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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거의 여러 전쟁에 있어서의 종교의 역할
  • 깨어라!—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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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72 10/8 10-12면

과거의 여러 전쟁에 있어서의 종교의 역할

영국 철학자 ‘존 로크’는 한때, “역사상 모든 말은 거의 전부가 전쟁과 살륙에 대한 것뿐이다.”34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종교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힘 중의 하나였다”35고 한 학자는 말하였다.

종교가 그처럼 강력한 영향을 행사하였는데도 인간 존재의 거의 전체 기간이 참혹한 전쟁의 피해를 입은 까닭은 무엇인가? 과거 여러 전쟁에 있어서 종교의 역할은 무엇이었는가?

‘아즈텍’족과 전쟁

‘아즈텍’ 종교는 신들을 인간 제물로 달래야 한다고 가르쳤다. 역사가 ‘빅토 더불류. 폰하겐’은 이렇게 설명하였다.

“전쟁과 종교를, 적어도 ‘아즈텍’ 인종에게 있어서는, 분리할 수 없었다. 그 두가지는 상호 연관되어 있었다. ··· 자기 신들에게 바칠 포로를 마련하기 위하여 조그마한 전쟁들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36

1486년에, 20,000여명의 포로들이, ‘휘칠로폭틀리’ 신의 거대한 ‘피라밋’ 봉헌식에 바치기 위하여 준비되었다. 그리고 나서 희생자들의 심장을 하나씩 하나씩 도려내어 그 신에게 바쳤다. 그러한 종교의 사수를 받은 전쟁들이 고대 ‘아메리카’인들에게 일으킨 공포감을 당신은 상상할 수 있는가?

고대 제국들과 전쟁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등지의 고대 제국과 백성들에게 종교가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 이를 고대 여러 나라들은 수많은 전쟁과 깊은 종교성에 있어서 유명하다. 종교와 전쟁은 상부 상조하였다. 예를 들면, 한 참고서에 이렇게 설명되었다.

“‘이집트’ 종교는 결코 전쟁을 단죄하지 않았다. 아주 옛날 ‘이집트’의 전쟁들은 신들과 신들 사이 또는 신들과 사람들 사이의 전쟁이었다. 그러므로 ‘이집트’ 왕들은 전쟁을 행하는 점에 있어서 신들의 본을 따른다고 주장했다. ··· 간단히 말해서, 모든 전쟁은 도덕적이었고, 이상적이고, 초자연적이고 신들의 선례에 따라 승인을 받은 것이었다.”37

때로는 종교 지도자들이 자기 나라의 전쟁을 용인하고 승인하는 정도로 그치지 않고 사람들에게 실제 전쟁에 나가서 싸울 것을 강권하기도 한다. 교직자인 ‘더불류. 비. 라이트’는 고대 ‘아시리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전투는 국가의 사업이었으며, 사제들은 끊임없이 전쟁을 충동하였다. 사제들은 전쟁 약탈품으로 생활하였으며, 전리품을 다른 사람들이 나누기 전에 그 중 몇 ‘퍼센트’는 반드시 그들에게 주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약탈자들의 활동은 극도로 종교적이었기 때문이다.”38

고대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이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여지가 없다. 군사 지도자들은 자기 신들에게 자주 도움을 요청하였다. “신들은, 어느 신이든지, 자기 백성을 전쟁에서 돕고 보호하는 것이 그의 주된 기능 중 하나임을 흔히 볼 수 있다.”39고 권위자 한 사람은 말하였다.

병사들이 자기 신들의 깃발을 전쟁터에 가지고 가는 것은 습관적인 일이었다. 그러한 깃발은 나무나 금속으로 만든 표상물 혹은 상징물이었다. 한 백과 사전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로마’의 군기(軍旗)는 신전 내에 보관하여 종교적으로 숭앙받았다. 지휘관은 병사들의 공격 의욕을 자극하기 위하여 적진 가운데 군기를 던지게 한 후 그것을 탈취하도록 격려한 일도 흔히 있었다. 그 병사들에게는 군기가 지상에서 아마 가장 거룩한 것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40

고대 이러한 나라들은 물론 그리스도교를 신봉하지 않았다. 그 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소개한 가르침은 인류의 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참된 신자들의 생활을 개선시켜 주었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그리스도교 내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제 4세기에 부패한 ‘로마’ 황제 ‘콘스탄틴’은 정치적인 이유로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만들었다. 그 이후 ‘로마 가톨릭’ 세력이 크게 팽창하였다. 그 종교는 다른 종교들과 달랐던가? 그 종교는 평화를 증진하였던가? 그것은 참 그리스도교였던가?

십자군 전쟁—그리스도교국의 “성전”

1095년에 교황 ‘어반 2세’는 ‘클레르몬트’에서 회의를 소집하였다. 그때에 고대 ‘팔레스타인’ 땅은 그리스도교를 신봉하지 않는 사람들이 점유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 교황은 “역사상 가장 영향을 미친 연설 중의 하나”라는 연설로 ‘클레르몬트’에 모인 사람들에게 현재 “성지”를 장악하고 있는 “이교도”들을 쳐부술 전쟁을 수행하라고 촉구하였다. ‘어반’은 그 군중들을 다음과 같이 격려하였다.

