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이십 세기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로마 9:25, 26.
1. 남편들이 나타내는 어떠한 자비를 오늘날 아내들은 기뻐할 것입니까?
우리가 갓 태어나서 아무 능력이 없을 때에 부모님이 자비를 보여준 것을 우리는 기뻐합니다. 아내들은 자기 남편이 여성적인 불편, 감정적 우울감, 여성적인 약점 등에 대해 자비를 나타낼 때에 기뻐합니다. 그러한 아내들은, 19세기 전에 주어진 자비에 관한 다음과 같은 권고를 오늘날도 적용되는 것으로서 인식할 것입니다.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베드로 전 3:7.
2. 왜 일부 사람들은 오늘날 하나님의 자비에 관해 기뻐하지 않으며, 자기들이 하나님보다 더 자비롭다고 생각합니까?
2 유명한 산상수훈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자기 생활에서 실천하려는 사람들도 있읍니다. “자비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그들이 자비를 받을 것이다.” (마태 5:7, 새번역) 이런 사람들은 변덕스러운 인류에게 자비를 보여주신 창조주를 본받기 때문에 복이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창조주의 성품 가운데 자비가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읍니다. 그들은 이렇게 불평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 모든 악행과 지상의 많은 난관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만일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우리에게 자비를 나타내어 그 모든 것을 일소하고 우리가 인생을 즐길 수 있도록 하시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게 불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은 죽었다!”는 충격적인 논리로부터 피해를 입기 쉽습니다. 인류에게 자비로운 관심을 보이는 점에 있어서 하나님이 “죽었다”고 그들은 생각하게 됩니다. 그들은 아마 그러한 “죽은” 하나님 보다는 자기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더 자비롭다고 단정할 것입니다. 그들은 현 20세기에 하나님의 자비의 증거를 보지 못합니다.
3. 어떤 면으로 보아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악을 용인하신 것이 우리에 대한 자비로운 목적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읍니까?
3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악과 난관을 허락하신 것이 사실은 자비로운 목적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멈추어 생각해본 적이 있읍니까? 만일 악을 허용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께서 자비를 나타내실 수도 없읍니다. 우리가 태어나기 수천년 전부터 지상에 악은 존재해오지 않았읍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악을 제거하셨다면 오늘날 우리가 이곳에 살아 있을 수 있겠읍니까?
4. 오늘날 우리가 살아 있는 점에 대해 어떤 여덟 사람에게 감사해야 하며, 왜 그렇습니까?
4 확실한 역사 기록에 의하면, 천지의 창조주께서는 4,300여년 전인 기원전 2370년에 세계적으로 폭력과 악을 일소하셨읍니다. 하나님께서는 세계적인 홍수를 일으키셨읍니다. 그 홍수에서 오직 여덟 사람만이 물이 새지 않는 거대한 방주를 통해 안전하게 살아 남았읍니다. 그 결과 ‘노아’와 그의 세 아들이 지은 방주에 들어가지 않은 수많은 가족은 오늘날까지 내려올 수도 있었던 모든 후손 계통이 멸절되었읍니다. 우리가 현재 20세기에 살아 있는 점에 대해서 ‘노아’와 ‘셈’과 ‘함’과 ‘야벳’ 그리고 그들의 충실한 아내들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창세 6:1부터 9:19.
5, 6. (ㄱ) 하나님의 자비의 계속에 대해 무슨 질문이 생깁니까? (ㄴ) 로마서 9:21-26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무슨 균형잡힌 견해를 알려 줍니까?
5 그러니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존재하는 것을 하나님의 자비의 증거로 생각해야 하지 않겠읍니까? 그렇습니다. 현 20세기의 특징을 이루고 있는 모든 폭력과 불법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중요한 질문은,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참으심과 자비로부터 유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이 세계적인 악을 얼마나 더 오랫 동안 허용하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성서에 있는 모든 증거에 의하면 별로 오래 허용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지상에 악을 허락하신 것을 불평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로부터 유익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조만간 하나님께서 인류 사이에 편만해 있는 모든 악을 일소하실 때에 우리의 생명을 쓸어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나타내시어 이 지상에 있는 의롭고 평화로운 새 질서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 ‘바울’과 같이 균형잡힌 견해를 가져야 합니다. 그는 이렇게 썼읍니다.
