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정의: “부활”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아나스타시스는 문자 그대로 “다시 일어남”을 의미하며 죽음으로부터 일어남을 말한다. “죽은 사람의(죽은 사람들 가운데서의) 부활”이라는 좀 더 온전한 표현이 성경에 반복적으로 사용된다. (마태 22:31; 사도 4:2; 고린도 첫째 15:12) 히브리어로는 테히야트함메팀이며, 그 뜻은 “죽은 사람의 소생”이다. (마태 22:23, 신세계역 참조주 성서 각주 참조) 부활에는 개개인의 생활 패턴, 즉 하느님께서 그분의 기억 속에 간직해 오신 생활 패턴을 되살리는 것이 포함된다. 각 사람은 그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인간의 몸 또는 영의 몸으로 부활되지만, 죽었을 때와 동일한 개성과 기억을 가지므로 개인의 동일성이 유지된다. 죽은 사람의 부활 마련은 여호와의 과분한 친절의 숭고한 표현이다. 그것은 그분의 지혜와 능력을 나타내며 땅에 관한 그분의 원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이다.
부활은 비물질적인 영혼과 육체와의 재결합인가?
물론 그것이 가능하려면, 인간은 육체에서 분리될 수 있는 비물질적인 영혼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성서는 그러한 점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한 개념은 그리스 철학에서 빌려온 것이었다. 영혼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이 277-281면에 나와 있다. 비물질적인 불멸의 영혼에 대한 그리스도교국의 신앙의 기원에 관한 증거를 알아보려면, 281, 282면을 참조하기 바란다.
예수께서는 육의 몸으로 일으킴을 받으셨으며, 현재 하늘에서 그러한 몸을 가지고 계신가?
베드로 첫째 3:18: “그리스도께서도 죄와 관련하여 단 한 번 죽으셨으니, 의로우신 분이 불의한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셨으나 영으로는[“영에 의해”, 왕역; “영으로는”, 개표, 신영성, 두에, 예루살렘] 살리심을 받[으시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되셨을 때, 영의 몸으로 출생하셨다. 그리스어 본문에서는 “육”이라는 단어와 “영”이라는 단어가 서로 대조되어 있으며, 둘 다 여격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만일 번역자가 “영에 의해”라고 번역하면 역시 일관성 있게 “육에 의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는 만일 번역자가 “육으로는”이라고 번역하면 역시 “영으로는”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사도 10:40, 41: “하느님께서는 그분[예수 그리스도를]을 셋째 날에 일으키시고 나타나게 하셨으니, 모든 사람에게가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미리 임명된 증인들, 곧 우리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예수를 보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그분이 영적 피조물이었기 때문이며 과거에 천사들처럼, 자신을 보이게 하기 위해서 육체로 물질화하셨을 때에는 다만 선택된 증인들이 있는 곳에서만 하셨기 때문이다.)
고린도 첫째 15:45: “사실, ‘첫 사람 아담은 산 영혼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아담[창조되었을 때의 아담처럼 완전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었습니다.”
누가 24:36-39은 부활되신 예수의 몸에 관하여 무엇을 알려 주는가?
누가 24:36-39: “[제자들이] 이런 일에 대하여 말하고 있을 때에, 그분이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그들에게 ‘여러분에게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겁이 났으며 무서웠기 때문에, 자기들이 영을 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분은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여러분은 왜 당황합니까?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생깁니까? 내 손과 발을 보십시오. 바로 나입니다. 나를 만지고 또 보십시오. 영은 살과 뼈가 없으나, 여러분이 보다시피 나는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영들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분명히 유령 혹은 환상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비교 마가 6:49, 50)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자기는 유령이 아님을 확신시켜 주셨다. 그들은 그분의 육의 몸을 볼 수 있었고 그분을 만져보고 뼈를 느낄 수 있었다. 또한 그분은 그들이 있는 데서 식사도 하셨다. 그와 비슷하게 과거에, 천사들은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도록 물질화했었으며, 먹기도 하고, 심지어 결혼하여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기까지 했었다. (창세 6:4; 19:1-3) 예수께서는 부활되신 다음에, 언제나 동일한 육의 몸으로 나타나시지는 않았다. (아마 그 당시 자신이 영이라는 사실을 정신에 심어주시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친밀한 동료들까지도 즉시 그분을 알아보지는 못하였다. (요한 20:14, 15; 21:4-7) 그러나 반복해서 물질화한 몸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고 그들이 알고 있는 예수를 식별할 수 있게 하는 언행을 하심으로, 그분은 자신이 참으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제자들의 믿음을 강화시켜 주셨다.
