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해야 할 해로운 남의 소문 이야기!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언 10:19.
1. 악의적인 남의 소문 이야기 곧 중상은 어떻게 손상을 줍니까?
어떤 것도 치사적인 독액을 건강에 좋은 음료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악의적인 남의 소문 이야기, 곧 중상은 적절하게도 독에 비유되었으며, 그것은 곧은 사람에게서 그의 좋은 이름을 빼앗아 갈 수 있습니다. 로마의 시인 유베날리스는 중상을 “모든 독 중에 가장 해로운 독”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영국의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한 극중 인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에게서 나의 좋은 이름을 훔쳐 가는 자는, 자기를 풍요롭게 해주지 못하는 것을 나에게서 빼앗아 가는 것이며 나를 정말 가난하게 만드는 것이다.”
2. 무슨 질문들을 고려해 볼 만합니까?
2 그러면 남의 소문 이야기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은 중상과 어떻게 다를 수 있습니까? 왜 해로운 남의 소문 이야기를 경계해야 합니까?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그 둘 사이의 차이
3. 남의 소문 이야기와 중상 사이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3 남의 소문 이야기란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문제에 관한, 언제나 사실은 아닌, 한담”입니다. 그것은 “가벼우면서도 허물없이 말하거나 쓰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으므로, 때때로 다른 사람에 관해 좋은 격려적인 점들을 말합니다. 중상은 다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좋은 이름과 명성에 분명히 해를 주고자 하는 거짓 보고”입니다. 그러한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악의가 있는 것이며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것입니다.
4. 한 작가에 의하면, 중상은 어떻게 시작될 수 있으며, 무엇으로 인해 생깁니까?
4 무해한 남의 소문 이야기가 비열한 중상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작가인 아서 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자주 중상은 사람에게 해를 입히고, 그 사람을 몰락시킬 수 있으며, 그러한 중상은 남의 소문 이야기 곧 아마도 처음에는 단지 한가한 데서 비롯되는 남의 소문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중상은 세상에 있는 가장 큰 해악 중의 하나이지만, 대개 무지로 인해 생긴다. 우리는 할 일이 거의 없는 그리고 인생에 대한 특별한 목적이 전혀 없는, 주로 그런 사람들에게서 그것을 발견하게 된다.”
5. 디모데 전서 5:11-15에 있는 바울의 교훈의 요지는 무엇입니까?
5 한담은 중상으로 인도될 수 있으므로, 사도 바울은 남의 소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서슴없이 꾸짖었습니다. 회중의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는 과부들에 대해 언급한 후에, 바울은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젊은 과부들에게는 등록을 거절하시오. 그들이 정욕에 끌려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나가게 [되겠기 때문입니다.] ··· 또한 그들은 할 일 없이 이 집 저 집 놀러 다니고 그 뿐만 아니라 수다를 떨고 일만 만들고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고 다닙니다. 그러므로 젊은 과부들은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가정을 다스리며 대적에게 비방거리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어떤 과부들은 벌써 곁길로 나가 사탄을 따라간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I 디모데 5:11-15, 새번역.
6. 중상으로 인도할 수 있는 형태의 남의 소문 이야기를 하는 개인적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6 바울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하였으므로, 그러한 여자들에 관해 불공평하게 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말한 내용은 매우 심각하게 생각해 볼 만한 점입니다. 경건한 여자들 중에는 아무도 “곁길로 나가 사탄을 따라”가고 싶어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그리스도인 여자가 중상의 죄를 지을 수 있는 성질의 말에 대한 약점을 가지고 있음을 안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렇다면 그런 여자는 이러한 바울의 교훈을 겸손하게 청종해야 합니다. “여자들[은] ··· 단정하고 참소[중상, 신세]하지 말[찌니라.]” 바울은 또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늙은 여자로는 ··· 행실이 거룩하며 참소치[중상하지, 신세] 말[게 하라.]” (디모데 전 3:11; 디도 2:3) 형제들도 그러한 현명한 권고를 진지하게 적용해야 합니다.
7. 성경적으로 볼 때, 우리 모두가 말을 통제해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7 물론, 때때로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그리고 봉사의 직무에서의 그들의 경험 등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앉아서 우리 형제를 헐뜯’는 일이 결코 없도록 합시다. (시 50:19, 20) 참으로, 말을 너무 많이 하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잠언 10:19) 그러므로 우리는 남의 소문 이야기를 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하며, 설사 해롭지 않은 이야기 같을지라도 그러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사람에 관해 이야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옳고, 정결하고, 사랑할 만하고, 덕이 있고, 칭찬할 만한 것들을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택할 수 있는 화제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빌립보 4:8.
