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내 영혼이 승인한 나의 택함받은 자!’
1, 2. 이사야 42장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너희는 나의 증인들, 곧 내가 택한 나의 종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다.” (이사야 43:10) 예언자 이사야가 기원전 8세기에 기록한 여호와의 이러한 선언은, 여호와의 고대 계약 백성이 증인들로 이루어진 나라였음을 알려 줍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택함받은 종이었습니다. 약 2600년 후인 1931년에,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씀이 자기들에게 적용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였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이름을 채택하고, 하느님의 지상 종이 되는 것과 관련된 책임들을 충심으로 받아들였습니다.
2 여호와의 증인들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한 이유에서 이사야서 42장은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 됩니다. 그 장에서는 여호와께서 어떤 종은 승인하시고 어떤 종은 배척하시는지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이 예언과 그 성취를 고려해 보면, 하느님의 승인을 얻게 해 주는 것은 무엇이고 그분의 은혜를 상실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통찰력을 얻게 됩니다.
“내가 나의 영을 그의 속에 두었다”
3. 여호와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나의 종”에 관해 무엇이라고 예언하십니까?
3 여호와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자신이 직접 택하신 종이 나타날 것임을 예언하십니다. “보라! 내가 굳게 잡고 있는 나의 종을! 내 영혼이 승인한 나의 택함받은 자를! 내가 나의 영을 그의 속에 두었다. 그는 나라들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다. 그는 외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을 것이며, 거리에서 자기 목소리가 들리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부서진 갈대를 꺾지 않을 것이며, 희미한 아마 심지를 끄지 않을 것이다. 진실하게 그는 공의를 베풀 것이다. 그는 희미해지지 않고 부서지는 일도 없이 마침내 땅에 공의를 세우리니, 섬들이 그의 법을 계속 기다릴 것이다.”—이사야 42:1-4.
4. 예언된 “택함받은 자”는 누구이며, 그 점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4 여기서 말하는 종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의문의 여지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이 마태의 복음서에 인용되어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 12:15-21) 사랑받는 종, “택함받은 자”는 예수입니다. 여호와께서 언제 자신의 영을 예수 위에 두셨습니까? 기원 29년에 예수께서 침례받으실 때입니다. 영감받은 기록은 그 침례에 대해 묘사하면서, 예수께서 물에서 올라오신 후에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음을 알려 줍니다.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려왔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러한 음성이 났다. ‘너는 내 아들, 사랑하는 자이다. 내가 너를 승인하였다.’” 여호와께서는 이러한 방법으로 친히 자신이 사랑하시는 종이 누구인지 밝히셨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수행하신 봉사의 직무나 그분이 행하신 기적들은 여호와의 영이 참으로 예수 위에 있었음을 증명해 주었습니다.—누가 3:21, 22; 4:14-21; 마태 3:16, 17.
“그는 나라들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다”
5. 기원 1세기에 공의가 무엇인가를 명확히 알려 줄 필요가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5 여호와의 택함받은 자는 참다운 공의를 “베풀”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참다운 공의가 분명히 나타나게 할 것이었습니다. “그는 나라들에게 공의가 무엇인가를 명확히 알려 줄 것”이었습니다. (마태 12:18) 기원 1세기에는 이 일이 참으로 필요하였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공의와 의에 대해 왜곡된 견해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엄격한 법전—상당 부분은 그들 스스로 만든 것—을 따름으로 의에 도달하려고 하였습니다. 법조문을 중시하는 그들의 공의에는 자비와 동정심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6. 예수께서는 어떻게 참다운 공의가 무엇인지 알려 주셨습니까?
