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의 생명에 관해 균형잡힌 견해를 유지하라
“자동차 여행자가 부상당한 개를 도우려 하다가 사망하다.” 이것은 1975년 8월 29일자 「뉴우요오크 데일리 뉴우스」에 보도된 한 기사 제목이다. 한 ‘롱 아일랜드’ 사람이 차를 세우고 도로 상에서 부상당하여 누워있는 개를 도와 주려고 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우발적으로 다른 차가 그를 부딛쳐서 그를 죽였다. 그 개는 동물 보호소로 옮겨졌다. 그러므로 개는 살아나고 사람은 죽었던 것이다.
그의 행동은 많은 사람들—아마 당신도 포함하여—이 가지고 있는 동물들에 대한 동정적인 배려를 잘 예시해 준다. 그는 동물의 생명에 대한 높은 존경심 때문에 자기 생명을 걸었던 것이다. 그것은 올바른 행동이었는가?
“그렇지 않다,”고 어떤 사람들은 일언지하에 단언할 것이다. 예를 들면, 영국의 어느 도시에서 개최된 한 모임에서 도로 안전 위원회의 한 위원은 자동차 여행자들이 개를 피하기 위하여 차선을 벗어날 때 야기되는 위험에 관하여 이렇게 언급하였다.
“만일 사람들로 하여금 필요한 경우에는 개를 치고라도 똑바로 운전해 나가도록 설복시킬 수만 있었다면, 인간들이 당한 많은 수의 상해를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 우리는 동물들에 대하여 너무 감상적이 되었기 때문에 한 마리의 동물을 피하기 위하여 본능적으로 차선을 벗어 날 것입니다.—그리고 아마 차도 위에는 ‘버스’들이 열을 지어 달려 오고 있다는 것은 망각할 것입니다. ··· 한 달 동안에 동 지역에서 발생한 42건의 사고 중에서 다섯은 개로 인한 것들이었읍니다. 이러한 일들은 나의 피를 끓게 만듭니다.”
그러나 끓고 있던 것은 그의 피만은 아니었다. 청중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동물의 생명에 대한 그의 견해에 격노하고 있었다.
그렇다, 동물의 생명에 대한 강한 느낌들이 매우 보편화되어 있다. 예를 들면, 사냥은 어떠한가?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야만적이고, 지각없고, 비인간적인 일이라고 심한 비난을 서슴치 않는다. 한편 다른 사람들은 음식물이나 동물의 가죽을 얻기 위하여 동물을 죽이는 것은 전적으로 정당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것이 옳바른 생각인가? 당신이 취할 균형잡힌 견해는 무엇인가?
당신도 이해할 수 있는 바와 같이, 각각의 상황에 그 자체의 특별한 경우와 환경이 있는 것이므로, 어떤 포괄적인 대답을 제시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물의 생명이라는 문제에 대한 균형잡힌 견해를 구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 그러면 그 근거란 무엇인가?
동물들의 창조주
비록 어떤 사람이 아무리 진실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불완전한 인간의 개인적 견해나 감정이 동물의 생명에 대한 균형잡힌 견해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그 근거가 되는 것은 동물 생명의 창조주의 견해(그리고 원칙들)이며, 그분의 견해는 완전하다.—신명 32:4.
이 지구의 육지에, 바다에 그리고 공중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을 지으신 후에,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세 1:20-25, 31) 그러므로 동물들은 좋았다. 그들은 우리의 지구 내에서 각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의 살아있는 전시물이다. (시 148:7, 10; 욥 12:7-9) 그러나 창조주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동물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율법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 그분은 그들이 동물들을 대하는 데 자비롭고 공평할 것을 요구하셨다. 몇가지 예를 고려해 보라. 황소와 나귀를 한 멍에에 메워서는 안되었다. 왜냐 하면 그렇게 하면 작은 동물이 고통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신명 22:10) 인간의 경우처럼, 동물에게도 쉴 수 있는 안식일이 주어졌다. (출애굽 23:12) 곡식을 타작하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고, 얼마쯤 먹게 해야 하였다. 먹지 못할 음식물로 애타게 만드는 것은 잔인한 일이기 때문이다. (신명 25:4)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는 “의인은 그 육축의 생명을 돌아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잠언 12:10) 확실히, 하나님께서는 동물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면, 이것은 사람이 음식물을 위해서나 혹은 모피나 가죽을 얻기 위한 사냥과 같은 방법으로 동물들을 죽여서는 안된다는 뜻인가? 그리고 무엇이 동물의 죽음에 대한 올바른 견해인가?
