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창조주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나타내신다!
천둥과 번개가 치는 가운데, 300만 명가량 되는 사람들이 시나이 반도의 높은 산 앞에 서 있었습니다. 구름이 시나이(시내) 산을 에워싸고 있었고, 땅은 진동하고 있었습니다. 그처럼 인상적인 상황에서, 모세는 고대 이스라엘이 하늘과 땅의 창조주와 공식적인 관계를 맺게 해주었습니다.—출애굽기 19장; 이사야 45:18.
하지만 우주의 창조주께서 한 민족에게, 그것도 비교적 소수 민족에게 자신을 특별한 방법으로 나타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모세는 다음과 같은 통찰력을 나타냈습니다.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함이라].”—신명 7:6-8; 사체로는 본서에서.
이러한 말은, 성서에는 우주와 지상 생물의 기원에 관한 사실보다 훨씬 더 많은 지식이 우리를 위해 들어 있음을 나타내 줍니다. 성서에는 창조주께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인간을 대해 오신 일에 관해 우리에게 알려 줄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성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연구되고 가장 널리 배부된 책이라서, 교육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서의 내용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흔히 구약이라고 부르는 부분에 먼저 초점을 맞추어, 성서에서 알아낼 수 있는 내용을 개략적으로 살펴보기로 합시다. 그렇게 하면 또한, 우주의 창조주이시자 성서의 저자이신 분의 특성에 대해 귀중한 통찰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고대의 창조 기록—믿을 수 있는가?”라는 제목의 제6장에서, 우리는 성서의 창조 기록에 우리의 최초의 조상—우리의 기원—에 관하여 다른 곳에서는 알 수 없는 사실들이 실려 있음을 보았습니다. 성서의 이 첫째 책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실이 들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어떤 것입니까?
그리스 신화를 비롯한 여러 신화는 신들과 반신 반인들이 인간들과 상종하던 시대에 대하여 묘사합니다. 또한 인류학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세계 도처에는 대부분의 인류를 쓸어간 고대의 홍수에 대한 전설이 있습니다. 당신이 그러한 신화를 일축해 버리는 것은 당연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후에 그러한 신화나 전설에 반영되어 나타난 내용의 밑바탕이 된 역사적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은 창세기밖에 없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었습니까?—창세기 6, 7장.a
창세기에서 당신은 또한 우리가 동질성을 느낄 수 있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창조주가 계시다는 것을 알고 그분의 뜻을 염두에 두고 생활한 남녀에 관해 읽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언급한 “열조” 가운데 포함되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은 사람들에 관해 아는 것이 가치 있는 일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창조주께서는 아브라함을 알게 되시자, 아브라함을 “나의 벗”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사야 41:8; 창세 18:18, 19)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지켜 보신 결과, 아브라함이 믿음의 사람이라는 확신을 얻으셨기 때문입니다. (히브리 11:8-10, 17-19; 야고보 2:23) 아브라함의 경험은 하느님이 가까이하기 쉬운 분임을 알려 줍니다. 그분의 위력과 능력은 외경심을 불러일으키지만, 그분은 단지 어떤 비인격적인 힘이나 원인(原因)에 불과한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와 같은 인간들이, 바로 우리 자신의 지속적인 유익을 위해, 존경심 넘친 관계를 배양할 수 있는 실재하는 인격체이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 (창세 22:18) 이것은 장차 올 “씨”에 관하여 아담 시대에 하신 약속을 더 진전시킨 것 혹은 확대시킨 것입니다. (창세 3:15, 「신세」 참조) 그렇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약속은, 때가 되면 누군가—씨—가 나타나서 모든 민족이 축복을 받게 해줄 것이라는 희망을 강화시켜 주었습니다. 당신은 이것이 성서 전체를 통하여 흐르는 중심 주제임을 알게 될 것이며, 그러한 사실은 이 책이 인간의 여러 가지 기록을 모아 놓은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님을 강조해 줍니다. 그리고 성서의 주제를 알게 되면, 하느님이 모든 나라를 축복하실 목적으로 고대의 한 나라를 사용하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시 147:19, 20.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대하실 때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계셨다는 사실은 “하느님은 편파적이 아니”심을 알려 줍니다. (사도 10:34; 갈라디아 3:14) 더 나아가, 하느님께서 주로 아브라함의 후손들과 상대하고 계실 때에도, 다른 나라에 속한 사람들도 얼마든지 여호와께로 와서 그분을 섬기기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열왕 상 8:41-43) 그리고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하느님이 그처럼 편파적이 아니시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모두가—국가적·민족적 배경에 상관없이—그분을 알고 또 그분을 기쁘시게 할 수가 있습니다.