6 그와는 대조적으로, 예수께서는 공의에 대한 하느님의 견해를 밝혀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가르침과 삶의 방식을 통해서, 참다운 공의는 동정심 많고 자비로운 것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유명한 산상 수훈을 고려해 보십시오. (마태 5-7장) 공의와 의를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에 대한 참으로 훌륭한 설명입니다! 복음서의 기록을 읽을 때, 우리는 예수께서 가난한 사람들과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내신 동정심에 감동을 받지 않습니까? (마태 20:34; 마가 1:41; 6:34; 누가 7:13) 예수께서는 구부러지고 두들겨 맞은 상한 갈대와 같은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소식을 전해 주셨습니다. 그들은 연기나는 아마 심지와도 같아서, 마지막 남은 생명의 불꽃마저도 거의 꺼져 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부서진 갈대”를 꺾는 일도, “희미한 아마 심지”를 끄는 일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사랑과 동정심에 찬 그분의 말씀과 행동은 온유한 사람들의 마음을 북돋워 주었습니다.—마태 11:28-30.
7. 예언에서, 예수께서 ‘거리에서 외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7 그러면 예언에서, 예수께서 “외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을 것이며, 거리에서 자기 목소리가 들리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께서는 그 시대의 많은 사람들과는 달리, 스스로 자랑하며 떠벌리고 다니는 분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마태 6:5) 나병 환자를 고쳐 주셨을 때에도 예수께서는 고침을 받은 사람에게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가 1:40-44) 예수께서는 널리 알려져서 명성을 얻기를 바라지 않으셨으며, 사람들이 간접적으로 들은 소문에 근거하여 결론을 내리기를 원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보다는 사람들이 확실한 증거에 근거하여 자신이 그리스도, 즉 여호와의 기름부음받은 종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분별할 수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8. (ㄱ) 예수께서는 어떻게 “나라들에게 공의를” 베푸셨습니까? (ㄴ) 이웃다운 사마리아 사람에 관한 예수의 예는 우리에게 공의에 대해 어떤 점을 가르쳐 줍니까?
8 택함받은 종은 “나라들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었는데, 예수께서 바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공의의 동정적인 속성을 강조하셨을 뿐 아니라, 하느님의 공의가 모든 사람을 포용해야 한다는 점도 가르치셨습니다. 한번은 예수께서 율법에 정통한 어떤 사람에게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께 “누가 참으로 내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아마 예수께서 “당신과 같은 유대인입니다”라고 대답하실 줄로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웃다운 사마리아 사람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비유에서, 레위 사람이나 제사장은 강도들에게 습격당한 어떤 사람을 도와주지 않은 반면 사마리아 사람은 그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질문을 한 사람은, 이 경우에 이웃은 레위 사람이나 제사장이 아니라 멸시받는 사마리아 사람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예의 결론에서 이렇게 권고하셨습니다. “당신 자신도 그와 같이 행하십시오.”—누가 10:25-37; 레위 19:18.
‘그는 희미해지지 않고 부서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9. 참다운 공의의 속성에 대한 이해는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입니까?
9 예수께서 참다운 공의의 속성을 명확히 알려 주셨으므로, 그분의 제자들은 그러한 특성을 나타내는 법을 배웠습니다. 우리도 그러한 특성을 나타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선과 악에 대한 하느님의 표준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이 공정하고 의로운지를 결정하실 권리를 하느님께서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호와의 방법대로 일을 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의 올바른 행실은 참다운 공의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밝혀 줄 것입니다.—베드로 첫째 2:12.
10. 공의를 나타내는 일에, 전파하고 가르치는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0 우리는 또한 전파하고 가르치는 활동에 부지런히 참여할 때 참다운 공의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자신과 자신의 아들 그리고 자신의 목적에 관한, 생명을 구하는 지식을 관대하게 공급해 주셨습니다. (요한 17:3) 그러한 지식을 우리 자신만 알고 있는 것은 옳은 일도 공정한 일도 아닐 것입니다. 솔로몬은 “네 손에 선을 행할 능력이 있거든, 마땅히 받아야 할 자들에게 선을 베풀기를 주저하지 말아라”라고 말합니다. (잠언 3:27) 하느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인종적·민족적·국가적 배경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마음을 다하여 전하도록 합시다.—사도 10:34, 35.
