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돔
(Edom) [붉은], 에돔 사람들 (Edomites)
에돔은 야곱의 쌍둥이 형인 에서에게 붙여진 별명이었다. (창 36:1) 이 별명이 그에게 붙은 이유는 그가 붉은 죽을 받는 대가로 맏아들의 권리를 팔았기 때문이다. (창 25:30-34) 우연의 일치로, 에서는 태어날 때 몸이 매우 붉었고(창 25:25), 그와 그의 자손들이 후에 거주하게 된 땅의 곳곳에서 그 비슷한 색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세일과 에돔 야곱이 하란에 머문 20년 기간 중에, 에서(에돔)는 세일 땅 즉 “에돔 들”에서 기반을 다지기 시작하였다. (창 32:3) 그렇게 에서는 아버지 이삭이 죽기 전에도(창 35:29) 벌써 이삭의 예언적 축복을 성취시키기 시작했던 것 같은데, 그는 헤브론 주위의 비옥한 땅에서 다른 곳으로 주의를 돌렸으며 또한 휘하의 남자 400명과 함께 “칼로 살”기 시작했음에 틀림없다. (창 27:39, 40; 32:6, 8) 하지만 기록을 보면 그가 여전히 거주지 또는 본거지를 헤브론 지역에 두고 있었으며 아버지가 죽은(기원전 1738년) 후에야 비로소 세일 산간 지방으로 완전히 이주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무렵에는 그의 가족이 늘어나 있었고 소유물도 매우 많았다.—창 36:6-8.
세일 땅은 이전에는 호리 사람들의 영토였지만(창 14:6; 36:20-30), 에서의 자손이 호리 사람의 족장들을 쫓아내고 그 지역을 차지하였다. (신 2:12) 그 후에 그 땅은 에돔 땅으로 알려지게 되었지만, 세일이라는 옛 이름도 계속 사용되었다.—민 24:18.
지리 설명 에돔의 영토는 북쪽으로 제렛 급류 골짜기에 의해 형성된 모압과의 국경에서부터 남쪽으로 아카바 만에 면한 엘랏(엘롯)에 이르기까지 약 160킬로미터에 걸쳐 있었다. (신 2:1-8, 13, 14; 왕첫 9:26) 에돔의 영토는 동쪽으로 아라비아 사막의 가장자리까지 뻗어 있었던 것 같으며, 서쪽으로는 아라바 너머 신 광야까지 이르렀으며 소금 바다의 남서쪽 끝에서 가데스-바네아까지 뻗어 있는 네게브 고지대도 포함하고 있었다. 따라서 에돔의 서쪽 부분은 유다 영토의 남동쪽 경계를 이루게 되었다.—수 15:1. 민 34:3 비교.
하지만 에돔 영토의 진정한 중심부는 아라바 동쪽에 있었던 것 같다. 높이가 해발 1700미터에 달하는 곳들도 있는 이곳의 높은 산맥에는 비가 어느 정도 내리기 때문이다. 아라바 서쪽에 있는 땅인 네게브는 지대가 상당히 낮아서 지중해의 폭풍 구름 가운데 남은 구름들을 그대로 통과시키는데, 그 구름들이 에돔의 더 높은 산들에 닿게 되면 남아 있던 수분 가운데 일부가 비가 되어 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고고학적 조사 결과는, 긴 산악 고원 지대의 가장 높은 부분에 있는 경작 가능한 좁고 긴 땅을 따라 고대의 정착지들과 요새들이 늘어서 있었음을 밝혀 준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도 남쪽 아카바 만 쪽으로 가면서 점점 줄어든다. 사해(소금 바다)에서 남쪽으로 30킬로미터쯤 떨어진 현대의 타필레에는 큰 올리브 과수원들이 있다. 하지만 연간 강수량이 280밀리미터 정도에 불과하므로 이것은 대부분 여덟 개의 양질의 샘에서 흘러나오는 물 덕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비옥한 땅은 부족했지만, 이 험준한 산간 지방에는 가치 있는 구리와 철이 매장되어 있어서 사해에서 남쪽으로 48킬로미터쯤 떨어진 현대의 페이난 주변에서는 채광과 제련이 행해졌다. 또한 고대에는 상당한 규모의 소나무 숲이 있었다는 증거도 볼 수 있다.
