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 I
(Judah) [찬미를 받는, 찬미[의 대상]]
1. 야곱의 아내 레아를 통해 태어난 야곱의 넷째 아들. (창 29:35; 대첫 2:1) 유다는 밧단-아람에 있는 하란에서 생애 가운데 약 구 년을 보낸 후에, 야곱의 온 집안과 함께 가나안으로 가게 되었다. (창 29:4, 5, 32-35; 30:9-12, 16-28; 31:17, 18, 41 비교) 그 후에 그는 아버지와 함께 숙곳에 그리고 다음에는 세겜에 거주했다. 하몰의 아들이 그의 누이 디나를 범하여 시므온과 레위가 디나의 원수를 갚기 위해 세겜의 모든 남자들을 죽인 후에, 유다도 그 도시를 약탈하는 데 가담한 듯하다.—창 33:17, 18; 34:1, 2, 25-29.
요셉과의 관계 세월이 흐르면서, 야곱이 요셉을 편애했기 때문에, 요셉은 유다와 그 밖의 이복형제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었다. 그들의 증오는 요셉이 자기가 형제들보다 더 우월해질 것임을 지적한 두 가지 꿈 이야기를 한 후에 한층 더 심해졌다. 따라서 야곱이 양 떼를 돌보고 있는 요셉의 이복형제들에게 요셉을 보내 살펴보게 했을 때, 그들은 멀리서 요셉을 보자 그를 죽일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요셉의 생명을 구할 것을 염두에 두고 있던 르우벤의 제안에 따라, 그들은 요셉을 물이 마른 구덩이에 던져 넣었다.—창 37:2-24.
그 후에 이스마엘 사람들의 대상이 눈에 띄자, 아마도 르우벤이 없는 동안, 유다는 다른 형제들에게 요셉을 죽이지 말고 지나가는 상인들에게 파는 것이 낫겠다고 설득했다. (창 37:25-27) 요셉이 동정심을 나타내 달라고 애원했는데도, 그들은 그를 은화 스무 닢(세겔이라면 44달러에 해당함)에 팔았다. (창 37:28; 42:21) 정황으로 보아 유다의 주된 관심사가 요셉의 생명을 구하려는 것이었고 그를 판 일 자체가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 나중에 축복이 되기는 하였지만, 유다도 다른 형제들처럼 오랫동안 양심을 짓누르는 심각한 죄에 대한 죄책감으로 고통을 느껴 왔다. (창 42:21, 22; 44:16; 45:4, 5; 50:15-21) (나중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받은 모세의 율법 아래에서 이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였다. 출 21:16) 그 후에 유다는 또한 다른 형제들과 함께 야곱을 속여 요셉이 들짐승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생각하게 하는 일에도 가담했다. (창 37:31-33) 유다는 그때 약 20세였다.
유다의 가족 이 일 후에 유다는 그의 형제들 곁을 떠난 것 같다. 그는 아둘람 사람 히라 가까이에 천막을 치고 아마 그와 우호적인 관계를 발전시킨 것 같다. 이 기간에 유다는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과 결혼했다. 그는 수아의 딸을 통해 세 아들 에르와 오난과 셸라를 갖게 되었다. 막내아들인 셸라는 악십에서 태어났다.—창 38:1-5.
나중에 유다는 다말을 택하여 맏아들 에르의 아내로 삼았다. 그러나 에르는 악했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그를 처형하셨다. 그러자 유다는 그의 둘째 아들 오난에게 시숙 결혼을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오난은 다말과 관계를 가지면서도 “정액을 땅바닥에 쏟아 버려 자기 형에게 자손을 주지 않으려고 하였다.” 이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오난도 죽이셨다. 그러자 유다는 다말에게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서 셸라가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권했다. 하지만 셸라가 다 자란 뒤에도, 아마 유다는 막내아들도 죽을지 모른다고 추리하고, 다말과 결혼하도록 그를 내주지 않았다.—창 38:6-11, 14.