11. 우리는 예수를 본받아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11 또한,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예수께서 대하신 방식으로 대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낙담케 하는 문제들에 직면하기 때문에 동정심과 격려가 필요합니다. 심지어 헌신한 일부 그리스도인들도 매우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어서, 부서진 갈대나 연기나는 심지와 같은 상태에 있을지 모릅니다. 그들에게 우리의 지원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누가 22:32; 사도 11:23) 공의를 나타내는 면에서 예수를 본받으려고 노력하는 참 그리스도인 연합체에 속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새 힘을 주는 일입니다!
12. 머지않아 모든 사람을 위한 공의가 실현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2 모든 사람을 위한 공의가 실현될 날이 과연 올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틀림없이 올 것입니다. 여호와의 택함받은 자는 ‘희미해지지 않고 부서지는 일도 없이 마침내 땅에 공의를 세울’ 것입니다. 아주 가까운 장래에, 즉위한 왕이신 부활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수하실’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둘째 1:6-9; 계시 16:14-16) 인간의 통치권은 하느님의 왕국으로 대치될 것입니다. 공의와 의가 넘쳐 흐를 것입니다. (잠언 2:21, 22; 이사야 11:3-5; 다니엘 2:44; 베드로 둘째 3:13) 여호와의 종들은 어느 곳에 있든지—심지어 먼 곳, “섬들”에 있는 종들까지도—그날을 간절히 고대하며 기다립니다.
‘내가 그를 이방 사람들의 빛으로 주겠다’
13.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택함받은 종에 대해 무엇이라고 예언하십니까?
13 이사야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의 창조주이시고 그것을 펴시는 위대한 분, 땅과 그 소출을 베푸시는 분,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고 땅에서 걷는 자들에게 영을 주시는 분인 참 하느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사야 42:5) 창조주 여호와에 대한 참으로 강력한 묘사입니다! 여호와의 위력을 생각나게 해 주는 이러한 말은, 그분의 말씀이 대단히 무게 있게 느껴지게 해 줍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로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내가 너를 보호하고 너를 백성의 계약으로, 이방 사람들의 빛으로 주리니, 너는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사람을 캄캄한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어둠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구금장에서 이끌어 낼 것이다.”—이사야 42:6, 7.
14. (ㄱ) 여호와께서 자신의 승인받은 종의 손을 붙잡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ㄴ) 택함받은 종은 무슨 역할을 합니까?
14 우주의 위대한 창조주, 생명을 주시고 유지시켜 주시는 분이 자신의 택함받은 종의 손을 붙잡고, 온전하고 한결같은 지원을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얼마나 안심이 되는 말씀입니까! 뿐만 아니라, 여호와께서는 그를 “백성의 계약”으로 주시기 위해 안전하게 지켜 주십니다. 계약은 약정이요, 협약이며, 엄숙한 약속입니다. 그것은 확실한 규정입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종을 “백성에게 보증”으로 삼으셨습니다.—미국역.
15, 16. 예수께서는 어떻게 “이방 사람들의 빛”이 되어 주셨습니까?
15 약속된 종은 “이방 사람들의 빛”으로서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어둠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해방시킬 것입니다. 예수께서 바로 그러한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심으로써 하늘의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요한 17:4, 6) 그분은 종교적 거짓을 폭로하셨고,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셨고, 종교적으로 속박되어 있는 사람들이 영적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마태 15:3-9; 누가 4:43; 요한 18:37) 그분은 어둠에 속한 일을 행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셨고, 사탄이 “거짓의 아버지”이자 “이 세상의 통치자”임을 폭로하셨습니다.—요한 3:19-21; 8:44; 16:11.
