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숙한 여자”가 충성스러운 사랑을 나타내다
“네가 현숙한 여자인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룻 3:11.
1, 2. 한 밤중에 있었던 어떠한 일이 우리의 주의를 이끌며, 그 장면은 어떠한 질문을 일으킵니까?
‘유다’ ‘베들레헴’과 그 주변은 밤의 어두움과 고요한 적막이 깔려 있읍니다. 들판의 타작 마당에서는 한 연로한 사람이 잠을 자고 있읍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한 젊은 여자가 살그머니 다가와서 그 덮은 것을 살짝 들추고 눕습니다. 그는 잠을 깨어 자기 발치에 누운 그 여자를 보고 “네가 누구뇨” 하고 묻습니다. 그 여자의 대답은 어떠합니까? ‘나는 당신의 시녀 ‘룻’입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그 여자는 특별히 아주 고상한 목적을 위해서 그에게 온 것입니다. 사실상 그 연로한 사람은 대화를 계속하면서 그의 덕성을 다음과 같이 인정합니다. “네가 현숙한 여자인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룻 3:9-11.
2 무슨 일 때문에 한 밤중에 이처럼 특이한 장면이 있게 되었읍니까? 실제로 이 여자는 누구입니까? 그리고 그 연로한 남자의 신원은 어떠합니까? 왜 그는 그 여자가 “현숙한 여자”로 알려졌다고 말합니까? 그 여자는 어떠한 특성을 나타냅니까? 한 밤중에 있었던 그 특이한 장면을 고려할 때 이런 질문들과 다른 질문들이 생깁니다.
3. (ㄱ) 우리는 어떠한 성서 책을 고려하고자 합니까? (ㄴ) 이 성서 기록은 언제 누구에 의하여 기록되었으며, 그것은 무엇을 강조합니까?
3 우리가 고려하려고 하는, ‘다윗’ 시대에 (기원전 1090년경) ‘히브리’ 예언자 ‘사무엘’에 의해 기록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하나님의 영감에 의한 그 기록은 성서 가운데서 오직 두권뿐인 여자의 이름을 지닌 책 중 하나라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다른 하나는 ‘에스더’이다.) 「룻기」를 감동적인 연애 이야기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책은 그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책입니다. 그 기록은 왕국 상속자인 오랫 동안 약속되어 온 메시야를 출산할 여호와 하나님의 목적을 강조합니다. 더우기 그 기록은 하나님의 사랑의 친절을 찬양합니다.—창세 3:15; 룻 2:20; 4:17-22.a
고난이 닥치다!
4. 「룻기」에 나오는 사건들은 어느 기간에 발생했읍니까?
4 이 기록에 나오는 사건들이 발생한 것은 ‘이스라엘’이 “사사들의 치리”를 받고 있던 때였읍니다. 그 때는 그 기간의 초기였음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타작 마당에서 ‘룻’과 함께 있었던 그 남자는 ‘여호수아’ 때의 ‘라합’의 아들, ‘보아스’였기 때문입니다. (룻 1:1; 여호수아 2:1, 2; 마태 1:5) 이 흥미있는 이야기가 펼쳐질 때 그 망라 기간은 아마 기원전 1300년경의 약 11년 정도일 것입니다.
5. 어떤 환경과 사실 때문에 ‘엘리멜렉’은 가족들과 함께 ‘모압’으로 이주하게 되며, 이것은 그리스도인 의무와 어떤 관련이 있읍니까?
5 ‘유다’ 땅에 기근이 발생하였으며 ‘베들레헴’(즉 ‘에브라다’)에도 그 영향이 미쳤읍니다. 특히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의 가정에도 재난이 들이닥쳤읍니다. 자기 가족에게 생활 필수품을 공급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했기 때문에 그는 단호한 조처를 취하게 됩니다. 얼마 있지 않아 ‘엘리멜렉’과 그의 아내 ‘나오미’와 그들의 두 아들 ‘말론’과 ‘기론’이 ‘요단’ 강을 건너 가는 것을 볼 수 있읍니다. 이 ‘에브라다’인들은 사해 동쪽, ‘아르논’ 강 남쪽의 고원에 위치한 ‘모압’이라는 나라에서 외국인 거주자가 됩니다.—룻 1:1, 2; 디모데 전 5:8 비교.
6. ‘나오미’, ‘룻’ 그리고 ‘오르바’가 남편을 여의게 된 경위를 설명하십시오.
6 시간이 흘러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는 나이든 과부가 됩니다. 후에 그들의 두 아들이 ‘모압’ 여인들과 결혼을 합니다. ‘말론’은 ‘룻’을 ‘기론’은 ‘오르바’를 각각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룻 1:4, 5; 4:10) 10년 정도가 지난 후에 재난이 다시 닥칩니다. ‘나오미’의 두 아들은 자녀를 남기지 않고 죽게 됩니다. 결국 세 여자는 모두 홀로 되었는데 남편을 여의고 과부가 된다는 것은 확실히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7. 과부가 된 ‘나오미’에게 있어서 어떠한 가망성이 특히 희박한 것처럼 보입니까?
7 특히 ‘나오미’의 슬픔은 큽니다. ‘유다’인인 그는 족장 ‘야곱’이 특별한 유언으로 그의 아들 ‘유다’를 이렇게 축복한 사실을 알고 있읍니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이 ‘실로’는 왕의 홀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사실상 그는 메시야 즉 그를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스스로를 축복하게 될 ‘아브라함’의 씨가 될 것입니다. 자, ‘유다’ 여자들은 그러한 기름부음받은 자의 조상들이 될 아들을 낳을 수 있읍니다! 그런데 ‘나오미’의 아들들은 자녀가 없이 죽었으며, 자신은 출산할 나이가 이미 지난 것입니다. ‘나오미’와 그 가족이 메시야의 혈통에 기여할 가망성은 극히 희박합니다.—룻 1:3-5; 창세 22:17, 18; 49:10, 33.
