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발생지를 방문하다
1978년 6월 12일 오전 ‘아랍’ 청년 둘이 ‘노르웨이’에서 온 우리 일행 십여명이 ‘베들레헴’으로 가는 여행을 도와 주고 있었다. 우리가 ‘예루살렘’ 교외의 한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뻥!” 하고 큰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폭탄이 터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아랍’ 청년들의 안색이 일변하였다. 그러나 대형 ‘트럭’의 큰 ‘타이어’가 ‘펑크’를 일으키고 길 옆에 서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한 ‘아랍’ 청년은 “그게 폭탄이었다면 우리는 곤란하게 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폭발지 근처에 있는 ‘아랍’인들은 모두 끌려가 며칠간 구금을 당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에 존재하는 긴장된 상황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작년초에 어떤 사람들이 두려움을 표현한 것과는 달리 최근에 여행한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은 그 나라가 여행자들에게 상당히 안전하다는 것이다.
‘노르웨이’에서 온 우리는 ‘여호와의 증인’ 여행단의 일부였다. 작년 이른 봄 이래로 전세계에서 증인들이 ‘이스라엘’을 찾았다.—‘프랑스’에서 2,400명, 독일에서 1,500명, ‘네델란드’에서 1,200명, 미국에서 750명 등이다. 7월까지는 약 9천명이 ‘이스라엘’을 찾았으며, 10월말까지는 총계 약 15,000명이 방문하였다.
여행단에 속한 많은 사람들이 신분을 알리는 ‘뱃지’를 달았으며, 여행단을 운송하는 ‘버스’의 앞창에는 “성서 지역을 여행하는 ‘여호와의 증인’들”이라고 쓰여 있었다. 놀랍게도 ‘캘리포오니아’에서 온 한 ‘유대’인 여자는 ‘이스라엘’을 방문하고 돌아와서 한 친척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가는 곳마다 ‘여호와의 증인’들을 보았읍니다. 저는 증인들이 ‘이스라엘’에 그렇게 깊은 관심을 가진 줄은 몰랐읍니다.” 그 여자는 증인들이 왜 ‘이스라엘’을 방문하였는지 알고 싶어하였다.
방문의 목적
기본적인 이유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으며, 따라서 그에 관해 가능한 한 더 많이 알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대부분의 성서 사건들이 발생한 곳이기 때문에 증인들은 그 나라에 대해 관심이 있다. 어떤 지방에 관한 내용을 읽을 때 그곳에 대해 잘 알면 참으로 유익하다. 예를 들어 보자.
신문에 당신이 성장하던 고장 근처에서 특별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보도되었다고 하자. 그 내용과 관련하여 어떤 언덕, 건물, 강이 언급되었다고 하자. 전혀 그곳에 가 보지 않은 경우보다 더 깊은 관심과 이해력을 가지고 그 기사를 읽게 될 것이다. 그렇다. 이제 그 배경을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 고장의 지형—산의 높이, 강의 넓이, 그 사건을 생생하게 하는 다른 지리적 특성—을 머리에 그릴 수 있다.
그렇다. 그 지방에 관해서 잘 알고 있으면 성서에 나오는 사람들과 그들과 관련된 사건들을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될 것이다.
현대 증인들
그러나 우리가 여호와의 고대 종들에게만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다. 방문한 ‘노르웨이’ 증인들을 위한 ‘하이파’ 왕국회관의 특별 집회에서 ‘이스라엘’에는 현대의 ‘여호와의 증인’ 회중이 약 다섯개 있으며, 약 260명의 왕국 전도인들이 연합하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베들레헴’과 ‘라말라’에는 대부분 ‘아랍’어를 말하는 증인들로 구성된 회중들이 있다. ‘텔아비브’의 두 회중은 대부분이 ‘유대’인들이다. 그러나 ‘하이파’에 있는 75명의 증인들 가운데 약 절반은 ‘유대’인들이고 나머지 절반은 ‘아랍’어를 말하는 사람들이다.
여러 주일 동안 지방 증인들은 방문객들과 서로 영적 격려를 나눌 수 있는 특별 집회를 마련하느라고 바빴다. 또한 ‘노르웨이’에서 온 우리 ‘버스’ 여행 집단이 6월 11일 ‘베들레헴’을 여행하고 있는 동안 지방 증인을 만났는데 그는 새로 건축된 아담한 왕국회관으로 우리를 데려다 주었다. 거기서 그와 다른 증인 한 사람이 우리의 여러 가지 질문에 대해 대답해 주었다.