“그리스도교 군사들이여, ··· 가서 야만인들과 싸우시오. 거룩한 땅을 구하기 위해 가서 싸우고, ··· 이교도의 피에 여러분의 손을 씻으시오. ···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군사가 되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도와 달라고 여러분을 부르시니 천박한 애정 때문에 가정에 얽매이지 마시오.”41

이렇게 하여 십자군 전쟁, 즉 이른바 “거룩한 전쟁”이 시작되어 그 후 2세기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유럽’의 설교단에서는 십자군 전쟁을 권유하는 설교가 울려 나왔다.”42고 한 역사가는 설명하였다. 다른 학자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주교들은 자기 주교구에 내려가서 이 군사적 그리스도교를 설교하였다. ··· 승려들은 칼을 만들라고 명령하였다. ··· 이제 ‘유럽’은 소용돌이치는 바다가 되어 ‘시리아’ 해변에 연거퍼 파도를 들이쳤다.”43

이렇게 자행된 전쟁은 필설로 묘사할 수 없을 정도였다. “종교의 승인과 징벌이라는 미명 하에 역사상 모든 호전적 욕망이 쏟아져 나왔다.”44고 한 역사가는 설명하였다. 십자군들은 역사책에 기록된 최악의 살륙, 무모한 약탈, 극악한 만행 등을 자행하였다. 그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다! ‘롤란드 에이치. 베인톤’ 교수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이것은 교회가 시작한 전쟁이었다. ··· 십자가 시형, 동전 삼킨 자들을 찢어 벌리는 행위, 사체 절단—‘안디옥’ ‘브헤몬드’는 ‘사라센’의 사람들의 코와 엄지손가락을 한 상자 가득히 담아 ‘그리이스’ 황제에게 보냈다.—극심한 약탈 등을 십자군 전쟁사에 아무 거리낌없이 기록하고 있다. 그 정신은 이상하게도 전쟁에 대한 야만적인 욕망과 신앙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열망이 혼합된 것이었다.”45

그러한 잔악한 행위를—그렇게도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행위를 그리스도의 이름과 연결시킨데 대하여 종교가 얼마나 커다란 책임을 져야 하겠는가! 자기를 그릇 대표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겠는가?

과거 그리스도교국 상호 간의 전쟁들

중세기에 자칭 그리스도인들은 그들끼리 전쟁을 많이 하였으며, 왕왕 교황의 축복을 받아가면서 전쟁을 하였다! 그러한 그리스도교국의 내부 전쟁들에 관하여 역사가 ‘제이. 시. 리파드’는 이렇게 말하였다. “중세기의 모든 전쟁에서는 교황의 승인이 중요한 요인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재가를 얻기 위하여 세속 군주들은 시장에서 하듯이 서로 경쟁을 예사로 하였다.”46

후에 1517년 경부터 종교적 반역이 일어나 ‘프로테스탄트’ 사상이 퍼지게 되자 그리스도교인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 상호간에 전쟁과 살륙 행위가 증가하였다. ‘켐브리지’ 대학교 역사 교수인 ‘지. 엠. 트레브리안’은 이렇게 썼다.

“그 시대에는 종교가 거의 전적으로 지성적, 도덕적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인간성은 그 특별한 가르침에 포함되지 않았다. 종교는 그 때에 파괴, 화형, 불타는 도시, 여자 및 유아의 살륙, 그칠줄 모르는 증오, 보복할 길 없는 죄악 등과 관련이 있었다고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야만 시대 이래 ‘유럽’ 사람들이 겪은 최악의 정신적 고통과 신체적 아픔은, 반역한 그리스도교국을 다시 끌어들이려는 ‘가톨릭’의 투쟁(부분적으로 성공을 거둠)에 의하여 이르게 되었다.”7

‘로마 가톨릭’ 교회는 반항자들 곧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을 다시 끌어들이기 위하여 야만적인 전쟁을 감행하였다.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은 강력히 저항하였다. 한 예로서 ‘안트와프’가 1576년에 포위되었는데 한 역사가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성모 교회의 이들 신사적인 사자들 곧 ‘스페인’ 군대들은 ‘성 ‘제임스’, ‘스페인’, 유혈, 육체, 화재, 약탈!’이라고 외치면서 전투를 벌였다. 8천명의 남자, 여자 및 소아들이 살해당하였다.”48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간의 30년 전쟁(1618-1648)은 특히 무시무시하였다. 그 동안 독일의 인구는 약 4분의 3이 줄었다. ‘아우그스부르크’ 주민들은 80,000명에서 18,000명으로 감소되었다. 그리고 ‘보헤미아’ 사람들은 4분의 1만이 생존하였다. ‘마그데부르크’라는 ‘프로테스탄트’의 도시의 멸망에 대한 기록은 그 전쟁의 잔인성을 잘 설명해준다. 독일 역사가 ‘프레데릭 쉴러’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이렇게 하여 가공할 만한 장면이 시작되었으니 그 역사를 묘사할 언어가 없고, 그 사건을 기술할 필묵이 없다. 천진한 유아도, 무력한 노인도, 젊음도, 성별도, 계급도, 아름다움도 정복자들의 분노를 진정시키지 못하였다. 남편들의 품안에서 아내들이 능욕을 당하였고, 딸들은 부모들의 발 앞에서 능욕을 당하였다. 무방비한 여성들은 덕성과 생명이라는 이중의 희생을 당하였다.”49

인류 역사 거의 전부가 “전쟁과 살륙에 대한 것뿐이다”라는 말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역사에 강력한 힘’을 미쳐온 종교가 무시무시한 유혈에 주된 책임이 있다는 사실 또한 틀림이 없다. 현재도 상태는 마찬가지인가?

[10면 삽화]

‘아즈텍’ 사제들이 희생자를 붙들고 있는 동안 다른 사제가 전쟁의 신에게 바치기 위해 희생자의 심장을 도려낸다 (목격자의 증언에 근거한 그림)

[11면 삽화]

십자군 전쟁은 역사상 최악의 살륙과 만행을 저질렀다.—모든 행위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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