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주의 폭정 아래서 보낸 반세기
렘비트 툼의 체험담
1951년에, 나는 시베리아에서 강제 노동을 하도록 10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우리는 북극권 훨씬 위쪽에 있는 수용소로 수천 킬로미터나 실려 갔습니다. 일은 녹초가 될 정도로 고되었고, 날씨는 혹독했으며, 생활 환경도 열악하였습니다. 내가 그곳에 가게 된 경위와 우리가 겪은 고통이 헛된 것이 아닌 이유를 말하고자 합니다.
나의 아버지는 에스토니아에서 지식인으로 간주되는 사람이었고, 발트 해에 있는 이 나라에서 1924년 3월 10일에 내가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말년에는 에스토니아 중부에 있는 예르바마에서 가족 농장을 운영하였습니다. 우리 가족은 루터교를 믿는 대가족으로서 자녀가 아홉이나 되었는데, 나는 그 중 막내였습니다. 내가 열세 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였습니다.
그 이듬해에 나는 초등 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1939년 9월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형 에리히는 군에 징집되었고, 나는 교육을 계속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1940년에는 에스토니아가 소련에 합병되었고, 일 년 후에는 독일군이 에스토니아를 점령하였습니다. 형은 독일군 포로가 되었다가 석방되어, 1941년 8월에 에스토니아로 돌아왔습니다. 1942년에, 나는 농업 학교에 다닐 수 있었습니다.
1943년에 내가 크리스마스를 지키기 위해 학교를 떠나 집에 와 있을 때, 우리 가족 주치의가 누나에게 성서 이야기를 해 주었다는 말을 누나 레이다에게서 들었습니다. 주치의는 누나에게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에서 발행한 소책자도 몇 부 주었습니다. 나는 그 소책자들을 읽고 나서 즉시 주치의인 아르투르 인두스 박사를 찾아갔으며, 그와 함께 성서를 연구하였습니다.
결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다
그 사이에, 독일과 소련 사이의 전투는 치열해졌습니다. 1944년 2월경에는, 이미 러시아군이 에스토니아 국경 가까이까지 진격해 왔습니다. 형은 독일군에 징집되었고, 나 역시 입대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법이 동료 인간을 죽이는 일을 금한다고 믿고 있었고, 인두스 박사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내가 숨어 있을 만한 곳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 주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어느 날 경찰관 한 사람과 내가 사는 지역의 민방위 대장이 우리 농장에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군 복무를 피하려 한다는 혐의로 나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고 왔습니다. 그때 나는 집에서 도망하지 않으면 독일 강제 수용소에 가지 않을 수 없을 것임을 알았습니다.
나는 어느 여호와의 증인의 농장에 은신하였습니다. 숨어 있는 동안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 가능한 한 성서와 워치 타워 협회 출판물을 많이 읽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식품을 좀 가져오기 위해 집에 몰래 가 보았습니다. 형이 몇몇 친구와 함께 며칠간 휴가를 보내기 위해 집에 와 있었기 때문에 집에는 독일 군인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날 밤 나는 탈곡장에서 형과 비밀리에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내가 형을 본 것은 그때가 마지막이었습니다.
가까스로 도망하다
같은 날 밤, 내가 숨어 있던 농장으로 돌아온 후 그 농장이 기습을 당하였습니다. 그 지역 경찰관과 민방위 대원들이 그 농장에 누군가가 숨어 있다는 제보를 받고 출동한 것입니다. 내가 마루 밑의 좁은 공간으로 기어 들어가고 얼마 안 있어, 머리 위로 지나가는 군화 소리를 들었습니다. 경찰관은 농부를 소총으로 위협하며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이 집에 숨어 있는 자가 있소! 어떻게 하면 마루 밑으로 들어갈 수 있소?” 그들이 이리저리 비추는 손전등의 빛줄기가 보였습니다. 나는 조금 더 안쪽으로 몸을 붙이고 거기에 누워 기다렸습니다. 그들이 떠나간 뒤에도 위험이 완전히 사라졌나 확인하기 위해 그 좁은 공간에 잠시 더 머물러 있었습니다.
