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고통 가운데서 견디게 하는 도움
1, 2. 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고통을 피할 수 없읍니까?
우리 생활 가운데 직면하는 문제들에 대해 도움이 절실히 필요할 때가 있읍니다. 미처 숨돌릴 겨를도 없이 비극이 잇따라 일어날 때 쉽게 절망에 빠질 수 있읍니다. 그것은 너무나 큰 부담같이 보일 수 있읍니다. 그러한 때에 도움을 받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입니다!
2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의 제자라 할지라도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고통에서 면제되어 있지 않습니다. 인류가 공통적으로 처한 입장에는 병, 사고, 홍수, 지진, 폭풍, 범죄, 불공평 및 압제가 포함되어 있읍니다. 우리는 최고 주권자께서 자기의 능력을 사용하여 유전적 형질과 환경을 조종함으로써 그분의 종들인 우리가 남달리 그러한 일들로 인한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해 주실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로 인한 해로운 영향을 제거하시는 것은 아직 미래사입니다. 만일 그분이 현재 자기의 백성을 특별히 보호해 주신다면, 틀림없이 허다한 사람들이, 사랑과 믿음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이기적인 이유로, 그분을 섬기려고 모여들 것입니다.—요한 6:10-15, 26, 27 비교.
3, 4. 참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이 당하지 않는 어떠한 고통을 당할 수 있으며 따라서 어떠한 질문이 생길 수 있읍니까?
3 우리는 불유쾌한 상태로 인한 고난을 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라는 신분 때문에 박해를 받을 수 있읍니다. 그 박해는 친척이나, 이웃 친지 혹은 정부 권위로 부터 올 수 있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씀하셨읍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마태 24:9) 제반 사실은 그러한 일이 바로 20세기에 발생했음을 증명합니다.
4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왜 자기의 종들이 여러 가지 시련을 당하도록 허락하십니까? 그들의 생활 방식이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를 보장해 주지 못하고 그러한 생활을 추구할 때 그들이 “미움”을 받게 될 수 있는데, 그러한 생활이 어떻게 참으로 가장 가치있는 생활이 될 수 있는가 의아하게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고통을 보상하는, 아니, 보상하고도 남을 만한 유익이 있읍니까? 실제로 경우에 따라 시련을 피하는 것보다 견디는 것이 더 행복할 수 있읍니까? 혹독한 압력하에서 성공적으로 견디는 데 무엇이 도움이 될 것입니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에게 큰 도움과 힘이 될 수 있읍니다.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5. 우리는 고통의 근원에 대해 무엇을 인정할 필요가 있읍니까?
5 고통의 근원이 우리의 천적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을 결코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분이 세상에 죄를 이끌어 들이지 않으셨읍니다. 하나님의 영자 하나가 창조주께 반역하고, 스스로 지존하신 분의 반항자 즉 ‘사단’이 되었읍니다. ‘사단’의 영향으로 첫 인간 부부 ‘아담’과 ‘하와’는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법을 범하였으며, 죽음의 심판을 받게 되었읍니다. (창세 3:1-19; 요한 8:44) ‘아담’이 자기의 완전성을 그르쳤기 때문에, 그의 모든 후손은 죄 가운데 태어나고, 여러 가지 병에 걸리고 늙고 죽게 되었읍니다. (로마 5:12) 우리 모두는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우리가 원하는 수준, 마땅히 도달해야 할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읍니다. 우리는 우리의 언행으로써 뜻하지 않게 다른 사람들을 해칠 수 있으며, 그들에게 고통을 더해 주는 경우가 있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불완전성으로 인한 고난이나 우리 동료 인간들의 불완전성으로 인한 고난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려서는 안된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읍니다. 만일 인간이 그분의 법을 순종했다면, 여러 가지 병과 노쇠 현상 그리고 기타 여러 가지 고통의 원인이 결코 존재하게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6. 여호와께서는 인간이 인간에게 잔학한 행위를 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느끼십니까?
6 또한 우리의 천적 아버지께서는 인간이 인간에게 비인도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승인하지 않으십니다. 성서는 이렇게 알려 줍니다. “세상에 모든 갇힌 자를 발로 밟는 것과 지극히 높으신 자의 얼굴 앞에서 사람의 재판을 굽게 하는 것과 사람의 송사를 억울케 하는 것은 다 주의 기쁘게 보시는 것이 아니로다.” (예레미야 애가 3:34-36)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동료 인간을 학대하는 사람들은 그분 앞에서 심문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로마 12:19) 따라서, 우리는 인간이 고의적으로 그리고 반역적으로 하나님의 법을 무시할 때 그 결과로 오는 고통 때문에 우리의 천적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7.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통을 초래하는 환경의 발전을 허락해 오셨으므로, 우리는 그분이 그렇게 하신 이유에 대해 어떠한 결론을 내려야 합니까?
7 물론, 여호와 하나님께는 ‘사단’과 악귀들과 악한 인간들 및 인간의 죄 있는 상태로 인한 온갖 고통스러운 환경을 막으실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자기의 종들에게도 고통스러운 환경이 임하도록 허락하시는 데는 분명히 좋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자비의 그릇들”을 위하여
8.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져오는 자들에 대해 즉각적으로 행동하지 않으시는 이유에 대해 로마서 9:14-24에서는 어떠한 이유를 제시합니까?
8 성경은 다른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가져오는 자들에 대해 즉각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는 하나님의 목적이 의로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궁극적인 유익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해 줍니다. 그리스도의 사도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기술하였읍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하겠읍니까? 하나님이 불공평하십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가 자비를 베풀려는 자에게 자비를 베풀 것이요 불쌍히 여기려는 자를 불쌍히 여길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읍니다. 그것은 사람의 의지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자비로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말씀하신 성경 귀절 가운데 ‘내가 너를 일으켜 세운 것은 네게 내 힘을 드러내고 온 땅에 내 이름이 알려지게 하려는 것이다’한 말씀이 있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려는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푸시고 완악하게 하시려는 사람에게는 완악하게 하십니다.