만일 제자들이 예수께서 현재 하늘에서 가지고 계신 몸의 그분을 실제로 본 것이었다면, 바울은 후에 영광스럽게 되신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존재 자체의 정확한 표상”이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느님은 영이시며 결코 육체로 계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히브리 1:3; 비교 디모데 첫째 6:16.
예수께서 부활 후에 나타나신 일들에 대한 보고들을 읽을 때 138, 139면에 인용된 베드로 첫째 3:18과 고린도 첫째 15:45을 염두에 둔다면 올바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누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 생명에 참여하도록 부활될 것이며, 그들은 거기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누가 12:32: “적은 무리여,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왕국을 여러분에게 주는 것을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승인하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나타내는 모든 사람이 이들 가운데 포함되지는 않는다. 그 수가 제한되어 있다. 그들이 하늘에 있게 되는 것은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이다.)
계시 20:4, 6: “나는 왕좌들을 보았는데, 그 위에 앉아 있는 이들이 있었고, 그들에게 심판하는 권세가 주어졌다. ···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은 행복하고 거룩하다. 이들에 대해서는 둘째 사망이 아무 권위도 갖지 못한다. 도리어 그들은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될 것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왕으로 통치할 것이다.”
하늘 생명으로 일으킴을 받는 사람들은 결국 거기에서 영광스럽게 된 육체를 갖게 될 것인가?
빌립보 3:20, 21: “주 예수 그리스도[는] ··· 능력의 작용에 따라, 비천한 우리의 몸을 변화시켜 자기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양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육의 몸이 결국 하늘에서 영광스럽게 된다는 의미인가? 아니면 그들이 하늘 생명으로 일으킴을 받을 때에는 낮은 육의 몸을 갖지 않고 영광스러운 영의 몸을 입게 된다는 의미인가? 다음의 성구에서 대답을 찾아보자.)
고린도 첫째 15:40, 42-44, 47-50: “하늘의 몸들이 있으며 땅의 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몸들의 영광이 다르고, 땅의 몸들의 영광이 다릅니다. 죽은 사람의 부활도 그러합니다. ··· 육적인 몸으로 뿌려져서 영적인 몸으로 일으킴을 받습니다. ··· 첫 사람[아담]은 땅에서 났으며 흙으로 만들어졌고, 둘째 사람[예수 그리스도]은 하늘에서 났습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그 사람과 같이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들도 그러하고, 하늘에 속한 그분과 같이 하늘에 속한 사람들도 그러합니다. 우리가 흙으로 만들어진 그 사람의 형상을 지녀 온 것과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그분의 형상을 지닐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들이여, 내가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살과 피는 하느님의 왕국을 상속받을 수 없고, 또한 부패할 것은 부패하지 않을 것을 상속받지 못합니다.” (여기에는 두 종류의 몸이 혼합된다거나 육체를 하늘로 데려 간다고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다.)
예수께서는 부활이 일반 인류에게 무엇을 의미할 것인지를 어떻게 보여 주셨는가?
요한 11:11, 14-44: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우리의 친구 나사로가 쉬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리로 가서 그를 잠에서 깨우겠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기탄없이 말씀하셨다.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 예수께서 도착해서 보시니, 그가 기념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나 되어 있었다. ··· 예수께서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 [예수께서] 큰 음성으로 ‘나사로, 나오시오!’ 하고 외치셨다. 죽었던 사람이 손발이 감는 베로 묶인 채 나왔으며, 얼굴은 천으로 감싸여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 다니게 하십시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만일 예수께서 나사로를 다른 생명을 누리는 행복한 상태에서 돌아오게 한 것이었다면 그것은 결코 친절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나사로를 생명이 없는 상태에서 일으키신 것은 그에게나 그의 누이들에게도 친절한 일이었다. 나사로는 다시 한번 살아 있는 인간이 되었다.)
