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두 왕의 실체가 바뀌다
1, 2. (ㄱ) 안티오코스 4세는 무슨 일로 인해 로마의 요구에 응하게 되었습니까? (ㄴ) 시리아는 언제 로마의 한 속주가 되었습니까?
시리아 왕 안티오코스 4세는 이집트를 침공하여 스스로 그 나라의 왕이 됩니다. 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요청에 따라, 로마는 대사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를 이집트로 파견합니다. 라이나스는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안티오코스 4세가 이집트의 왕권을 포기하고 그 나라에서 물러가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거대한 함대를 이끌고 옵니다. 시리아의 왕과 로마의 대사는 알렉산드리아 근교의 엘레우시스에서 맞닥뜨리게 됩니다. 안티오코스 4세는 고문관들과 상의할 시간을 달라고 요구하지만, 라이나스는 그 왕 주위에 원을 그려 놓고서 대답을 해야만 원 밖으로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굴욕을 당한 안티오코스 4세는 로마의 요구에 응하여 기원전 168년에 시리아로 돌아갑니다. 그리하여 북방 왕인 시리아와 남방 왕인 이집트의 대결은 끝납니다.
2 중동 지역의 일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 로마는 계속해서 시리아에 명령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안티오코스 4세가 기원전 163년에 사망한 이후에도 셀레우코스 왕조에서 나온 다른 왕들이 시리아를 통치하기는 하지만, 그 왕들은 “북방 왕”의 지위를 차지하지는 못합니다. (다니엘 11:15) 시리아는 마침내 기원전 64년에 로마의 한 속주가 됩니다.
3. 로마는 언제 어떻게 이집트에 대한 패권을 쥐게 되었습니까?
3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안티오코스 4세가 사망한 뒤에도 계속해서 130년이 조금 넘게 “남방 왕”의 지위를 차지합니다. (다니엘 11:14) 기원전 31년의 악티움 해전에서, 로마의 통치자 옥타비아누스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여왕—클레오파트라 7세—과 그 여왕의 로마인 애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합군을 물리칩니다. 이듬해에 클레오파트라가 자살하자, 이집트 역시 로마의 한 속주가 되어 더 이상 남방 왕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기원전 30년에, 로마는 시리아와 이집트 모두에 대한 패권을 쥐게 됩니다. 이제 다른 통치권들이 나타나서 북방 왕과 남방 왕의 역할을 맡을 것으로 기대해야 합니까?
새로운 왕이 “강제 징수자”를 보내다
4. 통치권을 행사하는 또 다른 실체가 북방 왕의 역할을 맡을 것으로 기대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4 기원 33년 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언자 다니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대로, 황폐케 하는 혐오스러운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을 보거든, ··· 그때에 유대에 있는 사람들은 산으로 도피하십시오.” (마태 24:15, 16) 예수께서는 다니엘 11:31을 인용하여 추종자들에게 장차 나타날 “황폐케 하는 혐오스러운 것”에 대하여 경고하신 것입니다. 북방 왕과 관련된 이 예언은, 북방 왕의 역할을 맡은 마지막 시리아 왕인 안티오코스 4세가 사망한 지 약 195년 후에 주어진 것입니다. 통치권을 행사하는 또 다른 실체가 북방 왕의 역할을 맡아야 함이 분명하였습니다. 누가 그 북방 왕이 될 것입니까?
5. 누가 북방 왕으로 일어서서, 한때 안티오코스 4세가 가지고 있었던 지위를 차지하였습니까?
5 여호와 하느님의 천사는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강제 징수자를 영화로운 왕국에 다니게 할 자가 그의 지위[안티오코스 4세의 지위]에 일어서게 될 것이다. 며칠 만에 그가 꺾일 것이나, 분노나 전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다니엘 11:20) 이렇게 “일어서게” 된 자는 최초의 로마 황제 옥타비아누스임이 증명되었으며, 그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로 알려졌습니다.—248면의 “공경을 받는 자와 업신여김을 받는 자” 참조.
6. (ㄱ) “강제 징수자”가 “영화로운 왕국”을 다니게 된 것은 언제였으며, 이 일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아우구스투스가 “분노나 전쟁으로” 사망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ㄷ) 북방 왕의 실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6 아우구스투스의 “영화로운 왕국”에는 “‘장식’의 땅”—로마의 속주가 된 유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다니엘 11:16) 기원전 2년에, 아우구스투스는 등록을 하라고 명령함으로써, 즉 인구 조사를 함으로써 “강제 징수자”를 보냈는데, 아마 인구 수를 파악하여 과세와 징병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이 포고령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는 등록을 하기 위해 베들레헴으로 여행하였고, 그 결과 예수께서는 그 예언된 장소에서 탄생하시게 되었습니다. (미가 5:2; 마태 2:1-12) 아우구스투스는 기원 14년 8월에—“며칠 만에”, 다시 말해서 등록하라고 포고령을 내린 지 얼마 안 되어—76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는데, “분노”한 암살자의 손에 의해서나 “전쟁”으로 사망한 것이 아니라 병에 걸려 사망하였습니다. 참으로 북방 왕의 실체가 바뀌었습니다! 이제 로마 제국이 그 황제들을 통해서 북방 왕이 되었습니다.
