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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살아있는 수백만이 결코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깨어라!—1973 | 7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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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간호원들은 스스로 정신적인 파멸을 당하는 일을 피하기 위하여 사직하였다. 어떤 경우에 그들은 큰, 살아있는 태아를 비밀히 보육하므로 그에게 생존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하는 심리적인 유혹을 경험하기도 한다.
성경적 견해
낙태에 따르는 이러한 모든 위험성과 비인간적인 면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질문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신생아를 죽이는 것이 나쁜 일이라면, 모태에서 발육중에 있는 아기를 죽이는 일도 마찬가지로 나쁜 일이 아닌가? 미숙아의 생명을 조산아 보육기 속에서 유지시키려고 하는 것이 정당한 일이라면 태아의 생명을 모태 속에서 유지시키려고 해야 정당한 일이 아닌가?
생명의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신성한 것으로 보신다. 고의적으로 조장된 낙태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범죄 행위이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에게 내리신 그 분의 율법은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생명을 보호하였다. 어떤 임신한 여인이, 남자들 사이의 싸움에서, 태아의 생명을 해친 사고를 당하였다면, 생명을 위하여 생명을 바쳐야 하였다.—출애굽 21:22-25.
오늘날 낙태가 빈번한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다른 법들을 무시한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다. 사람들은 소위 자유 도덕을 원해 왔으며, 그로 인하여 결국 그들은 원치 않는 결과들—원치 않는 배우자, 원치 않는 질병 및 원치 않는 임신 등을 당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러한 결과들을 쉽게 피하기 위한 노력으로, 더 쉬운 이혼, 더 용이한 의학 치료 또는 덜 엄격한 법 등을 원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도 비참한 부대(附帶) 결과들로부터 그들을 벗어나게 해주지는 못하였다. 오늘날의 참담한 도덕적 상황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남녀가 결혼의 띠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현명하게 자기들의 생활을 함께 계획하고, 자기들의 하나님이시며 창조주이신 분께 성실하게 순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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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새로운 집—독일깨어라!—1973 | 7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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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새로운 집—독일
태양은 아직 솟아오르지 않았다. 새벽 이슬이 초원과 들판에서 살아지기도 전, 나는 나의 집 나의 고향—‘그리스’ 중부의 한 작은 마을—을 떠났다. 부모님들은 기차역까지 나를 배웅하였다. 우리는 서로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려고 하였으나 좀처럼 입을 뗄 수 없었다. 곧 이별하게 되리라는 생각이 우리의 사고 기능을 정지시켰던 것이다.
우리가 마침내 “객원 노동자들”의 독일로 향하는 여행의 시발지인 철도역에 도착하였을 때, 우리는 흐르는 눈물로 뒤범벅이 된 얼굴들과 고별의 목메인 소리 밖에는 보고 들을 수가 없었다. 울적한 기분에 잠겨 있는 가운데, 달려오는 기차를 본 우리들에게 그것은 마치 얼마의 기간 동안—혹은, 어떤 경우에는, 영원히—밀접한 가족의 띠를 끊어 놓는 쇠로 만든 괴물처럼 보였다.
나는 기차가 출발하기 직전, 나의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자기의 품에 나를 끼어안으시던 그 순간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어머니는 나에 대하여 걱정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흐느끼면서, 어머니는 내가 객지에 가서 성공할 것을 기원하셨다. 지금까지도 나는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내 볼을 쓰다듬고 결코 자기를 잊지 말라고 당부하시면서 내 손을 잡아주시던 그 손길을 느낄 수 있다. 곧 기차는 출발하였고 우리는 모두 손수건을 흔들어 마지막 작별을 고하였다.
이러한 이별의 순간이 지난 후, 나의 생각은 분주하게 나의 장래를 맴돌고 있었다. 독일에서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가? 나는 ‘뮨헨’에 있는 큰 기계 공장과 취업 계약을 체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디에서 살게 될 것인가? 어떻게 나는 새로운 동료 노무자들과 서로 이해하면서 지낼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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