창조주께서 여러 세기 동안 상대하신 나라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많은 사실을 배워 알 수 있습니다. 그 역사를 세 부분으로 나누도록 합시다. 각 부분을 고려하면서, 여호와께서 어떻게 “그는 되게 하시다”라는 자신의 이름의 의미와 일치하게 행동하셨는지, 그리고 실제로 존재했던 민족을 대하신 일에서 그분의 특성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유의해 보십시오.
제1부—창조주가 통치한 나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이집트(애굽)에서 종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일으키시어 기원전 1513년에 그들을 인도하여 해방시키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나라가 되었을 때, 그 나라의 통치자는 하느님이셨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1117년에, 이스라엘 백성은 인간 왕을 구하였습니다.
어떠한 사태 진전으로 인해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세와 함께 시나이 산에 있게 되었습니까? 성서의 창세기는 그 배경을 알려 줍니다. 이전에 야곱(또 다른 이름은 이스라엘)이 이집트 북동쪽에 살고 있을 때, 그 당시까지 알려져 있던 세계 전역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야곱은 자기 가족을 염려하여 이집트에서 식량을 구하였는데, 그 나라에는 창고에 많은 곡식이 저장되어 있었습니다. 야곱은 식량 관리 책임자가 사실은, 여러 해 전에 죽었다고 생각했던 자기 아들 요셉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야곱과 그의 가족은 이집트로 이주했으며, 그 곳에서 계속 살라는 권유를 받았습니다. (창세 45:25-46:5; 47:5-12) 하지만 요셉이 죽자, 새로운 파라오(바로)는 야곱의 후손들을 징발하여 강제 노동을 시켰고, “고역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를 계속 시켰습니다. (출애굽 1:8-14) 이러한 생생한 기록을 비롯한 많은 내용을 성서의 두 번째 책인 출애굽기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십 년 동안 학대를 받았으며, 그들의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하였습니다. 여호와께 향하는 것은 지혜로운 행동이었습니다. 그분은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셨고, 장차 모든 민족을 축복하실 그분의 목적을 달성하기로 결심하고 계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권념[“주목”]’하셨는데,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는 창조주가 짓밟히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동정하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 2:23-25, 「신세」 참조) 그분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인도하여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모세를 택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와 그의 형 아론이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가서, 이 노예가 되어 있는 백성이 떠나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자 파라오는 다음과 같은 도전적인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출애굽 5:2.
당신은 우주의 창조주께서 그러한 도전적인 말을 들었다고 해서, 그 당시 존재하던 가장 큰 군사 강국의 통치자로부터 그러한 말을 들었다고 해서 조금이나마 움찔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까? 하느님께서는 파라오와 이집트 사람들을 일련의 재앙으로 치셨습니다. 마침내 열 번째 재앙이 내리자, 파라오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해방시키겠다고 동의하였습니다. (출애굽 12:29-32) 그리하여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여호와가 실재하는 인격체—정해진 때에 자유를 주시는 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여호와는 극적인 방법으로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출애굽 6:3) 그러나 파라오와 이스라엘 사람들 모두 그 이름에 대해서 배워야 할 것이 아직 더 있었습니다.
파라오가 곧 생각을 바꾸었기 때문에 그러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떠나간 노예들을 열심히 추격하여 홍해 근처에서 그들을 따라잡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홍해와 이집트 군대 사이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 때 여호와께서 개입하시어 홍해를 뚫고 지나갈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파라오는 이러한 일이 하느님의 무적의 힘의 전시임을 알아보았어야 했습니다. 그는 알아보기는커녕 군대를 이끌고 무모하게 이스라엘 사람들을 추격하다가, 하느님께서 바다가 다시 정상 상태로 돌아오게 하셨을 때 자기 군대와 함께 익사하였습니다. 출애굽기의 기록은 하느님께서 이 놀라운 일을 어떻게 행하셨는지 세세하게 알려 주지 않습니다. 적절하게도 우리는 그러한 일을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행위와 시간 조절이 인간의 제어 능력을 초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그러한 행위는 우주와 우주의 모든 법칙을 만드신 분의 능력을 초월하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출애굽 14:1-31.
이 일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이름과 일치하게 행동하시는 구원자이심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증명해 주었으며, 우리들에게도 강조해 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기록을 통해서 하느님의 길에 관해 훨씬 더 많은 점들을 식별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그분은 압제적인 국가에 대해서는 공의를 시행하신 반면, 장차 씨를 배출할 자기 백성에게는 사랑의 친절을 보이셨습니다. 이 나중 일과 관련해서, 우리가 출애굽기에서 읽는 내용은 분명히 고대 역사 이상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축복을 받게 하실 하느님의 목적과 관련이 있습니다.