6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찌라도 무슨 말 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로마 9:21-26; 또한 베드로 전 2:9, 10 참조.
문제를 당한 하나님의 결혼 관계
7. ‘호세아’는 누구이며, ‘바울’은 「호세아」서의 무슨 번역판으로부터 인용하였읍니까?
7 사도 ‘바울’이 위와 같이 인용한 글을 쓴 ‘호세아’는 어떤 사람이었읍니까? 그는 기원전 9세기와 8세기에 살았던 예언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희랍어 70인역」에서 호세아 1:10과 2:23을 인용한 것입니다. 「개역 한글판」에 의하면 그 귀절들은 이러합니다. “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할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저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8. 여호와께서는 ‘호세아’를 통하여 자기와 자기의 사랑을 받지 못한 여자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었음을 나타내셨읍니까?
8 여호와 하나님께서 ‘히브리’ 예언자 ‘호세아’를 자기 대변자로 사용하여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내가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여자]를 긍휼히 여기[리라].” 혹은 “내가 ··· 사랑치 아니한 자[여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라고 하심으로써 자기가 한 동안 사랑치 않았던 여자와 자신 사이에 문제가 있었음을 시사하셨읍니다. 그 문제에 대한 여호와의 말씀에 따르면 그것은 그분과 그 여자 사이에 일어난 결혼 문제였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여자를 사람의 아내에 비유하셨읍니다.
9. 여호와와 결혼한 것으로 표현된 자는 누구입니까?
9 여호와와 결혼한 여자로 표현된 그 여자는 누구입니까? 그 여자는 문자적인 여자, 인간 여자가 아닙니다. 여호와께서는, 그 여자가 한 백성 곧 족장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부터 내려온 ‘이스라엘’ 민족임을 알려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 여자는 민족적 아내, 조직적 아내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 조직과 결혼하셨읍니다. 중동 지방의 습관에 돈 주고 산 아내와 같이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민족은 그 민족의 하나님 여호와와 결혼하였던 것입니다.
10. 언제, 어디서, 그리고 어떻게 이 상징적 결혼이 이루어졌읍니까?
10 이 결혼은 언제 이루어졌읍니까? 그것은 기원전 1513년,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사신 후였읍니다. 그들을 어떻게 사셨읍니까? 그들을 ‘애굽’의 속박에서 해방시키심으로써였읍니다. 그때 예언자 ‘모세’의 인도 하에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아라비아’ 반도의 ‘시내’ 산으로 이끌어 오셨읍니다. 거기서, ‘모세’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로 하여 여호와께서는 자신과 해방된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결합의 띠를 맺을 것을 제의하셨읍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그들 사이에 언약을 맺을 것을 제의하셨읍니다. 이 언약은 하나의 법전을 기초로 하였읍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마치 여자가 남편의 법 아래 있는 것 같이 그 법을 준수할 것을 동의하였읍니다. (로마 7:2) ‘시내’ 산 꼭대기에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출애굽 19:1-6) 충분한 설명을 듣고 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진적으로 이 언약에 들어왔읍니다.
11. ‘이스라엘’ 나라는 그 자신과 여호와와의 결혼의 띠를 어떻게 유지해야 하였읍니까?
11 이렇게 하여 그곳 ‘시내’ 광야에서 결혼이 이루어졌읍니다. 여호와는 친척 남편이 되고 ‘이스라엘’ 민족은 지상의 조직적 아내가 되었읍니다. 이 신성한 관계는 희생 동물의 피를 흘림으로써 맺어졌읍니다. 그 피의 일부는 하나님의 율법책에 뿌리고 일부는 ‘이스라엘’ 백성 위에 뿌렸던 것입니다. (출애굽 24:1-8; 히브리 9:19, 20) 그때부터 계속해서 율법 언약이 효력을 가지고 있는 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충실하고 진실해야 하였읍니다. 그것은 마치 아내가 남편에 대해 충실하고 진실해야 하는 것과 같았읍니다. 십계명에 의하면, 그들은 형상을 사용하지 않고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숭배해야 하였읍니다. (출애굽 20:1-6) 그들은 다른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고 자신들을 하나님의 “소유”로 생각해야 하였읍니다. 그들은 여호와께 대해 거룩한 하나의 나라가 되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분리되어야 하였읍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결혼의 띠를 유지하고 존중하는 것이었읍니다.—예레미야 2:2, 3; 31:31, 32.