북으로 약 8‘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는 ‘예루살렘’에는 단지 네명의 증인 밖에 없으며 남쪽으로 약 24‘킬로미터’쯤 되는 ‘헤브론’에는 한명도 없다고 한다. 그들은 “‘베들레헴’에 있는 25명의 왕국 전도인들은 거대한 구역을 가지고 있읍니다”라고 말하였다. 그 다음날 우리 집단의 일부는 ‘베들레헴’의 증인들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호별 방문 전파를 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안내인인 그 지방의 증인 두 사람과 함께 우리가 묵은 ‘예루살렘’의 ‘호텔’ 근처에서 ‘아랍’ ‘버스’를 타고 ‘베들레헴’으로 돌아갔다.
‘예루살렘’의 남쪽
몇분 후 ‘베들레헴’에 이르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그 지방이 의미있는 곳이었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곳에서 태어나셨으며, 천사들이 예수의 탄생을 목자들에게 알리려고 그 근방 들판에 있는 그들에게 나타났다.1 그 곳에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산이 더 많았고 상당히 건조한 곳으로 보였다. 우리는 ‘베들레헴’의 고도가 ‘예루살렘’과 같은 것을 알고 놀랐다. 주위의 농촌 지역은 다른 여러 가지 성서 사건들을 기억나게 하였다.
‘야곱’이 이 근방을 통과할 때 그가 사랑하던 ‘라헬’이 ‘베냐민’을 낳으면서 죽었다.2 이곳은 ‘보아스’와 ‘나오미’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리고 ‘모압’ 여인 ‘룻’이 동쪽의 거칠고 메마른 광야를 지나 이곳으로 왔으며,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주웠다.3 또한 어린 목동 ‘다윗’이 이곳에서 자랐고, 자기 아버지의 양을 쳤으며, 그의 조카인 유명한 ‘요압’과 ‘아비새’의 고향도 이곳이었을 것이다.4
얼마 후에 우리는 차를 빌려서 남쪽 ‘헤브론’으로 향하기 시작하였다. ‘헤브론’은 해발 고도 약 914‘미터’로서 ‘예루살렘’과, ‘베들레헴’보다 약 137‘미터’ 더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우리가 남으로 향하자 변화를 볼 수 있었다. 그곳은 더 생산적인 곳으로 보였다. ‘헤브론’ 주위 지역은 그 수확으로 오랫 동안 유명하였다. ‘이스라엘’ 정탐꾼들은 ‘모세’에게 두 사람이 들어야 할 정도로 큰 포도송이들을 근처의 ‘에스골’ 골짜기에서 가져왔다.5 오늘날도 그 땅이 비옥하다.
우리가 ‘헤브론’의 좁은 옛 거리를 지나갈 때 옛날로 돌아가는 것처럼 느꼈다. ‘헤브론’은 사람이 거주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의 하나이다. ‘아브라함’, ‘사라’, ‘이삭’, ‘리브가’, ‘야곱’ 그리고 ‘레아’는 고대 ‘헤브론’ 근처의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다.6 우리는 유명한 그 매장지를 가 보았다. 지금은 회교 사원이 그 굴위에 서 있다. ‘아브라함’의 주요한 거주지는 한 때 커다란 나무들이 자랐던 ‘마므레’ 근처에 있었다.7 그는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되기에 앞서 천사들을 이곳에서 환대하였다.8 ‘헤브론’ 근처에 있는 한 지점에서 그는 약 1,220‘미터’ 아래 쪽을 내려다 보면서 여러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그 특이한 멸망의 짙은 연기가 오르는 것을 보았다.9
우리가 ‘헤브론’에 오기 위해 지나온 산지에 대해 생각하면서 다른 성서 기사에 관한 인식도 높아졌다. ‘헤브론’에 거주하는 동안 ‘야곱’은 17세 된 아들 ‘요셉’에게 ‘세겜’(현재의 ‘나블러스’)의 이전 집에서 양을 치고 있는 10명의 이복 형제들이 잘 있는지 살펴보라고 하였다.10 그것은 가까운 ‘예루살렘’으로 약 35‘킬로미터’ 정도를 걸어가야 할 뿐만 아니라 험한 지형을 지나 북쪽으로 수십 ‘킬로미터’를 가야 했음을 의미한다. ‘요셉’은 결국 ‘세겜’을 지나 ‘헤브론’에서 약 13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 있는 ‘도단’에서 그의 형들을 만날 수 있었다!