위의 사실과 일치하게, 모세는 에돔 왕에게 사자들을 보낼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던 장소인 가데스-바네아를 “당신의 영토 끝”이라고 표현했으며, 에돔의 영토를 평화롭게 통과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할 때 모세는 그들의 밭들과 포도원들과 우물들에 관해 언급하였다.—민 20:14-17.
전략적 요지 모세는 이스라엘이 에돔을 통과하는 “왕의 길”로 가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민 20:17) 일반적으로 ‘왕의 대로’라고 불리는 이 길은 아카바 만에서부터 시리아의 다마스쿠스까지 뻗어 있었던 것 같은데, 에돔을 가로지르는 부분에서는 아라바 동쪽으로 이어지는 높은 고원의 가장자리를 따라 뻗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길을 따라 에돔의 주요 도시들이 있었을 것이다. (창 36:33; 왕둘 14:7) 또 하나의 길은 네게브에서부터 동쪽으로 아라비아 사막의 가장자리에 있는 마안까지 뻗어 가다가 그곳에서 남북으로 뻗어 있는 또 다른 길과 연결되었다. 이집트, 아라비아, 시리아, 메소포타미아에서 온 많은 화물들이 이 길들로 지나갔다. 이 길들로 지나가는 낙타나 나귀 대상들에게서 징수한 통행세는 에돔의 부에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사막을 여행하느라 지친 사람들 역시 에돔에 도착했을 때 음식과 숙소를 위해 돈을 냈을 것이다.
아라바 쪽에 있는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 즉 고원의 벽면 덕분에 에돔의 주요 요새의 그쪽 부분은 훌륭하게 방비되었다. 제렛 급류 골짜기의 깊은 협곡은 모압 쪽에서의 침략을 저지해 주었다. (다만, 암 2:1에 유의) 비교적 취약한 동쪽의 사막을 향해서는 요새들이 연이어 있어서 미디안과 그 밖의 유목민들을 막아 낼 수 있었다. 그에 더하여, 산들과 고원들 사이로 패여 들어간 구렁들은 대개 기어오를 수 없는 붉은색 사암 절벽들로 둘러싸여 있어 접근하기 어려운 협곡들을 형성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하신 예언 가운데 에돔 사람들이 자신만만하게 “바위의 은밀한 곳에 거하며 언덕의 높은 곳을 차지하고 있”고 보금자리에 들어 있는 독수리 같다고 말씀하신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렘 49:7, 16.
에돔 민족 에돔 사람들은 에서의 자손이므로 기본적으로 셈족이지만, 함족의 혈통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 이유는 에서의 아내 두 사람이 함족인 가나안 혈통(헷 사람과 히위 사람) 출신이었고, 이름이 나오는 아내들 중에 한 사람만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 계통으로서 셈족의 피가 일부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창 36:2, 3) 만일 일부 학자들의 견해대로 호리 사람이라는 이름이 단지 “동굴 거주자”를 의미한다면, 에서의 히위 사람 아내 즉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는 세일에 거주하던 호리 사람의 자손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창 36:2, 20, 24, 25 비교) 어쨌든 에돔 사람들도 롯의 자손인 모압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처럼(단 11:41에 유의) 이스라엘 사람들과 친척 관계에 있었으며, 원래는 그들도 할례를 행하였다. (렘 9:25, 26. 겔 32:29 비교)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가리켜 이스라엘의 “형제들”이라고 하셨으며, 광야를 지나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에돔 사람의 토지 소유권을 침해해서는 안 되었다. 여호와께서 세일 산을 에돔의 자손들에게 소유지로 주셨기 때문이다.—신 2:1-8.
원래 여러 족장 국가로 이루어져 있었던 에돔의 부족들은 후에 하나의 왕국 아래 조직되었다. 역대 왕들의 계열을 보면, 서로 다른 부족 또는 족장 국가에서 왕이 나왔으며, 따라서 한 가계에서 세습적으로 왕위를 계승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창 36:15-19, 31-43) 일부 비평가들은 창세기 36:31에서 에돔의 통치자들을 가리켜 “이스라엘 자손을 통치하는 왕이 있기 전에 에돔 땅에서 통치한 왕들”이라고 한 말이 시대착오적이거나 후대에 삽입된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해 왔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다. 창세기를 기록한 모세는 하느님께서 야곱(이스라엘)에게 “왕들이 너의 허리에서 나올 것”이라고 하신 명확한 약속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창 35:11) 모세 자신도 이스라엘이 마침내 왕을 갖게 될 것임을 예언하였다.—신 28:36.