새벽이 되기 전에 그 집에서 나왔는데, 여호와께 감사하게도 남의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 형제들이 숨을 만한 다른 장소를 찾도록 도와 주었고, 독일의 점령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 있었습니다. 후에, 그 경찰관과 민방위 대장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러시아 유격병들에 의해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1944년 6월 19일에 나는 하느님에 대한 헌신의 상징으로 물침례를 받았으며, 누나도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1944년 6월에 소련이 에스토니아를 다시 점령하기 시작하였는데, 몇 달 후에 나는 자유롭게 집에 돌아와 농장 일을 도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집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11월에, 러시아군에 입대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나는 용기백배하여 징집 위원회 앞에서 담대하게 증거하였습니다. 그들은 소련 체제는 나의 신앙에는 관심이 없으며 모두가 군에 복무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남은 전쟁 기간에 나는 다행히 자유롭게 지낼 수 있었고, 동료 증인들에게 성서 출판물을 공급하는 일을 돕는 데 전념하였습니다.
전후의 활동
1945년 5월에 전쟁이 끝나고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에게 사면이 내려졌을 때, 나는 다시 학교에 다녔습니다. 1946년 초에, 소련의 집단 영농 체제가 개인들이 운영하는 농장을 다 인수하였기 때문에, 나는 에스토니아에서 영농을 하는 것은 장래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학교를 그만두고 왕국 전파 활동에 더 온전히 참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소련의 통치 아래서는, 우리의 봉사의 직무를 더는 공개적으로 수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상,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워치 타워 협회와의 연락은 중단된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나는 낡은 등사기 한 대를 가지고 우리가 보존해 두었던 출판물을 등사하는 일을 도왔습니다. 우리는 또한 회중 집회를 갖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1948년 8월부터 KGB(소련의 국가 보안 위원회)가 여호와의 증인을 박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전파 활동을 인도하던 사람들 중에 다섯 명이 체포되고 투옥되었으며, KGB가 모든 사람을 체포하려고 한다는 점이 곧 명백해졌습니다. 우리 중 네 사람으로 이루어진 위원회가 구성되어, 전파 활동을 조직하여 그리스도인 형제들을 격려해 주었고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사람들을 도와 주었습니다. 나는 아직은 비교적 자유로워 여기저기 돌아다닐 수 있었기 때문에, 동료 증인들과 연락하는 일을 수행하였습니다.
1948년 9월 22일자로 공식 항의서를 에스토니아 주재 소련 관리들에게 보냈습니다. 그 항의서에서는 우리의 조직과 활동의 목적을 설명한 다음, 수감되어 있는 동료 신자들을 석방해 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어떠한 반응이 있었습니까? 더 많은 사람들을 체포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1948년 12월 16일에 우리는 에스토니아 소련 사회주의 공화국 대법원 위원회 앞으로 우리 형제들을 무죄 방면해 줄 것을 요구하는 항의서를 또 보냈습니다. 이 항의서 사본들을 비롯한 여러 청원서들이 지금도 탈린 시 문서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정식 허가증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여행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느 러시아 경찰관에게서 강력한 4기통 블록 엔진으로 달리는, 사이드카가 달린 오토바이를 구입하여 그것을 몰고 아라베테, 오테파, 탈린, 타르투, 보루에 있는 회중들을 방문하였습니다. 우리는 그 오토바이를 병거라는 애칭으로 불렀습니다.