동물들의 생명과 죽음
창조주께서는 인간과 동물에게 동일하게 생명을 주셨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나 오랫 동안 살도록 되어 있는가? 과학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인간은 끝없는 생명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따라서 연구자들은 사람이 왜 죽는지를 이상히 여긴다. 성서는 그 이유를 알려 준다. 성서는 창조주께서 첫 인간들에게 영원히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셨음을 밝혀 준다. 죽음은 오직 그들이 반역하였기 때문에 닥쳐온 것이다. (창세 2:17; 3:17-19; 로마 5:12) 그런데 동물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의식적인 반역을 꾀할 능력이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단지 얼마 동안 산 다음에는 죽는다. 그러므로 창조주께서는 각 동물들이 결코 영원히 살도록 목적하시지 않으셨음이 분명하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죽음이 자연스러운 것이다.—베드로 후 2:12.
따라서, 비록 누가 어떤 애완 동물에 대하여 강한 애착심을 느끼게 될지라도, 그 동물의 생명이나 죽음에 대하여 그가 다른 인간에 대하여 느끼는 것처럼 느끼게 되어서는 안됨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느끼고 있다.a
오늘날에는 수많은 “애완 동물 공동 묘지”가 있다. ‘토론토’의 한 신문은 동물을 위한 장의소 시설이 있는 공동 묘지에 관하여 묘사한 바 있다. 그곳에서는 ‘실크’로 속을 댄 특별한 관에다 동물을 장사해 준다. 그 값은? 새 한마리를 위한 100‘달러’짜리에서부터 말 한 필을 위한 800‘달러’짜리까지 있다. 「뉴우요오크 포스트」지는 미국의 전 대통령 한 사람은 자기의 죽은 개를 돌보아 주도록 한 동물 매장지에다 매년 20‘달러’짜리 수표를 보내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그러나 당신은 어떠한 행로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합당하고 균형잡힌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창조주께서는 결코 동물들이 죽음을 보지 않고 살아가도록 목적하시지 않으신 이상, 당신은 한 동물의 죽음에 대하여 얼마 정도의 중요성을 부여하고 비용을 들여야 하겠는가? 성서에 나타나는 균형잡힌 견해와 일치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동물 공동 묘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사냥—균형잡힌 견해는 무엇인가?
동물의 생명을 논의함에 있어서는, 사냥이야말로 가장 논쟁이 되는 부면의 하나이다. 도에 지나친 사례가 너무 흔하다는 점이 으뜸가는 그 이유의 하나이다. 예를 들면, 수년 전에 ‘체코슬로바키아’에서 10명의 사냥군들이 6일 동안에 9,359마리의 산토끼, 7,245마리의 자고 및 5,089마리의 꿩—도합 21,693마리를 사냥한 바 있다. 그 사람들은 이로부터 ‘드릴’을 느꼈겠지만, 그러한 야단스러운 살륙이 많은 사람들로 사냥을 반대하게 만든다.
그러나 흔히, 많은 사냥군들의 경우에 있어서 점차로 지나치게 행동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로마’에서 들어온 1975년 6월의 보고를 고려해 보라.
“소총으로부터 그물 및 덫에 이르기까지 잘 구비된 무기를 갖춘 사냥군들이 1년에 2억 마리 이상의 새를 죽이고 있다. ··· 조류의 학살은 환경상에 큰 여파를 남기는 정도에 이르렀다. 수 백만의 새들이 멸절되거나 ‘이탈리아’의 상공을 날지 않음으로, 곤충과 병충들이 마구 번식하고 있다. 이것은 농부들이 자기들의 전답을 보호하기 위하여 다량의 살충제를 뿌려서, 자연의 균형을 교란시키게 됨을 뜻한다. ··· 매년 ‘이탈리아’에서는 사냥군들이 자기들의 사냥물 대신에 서로에게 총을 쏘기 때문에 약 7,000명의 사상자가 나오는 것으로 고려된다.”