약속의 땅으로 들어감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떠난 후에, 사막을 통과하여 시나이 산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시나이 산에서 있은 일은 하느님께서 앞으로 여러 세기 동안 이스라엘 나라를 대하실 방법을 결정하였습니다. 그분은 율법을 주셨습니다. 물론, 율법을 주시기 아주 오래 전에, 창조주께서는 이미 우주 내의 물질을 지배하는 법칙을 세워 놓으셨고, 그 법칙은 지금도 시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시나이 산에서 모세를 사용하여 국가의 법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출애굽기와 그 뒤에 나오는 세 권의 책—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서 하느님께서 하신 일과 그분이 주신 법전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학자들은 모세가 욥기도 썼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제10장에서 욥기의 일부 중요한 내용을 고려할 것입니다.
오늘날까지도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은 이 완벽한 법전의 핵심 도덕 명령인 십계명에 대해 알고 십계명을 따르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그 법전에는 다른 많은 명령들도 들어 있으며, 그 명령들은 그 탁월성 때문에 경탄의 대상이 됩니다. 이해할 만하게도, 많은 법규들은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활에 초점을 맞춘 것들로서, 개인 위생이나 공중 위생 그리고 질병에 관한 규칙들입니다. 처음에는 고대의 한 민족을 위해 제정된 것이긴 하지만, 그 법은 인간 전문가들이 지난 세기 정도에 와서야 겨우 발견한 과학적 사실들에 대한 지식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레위 13:46, 52; 15:4-13; 민수 19:11-20; 신명 23:12, 13) 당연히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생길 것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법이 어떻게 그 시대의 다른 나라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뛰어난 지식과 지혜를 반영할 수 있었는가?’ 그에 대한 합리적인 답은, 그 법이 창조주에게서 나왔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법은 또한 가문의 혈통을 보존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고, 씨가 나타날 때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이 따라야 할 종교적 의무도 규정해 놓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요구하신 모든 일을 하겠다고 동의하였기 때문에, 그 율법에 따라 살아야 할 책임이 있게 되었습니다. (신명 27:26; 30:17-20) 물론, 그들은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조차도 유익한 목적에 기여하였습니다. 후에 한 법률 전문가는, 율법이 “약속을 받은 씨가 도착할 때까지 범법을 나타”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갈라디아 3:19, 24) 따라서 율법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별된 민족이 되게 해주었으며, 씨 즉 메시아가 필요함을 상기시켜 주어, 그분을 영접하도록 그들을 준비시켜 주었습니다.
시나이 산에 모인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의 율법에 고착하겠다고 동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성서에서 계약 즉 협정이라고 부르는 것 아래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 계약은 이스라엘 나라와 하느님 사이에 체결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진해서 이 계약 안으로 들어왔으면서도 스스로 목이 곧은 백성임을 드러냈습니다. 예를 들면, 그들은 하느님을 대표한답시고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우상 숭배는 직접적으로 십계명을 범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행위는 죄였습니다. (출애굽 20:4-6) 더 나아가서, 그들은 자기들에게 공급된 양식에 대해 불평하였고, 하느님이 임명하신 인도자(모세)에게 반역하였으며,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여자들과 부도덕한 관계를 맺는 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모세 시대와 아주 동떨어진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이러한 사실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일 역시 단순히 고대 역사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배은 망덕한 행위와 하느님의 반응에 대한 성서 기록은 그분이 참으로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임을 보여 줍니다. 성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를 “재삼” 시험하여, 그분을 “슬프시게” 하고 “격동”하였다고 알려 줍니다. (시 78:40, 41) 그러므로 우리는 창조주께서 감정을 가지고 계시고 인간이 하는 일에 관심이 있으시다는 점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관점으로는, 이스라엘의 그릇된 행동 때문에 하느님께서 계약을 끝내시고 아마 다른 나라를 선택하셔서 약속을 성취시키시지 않을까 하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악의적으로 그릇된 행동을 하는 개개인에게는 벌을 내리시면서도 그 고집 센 나라 전체에게는 자비를 보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충실한 벗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에 계속 충성스러우셨습니다.
얼마 안 있어, 이스라엘은 성서에서 약속의 땅이라고 부르는 가나안에 가까이 이르게 되었습니다. 가나안에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행위들에 깊이 빠져 있는 강력한 민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창조주께서는 그 민족들에 간섭하지 않고 400년이 흘러가게 내버려 두셨지만, 이제는 정당하게도 그 땅을 고대 이스라엘에게 넘겨주기로 하셨습니다. (창세 15:16; 또한 132-3면의 “질투하시는 하느님—어떤 의미에서?” 참조) 그 준비 단계로, 모세는 12명의 정탐꾼을 그 땅에 보냈습니다. 그 중 10명은 여호와의 구원 능력에 대한 믿음의 결핍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의 보고로 인해 백성은 하느님에 대하여 불평하면서 이집트로 돌아갈 모의를 하였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께서는 그 백성에게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라는 선고를 내리셨습니다.—민수 14:1-4, 26-34.