남의 소문 이야기가 중상이 되는 경위
8. 동료 그리스도인들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언제나 나쁜 것이 아닌 이유는 무엇입니까?
8 만일 우리의 말이 정확하고 우리가 하는 말로 인해 아무도 손상을 입지 않는다면, 동료 신자들의 야외 봉사와 그 외의 경건한 활동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전혀 해로운 것이 아닙니다. 사실, 이러한 유의 긍정적인 말은 다른 사람을 격려할 수 있습니다. (비교 사도 15:30-33.)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충실하고 연로한 가이오에 관해 이야기하였으며, 사도 요한은 그에게 이렇게 편지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그대가 특히 나그네 된 형제들에게 봉사하는 일은 충성된 일입니다. 그들은 교회[회중, 신세] 앞에서 그대의 사랑을 증거했읍니다.” (III 요한 5, 6, 새번역) 그러므로 동료 그리스도인들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언제나 나쁜 것은 아닙니다.
9. (ㄱ) 가벼운 이야기가 어떻게 곧은 사람들에 대한 중상으로 변할 수 있습니까? (ㄴ) 우리는 적절하게도 무슨 자문을 해볼 수 있습니까?
9 하지만 가벼운 이야기가 곧은 사람들에 대한 중상으로 변할 수 있는데, 만일 우리가 그들의 사적인 문제를 파고 들거나 그들의 동기를 의심하거나 그들의 행실에 관해 의혹을 불러일으킨다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습관적으로 자문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말은 다른 사람의 명성에 해를 입힐 것인가? 내가 하는 말은 참인가? (계시 21:8) 나는 그 사람의 앞에서도 동일한 점을 말할 것인가? 그것은 회중에 불화를 일으킬 것인가? 나의 말은 그 사람이 봉사의 특권을 잃게 할 것인가? 시기심이 내 마음속에 있을 수 있는가? (갈라디아 5:25, 26; 디도 3:3) 내 말은 좋은 열매를 맺을 것인가, 아니면 나쁜 열매를 맺을 것인가? (마태 7:17-20) 나는 사도들에 관해서도 그와 같은 점을 말하였을 것인가? (고린도 후 10:10-12; 요한 3서 9, 10) 그러한 말은 여호와를 숭상하는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것인가?
10, 11. 시편 15:1, 3에 의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손이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면 어떻게 하지 않을 것입니까?
10 하나님을 숭상하는 사람들을 언급하면서, 시편 15:1은 이렇게 묻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손, 신세]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그러한 사람에 관해, 시편 필자 다윗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 혀로 참소치[중상하지, 신세]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는 자니이다.]” (시 15:3) 여기에 나오는 ‘중상하다’라는 단어는 “걷다,” 따라서 “돌아다니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동사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명령을 받았습니다. “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중상, 신 국제역]하지 말[라.]” (레위 19:16) ‘돌아다니면서 중상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손이자 벗이 아닙니다.
11 하나님의 벗들은 동료들에게 행악하지 않으며 곧은 이웃에 대한 어떤 훼방의 말도 진실로서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동료 신자들에 관한 거짓 이야기를 퍼뜨려서 이미 그들이 불경건한 사람들에 의해 당하는 악한 훼방에 부가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들에 관해 좋게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충실한 형제 자매들에 관해 훼방하는 말을 함으로써 그들에게 짐을 더욱 지우기를 결코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불화가 생길 때
12. 사도 행전 15:36-41은, 우리가 의견 차이가 있는 사람에 관해 소문 이야기를 하려는 유혹을 받을 경우 어떻게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습니까?
12 우리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우리와 심각한 의견 차이가 있었던 사람에 대해 나쁘게 말하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두번째 선교 여행을 떠나려 하였을 때 있었던 일을 고려해 봅시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기로 결정하였지만, 바울은 “[마가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하였었기 때문에 그 결정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서로 심히 다투”는 일이 벌어졌으며, 그들은 갈라섰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갔으며, 반면에 바울은 실라와 함께 수리아와 길리기아를 지나갔습니다. (사도 15:36-41) 나중에, 바울과 바나바 및 마가 사이의 불화는 분명히 해소되었는데, 마가가 바울과 함께 로마에 있었고 바울이 마가를 칭찬한 것을 볼 때 그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골로새 4:10) 의견 차이가 있기는 하였지만, 그 그리스도인들이 동료 신자들 가운데서 서로에 관해 소문 이야기를 하고 돌아다녔다는 증거는 전혀 없습니다.
13. 베드로가 관련된 어떤 상황에서 바울은 동료 그리스도인에 관한 소문 이야기를 하려는, 있을 수 있는 유혹을 저항하였습니까?