“그러면 당신은 내게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사람의 잘못을 책망하시는가? 누가 능히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있겠는가?’ 하고 반문할 것입니다. 오, 인간이여! 그대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말대꾸를 하는 것입니까? 만들어진 것이 만든 이에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소?’ 하고 말할 수 있겠읍니까? 토기장이가 한 흙덩이를 가지고 하나는 귀하게 쓸 그릇을 만들고 하나는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들어 낼 권리가 없겠읍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노를 나타내시고 그의 권능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시면서도 그 멸망받게 되어 있는 진노의 그릇들에 대하여 꾸준히 참아주시고 영광을 받게 미리 준비하신 자비의 그릇들에 대하여 자기의 풍성하신 영광을 알게 하시려 하셨다면 어떻다는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유대’ 사람들 가운데서 뿐 아니라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도 불러 내셔서 자비의 그릇들을 삼으셨읍니다.”—로마 9:14-24, 새번역.
9. ‘바로’는 자신이 ‘진노의 그릇’임을 어떻게 드러냈읍니까?
9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생활 가운데 어떠한 일이 유발 혹은 발생하도록 허락하시는가는 그 사람들이 어떠한 “그릇들”인지를 드러나게 할 수 있읍니다. ‘모세’와 ‘아론’을 통해 ‘이스라엘’인 노예들을 자유민으로 석방하라는 여호와의 통고를 받은 ‘바로’는 지존자에 대해 계속 완악한 태도를 보였읍니다. 재앙이 ‘애굽’인들에게 한 가지씩 임함에 따라, 이 ‘바로’는 더욱 완고하게 ‘이스라엘’인들이 자유민으로 ‘애굽’을 떠나게 하기를 거절하였읍니다. 그리하여 그는 최고 주권자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반역과 반항으로 멸망을 받기에 합당한 ‘진노의 그릇’임을 스스로 드러냈읍니다.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이 받은 잔인하고도 부당한 처우는 그들이 자비 혹은 동정을 받기에 합당하다는 것을 충분히 입증하였읍니다.
10. ‘바로’가 한 동안 반항적인 길로 가도록 허락하심으로써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빛내셨읍니까?
10 또한, ‘바로’가 계속 완고하게 반항하도록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데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지적한 사실에 유의해야 합니다. 만일 이 거만한 통치자가 즉각 멸망되었더라면, ‘애굽’인들의 많은 신들과 마술사들을 그처럼 굴욕을 당하게 하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그토록 광범위하고 다양하게 알려질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와 그의 군대가 홍해에서 멸망된 사건으로 절정을 이룬 열 가지 재앙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참으로 인상적인 전시였기 때문에 그 후 여러 해 동안 주위 나라들은 그 일을 화제에 올리고 있었읍니다. 그리하여 여호와라는 이름이 온 땅에 선포되었고, 그 이름에 영광과 영예가 돌려졌으며, 정직한 사람들은 그분의 최고의 지위를 인정하기에 이르렀읍니다.—여호수아 2:10, 11; 사무엘 상 4:8.
11. ‘이스라엘’인들은 ‘바로’를 상대한 그들의 경험으로부터 어떠한 유익을 얻었읍니까?
11 확실히, “자비의 그릇들”인 ‘이스라엘’인들은 지존자께서 행하신 일로부터 유익을 얻었읍니다. 그분이 압제를 허락하시고 웅대한 능력의 과시로 그 압제를 중지시키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인들은 그분을 더 잘 알게 되었으며, 다른 방법으로는 알 수 없었을 그분의 위대성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읍니다. ‘애굽’에서의 ‘이스라엘’ 인들의 경험은 고통스럽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 능력을 믿는 것과 하나님께 대한 건전한 두려움을 갖는 것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행복과, 안전, 평화 및 건강으로 인도하는 생활 방식을 계속 추구하기를 원한다면 이것은 필수적이었읍니다.—신명 6:1-24; 28:1-68.
12. ‘욥’의 경우에 예시된 바와 같이, 여호와께서 고통을 허락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읍니까?
12 그 때에 사람들의 마음의 경향이 분명히 나타난 것과 같이, 하나님의 허락에 의해 우리에게 임할지 모르는 시험과 시련으로 말미암아 그분께 대한 우리의 봉사의 동기가 올바른지의 여부가 드러날 수 있읍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의 동기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대적 ‘사단’의 주장이었읍니다. 충실한 ‘욥’에 대해 그 대적은 이렇게 선언하였읍니다.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찌라.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욥 2:4, 5) 우리가 고통 가운데서 충실히 인내하는 것은 ‘사단’의 주장이 거짓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 참여하는 것이며, 충실한 종들을 신뢰하시는 우리의 천적 아버지의 명예로운 이름을 입증하는 데 가담하는 것이 됩니다. 만일 여호와께서 ‘사단’이 자기의 대행자들을 통해 참 그리스도인들을 잔인하게 박해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거나 불구가 되게 한다면 어떠할 것입니까? 만일 어떤 사람들이 성적 폭행을 당하거나 기타 사악한 방법으로 학대를 받는다면 어떠할 것입니까? 그러한 일들은 충격적인 일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천적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에 온전히 시정하실 수 없는 것은 없읍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는 그분은 시련이 그러한 극한점까지 이르는 것을 허락하실 수 있읍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죽기까지 충실함을 보임으로써, 자기들의 헌신의 진실성을 의문의 여지없이 보일 기회를 가지게 됩니다.