‘업신여김을 받는 자가 일어서다’
7, 8. (ㄱ) 누가 아우구스투스의 지위에 북방 왕으로 일어섰습니까? (ㄴ) “왕국의 위엄”이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의 후계자에게 마지못해 주어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7 천사는 예언을 계속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업신여김을 받는 자가 그의[아우구스투스의] 지위에 일어서겠는데, 사람들은 그 사람 위에 결코 왕국의 위엄을 두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근심이 없는 동안에 들어와서 매끄러운 방법으로 왕국을 잡을 것이다. 한편 홍수의 팔들은 그 사람 때문에 범람하게 되고 부러질 것이다. 계약의 지도자도 그렇게 될 것이다.”—다니엘 11:21, 22.
8 “업신여김을 받는 자”는 아우구스투스의 셋째 아내 리비아의 아들인 티베리우스 카이사르였습니다. (248면의 “공경을 받는 자와 업신여김을 받는 자” 참조) 아우구스투스는 이 의붓아들이 가지고 있는 나쁜 특성 때문에 이 아들을 미워하여, 이 아들이 다음 차례의 카이사르가 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왕국의 위엄”은 후계자가 될 만한 다른 아들들이 모두 죽은 다음에야 비로소 마지못해 이 아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기원 4년에 티베리우스를 입양하여 왕좌의 상속자로 삼았습니다.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하자, 54세가 된 티베리우스—업신여김을 받는 자—는 “일어서”서 로마 황제이자 북방 왕으로서 권세를 잡았습니다.
9. 티베리우스는 어떻게 “매끄러운 방법으로 왕국을 잡”았습니까?
9 「신 브리태니카 백과 사전」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티베리우스는 원로원에 정치 공작을 펴,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한 지] 거의 한 달이 되도록 원로원에서 자기를 황제로 지명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는 원로원에 아우구스투스 외에는 어느 누구도 로마 제국을 통치하는 무거운 짐을 질 수 없다고 말하면서, 원로원 의원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한 사람이 아니라 일단의 사람들에게 맡김으로써 공화 정치를 회복하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역사가 윌 듀랜트는 이렇게 썼습니다. “원로원은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그가 마침내 권좌에 오를 때까지 그와 정중한 인사만 주고받았다.” 듀랜트는 이렇게 부언하였습니다. “양쪽 다 책략을 잘 쓴 셈이었다. 티베리우스는 원수(元首) 정치를 원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든 그것을 피할 방법을 모색했을 것이다. 원로원은 티베리우스를 두려워하고 미워했지만, 과거와 같이 이론상으로만 주권을 가지고 있는 민회들을 토대로 한 공화 정치를 부활시키는 것은 꺼렸다.” 그리하여 티베리우스는 “매끄러운 방법으로 왕국을 잡”았습니다.
10. “홍수의 팔들”은 어떻게 ‘부러졌’습니까?
10 “홍수의 팔들”—주변 왕국들의 군대들—에 관하여 천사는 “범람하게 되고 부러질”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티베리우스가 북방 왕이 되었을 때, 그의 조카 게르마니쿠스 카이사르는 라인 강에서 활약하고 있는 로마 군대의 사령관이었습니다. 기원 15년에, 게르마니쿠스는 자기의 군대를 이끌고 게르만족의 영웅 아르미니우스를 쳐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제한된 승리에 비해 희생이 커, 그 후 티베리우스는 독일에서 더 이상 군사 작전을 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 대신, 내란을 조장하여 게르만 부족들이 연합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티베리우스는 대체적으로 방어 외교 정책을 선호하였기 때문에, 국경을 강화하는 데 주력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상당히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홍수의 팔들”은 통제되고 ‘부러졌’습니다.
11. “계약의 지도자”는 어떻게 ‘부러졌’습니까?
11 여호와 하느님께서 땅의 모든 가족을 축복하기 위해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의 지도자”도 ‘부러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계약을 통해 약속된 아브라함의 씨였습니다. (창세 22:18; 갈라디아 3:16) 기원 33년 니산월 14일에,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있는 로마 총독 관저에서 본디오 빌라도 앞에 서 계셨습니다. 유대인 제사장들은 예수를 황제에 대한 반역죄로 고발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빌라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왕국은 이 세상의 일부가 아닙니다. ··· 내 왕국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로마 총독이 아무 허물도 없는 예수를 놓아 주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이렇게 소리 질러 말하였습니다. “당신이 이 사람을 놓아 준다면 당신은 카이사르의 벗이 아닙니다. 자기를 왕이라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카이사르를 거슬러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처형하라고 요구한 다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카이사르 외에 왕이 없습니다.” 카이사르에 대한 모욕은 거의 모두 포함되도록 티베리우스가 확대 적용시킨 “대역죄”에 관한 법에 따라, 빌라도는 예수가 ‘부러지’도록, 다시 말해서 고통의 기둥에 못박히도록 넘겨 주었습니다.—요한 18:36; 19:12-16; 마가 15:14-20.
한 폭군이 ‘계교를 꾸미다’
12. (ㄱ) 누가 티베리우스와 동맹하였습니까? (ㄴ) 티베리우스는 어떻게 ‘작은 나라를 힘입어 위력 있게 되’었습니까?
