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방법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될 수 있는가?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하라.”—마태 5:48, 새번역.
1. 우리는 우리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대하여 어떻게 느껴야 하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당신이 참으로 존경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그 사람과 같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아마 당신은 그의 본을 받으려고 일부러 노력까지 할 것입니다. 자녀들도 그와 같습니다. 많은 어린이들이 “내가 크면 아빠와 같이 될거야” 하고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읍니다. 우리도 우리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동일하게 느껴야 하지 않겠읍니까? 그분은 모든 면으로 참으로 바람직한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참으로 풍부히 공급해 주십니다! 심지어 죄와 사망에서 대속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마련까지 해 주셨읍니다. (요한 3:16; 시 145:16) 우리는 감동을 받아 하나님과 같이 되기를 원해야 하지 않겠읍니까?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 그분을 본받을 수 있읍니까? 어느 정도로 우리는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읍니까?
2. (ㄱ) 우리가 하나님이 완전하신 것과 같이 완전하게 되는 것이 왜 가능합니까? (ㄴ) “완전”이라는 단어는 어떠한 의미로 자주 사용되고 있으며, 이것은 “완전”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와 희랍어 단어의 의미와 어떻게 비교됩니까?
2 아마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하나님과 같아야 할 정도를 강조하신 것을 보고 깜짝 놀랄지 모릅니다. 그 분은 산상 수훈 가운데서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고 말씀하셨읍니다. (마태 5:48, 새번역) 그러면 우리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할 수가 있읍니까? 그렇습니다. 왜냐 하면 우리의 일상 대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성경에서도 “완전”이라는 말은 상대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것이 의도된 목적을 완전히 혹은 온전히 이룬다면 그것은 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읍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노아’와 ‘욥’과 같은 하나님의 종들이 “완전”하다고 언급되었음을 보게 됩니다. (창세 6:9; 욥 2:3) 여기에서 “완전”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와 희랍어는 ‘온전한, 온전히 발전된, 손상되지 않은’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읍니다. “완전”이라는 한국어도 “온전한, 부족함이 없는, 흠이 없는”으로 정의됩니다.
3, 4. (ㄱ) ‘노아’와 ‘욥’은 어떠한 의미로 완전하였읍니까? (ㄴ) 우리는 어떠한 의미로 우리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같이 완전할 수 있읍니까?
3 물론 ‘노아’와 ‘욥’과 같은 사람들은 죄없다는 의미에서 “완전”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행동 전체가 그들이 살던 때와 그들의 환경을 고려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요구하신 것 전부였다는 의미에서 완전하였읍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읍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정당하게 기대하신 것을 행하였읍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결함이 없고 흠잡힐 일이 없었으며, 그러한 의미로 완전하였읍니다.
4 이러한 뜻을 머리에 간직할 때 우리는 예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읍니다. 그분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우리에게 죄없을 것을 기대하신 것이 아니라 어떠한 다른 면으로 완전할 것을 의미하셨읍니다. 이것은 예수의 말씀의 문맥에서 분명히 알 수 있읍니다. 그분은 하나님께서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에게 뿐 아니라 불의하고 악한 사람들에게도 햇빛과 비를 주신다고 말씀하셨읍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본받아 그분의 완전하심과 같이 완전하려면, 우리는 우리의 친척들이나 우리의 친구들, 우리와 같은 인종이나 국적을 가진 사람들에게 친절과 자비와 관대함을 보일 뿐 아니라 기회있을 때마다 혹은 필요할 때마다 서슴치 않고 기꺼이 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의 사랑은 온전하며 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읍니다.
5, 6. (ㄱ) 예수께서 어떤 부자 청년에게 그가 완전하지 않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임이 분명합니까? (ㄴ) 오늘날 우리는 제1세기의 이 경험에서 어떠한 교훈을 배울 수 있읍니까?
5 우리가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같이 완전함으로써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려면, 우리는 또한 순결한 숭배의 이익을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자 청년이 그에게 와서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기 위하여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물었을 때 그 점을 알리셨읍니다. 예수의 설명은 이러하였읍니다. “네가 완전하게 되려거든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마태 19:16-23, 새번역) 이 청년은 그 많은 재산 때문에 온 영혼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마음이 분산되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의 마음은 재산에 쏠려 있었읍니다. 예수께서는 만일 그가 마음을 분산케 하는 이러한 것들을 벗어버린다면 그에게 유익이 있을 것임을 아셨읍니다. 그러한 것들이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 대한 봉사에서 완전 혹은 온전하지 못하였읍니다.