16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 (요한 8:12) 그분은 자신의 완전한 인간 생명을 대속물로 바치셨을 때 아주 놀라운 방법으로 자신이 세상의 빛임을 증명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믿음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과 승인된 관계를 누리고 영원한 생명의 전망을 가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마태 20:28; 요한 3:16) 예수께서는 전생애를 통해 경건한 정성을 완벽하게 나타내심으로써, 여호와의 주권을 옹호하며 마귀가 거짓말쟁이임을 증명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참으로, 눈먼 사람들에게 시력을 주신 분이며, 영적 어둠에 갇힌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신 분입니다.
17. 우리는 어떻게 빛을 비추는 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합니까?
17 예수께서는 산상 수훈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빛입니다.” (마태 5:14) 우리도 역시 빛을 비추는 자가 아닙니까? 우리는 우리의 생활 방식과 전파 활동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참다운 계몽의 근원이신 여호와께로 인도하는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본받아 여호와의 이름을 알리고, 그분의 주권을 옹호하고, 그분의 왕국을 인류의 유일한 희망으로 선포합니다. 또한 빛을 비추는 자로서 종교적 거짓을 폭로하고, 어둠에 속한 부정한 일들에 대해 경고하고, 악한 자인 사탄을 폭로하는 일을 합니다.—사도 1:8; 요한 첫째 5:19.
‘여호와께 새 노래를 노래하여라’
18.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백성에게 무엇을 알려 주십니까?
18 이제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백성에게로 주의를 돌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여호와이다. 이것이 나의 이름이다.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새긴 형상에게 주지 않을 것이다. 보라, 처음 일들—그것들은 이루어졌고, 새로운 일들을 내가 말한다. 그 일들이 일어나기도 전에, 내가 너희에게 들려 준다.” (이사야 42:8, 9) “나의 종”에 대한 예언을 하신 분은, 무가치한 신들 중 하나가 아니라 오직 한 분의 살아 계신 참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그 예언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으며, 또 실제로 이루어졌습니다. 여호와 하느님은 참으로 새로운 일들을 도모하시는 분이며, 그 일들이 일어나기도 전에 그 일들을 자신의 백성에게 알려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합니까?
19, 20. (ㄱ)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합니까? (ㄴ) 오늘날 누가 여호와께 찬양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까?
19 이사야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바다와 거기에 가득 찬 것을 향해 내려가는 사람들아, 너희 섬들과 거기에 거주하는 자들아, 여호와께 새 노래를, 땅 끝에서부터 그분에 대한 찬양을 노래하여라. 광야와 그 도시들, 게달이 거주하는 정착촌들은 목소리를 높여라. 바위에 거주하는 자들은 기뻐 외쳐라. 산꼭대기에서 큰 소리로 외쳐라.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며, 섬들 중에서 그분에 대한 찬양을 알려라.”—이사야 42:10-12.
20 도시들과 광야의 마을들과 섬들에 거주하는 자들, 심지어 “게달” 즉 사막의 야영지에 거주하는 자들까지도—어느 곳에 사는 사람이든지 모두—여호와께 찬양의 노래를 부르라는 강력한 권고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수백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이 예언적 호소에 반응을 나타내 왔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설레는 일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여호와를 자기들의 하느님으로 삼았습니다. 여호와의 백성은 230여 개의 나라와 지역에서 이 새 노래—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는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문화와 언어와 인종이 다양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이 합창단에 속해서 함께 노래를 부르는 것은 참으로 감격적인 일입니다!
