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 아래 있는 양떼의 목자들
1. “선한 목자”는 누구이며, “양”들과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셨을 때에 그분은 자기를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셨읍니다.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분의 “양”이었읍니다. 그분은 그들을 위하여 자기의 영혼을 버리신다고 말씀하셨읍니다. (요한 10:1-15) 그리하여 회중을 이루는 그리스도 예수의 추종자들을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양떼의 양으로 비유하셨읍니다. 누가 12:32에서 예수께서는 왕국을 받게 될 “적은 무리”에 관하여 말씀하셨고 요한 10:16에서는 예수께서 “다른 양”을 언급하셨는데 이들은 역시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들의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한 양떼의 일부가 될 자들입니다.
2. 아랫 목자들은 왜 양떼를 보배롭게 다루어야 합니까?
2 후에 그리스도인 성서 필자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 밑에서 목자로서 봉사하도록 임명된 그리스도인 감독자들에게 말할 때 비슷한 표현을 사용하였읍니다. ‘바울’은 ‘에베소’의 감독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여러분 자신과 온 양떼에 유의하십시오. 그들 가운데서 성령이 여러분을 감독자로 임명하여 하나님의 회중 즉 그가 그 자신의 아들의 피로 사신 것을 치게 하였읍니다.” (사도 20:28, 신세) 여기에서 ‘바울’은 이들 목자들이 이 회중은 하나님의 것이고 더욱이 그것은 하나님께서 매우 보배롭게 생각하시는 피 곧 자기 아들의 피로 사신 것임을 인정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였읍니다. 그러므로 이들 목자들은 양떼를 하나님과 그리스도 앞에서 아주 보배롭게 다루어야 합니다. 이 양떼는 바로 그분들의 것입니다.
3. (ㄱ) 제1세기에 양떼의 모든 성원들에게 기대된 것은 무엇이었읍니까? (ㄴ) 회중 안에서 연합이 어떻게 세워져 나아갔읍니까?
3 ‘바울’이 이 충고를 할 때쯤해서는 그리스도인 회중의 양같은 성원들은 한 장소나 한 도시에 있지 않고 ‘로마’ 제국의 여러 도시에 있는 회중에서 볼 수 있었읍니다. 그들은 여러 곳에 있었지만 한 목자 그리스도 예수 아래 있는 한 양떼였으며, 양떼의 각 성원은 예수께서 죽으시기 전에 기도하신 바와 일치하게 다른 성원들과 연합해야 하였읍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한 17:20, 21) 제1세기에 회중을 섬기도록 임명된 사람들은 회중의 머리로 임명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이끌고 모두로 그분을 본받고 진리에 고착하며, 순수한 사랑을 나타내도록 격려함으로써 그들의 연합을 세워 나아가는 일을 하게 되어 있었읍니다. 에베소 4:15, 16에 기록된 바와 같습니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며 모든 점에서 자라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이르러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모든 지체가 각각 그 분량에 따라 활동하는 대로 마디마다 공급을 받아 단단히 결합되고 서로 어울려 몸이 자라 사랑 안에서 몸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새번역) 그러므로 해야 할 일은 다양하지만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한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아래 있는 여러 성원들로 된 한 몸이었읍니다.
4. (ㄱ)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무엇을 강조하셨읍니까? (ㄴ)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무엇을 일깨워 주었읍니까?
4 ‘베드로’는 목자장 예수 그리스도의 지도 아래 양치는 일을 한 사람 중의 한사람이었읍니다. 예수께서는 부활되신 후에 ‘베드로’에게 요한복음 21:15-17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어린 양”을 먹이는 일 혹은 치는 일로 나타난다는 것을 강조하셨읍니다. 여러 해 후에 ‘베드로’는 그리스도인 회중에서 역시 장로의 직책에 있게 된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하였읍니다. 베드로 전서 5:1-4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 중의 장로들에게 같은 장로로서 또한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장차 나타날 영광을 같이 누릴 자로서 권합니다. 여러분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떼를 먹이시오. 억지로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진해서 하며 더러운 이익을 탐해서 할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하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에게서, 신세] 맡은 자들을 지배하러들지 말고 양떼의 모범이 되시오.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변하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게 될 것입니다.” (새번역) 이렇게 해서 이들 장로들 곧 그리스도 예수 아래 있는 이들 목자들은 양떼가 하나님의 것이며, 장로로서 그들을 돌보고 그들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에 대하여 일깨움을 받았읍니다.