일부 사냥군들은 단순히 자기들이 잡아 모아 전시할 수 있는 전리품 즉 자기들이 자랑할 수 있는 사냥물을 잡기 위하여 동물을 죽인다. 그들에게 있어서 사냥은 일종의 ‘자기 만족을 위한 노름’ 외에는 거의 아무 것도 아니다. 다른 이들은 죽이는 즐거움에 열중한다. 이것이 올바른 일인가? 그분의 율법 가운데 나타난 바 동물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은 분명코 전리품을 삼기 위해서나 운동삼아 ‘드릴’을 맛보기 위하여 동물들의 생명을 취하는 것을 금한다. 오히려 성서는 필경은 동물들과 사람들을 죽이면서 운동 삼아 사냥을 했음이 분명한 하나님께 대한 옛 반역자 ‘니므롯’을 정죄하고 있다. 그는 “여호와께 반대하는 능한 사냥군”으로 묘사되어 있다.—창세 10:9.
그러나, 편견없이 성서를 읽어 보면 창조주께서는 현재 음식물로 삼기 위하여 동물을 죽이는 것을 반대하시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홍수에 뒤이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전체 인간 가족의 조상인 ‘노아’에게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찌라 ···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창세 9:3, 4) 이것은 동물의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견해가 완전히 뒤바뀐 것인가? 그렇지 않다. 왜냐 하면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그분은 동물들이 영원히 살도록 목적하신 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냥하고 고기잡는 것을 금지하지 않으셨다. 그분이 분명하게 명령하신 것은 사냥군은 죽임당한 동물의 피를 쏟아 버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열왕기 상 4:22, 23; 레위 17:13, 14) 이것은 생명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도록, 심지어는 동물의 생명(피)이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인식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어미새의 생명을 그 알이나 새끼와 함께 취하는 것을 금하는 법으로써 동물의 생명에 대한 존경심을 권장하셨다. 새끼들에 대한 애착심 때문에 잡히기 더 쉽게 된 어미새는 놓아 주어야 하였다. 이렇게 하면 그 어미새는 새로운 새끼를 가질 수 있게 되며 그 종류가 멸절될 어떠한 위험성도 방지할 수 있다.—신명 22:6, 7.
성서에는 그물로 새와 물고기를 잡는 일에 관한 언급이 많이 들어 있다. (잠언 1:17; 호세아 7:11, 12; 하박국 1:15) 얼마의 직업적 어부들을 사도들로 선택하신 예수 그리스도까지도 어떤 경우에 제한된 정도의 고기잡이 일을 지시하신 일이 있다.—마태 17:27; 요한 21:5-13.
그러나 당신은 아마 어떤 많은 사람들은 다른 음식을 구할 수 없을 때에만 음식물을 삼기 위한 사냥이 정당화된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알 것이다. 음식을 살 수 있을 때라면, 사냥하는 것은 동물의 생명에 대한 불경을 나타내는 것인가?
‘이삭’과 그의 아들들이 관련된 한 성서 기록은 그 문제를 저울질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삭’의 아들 ‘에서’는 사냥으로 음식물을 마련하곤 하였다. (창세 25:28) 한때 ‘이삭’은 그에게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라]”고 말하였다. 왜냐 하면 사냥해서 잡은 고기는 ‘이삭’이 말한 바 “나의 즐기는 별미”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냥해서 잡은 고기가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고기였는가? 그렇지 않다. 왜냐 하면 이 경우엔 ‘야곱’은 염소 새끼 두 마리로 자기 아버지에게 맛있는 별미를 만들어 드렸기 때문이다. (창세 27:1-10) 마찬가지로, 오늘날 어떤 사람이, 비록 정육점에서 다른 고기를 살 수 있지만, 어떤 사냥한 고기가 더 먹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는 ‘사냥군이 죽인 사냥한 고기를 먹던 도살자가 죽인 소고기를 먹던 무슨 차이가 있는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사냥이나 고기잡이를 하는 사람은 그렇게 함으로써 얼마의 음식물을 구할 수 있는 한편 그와 동시에 숲속을 걷거나 냇가에서 휴식함으로써 진정한 즐거움을 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사냥을 하려는 사람은 관련되어 있는 위험성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위험성들 중의 하나는 점차적으로 죽이는 취미를 들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음식물로 삼기 위한 사냥으로 시작한 얼마나 많은 사냥군들이 ‘죽이는 즐거움’에서 기쁨을 느끼게 되어 이제는 동물의 생명에 대하여 방지할 정도의 불경을 나타내게 되었는가? 유명한 사냥 선수인 ‘찰스 어스킨스’ 대령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사냥은 아편 양귀비의 온갖 효능을 지니고 마약 작용을 하는 것 같은 굉장한 악습이다.” 당신에게도 이런 영향이 미칠 수 있지 않겠는가?