12. 여호와와 ‘이스라엘’ 나라 사이의 고대의 결혼과 그와 유사한 현대적인 결혼을 고려하는 것은 왜 중요합니까?
12 오늘날 합법적 결혼이 파괴되는 예가 흔히 있읍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 두 사람 사이의 결혼인데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수백만명으로 이루어진 전체 나라와 여호와 사이의 결혼은 어떻게 되었읍니까? 오늘날 우리는 이 점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 하면, 옛날의 그 결혼은 후에 있을 그와 같은 결혼에 대해 예언적 의미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와 ‘이스라엘’ 사이의 결혼 관계에 일어났던 사태는 한 나라에만 영향을 미쳤읍니다. 그러나 그 후의 결혼 관계에 일어나는 일은 전체 종교계, 전체 인류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이 말은 오늘날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 됩니다. 따라서 가까운 장래에 우리 모두에게 재난이 미칠 가능성이 있읍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여호와와 ‘이스라엘’ 사이에 있었던 고대의 결혼에 대해 그리고 그와 유사한 현대적인 결혼에 대해 고려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호세아’가 본보기로 사용됨
13. 왜 ‘이스라엘’ 왕국은 ‘사울’ 가족으로부터 ‘다윗’ 가족으로 옮기웠으며, 다윗 왕계는 누구에게 이를 것이었읍니까?
13 몇세기 후에, ‘이스라엘’ 나라는 보이지 않는 천적 남편인 여호와만을 자기들의 왕으로 삼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읍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요청에 따라 기원전 1117년에 하나님께서는 ‘베냐민’ 지파의 ‘사울’을 최초의 인간 왕으로 기름붓도록 하셨읍니다. ‘사울’은 후에 여호와께 불충성하였읍니다. 따라서 온 ‘이스라엘’의 왕국은 그의 가계에서 계속되지 않았읍니다. 여호와께서는 왕국을 ‘유다’ 지파 ‘이새’의 아들인 ‘다윗’에게 옮기셨읍니다. 기원전 1077년에 ‘다윗’은 왕좌에 올랐읍니다. 기원전 1070년에 그는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열 두 지파 전부를 다스릴 수도로 정하였읍니다. ‘다윗’이 올바른 숭배에 충실하였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그와 함께 엄숙한 언약을 맺으셨는데, 그것은 그의 가계에 영원한 왕국을 주시겠다는 것이었읍니다. 그러므로 ‘다윗’ 왕계는 메시야에게 이르게 되고 그 메시야가 영원한 왕이 되십니다.—사도 13:20-24; 사무엘 하 7:1-17.
14, 15. (ㄱ) 왜 그리고 언제 ‘솔로몬’을 통한 ‘다윗’ 왕계의 왕국은 축소되었읍니까? (ㄴ) ‘이스라엘’의 열 지파 왕국은 어떻게 하여 음란하게 되었으며, 무슨 신을 맞아들였읍니까?
14 ‘다윗’의 첫째 후계자인 ‘솔로몬’ 왕은 결국 지혜롭지 못한 길에 빠져 여호와 하나님의 순결한 숭배로부터 이탈하였읍니다. 하나님의 형벌에 따라, ‘솔로몬’ 왕의 후계자들의 왕국은 두 지파 곧 ‘유다’와 ‘베냐민’ 지파로 줄어졌읍니다. 그 일은 ‘솔로몬’ 왕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좌에 오른 후에 일어났읍니다. 열 지파는 떨어져 나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고 독립 왕국을 설립하였읍니다. 이 반역한 왕은, ‘예루살렘’에 있는 ‘솔로몬’의 성전에서 행해지던 여호와의 숭배와는 별도의 종교적 숭배 형태를 설립하였읍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열 지파 왕국을 두 개의 금송아지 숭배로 향하게 만들었읍니다. 금송아지를 하나는 ‘벧엘’에, 다른 하나는 ‘단’에 두었읍니다. 열 지파 ‘이스라엘’ 왕국의 제7대왕 ‘오므리’ 시대에 ‘사마리아’ 도시가 건설되어 국가의 수도가 되었읍니다.