그리스어 「칠십인역」 욥 42:17에는 욥이 창세기 36:33에 나오는 에돔 왕 요밥과 같은 사람이라는 내용이 부가되어 있다. 하지만 욥은 우스 땅 출신이었는데, 우스라는 이름은 원래 아람의 한 부족에게 붙여진 이름이었고 아람 사람 나홀의 가계에서도 사용되었다. (욥 1:1. 창 10:23; 22:20, 21 비교) 애가 4:21에서 “우스 땅에 사는” 에돔에 관해 말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욥이 살았던 시기로 생각되는 때로부터 여러 세기가 지난 뒤에 기록된 이 구절은 우스와 에돔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예레미야 25:20, 21에서 ‘우스 땅의 왕들’이 에돔과 별도로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성구는 오히려 에돔의 영토가 확장되었음을 지적하는 것일 수 있다.—우스 4번 참조.
질병에 걸린 욥을 방문하여 비난했던 세 “동무” 가운데 한 사람은 에돔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그는 바로 데만 사람 엘리바스이다. (욥 2:11. 창 36:11, 34 비교) 데만은 예레미야 49:7에서 에돔 사람의 지혜의 중심지로 언급되어 있는데, 아마 그곳의 에돔 사람들이 동방에서 온 여행자들과 정기적으로 접촉하고 교류한 것이 그들이 지혜로 명성을 얻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이집트 탈출 시기부터 유다 역사의 끝까지 홍해에서 파라오의 군대가 멸망되고 이스라엘이 기적으로 구출된 일은, 가나안과 그 주위의 모든 지역처럼 에돔에도 영향을 미쳤다. (출 15:14, 15) 시나이 반도의 광야에서, 이스라엘에 대해 무력을 사용한 최초의 반대는, 에돔의 한 부족으로서 널리 퍼져 사는 아말렉 사람들로부터 왔는데, 이 아말렉 사람들은 그들의 역사 전체에 걸쳐 이스라엘에게 괴로움의 근원이 되었다. (출 17:8-16. 창 36:12, 16 비교. 아말렉, 아말렉 사람들 참조) 방랑 기간이 끝나 갈 때, 에돔을 통과하여 ‘왕의 대로’로 안전하게 지나가게 해 달라는 모세의 정중한 요청은 거절당했으며,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은 에돔 왕은 이스라엘이 조금도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려고 막강한 군대를 집결시켰다. (민 20:14-21) 그래서 아론이 에돔 국경 근처의 호르 산에서 죽은 뒤에(민 20:22-29), 이스라엘은 에돔의 중심부를 우회하여, 제렛 급류 골짜기 곁에 진을 쳤다가, 그 후에 북쪽으로 여행하여 모압의 동쪽 국경 지방을 지났다.—민 21:4, 10-13; 판 11:18. 신 2:26-29 비교.
모세는 죽기 전에 이스라엘에 대해 선언한 축복의 시 가운데, 여호와 하느님이 ‘시나이에서 오시고, 세일[에돔]에서부터 번쩍이며 나타나시고, 바란 산간 지방에서부터 빛을 비추셨다’고 묘사하였다. 비슷한 묘사가 바락과 드보라의 노래에 그리고 하박국의 예언에도 나온다. (신 33:2; 판 5:4, 5; 합 3:3, 4) 따라서 이 예언적 묘사에서는 마치 인상적인 무대가 펼쳐지고, 거기에서 여호와께서 새로 형성된 자신의 나라에 자신을 나타내면서, 산봉우리들 위에서 비치는 빛의 번쩍임으로 그들에게 광채를 비추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스라엘은 에돔 사람을 가증히 여기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그는 당신의 형제이기 때문”이었다. (신 23:7, 8) 하지만 공격적인 아말렉 부족뿐 아니라 에돔 전체가 이스라엘을 반대하는 행로를 취하였다. 사울은 그들과 전쟁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삼첫 14:47, 48) 하지만 사울은 에돔 사람 도엑을 자기 목자들의 우두머리로 삼았는데, 이 사람은 다윗에 대해 사울에게 밀고하는 일을 하였다. 사울의 부하들이 놉의 제사장들을 공격하기를 꺼릴 때, 사울은 도엑을 사용하여 무차별 학살을 저질렀다.—삼첫 21:7; 22:9-18.