13. 베드로 전서 1:5-7의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당할 수 있는 고통에 대해 무엇을 밝혀 줍니까?
13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가 당하는 시련이 천연적인 원인으로 인한 것이든 박해로 인한 것이든 그것은 우리를 개인적으로 향상시켜 줄 수 있읍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점에 주의를 이끌었읍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음으로써 그들의 최종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한 후에,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베드로 전 1:6, 7.
14. 그리스도인들은 시련으로 “근심”할 때 왜 기뻐할 수 있읍니까?
14 ‘베드로’가 인정했듯이, 우리가 당하는 고통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시련 때문에 실제로 “근심”하거나 고통을 느낄 수 있읍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즐거워할 수 있읍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선, 고통 가운데서 성공적으로 견딤으로써 얻게 되는 영적 유익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기쁨이 있읍니다. 그것이 어떠한 영적 유익입니까?
고통은 믿음을 연단시켜 줄 수 있다
15. 시련은 믿음에 어떠한 영향을 줄 수 있읍니까?
15 사도 ‘베드로’는 시련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주는 영향을 불로 금을 연단하는 것에 비유하였읍니다. 연단 과정에 의해 불순물이 제거되고, 순수한 금이 남습니다. 금이 고귀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연단 과정은 가치 있읍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말한 바와 같이 불에 의해 연단된 금도 없어질 수 있읍니다. 그것은 닳아서 없어질 수 있으며 다른 수단에 의해 파괴될 수 있읍니다. 그러나 시련받은 혹은 시험받은 믿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파괴될 수 없읍니다.
16. 우리가 진정한 믿음을 가지는 것은 왜 매우 유익합니까?
16 우리가 하나님의 승인을 받고자 한다면, 우리에게는 그러한 믿음이 꼭 있어야 합니다. 성서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알려 줍니다. (히브리 11:6) 참으로, 시험하에서 진정한 것으로 증명되는 믿음은 연단된 금의 가치를 훨씬 초월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장래는 그러한 믿음에 달려 있읍니다.
17. 시련이 믿음에 주는 영향에 관하여 어떠한 질문이 생길 수 있읍니까?
17 그러나 어떻게 시련은 믿음을 연단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수 있읍니까? 그 일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일어날 수 있읍니다.
18. 시련하에서 어떻게 믿음이 드러날 수 있으며, 이것은 어떻게 우리를 강화할 수 있읍니까?
18 만일 우리의 믿음이 강하다면, 그 믿음은 고난의 때에 우리를 위로하고 지지해 줄 것입니다. 다음에, 한 가지 시련을 성공적으로 통과하면 우리는 더 큰 시련을 견딜 수 있을 만큼 강화됩니다. 그 경험은 믿음이 우리를 위하여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입증해 준 증거가 될 것입니다.
19. 특정한 시련은 믿음의 약함에 대해 무엇을 들어내 줄 수 있으며, 이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읍니까?
19 반면에, 특정한 시련은 성격의 결함, 이를 테면, 교만, 고집, 조급함, 세상적 경향 혹은 안이와 쾌락에 대한 사랑을 드러낼 수 있읍니다. 이러한 경향은 사실 약한 믿음에서 생겨납니다. 어떻게 그러합니까? 그러한 경향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인도와 뜻에 온전히 복종하지 않는 것을 밝혀 주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께서 행복으로 인도하는 것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는 것이 언제나 축복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가장 잘 아신다는 점을 확신하지 않습니다. (히브리 3:12, 13) 시련이 약함을 들어내 줄 때, 그리스도인은 지존자의 승인받은 종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믿음을 강화할 필요성에 깨어있을 수 있읍니다.
20. 시련이 우리의 믿음의 약함을 드러내 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20 그러므로, 특정한 상황이 우리의 믿음의 결함을 나타낸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검토하고 무엇을 시정해야 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읍니다. 이렇게 자문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나의 믿음은 왜 약한가?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연구와 묵상을 소홀히 하고 있는가? 나는 믿음의 표현에 있어서 강화되기 위하여 동료 신자들과 모이는 기회를 온전히 이용하고 있는가? 나는 모든 염려와 걱정을 여호와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나 자신에게 더 의지하는 경향이 있는가? 나는 매일 참으로 기도를, 마음에서 우러나는 기도를 하고 있는가?’ 개선이 필요한 분야가 확정되면, 우리는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 우리의 정기적인 생활에서 필요한 시정을 하기 위해 근면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21. 우리의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21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고 시련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실 것을 참을성있게 신뢰함으로써 이러한 시련을 통해 그분의 더 나은 종이 될 수 있읍니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의 믿음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의 믿음을 “칭찬”하고, 추천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그분은 우리에게 풍부한 상을 주실 것이며, 그리하여 우리에게 “영광”을 부여하실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그분은 우리를 자기의 제자로서 “존귀”하게 하실 것입니다. (마태 10:32; 누가 12:8; 18:8 비교.) 이것은 우리가 장차 끝없는 행복한 생활을 하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혹심한 고통을 당하는 동안 믿음이 약화되지 않도록 어떻게 할 수 있읍니까?
강한 압력에 대처하는 방법
22. 시련의 길이에 대한 어떠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인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읍니까?
22 우리가 어려운 시련을 성공적으로 인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한 가지 일은 시련이 일시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금을 연단하는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읍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당하는 고통도 무한히 계속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병과 울부짖음과 고통이 없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의 마음에 새겨 둔다면, 현 사물의 제도 내에서의 최악의 고통도 “일시적인 가벼운” 것에 불과하다고 느껴질 수 있읍니다. (고린도 후 4:17, 새번역)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때를 바라볼 것입니다. (이사야 65:17) 그러한 혹독한 경험이 그 때에는 고통스러운 기억조차 되지 않을 것임을 알 때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23. 고통은 왜 일반적으로 선한 행실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 아닙니까?
