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연구 노트—4장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고 말해야 합니까?: 일부 사본에는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현재 본문에 사용된 표현이 사본상으로 더 강력한 지지를 얻고 있다.
여호와: 이 구절에서 인용한 창 15:6의 히브리어 원문에는 네 개의 히브리어 자음으로 표기된 하느님의 이름(יהוה, 로마자로 음역하면 YHWH)이 나온다. (부록 다 참조) 현존하는 그리스어 사본들에는 이 부분이 테오스(하느님)로 되어 있는데, 아마도 「칠십인역」 사본들에서 창 15:6에 나오는 표현을 가져온 것 같다. 대부분의 번역판들에서 이 부분을 “하느님”으로 번역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 구절에서 인용한 창 15:6의 히브리어 원문에는 테트라그람마톤이 들어 있으며, 따라서 「신세계역」에서는 본문에 여호와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갈 3:6과 약 2:23에도 창 15:6 전체가 인용되어 있다.
여겨졌다: 또는 “대변에 기입되었다; 간주되었다”. 로마서 4장에서 그리스어 로기조마이는 “여겨지다” 또는 “여기다”로 열 번 번역되었으며 (3, 4, 5, 6, 9, 10, 11, 22, 23, 24절) (죄를) “묻다”로 한 번 번역되었다. (8절) 이 그리스어 동사는 고대에 회계 처리를 하는 경우처럼 계산을 할 때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차변에 기입되는 것을 가리킬 수도 있고 대변에 기입되는 것을 가리킬 수도 있었다. 행동이 수반된 아브라함의 믿음은 “의롭다고 여겨졌다.” 다시 말해, 마치 대변에 의롭다고 기입된 것처럼, 의롭다고 간주되었다. (롬 4:20-22) 이것은 아브라함이나 그리스도 이전 시대의 다른 충실한 사람들이 죄가 없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그분의 약속에 믿음을 나타내고 그분의 명령을 따르려고 노력한다는 점을 고려해 주셨다. (창 3:15; 시 119:2, 3)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그분 앞에 설 수 없는 나머지 인류와 비교할 때 그들이 죄가 없다고 여기셨다. (시 32:1, 2; 엡 2:12) 물론 아브라함과 같은 충실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죄에서 구속받을 필요가 있다는 점을 인정했고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에 구속해 주시기를 기다렸다. (시 49:7-9; 히 9:26) 그때가 오기 전에도 여호와께서는 그러한 불완전한 사람들이 나타낸 믿음 때문에, 자신의 완전한 공의의 표준을 타협하는 일 없이 그들과 상대하고 그들을 축복하실 수 있었다.—시 36:10.
과분한 친절: 또는 “선물”. 일하는 사람은 품삯을 받을 권리가 있다. 그는 그러한 품삯을 선물이나 특별한 친절로 여기지 않는다. 그와는 달리 하느님께서 불완전한 사람들을 사형을 당할 처지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믿음을 근거로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일은 전적으로 과분한 친절이다. 이러한 친절은 받는 쪽이 받을 만한 노력을 한 것도, 받을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며 순전히 주는 쪽에서 관대하게 베푸는 것이다.—롬 3:23, 24; 5:17; 고후 6:1; 엡 1:7. 용어 설명 “과분한 친절” 참조.
당연히 받아야 할 것으로: 또는 “빚으로”. 일하는 사람은 자신이 일한 대가를 받을 권리가 있다. 그는 품삯을 자신의 권리 즉 주인이 자신에게 진 빚으로 생각한다. 그는 그것을 선물이나 특별한 친절로 여기지 않는다.
용서받고: 그리스어 아피에미는 기본적으로 “떠나가게 하다”를 의미하지만 (요 11:44; 18:8) “빚을 탕감하다”를 의미할 수도 있고 (마 18:27, 32)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죄를 “용서하다”를 뜻할 수도 있다. (마 6:12) (마 6:12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이 이 구절에서 인용한 「칠십인역」의 시 32:1(31:1, LXX)에도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덮어진: 또는 “용서받은”. 그리스어 에피칼립토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이 구절에만 나온다.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덮다”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용서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바울은 여기서 시 32:1을 인용한 것인데, 그 구절의 「칠십인역」(시 31:1) 표현을 보면 동일한 그리스어 동사가 죄를 용서한다는 의미로 사용된 “덮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를 번역하는 데 쓰였다.