15 ‘사마리아’에서 ‘오므리’ 왕의 아들 ‘아합’은 ‘시돈’ 사람의 신 ‘바알’의 숭배를 도입하여 그곳에 ‘바알’ 성전을 건축하였읍니다. (열왕 상 16:23-33) 이러한 불충실한 행로를 통하여 열 지파 왕국은 음란하게도 온 ‘이스라엘’의 천적 남편을 버리고 부도덕하게도 거짓 신인 ‘바알’을 국가적 남편으로 맞아들였읍니다.—호세아 9:10.
16. ‘히스기야’에 이르기까지 ‘유다’ 왕국의 왕들은 종교적으로 어떻게 행동하였읍니까?
16 두 지파 ‘유다’ 왕국의 왕들은 어떠하였읍니까? 그들은 여호와의 순결한 숭배와 거짓 신 숭배 사이를 왔다갔다 하였읍니다. ‘다윗’으로부터 열두째 왕인 ‘아하스’ 왕은 거짓 숭배로 향하였읍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문을 폐쇄하기까지 하였읍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 ‘히스기야’ 왕은 성전 문을 다시 열고 ‘유다’ 왕국을 위해 순결한 숭배를 회복시켰읍니다. ‘호세아’는 ‘히스기야’ 왕 통치 때까지 예언을 계속하여 유익을 주었읍니다. 이 예언자는 자기가 예언한 사실들이 한창 진행되던 때에 살았읍니다.
달갑지 않은 봉사의 임명?
17, 18. ‘호세아’는 어떤 종류의 임명을 받았으며, 우리는 ‘호세아’의 말이 가공적인 것이 아님을 어떻게 알 수 있읍니까?
17 혼기가 되어, 우리의 결혼을 마련하시는 아버지께서 우리가 결혼할 여자는 얼마 후에 불충실하게 될 것이며, 간음을 행하고, 결국은 우리를 버리고 다른 애인을 찾아 갈 것이라고 하면서 그 여자와 결혼하라고 한다면 우리의 기분이 어떠하겠읍니까? 참으로 달갑지 않은 일이 아니겠읍니까? 그러나 ‘호세아’에게는 실제 그러한 일이 있었읍니다. 그것은 상상적이거나 가공적이거나 신화적이 아닙니다!
18 실제 역사적 인물인 ‘호세아’는 그의 이름을 지닌 예언서에서 그 사실을 알려 줍니다. 그 책의 진실성은, 「마태복음」에서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후대의 영감받은 문헌에서 최소 일곱번이나 인용된 사실로 뒷받침 되어 있읍니다.a 그리스도교의 설립자께서도 친히 그의 말을 인용하셨읍니다. 그러므로, ‘호세아’가 여호와의 예언자로서 봉사의 임명을 받은 내용에 관한 글을 읽을 때에 우리는 그것이 음란한 글로 독자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꾸며 만든 이야기가 아니라 순수한 진실임을 믿을 만한 굳건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호세아’의 행로의 예언적 의미가 현재까지 존재하는 한 백성의 역사적 사실과 정확히 부합되기 때문에 그의 진실성은 더욱 확실합니다.
19. 어느 왕들이 ‘유다’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에 ‘호세아’는 예언 활동을 하였읍니까?
19 ‘호세아’는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기록된 역사 가운데에서 자기가 있던 특정 기간을 밝히면서 맨먼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호세아 1:1) ‘웃시야’, ‘요담’, ‘아하스’ 및 ‘히스기야’는 ‘다윗’ 왕의 후손들이었으며, ‘예루살렘’에서 두 지파 ‘유다’ 왕국을 다스렸읍니다. ‘웃시야’는 기원전 829년에 왕으로 통치를 시작하였으며, ‘히스기야’는 기원전 716년에 통치를 마쳤읍니다. 그러므로 이 왕들의 통치 기간은 총 113년간입니다. 반면에, 열 지파 ‘이스라엘’ 왕국을 다스린 왕들 중에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은 그러한 이름을 가진 두번째 왕이었기 때문에 ‘여로보암’ 2세라고 합니다.