스탈린 앞으로 보낸 항의
1949년 6월 1일에는, 또 한 통의 청원서를 에스토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최고위국뿐만 아니라 소련 최고 소비에트 회의 간부회 의장인 니콜라이 슈베르니크 앞으로도 우송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청원서의 사본 한 부를 탈린 시 문서 보관소에서 회수할 수 있었는데, 이 청원서에는 니콜라이 슈베르니크가 이 청원서를 접수하여 사본 한 부를 소련 정부의 수상인 요세프 스탈린에게 보냈음을 알려 주는 니콜라이 슈베르니크의 도장이 찍혀 있습니다. 이 청원서의 마지막 부분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증인을 교도소에서 석방해 줄 것과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박해를 중단해 줄 것을 요구하는 바입니다. 워치타워 성서 책자 협회라는 이름을 통해 활동하는 여호와 하느님의 조직은 여호와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소련의 모든 주민에게 방해받지 않고 전파할 수 있도록 마땅히 허락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호와께서 소련과 공산당을 완전히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상의 일을, 여호와 하느님과 그분의 왕국의 왕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또한 수감되어 있는 모든 동료 신자들의 이름으로 요구하는 바입니다.
서명: 에스토니아의 여호와의 증인 일동 (1949년 6월 1일).”
박해가 더 심해지다
1950년 초에 우리는 독일에서 돌아온 어떤 사람으로부터 「파수대」 세 개호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영적 양식으로부터 우리의 그리스도인 형제들이 모두 유익을 얻을 수 있도록, 1950년 7월 24일에 오테파 마을 근처에 있는 한 성서 연구생의 건초 헛간에서 대회를 열기 위한 조직을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KGB가 어떤 방법으로인가 우리의 계획을 알아내고는 대대적으로 체포할 준비를 하였습니다.
두 대의 트럭을 타고 온 군인들이 형제들이 내리기로 되어 있는 팔루페라 기차역에 배치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 군인은 무선 송신기를 가지고 팔루페라에서 오테파로 가는, 대회 장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길에서 잠복하고 있었습니다. 일찍 도착하기로 되어 있던 어떤 형제들이 예정된 시간에 나타나지 않자, 우리는 우리 계획이 발각되었음을 눈치챘습니다.
나는 동료 증인 엘라 키카스를 데리고 팔루페라보다 두 정거장 앞선 기차역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갔습니다. 마침 기차가 도착해 있어서, 엘라와 나는 양쪽 끝으로 올라타 객차 안을 달려가면서 모두 내리라고 소리쳤습니다. 증인들이 내리자, 우리는 다음날 다른 헛간에서 대회를 열 마련을 하였습니다. 따라서 KGB의 대대적인 증인 체포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 대회가 있은 지 두 달 후에 대규모로 체포하는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1950년 9월 22일에 경찰에 연행되어 심문을 받았으며, 에스토니아의 전파 활동을 감독하는 위원회에서 일하던 다른 세 사람도 같은 일을 당하였습니다. 우리는 탈린 시 파가리 가에 있는 KGB 교도소에 8개월간 구금되어 있었습니다. 그 후, 우리는 칼다 가에 있는 일반 교도소로 이감되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 3개월간 감금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하실에 감금되어 있었던 KGB 교도소에 비하면, 발트 해에 있는 이 교도소는 마치 휴양지와도 같았습니다.
시베리아에서의 힘든 생활
얼마 안 있어, 나는 하리 에니카, 알렉산데르 헤름, 알베르트 코세, 레온하르드 크리비와 함께 10년 형을 선고받아 먼 곳에 있는 시베리아의 노릴스크 수용소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여름에는 2개월간 해가 지지 않으며, 겨울에는 2개월간 지평선 위로 해가 뜨지 않습니다.
1951년 8월에, 우리는 탈린에서 노릴스크까지 가야 할 노정의 첫 구간을 기차를 타고 출발하였습니다. 우리는 프스코프, 상트페테르부르크(이전의 레닌그라드), 페름, 예카테린부르크(이전의 스베르드로프스크), 노보시비르스크를 경유하여 예니세이 강가의 크라스노야르스크까지 약 6000킬로미터를 여행하였습니다. 마침내 10월 초에, 우리는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화물선을 타고 북쪽으로 1600킬로미터 이상 실려 갔습니다. 2주 후에 우리는 북극권 훨씬 위쪽에 있는 두딩카 읍에 도착하였습니다. 두딩카에서 다시 기차로 갈아 타고 노릴스크까지 가는 다음 구간 120킬로미터를 갔습니다. 노릴스크 역에서부터는 읍 외곽에 있는 강제 노동 수용소까지 마지막 15킬로미터를 많은 눈 속을 걸어서 갔습니다.