다윗은 왕이 된 뒤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들에 대해 큰 승리를 거두었다. (삼둘 8:13. 소금 골짜기 참조) 그 전투를 유발한 행동이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틀림없이 에돔의 침략이 그 원인이었을 것이다. 아마 에돔 사람들은 다윗이 시리아를 정벌하러 갔으므로 그의 왕국의 남쪽 지방은 침략에 대해 허술한 상태라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대기 첫째 18:12과 시편 60편 머리글에서는 에돔 사람들을 정복하는 일을 한 사람을 각각 아비새와 요압으로 묘사한다. 다윗은 최고 사령관이었고 요압은 그의 우두머리 장수였으며 아비새는 요압 밑에 있는 한 부대의 지휘관이었으므로, 관점에 따라서 기록마다 승리를 거둔 사람을 다르게 묘사할 수 있을 것인데,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그와 비슷하게 이 구절들에 나오는 숫자의 차이도, 그 전쟁의 서로 다른 여러 부면이나 출정들 가운데 필자가 어느 것을 묘사하였느냐의 차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왕첫 11:15, 16 비교) 어쨌든, 다윗은 에돔 전역에 이스라엘 군의 수비대를 배치했고, 에돔의 남은 주민들은 이스라엘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삼둘 8:14; 대첫 18:13) 이제 야곱의 “멍에”가 에돔(에서)의 목에 무겁게 놓여진 것이다.—창 27:40. 민 24:18 비교.
에돔 여자들과 결혼한 솔로몬은(왕첫 11:1), 홍해에 면한 에돔의 해안 도시들인 엘롯(엘랏)과 에시온-게벨에 대한 이스라엘의 지배권을 이용하여 해운업을 발전시켰다. (왕첫 9:26; 대둘 8:17, 18) 에돔은 남자 인구가 고갈되어 이스라엘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도피한 왕족인 하닷이 모종의 저항 운동을 이끈 일은 있었다.—왕첫 11:14-22.
이러한 상황이 다윗이 처음 에돔을 정복하고 나서 꼬박 한 세기 동안 계속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암몬과 모압과 세일[에돔] 산간 지방의 자손들”이 공격을 해 온 것은(대둘 20:1, 2, 10, 22), 유다와 이스라엘과 에돔의 군대가 연합해서 모압을 공격하기 전에 있었던 일일 것이다. (왕둘 3:5-9. 모압, 모압 사람들 참조) 에돔은 이 각각의 삼국 동맹에 다 가담하여, 처음에는 이편에서 싸웠고 다음에는 반대편에서 싸웠던 것 같다. 또한 여호사밧 통치 기간의 어느 시점엔가 에돔에는 왕이 없었다는 기록도 있다. 대리관이 그 땅을 통치했는데, 대리관은 유다의 왕좌의 관할하에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유다는 전혀 방해받지 않고 아카바 만과 거기에 면한 항구(들)까지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왕첫 22:47, 48) 모압에 대한 군사 행동과 관련해서, 동맹군이 진을 치고 있던 곳인, 이전에는 말라 있던 급류 골짜기에 예언대로 물이 흘러넘치게 된 것은, 높은 고원에서 발생한 사막의 뇌우로 인한 결과였을지 모른다. 현대에도 그러한 폭풍우가 발생하면 급류가 아라바 쪽으로 향한 와디들을 세차게 흘러 내려가는 일이 있다. 또는 순전히 기적의 수단에 의해 그러한 물이 나타난 것일 수도 있다.—왕둘 3:16-23.