마가 5:35-42: “회당의 주임 관리의 집에서 몇 사람이 와서 ‘당신의 딸이 죽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선생님을 더 이상 괴롭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하는 말을 귓결에 들으시고 회당의 주임 관리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을 나타내기만 하십시오’ 하고 말씀하셨다. ··· 어린아이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기와 함께한 사람들을 데리고 어린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어린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탈리타 쿠미’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는데, 일어나거라!’ 하는 뜻이다. 그러자 소녀는 곧 일어나 걷기 시작하였다. 그 아이는 열두 살이었다. 곧 그들은 큰 경이감으로 정신을 잃을 정도가 되었다.” (일반 부활이 그리스도의 천 년 통치 중에 지상에서 있게 될 때, 틀림없이 수많은 부모와 자녀들은 그들이 재회할 때 몹시 기뻐할 것이다.)
지상 생명으로 일으킴을 받는 사람들에게 어떤 전망이 있는가?
누가 23:43: “진실로 내가 오늘 당신에게 말하는데, 당신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통치할 때 온 땅이 낙원으로 변모될 것이다.)
계시 20:12, 13: “나는 죽은 사람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왕좌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두루마리들이 펴 있었다. 그러나 다른 두루마리가 펴 있었는데, 그것은 생명의 두루마리이다. 죽은 사람들이 그 두루마리들에 기록된 것에 따라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았다. ··· 그들이 각각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았다.” (두루마리들이 펴 있다는 것은 이사야 26:9과 일치하게, 하느님의 뜻을 배우는 교육 기간이 있을 것임을 지적하는 것 같다. “생명의 두루마리”가 펴 있다는 사실은 그 교육에 유의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이름을 그 두루마리에 기록되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들 앞에는 인간 완전성 가운데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전망이 있다.)
일부 사람들은 일으킴을 받아 단지 심판을 선고받은 다음 둘째 사망에 처해지게 되는가?
요한 5:28, 29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기념 무덤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음성을 듣고 나올 시간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한 일을 행한 사람들은 생명의 부활에, 사악한 일을 행한 사람들은 심판의 부활에 이를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그분이 후에 요한에게 주신 계시된 말씀에 비추어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위에 인용된 계시 20:12, 13 참조) 전에 선한 일을 한 사람들과 전에 악한 일을 한 사람들이 “각각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어떤 행위인가? 만일 사람들이 이전 생애에서 나타낸 행위에 근거하여 유죄 판결을 받을 것이라는 견해를 받아들여야 한다면, 그것은 “죽은 사람은 자기의 죄에서 해방”되었다는 로마 6:7과 일치하지 않는다. 또한 단지 멸하기 위해 사람들을 부활시킨다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요한 5:28에서 앞으로 부활이 있을 것을 지적하신 것이며, 29절에서는 그들이 인간 완전성으로 높여지고 판결을 받은 후의 결과를 나타내신 것이다.
계시록 20:4-6은 땅에서 부활될 사람들에 관하여 무엇을 알려 주는가?
계시 20:4-6: “나는 왕좌들을 보았는데, 그 위에 앉아 있는 이들이 있었고, 그들에게 심판하는 권세가 주어졌다. 그렇다. 나는 예수에 관하여 증언한 일과 하느님에 관하여 말한 일 때문에 도끼로 처형된 사람들의 영혼들[을] ··· 보았다. 그런데 그들은 살아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왕으로 통치하였다. (나머지 죽은 사람들은 천 년이 끝나기까지 살아나지 못하였다.) 이것이 첫째 부활이다.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은 행복하고 거룩하다. 이들에 대해서는 둘째 사망이 아무 권위도 갖지 못한다. 도리어 그들은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될 것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왕으로 통치할 것이다.”