23 또한, 우리가 사람들의 손에 큰 고통을 당하는 일이 일반적으로 매일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선한 행실을 유지하는 것은 실제로 어떠한 사람도 우리를 해치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됩니다.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정부 권위의 임무이므로, 권위자들은 여호와의 종들이 법을 잘 준수하는 사람들이라고 칭찬할 경우도 있읍니다. 현대에도 반대자들이 하나님의 충실한 예언자 ‘다니엘’에 대해 이렇게 인정한 바와 같이 하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이 ‘다니엘’은 그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그 틈을 얻지 못하면 그를 고소할 수 없으리라.” 그렇습니다. ‘다니엘’은 “충성되어 아무 그릇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었읍니다. (다니엘 6:4, 5) 선한 행실 자체가 그리스도인이 적의의 대상이 되는 이유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한 것 같습니다.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베드로 전 3:13.
24. 인간들은 왜 우리에게 영구적인 해를 입힐 수 없읍니까?
24 그러나 그 사도의 질문의 진정한 의도는 이러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고결한 그리스도인에게 누가 진정한 해를 입힐 수 있는가?’ 아무도 우리에게 영속적인 해를 입힐 수 없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몸은 죽일지라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과 몸을 모두 죽여 ‘게헨나’에 넣을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마태 10:28, 새번역)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죽이기까지는 할 수 있으나, 산 영혼으로서의 우리의 권리를 빼앗아 갈 수는 없읍니다. 지존하신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통해 충실한 종들을 생명으로 회복하실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산 존재자로서의 우리의 생명의 권리를 영원히 멸하고 우리를 부활의 희망이 없는 끝없는 죽음에 처하실 수 있는 분은 여호와 뿐입니다.
25, 26. (ㄱ) 의를 위하여 고통을 받을 때 왜 우리는 기뻐할 수 있읍니까? (ㄴ) 왜 우리는 우리를 박해하는 자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까?
25 이러한 진리 때문에,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 형제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읍니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라.]”—베드로 전 3:14.
26 만일 우리가 “의를 위하여” 고통을 받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있음을 기뻐할 수 있읍니다. 우리는 올바른 이유로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지존자를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바를 행하기 때문에 우리는 깊은 내적 만족과 평화를 얻을 수 있읍니다. 그러나, 사도가 지적한 바와 같이, 성공적으로 그렇게 하는 데는 두려움에 굴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사도는 박해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고통을 가함으로써 조장할 수 있는 두려움을 지적하고 있는 것같습니다. 혹은, 박해자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일 수도 있읍니다. 예를 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죽은 자들을 부활시키실 것이라는 믿음이 없기 때문에 참 그리스도인들을 반대하는 자들은 일찍 죽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히브리 2:14, 15) 그러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는 그러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해방되었고 우리의 천적 아버지께서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을 알기 때문에 불신자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박해하는 자들에 대한 분노를 터뜨리는 등 “소동”을 부릴 이유가 없읍니다.
27, 28. 정부 관리들 앞에 이끌려 가서 거칠고 얕잡는 식으로 심문을 받을 때 베드로 전서 3:15의 충고가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읍니까?
27 만일 우리가 정부 권위자들 앞에 이끌려 가서 거칠고 얕잡는 식으로 심문을 받는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우리는 결코 같은 방식으로 응수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후원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담대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호전적이 되거나 거만해서는 안됩니다. (사도 4:5-20 비교.) 사도의 충고는 이러합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 (베드로 전 3:15) 만일 우리가 이러한 충고를 무시하고 모욕과 불경을 표시한다면, 그 때부터는 의를 위하여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정부 권위는 우리를 무례한 반항으로 처벌할 당연한 이유가 있다고 느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의 권리가 남용된다고 느낄 때에는 분노와 불쾌감을 터뜨립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28 사도가 충고했듯이, 그러한 상황하에서 우리는 우리 주를 염두에 두고 그 본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최고의 경의를 표하고 그분을 우리 마음 속에 거룩한 분으로 모셔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제자들이며, 우리는 마치 주 앞에 서 있는 것같은 태도로, 심문하는 권위자에게 말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입장에 대한 이유를 조용하고 차분한 태도로 존경심을 가지고 설명해야 합니다.
반대자들에게 주는 선한 영향
29. 고통 가운데서 충실히 인내하는 것은 반대자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줄 수 있읍니까?
29 고통 가운데서 충실히 인내하는 것은 또한 반대자들을 잠잠케 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읍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것을 깨끗한 양심을 유지하는 필요한 자극제라고 설명하였읍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 전 3:16) 하나님의 종들의 참을성 있고 불평없는 태도를 보고 반대자들은 자기들이 그들을 중상한 데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수 있읍니다. 우리가 반대자들을 친절히 대할 때 특히 그러합니다.—로마 12:19-21.
30. (ㄱ) 악을 행하고 고통을 받는다면 왜 유익이 없읍니까? (ㄴ) 의를 위하여 고통을 받는 것과 관련하여 ‘베드로’는 왜 “하나님의 뜻일찐대”라고 말하였읍니까?