6 “완전”에 대한 예수의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읍니까? 그것은 우리가 단순히 하나님께 대한 명목상의 봉사로만 만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정신과 마음과 영혼과 힘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며 개인적인 욕망이나 야망에 의하여 그분께 대한 우리의 완전한 전념이 방해를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는데 전 시간으로 참여하는 것을 막는 성경적 의무나 신체적 장애가 없다면 우리는 전 시간 전파 사업에 참여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봉사를 주저하면서 “완전”하게 될 수는 없읍니다.
곧고 바름
7, 8. (ㄱ)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의 바르심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ㄴ) 우리가 직장에 고용되어 있는데, 공의에 있어서 하나님을 본받으려 한다면 우리에게 무엇이 요구됩니까?
7 ‘하나님과 같이 완전’하게 되려면 그분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데는 바르고 옳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공의를 사랑하시”는 분이며, 그분은 “진실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곧은, 신세]하”시다고 알려 줍니다. (시 37:28; 신명 32:4)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기 위하여 우리의 모든 행동에서 정직해야 하며 만일 우리가 고용되어 있다면 그것은 고용주와의 모든 관계에 있어서도 그러함을 의미합니다. (에베소 5:1) 부정직이 너무나 만연한 오늘날 사람들이 참으로 옳지 않은 일을 하는, 사실상,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는 일이 보통입니다.—출애굽 23:2.
8 예를 들면 많은 고용인들 사이에는 될 수 있는 대로 적게 일하면서 직장을 유지하려고 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을 때면 자기의 물건이 아닌 것을 훔치는 일이 습관화되고 있읍니다. 우리가 그러한 일을 하면서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될 수는 없읍니다. 또한 오늘날 흔한 일은 자기에게 적용되지 않는 복지와 실업에 대한 혜택을 얻는 행위 그리고 꾸고 갚지 않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공의에 있어서 “완전”하려면 우리는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해야 하며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야 합니다.—시 37:21, 고린도 후 8:21; 베드로 전 2:12.
9. 하나님과 같은 공의는 “가이사”와 우리와의 관계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합니까?
9 공의에 있어서 하나님을 본받기 위하여는 또한 세금을 바치는 데 양심적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칠 것이며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라고 알려 줍니다. (마가 12:17; 로마 13:7) 얼마 전에 한 부유한 그리스도인이 이러한 성경의 명령을 청종하기를 거절하였기 때문에 여호와의 증인의 그리스도인 회중에서 제명당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일이 있읍니다. 사실 그는 고대 ‘이스라엘’의 ‘아간’의 경우와 같이 아주 드문 예외였읍니다. 왜냐 하면 여호와의 증인 전체는 법을 잘 준수하는 납세자들로서 훌륭한 명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 7:1-26) 그러므로 독일의 한 신문(Sindelfinger Zeitung)은 “가장 정직한 사람들은 ··· 여호와의 증인들”이라는 표제의 기사를 게재하였읍니다. 그 기사는 납세 문제를 언급하고 이러한 말로 결론을 맺었읍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연방 공화국에서 가장 정직한 사람들로 인정을 받고 있다고 연방 재무성은 말하고 있다.”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왜냐 하면 여호와의 증인들의 목적은 바로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충실하고 믿음직함
10.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충실하고 믿음직한 분임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10 여호와 하나님 자신은 충실함과 믿음직한 면에서 우리가 본받을 수 있는 빛나는 본이십니다. 하나님의 예언자 ‘모세’가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말한 바와 같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충실하신, 신세] 하나님이시라. ···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느니라].” (신명 7:9)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는 또한 이 동일한 사실을 증거하여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모든 선한 일이 하나도 틀리지 아니하고 다 너희에게 응하여 그 중에 하나도 어김이 없음을 너희 모든 사람의 마음과 뜻에 아는 바라.” 여호와는 우리가 전적인 확신과 신뢰를 가지고 우리의 영혼을 “부탁”할 수 있는 “충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여호수아 23:14; 베드로 전 4:19; 고린도 전 10:13.
11. (ㄱ) 우리는 하나님의 헌신한 자녀로서 하나님께 어떠한 책임을 가지고 있읍니까? (ㄴ) 우리는 오늘날 하나님의 종들의 주된 사업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우리가 충실하고 믿음직함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읍니까?