5. (ㄱ)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감독하다라는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ㄴ) 예수께서는 이 점을 어떻게 강조하셨읍니까?
5 그리스도인 목자는 곧 감독자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이 세상에서 공사 감독자나 농장 감독자를 생각하는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 회중 내에서는 지배하는 일이 없읍니다. 감독한다는 말은 사람을 높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여러 해 전에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가지셨던 마지막 만찬식에서 그리스도 예수로부터 이 사실을 잘 배웠읍니다. 누가 복음 22:24-27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또 저희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찌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 찌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제자들이 그러한 다툼을 한 것은 잘못이었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얼마나 친절하게 그들을 시정해 주셨읍니까?
6, 7. (ㄱ) 예수께서는 어떻게 장차 목자들이 될 사람들에게 훌륭한 본이 되셨읍니까? (ㄴ) ‘베드로’는 또한 무슨 특성을 강조하였읍니까? (ㄷ) 회중은 이 특성으로부터 어떠한 유익을 얻게 됩니까?
6 이 목자장은 장차 목자들이 될 사람들에게 훌륭한 본이 되셨읍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가지신 그 만찬에 관한 ‘요한’의 기록은 이 때 있었던 일을 이렇게 알려 줍니다. “저녁 먹는 중 ···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시니라].” (요한 13:2-5) 예수는 좋은 선생이었읍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이유를 설명해 주셨읍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요한 13:12-15.
7 ‘베드로’는 그리스도 예수의 본과 목자는 양떼를 겸손히 다루어야 할 필요성에 깊은 감동을 받아 항상 그들을 섬길 태세를 갖추고 있었읍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하나님에게서] 맡은 자들을 지배하러들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라고 편지한 것입니다. 이 겸손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양떼를 치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보기를 원하신 특성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이렇게 계속하였읍니다. “젊은이들이여, 이와 같이 여러분도 장로들에게 복종하시오. 모두가 서로 서로 겸손의 옷을 입으시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강하신 손 아래 스스로 겸손하시오. 때가 되면 그가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베드로 전 5:5, 6, 새번역) 겸손한 데는 그만한 유익이 있읍니다. 이 특성을 가진 사람에게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생각으로 가까이 접근하기가 쉬우며 이러한 정신은 회중 전체를 사랑으로 연합하게 합니다. 사랑과 겸손으로 섬긴다면 전제적이거나 독단적인 행동이나 하나님에게서 맡은 사람들을 지배하는 일이 없읍니다. 참 목자는 양떼의 본이 되는 데만 관심이 있읍니다.
8. (ㄱ) 희랍어 ‘에피스코포스’의 기본 사상은 무엇입니까? (ㄴ) 그리스도인 감독자들에게는 이 말이 왜 희랍어 ‘키리오스’보다 더 적절합니까?
8 희랍어 ‘에피스코포스’에서 번역된 “감독자”라는 말은 보호자 혹은 후견인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에피스코포스’라는 말에서 유래한 기본 사상은 보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감독자는 하나님의 양떼를 염려하고 마치 목자가 실제 양을 돌보듯이 그러한 양떼를 돌보는 사람입니다. 감독자라고 해서 하나님의 양떼를 지배해서는 안됩니다. 여기 “지배”라고 번역된 희랍어는 “주”라는 뜻의 ‘키리오스’로서 그것은 마치 가장 곧 가족의 머리처럼 다른 사람들에 대한 능력과 권위를 가진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 말은 또한 “주인”, “소유자” 또는 심지어 경칭으로서의 “선생님”으로 번역됩니다. 노예 소유자가 그것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노예 소유자는 희귀합니다. 현대에는 고용주 혹은 상전이 ‘키리오스’ 혹은 “주”에 행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장로들과 형제들의 관계를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관계처럼 보아서는 안됩니다. 장로들은 목자들이며, 목자들은 양을 좋은 초장과 물있는 곳으로 인도하고 그들을 보호하며 다쳤거나 앓는 양들을 고쳐 주고자 노력합니다. 그리스도인 회중의 목자들은 우리에게는 한분의 천적 주가 계시며 그분 아래서 우리가 섬기고 있고 그분 앞에 우리가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들의 형제들의 동료 일군들이 됨으로써 주의 사업에서 그들을 격려합니다.