30 의를 위하여 고난을 충실히 인내하는 데서 그러한 유익이 올 수 있다는 사실은 ‘베드로’의 다음 말을 강력히 지지해 줍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찐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베드로 전 3:17) 도적질이나 착취, 탈세로 인하여 혹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데 대한 그릇된 견해나 잘못된 열성으로 권위를 무시했기 때문에 받는 고통이라면 무슨 가치가 있겠읍니까? 그러한 이유로 처벌을 받는다면, 자신과 동료 신자들에게 모독이 될 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부당한 학대를 받으면서도 견디는 것을 보는 다른 사람들은, 참 숭배자들을 받들어 주는 힘으로 감명을 받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진리와 그 옹호자들에 대해 욕하는 입을 다물게 될 수 있읍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임하는 고통이 하나님의 허락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베드로’는 사실을 잘못 설명하지 않았읍니다. 그는 정확하게도 “하나님의 뜻일찐대”라고 말하였읍니다.
예수의 경우에 나타난 보람있는 행로
31.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통 가운데서 충실히 인내하신 것이 어떻게 유익하였읍니까?
31 고통 가운데서도 충실히 인내하는 그리스도인은 웅대한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에 잘 입증되었읍니다. 그분은 죄가 없으셨으므로 처벌을 받을 이유가 없었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고통을 당하시고, 마침내 형주에서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놀라운 유익이 있게 되었고 풍부한 상을 받게 되었읍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기술하였읍니다.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명 뿐이니 겨우 여덟명이라.”—베드로 전 3:18-20.
32.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고통 가운데서 인내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어떠한 유익이 있게 되었읍니까?
32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인간 희생으로서 자기의 생명을 바칠 수 있었던 것은 고통 가운데서 흠없는 성실을 유지하셨기 때문이었읍니다. 그러므로,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이 ‘하나님께 인도되어’ 지존자와 화해하고 영원한 생명의 전망을 가질 수 있는 길이 열렸읍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기 때문에 우리가 큰 유익을 얻고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분의 본을 따라 의를 위하여 고통을 당해야 하지 않겠읍니까?
33.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이유로 죽음의 위협에 직면할 때 그분의 부활은 우리에게 무엇에 대한 보증이 됩니까?
33 더우기, 그분의 경우에서와 같이, 우리가 충실히 인내할 때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다는 즉 영의 생명으로 부활되었다는 사실은 그분의 제자들이 생명으로 회복될 것이라는 불변의 보증입니다.—고린도 전 15:12-22.
3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충실하셨기 때문에 악한 영들과 관련하여 어떠한 일을 하실 수 있었읍니까?
34 하나님의 아들은, 충실히 인내하시고 승리자가 되셨기 때문에, “옥에 있는 영들”에게 영자로서 심판의 소식을 선포하실 수 있었읍니다. 이들 영들의 불순종이 ‘노아’의 때와 결부되었으므로, 그 영들은 하늘에 있는 그들의 원래의 처소를 떠나 여자들과 동거하면서 남편 행세를 한 천사들 곧 하나님의 아들들임이 분명합니다. (창세 6:1-4) 그 벌로서 그들은 충실한 천사들과 함께 있던 그들의 원래의 처소에서 영원히 축출되어 모종의 제한을 받게 되었기 때문에 “옥에 있는 영들”이라고 불리웁니다. ‘유다’의 말은 이들 타락한 천사들에게 전할 수 있는 소식은 단죄적 심판의 소식 뿐이라는 것을 확증합니다.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하나님이] 흑암에 가두셨[느니라.]” (유다 6) 예수께서 생명으로 회복되고 타락한 천사들에게 그러한 단죄적 심판의 소식을 전파 혹은 선포할 위치에 있게 된 것은 그분이 죽기까지 충실히 인내하셨기 때문이었읍니다.
35. 예수께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멸망을 전파하신 사실이 우리가 충실히 인내하도록 격려가 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5 이처럼 악한 영들에게 멸망이 전파된 사실은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 충실히 인내하도록 격려가 되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러한 악령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인류를 격동시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대항하게 하는 주범들이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알려 줍니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고린도 후 4:4) “우리[그리스도인들]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에베소 6:12; 또한 계시 16:13, 14 참조.) 그러므로, 부활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악령들에게 심판의 소식을 전파하실 수 있었던 사실은 마침내 그들의 증오 활동이 전멸될 것이라는 보증이 됩니다. (마가 1:23, 24 비교.)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구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36. (ㄱ)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충실성에 대해 어떻게 상을 받으셨읍니까? (ㄴ) 예수의 지위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위해 고통받는 것에 대해 어떻게 느껴야 합니까?
3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승인받은 종으로서 죽은 자로부터 일으킴을 받으셨고 그리하여 불순종하는 천사들에게 심판의 소식을 전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크게 높임을 받으셨읍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알려 줍니다.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베드로 전 3:22) 이러한 말은 죽은 자로부터 부활되신 후의 예수 자신의 말씀과 일치합니다. “하늘과 땅에서 모든 권세가 내게 주어졌읍니다.” (마태 28:18, 신세) 많은 사람들은 그분보다 훨씬, 훨씬 못한 권세를 가진 인간 통치자들을 위해 기꺼이 고통을 당했고 생명까지 바치기도 하였읍니다. 그들은 이러한 면으로 어떤 왕이나 여왕을 섬기는 것을 큰 영예로 생각하였읍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천적 왕 예수 그리스도께 충성을 바친다는 이유로 고통 당하는 것은 훨씬 더 영예로운 것이 아니겠읍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라
37. 우리는 고통을 당할 때 누구를 본받고자 노력해야 합니까?
37 그러므로 고통 가운데서 항상 하나님의 아들을 귀감으로 바라보십시오. 사도는 이렇게 썼읍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함이라.”—베드로 전 4:1, 2.
38.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적 태도는 어떠하셨읍니까?
38 예수께서는 어떠한 정신 태도를 보이셨읍니까? 그분은 자신에게 쌓여진 신체적 학대와 욕설에 겸손히 순응하셨으며 마침내 형주에서 고통스러운 죽음을 당하셨읍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같은 방법으로 결코 보복하지 않으심으로써 이러한 예언을 성취시키셨읍니다.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도 8:32; 이사야 53:7.