에돔은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 통치 기간에 반란을 일으켜 유다의 멍에를 벗어던지고 독립된 군주 국가를 재건하였다. 여호람이 그들과 대결하여 한 차례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지만, 에돔 사람들은 계속 반란을 일으켰다. (왕둘 8:20-22; 대둘 21:8-10) 아마샤 통치(기원전 858-830년) 전반기에 ‘소금 골짜기’는 또다시 에돔에게 군사적 재난의 현장이 되었으며, 아마샤는 에돔의 주요 도시 셀라를 빼앗았다. 하지만 그는 유혹에 빠져 에돔의 무력한 거짓 신들을 숭배하게 되었다. (왕둘 14:7; 대둘 25:11-20) 그의 아들 웃시야(아사랴)는 엘랏을 유다의 지배 아래로 회복시켰다.—왕둘 14:21, 22.
시리아는 아하스 통치 중(기원전 761-746년)에 유다에 대해 공세를 취하여 홍해의 엘랏 항구를 에돔의 수중에 돌려주었다. (왕둘 16:5, 6) 에돔 사람들은—유다의 지배에서 벗어난 듯한 때에—아시리아를 포함한 다른 나라들과 함께 유다를 습격하였다.—대둘 28:16-20. 시 83:4-8 비교.
에돔 사람들 자신에 의한 기록물은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나라들의 세속 기록에는 그들에 대해 언급하는 내용이 있다. 기원전 두 번째 천년기의 것으로 생각되는 이집트의 한 파피루스는 에돔에서 온 베두인 부족들이 자기들의 가축 떼를 위해 목초지를 찾으려고 삼각주 지역으로 들어온 일에 관해 언급한다. 파라오 메르넵타와 람세스 3세는 에돔에 대해 지배권을 주장했으며, 아시리아의 군주 아다드니라리 3세도 같은 주장을 하였다. 이 후자의 왕 이후의 어느 때엔가 디글랏-빌레셀 3세(아하스와 동시대 인물)는 “에돔의 카우슈말라쿠”로부터 조공을 받은 일을 자랑하며, 또한 산헤립(센나케리브)의 계승자인 에살-핫돈은 “카우슈가브리”를 자기에게 예속된 에돔 왕으로 언급한다.—「고대 근동 문헌」(Ancient Near Eastern Texts), J. 프리처드 편, 1974년, 282, 291면.
예언 속의 에돔 일찍이 웃시야 왕 통치 중에, 예언자 요엘과 아모스는 에돔이 이스라엘에게 지속적으로 격노를 터뜨리며 칼을 무자비하게 휘두른 일로 인해 여호와께서 에돔을 분명히 정죄하실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암 1:6, 11, 12) 여호와의 계약 백성을 악의적으로 적대한 일로 인해, 에돔은 하느님의 보증으로 소유하게 되었던 땅에 대한 권리를 박탈당하였다. (욜 3:19; 암 9:11, 12) 기원전 607년에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유다와 예루살렘을 정복했을 때, 에돔 사람들은 멸망당하지 않을 수 없음을 드러내는 행동을 하고 말았다. 에돔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황폐시키는 자들을 부추기고(시 137:7), 유다의 비참한 처지를 기뻐하고, 적의와 복수심 때문에 심지어 도피하는 유다 사람들을 바빌로니아 사람들에게 넘겨주어 살육당하게 함으로써 증오심을 명백히 드러냈던 것이다. 그들은 주위의 다른 민족들과 합세하여 그 땅을 약탈했으며, 버려져 있는 유다와 이스라엘 땅을 차지할 계획을 하면서 여호와를 거슬러 자랑하는 말을 하였다. 이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예언자 예레미야, 에스겔, 오바댜에게 지시하시어, 에돔이 기뻐하는 일이 오래가지 않을 것이며 유다가 당한 일이 에돔에게도 닥칠 것임을 확언하게 하셨다. (애 4:21, 22; 겔 25:12-14; 35:1-15; 36:3-5; 옵 1-16) 예언자 이사야가 그 이전에 예언한 것처럼, 칼을 휘두르는 에돔 사람들은 여호와 자신의 공의와 심판의 칼 아래 놓이게 될 것이며, 큰 자나 작은 자나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희생 동물처럼 멸망에 바쳐지게 될 것이었다.—사 34:5-8.