20. ‘여로보암’ 2세는 누구의 증손이었으며, 이 왕의 통치 기간 중 어느 때에 ‘호세아’는 그의 예언적인 생애을 시작하였읍니까?
20 이 ‘여로보암’의 증조부는 ‘님시’의 아들 ‘예후’ 왕이었읍니다. ‘예후’는 열 지파 ‘이스라엘’ 왕국에서 ‘바알’ 숭배를 분쇄하였읍니다. 그는 왕후 ‘이세벨’이 ‘이스라엘’에서 ‘바알’ 숭배를 조장하는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그를 창밖으로 내던져 죽게 하였읍니다. 후에 ‘아마샤’ 왕이 ‘유다’를 통치하던 때에 ‘여로보암’ 2세가 왕으로 등장하였읍니다. ‘여로보암’의 통치 기간은 ‘아마샤’의 후계자 ‘웃시야’ 왕의 통치 기간과 겹쳤읍니다. 따라서, ‘여로보암’의 통치 기간이 ‘웃시야’ 왕의 통치 기간과 겹치는 기간 즉 기원전 829년 이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로 하여금 예언적인 생애를 출발하게 하셨읍니다.
21. 여호와께서는 ‘호세아’에게 어떠한 아내를 취하라고 하셨으며, 이유는 무엇이었읍니까?
21 ‘호세아’가 이어 서술한 일이 일어났을 때에 그 자신의 반응이 어떠하였겠는지 상상할 수 있겠읍니까?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음행의 아내, 신세)을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음행의 자녀들, 신세)를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호세아 1:2.
22. ‘호세아’가 취할 여자는 어떤 면에서 “음행의 아내”였으며, 어떻게 하여 그 자녀들은 “음행의 자녀”였고, 왜 그러하였읍니까?
22 ‘호세아’가 그와 같은 명령에 따라 예언적 생애를 시작한 점에 대해 충격을 느낍니까? 그러나 여호와께서 이미 창녀가 된 여자와 결혼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아니었읍니다. 여호와께서는 ‘호세아’가 아내로 취할 여자를 ‘음행하는 여자(혹은, 아내)’라고 부르시지 않고, 직역하면, “음행의 아내”라는 말로 부르셨읍니다. 뿐만 아니라, 이 여자는 여호와의 상징적 지상의 “아내”를 비유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가 처음부터 방종하고 음행하는 여자였다면 거기에 적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영적인 면에서 합법적인 자손을 낳기 위해 도덕적으로 깨끗한 “처녀” 아내와 결혼하셨읍니다. 그러므로 “음행의 자녀들”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가지실 “자녀”의 상태를 예언적으로 표현하신 것이며 그들의 장래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었읍니다. 왜 그렇게 표현되었읍니까? 왜냐 하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한 “나라”는 열 지파 ‘이스라엘’을 뜻합니다.
23. ‘호세아’는 누구를 아내로 맞았으며, 그 아내는 무엇을 낳았읍니까?
23 그 때 결혼 생활의 전망은 좋지 않았지만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읍니다. 그는 이와 같이 하여 여호와의 예언자로서의 생애를 시작하였읍니다. “이에 저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취하였더니 저가 잉태하여 [그에게] 아들을 낳으[니라].”—호세아 1:3, 신세 참조.
24. 여호와께서는 그 아들을 무엇이라고 부르라고 하셨으며, 이유는 무엇이었읍니까?
24 이 아들은 ‘호세아’의 정당한 아들이었으며, ‘음행의 아들’을 ‘호세아’가 입양한 것이 아니었읍니다. 이 아들이 난지 8일째 되는 날 그가 할례를 받을 때에 ‘호세아’는 그 아이를 무엇이라고 이름 지었읍니까? 그 아들의 이름은 예언적이어야 하였으므로 그 예언적 희곡을 지도하시던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그 이름을 지어 주셨읍니다. 그 이름은 여호와의 목적을 지적하는 것이었읍니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임이니라. 그 날에 내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으리라 하시니라.”—호세아 1:4, 5.