그래서 다말은 유다가 홀아비가 된 뒤에 자기의 시아버지가 팀나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매춘부처럼 변장한 다음 유다가 지나갈 길목에 있는 에나임 입구에 앉아 있었다. 유다는 자기 며느리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가 매춘부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와 관계를 가졌다. 나중에 다말이 임신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유다는 그가 창녀 같은 사람이므로 불태우라고 명했다. 그러나 유다는 다말을 임신시킨 사람이 자기 자신임을 증명하는 증거물이 제시되자 이렇게 외쳤다. “그가 나보다 더 의롭구나. 내가 그에게 내 아들 셸라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처럼 유다는 부지중에 셸라를 대신하여 법적인 자손의 아버지가 되는 일을 한 것이다. 약 여섯 달 후에 다말은 쌍둥이 베레스와 제라를 낳았다. 유다는 더 이상 다말과 관계를 갖지 않았다.—창 38:12-30.
양식을 구하러 이집트로 얼마 후에 기근에 강타당한 가나안 지역에, 이집트에서 양식을 구할 수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마침내 야곱의 지시에 따라 유다를 포함하여 그의 아들 열 명이 양식을 구하러 이집트로 갔다. 이때 그들의 이복형제인 요셉은 이집트의 식량 관리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요셉은 그들이 누구인지 금방 알았지만,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다. 요셉은 그들이 정탐꾼이라고 누명을 씌우면서, 베냐민을 데려오지 않는다면 다시 돌아오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정탐꾼이 아니라고 부인하다가 베냐민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다. 요셉은 또한 자기의 이복형제 가운데 하나인 시므온을 결박하여 인질로 잡아 두었다.—창 42:1-25.
이해할 만하게도 야곱은 요셉과 시므온을 둘 다 잃었다고 생각하고, 다른 아들들이 이집트로 갈 때 베냐민을 함께 보내려 하지 않았다. 자기가 베냐민을 데리고 돌아오지 못한다면 자기의 두 아들을 야곱이 죽여도 좋다는, 르우벤의 감정에 치우친 진술은 무게가 부족했는데, 아마 그가 아버지의 첩을 범한 일로 믿을 수 없는 사람임을 드러냈기 때문일 것이다. (창 35:22) 마침내 유다가 베냐민의 보증이 되겠다고 약속함으로 아버지의 동의를 얻어 내는 데 성공했다.—창 42:36-38; 43:8-14.
이집트에서 식량을 산 다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요셉의 관리인이 야곱의 아들들을 뒤쫓아 와서 그들이 도둑질을 했다고 누명을 씌웠다(사실은 요셉의 계략이었음). 도둑맞았다는 물건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되었을 때, 야곱의 아들들은 돌아와서 요셉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때 그 혐의에 대해 답변하고 베냐민과 아버지를 위해 설득력 있고 진지하게 간청하며 자기가 베냐민 대신 종이 되게 해 달라고 요청한 것은 유다였다. 요셉은 유다의 진실한 간청에 매우 감동되어 더 이상 감정을 억누르고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요셉은 자기 형제들과만 있는 자리에서 자기의 신분을 밝혔다. 요셉은 형들이 자기를 노예로 판 일을 용서한 후에, 이복형제들에게 야곱을 모시고 이집트로 돌아오라고 지시했는데, 기근이 아직 오 년이나 더 계속될 것이었기 때문이다.—창 44:1–45:13.
나중에 야곱과 그의 온 집안이 이집트에 가까이 왔을 때, 야곱은 “자기보다 앞서 유다를 요셉에게 보내 그보다 앞서 고센에 소식을 전하게 하였다.”—창 46:28.