우리가 ‘헤브론’의 고대 도로를 걷고, 옛 시장터를 보면서 우리는 ‘다윗’이 이곳에서 살았을 때의 생활도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우리는 그가 ‘헤브론’에서 왕으로 기름부음 받았으며, 그가 수도를 북쪽 ‘예루살렘’으로 옮기기 전에 7년 반 동안 이곳에서 통치하였음을 상기하였다.11 그러나 물론 현대의 증거들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항상 총을 메고 가까이 있는 ‘이스라엘’ 군인들이 한 가지 증거였다.
‘헤브론’은 점령 도시이다. 그곳은 군사적 통제를 받고 있는 지역의 일부이다. 지금 “웨스트뱅크”라고 불리우는 이 지역은 동쪽의 사해와 ‘요단’ 강, 서쪽에 있는 지중해의 ‘유대’ 해안 평야 사이에 놓여 있다. 굽이치는 언덕과 골짜기로 이루어진 3,700평방 ‘킬로미터’에 이르는 이 거대한 지역은 1967년 6일 전쟁 중에 ‘이스라엘’이 ‘요르단’으로부터 빼앗은 것이다.
우리가 ‘헤브론’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가 거의 오후 세시경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그곳에 도착하기 전에 ‘솔로몬’의 못을 가리키는 표지가 있는 곳에서 옆길로 빠졌다. 우리는 눈을 의심하였다! 그것들은 참으로 컸다!—세개가 있었는데 가장 큰 것은 길이가 178‘미터’이고 넓이가 54‘미터’이며, 깊이가 약 15‘미터’였다! 이것들은 ‘예루살렘’에 물을 공급하기 위하여 ‘로마’ 시대에 재건된 것으로 보이지만 ‘솔로몬’ 시대에도 동일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었을 것이다.
‘베들레헴’에 도착하여 우리는 다른 한 가지—‘헤로디움’—를 더 보기 원하였다.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했던 ‘헤롯’ 대왕은 ‘베들레헴’ 동남쪽 수‘킬로미터’ 되는 곳에 있는 높은 이 언덕 위에다 자기 이름을 딴 성채를 만들었다.12 며칠 전에 우리는 동남쪽으로 더 가서 사해 근처의 ‘마사다’에 있는 웅장한 궁전—성채를 보았다. 기원 73년에 그곳에서 ‘유대’인들은 ‘로마’인들에게 끝까지 항거하였다. 그러나 그처럼 크지는 않지만 어떤 점에서는 ‘헤로디움’이 우리에게 더 의미있는 것이었다.
불모지 임에도 불구하고 주변 지역이 굉장히 아름다왔기 때문이다. 지는 해의 매혹적인 황갈색이 그 지역을 아름답게 장식하였다. 동쪽으로 우리는 사해까지 볼 수 있었다. 우리 앞에는 ‘다윗’이 자기를 추적하던 ‘사울’을 성공적으로 피한 ‘유대’ 광야가 펼쳐 있었다.13 울퉁불퉁한 지역을 보고 특히 그가 어려서부터 그 지역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임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는 ‘다윗’도 자기의 양을 치는 동안 아마도 종종 우리가 즐기고 있는 웅대한 광경을 보기 위해 바로 이 언덕을 올랐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텔아비브-야포’의 남쪽
우리는 첫째 주일을 지중해에 가까운 ‘텔아비브’ 근처의 한 ‘호텔’에서 묵었다. ‘이스라엘’의 가장 큰 도시인 ‘텔아비브’는 현대에 생긴 것이지만 그 도시는 고대의 ‘욥바’라는 도시와 인접하고 있다.—그래서 그 도시들은 공식적으로는 ‘텔아비브-야포’라고 불리운다.