12 천사는 여전히 티베리우스에 관해 예언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들이 그와 동맹하였기 때문에 그는 속임수를 행하고 올라와서 작은 나라를 힘입어 위력 있게 될 것이다.” (다니엘 11:23) 로마 원로원 의원들은 헌법에 의거하여 티베리우스와 “동맹”하였기 때문에, 티베리우스는 공식적으로 그들에게 의존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속임수를 행하고 실제로는 “작은 나라를 힘입어 위력 있게” 되었습니다. 그 작은 나라란 로마의 근위대로서, 로마의 성벽 가까이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근위대가 가까이 있는 것은 원로원에 위협이 되었으며, 티베리우스가 자기의 권한에 대항하여 민중 가운데서 일어난 어떠한 봉기도 제압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약 1만 명의 근위병을 힘입어 위력을 유지하였습니다.
13. 티베리우스는 어떤 면에서 조상을 능가하였습니까?
13 천사는 다음과 같은 예언을 덧붙여 말하였습니다. “근심이 없는 동안에, 그가 관할 지역의 기름진 곳으로 들어가서 그의 조상과 조상의 조상도 하지 않은 일을 실제로 할 것이다. 그가 강탈물과 전리품과 소유물을 그들 가운데 흩어 줄 것이다. 또 요새화된 곳들에 대하여 계교를 꾸밀 것이나, 단지 때가 되기까지 그렇게 할 것이다.” (다니엘 11:24) 티베리우스는 의심이 대단히 많아서, 그의 통치 기간에는 계획적인 살인이 많았습니다. 주로 근위대 사령관인 세야누스의 영향 때문에, 티베리우스의 통치 후반기는 공포 정치로 특징을 이루었습니다. 결국 세야누스 자신도 의심을 받아 처형되었습니다. 백성에게 학정을 행한 면에서 티베리우스는 조상을 능가하였습니다.
14. (ㄱ) 티베리우스는 어떻게 “강탈물과 전리품과 소유물”을 로마의 속주들에 흩어 주었습니까? (ㄴ) 티베리우스는 사망할 즈음 어떻게 여겨지고 있었습니까?
14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강탈물과 전리품과 소유물”을 로마의 속주들에 흩어 주었습니다. 그가 사망할 때쯤, 그에게 복종하던 민족들은 모두 번영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세금이 무겁지 않았기 때문에, 티베리우스는 고난을 겪고 있던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관대함을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압제하거나 부정한 방법으로 문제를 처리하도록 독려하는 군인이나 관리가 있다면, 그들은 제국에 의해 보복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 권력의 기반이 확고히 다져져 있었기 때문에 대중은 지속적으로 안전을 누릴 수 있었으며, 향상된 교통 체제는 무역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티베리우스는 로마 안팎에서 국사가 공정하고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는지 살폈습니다. 법은 개선되었고,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가 시작한 개혁의 진전으로 사회·도덕 법규의 수준도 높아졌습니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계교를 꾸”몄습니다. 그래서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는 티베리우스를 가면을 쓰고 행동하는 데 능란한 위선적인 인물로 묘사하였습니다. 기원 37년 3월에 사망할 즈음, 티베리우스는 폭군으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15. 1세기 말과 2세기 초에 로마의 상황은 어떠하였습니까?
15 북방 왕의 역할을 계속한 티베리우스의 후계자들 가운데는 가이우스 카이사르(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1세, 네로,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가 있었습니다. 「신 브리태니카 백과 사전」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들은 아우구스투스의 국가 운영 정책과 건축 계획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는데, 혁신적인 면은 훨씬 부족한 반면 허세는 더 심했다.” 동 참조 문헌에서는 또한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합니다. “1세기 말과 2세기 초에, 로마는 위용도 절정에 달했고 인구도 가장 많았다.” 이 기간 중에 로마는 제국의 국경 지대에서 약간의 문제를 겪고 있기는 했지만, 기원 3세기가 되기까지는 로마와 남방 왕 사이에 예언된 첫 대결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남방 왕을 치다
16, 17. (ㄱ) 누가 다니엘 11:25에 언급된 북방 왕의 역할을 맡았습니까? (ㄴ) 누가 남방 왕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어떻게 그러한 일이 있게 되었습니까?
16 하느님의 천사는 예언을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그[북방 왕]는 자기의 힘과 마음을 불러일으켜 큰 군대로 남방 왕을 칠 것이며, 남방 왕도 전쟁을 하려고 대단히 크고 위력 있는 군대를 거느리고 분발하여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그[북방 왕]는 서 있지 못할 것인데, 그들이 그에게 불리한 계교를 꾸밀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진미를 먹는 바로 그 사람들이 그를 파멸시킬 것이다. 또 그의 군대도 떠내려가고, 많은 자들이 살해되어 쓰러지고 말 것이다.”—다니엘 11:25, 26.
17 옥타비아누스가 이집트를 로마의 한 속주로 만든 지 약 300년 후에, 로마의 황제 아우렐리아누스는 북방 왕의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한편, 로마의 식민지인 팔미라의 여왕 셉티미아 제노비아는 남방 왕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a (252면의 “제노비아—전사였던 팔미라의 여왕” 참조) 기원 269년에, 팔미라 군대는 로마를 위해 이집트를 안전한 곳으로 만든다는 미명하에 이집트를 점령하였습니다. 제노비아는 팔미라를 동쪽 지역을 지배하는 도시로 만들어, 로마의 동쪽 지역에 있는 속주들을 통치하고 싶어하였습니다. 제노비아의 야심에 경계심을 갖게 된 아우렐리아누스는 “자기의 힘과 마음”을 불러일으켜 제노비아를 쳤습니다.