9, 10. (ㄱ) ‘베드로’는 어떻게 겸손의 훌륭한 본이었읍니까? (ㄴ) 거짓 종교와는 대조적으로 참 목자들의 어떠한 특성이 연합에 기여하며, 예수께서는 이 점을 어떻게 강조하셨읍니까?
9 이 점에 있어서 ‘베드로’ 자신이 훌륭한 본이었읍니다. 그가 베드로 전 5:1을 기록할 때 장로들에게 말하면서 “나는 ··· 같은 장로로서”(새번역) 말한다고 하였읍니다. 이것은 ‘베드로’를 수위(首位) 혹은 교황의 지위로 높이려는 이 세상 종교의 ‘베드로’에 대한 견해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베드로’가 세운 본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10 ‘베드로’는 틀림없이 예수께서 자신들을 높이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때 말씀하신 내용이 마태 23:8-12에 기록되어 있읍니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그리스도 예수 아래서 섬기는 목자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 겸손은 양떼의 연합에 기여하며 따라서 여호와의 축복을 얻게 합니다.
11. ‘바울’과 ‘바나바’는 오늘날 감독자들에게 어떠한 훌륭한 본이 되었읍니까?
11 여행하는 감독자였던 ‘바울’과 ‘바나바’는 한 때 구원을 위하여는 할례가 필요하다고 가르치는 어떤 사람의 문제를 직면하게 되었읍니다. 사도 15:2를 보면 ‘바울’과 ‘바나바’는 그 가르침에 반대하였으며 다툼이 있었음을 알려 줍니다. 그러나 회중 전체의 연합을 위하여 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의 통치체에게 그 문제를 가져갔읍니다. 그 문제가 철저히 토의되고 통치체가 결정을 내리자 ‘바울’과 같은, 지방적으로 여행하는 감독자들은 그 결정을 전심으로 받아들이고 그 중요한 영적 지시를 회중들에게 전달하였읍니다. 사도 16:4, 5은 이렇게 알려 줍니다. “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의 작정한 규례를 저희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니라.” 이것은 양떼의 모든 사람들 사이에 연합을 증가시키고 생각을 일치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여호와를 기쁘시게 한 것이 분명하였읍니다. 여호와께서는 회중을 번영케 하시고 증가를 가져오셨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리스도인 회중의 통치 마련에 대한 존경 면에서 오늘날 감독자들에게 좋은 본이 되었읍니다.
12. (ㄱ) ‘바울’은 언제나 누구에게 영광을 돌렸읍니까? (ㄴ) ‘바울’은 회중의 감독자들을 어떻게 다루었읍니까?
12 ‘바울’은 진리를 전파하는 일에 일익을 담당하였고 그 일의 확장을 보았지만 그는 본이 되는 방법으로 여호와께 영광을 돌렸읍니다. 그는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라고 말함으로써 자기나 다른 하나님의 종들로부터 관심을 하나님께로 이끌었읍니다. (고린도 전 3:7)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이 편지는 또한 ‘고린도’ 회중 감독자들에게 그들이 시행하지 않고 있는 하나님의 법의 요구 조건을 상기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음을 알려 줍니다. 제5장에서는 회중 내에 음행하는 자가 있다는 것이 보고되었는데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음을 알려 줍니다. 그 기록에는 ‘바울’이 모든 감독자들에게 결점이 있다고 해서 그들의 자격을 박탈하거나 회중내의 직책에서 해임하기를 권고하였다는 말이 없읍니다. 오히려 ‘바울’은 형제라고 일컫는 자들 가운데 하나님의 법을 범하는 자들과는 사귀지도 말고 악한 자는 그들 가운데서 제거하라고 지시하였읍니다. ‘바울’은 그들이 양치는 일에 발전하고 개선해 나아갈 기회를 갖게 함으로써 그들에 대하여 참을성을 나타냈읍니다. 그러나 이것은 감독자나 봉사의 종이 결코 봉사의 특권을 상실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분명히 불충실하거나 흠잡힐 일이 있게 되면 그는 자격을 상실하게 됩니다.