사도 ‘베드로’가 ‘도르가’14를 부활시킨 것도 ‘욥바’였으며, 바다 근처에 있는 무두질 업자인 ‘시몬’의 집에 머무는 동안 환상을 받은 곳도 여기였다. 이 환상 때문에 ‘베드로’는 ‘가이사랴’로부터 이방인 ‘고넬료’가 보낸 사자들과 함께 갔다.15 우리가 ‘텔아비브’에서 북쪽 ‘가이사랴’로 향하는 주요 고속 도로로 여행할 기회를 가졌을 때 우리는 자동차로 약 한시간 걸리는 이 여행이 ‘베드로’와 그의 동료에게는 이틀이 걸렸다는 것을 생각하였다.
우리가 남으로 향하는 날 우리는 고대 ‘블레셋’ 지역으로 갔다. 첫 주일에는 ‘버스’ 여행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성서적인 관심을 끄는 장소들에 가기 위해 차를 빌렸다. 남쪽으로 가는 도중에 우리는 맨 먼저 ‘이스라엘’의 현대적 도시가 지중해에 인접해서 세워지고 있는 ‘아스돗’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근처에 한 때는 탁월한 ‘블레셋’ 도시가 서 있었으며, 여호와의 언약궤를 전쟁에서 얻은 후에 그곳으로 가져오게 되었다는 점을 상기하였다. 그 ‘아스돗’인들은 고통스런 치질을 앓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그들은 그 언약궤를 보내도록 자극을 받았다.16
우리가 계속 남쪽으로 가자 유명한 관광 중심지가 되어가고 있고 아름다운 해변이 있는 ‘아스글론’에 이르렀다. 이곳도 역시 한 때는 주요한 ‘블레셋’의 성읍이었다. 고대의 그 폐허를 방문한 우리는 그곳의 한 간판에 ‘블레셋’인들과의 전쟁 중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과 관련하여 ‘다윗’이 이렇게 노래한 점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 일을 ···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찌어다. ‘블레셋’ 사람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할례 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17
다음에 우리는 계속하여 ‘가사’와 바다 근처에 있는 다른 주요한 ‘블레셋’ 성읍이 있었던 “가사 지구”로 향하였다. 그 길을 가는 동안 우리는 그 땅의 생산성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 농업 지역은 고대 ‘블레셋’이 번영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사’는 오늘날 전쟁의 상처를 안고 있다. 그 거리를 지나가면서 우리는 침울함과 절망의 분위기를 느꼈다.
그 지역은 ‘가사’에 대해 잘 알았던 ‘이스라엘’의 사사 ‘삼손’을 기억하게 하였다. 어느날 밤 그는 성문의 문짝들을 빼어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산 꼭대기로” 갔다.18 이제 이곳을 다녀온 후에 우리는 그러한 짐을 지고 5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산으로 약 914‘미터’를 올라간 기적적인 힘을 더 온전히 인식하게 되었다. 이곳 ‘가사’에서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이 그 안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던 건물의 지붕을 받치고 있던 기둥을 헐어 자신 뿐만 아니라 수천명의 ‘블레셋’인들을 죽였다.19
‘가사’에서 동남쪽으로 약 50‘킬로미터’쯤 되는 곳에 있는 ‘브엘세바’로 향하였다. 훌륭한 도로가 낙타, 양, 염소와 그들을 돌보는 ‘아랍’인들이 있는 넓은 공터 사이로 지나갔다. 멀리 그들의 천막을 바라 보면서 ‘아브라함’과 ‘이삭’이 그 지역에서 살던 때도 생활이 그와 상당히 비슷하였을 것으로 생각했다. 대체로 상당히 현대적인 도시인 ‘브엘세바’에서 우리는 (목요일에 열리는) ‘베두윈’ 시장을 가 보았으며, 훌륭한 생산품에 놀랐다.—그리고 참으로 값이 쌌다! 우리는 30‘센트’에 해당하는 돈으로 2‘킬로그램’(12개)의 ‘오렌지’를 샀다.
그러나 우리의 주요한 관심은 보통 성서의 ‘브엘세바’로 알려져 있는, 성읍 밖의 언덕에 있었다. 이 높은 언덕은 주변의 지역을 제압하고 있다. 우리는 그 위로 올라가서 사라지는 태양에 의한 그림자와 빛으로 아름답게 물든 넓은 시골 지역의 훌륭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발굴된 고대 폐허를 살펴보면서 ‘참으로 살기에 훌륭한 장소이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아브라함’도 그렇게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가 이곳에서 머물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삭’을 데리고 (오늘날 ‘예루살렘’ 성벽 내에 있는)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서 희생으로 드리라고 지시하셨다. ‘아브라함’은 후에 ‘브엘세바’로 돌아갔다.20
그날 밤 ‘호텔’로 가면서 우리는 즐거움을 느꼈다. 이 장소들—많은 장소들이 성서의 명칭을 지니고 있다—을 보니 우리가 어려서부터 읽은 성서 기사의 깊은 의미를 이해할 수 있고 확신할 수 있었다.