18. 북방 왕인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와 남방 왕인 제노비아 여왕이 세력 다툼을 벌인 결과는 어떠하였습니까?
18 제노비아를 우두머리로 한 통치하는 실체로서, 남방 왕도 북방 왕과 전쟁을 하려고, 두 장군 잡다스와 잡바이 휘하에 “대단히 크고 위력 있는 군대를 거느리고 분발하여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아우렐리아누스는 이집트를 점령한 다음 소아시아와 시리아 정벌을 시작하였습니다. 제노비아는 에메사(지금의 홈스)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팔미라로 퇴각하였습니다. 아우렐리아누스가 그 도시를 포위 공격하자 제노비아는 용감하게 방어하였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제노비아와 그의 아들은 페르시아를 향해 도망하다가 유프라테스 강에서 로마 군대에게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팔미라 사람들은 기원 272년에 그 도시를 내주었습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제노비아를 죽이지 않고, 기원 274년에 로마 시내를 통과하는 개선 행렬의 주된 흥미거리로 삼았습니다. 제노비아는 여생을 사회적 지위가 있는 한 로마 사람의 부인이 되어 보냈습니다.
19. 아우렐리아누스는 어떻게 ‘그에게 불리하게 꾸며진 계교 때문에’ 죽게 되었습니까?
19 아우렐리아누스 자신도 ‘그에게 불리하게 꾸며진 계교 때문에 서 있지 못’하였습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기원 275년에 페르시아 사람들을 치러 원정을 떠났습니다. 아우렐리아누스가 트라키아에서 해협들을 건너 소아시아로 들어갈 기회를 엿보고 있던 중에, ‘그의 음식을 먹던’ 사람들이 그에게 불리한 계교를 꾸며 그를 “파멸”시켰습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그의 비서관인 에로스가 저지른 부정 행위를 문책할 참이었습니다. 그러자 에로스는 일부 장교들이 죽임을 당하도록 지명된 것처럼 그들의 명단을 날조하여 만들었습니다. 그 장교들은 이 명단을 보자 아우렐리아누스를 암살할 음모를 꾸며 그를 살해하게 되었습니다.
20. 북방 왕의 “군대”는 어떻게 “떠내려”갔습니까?
20 북방 왕의 활동은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로마의 다른 통치자들이 그의 뒤를 이었습니다. 한동안은 서쪽에도 황제가 있었고, 동쪽에도 황제가 있었습니다. 이 두 황제의 지배 아래서 북방 왕의 “군대”는 “떠내려”갔습니다. 다시 말해서 “흩어”졌습니다.b 그리고 북쪽에서 게르만 부족들이 침공해 오는 바람에 많은 사람이 “살해되어 쓰러”졌습니다. 기원 4세기에 고트족이 로마의 국경을 침공해 들어왔습니다. 그 이후로 침공이 잇달았습니다. 기원 476년에는, 게르만족의 지도자 오도아케르가 로마에서 통치하던 마지막 황제를 제거하였습니다. 6세기 초에, 서쪽의 로마 제국은 사분오열되어, 게르만족 출신의 왕들이 브리타니아, 갈리아,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스페인을 통치하였습니다. 동쪽에 있는 제국은 15세기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거대한 제국이 나뉘게 되다
21, 22. 콘스탄티누스는 기원 4세기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습니까?
21 여호와의 천사는 여러 세기에 걸쳐 일어난 로마 제국의 붕괴에 대해 불필요하게 자세히 언급하지 않고, 북방 왕과 남방 왕의 또 다른 행적에 대해 계속해서 예언하였습니다. 하지만 로마 제국의 진전 상황을 간단하게 살펴보는 것은, 나중 시대에 경쟁 관계에 있게 될 두 왕을 식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22 4세기에,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배교한 그리스도교를 국가적으로 승인하였습니다. 그는 심지어 기원 325년에, 소아시아의 니케아에 공의회를 소집하고 직접 주재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후에, 콘스탄티누스는 제국의 본거지를 로마에서 비잔티움 즉 콘스탄티노플로 옮겨, 그 도시를 새로운 수도로 삼았습니다. 로마 제국은 기원 395년 1월 17일에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사망할 때까지 단 한 사람의 황제의 통치권 아래 지속되었습니다.
23. (ㄱ) 테오도시우스가 사망하자 로마 제국은 어떻게 나뉘어졌습니까? (ㄴ) 동로마 제국은 언제 끝나게 되었습니까? (ㄷ) 1517년에 이르러는 누가 이집트를 통치하게 되었습니까?