화물선을 타고 올 때 겨울 옷을 도둑맞았기 때문에, 나는 여름용 웃옷과 모자와 샌들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탈린에서 시작한 여러 주에 걸친 여행으로 쇠약해져 있었고, 빈약한 일일 배급 식량마저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부 재소자들은 쓰러지기까지 하였습니다. 우리는 말이 올 때까지 그들을 도와 주었고, 말이 도착하자 말이 끄는 썰매에 그들을 태웠습니다.
수용소에 도착하자, 등록을 하고 목욕실에서 씻은 후에 하루치 식량을 배급받았습니다. 막사가 따뜻해서 나는 곧 깊은 잠에 빠져 들었습니다. 그런데 귀에 생긴 염증으로 한밤중에 심한 통증을 느껴 깨어났습니다. 다음날 아침 치료를 받고 노동을 면제받았습니다. 하지만 수용소 관리들은 내가 노동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화가 나서 나를 구타하였습니다. 나는 한 달간 독방에 감금되었습니다. 그들의 표현대로 하자면, 내가 “수용소의 평화를 깨뜨렸기” 때문입니다. 감사하게도, 부속 진료소에서 치료해 주는 일은 계속되었으며, 독방에 감금되어 있는 기간은 건강을 회복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수용소에서 보낸 첫 겨울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니켈 광산의 노천갱에서 하는 작업으로 기진맥진해졌으며, 우리가 받은 얼마 안 되는 식량도 형편없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괴혈병 증상을 보이자, 우리는 병을 완화시키기 위한 조처로 비타민 C 주사를 맞았습니다. 그런데 기쁘게도, 우리는 수용소에서 많은 동료 증인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몰도바와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에서 온 증인들이었습니다.
수용소 생활의 변화
1952년 봄에, 재소자들은 적은 급료를 받기 시작하였으며, 덕분에 우리는 식품을 사서 식사량을 늘릴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일부 증인들에게는 식품 상자가 전달되기 시작하였는데, 위장되어 있는 그 상자 밑바닥에는 성서 출판물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몰도바에서 온 한 증인이 한 번은 라드 기름이 들어 있는 깡통을 하나 받았습니다. 기름을 다 먹자 돼지의 위의 내막이 나타났습니다. 그 속에는 「파수대」 세 개호가 들어 있었습니다!
1953년 3월 5일에 스탈린이 사망하자, 수용소 생활에 급격한 변화가 생겼습니다. 우선, 재소자들이 석방을 요구하면서 파업과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가 파견되었습니다. 노릴스크에서는 폭동이 일어나는 바람에 120명의 재소자가 죽임을 당하였지만, 증인들은 폭동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임을 당하거나 부상을 당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1953년 여름에는, 니켈 광산의 노동이 두 주 동안 정체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 후에는 수용소 생활이 더 쉬워졌습니다. 일부 재소자들은 석방되었고, 형기가 줄어든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충실한 증인
수용소에 소동이 많았던 이 시기가 끝나자, 나는 이르쿠츠크 지방의 타이셰트 시 근처에 있는 남쪽의 수용소로 이송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내게 처음으로 성서 연구를 해 주었던 아르투르 인두스를 만났습니다. 그는 수용소에서 의사로 일하기를 거부하고, 대신 더 고된 육체 노동을 받아들이는 쪽을 택하였습니다. 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정말로 아픈 재소자들은 강제로 노동을 하는데, 책임 있는 지위를 맡은 건강한 재소자들에게 병가를 내주는 것이 양심에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인두스 형제는 그 당시 쇠약해져서 병든 상태였습니다. 이전에 고된 육체 노동을 많이 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겪은 고통이 마음을 영적으로 정련시켜 주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3주가량 함께 지냈습니다. 그후 그는 수용소 병원에 들어가게 되었고 1954년 1월에 사망하였습니다. 북극권 아래쪽에 끝없이 펼쳐져 있는 삼림 어딘가에 그의 이름 없는 무덤이 있습니다. 충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사망한 그는 부활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석방되어 집으로 가다
1956년에 소련의 최고 소비에트 회의 간부회에 속한 한 위원회가 우리 수용소로 파견되어 재소자들에 관한 서류를 검토하였습니다. 내가 그 위원회 앞에 불려갔을 때, 위원회 책임자인 장군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석방되면 무슨 일을 할 것입니까?”