행복합니다: 그리스어 마카리오스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50회 나온다. 바울은 여기서 “행위와 상관없이 하느님께서 의롭다고 여기시는 사람의 행복”을 묘사한다. (롬 4:6) 이 그리스어는 하느님과 (딤전 1:11) 하늘에서 영광 가운데 계신 예수를 (딤전 6:15)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또한 이 단어는 예수께서 산상 수훈 가운데서 하신 행복에 관한 유명한 말씀에도 사용되었다. (마 5:3-11; 눅 6:20-22) 롬 4:7, 8에 나오는 “행복하다”라는 표현은 시 32:1, 2에서 인용한 것이다. ‘~는 행복하다’와 같은 표현은 히브리어 성경에 자주 나온다. (신 33:29; 왕상 10:8; 욥 5:17; 시 1:1; 2:12; 33:12; 94:12; 128:1; 144:15; 단 12:12) “행복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표현은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처럼 단지 마음이 유쾌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볼 때, 사람이 진정한 행복을 누리려면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기르고 그분을 충실히 섬기고 그분의 은혜와 축복을 받아야 한다.
여호와: 이 구절에서 인용한 시 32:2의 히브리어 원문에는 네 개의 히브리어 자음으로 표기된 하느님의 이름(יהוה, 로마자로 음역하면 YHWH)이 나온다.—부록 다 참조.
인장: 또는 “보증; 확증”. 여기서 “인장”이라는 표현은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점유권 또는 소유권을 나타내는 표를 뜻한다. 아브라함이 받은 할례는 그가 이미 가지고 있던 믿음을 통해 의롭다고 여겨졌다는 점을 확증해 주는 “인장”이었다.—요 3:33 연구 노트 비교.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의 아버지: 영적인 의미에서 볼 때,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충실한 그의 육적 자손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들의 아버지이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부터 믿음을 나타내기 시작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롬 4:10) 그로 인해 아브라함은 예수에게 믿음을 나타내는 할례받지 않은 비유대인 즉 이방인들의 “아버지”가 되었다. 따라서 로마의 그리스도인 회중에 속해 있던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 모두는 자신들의 믿음과 순종을 근거로 아브라함을 자신들의 아버지로 부를 수 있었다.—롬 4:17 연구 노트 참조.
자손: 또는 “후손”. 직역하면 “씨”.—부록 가2 참조.
범법: 그리스어 파라바시스는 기본적으로 “어기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특정한 한계나 범위를 넘어서는 것, 특히 법을 위반하는 것과 같은 행동을 가리킨다.
자손: 롬 4:13 연구 노트 참조.
기록된 것과 같습니다: 창 17:5에서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하신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할 것이다”라는 말씀을 가리킨다. 여호와께서는 이 약속을 근거로 아브람이라는 이름을 “무리의 아버지; 많은 사람의 아버지”를 의미하는 아브라함으로 바꾸셨다. 이 약속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은 “씨족에 따른 열두 수장”의 아버지가 되었다. (창 25:13-16; 17:20; 21:13, 18) 아브라함이 그두라를 통해 낳은 여섯 아들도 아브라함을 선조로 둔 다른 민족들을 이루었다. (창 25:1-4; 대상 1:28-33; 롬 4:16-18)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서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에돔 사람들이 나왔다. (창 25:21-26) 또한 영적인 의미에서도 아브라함은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되었는데, 그중에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고착하는” 로마 회중의 그리스도인들도 포함되었다.—롬 4:16.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분: 하느님을 그렇게 묘사할 수 있는 이유는 그분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 절대적으로 확실하기 때문이다. (사 55:10, 11) 여기서 바울은 아브람과 사래가 자녀가 없었는데도 아브람이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셨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창 17:4-6) 이것은 마치 아브라함의 아들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태어나기 오래전부터 이미 그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씀하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7절 끝부분에 나오는 이 그리스어 표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분”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이 번역 표현은 하느님의 창조 능력을 강조한다. 그분은 아브라함이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하는 데 틀림없이 그 능력을 사용하셨을 것이다.
자손: 롬 4:13 연구 노트 참조.
죽었다고: 또는 “임신하지 못한다고”. 이 표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네크로시스로, 동사 네크로오와 어근이 같다. 네크로오는 이 문장의 앞부분에 나오며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로 번역되었다. 임신하지 못하던 사라(사래)는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나이가 지났는데도 기적적으로 생식 능력이 회복되었다. (창 11:30; 18:11) 또한 바울은 아브라함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으로 묘사했다. (히 11:11, 12) 따라서 아브라함과 사라 모두 생식 능력이 회복되어 자녀를 가질 수 있게 되었을 때 부활에 비할 만한 일을 체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창 18:9-11; 21:1, 2, 12; 롬 4:20, 21.
의심한: 또는 “흔들린”. 이 표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디아크리노는 확신하지 못하거나 마음이 나뉘어 있거나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단어는 다른 구절들에서도 “의심하다”로 번역되었다.—마 21:21; 막 11:23; 행 10:20; 11:12; 약 1:6.
여겨졌습니다: 롬 4:3 연구 노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