‘사마리아’로
또 다른 날 우리는 지중해를 따라 북쪽으로 가다가 ‘네타냐’에서 동쪽으로 나아갔다. 그리하여 우리는 비옥한 ‘사론’ 평야를 가로질러 갔고 몇 ‘킬로미터’를 가니 ‘사마리아’ 산지가 있었다. 위에 북쪽 ‘이스라엘’ 열지파 왕국의 고대 수도인 ‘사마리아’가 한 때 서 있던 언덕이 우리 바로 옆에 갑자기 나타났다. 우리는 차를 타고 그 위로 가서 주변의 산들과 비옥한 골짜기를 구경하였다. 꼭대기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왕 ‘아합’의 궁전으로 밝혀진 유적을 보았다. 기원전 8, 9세기의 것으로 보이는 이곳에서 발견된 상아 조각들은 그 궁전이 원래 화려했음을 지적한다.21
간선 도로로 돌아가서 북으로 가다 어린 ‘요셉’이 자기 형들과 그들의 양떼를 발견한 ‘도단’ 골짜기에 이르렀다. 양떼와 염소들과 곡식을 추수하는 벌판에 있는 농부들은 과거의 아름다운 양치는 광경을 상상하게 하였다. ‘예닌’(고대 ‘레위’인의 도시인 ‘엔가님’) 근처에서 우리는 방향을 돌려 오던 길로 다시 가서 결국 ‘나블러스’에 이르렀다. 고대 ‘세겜’이 있던 이곳 ‘에발’ 산은 우리의 북쪽에 있었고 ‘그리심’ 산은 남쪽에 있었다.22 ‘그리심’ 산 기슭에 ‘야곱’의 우물이 있는데 아마 그 우물에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돌아 가시는 중에 ‘사마리아’ 여자를 만나셨을 것이다. 그 여자는 예수에게 “우리 조상들이 이 산에서 예배”하였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그리심’ 산을 의미하였을 것이다.23
역사적인 산인 ‘그리심’ 산 꼭대기에서 내려온 후에 우리는 다시 남쪽을 향해 아마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가시면서 이용하셨을지도 모르는 길로 나아갔다. 우리는 “실로”라는 도로 표시를 보았다. 깊은 흥미를 가지고 우리는 동쪽으로 꺾어서 아주 좁은 길로 사사 시대 중 여호와의 언약궤가 있었던 곳을 향하여 나아갔다.24 한 ‘이스라엘’ 군인이 우리를 저지하였는데 다른 아무도 보이지 않는 외딴 곳에 우리가 오는 것을 보고 놀란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조용한 산지에서 ‘입다’의 딸과 후에 어린 ‘사무엘’이 한 때 여호와의 장막에서 섬겼다는 것을 생각하니 참으로 흥미있는 장소였다.25
이제 오후 세시쯤 되었는데 우리가 보기를 원하는 것들이 많이 있었다. 산지를 통하여 남쪽으로 몇 ‘킬로미터’를 더 간 후에 동쪽으로 조금 나아가니 ‘베이틴’과 ‘데이르 디브완’이라는 ‘아랍’ 마을이 있었다. 한 때는 근처에 ‘벧엘’과 ‘아이’라는 성서 도시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들을 발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길에서 두 사람에게 물었다. 그들은 영어를 말하였으며, 그 다음 한 두 시간 동안 발굴된 고대의 유적들을 살펴보는 우리를 친절하게 인도하였다.
해발 고도 약 914‘미터’ 되는 곳에 서서 시원한 저녁 바람이 우리의 머리와 옷자락을 날릴 때 주변의 시골 지역을 보는 것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그들의 가축을 다루는 사람들 사이에 다툼이 있어서 ‘롯’이 ‘아브라함’과 분리될 때 ‘아브라함’이 그에게 방향을 먼저 선택하게 한 곳이 바로 이곳이었을 것같다. 성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라].”26
우리는 떠날 준비를 하는데 한 사람이 우리에게 자기 집으로 가서 차를 들고 자기 식구들을 만나도록 강권하였다. 거기에서 우리는 참으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어둠이 깔리자 우리는 낯설은 사람들로부터 예상치 못한 환대를 받은 것을 기뻐하면서 억지로 자리를 떴다.