39. 우리가 죄를 그쳤다는 것을 무엇이 증명합니까?
39 지존자의 종들인 우리도 고통 가운데서 참기를 원하며, 반항 정신이나 보복 정신에 굴복하기를 원치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박해자들을 위협하거나 그들에게 가해할 기회를 찾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아직도 죄많은 육체의 정욕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인간들에게 당하는 고통은 어느 것이든지 오직 우리가 이 세상의 이기적인 행로와 길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어야 합니다. (요한 15:19, 25) 이와 같이 우리는 태도와 언행에 있어서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고 있다는 것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기뻐해야 할 이유
40.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통을 당하는 것이 왜 많은 제1세기 신자들에게 이상하게 보였을지 모릅니까?
40 기원 제1세기에, 우상 숭배자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고통을 당하지 않았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누구나 미움을 받았읍니다. 박해를 당하는 것은 이상한 경험이었을 것이며 당황케 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 즉 좋은 소식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임한 축복과 큰 대조를 이루었읍니다. 이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고난에 대한 올바른 견해가 절실히 필요했읍니다. 사도 ‘베드로’의 이러한 말은 그들에게 참으로 위안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베드로 전 4:12-14.
41, 42. (ㄱ) 베드로 전서 4:12-14과 일치하게, 우리는 의를 위하여 받는 고통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읍니까? (ㄴ) 그러한 고통은 무엇을 확증합니까?
41 우리는 우리에게 임할지 모르는 고난에 당혹하거나 놀랄 것이 아니라, 우리 주인께서 나타나실 때에 받을 축복에 참여하기 위한 예비 과정으로 생각할 수 있읍니다. ‘베드로’는 고통을 “불 시험”이라고 불렀읍니다. 금속이 불에 의해 연단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종들이 환난을 통해 연단되고 정화되도록 허락하십니다. 물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지 않으셨읍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죄가 있으므로, 그분은 우리를 정화하는 수단으로 어떤 고통 당하는 것을 허락하실 수 있읍니다. 우리가 당할지 모르는 고난은 우리가 동료 인간을 대하는 데 있어서 좀 더 친절하고, 좀 더 겸손하고, 동정심과 이해심을 보이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읍니다. 또한, 우리 자신이 혹심한 시련을 인내했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가 주는 위안과 격려의 말은 훨씬 더 무게가 있읍니다. 우리의 위로를 받는 사람들은 우리가 그들이 현재 당하는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을 알고 있읍니다.
42 하나님의 아들은 고통을 당하셨으므로, 우리가 경험하는 고난은 우리가 참으로 그분의 제자들이며 그분과 하나가 되어 있다는 것을 확증합니다.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라.]” (요한 15:20) 우리 주인과 같은 이유로 박해를 받고 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면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고 있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충실성으로 인해 그분이 천적 아버지로부터 상을 받은 것과 같이, 고난 가운데서 우리가 참고 충실을 유지한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아들께서 나타나실 때에 승인을 받을 것입니다. 현재의 고통에 대한 모든 원인이 더는 존재하지 않을 새 질서에서 끝없는 생명을 받게 될 때 확실히 우리의 기쁨은 넘쳐 흐를 것입니다.
43. 고통 가운데서 충실히 인내하는 것은 우리 위에 어떠한 영이 임해 있다는 증거이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43 또한 ‘베드로’가 말했듯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즉 그분의 제자라는 신분 때문에 모욕을 참는 것은 기뻐할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모욕을 당하는 혹은 명예 훼손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발산되는 하나님의 영 혹은 존귀한 “영광의 영”이 틀림없이 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 영은 거룩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깨끗한 혹은 순결한 사람들에게만 임할 수 있읍니다.
44. 우리는 어떠한 고통을 피해야 할 것입니까?
44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는 어떠한 고통도 우리의 악행의 원인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라.]”—베드로 전 4:15.
45.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죄를 범하고 고통을 당하면 어떠한 결과가 있읍니까?
45 그리스도인이라 주장하며 동료 인간에 대해 죄가 있는 사람은 처벌을 면할 것을 기대할 수 없읍니다. (사도 25:11 비교.) 그 처벌은 자신에게 뿐 아니라, 그가 연합하고 있는 회중에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에 모독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는 기쁨이 아니라 수치를 얻게 됩니다.
46. (ㄱ) 간섭하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ㄴ) 그리스도인이 간섭을 하다 보면 어떠한 고통을 당할 수 있읍니까?
46 다른 사람의 일에 간섭하면 미움을 받을 수 있읍니다. 간섭을 하게 되는 경위가 ‘베드로’가 사용한 “간섭”이라는 희랍어 단어에 암시되어 있읍니다. 그 말은 문자적으로 “다른 사람의 것을 감독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아마 성경적인 지식을 얻었기 때문에 이제 세상 사람들에게 개인적 생활을 영위할 방법을 가르칠 자격이 있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그는 의상 표준, 자녀 징계, 결혼 및 성문제 해결, 오락, 식이 요법 등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주장할지 모릅니다. 그가 요청을 받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의 개인 문제에 끼어 들어 그들에게 어떤 일을 권고하거나 만류한다면, 그는 그들의 일에 대한 “감독자”가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흔히 반감을 가집니다. 그와 같이 간섭하다 보면, 참견하지 말라는 단호한 말을 듣게 될 수 있읍니다. 그는 사생활 간섭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들로부터 신체적인 폭행을 당할 수도 있읍니다. 자신의 일이 아닌 문제에 끼어드는 사람은 고난을 자초하며 외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와 그 소식을 잘못 대변하게 됩니다. 물론, 회중 내에서도, 간섭하는 사람들은 용납되지 않습니다.—디모데 전 5:13 비교.