11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을 본받는 자로서 우리는 충실하고 믿음직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시간과 돈, 정력 및 개인적 영향력과 같은 우리에게 맡겨진 개인적 자산이 있읍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관리하는 데 충실해야 합니다. (고린도 전 4:1, 2) 우리는 여호와께, 우리가 그의 자녀 중 하나가 되기를 원하며, 우리가 살아있는 한 그분을 섬길 것이라고 말하였읍니까? 우리는 그렇게 하겠다는 우리의 약속을 충실히 지킵니까? 여호와께서 그의 종들이 지금 하기를 원하시는 주된 사업은 그의 왕국 곧 악을 멸망시키고 지상에 평화를 가져올 정부에 대하여 전파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 시대에 성취되고 있는 예언 가운데서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이 천국 복음이 ···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태 24:14) 우리는 이 전파 활동을 하는 데 충실합니까? 우리는 그 일에 정기적으로 참여하여 우리가 전파하도록 임명된 지역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방문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더 알고자 하는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을 모두 재방문합니까? 그러한 사람들과 가정 성서 연구를 사회할 때 우리는 믿음직합니까?
12, 13. (ㄱ) 우리는 결혼 관계에 있어서 어떻게 하나님과 같은 믿음직함을 보일 수 있읍니까? (ㄴ) 그리스도인 청소년들은 어떻게 믿음직함을 보일 수 있읍니까?
12 우리는 또 다른 면에서 충실하고 믿음직해야 합니다. 즉 우리의 가족 관계에 있어서 그러합니다. 결혼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아끼겠다는 우리의 서약을 지킵니까? 그렇지 않으면 어떤 야망과 같은 다른 관심사 혹은 문제 때문에 우리의 결혼 배우자를 “속이”는 일이 있읍니까? 우리는 성적 관심을 우리의 배우자에게 충실히 제한합니까? 아니면 때때로 욕망이 방황하는 일이 있읍니까? 사랑과 감정이입은 충실하고 믿음직하게 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여호와를 본받고 우리 자신이 그분의 완전하심과 같이 완전함을 증명할 것입니다. 왜냐 하면, 여호와께서는 그의 아내같은 조직에 대하여 충실하고 믿음직한 남편같은 소유자이시기 때문입니다.—이사야 54:1, 5.
13 그리고 여러분 청소년들은 어떠합니까? 여러분은 믿음직하고 충실함으로써 하나님을 본받고 있읍니까? 예를 들면 여러분은 학교 숙제에 관심을 기우리며 부지런히 그 숙제를 합니까? 여러분은 집안에서 하는 일에 대하여 신용을 지킵니까? 아버지가 밤에 귀가하시면 여러분에게 맡긴 일이 이행되어 있음을 보시게 됩니까? 여러분은 청소년 시절에 위대하신 창조주 보시기에 소중한 사람이 되게 하는 일을 함으로써 그분을 기억할 기회를 가지고 있읍니다.—전도 12:1.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라
14. 여호와를 본받는 데 있어서 우리가 미워해야 할 것들 몇 가지는 무엇입니까?
14 우리가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하여 그분의 완전하심과 같이 우리 자신이 완전함을 증명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미워하십니까? 그분은 이렇게 알려 주십니다. “대저 나 여호와는 ···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느니라].”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칠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 또한 성서는 이렇게 격려합니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나쁜 것, 신세]을 미워하라.” “악을 미워하[라].”—이사야 61:8; 잠언 6:16-19; 시 97:10; 로마 12:9.
15. (ㄱ) “나쁜 것을 미워”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ㄴ) 우리가 나쁜 것을 미워하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15 “나쁜 것을 미워”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나쁜 것에 대하여 ‘강렬한 혐오감’을 갖는 것, ‘그것을 몹시 싫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악한 것 곧 나쁜 것에 대하여 냉담하거나 중립적이 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때때로 나쁜 것은 우리의 타락한 경향에 매우 호소력이 클 수 있읍니다. 그것은 흥분과 관능적 쾌락, 심지어는 부와 안일을 약속해 줄 수 있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쁜 것을 몹시 싫어해야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읍니까?
16. 어떻게 우리는 나쁜 것이 우리 속에서 뿌리를 박고 자라는 것을 막을 수 있읍니까?
16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애정, 욕망 및 감정을 보호함으로써 모든 형태의 악이 우리 속에 뿌리를 박는 것을 막도록 진실하게 노력할 수 있읍니다. (잠언 4:23; 베드로 전 3:10, 11) 이 일을 할 수 있는 중요한 방법은 우리가 읽는 서적과 잡지와 신문 기사에 대하여 주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쁜 것을 즐겨 읽을 정도로 악에 대한 불건전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읍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미워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읍니다. 그리고 우리가 나쁜 것을 미워한다면, 우리는 폭력, 야만적 행위, 성적 부도덕 및 기타 형태의 악을 특징으로 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영화를 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것을 계속 본다면, 반드시 그러한 것에 대하여 무감각해지고 그러한 것을 더는 미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그러한 것을 더욱 갈망하게까지 될 것입니다.