23 테오도시우스가 사망하자, 로마 제국은 그의 아들들에 의해 나뉘어졌습니다. 호노리우스는 서쪽 지역을 받았고, 아르카디우스는 동쪽 지역을 받아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삼았습니다. 브리타니아, 갈리아, 이탈리아, 스페인, 북아프리카는 서쪽 지역에 속한 속주들이었습니다. 마케도니아, 트라키아,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는 동쪽 지역에 속한 속주들이었습니다. 기원 642년에는, 이집트의 수도 알렉산드리아가 사라센 사람들(아랍 사람들)에게 함락되어, 이집트는 칼리프(이슬람 제국 군주의 칭호)들의 지배를 받는 속주가 되었습니다. 1449년 1월에, 콘스탄티누스 11세는 동쪽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습니다. 술탄(오스만 제국 황제의 칭호)인 메메트 2세의 지휘 아래 오스만 튀르크족이 1453년 5월 29일에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면서, 동로마 제국은 끝나게 되었습니다. 1517년에 이집트는 터키 사람들의 속주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때가 되면, 이 고대 남방 왕의 땅은 서쪽에서 출현한 또 다른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될 것입니다.
24, 25. (ㄱ) 일부 역사가들에 의하면, 무엇이 신성 로마 제국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습니까? (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라는 칭호는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24 로마 제국의 서쪽 지역에서는 로마의 가톨릭 주교가 등장하였는데, 특히 기원 5세기에는 교황의 권위를 주장한 것으로 유명한 교황 레오 1세가 등장하였습니다. 이윽고 교황은 서쪽 지역의 황제에게 왕관을 씌우는 권한까지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기원 800년의 크리스마스 날에 로마에서 바로 그러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교황 레오 3세는 새로 탄생한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프랑크 왕 찰스(샤를마뉴)에게 왕관을 씌워 주었습니다. 이 대관식은 로마에 황제 통치를 부활시켰으며, 일부 역사가들에 따르면, 신성 로마 제국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동로마 제국과 서쪽의 신성 로마 제국이 존재하게 되었는데, 둘 다 그리스도교를 믿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25 시간이 흐르면서, 샤를마뉴의 후계자들은 무능한 통치자임이 드러났습니다. 심지어 얼마 동안은 황제의 자리가 비어 있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사이에, 독일 왕 오토 1세는 이탈리아의 북쪽 지역과 중부 지역의 많은 부분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이탈리아의 왕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기원 962년 2월 2일에, 교황 요한 12세는 오토 1세에게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왕관을 씌워 주었습니다. 그 제국의 수도는 독일에 있었으며, 황제들도 독일 사람이었고, 신민들도 대부분 독일 사람이었습니다. 5세기 후에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家)가 “황제”의 칭호를 얻게 되었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잔여 기간 중 대부분의 기간 그 칭호를 쥐고 있었습니다.
두 왕이 다시 분명히 식별되다
26. (ㄱ) 신성 로마 제국의 종말에 대하여 어떻게 말할 수 있습니까? (ㄴ) 누가 북방 왕으로 등장하였습니까?
26 나폴레옹 1세는 1805년에 독일에서 일련의 승리를 거둔 후 신성 로마 제국의 존재를 인정하기를 거부함으로 신성 로마 제국에 치명타를 입혔습니다. 왕관을 지키는 데 실패한 황제 프란츠 2세는 1806년 8월 6일에 로마 황제의 지위에서 사임하고 본국 정부로 물러가 오스트리아 황제가 되었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황 레오 3세와 프랑크 왕 샤를마뉴에 의해 창건된 신성 로마 제국은 1006년간 지속되다가 종말을 고하게 되었습니다. 1870년에, 로마는 교황청에서 독립하여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이듬해에는, 빌헬름 1세가 카이사르 즉 카이저(독일 황제의 칭호)로 명명되면서 독일 제국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현대의 북방 왕—독일—이 세계 무대에 등장하였습니다.
27. (ㄱ) 이집트는 어떻게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습니까? (ㄴ) 누가 남방 왕의 지위에 올랐습니까?
27 그러면 현대의 남방 왕은 누구임이 드러났습니까? 역사에 의하면, 영국이 17세기에 제국의 힘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 1세는 영국의 무역로를 차단하고 싶어, 1798년에 이집트를 정복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전쟁이 벌어졌고, 영국과 오스만 제국이 동맹을 맺는 바람에 프랑스군은 이집트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집트는 두 왕 사이의 세력 다툼이 시작되었을 때 남방 왕으로 식별됐던 나라입니다. 다음 세기에는, 이집트에서 영국의 영향력이 증가하였습니다. 1882년 이후로, 이집트는 사실상 영국의 속국이 되었습니다. 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을 때, 이집트는 터키에 속하여 헤디브 즉 터키에서 파견한 총독의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전쟁에서 터키가 독일 편을 들자, 영국은 헤디브를 해임시키고 이집트가 영국의 보호국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영국과 미국은 점차 긴밀한 유대를 형성하여 영미 세계 강국이 되었습니다. 두 나라는 함께 남방 왕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각주]
a “북방 왕”이나 “남방 왕”이라는 명칭은 일종의 칭호이므로, 왕이든 여왕이든 국가들의 연합체이든, 통치권을 행사하는 실체라면 무엇이든 가리킬 수 있다.
어떤 점을 알게 되었습니까?
● 어느 로마 황제가 처음으로 북방 왕으로 일어섰으며, 그는 언제 “강제 징수자”를 보냈습니까?
●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한 후 누가 북방 왕의 지위를 차지하였으며, “계약의 지도자”는 어떻게 ‘부러졌’습니까?