가죽과 모피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동물들의 가죽을 위하여 사냥을 한다. 그들은 동물들을 단순히 자만심을 키워주는 전리품으로써가 아니라 가죽이나 모피로써 사용한다. 이러한 이유로 동물을 죽이는 것은 동물의 생명에 대하여 심한 불경을 보이는 것인가? 그것은 옳지 못한 일인가?
가죽 때문에 야생 동물들을 마구 죽이는 일에 대한 한가지 일리가 있는 반대 이유는 동물의 수효에 미치는 영향이다. 예를 들면 ‘유럽’ 출신의 정착자들이 도착하기 전에 북‘아메리카’의 해리의 수효는 약 6천만 내지 1억이었다. 그러나 금세기에 접어들 무렵 그들은 해리 모자와 가죽에 대한 광적인 유행을 충족시키기 위한 과도한 덫 사냥의 결과로 거의 멸종되고 말았다. 또한 ‘유행’ 중인 표범, 치이타 및 호랑이 가죽으로 만든 외투의 수요로 말미암아 그처럼 동물들이 거의 멸종되어 가는 상태는 어떠한가?
확실히 일시적 유행과 ‘패션’이 어떤 형태의 동물의 생명을 멸절시키도록 방치해 둘 아무런 핑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창조주께서 사람에게 동물들에 대한 지배권을 부여하신 것은 사람이 욕심스럽게도 창조주의 솜씨를 멸절시켜도 좋다는 뜻은 아니었다. (창세 1:26) 그러나, 동물의 생명에 대한 존경은 어떤 경우에라도 가죽이나 모피를 얻기 위하여 동물을 죽이는 것이 부당하다는 식의 태도를 취할 것을 요구하는가?
이점에 있어서 또한 성서는 균형잡힌 견해를 제시한다. 성서는 동물들이 인간을 위해 존재함을 알려 준다. 인간 역사의 초기에 창조주 자신이 최초의 부부에게 옷을 입히기 위하여 동물의 가죽을 사용하셨다. (창세 3:21) 그것은 부당한 일인가? 분명코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셨다고 하여 비난하는 것은 균형잡지 못한 일이다. 그리고 후일에 창조주 자신께서 당신의 성소를 꾸미는 데 대해 이러한 지시를 하셨다. “붉은 물들인 수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고 해달의 가죽으로 그 웃덮개를 만들찌니라.” (출애굽 26:14; 39:34, 43) 마찬가지로, 참 숭배자들도 의복과 다른 것들을 위하여 동물의 가죽을 사용하였음을 성경은 보여 준다.—레위 13:48; 마태 3:4; 히브리 11:37.
그러므로 성서는 결코 가죽으로 만든 의복이나 다른 유용한 물건을 피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물론, 어떤 사람이 모피나 동물의 가죽을 피하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개인적인 문제이다. 또한 누구든 동물의 생명에 대한 균형잡힌 존경심을 나타내는 사람이라면 그는 멸종되어 가고 있는 동물의 가죽(혹은 다른 신체 부분)으로 만든 의복이나 물건을 살 것인지를 심사숙고할 것이다.
생명과 재산의 보호
때때로 사람들은 다른 동물을 잡아 먹거나 해가 되는 동물을 죽일 것인지의 여부를 결정지어야 할 때가 있다. 이에 대한 균형잡힌 견해는 무엇인가?
실제로, 당사자 자신이 사실에 따라서 득실을 고려하여 각각의 경우를 저울질 해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서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 보라. 만일 당신이 진딧물이나 당신의 부엌에 들어 오는 쥐를 죽인다면 그것은 동물의 생명에 대하여 불경을 보이는 것이 될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동물이 인간의 음식물을 먹어 버리거나 오염시킬 것이며 아마도 질병을 퍼뜨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때문에 그러한 동물을 쉽사리 죽여 버릴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닭이나 양을 죽이는 여우나 늑대는 어떠한가?