아름다운 ‘갈릴리’
우리에게 ‘갈릴리’는 중요한 곳이다. 그곳의 지리적 특징만 보아도 마음에 들었다—해안의 ‘갈멜’ 산지, 북쪽의 거친 지역, 푸른 보석과 같은 ‘갈릴리’ 바다, 또 남쪽의 ‘사마리아’와 북쪽의 ‘갈릴리’ 산지 사이에 위치한 아름다운 푸른 ‘이스르엘’ 골짜기(‘에스드렐론’ 평야라고도 불리운다). 그러나 물론 ‘갈릴리’가 우리에게 특히 매력을 끄는 것은 이곳에서 예수께서 자기 지적 생애의 대부분을 보내셨고, 중요한 여러 가지 성서 사건들이 이곳에서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탄 ‘버스’가 ‘하이파’를 떠나 ‘이스르엘’ 골짜기로 갈 때 ‘갈멜’ 산지는 우리 우편에, 자주색 꽃들이 있는 ‘기손’ 강은 우리 좌편에 있었다. 우리는 산맥을 쳐다 보면서 유명한 불을 내리는 시험에서 ‘엘리야’의 제물을 태운 여호와의 기적에 관해 생각했다. ‘엘리야’는 450명의 ‘바알’ 예언자들을 이곳에서 우리 왼편으로 단지 몇 ‘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기손’으로 끌고 가서 죽였다.27 그 일이 발생한 장소를 보니 그 사건의 의미와 그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다.
몇 ‘킬로미터’를 가서 참으로 전략적 지점에 위치한 도시 고대 ‘므깃도’의 폐허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아름다운 ‘이스르엘’ 골짜기의 참으로 훌륭한 광경을 보았다! 이 훌륭한 요새지를 장악한 자는 누구든지 ‘갈멜’ 산지로 통과하는 것을 관할할 수 있었다. 결정적인 전투가 이곳에서 벌어졌다. 성서가 ‘아마겟돈’(“‘므깃도’ 산”을 의미함)이라는 명칭을 모든 정치적인 반대자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승리를 거두시는 전쟁과 관련시키고 있는 점은 참으로 적절하다! 28
‘므깃도’에서 우리는 이 유명한 골짜기 혹은 평야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그 골짜기의 중심 근처에는 ‘모레’ 산이 있었다. 그 경사지 혹은 그 근처에 ‘나인’, ‘수넴’, ‘엔돌’과 같은 성읍이 있었다. 이 산을 지나 동북쪽으로 몇 ‘킬로미터’를 가면 꼭대기가 둥근 유명한 ‘다볼’ 산이 서 있다. 그곳에서 ‘드보라’와 함께 사사 ‘바락’이 내려와서 놀란 ‘가나안’인들을 격파시켰다.29 (우리가 앞서 차로 올라갔던 ‘다볼’ 산 꼭대기에서 그 지역의 웅장한 광경을 볼 수 있다) 예수의 어릴 때의 고향인 ‘나사렛’은 ‘갈릴리’ 산지에 있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골짜기에서 아주 가깝다. 예수께서는 우리 눈 앞에 전개되는 그 지역을 잘 아셨을 것이다. ‘나사렛’은 이 주변 지역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골짜기에서 멀리 떨어진 동남쪽에 있는 ‘길보아’ 산을 바라 보았다. 그 기슭 근처에 ‘하롯’의 우물이 있다. 그곳에서 ‘기드온’은 ‘모레’ 산에서 야영을 하고 있던 135,000명의 ‘미디안’인들과 마주쳤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그의 군대를 단지 3백명으로 줄이도록 지시하셨으며, 그 수로 ‘기드온’이 승리하게 하셨음을 기억하였다.30 후에 비슷한 전투에서도 ‘블레셋’인들은 ‘모레’ 산 가까이 있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롯’ 샘 곁에 있었다. 이 때는 그 ‘블레셋’인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패주시켰으며, ‘사울’과 ‘요나단’이 죽임을 당하였다.31 이 지역을 보니 그러한 성서 사건이 눈에 선하였다.