17. (ㄱ) 왜 우리는 교제에 대하여 조심해야 합니까? (ㄴ) 우리는 사법 위원회의 제명 처분 조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해야 하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17 또한 우리가 나쁜 것을 미워함으로써 여호와를 본받는 자가 되려면 우리는 “악한 동무가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는 것을 기억하고 친구의 선택에 극히 신중을 기할 것입니다. (고린도 전 15:33) 이것은 우리가 회중 사법 위원회가 어떤 사람을 비그리스도인 행실로 인하여 제명할 때 그 조치를 충성스럽게 지지하는 것을 포함할 것입니다. (고린도 전 5:1-13) 그러한 사람은 좋은 친구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가 행한 악에 대하여 그리고 그 행실이 여호와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회중에 초래한 모독에 대하여 의분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악한 행동이 새로운 혹은 비장성한 그리스도인들을 넘어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고 말할 때의 ‘바울’과 같은 반응을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고린도 후 11:29.
사랑에 있어서 하나님을 본받음
18. (ㄱ)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우리 자신이 완전함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무엇입니까? (ㄴ) 우리에게는 이러한 면에서 그분을 본받아야 할 어떠한 이유가 있읍니까?
18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가 ‘우리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우리 자신이 완전함’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사랑이라는 훌륭한 특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의 말씀은 그분의 이 특성을 참으로 광대케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 자기의 사랑”을 나타내셨읍니다. 확실히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이 사랑의 마련은 우리로 인식깊은 반응을 나타내게 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이 점을 설명하여 “하나님이 이같이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하고 말하였읍니다.—요한 1서 4:9-11, 16, 새번역; 로마 5:8.
19.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 하나님과 같은 관대함을 보일 수 있읍니까?
19 우리가 사랑에 있어서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관대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의 수여자이시며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분입니다. (야고보 1:17, 5) 우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기 위하여 무엇에 있어서 관대할 수 있읍니까? 우선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목적에 관한 진리가 있읍니다. 그리고 우리는 진리를 거저 받았으므로 모든 적절한 기회에 왕국의 좋은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함으로써 그것을 거저 주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지방적으로 그리고 세계적으로 수행되는 왕국 전파 사업을 지원하기 위하여 우리의 물질적 수단을 관대하게 기부함으로써 하나님과 같은 관대함을 나타낼 수 있읍니다. 그러나 관대함을 나타내는 또 다른 방법은 궁핍한 우리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돕는 것입니다. 그러한 관대함을 나타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 하면, 그것은 우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는 예수의 명령을 청종하는 중요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마태 5:46-48, 새번역; 요한 1서 3:17, 18.
20, 21. (ㄱ) 특히 무엇과 관련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는 권고를 받고 있읍니까? (ㄴ) 우리는 관대히 용서함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본받을 수 있읍니까?
20 우리가 사랑에 있어서 하나님을 본받을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남을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특히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특별히 충고받은 부면은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관련되어 있읍니다. 우리가 고려하여 온 사도의 충고의 문맥을 유의하여 보십시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에베소 4:32-5:2.
21 우리 모두는 불완전하고 지혜와 이해와 분별력이 제한되어 있으므로 우리의 그리스도인 형제들의 죄를 이해해 주고 기꺼이 용서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읍니까? 그렇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베드로 전 4:8) 만일 여호와께서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시고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다면 우리 불완전한 인간은 우리에게 잘못하는 그리고 우리에게 용서를 구하는 사람들을 더욱 기꺼이 용서해야 하지 않겠읍니까? 하나님은 “널리” 용서하시므로 우리는 이 점에서도 그분을 본받아야 하지 않겠읍니까? 그것은 우리가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일흔 일곱번” 기꺼이 용서해 주기를 원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 가운데에는 우리에게 지은 심각한 범죄도 범죄자가 참다운 회개를 나타낼 때, 용서해 주는 것을 포함합니다.—시 103:8-14; 이사야 55:7; 마태 18:21-35, 신세.
22-24. (ㄱ) 성서는 여호와의 오래 참으심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ㄴ) 우리 모두는 어떻게 여호와를 본받고 또한 우리 자신이 오래 참음을 나타낼 수 있읍니까?