47. 그리스도인이 고통 가운데 참는 것은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있읍니까?
47 범법자나 간섭하는 사람으로 공공연히 폭로될 때 당하는 수치와는 대조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당하는 고통은 영예를 가져다 줍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기술하였읍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베드로 전 4:16) 우리의 그리스도인 생활 때문에 우리에게 고난이 임할 때 우리가 참을성있게 불평없이 그 고난을 참으면 지존자께 영광이 돌아갑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것 즉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고귀한 관계, 깨끗한 양심, 영적 복지 및 미래에 대한 확고한 희망이 큰 가치가 있는 보물임을 증명합니다. 우리는 고통을 기꺼이 참으며 필요하다면, 그것을 위하여 죽을 수 있음을 증명하며 이것이 우리가 열렬히 섬기는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합니다. 반면에, 압력에 굴복하고 우리의 믿음을 포기한다면, 그의 이름에 수치가 돌아갈 것입니다. 그것은 관찰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의 무한한 가치를 의심하게 할 것입니다.—에베소 3:13; 고린도 후 6:3-10 비교.
징계 즉 훈련의 한 형태
48. 베드로 전서 4:17-19은 우리가 의를 위하여 고통을 당할 때 도움을 받게 된다는 점을 어떻게 설명합니까?
48 우리가 살펴 본 바와 같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부당한 고통을 막으실 수 있지만, 좋은 이유들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허락하십니다. 한편, 지존자께서는 반드시 그의 종들에게 도움을 베푸십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점을 좀 더 설명하였읍니다.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찌어다.”—베드로 전 4:17-19.
49. (ㄱ) 언제 이후로 “하나님의 집”이 심판을 받아 왔읍니까? (ㄴ) 최종 판결은 무엇에 따라 내려집니까?
49 그리스도인 회중은 “하나님의 집”으로서 기원 33년에 시작되었읍니다. 그 때 이후로, 그 집 성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왔읍니다. 그분의 뜻에 대한 그들의 응답, 그들의 태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임하도록 허락하시는 일들에 대한 그들의 언행은 그분의 최종 판결과 큰 관계가 있읍니다. 때때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시는 고통은 매우 심각할 수 있읍니다. 그러나 박해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유익을 위해 베푸실 수 있는 징계의 한 형태입니다.—히브리 12:4-11; 또한 히브리 4:15, 16을 참조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통이 그분으로 하여금 동정심과 이해심이 있는 대제사장이 되도록 준비시켜 주었음이 지적되어 있음.
50, 51. ‘요셉’과 ‘바울’의 체험은 인간들이 우리를 해하기 위한 행동을 여호와께서 축복으로 바꾸실 수 있음을 어떻게 실증합니까?
50 ‘사단’의 지배하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를 학대함으로써 우리의 믿음을 파괴하고자 시도합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악한 목적을 좌절시키실 수 있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천적 아버지께서는 악을 미워하는 분이시지만, 어떤 선한 결과를 얻기 위하여 우리에게 어떤 해가 미칠 수 있게 하실 수 있읍니다. ‘야곱’의 어린 아들 ‘요셉’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이복형들은 그를 미워하여 그를 노예로 팔았읍니다. 여러 해 동안 ‘요셉’은 부당한 투옥을 당하는 등 많은 고통을 겪었읍니다. 그러나, 그 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환경을 이용하여 ‘야곱’ 일가를 생존하게 하셨읍니다. 이에 대해 ‘요셉’은 그의 이복 형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읍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찌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로 삼으셨나이다.”—창세 45:5-8.
51 이와 동일하게,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감금되었을 때, 이 불리한 환경은 참 숭배의 이익을 도모하는 역할을 하였읍니다. 그는 ‘빌립보’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기술하였읍니다.
“형제들이여, 내가 당하고 있는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기를 바랍니다. 내가 감옥에 갇힌 것이 그리스도를 위함이라는 것을 온 경비 사령부와 그 밖의 모든 사람이 밝히 알게 되었으므로 거의 모든 형제가 내가 갇힌 일 때문에 주 안에서 확신을 얻어 두려움없이 더욱 더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읍니다.”—빌립보 1:12-14, 새번역.
52. 왜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은 설 수 없읍니까?
52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충성스러운 종들이 연단되고 그들의 헌신을 증명하기 위해 혹독한 시련을 당하도록 허락하시는데, 어떻게 그리스도인 회중 즉 “하나님의 집” 안에서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동일한 회중 내의 “의인”과 함께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겠읍니까? 시편 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시 1:5) 그렇습니다. 악인들은 승인을 받지 못하고 단죄를 받을 것입니다. 그들은 의인의 회중에 있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결코 유리한 입장에 ‘서지’ 못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신자들이 직면해야 할 일들을 생각할 때 그들이 최종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되려면 의의 길에서 진정한 노력과 사랑과 믿음을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겨우” 구원을 얻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회중(“하나님의 집”)의 모든 성원은 이 심판 “때”에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베드로 전 4:17, 18; 잠언 11:31.
53. (ㄱ) 우리는 고통을 당할 때 여호와께서 “미쁘신 조물주”라는 사실로부터 어떠한 위안을 받을 수 있읍니까? (ㄴ) 우리는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들에 대해 어떠한 반응을 보여야 할 것입니까?