25. (ㄱ) 이리하여 무슨 왕조와 무슨 나라에 대해 재난이 예언되었읍니까? (ㄴ) ‘이스라엘’ 나라는 여호와께 대해 어떤 방법으로 영적 간음을 범하지 말아야 하였읍니까?
25 이리하여 4대째 이른 ‘예후’ 왕조에 대하여 그리고 열 지파 ‘이스라엘’ 왕국 전체에 대하여 재난이 예언되었읍니다. 이 왕국은 한 때 통일되었던 열 두 지파 ‘이스라엘’ 왕국 중에서 더 큰 부분이었읍니다. 그 본래의 ‘이스라엘’ 나라는 기원전 1513년에 ‘시내’ 광야에서 영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과 결혼했읍니다. 그것은 ‘이스라엘’과 여호와 사이에 ‘모세’의 율법 언약이 맺어졌을 때였읍니다. 결혼 계약에 따르면, 그 열 두 지파 ‘이스라엘’ 나라는 여호와만을 하나님으로 숭배함으로써 그분께 충실하고 진실해야 하였읍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이탈하여 거짓 신들을 숭배함으로써 영적 간음을 범하지 말아야 하였읍니다.
26. ‘호세아’의 아내는 누구를 상징하였읍니까?
26 여호와와 ‘이스라엘’과의 결혼은 ‘호세아’와 ‘고멜’과의 결혼으로 상징되었읍니다. ‘고멜’은 “완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논리적으로 ‘고멜’은 ‘이스라엘’ 나라를 상징하였읍니다. 그러나 ‘호세아’ 시대에 ‘이스라엘’은 열 지파 ‘이스라엘’ 왕국을 형성하였던 열 지파로만 대표되었읍니다. 이 왕국은 150여년이 지난 후에,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하였다고 하신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읍니다.
27. ‘이스라엘’은 순결하게 시작되었는데도, 호세아 10:1, 2에 의하면 그 나라 상태가 어떻게 되었읍니까?
27 ‘이스라엘’은 예언자 ‘모세’ 아래서 순결하게 시작되었지만, 국가적 상태는 여호와의 영감 받은 예언자의 다음과 같은 예언처럼 되었읍니다. 호세아 10:1, 2의 기록은 이러합니다.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타락한, 신세) 포도 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아름다울수록 주상(柱像)을 아름답게 하도다. 저희가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죄를 받을 것이라.”
“이스르엘”이라는 이름의 강력한 예언적 의미
28. ‘이스르엘’이라는 이름의 뜻은 무엇이며, 그의 예언적 의미로 볼 때에 그것은 왜 ‘호세아’의 아들에게 적절하였읍니까?
28 여호와께서 영적으로 간음한 ‘이스라엘’에게 특정한 조치를 취하실 목적을 가지셨기 때문에 ‘호세아’에게 ‘고멜’에게서 낳은 그의 장자를 ‘이스르엘’이라 부르도록 지시하셨읍니다. 그 이름은 매우 합당하였읍니다. ‘호세아’의 모국어인 ‘히브리’어로 그 말은 “하나님이 씨를 뿌릴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씨를 뿌리”는 것이지만 유익한 의미로 뿌리는 것이 아니었읍니다. 사람이 씨를 뿌릴 때에는 그것을 흩으기 때문에 여기서 ‘뿌린다’는 말은 ‘흩으고 분산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호와께서 왕족인 “‘예후’의 집”을 흩으신다는 것은 그것을 파괴시키고 해체시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열 지파 ‘이스라엘’ 왕국에 대한 비슷한 조치도 그의 해체 및 붕괴를 초래할 것입니다.—누가 22:31 비교.
29. ‘예후’ 왕은 ‘바알’ 숭배를 어떻게 하였으며, 송아지 숭배는 어떻게 하였고, 무슨 계명을 범하였읍니까?