● 북방 왕인 아우렐리아누스와 남방 왕인 제노비아 사이의 세력 다툼의 결과는 어떠하였습니까?
● 로마 제국은 어떻게 되었으며, 19세기 말에는 어느 강국들이 두 왕의 지위를 차지하였습니까?
[248-251면 네모와 삽화]
공경을 받는 자와 업신여김을 받는 자
한 사람은 내분에 시달리던 공화국을 세계 제국으로 변모시켰다. 다른 한 사람은 그 제국의 부를 23년 만에 20배로 증가시켰다. 한 사람은 사망할 당시 공경을 받고 있었지만, 다른 한 사람은 업신여김을 받고 있었다. 로마의 이 두 황제의 통치 기간은 예수의 생애와 봉사 기간과 겹쳤다. 이 두 황제는 누구였는가? 그리고 한 사람은 공경을 받은 반면 다른 한 사람은 공경을 받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벽돌 도시였던 로마를 대리석 도시로 변모”시킨 사람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기원전 44년에, 그의 누이의 손자였던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는 18세밖에 되지 않았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들로 입양되어 개인적으로 그의 주 상속자가 된 어린 옥타비아누스는 상속 재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즉시 로마로 떠났다. 로마에서 옥타비아누스는 만만치 않은 상대와 마주치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카이사르의 수석 보좌관이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로서, 그 역시 주 상속자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뒤이어 벌어진 정치적 음모와 세력 다툼은 13년간이나 지속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1년에)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그의 애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합군을 물리친 다음에야 비로소 논란의 여지 없는 로마 제국의 통치자로 부상하였다. 이듬해에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자살하자, 옥타비아누스는 이집트를 합병하였다. 그리하여 그리스 제국의 마지막 흔적마저 제거되자, 로마가 세계 강국이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전제적인 권력을 휘두르다 암살당한 사실을 기억하고 그러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조심하였다. 그는 공화 정치를 좋아하는 로마 사람들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자신의 군주 정치에 공화 정치의 옷을 입혀 위장하였다. 그는 “왕”이나 “독재관”과 같은 칭호를 거절하였다. 한 단계 더 나아가, 모든 속주에 대한 통제권을 로마 원로원에 이양하겠다는 자신의 의도를 공표하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직위들에서 물러나겠다고 제의하였다. 이러한 책략은 성공하였다. 고맙게 여긴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그가 가지고 있던 지위들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일부 속주들에 대한 통제권도 가지고 있도록 강력히 권하였다.
뿐만 아니라, 원로원은 기원전 27년 1월 16일에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는데, 그것은 “높여진 자, 신성한 자”라는 뜻이다. 옥타비아누스는 그 칭호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위한 달의 이름을 새로 짓고 2월에서 하루를 빌려 와, 8월(August)도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의 이름을 따라 명명한 달인 7월(July)만큼 날수가 많게 하였다. 그리하여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최초의 황제가 되었고, 그 후로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또는 “존엄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후에, 그는 또한 “폰티펙스 막시무스”(대제사장)라는 칭호도 갖게 되었으며, 기원전 2년—예수께서 탄생하시던 해—에는 원로원에서 그에게 파테르 파트리아이 즉 “국부(國父)”라는 칭호까지 붙여 주었다.
그 동일한 해에,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는] 사람이 거주하는 온 땅에 포고령을 내려 등록하게 하였다. ··· 그래서 모든 사람이 등록을 하려고 각자 자기의 도시로 여행을 떠났다.” (누가 2:1-3) 이 포고령으로 인해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시게 되어 성서 예언이 성취되었다.—다니엘 11:20; 미가 5:2.
아우구스투스 통치하의 정부는 어느 정도 정직하게 통치한 것과 안정된 통화 제도를 유지한 것으로 특징을 이루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또한 효과적인 우편 제도를 마련하였고 도로와 다리들을 건설하였다. 그는 육군을 재조직하였고, 상비 해군을 창설하였으며, 근위대로 알려진 황제 호위 정예 부대를 만들었다. (빌립보 1:13) 그의 후원 아래, 베르길리우스나 호라티우스 같은 작가들이 번영을 누렸고, 조각가들은 오늘날 고전 형식이라고 부르는 아름다운 작품들을 만들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마무리짓지 못하고 남겨 둔 건물들을 완성하였고 많은 신전을 복구하였다. 그가 도입한 팍스 로마나(“로마 지배에 의한 평화”) 정책은 200년 이상 지속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기원 14년 8월 19일에 76세를 일기로 사망하였고, 그 이후 신격화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자기가 “벽돌 도시였던 로마를 대리석 도시로 변모시켰다”고 자랑하였다. 그는 로마가 내분에 시달리던 이전의 공화 정치 시절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다음에 황제가 될 사람을 훈련시키고 싶어하였다. 하지만 후계자와 관련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한 조카와 두 손자와 한 사위와 한 의붓아들이 모두 사망하는 바람에, 계승자로는 의붓아들인 티베리우스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업신여김을 받는 자”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한 지 한 달도 채 안 되어, 로마 원로원은 54세인 티베리우스를 황제로 지명하였다. 티베리우스는 기원 37년 3월까지 살면서 통치하였다. 따라서 그는 예수께서 공개 봉사를 수행하시던 기간에 로마의 황제였다.