21. 하느님의 백성의 적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찬양의 노래를 잠잠케 하는 데 성공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1 반대자들은 하느님을 대적하여 일어서서 이 찬양의 노래를 잠잠케 할 수 있습니까?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용사처럼 여호와께서 나가실 것이다. 전사처럼 그분은 열심을 일으키실 것이다. 그분은 외치실 것이다. 그렇다. 전쟁 함성을 발하실 것이다. 그 적들보다 힘이 있음을 보이실 것이다.” (이사야 42:13) 어떤 세력이 감히 여호와를 대적하여 일어설 수 있습니까? 약 3500년 전에 예언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은 다음과 같이 노래한 적이 있습니다. “여호와는 남자다운 전사. 그 이름은 여호와. 파라오의 병거들과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그의 빼어난 전사들이 홍해에 잠겼습니다.” (탈출 15:3, 4) 여호와께서는 그 시대에 가장 강력한 군대에 대하여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위력 있는 전사로서 나가실 때는 하느님의 백성의 어떠한 적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내가 오랫동안 조용히 있었다”
22, 23. 여호와께서 ‘오랫동안 조용히 계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2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적들에게 심판을 집행하실 때에도 공평하고 공정하게 행하십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오랫동안 조용히 있었다. 내가 계속 잠잠하였다. 내가 계속 자제를 나타내었다. 해산하는 여자처럼 내가 신음하고, 동시에 숨이 가빠 헐떡일 것이다. 내가 산과 언덕을 황폐시키고, 그 초목을 모두 말려 버릴 것이다. 내가 강들을 섬으로 바꾸고, 갈대 못을 말려 버릴 것이다.”—이사야 42:14, 15.
23 여호와께서는 사법적인 조처를 취하시기 전에, 그릇된 일을 행한 자들에게 악한 길에서 돌아설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해 시간을 허락하십니다. (예레미야 18:7-10; 베드로 둘째 3:9) 지배력을 행사하는 세계 강국으로서 기원전 607년에 예루살렘을 황폐시키는 바빌로니아 사람들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러한 일을 허락하시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충실 때문에 그들을 징계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는 역할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심판이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혹하게 하느님의 백성을 대합니다. (이사야 47:6, 7; 스가랴 1:15) 자신의 백성이 고통당하는 것을 보시는 참 하느님의 마음은 틀림없이 매우 아플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자신이 정하신 때까지, 조처를 취하기를 보류하십니다. 그러나 그때가 되자, 그분은 자신의 계약 백성을 해방시켜 하나의 독립 국가로 탄생시키기 위해—해산하는 여자처럼—수고하십니다.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해, 그분은 기원전 539년에 바빌론과 그 방어 체계를 말려 버리시고 황폐시키십니다.
24.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어떤 전망을 열어 주십니까?
24 매우 오랫동안 유배 생활을 한 뒤에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자 하느님의 백성은 틀림없이 매우 감격할 것입니다! (역대 둘째 36:22, 23) 여호와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어 틀림없이 매우 기쁠 것입니다. “내가 눈먼 사람들을 그들이 알지 못하는 길로 걷게 하겠다. 그들이 알지 못하는 길을 밟게 할 것이다. 내가 그들 앞의 어두운 곳을 빛으로, 험한 곳을 평지로 바꿀 것이다. 이 일들을 내가 그들을 위하여 행하며, 그들을 버리지 않겠다.”—이사야 42:16.
25. (ㄱ) 오늘날 여호와의 백성은 무엇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ㄴ) 우리는 어떤 결심을 해야 합니까?
25 이 말씀은 오늘날 어떻게 적용됩니까? 여호와께서는 지금까지 오랫동안—여러 세기 동안—나라들이 제멋대로 하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 문제들을 해결하실 지정된 때가 가까웠습니다. 현대에, 그분은 자신의 이름을 증거할 백성을 일으키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에 대한 반대를 모두 무너뜨리고, 그들이 여호와를 “영과 진리로” 숭배할 수 있는 길을 평평하게 닦아 주셨습니다. (요한 4:24) 그분은 “그들을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거짓 신들을 숭배하겠다고 고집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조각한 형상을 신뢰하고, 주조한 형상에게 ‘당신들이 우리의 신들입니다’ 하고 말하는 자들, 그들은 뒤로 물러가게 되고, 몹시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이사야 42:17) 여호와의 택함받은 자가 한 것처럼, 우리가 여호와께 충실을 유지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귀먹고 눈먼 종’
26, 27. 이스라엘은 어떻게 ‘귀먹고 눈먼 종’임을 드러내며, 그 결과 어떤 일을 당하게 됩니까?