“그때가 돼 봐야 알겠지요” 하고 나는 대답하였습니다.
그 방에서 나가 있다가 다시 불려 들어갔을 때 그 장군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소련의 최악의 적이오. 이데올로기의 적이지.” 하지만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석방하겠소. 하지만 당신을 감시할 것이오.” 나는 1956년 7월 26일에 석방되었습니다.
나는 이틀 동안, 타이셰트 근처에 있는 마을인 수예티카에 살고 있는 우크라이나 증인들을 방문했는데, 그들은 1951년에 그곳으로 유배되었습니다. 그리고 톰스크 지방에 나흘간 머물렀는데, 어머니가 그 근처로 유배당해 있었습니다. 나는 기차역에서 20킬로미터를 걸어서 그리고례프카 마을로 갔습니다. 그곳에 가 보니, 생활 환경이 우리 대부분이 수용소에서 살 때보다 훨씬 더 열악하였습니다! 누나도 카자흐스탄에 있는 수용소에서 석방되어 몇 달 전에 이곳에 와 어머니와 함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권을 압수당했기 때문에 그때까지도 에스토니아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에스토니아에서 압력을 받다
이윽고 나는 에스토니아에 있는 집으로 돌아와 곧바로 부모가 운영하던 농장으로 가 보았습니다. 시베리아에서 듣던 소문대로, 정부는 우리 건물을 모두 파괴해 놓았습니다! 나는 며칠 후에 소아마비에 걸렸습니다. 장기간 병원에 입원하였고 그후 계속 치료를 받았습니다. 나는 오늘날까지도 한 다리를 접니다.
얼마 안 있어, 나는 1943년 여름에 일했던 회사인 레트세 토탄 회사에 취직하였습니다. 그 회사를 통해 아파트를 한 채 얻어, 1956년 12월에 어머니와 누나가 유배 생활에서 돌아오자 우리는 레트세에서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1957년 11월에 나는 엘라 키카스와 결혼하였는데, 그 역시 얼마 전에 시베리아의 수용소에서 돌아왔습니다. 두 달 후에 우리는 타르투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개인 주택에 속한 작은 방을 얻었습니다. 나는 마침내 타르투 지역 소비자 협동 조합의 운전 기사로 취직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시베리아에 있을 때 「파수대」 연구 기사 열 개를 러시아어에서 에스토니아어로 번역한 적이 있었고, 그 기사들을 집으로 가지고 왔었습니다. 후에, 우리는 「낙원을 잃은 때부터 낙원을 찾을 때까지」라는 책을 받았는데, 우리는 그 책도 에스토니아어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타자를 쳐서 그 책의 사본을 여러 부 만들었습니다. 그 사이에도 KGB는 감시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추적 방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냥꾼에게 쫓기는 동물처럼 항상 살피며 조심하였습니다.