형제들 가운데서 뛰어나게 되다 그의 연로한 아버지에 대한 관심과 자기의 자유를 걸고서라도 베냐민의 자유를 지키려는 숭고한 노력으로, 유다는 자신의 형제들 가운데서 뛰어나게 되었다. (대첫 5:2) 이제 그는 더 이상, 세겜 사람들을 약탈하는 데 가담하고 이복형제 요셉에게 몹쓸 짓을 하고 그다음에 자기 아버지를 속이는 데 동조하던 젊은 날의 유다가 아니었다. 유다는 지도자에 걸맞은 좋은 특성들로 인해,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우두머리 가운데 하나로서, 죽어 가는 아버지로부터 뛰어난 예언적 축복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되었다. (창 49:8-12) 그 예언의 성취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고려하고 있다.
2. 유다에게서 나온 지파. 유다가 야곱의 집안과 함께 이집트로 온 지 약 216년 후에, 이 지파에서 20세 이상인 장정의 수는 7만 4600명으로 증가했는데, 이 수는 12지파 가운데 다른 어느 지파보다도 많은 수였다. (민 1:26, 27) 40년의 광야 방랑 기간의 끝에, 유다 지파의 등록된 남자 수는 1900명이 증가했다.—민 26:22.
장막과 그 비품들과 기구들은 유다 지파의 브살렐과 그의 보조자인 단 지파 오홀리압의 지휘 아래 제조되었다. (출 35:30-35) 장막이 세워진 후에, 유다 지파는 잇사갈 지파와 스불론 지파와 함께 신성한 곳 동쪽에 진을 쳤다.—민 2:3-8.
유다의 지도력에 대한 초기 증거 야곱의 예언적 축복은 유다에게 지도자의 역할을 지정했는데(창 49:8. 대첫 5:2 비교), 그 예언의 성취는 이 지파의 초기 역사에서도 확증된다. 유다 지파는 그 수장 나손의 지도 아래, 광야를 통과하는 행진의 선두에 있었다. (민 2:3-9; 10:12-14) 또한 이 지파에서 갈렙이 나왔는데, 그는 약속의 땅에 다시 들어가는 특권을 받은 충실한 두 정탐꾼 가운데 하나이다. 갈렙은 나이가 많이 들었는데도 유다 지파에게 할당된 땅을 정복하는 데 활발히 참여했다. 하느님은 이 지파가 가나안 사람들과의 싸움에서 선두에 서라고 지정하셨으며, 이 지파는 시므온 지파와 함께 그렇게 했다. (민 13:6, 30; 14:6-10, 38; 수 14:6-14; 15:13-20; 판 1:1-20. 신 33:7 비교) 나중에, 유다 지파는 다시 한 번 하느님이 부여하신 권위에 근거하여, 베냐민 지파를 응징하기 위한 군사 행동의 선두에 섰다.—판 20:18.
유다의 상속지 유다 지파에게 할당된 영토는 북쪽으로는 베냐민 지파와 단 지파의 영토와(수 15:5-11; 18:11), 동쪽으로는 소금 바다(사해)와(수 15:5), 서쪽으로는 대해(지중해)와 그 경계가 맞닿아 있었다. (수 15:12) 남쪽 경계는 사해 최남단 지점에서 남서 방향으로 뻗어 나가 아그랍빔 오르막길로 나아가 거기에서 계속하여 진으로 건너가고 북쪽으로 가데스-바네아 근처까지 나아가서 마침내 헤스론, 앗달, 갈가, 아스몬과 이집트 급류 골짜기를 지나 지중해까지 이르렀던 것 같다. (수 15:1-4) 이 영토 가운데 주로 브엘-세바를 중심으로 한 부분은 시므온 자손에게 할당되었다. (수 19:1-9) 겐 사람들 즉 결혼을 통해 모세와 인척이 된 한 비이스라엘인 가족도 유다 지파의 영토에 거주하기 시작했다.—판 1:16.