연합케 하는 봉사
13. 감독자는 책임을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13 감독자에게는 무거운 책임이 있읍니다. 그러나 그것은 즐거운 책임—큰 특권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짐을 가볍게 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선한 목자”께서는 우리에게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마태 11:30) 이것이 책임에 대한 예수의 견해였읍니다. 예수의 본을 따라 여호와의 뜻을 행하는 데 예수와 함께 멍에를 멘 아랫 목자들 역시 그 책임을 그러한 식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많은 것은 ‘첫째 것을 첫째’에 두는 것에 달려 있읍니다.—마태 6:33.
14. 예수께서 하신 큰 일은 무엇이었으며, 제자들에게 무슨 일을 훈련시키셨읍니까?
14 예수의 본을 좀더 가까이 살펴 보도록 합시다. 예수께서 지상에 계셨을 때에 행한 큰 일은 무엇이었읍니까? 침례자 ‘요한’이 잡혀서 투옥되었을 때에 예수께서는 ‘갈릴리’로 가셔서 거기에서 자기의 봉사를 시작하셨읍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마태 4:17) 왕국을 전파하는 것이 예수의 주요 사업이었읍니다. 그리고 그분은 주로 그 일을 하도록 제자들을 훈련시키셨읍니다. (누가 8:1; 9:1, 2; 10:1, 8, 9) 지상 봉사를 마치게 되셨을 때에 그분은 ‘빌라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요한 18:37) 예수와 함께 멍에를 메고 있는 아랫 목자들이 이보다 작은 목표를 가져서야 되겠읍니까?
15, 16. (ㄱ) 감독자들의 어떠한 문제에 대하여 모두는 이해를 나타내야 합니까? (ㄴ) 감독자들이 복음 전하는 일과 양치는 일 그리고 가르치는 일의 책임을 균형 잡게 이행할 때 어떠한 축복이 있게 될 것입니까?
15 그러나 많은 감독자들의 경우에 있어서 이것은 문제를 제시하며, 그것도 이해할 만합니다. 가족 책임을 돌보고 양치는 방문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을 사용하다 보니 호별 방문 봉사와 기타 야외 활동을 열심히 인도할 만한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이지만 복음을 전하는 일과 양치는 일 그리고 가르치는 일에 합리적인 균형을 잡을 수 없읍니까? (에베소 4:11) 감독자가 봉사 집단과 함께 복음 전하는 일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도록 계획하는 경우라면 이 봉사와 함께 할 수 있는 다른 활동을 고려하십시오. 흔히 감독자는 이 봉사에 가족을 동반하도록 계획할 수 있으며, 다른 전도인들과 함께 그들에게도 실용적인 훈련을 베풀 수 있읍니다. 가족과 함께 정기적으로 봉사에 참예하는 것은 큰 즐거움이며, 이것은 다른 전도인들도 즐거움을 발견하게 할 수 있는 본이 됩니다.
16 양치는 방문은 어떠합니까? 봉사에서 돌아오는 길에 감독자는 잠깐 어떤 전도인이나 가정에 들려서 야외에서 있었던 그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은 틀림없이 고무적인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감독자들은 직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잠깐 들리기도 합니다. 방문을 잘 계획만 한다면 복음 전하는 시간을 많이 빼앗길 필요가 없읍니다. 감독자들은 오늘날에도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말과 같이 말할 수 있읍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고린도 전 9:16) 그리스도인이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일에 계속 활동적이라면 얼마나 상쾌한 일이며, 감독자의 그러한 훌륭한 본에 대하여 양떼는 얼마나 고맙게 생각할 것입니까!
17. 예수께서는 봉사를 어떻게 수행하셨읍니까?