53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인내할 수 없는 시련이 우리에게 임할 수 있읍니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이 아무리 곤란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유지시켜 주실 수 있고 우리가 당할지 모르는 모든 해를 완전히 제거하실 수 있읍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그분께 의지할 때 그분은 자기의 영을 통해 우리가 고통 가운데서 참도록 힘주실 수 있읍니다. ‘베드로’가 말한 바와 같이, 그분은 “미쁘신 조물주”,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이므로, 자기의 종들을 도우시겠다는 약속을 충실히 이행하실 것입니다. (베드로 전 4:19) 이러한 사실을 아는 것은 우리가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을 불명예스럽게 하는 식의 반응을 보이지 않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읍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대항하고 그들에게 같은 식으로 보복할 것이 아니라, 계속 선을 행하기를 원할 것입니다.—누가 6:27, 28.
54.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손 아래서 겸손하며, 이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유익합니까?
54 만일 우리가 우리에게 임하는 일에 겸손히 순응하고 그리스도와 같은 태도를 유지한다면, 우리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높이실 것을 확신할 수 있읍니다. 어떠한 시련도 무한히 계속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끝나고야 말 것입니다. 우리가 학대를 받는 동안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게 처신하는 한, 우리는 여호와의 손 아래 머물러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손은 우리를 들어 올리실 수 있으며, 우리를 그분의 승인받고 시련받은 종으로서 높이실 수 있읍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추천하였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베드로 전 5:6, 7.
55. 우리는 시련으로부터 도피할 수 없지만, 무엇에 대해 안심할 수 있으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55 여호와께서 우리에 대해 진정으로 관심이 있으시다는 것을 아는 것은 참으로 고무적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며, 그분의 영은 우리를 힘 주시며 우리를 유지시켜 주십니다. 또한, 특정한 시험이 끝난 다음 여호와의 인자한 보호를 돌이켜 보면, 우리는 그분께 더 가까이 이끌리게 됩니다. 그러한 입장은 중병에 걸렸을 때에 부모의 사랑과 염려를 경험한 인식깊은 자녀의 입장에 비길 수 있읍니다. 그러한 경우에 자녀의 신임과 사랑은 크게 강화됩니다. 물론, 매우 괴로운 환경에서 우리는 도피할 수 없읍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걱정과 염려를 여호와 하나님께 맡길 수 있읍니다. 우리는 격분한 폭도의 무자비한 구타 행위, 공격자들의 성적 폭행 등 잔학 행위를 얼마 동안 견디어낼 수 있을 것인가를 걱정할 필요가 없읍니다. 우리의 인자하신 천적 아버지의 도움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충실을 유지함으로써 인내할 수 있고 박해자들에 대해 도덕적 승리를 거둘 수 있읍니다. 이러한 보증은 시련을 직면했을 때 확고함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정신과 마음의 평화를 빼앗아가는 염려를 우리로부터 제거해 줍니다.
56. 우리의 염려를 여호와께 맡기는 것은 왜 우리가 시련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냉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까?
56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염려를 여호와께 맡겨 버림으로써 현재 자기 만족에 빠지거나 냉담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원수가 있읍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기술하였읍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느니라.]”—베드로 전 5:8.
57. ‘사단’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57 그 사도의 충고와 일치하게,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방심할 수 없읍니다. 대적은 우리가 넘어지기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읍니다. 만일 ‘사단’이 우리에게 우리 형제들의 충실성을 의심하게 하거나 어떤 다른 면으로 우리를 영적으로 약하게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 회중과의 연합에서 떠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믿음을 표현하는 일을 중지한다면, 우리는 방심하는 사람들을 살피는 “우는 사자”와 같은 ‘사단’에게 삼키울 것입니다.
58. 우리의 형제들에 대한 어떠한 사실을 아는 것이 우리가 충실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읍니까?
58 항상 깨어 있으려면, 고통 가운데 참는 것이 우리 만이 아님을 항상 기억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지구상 도처에서 우리의 그리스도인 형제들이 여러 가지 고난을 참고 있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의 도움으로 그들은 시련을 충실히 인내하는 면에서 성공하고 있읍니다. 이것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사단’의 올무에 걸리지 않을 수 있읍니다. 왜냐 하면 우리도 여호와의 힘에 의지하여 인내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굳게 서서 악마를 대적”해야 합니다. “여러분도 아는 대로 세상에 있는 여러분의 형제들도 같은 고난을 다 당해 왔읍니다.”—베드로 전 5:9, 새번역.
59, 60. 우리가 당하는 시련으로부터 우리는 어떻게 최대의 유익을 얻을 수 있읍니까?
59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을 얻는 데 성공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도움을 확신을 가지고 기대할 수 있읍니다.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허락에 의해 우리에게 임하는 모든 것을 우리를 완전하고 온전히 자란 그리스도인이 되며, 믿음 안에서 굳세어지도록 하는 가치있는 징계로 받아들일 수 있읍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표현하였읍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권력이 세세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찌어다. 아멘.”—베드로 전 5:10, 11.
60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시는 동안 고통을 당하고 높임을 받으신 바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의 제자들도 영광스러운 상을 받을 것을 기대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허락에 의해 우리에게 임할 수 있는 고통이 우리가 성서 표준에 고착하는 면에서 더 강해지게 하고 하나님의 아들의 더욱 겸손하고, 동정심과 이해심을 더 보이는 제자들이 되게 한다면, 이러한 형태의 훈련은 목적을 달성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는 우리의 천적 아버지를 온전히 신뢰하고, 그분께서 허락하시는 모든 것에 우리가 겸손히 순응한다면 우리의 영원한 복지와 행복이 마침내 보장될 것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로마 8:28) 사도 ‘베드로’와 같은 정신으로 우리는 우리의 음성을 높여 이렇게 말할 수 있읍니다. ‘온갖 시련을 통해 우리를 훈련받게 하시고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승인받은 종으로서 굳세고 강하게 되도록 도우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