고대 유다에 할당된 경계 내에는 자연환경이 독특한 지역이 몇 있었다. 네게브는 남쪽으로 뻗어 있는데, 이 지역의 대부분은 해발 450미터에서 600미터 사이의 고원이다. 지중해를 따라 블레셋 평야가 펼쳐져 있는데, 그곳의 모래 언덕들은 내륙으로 6킬로미터나 뻗어 있는 경우도 있다. 기복이 심한 이 평야는 초기에는 포도원과 올리브나무 숲과 곡식밭이 있는 지역이었다. (판 15:5) 그 바로 동쪽에는 여러 골짜기로 분절된 구릉 지대가 있으며, 남쪽에서는 높이가 해발 약 450미터에 이른다. 이곳은 세펠라(“저지”라는 의미)로서, 고대에는 돌무화과나무로 덮여 있던 지역이다. (왕첫 10:27) 이곳은 유다 산지와 비교할 때 저지인데, 유다 산지는 동쪽으로 더 멀리 뻗어 있으며 높이가 다양하여 해발 600미터에서 1000미터가 넘는 경우도 있다. 유다 산지의 동쪽 경사면을 차지하고 있는 불모지 언덕들은 유다 광야를 형성한다.
여호수아의 인도를 받으며 가나안 사람들의 병력을 격파한 일은 유다 지파가 받은 영토 내에서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수비대를 주둔시키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 때문에 원주민들이, 아마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른 곳에서 전쟁을 하고 있는 동안, 헤브론과 드빌 같은 도시들로 다시 돌아온 듯하다. 따라서 이 장소들을 탈환할 필요가 있었다. (수 12:7, 10, 13; 판 1:10-15 비교) 그러나 저지 평야의 주민들에게는 잘 갖추어진 전차 부대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쫓아내지는 못했다. 이 가운데는 틀림없이 가드와 아스돗의 블레셋 사람들이 포함되었을 것이다.—수 13:2, 3; 판 1:18, 19.
재판관 시대부터 사울 시대까지 재판관들이 다스리던 격동기에, 유다 지파도 다른 지파들처럼 거듭거듭 우상 숭배에 빠졌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주변 나라들 특히 암몬 사람들과 블레셋 사람들이 유다 지파의 영토를 침범하는 것을 허용하셨다. (판 10:6-9) 삼손 시대에는 유다 지파의 사람들이 블레셋 도시들인 가자, 에그론, 아스글론에 대한 지배권을 완전히 잃었을 뿐 아니라 블레셋 사람들이 사실상 유다 사람들의 지배자가 되었다. (판 15:9-12) 사무엘 시대까지는 유다 지파의 영토를 블레셋 사람들에게서 되찾지 못했던 것 같다.—삼첫 7:10-14.
사무엘이 베냐민 지파의 사울을 이스라엘의 첫째 왕으로 기름부은 후에, 유다 지파 사람들은 사울의 지도 아래 충성스럽게 싸웠다. (삼첫 11:5-11; 15:3, 4) 블레셋 사람들과의 전투가 매우 빈번했는데(삼첫 14:52), 블레셋 사람들은 이때에도 이스라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삼첫 13:19-22) 하지만 그들의 세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여호와의 도움으로,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은 믹마스에서 아얄론까지 펼쳐진 지역에서 블레셋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삼첫 13:23–14:23, 31) 블레셋 사람들이 나중에 유다를 침략했을 때, 유다 지파의 어린 목동 다윗이 블레셋의 대표 투사 골리앗을 죽인 후에 블레셋 사람들은 또다시 패배를 당했다. (삼첫 17:4, 48-53) 그 후 사울 왕은,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으로 일찍이 기름부음을 받은 바 있는 다윗을 이스라엘 전사들 위에 임명했다. 다윗은 그런 자격으로 충성스럽게 사울을 지원했으며 블레셋 사람들에게 승리를 더 많이 거두었다. (삼첫 18:5-7) 이때 유다 지파는 “사자 새끼”와 같은 입장이었는데, 다윗이라는 인물을 통해 아직 왕권을 얻지 못한 때였기 때문이다.—창 49:9.