그러나 아마 가장 아름다운 광경은 ‘갈릴리’ 바다였을 것이다. 그 때에 우리는 그 바다의 북쪽에 있는 산지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우리 아래에는 깊은 대야 속에 있는 보석처럼 길이 21‘킬로미터’이고, 넓이 12‘킬로미터’의 푸른 호수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았기 때문에 그 호수는 아주 작게 보였다. 놀랍게도 그 호수는 해면 아래 약 213‘미터’ 되는 곳에 있어서 언덕과 산들이 그것을 거의 둘러싸고 있다.
배를 타거나 높은 곳에서 그 호수를 보면서 호반에서 시간을 보낼 때 우리는 이곳에서 발생한 여러 가지 사건들을 생각하였다. 예수께서는 이 바다 위를 걸으셨고,32 폭풍을 잠잠하게 하셨으며,33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 해변에서 자기 제자들과 아침 식사를 드셨고,34 근처의 산허리에서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연설을 하셨고,35 이 곳에서 몇개의 떡과 몇마리의 물고기로 수천명을 먹이셨으며,36 북쪽 해안에 있는 도시인 ‘가버나움’에 거주하셨다.37
우리 ‘버스’가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을 향하던 날 우리는 ‘이스르엘’과 ‘요단’ 골짜기 사이에 전략적으로 위치한 ‘벧산’이라는 도시에 이르렀다. 그 고대 도시의 폐허는 약 80‘미터’ 높이의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길보아’ 산과 ‘므깃도’ 산 쪽으로 ‘이스르엘’ 골짜기를 올려다 보며, ‘여리고’ 쪽으로 ‘요단’ 골짜기를 내려다 보는 그 꼭대기에서 참으로 훌륭한 광경을 볼 수 있다! 이곳 ‘벧산’에서 ‘블레셋’인들은 ‘길보아’ 산에서의 전투에서 ‘사울’이 죽은 후에 성벽 위에 ‘사울’의 시체를 매달아 놓았다.38
‘여리고’와 ‘예루살렘’
우리는 ‘요단’ 계곡을 따라 약 80‘킬로미터’를 가서 ‘여리고’에 이르렀다. 이 지역은 덥고 건조하지만, 봄에는 더 서늘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와 그분의 가족이 유월절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매년 여행하는 데 ‘사마리아’ 산지가 아니라 더 멀지만 여행하기가 더 쉬운 이 길을 택하지 않았을 것인가 생각하였다.39
야자수가 많은 ‘여리고’에 이르니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40 냉방 장치를 한 ‘버스’에서 나오자 우리는 태양의 강렬한 열기를 느꼈다. 그것은 자기의 제자들에게 “냉수 한 그릇”을 주는 사람을 예수께서 칭찬하신 것을 더 온전히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41 우리는 발굴된 고대 ‘여리고’의 폐허가 있는 언덕에 올랐다. 그 지역은 비교적 좁아서 ‘여호수아’와 그의 군대가 어떻게 하루에 일곱 번씩 그 성읍 주위를 행군할 수 있었는가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42
마지막 나흘은 성서의 주요 도시인 ‘예루살렘’에서 보냈다. 우리가 자주 읽었던 장소들을 직접 보는 것은 참으로 의미있는 것이었다. ‘감람’산 위에 서서 우리는 ‘유다’가 이 근방 어디엔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분의 적들에게 예수를 넘겼다는 것을 기억하였다.43 ‘기드론’ 골짜기 너머로 ‘바위의 도움’을 볼 수 있었으나 예수 당시에는 그분이 그곳에 있는 성전을 보셨을 것이다. 성전을 보시면서 그분은 유명한 “사물의 제도의 결말”에 관한 예언을 하셨다.44
우리는 감람산 위에서 “‘다윗’ 성”의 실제 위치를 볼 수 있었으며, 북쪽과 서쪽을 향하여 확장된 후대의 ‘예루살렘’과의 관련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원래의 “‘다윗’ 성” 혹은 “‘시온’ 산”은 ‘여부스’족들로부터 탈취되었다.45 그곳은 ‘바위의 도움’ 남쪽으로서 현대의 ‘예루살렘’ 성벽의 외부에 있다. 다른 날 우리는 왜 원래의 그 성읍의 실제적 위치가 아주 명백한가 하는 이유를 더 명백히 알게 되었다.
