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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치 있으면서도 확고함을 나타내기
재치란 불필요하게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능력입니다. 재치는 말하는 방법과 시기를 아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타협하여 옳은 것을 양보하거나 사실을 왜곡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재치와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잠언 29:25.
영의 열매는 재치 있게 말하는 데 가장 훌륭한 기초가 됩니다. 따라서 사랑의 동기를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을 노엽게 하기를 원하지 않고, 오히려 돕고 싶어합니다. 친절하고 성품이 온화한 사람은 말하거나 행동하는 방식이 부드럽습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좋은 관계를 촉진시키는 방법을 모색합니다. 사람들의 태도가 거칠어도, 오래 참는 사람은 차분한 상태를 유지합니다.—갈라디아 5:22, 23.
그러나 성서의 소식을 전하는 방법에 관계없이, 어떤 사람들은 소식 자체를 불쾌하게 여길 것입니다. 1세기 유대인들 중 대다수의 마음 상태가 악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걸림돌과 거침이 되는 바위”가 되셨습니다. (베드로 첫째 2:7, 8) 예수께서는 자신의 왕국 선포 활동과 관련하여 “나는 땅에 불을 지르러 왔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12:49) 사람들이 창조주의 주권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이 포함된 여호와의 왕국 소식은, 계속해서 인류가 직면해 있는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느님의 왕국이 머지않아 현 악한 사물의 제도를 제거할 것이라는 소식을 불쾌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께 순종하여 계속 전파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한편 우리는 성서의 이러한 조언을 염두에 둡니다. “여러분이 할 수 있다면, 가능한 대로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십시오.”—로마 12:18.
증거할 때의 재치. 우리는 여러 상황에서 우리의 믿음에 대해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야외 봉사를 할 때 말하는 것은 물론이고, 친족이나 직장 동료나 학교 친구와 함께 있을 때에도 적절한 기회를 찾습니다. 그 모든 상황에서 재치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방식으로 왕국 소식을 전할 경우, 그들은 분개할지 모릅니다. 자신들이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고 아마 도움받을 필요성을 느끼지도 않는데 시정될 필요가 있다는 식의 말을 듣게 되면 불쾌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한 잘못된 인상을 주지 않으려면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우정적인 대화를 나누는 기술을 배운다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관심사가 되는 문제를 언급하는 일로 대화를 시작하려고 노력하십시오. 그 사람이 친족이거나 직장 동료이거나 학교 친구라면, 당신은 이미 그의 관심사를 알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 사람이 초면이라 해도, 당신이 보도를 통해 들었거나 신문에서 읽은 뉴스거리를 언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문제들은 대개 많은 사람의 관심사를 반영합니다. 호별 방문 봉사를 하고 있을 때에는 잘 관찰하십시오. 집의 장식, 마당에 있는 장난감들, 종교 물품, 진입로에 주차해 둔 자동차의 범퍼에 붙어 있는 스티커 등은 집주인의 관심사를 한층 더 알려 주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집주인이 문으로 나오면, 그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때 귀 기울여 들으십시오. 집주인이 하는 말을 통해 그 사람의 관심사와 견해에 대한 당신의 판단이 옳았다거나 틀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고, 증거하기 위해 고려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한층 더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대화를 전개해 나가면서, 성서와 성서에 근거한 출판물 가운데서 화제와 관련이 있는 점들을 알려 주십시오. 그러나 대화를 독점하지는 마십시오. (전도 3:7) 집주인이 기꺼이 대화를 나누려 하면 그 사람을 대화에 끌어들이십시오. 그 사람의 견해나 의견에 관심을 가지십시오. 그 견해나 의견은 재치를 나타내는 데 필요한 실마리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을 말하기 전에, 그것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들릴지 고려하십시오. 잠언 12:8에서는 “슬기로운 입”을 칭찬합니다. 이 구절에 사용된 히브리어 표현은 통찰력이나 현명함과 같은 개념들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슬기롭다는 것은 지혜롭게 행동하기 위해 어떤 문제를 심사숙고한 결과 조심스럽게 말을 삼가는 것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잠언의 같은 장 잠 12:18절에서는 “칼로 찌르듯 생각 없이 말하”는 것에 대해 경고합니다.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성서 진리를 옹호할 수 있습니다.
단지 단어 선택에서 분별력을 나타내는 것만도 불필요하게 장벽을 쌓지 않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성서”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정신적 장벽을 쌓는다면, “경전”이라든가 “현재 2000개 이상의 언어로 발행되어 있는 책”과 같은 표현을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서를 실제로 언급할 경우에는, 성서에 대한 상대방의 견해를 물어보고 나서 이어지는 대화 중에 그 사람의 의견을 참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재치 있다는 것은 흔히 말해야 할 적당한 때를 결정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잠언 25:11) 상대방이 하는 모든 말에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그 사람이 표현하는 비성경적인 견해를 일일이 문제 삼을 필요는 없습니다. 집주인에게 한꺼번에 모든 것을 말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할 것이 아직도 많으나 지금은 여러분이 그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요한 16:12.