사울이 다윗을 자기 왕권에 위협이 되는 존재로 여기고 그를 추방했을 때에도, 다윗은 여호와의 기름부음받은 자인 사울에게 여전히 충성을 유지했다. 그는 결코 이스라엘의 적들과 한편이 되지도 않았고, 스스로 사울을 해치거나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지도 않았다. (삼첫 20:30, 31; 24:4-22; 26:8-11; 27:8-11; 30:26-31) 오히려 다윗은 이스라엘의 적들과 싸웠다. 한번은 다윗이 유다 지파의 도시인 그일라를 블레셋 사람들에게서 구해 주었다.—삼첫 23:2-5.
야곱의 축복이 다윗을 통해 성취되다 마침내 왕권을 베냐민 지파에서 유다 지파로 옮길 하느님의 지정된 때가 왔다. 사울이 죽은 후에,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 사람들은 다윗을 왕으로 기름부었다. 하지만 다른 지파들은 사울의 집과 유착하여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자기들의 왕으로 삼았다. 이 두 왕국 사이의 충돌은 이스-보셋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인 아브넬이 다윗에게 투항할 때까지 거듭되었다. 그 후 오래지 않아 이스-보셋은 살해되었다.—삼둘 2:1-4, 8, 9; 3:1–4:12.
그 후 다윗이 이스라엘 전체를 다스릴 왕권을 갖게 되었을 때, ‘야곱의 아들들’ 즉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유다를 찬미했으며 그의 대표자인 통치자에게 꿇어 엎드렸다. 따라서 다윗은 예루살렘이 기본적으로 베냐민 지파의 영토에 있었지만 예루살렘을 공격하러 갈 수 있었는데, 시온의 성채를 차지한 뒤에 그것을 자신의 수도로 삼기 위해서였다. 대부분의 경우 다윗은 칭찬받을 만하게 처신했다. 따라서 그를 통하여 유다 지파는 야곱이 임종 시의 축복에서 예언한 것과 같이, 공의와 의와 같은 특성들로 인해, 그리고 국가의 안전을 유지하는 일을 포함하여 이스라엘 나라에 대한 봉사로 인해 찬미를 받았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시온에서 왕으로 다스리던 다윗을 두 번이나 타도하려고 했던 사람들)과 모압 사람들, 시리아 사람들, 에돔 사람들, 아말렉 사람들, 암몬 사람들을 정복했을 때 유다의 손이 참으로 그의 적들의 목덜미에 있었다. 이처럼 다윗의 통치 아래, 이스라엘의 경계는 마침내 하느님께서 정하신 한계까지 확장되었다.—창 49:8-12; 삼둘 5:1-10, 17-25; 8:1-15; 12:29-31.
다윗과 맺어진 왕국을 위한 영원한 계약 때문에, 유다 지파는 470년 동안 홀과 명령자의 지팡이를 소유했다. (창 49:10; 삼둘 7:16) 하지만 왕국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던 때 즉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유다 앞에 꿇어 엎드린 때는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 기간뿐이었다. 솔로몬이 통치 말엽에 배교했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유다의 다음 왕 르호보암에게서 열 지파를 찢어 내어 여로보암에게 주셨다. (왕첫 11:31-35; 12:15-20) 단지 레위 사람들과 베냐민과 유다 지파만 다윗의 집에 계속 충성을 나타냈다.—왕첫 12:21; 대둘 13:9, 10.
3. 베냐민 지파를 포함한 유다 왕국. (대둘 25:5) 솔로몬이 죽은 후에 다른 열 지파는 에브라임 지파 사람인 여로보암 아래 독립된 왕국을 형성했다.
그 후 오래지 않아, 르호보암 제오 년에, 이집트 왕 시삭이 유다 왕국을 침공하여 예루살렘까지 왔으며 도중에 있는 요새 도시들을 함락시켰다.—왕첫 14:25, 26; 대둘 12:2-9.