우리는 ‘기드론’ 골짜기로 내려가서 “‘다윗’ 성”이 자리 잡고 있는 언덕 바로 아래 있는 ‘기혼’ 샘에 이르렀다. 동굴 속에 있는 이 샘은 고대에는 물 공급을 보호하여야 하였기 때문에 그 성읍에 필수적인 것이었다. ‘요압’과 그의 부하들이 높은 그 성읍 내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여부스’족이 성벽 밖의 이 샘에 이르도록 만든 수직굴을 통해서였던 것같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윗’과 ‘이스라엘’이 그 성을 점령할 수 있도록 성안에서 공격군을 인도하였다.46 여러 해 후에 ‘히스기야’ 왕은 ‘기혼’에서 ‘실로암’ 샘에 이르는 533‘미터’ 길이의 ‘터널’을 만들었는데—‘히스기야’ 시대에는 ‘실로암’ 샘이 성읍 내부에 있었다—참으로 공학적인 걸작품이다.47 이로 인해 어떤 포위 공격을 받더라도 ‘예루살렘’에 물이 공급될 수 있었다.
‘히스기야’의 ‘터널’을 통하여 물이 아직도 흐른다. 우리가 그 ‘터널’ 속을 걸어 갈 때 그것은 무릎 정도의 깊이였다. ‘실로암’ 못에서 나온 후에 우리는 계곡으로 걸어가서 ‘엔로겔’ 샘에 이르렀다. 우리는 ‘다윗’의 반역적인 아들 ‘아도니야’가 보좌 찬탈을 위한 지지를 얻기 위해 잔치를 벌인 곳이 ‘엔로겔’임을 생각하였다.48 죽어가는 ‘다윗’ 왕이 이 말을 들었을 때 그는 그 골짜기에서 단지 수백 ‘미터’ 정도 위에 있는 ‘기혼’ 샘에서 그의 아들 ‘솔로몬’이 왕으로 기름부음받게 하였다.49
이러한 장소를 방문해 보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 우리는 그러한 장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기 위하여 그것들을 볼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방문은 그 장소가 실제로 존재함을 확증해 주는 것이었다. 특히 실제로 그곳에 가서 성서 사건들이 발생한 지역의 배경을 잘 알게 되니 이러한 사건들에 대해 의미가 깊어지고 인식이 높아졌다.
[26면 네모]
성서 참조
1 누가 2:4-16.
2 창세 35:16-20.
3 룻기 1:16-19; 2:2-4.
5 민수 13:23.
6 창세 23:14-19; 25:9; 49:30, 31; 50:13.
8 창세 18:1-8.
9 창세 19:27-29.
10 창세 37:12-14.
11 사무엘 하 5:1-5.
12 마태 2:7-18.
13 사무엘 상 24:1-3.
14 사도 9:36-43.
15 사도 10:1-25.
16 사무엘 상 5:1-9.
17 사무엘 하 1:20.
18 사사 16:3.
20 창세 21:30-34; 22:1-19.
21 열왕 상 22:37-39; 아모스 6:1, 4.
22 신명 11:29, 30; 여호수아 8:30-35.
24 여호수아 18:1.
25 사사 11:40; 사무엘 상 3:21.
26 창세 13:1-11.
27 열왕 상 18:18-40.
29 사사 4:4-16.
30 사사 7:1-22; 8:10.
31 사무엘 상 28:4; 31:1-4.
32 마태 14:23-32.
33 마가 4:35-41.
34 요한 21:9-14.
35 마태 5:1, 2.
36 마태 14:14-22.
37 마가 2:1.
38 사무엘 상 31:10.
39 누가 2:41, 42.
40 신명 34:3.
41 마태 10:42.
42 여호수아 6:15.
44 마가 13:3, 4; 마태 24:3.
45 사무엘 하 5:7, 9; 6:12.
48 열왕 상 1:9, 10.
49 열왕 상 1:33-41.
[20면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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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엘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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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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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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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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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디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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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므레
가사
헤브론
사해
마사다
브엘세바
소돔과 고모라?
[22면 삽화]
우리는 텔 브엘세바 근처에서 양과 염소들을 돌보는 이 젊은 처녀를 보았다
[24면 삽화]
오늘날의 아름다운 ‘갈릴리’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