13 바울은 또한 게바(베드로)를 책망할 때 손상케 하는 소문 이야기에 의존하려는, 있을 수 있는 유혹을 저항하였는데, 게바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앞이기 때문에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식사하고 교제하는 것을 부끄러워했었습니다. 바울은 베드로에 관해 뒷전에서 말한 것이 아니라, “저를 면책”하면서, “모든 자 앞에서” 거리낌없이 말하였습니다. (갈라디아 2:11-14) 베드로도 자신을 책망한 사람에 관한 소문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나중에 그를 가리켜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 후 3:15) 그러므로 동료 신자가 시정받을 필요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에 관한 소문 이야기를 할 구실이 되지는 못합니다. 그러한 말을 하려는 것을 경계하고 해로운 소문 이야기를 퍼뜨리려는 유혹을 저항해야 할 타당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경계해야 할 이유
14. 해로운 남의 소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거나 그러한 이야기를 퍼뜨리지 않아야 할 주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14 우리가 해로운 남의 소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거나 그러한 이야기를 퍼뜨리는 일에 가담해서는 안 되는 주된 이유는, 우리가 중상자를 정죄하시는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지적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러한 말을 어떻게 보시는가 하는 점이 이스라엘 백성이 다음과 같은 명령을 받았을 때 분명해졌습니다. “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중상, 신세]하지 말며 네 이웃을 대적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레위 19:16)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즐기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대화에 언급될지 모르는 누군가를 중상하지 않아야 합니다.
15. 누가 우두머리 중상자이며, 해로운 남의 소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까?
15 해로운 남의 소문 이야기를 하지 않아야 할 또 다른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으로 인해 여호와에 대한 우두머리 중상자인 사단을 본받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 대적(大敵)에게는 적절하게도, “중상자”를 의미하는 “마귀”(희랍어, 디아볼로스)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하와가, 하나님을 중상하는 사단의 말에 귀를 기울여 그에 따라 행동하였을 때, 최초의 인간 부부는 그들의 최상의 벗으로부터 떨어져 나갔습니다. (창세 3:1-24) 사단의 책략에 굴복하여 해로운 말에 연루되는 일이 결코 없도록 합시다. 그러한 말은 당연히 하나님의 승인을 받지 못하며, 따라서 우리를 우리의 최상의 벗인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할 수 있습니다.
16. 중상자는 어떻게 “친한 벗을 이간”합니까?
16 우리는 악의적인 남의 소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벗들을 이간시키기 때문입니다. 종종 중상자들은 과장하고, 잘못 전달하고, 거짓말을 하며 격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말을 잔뜩 늘어놓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면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뒷전에서 수군거립니다. 종종 근거 없는 의혹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므로 “말장이[중상자, 신세]는 친한 벗을 이간”합니다.—잠언 16:28.
17. 왜 우리는 가벼운 남의 소문 이야기에 깊이 연루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까?
17 우리는 가벼운 남의 소문 이야기라도 깊이 연루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에게 해를 입힐 의도가 없는 말도 반복될 때 해를 입히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말은 재미있게 꾸며지거나 왜곡되어서 결국 경건한 사람의 명성에 손상을 주어 그의 좋은 이름을 앗아갑니다. 그런 일이 일어났을 경우, 당신이 그러한 이야기의 근원이었거나 심지어 전달한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느끼겠습니까? 사람들은 당신을, 손상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으로 볼 것이며, 따라서 더는 당신과의 동료 관계를 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비교 잠언 20:19.
18. 남의 소문 이야기가 어떻게 사람을 거짓말쟁이로 만들 수 있습니까?
18 경계해야 할 또 다른 이유는, 손상케하는 남의 소문 이야기는 우리를 거짓말쟁이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중상자, 신세]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데로 내려가느니라.” (잠언 26:22) 우리가 거짓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반복한다면 어떻게 될 것입니까? 설사 그 거짓말을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퍼뜨릴 때 우리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짓말임이 밝혀질 때, 우리는 거짓말쟁이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일이 일어나기를 원합니까? 하나님께서는 거짓 교사들에게 종교적 거짓말에 대한 책임을 물으시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분은 또한 거짓말을 하는 중상자들에게도 책임을 물으십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생각없이 말을 해도 그들이 심판 날에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너는 네 입으로 한 말로 무죄하게도 되고 유죄하게도 될 것이다.” (마태 12:36, 37, 새번역)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할 것이므로,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거짓말하는 중상자로 단죄하시기를 원할 것입니까?—로마 14:12.