「신세」와 「모펏」에는 삽입된 내용의 앞 뒤 문맥이 통하도록 괄호가 사용되어 있다. 명백히 설명되었듯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이들은 “나머지 죽은 사람들”이 아니다. 그 부활은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통치할 이들을 위한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서 통치하는 이들 외에는 천 년 중에 다른 아무도 살지 못할 것이라는 뜻인가? 아니다. 만일 그렇다고 하면, 제사장으로서의 그들의 봉사로부터 유익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며 그들의 통치 영역은 황폐한 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머지 죽은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아담의 죄의 결과로 죽은 사람들과, 큰 환난의 생존자들 혹은 천년기 중에 태어날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아담의 죄의 치사적인 영향으로부터 구제될 필요가 있는 사람들 모두이다.—비교 에베소 2:1.
그들은 어떤 의미로 천 년 끝까지 “살아나지” 못하는가? 이것은 그들의 부활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살아나다’라는 말에는 인간으로서 단지 존재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의미가 내포된다. 그것은 아담의 죄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인간 완전성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앞 구절에서 하늘에 있게 될 사람들이 “살아”났다고 말한 직후에 5절에 이러한 언급이 나온다는 점에 유의하라. 하늘에 갈 사람들의 경우에, “살아”났다는 것은 죄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생명을 의미한다. 그들은 심지어 특별히 불멸성을 입는 은혜를 받는다. (고린도 첫째 15:54) 그러므로 “나머지 죽은 사람들”은 인간 완전성으로 온전한 생명을 가질 때 “살아나”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지상에서 부활되는 사람들 가운데는 누가 포함될 것인가?
요한 5:28, 29: “이것에 놀라지 마십시오. 기념 무덤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나올 시간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념 무덤”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타포스[무덤, 개인의 매장지] 또는 하이데스[무덤, 죽은 인류의 보통 무덤]의 복수형이 아니라 므네메이온[기억, 기념 무덤]의 여격 복수형이다. 그것은 죽은 사람에 대한 기억을 간직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용서받지 못할 죄 때문에 게헨나에서 기억이 소멸당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기억하시는 사람들이 영원히 살 기회를 갖도록 부활될 것이다.—마태 10:28; 마가 3:29; 히브리 10:26; 말라기 3:16.)
사도 24:15: “나는 하느님께 향한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희망은 ··· 의로운 사람들과 불의한 사람들의 부활이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의로운 길과 일치하게 산 사람들과 무지하여 불의한 일을 한 사람들이 부활될 것이다. 성서는 죽은 사람 중에 어느 특정한 개인이 부활될 것인가에 대한 우리의 모든 질문에 대답해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사실을 아시는 하느님께서 편파적이 아니게 행동하실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그분의 공의에는 그분의 의로운 표준을 무시하지 않는 자비가 포함된다. 비교 창세 18:25.)
계시 20:13, 14: “바다가 그 안에 있는 죽은 사람들을 내주고 죽음과 하데스도 그 안에 있는 죽은 사람들을 내주어, 그들이 각각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았다. 그리고 죽음과 하데스는 불못에 던져졌다. 불못, 이것은 둘째 사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아담의 죄로 인하여 죽은 사람들은 그들이 바다에 묻혔든지, 땅에 있는 죽은 인류의 보통 무덤인 하데스에 묻혔든지 부활될 것이다.)
또한 “구원” 제하 참조.
수십 억의 사람들이 죽은 사람 가운데서 부활된다면, 그들 모두가 어디에서 살 것인가?
지금까지 지구상에 살았던 사람들의 수는 대체로 200억 명으로 추산된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이들 모두가 다 부활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다 부활된다 할지라도, 충분한 공간이 있을 것이다. 현재 지구의 육지 표면은 약 1억 4760만 제곱 킬로미터이다. 그 중 절반을 다른 목적으로 남겨 둔다 해도, 거의 3700제곱 미터에 달하는 면적이 각 개인에게 배당된다. 그만하면 충분한 식량을 마련하고도 남는다. 현재 식량 부족의 근본 원인은 충분히 생산하지 못하는 땅의 무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적인 대립과 상업적인 탐욕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