26 하느님의 택함받은 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기까지 충실을 유지하셨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은 영적인 의미에서 귀먹고 눈먼 불충실한 종임을 드러냅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귀먹은 사람들아, 들어라. 너희 눈먼 사람들아, 바라보아라. 나의 종이 아니라면 눈먼 자가 누구이겠느냐? 내가 보내는 나의 사자처럼 귀먹은 자가 누구이겠느냐? 갚음을 받은 자처럼 눈먼 자, 여호와의 종처럼 눈먼 자가 누구이겠느냐? 많은 것이 보이는데도, 너는 주의하지 않았다. 귀가 열려 있는데도, 너는 잘 듣지 않았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의를 위하여, 법을 드높이고 존엄하게 하기를 기뻐하셨다.”—이사야 42:18-21.
27 이스라엘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실패자입니다! 그 백성은 나라들의 악귀 신들을 숭배하는 일에 반복해서 빠져듭니다. 여호와께서 계속해서 사자들을 거듭거듭 보내시지만, 그 백성은 유의하지 않습니다. (역대 둘째 36:14-16) 이사야는 그 결과를 다음과 같이 예언합니다. “이들은 강탈당하고 약탈당한 백성이요, 모두 구덩이에 잡혀 있고 구금장에 숨겨져 있다. 그들은 강탈물이 되었으나 구출해 줄 자가 없고, 약탈물이 되었으나 ‘돌려주어라!’ 하고 말해 주는 자가 없다. 너희 중에 누가 이 일에 귀를 기울이겠느냐? 누가 나중 시대를 위하여 주의를 기울여 잘 듣겠느냐? 누가 야곱을 한낱 약탈물로 내주시고, 이스라엘을 강탈자들에게 내주셨느냐? 바로 여호와가 아니시냐? 우리가 그분에게 죄를 지었고, 사람들은 그분의 길로 걸으려 하지 않았으며 그분의 법을 잘 듣지 않았다. 그래서 그분은 격노를, 자신의 분노와 전쟁의 힘을 그에게 계속 쏟으셨다. 그래서 그것이 그를 온통 둘러 계속 태워 버렸지만, 그는 유의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를 향하여 계속 활활 타올랐지만, 그는 전혀 마음에 두려 하지 않았다.”—이사야 42:22-25.
28. (ㄱ) 우리는 유다 주민의 예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ㄴ) 우리는 어떻게 여호와의 승인을 얻기 위해 노력할 수 있습니까?
28 유다 주민의 불충실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유다 땅이 기원전 607년에 강탈당하고 약탈당하게 하십니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여호와의 성전을 불태우고 예루살렘을 황폐시킨 다음 유대인들을 사로잡아 갑니다. (역대 둘째 36:17-21) 우리는 이 경고의 본보기를 마음에 새기고, 여호와의 교훈을 들을 때 결코 귀먹은 것처럼 행동하거나 그분의 기록된 말씀을 읽을 때 결코 눈먼 것처럼 행동하지 않기 바랍니다. 오히려, 여호와께서 친히 승인하신 종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음으로 여호와의 승인을 얻으려고 노력하기 바랍니다. 우리도 예수처럼,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참다운 공의를 알리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도 여호와의 백성 가운데 머물러서 빛을 비추는 자가 되어 참 하느님을 찬양하고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33면 삽화]
참다운 공의는 동정심 많고 자비롭다
[34면 삽화]
예수께서는 이웃다운 사마리아 사람에 관한 비유에서, 참다운 공의는 모든 사람을 포용한다는 점을 보여 주셨다
[36면 삽화]
우리는 격려적이고 친절한 사람이 됨으로써 하느님의 공의를 나타낼 수 있다
[39면 삽화]
우리는 전파 활동을 통해 하느님의 공의를 나타낼 수 있다
[40면 삽화]
승인받은 종은 “이방 사람들의 빛”으로 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