그러한 판결로 어떤 일이 성취되었습니까? 모세는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여호와께서 그들을 낮추신 그 40년간을 기억하라고 훈계하였습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줄 마음에 생각하[라].” (신명 8:1-5)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께 모욕적인 행동을 하였지만,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부양하시면서 그들이 자신에게 의존해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를 들면, 여호와께서 그 민족에게 꿀 섞은 과자 같은 맛이 나는 식품인 만나를 공급해 주셨기 때문에 그들은 생존하였습니다. 분명히, 그들은 광야에서의 경험을 통해 많은 사실을 배웠어야 하였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순종하고 그분을 의지하는 것이 중요함을 분명히 깨달았어야 하였습니다.—출애굽 16:13-16, 31; 34:6, 7.
모세가 죽자, 하느님께서는 여호수아를 임명하여 이스라엘을 인도하게 하셨습니다. 이 용감하고 충성스러운 사람은 그 민족을 가나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그 땅을 정복하는 일을 용기 있게 시작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짧은 기간에, 31명의 왕을 물리치고 약속의 땅을 대부분 점령하였습니다. 여호수아서에서 이 흥미진진한 역사를 읽어 볼 수 있습니다.
인간 왕이 없는 통치
광야에 머무는 동안 그리고 약속의 땅에서 초기의 여러 해를 보내는 동안, 그 나라에는 모세와 그 뒤를 이은 여호수아라는 인도자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인간 왕이 필요 없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주권자이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임명된 장로들이 성문에서 소송을 들어 주도록 마련하셨습니다. 장로들은 질서를 유지하고 백성을 영적으로 도와 주었습니다. (신명 16:18; 21:18-20) 룻기에는 그러한 장로들이 신명기 25:7-9에 나오는 법에 근거하여 소송을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흥미진진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 나라는 여러 해 동안, 거듭거듭 하느님께 불순종하고 가나안 신들에게 향함으로 종종 하느님의 미움을 샀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극심한 어려움에 처하여 여호와께 도와 달라고 부르짖으면,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모른 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사사들을 일으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는 일을 인도하셔서, 압제적인 이웃 민족들에게서 그들을 구해 주셨습니다. 사사기라는 책에서는 이 용기 있는 사사들 가운데 12사람의 공적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사사 2:11-19; 느헤미야 9:27.
그 기록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사사 21:25) 그 나라는 율법에 제시되어 있는 표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장로들의 도움과 제사장들의 교훈으로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고 또 그렇게 하는 데서 안전감을 누릴 만한 근거가 있었습니다. 더욱이, 율법에서는 성막 즉 이동식 성전에 대한 규정도 해 놓아서, 그 곳에서 희생을 바쳤습니다. 그 곳은 참 숭배의 중심지였으며, 참 숭배는 그 당시에 나라를 연합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2부—왕들의 통치 아래서 누린 번영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일하고 있었지만, 백성은 인간 왕을 요구하였습니다. 첫 세 왕—사울, 다윗, 솔로몬—은 기원전 1117년부터 997년까지 각각 40년간 통치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부와 영광이 절정에 달하였으며, 창조주께서는 장차 올 씨의 왕권을 준비하기 위해 중요한 조처를 취하셨습니다.
사무엘은 사사이자 예언자로서 이스라엘의 영적 복지를 잘 돌보았지만, 그의 아들들은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백성은 마침내 사무엘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하였습니다.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여호와께서는 사무엘에게 백성이 요구하는 것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여 주셨습니다. “백성이 ··· 한 말을 ···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여호와께서는 이러한 일이 벌어질 때 오게 될 슬픈 결과를 예견하셨습니다. (사무엘 상 8:1-9)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요구와 일치하게, 사울이라는 겸허한 사람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임명하셨습니다. 사울은 처음에는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이었지만, 왕이 되자 고집 센 경향을 드러내며 하느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하느님의 예언자는 그의 왕권이 여호와의 마음에 맞는 사람에게로 넘어갈 것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은 창조주께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순종을 참으로 가치 있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강조해 줍니다.—사무엘 상 15:22, 23.
이스라엘의 다음 왕이 될 다윗은 유다 지파에 속한 한 가족의 막내아들이었습니다. 이 놀라운 선택과 관련하여, 하느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사무엘 상 16:7) 창조주께서 외모가 아니라 우리의 속사람을 보신다는 사실은 참으로 격려가 되지 않습니까? 하지만 사울은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장차 왕이 될 사람으로 다윗을 선택하신 때부터, 사울은 다윗을 제거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지 않으셨으며, 사울과 그의 아들들은 결국 블레셋이라고 하는 적대 관계에 있는 민족과의 전쟁 중에 사망하였습니다.