유다 왕 르호보암, 아비얌(아비야), 아사가 통치한 약 40년 동안, 유다 왕국과 이스라엘 왕국 사이에는 충돌이 거듭되었다. (왕첫 14:30; 15:7, 16) 그러나 아사의 계승자인 여호사밧은 이스라엘의 악한 왕 아합과 결혼 동맹을 맺었다. 이로 인해 두 왕국 사이에 평화가 있기는 했지만,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한 일은 유다 왕국에 재난이 되었다. 여호람은 아달랴의 영향을 받아 심한 배교의 죄를 지었다. 그의 통치 중에 블레셋 사람들과 아랍 사람들이 유다를 침공하여 포로를 잡아가고 그의 아들들 가운데 가장 어린 여호아하스(아하시야)만 제외하고 나머지 아들을 모두 죽였다.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을 때, 그도 마찬가지로 악한 아달랴의 지시를 따랐다. 아하시야가 참혹하게 살해당한 뒤에, 아달랴는 모든 왕손을 죽였다. 하지만, 틀림없이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 다윗 왕좌의 정당한 상속자인 아기 여호아스는 숨겨져 살아남았다. 그동안 찬탈자 아달랴가 여왕으로 통치하다가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명령에 따라 처형되었다.—대둘 18:1; 21:1, 5, 6, 16, 17; 22:1-3, 9-12; 23:13-15.
여호아스는 통치 초기에는 잘 다스렸지만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죽은 뒤에 참 숭배에서 떠났다. (대둘 24:2, 17, 18) 여호아스의 아들 아마샤도 마찬가지로 의로운 행로에 계속 머물지 못했다. 그의 통치 중에, 여러 해 동안의 평화 공존 기간이 지난 후에, 열 지파 왕국과 유다 왕국은 다시 전장에서 맞섰는데, 유다 왕국이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다. (대둘 25:1, 2, 14-24) 유다의 다음 왕 웃시야(아사랴)는 신성한 곳을 침범한 일 외에는 여호와의 눈에 옳은 일을 했다. 그의 계승자인 요담은 충실한 왕이 되었다. 그러나 요담의 아들 아하스는 대규모 우상 숭배 행위로 악명을 떨쳤다.—대둘 26:3, 4, 16-20; 27:1, 2; 28:1-4.
아하스의 통치 기간에 유다는 에돔 사람들과 블레셋 사람들 그리고 북쪽 이스라엘 왕국과 시리아의 침공으로 고통을 겪었다. 시리아·이스라엘 연합군은 심지어 아하스를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그 대신 다윗 가계가 아닌 사람을 유다의 왕으로 세우겠다고 위협하기까지 했다. 예언자 이사야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시켜 주었는데도, 믿음이 없는 아하스는 아시리아 왕 디글랏-빌레셀 3세에게 뇌물을 주며, 와서 자기를 도와 달라고 했다. 이 어리석은 행동으로 유다는 아시리아라는 무거운 멍에를 지게 되었다.—대둘 28:5-21; 사 7:1-12.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는 참 숭배를 회복했으며 아시리아 왕에게 항거했다. (왕둘 18:1-7) 그 결과 산헤립(센나케리브)이 유다를 침공하여 많은 요새 도시들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결코 빼앗기지 않았는데, 하룻밤에 여호와의 천사가 아시리아 사람들의 진영에서 18만 5000명을 살육했기 때문이다. 치욕을 당한 산헤립은 니네베로 돌아갔다. (왕둘 18:13; 19:32-36) 열 지파 왕국은 그보다 약 팔 년 앞서 즉 기원전 740년에, 그 수도인 사마리아가 아시리아 사람들에 의해 무너지면서 종말을 맞았다.—왕둘 17:4-6.
유다의 다음 왕인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는 우상 숭배를 다시 부흥시켰다. 그렇지만 그는 아시리아 왕에 의해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회개를 했으며, 예루살렘에 돌아온 후에, 종교 개혁에 착수했다. (대둘 33:10-16) 그러나 그의 아들 아몬은 우상 숭배로 되돌아갔다.—대둘 33:21-24.