이 점에 있어서 역시 창조주께서는 아무런 지침이 없이 남겨 두시지 않으셨다. 성서는 분명히 생명에 대한 존경심을 촉구하고 있는 한편, 사자와 곰이 ‘다윗’의 양떼를 위협할 때 ‘다윗’이 그것들을 죽이는 것을 동물의 생명에 대한 불경이라고 생각지는 않았음을 보여 준다. (사무엘 상 17:34-36) 그것은 단순이 가축의 죽음보다는 육식 동물의 죽음이 타당하다는 문제가 아니었다. ‘솔로몬’의 아가 2:15은 포도원을 위협하는 여우들에 대하여 행동을 취하는 것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의 음식물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동물을 죽일 수도 있다. 자기 생명을 보호하는 것과 관련하여, ‘삼손’이 공격하는 사자를 죽였다는 것과 ‘바울’이 독사를 불 속으로 흔들어서 떨어 뜨렸다는 내용도 아무런 놀라울 것이 없다. (사사 14:5, 6; 사도 28:3-6) 그러므로 분명히 어떤 동물이 위협을 가해 온다면 그것은 그 동물을 죽일 수 있는 정당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출애굽 21:28, 29.
그러나 이것도 균형잡지 못한 극단에 흐를 수 있다. 성서는 단순히 그들 중 얼마가 문제를 야기시킨다는 이유 때문에 모든 여우나 곰을 근절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을 권고하지 않는다. 양들을 잡아먹는다는 이유로 ‘오스트레일리아’산 유대류(有袋類)인 ‘타스마니안’ 늑대를 멸종된 것 같이 보일 때까지 사냥하고 죽인 일이 있다. 미국에서 비슷한 문제와 관련된 많은 논쟁이 일어나고 있다. 많은 양치기들과 소 목장주들은 늑대와 ‘코이오우트’들이 양떼와 소떼에 위협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모조리 죽여 버려도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반면 많은 환경 보존론자들과 생태학자들은 양들이나 소에게 미치는 손실은 경미한 것이며 따라서 그것이 “자연의 균형”에 중요한 야생 동물들을 멸절시킬 근거가 되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일부 지방에서 일어났던 일이 그들의 논점을 잘 예시해 준다. 그곳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가축을 잡아먹는 동물로 생각되는 밀림의 고양이와 부엉이를 죽여 없앴다. 그 결과는? 병을 옮기는 쥐들이 집안에 들끓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 문제는 복잡하다. 모든 경우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광범위한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확실히 하나님의 말씀의 균형잡힌 지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도움이 된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동물을 죽일 수 있음을 이해하게 해 준다. 그러나 그것은 성서에 나타난 동물의 생명에 대한 고차원의 배려에 맞추어 균형이 잡혀야 한다. 그 다음에 개인적인 결정을 내려야 한다. 다른 관련된 문제들도 비슷하게 해결되어야 한다.
어떤 학생이 생물 시간에 개구리, 메뚜기, 벌레 혹은 어린 돼지새끼같은 어떤 동물을 해부 실험을 해야 하는 경우에 그는 자기 부모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어 볼 수 있을 것이다. 많은 학교 당국에서는 그러한 실험은 교육적인 일이라는 견해를 유지하고 있다. 한 실험실 조수는 “당신은 앉아서 심장에 연결되어 있는 [어린 돼지새끼의] 각 동맥을 자세히 더듬어 살펴볼 수 있읍니다. 그것은 교과서 속에서는 배울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한 학생은 어린 돼지의 심장 절개 수술 실험에서 많은 것을 배웠기는 하였지만 다른 실험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그 개구리를 죽이는 일이 참으로 불필요한 일이라는 느낌을 받았읍니다. 내가 배운 한 가지 점은 생명이란 매우 복잡한 것이며—목적없는 실험으로 죽여버려서는 않되겠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학교에 다니는 한 17세 된 소녀는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생명을 옳게 평가하도록 우리를 도울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그 말씀이 제게는 역설적으로 들렸읍니다. 어떻게 죽이는 일로써 생명을 옳게 평가할 수 있겠읍니까?”라고 말하였다. 그러한 경우에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만일 어떤 문제가 제기된다면 부모들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자기들의 자녀들과 함께 성서에 제시된 동물의 생명에 대한 균형잡힌 견해를 토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고, 또한 학교의 요구 조건과 교육적인 가능성들을 토의한 다음 그들은 자녀의 양심을 염두에 두고서 어떻게 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동물들을 어떻게 보고, 다루어야 마땅할 것인가에 관하여 많은 질문들, 즉 성인 각자가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할 많은 질문들이 제기된다는 사실은 부인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동물의 생명의 창조주로부터 나온 균형잡힌 지침이 있다는 데 대하여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각주]
[18면 삽화]
창조주께서 동물들이 죽음을 보지 않고 살아가도록 목적하지 않으셨으므로 당신은 한 동물의 죽음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중요성을 부여하고 어느 정도의 비용을 들여야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