다윗은 헤브론 성에서 왕으로 통치하였습니다. 그 후 그는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수도를 그리로 옮겼습니다. 그는 또한 이스라엘의 국경을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신 땅의 최대 경계까지 넓혔습니다. 이 기간(과 그 후에 등장한 왕들의 역사)에 대해서는 성서에 들어 있는 여섯 권의 역사책b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 책들은 다윗의 생애도 문제들이 없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예를 들면, 다윗은 인간적인 욕망에 굴복하여 아름다운 밧세바와 간음을 범하였고, 그 후 자기 죄를 은폐하기 위해 또 다른 그릇된 행동들을 하였습니다. 공의의 하느님이신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잘못을 그냥 간과해 버리실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마음에서 우러나온 회개를 하였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율법에 규정된 형벌을 엄격하게 적용하도록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자기가 저지른 죄로 인해 많은 가족 문제를 겪을 것이었습니다.
그 모든 위기를 겪으면서 다윗은 하느님을 인격체—감정을 가지신 분—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 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저는 ··· 저희 부르짖음을 들으[시리로다].” (시 145:18-20; 사체로는 본서에서) 다윗의 성실성과 헌신적인 태도는 그가 지은 아름다운 노래들에 뚜렷이 표현되어 있는데, 그 노래들이 시편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시들을 통해 위로와 격려를 얻어 왔습니다. 시편 139:1-4에 반영되어 있는, 다윗과 하느님 사이의 가까운 관계를 고려해 보십시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니] ···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다윗은 특히 하느님의 구원 능력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시 20:6; 28:9; 34:7, 9; 37:39) 여호와의 구원 능력을 경험할 때마다 여호와에 대한 다윗의 신뢰심은 자라 갔습니다. 시편 30:5과 62:8과 103:9에서 그 증거를 볼 수 있습니다. 혹은 다윗이 밧세바와 지은 죄로 책망을 받은 후에 지은 시편 51편을 읽어 보십시오. 창조주가 거만하신 분이 아니라 겸손하게 기꺼이 귀기울여 주시는 분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우리의 감정을 그분에게 어렵지 않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참으로 새 힘을 줍니다! (시 18:35, 「신세」 참조; 69:33; 86:1-8) 다윗은 단지 경험만으로 그러한 인식을 갖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묵상하며 주의 손의 행사를 생각하[나이다].”—시 63:6; 143:5.
여호와께서는 한 영원한 왕국을 위하여 다윗과 특별한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다윗은 아마 그 계약의 온전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후에 성서에 기록된 세부점들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서 약속된 씨가 다윗의 가계에서 나올 것임을 알리신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사무엘 하 7:16.
지혜로운 왕 솔로몬과 삶의 의미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지혜로 유명한 사람이었으며, 우리는 잠언과 전도서라는 매우 실용적인 책을 읽음으로 그의 지혜로부터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c (열왕 상 10:23-25) 전도서는 지혜로운 솔로몬 왕처럼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에게 특히 도움이 됩니다. 왕의 가문에서 태어난 최초의 이스라엘 왕으로서, 솔로몬에게는 할 수 있는 일이 대단히 많았습니다. 그는 또한 웅장한 건축 공사를 추진하였고, 식탁에서 매우 다양한 음식을 즐겼으며, 음악은 물론 훌륭한 친구들과의 교제도 즐겼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도다].” (전도 2:3-9, 11) 솔로몬은 결국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까?
솔로몬은 이렇게 썼습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전도 12:13, 14) 이러한 결론과 일치하게, 솔로몬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숭배할 수 있는 곳인 영광스러운 성전을 건축하는 7년간의 공사를 추진하였습니다.—열왕기 상 6장.
여러 해 동안 솔로몬의 통치는 평화와 풍부로 특징을 이루었습니다. (열왕 상 4:20-25) 하지만 그의 마음은 다윗의 마음과는 달리 여호와께 완전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였습니다. 솔로몬은 많은 이방 여자들을 아내로 취하였으며, 그 여자들로 인해 그의 마음은 그들의 신에게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마침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결단코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으리라] ··· 나의 종 다윗과 ···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네 아들에게 주리라.”—열왕 상 11:4, 11-13.
제3부—왕국의 분열
기원전 997년에 솔로몬이 죽자 북쪽의 열 지파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이 열 지파는 이스라엘 왕국을 형성하였는데, 기원전 740년에 아시리아(앗수르)가 이 왕국을 정복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의 왕들은 두 지파를 통치하였습니다. 이 유다 왕국은 기원전 607년에 바빌론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그 거민들을 사로잡아 갈 때까지 지속하였습니다. 유다 지역은 70년 동안 황폐되어 있었습니다.