마지막 우상 숭배 일소 운동은 아몬의 아들 요시야의 통치 중에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진실한 회개가 일반 사람 가운데서도 영향을 미치기에는 너무 늦은 때였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완전한 황폐를 선고하셨다. 결국 요시야 자신은 므깃도에서 이집트 군대를 돌려보내려고 시도하다가 죽임을 당했는데, 이집트 군대는 갈그미스에 있는 아시리아의 왕을 도우러 가던 길이었다.—왕둘 22:1–23:30; 대둘 35:20.
유다의 마지막 네 왕인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는 악한 통치자가 되었다. 파라오 느고는 여호아하스를 폐위시키고 유다 땅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으며, 여호아하스의 형제인 여호야김을 왕으로 삼았다. (왕둘 23:31-35) 나중에, 아마 팔 년 동안 통치하고 나서, 여호야김은 이전에 갈그미스에서 이집트 군대를 패배시킨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네부카드네자르)에게 예속되었다. 여호야김은 삼 년 동안 바빌론 왕을 섬기다가 반역했다. (왕둘 24:1; 렘 46:2) 그 후에 느부갓네살은, 아마도 반역한 왕을 바빌론으로 포로로 끌고 가려는 의도로, 예루살렘을 치러 왔다. (대둘 36:6) 하지만 여호야김은 결코 바빌론으로 끌려가지 않았는데, 그가 성서에서 밝혀 주지 않는 어떤 방법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그 후에 여호야긴이 왕이 되었다. 그는 단지 석 달 열흘 동안 통치한 후에 자진하여 느부갓네살에게 항복했고, 왕실의 다른 성원들과 백성 수천 명과 함께 바빌론으로 끌려가 유배되었다. 그리고 느부갓네살은 여호야긴의 숙부 시드기야를 유다의 왕좌에 앉혔다.—왕둘 24:6, 8-17; 대둘 36:9, 10.
시드기야는 예속된 왕으로 통치한 지 제구 년에 반역하였고, 바빌론에 대한 반역을 지원해 줄 것으로 기대하며 이집트의 군사력을 바라보았다. (왕둘 24:18–25:1; 대둘 36:11-13; 겔 17:15-21) 그래서 느부갓네살은 자신의 군대를 유다로 진군시켰다. 예루살렘은 18개월 동안 포위되어 있다가 마침내 성벽이 뚫렸다. 시드기야는 도망치다가 붙잡혔고, 그의 눈앞에서 그의 아들들이 살육당했으며, 그다음에 그 자신은 눈이 멀게 되었다. 그다음 달에 생존자들 대부분은 끌려가 유배되었다. 유다에 남아 있는 몇몇 낮은 신분의 백성을 다스리도록 그달리야가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가 암살된 뒤에, 그 백성은 이집트로 도망쳤다. 그렇게 되어 기원전 607년 일곱째 달에 유다 땅은 완전히 황폐되었다.—왕둘 25:1-26. 자세한 점들을 알려면 각각의 왕들에 관한 항목 참조.
통치권을 잃은 것은 아님 그렇지만 유다 왕국이 그렇게 비참하게 끝났다고 해서 홀과 명령자의 지팡이가 그 지파에서 아주 떠난 것은 아니었다. 야곱의 임종 시의 예언에 의하면, 유다 지파는 영구적인 왕권의 상속자 즉 실로(“그것을 가진 자, 그것이 속한 자”라는 의미)를 산출하게 되어 있었다. (창 49:10) 따라서 적절하게도 여호와께서는 유다 왕국이 전복되기 전에 에스겔을 통해 시드기야에게 이러한 말씀을 전달하셨다. “터번을 제거하고, 면류관을 벗겨라. 이것이 그대로 있지 않을 것이다. 낮은 것은 높이고, 높은 것은 낮추어라. 내가 그것을 파괴하고, 파괴하고, 파괴하겠다. 또한 이것에 관해 말하면, 그것은 법적 권리를 가진 자가 올 때까지 결코 누구의 것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오면 내가 반드시 그것을 그에게 주겠다.” (겔 21:26, 27) 그 법적 권리를 가진 자는, 약 600년 후에 천사 가브리엘이 유대인 처녀 마리아에게 알린 말에 지적되어 있듯이, 다름 아닌 하느님의 아들 예수이다. (누 1:31-33)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다 지파의 사자”라는 칭호를 지니시는 것은 적절하다.—계 5:5.