19. 해로운 남의 소문 이야기가 살인적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9 해로운 남의 소문 이야기를 퍼뜨리지 않아야 할 또 다른 이유는, 그러한 이야기가 살인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한 이야기는 무죄한 사람의 좋은 명성을 망치는 치사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혀는 ‘연마한 칼’이며, 독한 말은 매복한 곳에서 흠없는 사람을 쏜 화살과 같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주[여호와]는 나를 숨기사 행악자의 비밀한 꾀에서와 죄악을 짓는 자의 요란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저희가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숨은 곳에서 완전한[흠없는, 신세] 자를 쏘려 하[나이다.]” (시 64:2-4) 우리는 동료 인간이 시편 필자가 한 것처럼 하나님께 기도로 도움을 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느낄 정도로 그에 관해 그러한 악한 것들을 말한 것에 대해 책임이 있기를 원할 것입니까? 우리는 살인에 해당하는 죄를 짓기를 원합니까?
20. (ㄱ) 하나님의 회중에 관한 한, 회개하지 않는 중상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ㄴ) 장로들은 남의 소문 이야기 및 중상과 관련하여 어떤 점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까?
20 중상은 하나님의 조직으로부터의 추방을 초래할 수 있으며, 중상자는 아마도 회개하지 않는 거짓말쟁이로서 제명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가벼운 남의 소문 이야기를 한 죄를 범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러한 조처가 취해지지 않습니다. 장로들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문제들을 저울질해 보아야 하며, 단순한 남의 소문 이야기와 비열한 중상을 예리하게 구분해야 합니다. 제명 처분되려면, 범죄자는 악의적이고 회개하지 않는 중상자여야 할 것입니다. 장로들은 거짓이나 악의가 아니라 인간적인 관심이 동기가 되어 사소한 남의 소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누구나 제명 처분할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문제를 합당한 정도 이상으로 확대해서는 안 되며, 중상이 분명히 관련되어 있음을 증명하는 실제적인 증거를 가진 증인들이 있어야 합니다. (디모데 전 5:19) 회개하지 않는 중상자들이 추방되는 것은 주로 악의적인 남의 소문 이야기를 그치게 하여 그 결과 회중이 죄로 더럽혀지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고린도 전 5:6-8, 13) 그러나 장로들은 너무 성급하게 되어 어떤 사람을 비성경적인 근거로 추방하는 일이 있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기도와 교훈을 통하여, 장로들은 종종 그 사람이 회개하고 사과하도록, 혹은 상황에 따라서는 보상을 하도록 그리고 혀를 제어하는 일에서 발전하도록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중상인가?
21. 범죄자에 관해 소문을 낼 것이 아니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21 현명한 잠언은 이렇게 말합니다.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중상자, 신세]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 (잠언 11:13) 이것은 어떤 사람이 은밀히 심각한 죄에 빠져 있는 것을 알 경우 그에 관해 말하는 것이 중상에 해당한다는 의미입니까?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그 문제에 관해 소문을 내서는 안 됩니다. 범죄자에게 장로들의 도움을 구하도록 직접 권해야 합니다. (야고보 5:13-18) 만일 그가 합리적인 기간 내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회중의 깨끗함에 대한 염려 때문에 그 문제를 장로들에게 보고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레위 5:1.
22. 왜 우리는 고린도 전서 1:11이 남의 소문 이야기를 하는 것을 공인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22 그러한 보고는 범죄자가 징계를 받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으며, 그런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만, 징계를 통해 훈련받은 사람은 의의 열매를 거둡니다. (히브리 12:11) 범죄 행위는 그러한 문제를 다루도록 임명된 사람들에게 밝혀져야지, 그것에 관해 잡담할지 모르는 남의 소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에게 밝혀져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고린도 전 1:11) 그 집안 식구들은 동료 신자들에 관해 소문을 낸 것이었습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어 생명의 길로 돌아오도록 조처를 취할 수 있는, 책임있는 장로에게 보고한 것이었습니다.
23. 고려해 보아야 할 무슨 질문이 아직 남아 있습니까?
23 만일 우리가 해로운 남의 소문 이야기에 말려드는 것을 경계하도록 사람을 돕는다면, 우리는 그에게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현명한 잠언은 이렇게 말합니다. “입을 지키는 자는 그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 (잠언 13:3) 그러므로 분명히, 해로운 남의 소문 이야기와 악한 중상을 경계해야 할 충분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로운 남의 소문 이야기를 멎게 할 수 있습니까? 다음 기사가 대답해 줄 것입니다.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 가벼운 남의 소문 이야기와 중상 사이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 남의 소문 이야기가 어떻게 중상이 될 수 있습니까?
◻ 해로운 남의 소문 이야기를 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이유 몇 가지는 무엇입니까?
◻ 우리가 다른 사람의 심각한 범죄 행위를 보고하는 것이 중상에 관련되는 것이 아닌 이유는 무엇입니까?
[14면 삽화]
사람에 대해 소문 이야기를 함으로써, 뒤에서 그를 쏘는 죄를 짓는 일이 결코 없도록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