솔로몬이 죽자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권좌에 올라 백성을 가혹하게 다스렸습니다. 그로 인해 반역이 일어나 열 지파가 떨어져 나가 이스라엘 왕국이 되었습니다. (열왕 상 12:1-4, 16-20) 그 후 오랜 기간 이 북쪽 왕국은 참 하느님에게 고착하지 않았습니다. 백성은 종종 금송아지 모양의 우상들 앞에서 절을 하거나 그 밖의 여러 가지 형태의 거짓 숭배에 빠져 들었습니다. 몇몇 왕들은 암살을 당하였고, 그들의 왕조는 찬탈자들에 의해 전복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큰 관용을 나타내시어, 거듭거듭 예언자들을 보내어 그들이 배교적인 행위를 계속한다면 장차 비극을 맞게 될 것이라고 그 나라에 경고하셨습니다. 호세아와 아모스는 이 북쪽 왕국에 집중적으로 소식을 전한 예언자들이 기록한 책입니다. 마침내 기원전 740년에 아시리아 사람들이 하느님의 예언자들이 예언한 비극을 가져왔습니다.
남쪽에서는 다윗의 집에 속한 19명의 왕이 대를 이어 가며 기원전 607년까지 유다를 통치하였습니다. 아사, 여호사밧, 히스기야, 요시야 왕들은 그들의 조상 다윗처럼 통치하였으며, 여호와의 은혜를 얻었습니다. (열왕 상 15:9-11; 열왕 하 18:1-7; 22:1, 2; 역대 하 17:1-6) 이 왕들이 통치할 때 여호와께서는 그 나라를 축복하셨습니다. 「영국인의 비평 및 해설 성서 백과 사전」(The Englishman’s Critical and Expository Bible Cyclopædia)에서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유다 왕국이 대단히 보수적인 색채를 띠게 한 요인들 가운데는 하느님이 정해 주신 성전, 제사직, 성문법, 유일하신 참 하느님 여호와를 신권 통치의 참 왕으로 인정하는 것 등이 있었다. ··· 이처럼 율법에 고착하는 태도로 인해 ··· 왕위 계승이 있을 수 있었고, 그 가운데는 지혜롭고 훌륭한 군주들이 많이 있었다. ··· 그리하여 유다 왕국은 인구가 더 많은 북쪽의 자매 왕국보다 더 오래 존속하였다.” 이 훌륭한 왕들보다는 다윗의 길로 걷지 않은 왕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일들을 인도하시어, ‘하느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 예루살렘에서 자신의 종 다윗에게 한 등불이 항상 자신 앞에 있게 하’셨습니다.—열왕 상 11:36.
멸망의 길로 나아감
므낫세는 참 숭배에서 벗어난 유다의 왕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그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며 점치며 사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많이 행하여 그 진노를 격발하였[더라].” (열왕 하 21:6, 16) 므낫세 왕의 백성이 므낫세의 꾀임을 받아 “악을 행한 것이 여호와께서 ··· 멸하신 열방보다 더욱 심하였”습니다. 창조주께서는 므낫세와 그의 백성에게 거듭 경고를 하신 다음에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내가 ··· 사람이 그릇을 씻···음 같이 예루살렘을 씻어 버릴찌라.”—역대 하 33:9, 10; 열왕 하 21:10-13.
그 서막으로서, 여호와께서는 아시리아 사람들이 므낫세를 사로잡아 구리 족쇄에 채워 포로로 끌어 가게 하셨습니다. (역대 하 33:11) 므낫세는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 정신을 차리고 “그 열조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비”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어떤 반응을 보이셨습니까? “하나님이 그 기도를 받으시며 그 간구를 들으시사 저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거하게 하시매 므낫세가 그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 므낫세 왕과 그의 손자 요시야 왕은 둘 다 필요한 개혁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나라는 대대적인 도덕적·종교적 타락 상태에서 영구적으로 돌아서지는 못하였습니다.—역대 하 33:1-20; 34:1-35:25; 열왕기 하 22장.
의미 심장하게도, 여호와께서는 열심 있는 예언자들을 보내어, 진행되고 있는 일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알려 주셨습니다.d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습니다. “너희 열조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내 종 선지자[“예언자”]들을 너희에게 보내었으되 부지런히 보내었[느니라].” 그러나 그 백성은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조상보다 악을 더 행하였습니다! (예레미야 7:25, 26, 「신세」 참조) 여호와께서는 “그 백성[을] ··· 아끼사[“동정심을 느껴”]” 그들에게 거듭거듭 경고하셨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반응을 나타내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기원전 607년에 바빌론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그 땅을 황폐시키게 허락하셨습니다. 그 땅은 70년 동안 버려진 채로 있었습니다.—역대 하 36:15, 16, 「신세」 참조; 예레미야 25:4-11.
이처럼 하느님께서 행하신 일을 간략하게 살펴보는 것은, 여호와께서 자신이 선택하신 나라에게 나타내신 관심과 그 나라를 공정하게 대하신 방법을 우리가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그분은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처럼 뒤로 물러서서 자신의 백성이 어떻게 하나 보려고 그냥 기다리고 계시지만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을 돕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셨습니다. 당신은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말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이사야 64:8) 따라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창조주가 사랑 많고 관심 있는 인간 아버지와 같은 반응을 보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그분은 또한, 우리가 스스로 택한 행로와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십니다.