29 ‘이스라엘’의 ‘아합’ 왕은 나라의 수도가 ‘사마리아’인데도 불구하고 왕궁을 ‘이스르엘’에 두고 있었읍니다. 그 후 ‘예후’ 왕조도 ‘이스르엘’에 왕궁을 두었읍니다. ‘예후’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아 열 지파 ‘이스라엘’ 왕국에서 ‘바알’ 숭배를 격렬하게 제거하였읍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두 금송아지의 숭배를 계속하였고, ‘예루살렘’에서 행해진 여호와의 숭배를 무시하였읍니다. 이처럼 조각한 형상을 숭배함으로써, ‘예후’의 집은 십계명을 범하였읍니다. 그들은 또한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을 범하였읍니다.—출애굽 20:2-6, 13.
30. 여호와께서는 ‘이스르엘’에서의 유혈에 대해 ‘예후’의 집에 어떻게 갚으셨읍니까?
30 이렇게 하여 ‘이스르엘’에 왕궁을 두고 있던 송아지 숭배 왕조는 ‘예후’ 왕의 유혈의 기록을 남기기 시작하였읍니다. 십계명의 수여자께서는 이러한 기록을 묵과하실 수 없었읍니다. 따라서 이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호세아 1:4) 이 말씀 그대로, ‘여로보암’ 2세의 아들 ‘스가랴’가 6개월을 통치한 후에 ‘예후’ 왕의 ‘이스라엘’ 왕조는 비참한 종말을 당하였읍니다. ‘스가랴’는 살해당하였던 것입니다.—열왕 하 15:8-12.
31. 어떻게 하여 ‘이스라엘’ 나라의 통치는 끊어졌으며, 그것은 어떻게 하여 “‘이스르엘’ 골짜기”같이 되었읍니까?
31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예후’ 왕의 왕조는 기원전 791년에 종말을 당하였읍니다. 그러나 열 지파 ‘이스라엘’ 왕국은 기원전 740년까지 51년을 더 존속하였읍니다. 그 후에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하셨읍니다. (호세아 1:4)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세계 강국을 사용하여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전쟁의] 활을 꺾으”셨읍니다.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가 무너지자 배도한 그 나라는 패망하였읍니다. 생존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앗수르’ 제국의 각 도로 추방되었을 때에 그 나라의 국력은 씨와 같이 흩어졌읍니다. 그 비참한 경험은 “‘이스르엘’(하나님이 씨를 뿌릴 것이다) 골짜기”라는 표현의 상징적 의미에 잘 부합되었읍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해방자인 사사 ‘기드온’이 선정된 군사 300명으로 “‘이스르엘’ 골짜기” 근처 ‘므깃도’ 근방에서 ‘미디안’ 침략군을 흩은 것과는 전혀 달랐읍니다. (사사 6:33, 34) 기원전 740년에는 해방자도 없고 생존을 위해 전쟁을 할 능력도 없어서 열 지파 ‘이스라엘’ 왕국은 멸절당하였읍니다.
32. 우리는 현 20세기에 이상과 같은 사실의 의미를 왜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까?
32 우리는 이 사실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를 깨닫습니까? 그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됩니다. 왜냐 하면, 현 20세기에 와서, 영적으로 음란하고 불충실한 ‘이스라엘’의 현대적 실체에게 그것이 성취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실체는 그리스도교국으로서 거기에는 전세계적으로 거의 10억에 달하는 교인들이 포용되어 있읍니다. 그리스도교국의 재난이 임박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의 자비는 어디서 작용하는가?’ 하고 질문할 수 있읍니다. 여호와께서 예언자 ‘호세아’를 다루신 역사를 계속 살펴 보면 그 점이 분명히 나타날 것입니다.
[각주]
a 참조, 마태 2:15; 9:13; 12:7; 누가 21:22; 23:30; 계시 3:17; 6:8, 16; 호세아 11:1; 6:6; 9:7; 10:8; 12:8; 13:14.
[272면 도표]
호세아 생존시의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들
(수자는 즉위년)
유다의 왕들 기원전 이스라엘의 왕들
843경 여로보암 2세
웃시야(아사랴) 829
792경 스가랴
791 살룸
790경 므나헴
780 브가히야
778 베가
요담 777
아하스 761경
748경 호세아
히스기야 745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