황제로서 티베리우스는 미덕과 악덕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 그의 미덕 가운데는, 사치스러운 것에 돈을 낭비하는 일을 싫어하는 특성이 있었다. 그 결과, 제국은 번영을 누렸으며, 그에게는 재난이나 곤경에서 회복되도록 도울 수 있는 자금이 있었다. 티베리우스에게 영예가 될 만한 일로서, 그는 자신을 단지 한 인간에 불과한 존재로 여겨 여러가지 영예로운 칭호를 거절하였으며, 황제 숭배는 일반적으로 자기 자신보다는 아우구스투스에게 하도록 하였다. 아우구스투스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자신들을 위해 한 것과는 달리, 그는 달력의 한 달의 이름을 자기 이름을 따서 짓도록 하는 일을 하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자기에게 영예를 돌리는 일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티베리우스에게는 미덕보다 악덕이 더 많았다. 그는 의심이 몹시 많아 사람들을 대할 때 위선적으로 행동하였고, 그의 통치 기간에는 계획적인 살인이 많았는데, 살해된 사람들 중에는 이전에 그의 친구였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는 대역죄(lèse-majesté)에 관한 법을 확대 적용시켜, 폭동을 선동하는 행위뿐만 아니라 단지 자신의 명예를 훼손하는 말만 해도 그 법의 적용 대상에 포함시켰다. 유대인들은 아마 이 법의 힘을 빌려,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게 예수를 죽이라고 압력을 가하였을 것이다.—요한 19:12-16.
티베리우스는 로마 성벽 북쪽에 요새화된 병영을 구축하여 근위대를 로마 부근에 집결시켜 놓았다. 근위대가 이처럼 가까이 있는 것은 티베리우스가 권력을 행사하는 데 방해가 되는 로마 원로원에 위협이 되었고, 백성의 무법한 행동을 억제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티베리우스는 또한 밀고 제도를 장려하여, 그의 통치 후반기는 공포 정치로 특징을 이루었다.
티베리우스는 사망할 당시 폭군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그가 죽자, 로마 사람들은 기뻐하였고 원로원은 그를 신격화하기를 거부하였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우리는 “업신여김을 받는 자”가 “북방 왕”으로 일어서게 될 것이라고 한 예언이 티베리우스에게 성취되는 것을 보게 된다.—다니엘 11:15, 21.
어떤 점을 알게 되었습니까?
● 옥타비아누스는 어떻게 로마 최초의 황제가 되었습니까?
● 아우구스투스의 정부의 업적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 티베리우스가 지닌 미덕과 악덕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습니까?
● “업신여김을 받는 자”에 관한 예언이 어떻게 티베리우스에게 성취되었습니까?
[삽화]
티베리우스
[252-255면 네모와 삽화]
제노비아—전사였던 팔미라의 여왕
“그의 피부는 짙은 색을 띠고 있었다. ··· 치아는 진주같이 희었으며, 크고 까만 눈은 유난히 광채를 발하였는데, 더없이 매력적인 상냥한 눈빛 때문에 다소 부드러움을 띠고 있었다. 목소리는 힘차면서도 아름다웠다. 남자와 같은 이해심은 학문에 의해 보강되어 더욱 돋보였다. 라틴어도 잘 알고 있었으며, 그리스어, 시리아어, 이집트어에도 그에 못지 않은 완벽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시리아의 도시 팔미라의 여왕이자 전사(戰士)였던 제노비아에게 위와 같은 찬사를 부여하였다.
제노비아의 남편은 팔미라의 귀족이었던 오다이나투스였다. 오다이나투스는 로마 제국을 위해 페르시아에 대한 군사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기원 258년에 로마의 집정관의 지위에 오르는 상을 받았다. 2년 후, 오다이나투스는 로마 황제 갈리에누스로부터 ‘온 동방의 통치자’(corrector totius Orientis)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 칭호는 페르시아 왕 샤푸르에게 거둔 승리를 인정하여 주어진 것이다. 오다이나투스는 마침내 자신을 “왕 중의 왕”이라고 칭하기까지 하였다. 오다이나투스가 이러한 성공을 거둔 것은 상당 부분 제노비아의 용기와 신중함 덕분이었을 것이다.
제노비아가 제국 건설의 야망을 품다
오다이나투스는 한창 위세를 떨치던 기원 267년에 계승자와 함께 암살당하였다. 제노비아가 남편의 지위를 이어받았는데, 제노비아의 아들은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 어렸기 때문이다. 제노비아는 아름답고 야심에 차 있었으며 유능한 행정가인 데다가, 남편과 함께 군사 작전을 수행하는 데 익숙해 있었고 여러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기 때문에, 신하들의 존경과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제노비아는 학문을 사랑하여, 주위에 항상 지식인들을 두고 있었다. 제노비아의 고문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철학자이자 웅변가인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있었는데, 그는 “살아 있는 도서관이자 걸어 다니는 박물관”이라고 불리었다. 저술가 리처드 스톤먼은 「팔미라와 그 제국—로마에 대한 제노비아의 반란」(Palmyra and Its Empire—Zenobia’s Revolt Against Rome)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기술한다. “제노비아는 오다이나투스 사후 5년 동안에 ··· 백성의 정신 속에 동방의 여왕으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제노비아의 영토 한쪽에는 제노비아와 그의 남편이 기세를 한풀 꺾어 놓은 페르시아가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쇠퇴해 가고 있는 로마가 있었다. 역사가 J. M. 로버츠는 로마 제국의 당시 상황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3세기에 ··· 로마는 동서 국경 지대에서도 곤혹스러운 시기를 겪고 있었지만, 국내에서도 내전과 계승권 다툼에 시달리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황제를 사칭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도) 황제가 스물두 번이나 바뀐 것이다.” 반면에, 시리아의 여왕은 자신의 왕국에서 권력 기반이 든든한 절대 군주였다. 스톤먼은 이렇게 기술한다. “두 제국[페르시아와 로마]간의 세력 균형을 조절하고 있던 제노비아는 두 제국을 모두 지배할 제3의 제국을 건설하려는 야망을 품을 수 있었다.”