에돔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영구히 사람이 거주하지 않게 될 것이었다. (렘 49:7-22. 사 34:9-15 비교) 여호와의 미움을 받아 마땅한 에돔은 “악한 영토”와 “여호와께서 한정 없는 때까지 질책하시는 백성”이라고 불릴 것이었다. (말 1:1-5) 따라서 이사야 63:1-6에서 에돔은 하느님의 계약 백성의 숙적들을 상징하는 듯하다. 이 구절에서 하느님의 복수의 포도 압착조를 밟으시어 피로 얼룩진 옷을 입고 계신 ‘전사’이신 하느님은 적절하게도 에돔(“붉은”이라는 의미)에서 오시는 것으로 그리고 에돔의 가장 탁월한 도시 보스라(Bozrah, 여기에서는 “포도 수확”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바치르[ba·tsirʹ]에 대한 어희(語戲)로 사용된 것일 가능성이 있음)에서 오시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계 14:14-20; 19:11-16 비교.
후기 역사와 소멸 여호와의 예언자 예레미야를 통해, 에돔 왕은 그의 목을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네부카드네자르)의 멍에 아래로 가져가라는 경고를 받게 되었다. (렘 27:1-7) 이 점과 관련하여 에돔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기원전 607년에 예루살렘이 멸망된 뒤에, 유배된 유다 사람 가운데 일부는 임시로 에돔에 도피해 있었다. 그러다가 바빌로니아 군대가 떠나자 이 도피자들은 자기들의 땅으로 돌아왔다가 결국에는 이집트로 도피해 내려갔다. (렘 40:11, 12; 43:5-7) 곧 에돔이 여호와의 격노의 잔을 들이마시게 될 때가 왔다. (렘 25:15-17, 21) 이 일은 기원전 6세기 중반 무렵 바빌로니아 왕 나보니두스 통치 중에 일어났다. 바빌로니아의 역사와 문학을 연구한 학자인 C. J. 가드에 의하면, 에돔과 데마를 정복한 나보니두스의 군대에는 유대인 군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일에 관해 해설하면서, 존 린지는 이렇게 썼다. “야훼께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손으로 에돔에게 복수하겠다’라고 말씀하셨다고 기록한 예언자의 말은 이렇게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성취되었다. (겔 25:14) 또한 에돔의 ‘동맹자들’, ‘연합자들’, ‘신뢰하던 벗들’이 그들을 ‘속이’고, 그들을 ‘대적하여 이기’고, 그들 밑에 ‘덫을 놓을’ 것이라고 한 오바댜의 말도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여기에서 언급된 자들은 바빌로니아 사람들일 수 있다. 그들은 네부카드레자르 시대에는 에돔이 유다로부터 탈취하는 일에서 한몫을 차지하도록 허용했지만, 나보니두스 치하에서는 영리를 추구하는 에돔의 상업주의적 야심을 단호하게 억압하였다(옵 1, 7 참조).”—「계간 팔레스타인 탐사」(Palestine Exploration Quarterly), 런던, 1976년, 39면.
나보니두스의 에돔 원정으로부터 약 100년 후에 기록된 말라기서는 하느님이 이미 에돔의 “산들을 황무지가 되게 하였고, 그의 상속지를 광야의 자칼에게 넘겨 주었다”고 알려 준다. (말 1:3) 에돔 사람들은 돌아가서 황폐한 곳들을 다시 세우기를 바랐지만, 성공하지 못할 것이었다.—말 1:4.
기원전 4세기 무렵에는, 나바테아인들이 에돔의 영토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에돔 사람들은 결코 돌아올 수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유다 남쪽의 네게브에 있었다. 에돔 사람들은 북쪽으로 헤브론까지 이주했으며, 마침내 유다 남부 지역이 이두매로 알려지게 되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요한 히르카누스 1세가 기원전 130년과 120년 사이의 어느 때엔가 그들을 복속시키고 강제로 유대교를 받아들이게 했다고 한다. (「유대 고대사」 Jewish Antiquities, XIII, 257, 258 [ix, 1]; XV, 253, 254 [vii, 9]) 그 뒤로 그들은 점차 유대인들에게 흡수되어, 기원 70년에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 멸망된 뒤에는 하나의 민족으로서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옵 10, 18. 이두매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