가능하다면, 듣는 사람들을 진실하게 칭찬해 주십시오. 집주인이 논쟁적인 경우라도,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그를 칭찬해 줄 수 있을지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아테네의 아레오바고에서 철학자들에게 연설할 때 그렇게 했습니다. 철학자들은 “그와 논쟁하여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견해를 말할 수 있었습니까? 바울은 이전에 그들이 자신들의 신들을 위해 만든 많은 제단들을 관찰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아테네 사람들의 우상 숭배와 관련하여 그들을 정죄하는 대신, 그들의 강한 종교심에 대해 재치 있게 칭찬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보니 여러분은 모든 일에서 신들에 대한 두려움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한 것 같습니다.” 이러한 접근 방법으로 참 하느님에 관한 소식을 전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몇몇 사람들은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사도 17:18, 22, 34.
이의를 제기할 때, 과민 반응을 나타내지 마십시오. 차분한 상태를 유지하십시오. 그 기회를 상대방의 생각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기회로 여기십시오. 상대방이 견해를 표명한 것에 대해 감사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대방이 퉁명스럽게 “나는 내 종교가 있어요”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어려서부터 그 종교를 가지셨습니까?”라고 재치 있게 물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 상대방의 대답을 듣고 나서, “모든 사람이 언젠가 하나의 종교로 연합될 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라고 덧붙이십시오. 이런 방법으로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 합당한 견해를 갖는다면, 우리가 재치 있게 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길이 옳으며 그분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굳게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점들에 관해 확신 있게 말합니다. 그러나 독선적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전도 7:15, 16) 우리는 진리를 알고 여호와의 축복을 누리는 것에 대해 감사하지만, 우리가 여호와의 승인을 받고 있는 것이 우리 자신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의 과분한 친절과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 때문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에베소 2:8, 9) 우리는 ‘우리가 믿음 안에 있는지 계속 시험하고, 우리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 계속 확인’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고린도 둘째 13:5)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의 요구 조건을 따를 필요성에 대해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서, 겸손하게 성서의 조언을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합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심판할 권리가 없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심판을 모두 아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그 아들의 심판대 앞에서 답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요한 5:22; 고린도 둘째 5:10.
가족과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대할 때. 우리가 재치를 사용하는 것은 야외 봉사에 국한되어서는 안 됩니다. 재치는 하느님의 영의 열매의 표현이기 때문에, 우리는 집에서 가족을 대할 때에도 재치를 나타내야 합니다. 사랑이 있다면, 다른 사람의 감정에 관심을 나타내게 될 것입니다. 왕비 에스더는 남편이 여호와의 숭배자가 아니었지만, 여호와의 종들이 관련되어 있는 문제들을 남편에게 알릴 때 남편에 대한 존경심과 예리한 분별력을 나타냈습니다. (에스더 3-8장) 어떤 경우에는 증인이 아닌 가족 성원들을 재치 있게 대하려면, 우리의 신앙을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행실로 그들이 진리의 길에 호감을 갖게 할 필요가 있을지 모릅니다.—베드로 첫째 3:1, 2.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회중 성원들을 잘 알고 있다고 해서 그들을 무뚝뚝하게 대하거나 불친절하게 대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들이 장성한 사람들이니까 그렇게 대해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고 추리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인데, 뭐”라는 말로 자신을 변명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른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변화하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열렬히 사랑”한다면, ‘믿음으로 친족이 된 사람들에게 선한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베드로 첫째 4:8, 15; 갈라디아 6:10.
청중에게 연설할 때. 연단에서 연설하는 사람들 역시 재치가 있어야 합니다. 청중을 구성하는 사람들은 배경과 환경이 다양하며, 영적 발전의 단계도 다양합니다. 왕국회관에 처음 나온 사람도 있을지 모르며, 연사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특히 심한 압박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연사가 청중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는 데 무엇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디도에게 한 조언과 일치하게, “아무에 대해서도 나쁘게 말하지 말고, ··· 합리적이 되고, 모든 사람에게 온화함을 온전히 보이”는 것을 목표로 삼으십시오. (디도 3:2) 다른 인종, 다른 언어 그룹에 속한 사람들 혹은 다른 국적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격하시키는 표현을 사용하는 세상을 본받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계시 7:9, 10) 여호와의 요구 조건들을 솔직하게 설명해 주고, 그 요구 조건들을 적용하는 지혜를 보여 주되, 아직 여호와의 길로 온전히 걷고 있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경멸적인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 대신,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행하도록 모든 사람을 격려하십시오. 따뜻하고 진실한 칭찬으로 조언을 부드럽게 만드십시오. 우리 모두가 서로에 대해 가져야 할 형제 애정을 말투와 어조로 전달하십시오.—데살로니가 첫째 4:1-12; 베드로 첫째 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