17 ‘복음 전하는 자로, 목자로, 가르치는 자’로 섬기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께서 봉사를 이행하신 방법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분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왕국을 선포하셨읍니다. 오늘날 우리는 주로 집집을 방문해서 그 일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공개적인 전파와 제자들을 사적으로 가르치는 일을 어떻게 연관시키셨는지 유의하십시오. 한때 예수께서는 배를 타시고 바닷가에 모인 큰 무리에게 가르치신 일이 있었읍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셨읍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물었읍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조용히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셨읍니다. 그리고 나서 그분은 다른 많은 것들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셨읍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다시 그분에게로 왔읍니다. 그래서 그분은 그들이 자기의 가르침을 “깨닫”도록 도와 주셨읍니다.—마태 13:1-3, 10, 11, 34-36, 51.
18. 감독자들이 야외 지향적인 봉사를 할 때 어떠한 유익이 있을 수 있읍니까?
18 그러므로 예수의 봉사는 야외 지향적이었읍니다. 많은 감독자들은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본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한 집단과 함께 봉사할 때에 그들은 집 문에서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데 다른 전도인들을 동반할 수 있읍니다. 이것은 집단을 크게 격려할 수 있읍니다. 그들은 여러 전도인들과 함께 봉사하면서 그들이 찾아간 집에서 다루어야 할 상태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 주고 그 지방적인 문제를 극복하는 방법을 보여주는 데 관심을 보일 수 있읍니다. 특히 그들이 봉사를 마칠 때에 그들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질문을 토의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대한 집단의 열정을 고무하는 동시에 감독자들은 양치는 일과 가르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읍니다.
19. 예수께서는 “선한 목자”로서 어떠한 탁월한 본을 세우셨읍니까?
19 요한 복음 10:3, 4에서 우리는 “선한 목자”에 관하여 이러한 내용을 읽을 수 있읍니다.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 오[느니라].” 오늘날의 아랫 목자들도 왕국 봉사에서 양떼를 인도하고 봉사 집단에 속한 각 전도인들의 필요를 사랑으로써 보살피고 모두가 좋은 소식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일에서 재능을 발전시키도록 세워주기 위해 각자에게 친절한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가장 가치있는 격려를 할 수 있읍니다. 양떼를 그렇게 섬기는 일에 탁월한 본을 세우신 분은 바로 예수 자신입니다.—시 40:9.
20. (ㄱ) 양떼는 왜 감독자들을 비평해서는 안됩니까? (ㄴ) 양떼의 성원들은 어떻게 감독자들의 사랑의 노동을 충성스럽게 받들 수 있읍니까?
20 때로는 문제들이 감독자들의 시간을 상당히 뺐는 일이 있으며, 그 문제들은 등한히 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때때로 이런 문제들이 감독자들로 하여금 다른 전도인들을 왕국 봉사에서 인도할 수 없게 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아무도 그들을 비판해서는 안됩니다. 양떼 모두는 그들의 사랑의 노동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들은 감독자들이 복음 전하는 일과 양치는 일 그리고 가르치는 일 사이에 올바른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하는 것에 대하여 고맙게 생각합니다. 환경이 허락하는대로 감독자들이 복음 전하는 일에 끊임 없이 동반하는 것을 가장 기뻐합니다. 때때로 봉사의 종들과 회중에 있는 다른 전도인들이 세세한 일이나 특별히 감독자가 돌보아야 할 일이 아닌 다른 일들을 돌봄으로써 감독자들의 짐을 가볍게 할 수 있읍니다. 감독자들과 나란히 충성스럽게 섬기는 봉사의 종들과 기타 보조자들 그리고 가능한 한 모든 도움을 베푸는 사람들은 회중에게 큰 축복이 됩니다.—시 149:1.
21. “진리를 말”하는 데 연합해서 봉사할 때 어떠한 결과를 얻게 됩니까?
21 감독자들과 봉사의 종들 그리고 회중의 다른 모든 성원들이 왕국 봉사에서 열심히 그리고 서로 “진리를 말”하는 데 연합해 있고, 회중 전체가 왕국을 전파하고 제자를 삼는 일을 발전시키려고 세세한 모든 일에 협조한다면 모두는 참으로 “사랑 안에서 ··· 모든 점에서 자라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이르”게 될 것입니다.—에베소 4:15, 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