북쪽 왕국과 비교 유다 왕국은 북쪽 왕국보다 훨씬 더 안정을 누렸으며, 약 133년 더 오래 지속되었다. 몇 가지 요인들이 그 점에 기여했다. (1) 하느님이 다윗과 맺으신 계약 때문에, 다윗 왕가의 혈통은 끊어지지 않고 보존되었지만, 북쪽 왕국에서는 자기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준 왕이 절반도 안 되었다. (2) 아론계 제사직 마련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계속되었기 때문에 여호와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으며 불충실한 그 나라가 자기들의 하느님께로 돌아오기가 더 쉬웠다. (대둘 13:8-20) 반면에, 북쪽 왕국에서는 유다로부터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 송아지 숭배를 시작하고 계속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는데, 아마 이 때문에 그것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왕첫 12:27-33) (3) 19명의 유다 왕 가운데 네 명 즉 아사, 여호사밧, 히스기야, 요시야는 참 숭배에 대한 정성이 탁월했으며 두드러진 종교 개혁을 실시했다.
하지만 두 왕국의 역사 모두 여호와의 명령을 무시하는 일과 안전을 얻으려고 군사 동맹을 신뢰하는 일의 어리석음을 잘 보여 준다. 또한 불순종하는 자신의 백성에 대한 여호와의 오래 참음도 부각된다. 그분은 거듭거듭 자신의 예언자들을 보내어 그 백성 가운데 회개를 권하셨지만, 그들은 흔히 그 예언자들의 경고를 무시했다. (렘 25:4-7) 유다에서 봉사한 예언자들 가운데는 스마야, 잇도, 아사랴, 오뎃, 하나니, 예후, 엘리에셀, 야하시엘, 미가, 호세아, 이사야, 스바냐, 하박국, 예레미야가 있었다.—이스라엘 2, 3번 참조.
유배 기간 이후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다 땅으로 돌아가 그곳에 성전을 재건하는 것을 허용하는 키루스의 포고령이 발효한 때인 기원전 537년에, 아마 여러 지파의 대표자들이 고향으로 돌아온 것 같다. (라 1:1-4; 사 11:11, 12) 에스겔 21:27의 성취로, 다윗 가계의 어떤 왕이 귀환한 백성의 행정적인 일을 관장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또한 지파 간의 질투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데, 이것은 에브라임과 유다가 정말 하나가 되었음을 나타내 주었다.—사 11:13.
4. 레위 사람 호다위야 또는 호드야와 동일인인 듯한 인물. 이 사람의 자손은 스룹바벨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라 2:40; 3:9; 느 7:43.
5. 스룹바벨과 함께 돌아온 사람들 가운데 언급되어 있는 한 레위 사람.—느 12:1, 8.
6. 타국인 아내와 아들들을 떠나보낸 사람들 가운데 한 레위 사람.—라 10:23, 44.
7. 유배 기간 후에 예루살렘에 거주하며 그곳에서 감독의 자격으로 섬긴 한 베냐민 지파 사람.—느 11:7, 9.
8. 예루살렘 성벽이 완성된 뒤에 느헤미야가 조직한 낙성식 행렬에 포함되어 있었던 한 인물.—느 12:31, 34.
9. 낙성식 행렬에 포함되어 있었던 한 제사장 악사.—느 12:31, 35, 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