기원 269년에, 로마의 통치권에 반기를 들고 황제를 사칭하는 사람이 이집트에 나타나자, 제노비아에게 왕권을 확장할 기회가 생겼다. 제노비아의 군대는 신속히 이집트로 진격하여 반군을 진압하고 그 나라를 차지하였다. 제노비아는 스스로 이집트의 여왕이라고 선포하고는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은 주화를 발행하기까지 하였다. 이제 제노비아의 왕국은 나일 강에서부터 유프라테스 강까지 확장되게 되었다. 제노비아는 그의 생애의 이 시점에서 “남방 왕”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다니엘 11:25, 26.
제노비아 시대의 수도
제노비아는 수도인 팔미라를 로마 세계의 큰 도시들에 견줄 만큼 견고하고 아름답게 만들었다. 팔미라의 인구는 15만여 명에 이른 것으로 추산된다. 팔미라에는 화려한 공공 건물, 신전, 정원, 기둥, 기념물 등이 가득 들어서 있었는데, 그 도시를 둘러싸고 있던 성벽은 둘레가 21킬로미터나 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요 거리에는 높이가 15미터가 넘는 코린트식 기둥 약 1500개가 주랑을 이루고 늘어서 있었다. 도시에는 영웅들과 부유한 독지가들의 상(像)과 반신상이 많이 있었다. 기원 271년에 제노비아는 또한 자신과 죽은 남편을 묘사한 두 개의 상(像)을 세웠다.
태양 신전은 팔미라에서 가장 훌륭한 건축물 가운데 하나로, 의문의 여지 없이 이 도시의 종교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제노비아 자신도 아마 태양신과 관련이 있는 신을 숭배했을 것이다. 하지만 3세기의 시리아는 여러 종교가 공존하는 나라였다. 제노비아의 영토에는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과 유대인들 그리고 태양과 달의 숭배자들이 있었다. 제노비아는 이러한 다양한 숭배 방식에 대해 어떤 태도를 나타냈는가? 저술가 스톤먼은 이렇게 기술한다. “현명한 통치자라면 자신의 백성에게 적절해 보이는 관습은 어느 것도 무시하지 않을 것이다. ··· 사람들은 신들이 팔미라의 편에 서 있기를 ··· 바랐다.” 제노비아는 종교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나타낸 것 같다.
제노비아는 뛰어난 인품으로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았다. 가장 의미심장한 사실은, 그가 다니엘의 예언에 언급된 한 정치적 실체를 대표하는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의 통치 기간은 5년 이상 지속되지 못하였다. 로마 황제 아우렐리아누스가 기원 272년에 제노비아를 패배시킨 다음 팔미라를 약탈하여 복구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렸다. 제노비아에게는 관대한 조처가 내려졌다. 제노비아는 로마 원로원의 한 의원과 결혼하여 아마 은둔 생활을 하며 여생을 보낸 것으로 전해진다.
어떤 점을 알게 되었습니까?
● 제노비아는 어떤 인품을 지닌 것으로 묘사되었습니까?
● 제노비아가 세운 공적 가운데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 종교에 대한 제노비아의 태도는 어떠하였습니까?
[삽화]
병사들에게 연설을 하고 있는 여왕 제노비아
[246면 도표와 삽화]
다니엘 11:20-26에 나오는 왕들
북방 왕 남방 왕
다니엘 11:20 아우구스투스
다니엘 11:21-24 티베리우스
다니엘 11:25, 26 아우렐리아누스 여왕 제노비아
예언된 대로 독일 제국 영국,
로마 제국이 뒤이어
붕괴되면서 영미 세계 강국
형성된 국가들
[삽화]
티베리우스
[삽화]
아우렐리아누스
[삽화]
샤를마뉴의 작은 조상(彫像)
[삽화]
아우구스투스
[삽화]
17세기 영국의 전함
[230면 전면 삽화]
[233면 삽화]
아우구스투스
[234면 삽화]
티베리우스
[235면 삽화]
아우구스투스의 포고령으로 인해, 요셉과 마리아는 베들레헴으로 여행하게 되었다
[237면 삽화]
예언된 대로, 예수는 죽임을 당하여 ‘부러졌’다
[245면 삽화]
1. 샤를마뉴 2. 나폴레옹 1세 3. 빌헬름 1세 4. 제1차 세계 대전 중의 독일 군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