22 하나님께서는 또한 노하기를 더디하고 오래 참으시는 면에서 우리에게 인자한 본을 세우십니다.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의 성품의 이 호소력있는 면을 지적하여 이렇게 기술하였읍니다. “[여호와께서는]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베드로 후 3:9)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노하기를 더디하신다는 것을 열왕 통치 시대에 그의 나라인 ‘이스라엘’ 민족을 다루어 오신 면에서 나타내셨읍니다! 성서는 이렇게 알려 줍니다.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백성과 그 거하시는 곳을 아끼사 부지런히 그 사자들을 그 백성에게 보내어 이르셨[느니라].”—역대 하 36:15.
23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약점으로 인하여 동요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의 이면을 본받을 수 있읍니다. 때때로 인도를 받는 사람들은 냉담 혹은 소홀함을 나타내며 그리하여 감독자는 “격노”하기가 참으로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기 위하여 감독자들도 참아야 하며, 오래 참고 노하기를 더디해야 합니다.
24 특히 가족 사회 내에서 우리는 이 오래 참음이라는 특성을 나타내기를 원해야 합니다. 세상의 남편들은 아내에 대하여 조급한 예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고 충고한 것은 참으로 적절합니다! (골로새 3:19) 또한 사도 ‘베드로’는 아내를 다루는 것에 대하여 대단히 적합한 말을 하였읍니다.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러한 충고를 청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왕국의 소식을 온 땅에 전파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과 같이 중요합니다.—베드로 전 3:7.
25, 26. (ㄱ)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인내를 나타내 오셨읍니까? (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과 같은 인내를 나타낼 수 있읍니까?
25 우리가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같이 완전하려면 또 다른 면으로 하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에 근거한 인내를 본받아야 합니다. “사랑은 ···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하고 성서는 알려 줍니다. (고린도 전 13:4, 7) 하나님께서는 인내를 나타내십니까? 그렇습니다. 왜냐 하면 그분은 피조물이 그릇된 행동을 할 때 고통과 아픔을 느끼시면서도 계속 옳은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시 78:40, 41) 영감받은 사도가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듯이 “하나님이 ···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셨읍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분의 사랑 때문이었읍니다.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함이었읍니다.—로마 9:22, 23.
26 우리가 그의 사랑에 있어서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려면 우리도 인내를 나타내야 합니다. 우리는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 것입니다. (갈라디아 6:9) 사랑은 우리가 접근하는 사람들의 냉담이나 심지어 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리의 왕국 전파 사업을 계속 충실히 행하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우리는 온 땅의 왕국 전파 활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성서 서적을 생산하는 ‘벧엘’에서 봉사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곳에서의 우리의 임무는 틀에 박힌 일일지 모르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사랑을 가질 때 우리는 거기에서 인내할 것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의 입증과 다른 사람들의 구원에 기여하며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마련하신 모든 것에 대한 우리의 인식의 증거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왜 하나님과 같이 완전하려고 노력해야 하는가?
27, 28. (ㄱ) 하나님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완전하라는 문제는 임의적인 것입니까? (ㄴ) 하나님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우리가 완전하게 되는 것은 어떻게 우리의 행복에 기여합니까?
27 확실히,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하여 그분이 완전하신 것같이 우리 자신이 완전함을 증명하는 데는 많은 것이 관련되어 있읍니다! 그러나 “완전”이라는 이 문제는 임의적인 것이 아님에 유의하십시오. 예수께서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하라[완전해야 한다, 신세]”고 말씀하셨읍니다. (마태 5:48, 새번역)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하나님을 본받는 자’인 참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바르고 곧으며, 충실하고 믿음직하며,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고, 관대함과 남을 용서함과 오래 참음과 인내를 나타냄으로 사랑을 보이는 것이 절대 중요합니다. (에베소 5:1) 그러나 사실,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같이 완전하게 되는데 우리에게 큰 난관이나 희생이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유익합니다. 사실, 여호와는 “행복하신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디모데 전 1:11, 신세) 그분을 본받는 것은 우리의 행복에 공헌할 것입니다. 어떻게 그러합니까?
28 우선, 여호와를 본받음으로써 우리는 그의 마음을 기쁘시게 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내 아들아, 지혜를 얻고 내 마음을 기쁘게 하라. 그리하면 나를 비방하는 자에게 내가 대답할 수 있겠노라.” (잠언 27:11) 확실히 우리의 생활 행로가 우리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기쁘시게 한다면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읍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을 본받음으로써 우리는 현재 행복과 마음의 평온과 만족을 얻을 뿐 아니라 그의 새로운 사물의 제도에서 영원한 생명의 확실한 희망을 갖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완전’하기 위하여 우리가 노력할 만한 이유가 충분한 것은 확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