KGB의 목표
1960년대 초에, KGB는 증인 비방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우리 부부가 주된 목표였습니다. 신문들은 비방 기사들을 싣기 시작하였고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도 우리를 헐뜯었습니다. KGB는 내가 다니는 직장에서 두 차례나 공개 집회를 열었습니다. 또한 탈린에 있는 에스토니아 극장에서는 전문 배우들이 나를 풍자하는 희극을 상연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한 상황은 다윗이 한 다음과 같은 말을 생각나게 해 주었습니다. “성문에 앉은 자가 나를 말하며 취한 무리가 나를 가져 노래하나이다.”—시 69:12.
우리의 명예를 손상시키려는 이러한 노력은 1965년까지 계속되었는데, 그 해에 타르투에 있는 근로자 공중 보건 빌딩에서 마지막 모임이 열렸습니다. 우리 부부는 그 모임에 참석하였는데, 청중은 만원을 이루었고 KGB 요원들도 와 있었습니다. 여러 차례 아내가 질문을 받았을 때 청중은 응원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분명히 청중은 우리 편이었습니다. KGB 요원들은 그러한 결과로 인해 실망과 분노를 느꼈습니다.
영적 굶주림이 충족되다
공산주의자들은 우리의 출판물이 배포되는 것을 중단시키려고 하였지만, 1965년경 이후로 우리는 우리의 그리스도인 형제들에게 출판물을 비교적 충분히 공급해 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장소에서 비밀리에 번역하고 인쇄하는 작업을 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활력이 소요되었습니다. 한 KGB 요원은 나의 지하 활동과 출판물 수송 방법을 가리켜 한 번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툼 씨, 당신은 밑바닥이 위장되어 있는 여행 가방 같소.”
물론, 우리는 집회도 비밀리에 작은 집단으로 가져야 하였습니다. 그리고 전파하는 일도 비공식으로 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자기들의 집이 어느 때에 수색당해도 문제가 없도록 대비해 놓아야 하였습니다. 따라서 워치 타워 협회 출판물을 매우 주의 깊이 숨겨 놓아야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성서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발견되었고, 그들은 왕국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1980년대에 소련 수상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개혁을 시작했을 때, 우리는 하느님을 섬기는 자유를 좀더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1991년에 소련은 붕괴되었고, 여호와의 증인은 법적 인가를 얻었습니다. 현재 타르투에는 회중이 네 개 있고, 최근에는 자체 왕국회관 건물을 건축하는 일이 완공되었습니다. 에스토니아에는 봉사의 직무에 참여하는 증인이, 50여 년 전에 내가 전파하는 일을 시작했을 때는 대략 40명에서 50명이었던 것에 비해, 지금은 3800명이 넘습니다.
만족스러운 그리스도인 생활
나는 내가 여호와를 섬기는 입장을 취한 것이 올바른 결정이었는지를 의심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깊은 만족감에 가득 찬 마음으로 돌이켜 볼 때, 여호와의 조직이 계속 활기차게 전진하고 있고 여호와를 섬기기를 원하는 사람이 점점 더 많이 나오고 있는 것을 보게 되어 행복합니다.
우리 부부가 그 여러 해 동안 여호와의 사랑과 보호 덕분에 잘 견딜 수 있었던 것에 대해 나는 여호와께 깊은 감사를 느낍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의로운 제도가 매우 가까이 와 있음을 늘 생각함으로써 영적인 힘을 얻어 왔습니다. 여호와를 숭배하는 사람들의 수가 놀랍게 증가하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참으로 우리가 겪은 고난이 헛되지 않았음을 확신하게 됩니다.—히브리 6:10; 베드로 둘째 3:11, 12.
[12, 13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탈린에서 악명 높은 노릴스크 수용소까지 가는 두 달간의 노정을 나타내는 지도
탈린
프스코프
상트페테르부르크
페름
예카테린부르크
노보시비르스크
크라스노야르스크
두딩카
노릴스크
북극권
[자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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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면 삽화]
아르투르 인두스, 불굴의 그리스도인 순교자
[14면 삽화]
시베리아의 재소자들, 1956년. 나는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에 있다
[15면 삽화]
우리가 종종 심문을 받곤 했던 구KGB 본부 앞에서 아내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