그 나라가 70년간 바빌론에 사로잡혀 있는 일을 겪은 후에,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회복시키겠다는 예언을 성취시키셨습니다. 백성은 해방되어, 고국으로 돌아가 ‘예루살렘에 있던 여호와의 전을 다시 건축’하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에스라 1:1-4; 이사야 44:24-45:7) 성서의 여러 책들e은 이 회복과 성전 재건과 뒤이어 있은 여러 가지 일들을 다룹니다. 그 책들 중 하나인 다니엘은 씨 즉 메시아가 정확히 언제 나타날 것인지 예언하였고 또 우리 시대의 세계 사태의 진전에 대해서도 예언하였기 때문에 특히 흥미롭습니다.
마침내 성전이 재건되었지만, 예루살렘은 처량한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성벽과 성문이 파괴된 채로 있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느헤미야와 같은 사람들을 일으키셔서 유대인들을 격려하고 조직하셨습니다. 우리가 느헤미야 9장에서 읽을 수 있는 기도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 오셨는지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 기도는 여호와가 “사유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신 분임을 보여 줍니다. (사체로는 본서에서) 그 기도는 또한 여호와께서 완벽한 공의의 표준과 일치하게 행동하시는 분임을 보여 줍니다. 그분은 심판을 집행하기 위해 능력을 행사하실 타당한 이유가 있을 때에도, 사랑으로 인해 공의를 부드럽게 시행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다. 이 일을 균형 잡히고 훌륭한 방법으로 하려면 지혜가 필요합니다. 창조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대하신 방법을 볼 때, 확실히 우리는 그분에게 이끌려서 그분의 뜻을 행하는 데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성서의 이 부분(구약)은, 유다 왕국이 예루살렘의 성전과 함께 회복되었지만 이교 나라의 통치를 받고 있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렇다면 “영원히” 통치하게 될 “씨”와 관련하여 하느님이 다윗과 맺은 계약은 어떻게 성취될 수 있었습니까? (시 89:3, 4, 「신세」 참조; 132:11, 12) 유대인들은 여전히 “메시아 지도자”가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었는데, 그 지도자는 하느님의 백성을 해방시켜 지상에 신권(하느님이 통치하는) 왕국을 세울 것이었습니다. (다니엘 9:24, 25, 「신세」) 하지만 그것이 여호와의 목적이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약속된 메시아가 어떻게 구출을 가져오겠습니까?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다음 장에서는 이러한 매우 중요한 문제들을 고려할 것입니다.
[각주]
a 성서의 책들의 내용을 식별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책들의 이름을 굵은 글자체로 명기함.
b 그 책들은 사무엘 상, 사무엘 하, 열왕기 상, 열왕기 하, 역대 상, 역대 하이다.
c 그는 또한 아가서를 썼다. 아가서는 신분이 낮은 목동에 대한 한 젊은 여성의 충성을 강조하는 사랑의 시이다.
d 성서의 여러 권의 책에 그러한 영감받은 예언의 소식이 들어 있다. 그러한 책들 가운데는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 애가, 에스겔, 요엘, 미가, 하박국, 스바냐가 있다. 오바댜, 요나, 나훔서에는 하느님의 백성과 관계를 맺으며 그들에게 영향을 미친 주변 국가들에 초점을 맞춘 소식이 들어 있다.
e 역사와 예언이 담긴 이 책들 가운데는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학개, 스가랴, 말라기가 있다.
[126, 127면 네모]
기적—믿을 수 있는가?
“전등과 무선 통신을 사용하고 현대에 발견된 의료 기술과 수술 기술을 이용하면서, 동시에 신약의 세계에 나오는 영들과 기적을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독일의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이 한 이 말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잘 대변해 준다. 하느님이 홍해를 가르신 것과 같은, 성서에 기록된 기적에 대해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콘사이스 옥스퍼드 사전」에서는 “기적”을 “어떤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일어난 특별한 일”이라고 정의한다. 그러한 특별한 일 가운데에는 자연의 질서에 개입하는 일도 있는데, 그러한 일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믿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자연의 법칙을 어기는 것처럼 보이는 일도, 관련된 또 다른 자연의 법칙에 비추어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일례로, 「뉴 사이언티스트」지의 보도에 의하면, 도쿄 대학교의 두 물리학자가 수평을 이룬 관(管)에 물을 어느 정도 채운 다음 관 주위에 매우 강한 자기장이 작용하게 해 보았다. 물이 관의 양 끝으로 몰려가는 바람에, 가운데에는 물이 없는 부분이 생겼다. 1994년에 발견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는, 물이 자석에 반발하는 약한 반자성(反磁性)을 띤 물질이기 때문이다. 물이 자기장이 매우 강한 곳에서 자기장이 약한 곳으로 이동하는 이러한 확증된 현상을 모세 효과라고 한다. 「뉴 사이언티스트」지에서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큰 자석만 있으면, 물을 이리저리 이동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리고 큰 자석만 있으면, 거의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
물론,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 홍해를 가르실 때 어떤 방법을 사용하셨는지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창조주께서는 자연의 모든 법칙을 세세한 면까지 완벽하게 알고 계시다. 그분은 자신이 만든 또 다른 법칙을 사용하여 어떤 법칙의 특정 부면을 쉽게 조절하실 수 있다. 그 결과가 인간에게는 기적처럼 보일 수 있다. 특히, 관련된 법칙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때에는 더욱 그렇다.
성서에 나오는 기적에 대하여, 일본 교토 대학교의 명예 교수 야마다 아키라는 이렇게 말한다. “[기적]을 우리가 연구하고 있는 과학의 관점에서 (혹은 현 상태의 과학의 입장에서) 현재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할지 모르지만, 단지 진보된 현대 물리학이나 진보된 현대 생물학에 근거하여 그러한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결론짓는 것은 잘못이다. 앞으로 10년쯤 있으면, 오늘날의 현대 과학은 시대에 뒤떨어진 학문이 될 것이다. 과학이 신속히 진보할수록, ‘10년 전에는 과학자들이 이러저러한 것을 진지하게 믿었다’는 식으로 오늘날의 과학자들이 조롱의 대상이 될 가능성은 더 커진다.”—「과학 시대의 신들」(Gods in the Age of Science).
여호와께서는 모든 자연 법칙을 조종하실 수 있는 창조주로서,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여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다.
[132, 133면 네모]
질투하시는 하느님—어떤 의미에서?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우리는 출애굽기 34:14에서 이러한 말을 읽을 수가 있는데, 그 의미는 무엇인가?
“질투하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전적인 정성을 강력히 요구하다, 경쟁 상대를 허용하지 않다”를 의미할 수 있다. 여호와의 창조물에게 유익이 되는 긍정적인 의미로,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이름과 숭배와 관련하여 질투하신다. (에스겔 39:25, 「신세」 참조) 자신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를 성취시키려는 그분의 열심은, 그분이 인류를 위한 자신의 목적을 이루실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예를 들어, 가나안 땅에 거하는 사람들에 대한 그분의 심판을 고려해 보자. 한 학자는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묘사를 한다. “바알, 아스도렛 등 가나안 신들에 대한 숭배는 가장 사치스러운 술잔치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의 신전은 악의 중심지였다. ··· 가나안 사람들은 숭배로 부도덕한 행위를 하고, ··· 그런 다음 그 동일한 신들에게 드리는 제물로 그들 자신의 장자를 죽였던 것이다.” 고고학자들은 희생된 어린애의 유해가 담긴 항아리들을 발견하였다. 하느님께서 가나안 사람들의 그릇된 행동을 주목해 보신 것은 아브라함 시대였지만, 그분은 그들에게 400년 동안 참을성을 나타내시며 그들이 변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허락하셨다.—창세 15:16.
가나안 사람들은 자신들의 그릇된 행동의 심각성을 알고 있었는가? 도덕과 공의를 나타내야 할 보편적인 근거라고 법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는, 인간의 양심 기능을 그들도 가지고 있었다. (로마 2:12-15) 그런데도 가나안 사람들은 가증스러운 자녀 희생과 타락한 성행위를 계속하였다.
공의를 균형 잡히게 행사하시는 여호와께서는 그 땅을 정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결정하셨다. 이것은 종족 말살이 아니었다. 가나안 사람들 가운데서도 자진적으로 하느님의 높은 도덕 표준을 받아들인, 라합과 같은 개인이나 기브온 사람들 같은 집단은 전체가 목숨을 건졌다. (여호수아 6:25; 9:3-15) 라합은 메시아에 이르는 왕의 가계를 이어 주는 사람이 되었고, 기브온 사람들의 후손은 여호와의 성전에서 봉사하는 특권을 받았다.—여호수아 9:27; 에스라 8:20; 마태 1:1, 5-16.
그러므로 사실에 근거한 온전하고 명확한 지식을 얻는다면, 여호와가 충실한 피조물들에게 유익이 되는 적절한 방법으로 질투하시는, 흠모할 만하고 공정한 하느님이심을 이해하기가 훨씬 더 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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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주께서는 노예가 된 민족을 해방시켜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데 사용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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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스라엘 민족은 시나이 산에서 창조주와 계약 관계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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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할 데 없는 창조주의 법을 지키는 것은 그분의 백성이 약속의 땅에서 삶을 즐기는 데 도움이 되었다
[136면 삽화]
예루살렘 성벽 남쪽에 있는, 다윗 왕이 수도로 삼았던 지역을 당신도 방문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