8. 어떠한 요인들 때문에 ‘나오미’는 도중에 있을 위험을 무릅쓰면서 ‘유다’로 돌아오게 됩니까?
8 그러나 적어도 좋은 일에 대한 희미한 한 가닥의 희망이 있읍니다. ‘나오미’는 (아마 어떤 여행하는 ‘히브리’인 상인들을 통해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들었읍니다. 그렇습니다. 기근은 끝나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유다’에 다시 양식이 있고, “떡집”인 ‘베들레헴’에 훌륭한 식품이 있읍니다. 오래지 않아 남편을 여인 그 세 여자가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행하”는 것이 보입니다. 이것은 쉬운 여행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 도둑들과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득실거리기 일쑤인 지역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 대한 ‘나오미’의 충성과 자기 동족과 함께 하려는 염원 때문에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길을 계속 갑니다.—룻 1:6, 7.
결정의 때
9. 왜 ‘룻’과 ‘오르바’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듣게 됩니까?
9 그 젊은 과부들은 단지 예의상 그 연로한 시어머니를 ‘모압’과 ‘이스라엘’의 경계까지만 동반할 것입니까? 혹은 그들은 더 갈 것입니까? 이제 보십시다. 얼마쯤 가다가 ‘나오미’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 (룻 1:8) 적어도 ‘룻’의 아버지가 아직 살아 있을 때인데 왜 “어미”라는 말을 사용합니까? (룻 2:11) 자, 그 말은 연로한 여자가 젊은 여자들에게 할 수 있는 자연스런 말이며 그들의 어머니는 그들의 빈곤한 시어머니와는 달리 안정된 집을 가지고 있었읍니다. 어쨌든 어머니의 사랑은 슬픈 딸에게 특히 위로가 될 것입니다.
10. ‘나오미’는 어떠한 희망을 가지고 자기의 두 자부를 기꺼이 보내고자 합니까?
10 ‘나오미’의 다음 말을 들어 봅시다.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로 각각 남편의 집에서 평안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룻 1:8, 9) 그 두 ‘모압’ 여자들은 ‘나오미’와 죽은 남편들에게 사랑의 친절 혹은 충성스러운 사랑을 나타냈었읍니다. 그들은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의 근심”이 된 ‘에서’의 ‘히위’인 아내들과는 달랐읍니다. (창세 26:34, 35) 이제 아무런 재물이 없는 ‘나오미’에게는 자부들에게 보답하는 길은 다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길 밖에 없읍니다. ‘나오미’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각각 남편과 가정을 주셔서 안식과 평안을 얻게 되기를 바라고 기꺼이 이 젊은 과부들을 보내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들은 더는 과부들이 아니고 또 과부의 서러움을 겪지 않게 됩니다.
11. (ㄱ) ‘룻’과 ‘오르바’가 ‘나오미’와 헤어진다는 것이 왜 그렇게도 괴로운 일인 것 같으며, 이것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가족 관계에 있어서 어떠한 교훈이 됩니까? (ㄴ) ‘룻’과 ‘오르바’가 ‘나오미’와 계속 함께 산다면 재혼의 전망은 어떠할 것입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11 그러나 ‘룻’과 ‘오르바’는 떠나지 않습니다. ‘나오미’가 그들에게 입을 맞출 때 그들은 소리높여 울기 시작합니다. 분명히 ‘나오미’는 버리고 떠나기에는 너무나 가슴아픈 친절하고 사랑이 있는 시어머니입니다. (룻 1:8-10; 사도 20:36-38 비교) 그러나 ‘나오미’는 계속 그들을 타이릅니다. “나의 태중에 너희 남편 될 아들들이 오히려 있느냐? 내 딸들아 돌이켜 너희 길로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찌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서 아들들을 생산한다 하자. 너희가 어찌 그것을 인하여 그들의 자라기를 기다리겠느냐? 어찌 그것을 인하여 남편 두기를 멈추겠느냐?” 그렇습니다. ‘나오미’의 죽은 아들들 대신 새로운 아들들이 생기고 이들이 자란다 할지라도 이 젊은 여자들이 그 동안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지 않을 것입니까? 그러한 생각은 비합리적일 것입니다. 그 점에 있어서 ‘모압’ 여인인 그들이 ‘유다’에 있는 어떤 남자와 결혼해서 자녀를 양육하게 될 전망은 아주 희박할 것입니다.—룻 1:11-13.
12, 13. ‘룻’과 ‘오르바’는 어떻게 시험을 받고 있으며, ‘오르바’는 어떠한 결정을 합니까?
12 ‘나오미’는 이렇게 계속합니다.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룻 1:13) ‘나오미’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하시는 일 혹은 허락하시는 일은 모두 정당한 것임에 틀림없읍니다. (잠언 19:3) 그러나 ‘나오미’는 자부들을 위하여 슬픔이 가득합니다. 이제 그들이 결정할 때가 된 것입니다. 그들은 계속 비이기적으로 ‘나오미’와 함께 살 것입니까? 그들의 동기와 충성은 시험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13 ‘오르바’는 결정을 내립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시어머니에게 입을 맞추고 떠납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룻 1:14, 15) 그렇습니다. ‘오르바’는 자기 백성과 ‘자기 신’에게로 돌아가고 있읍니다. 그와 ‘룻’은 “‘그모스’의 백성” 중에서 자랐으며, 그 ‘모압’의 거짓 신의 숭배에서 자녀를 희생하는 무서운 일까지도 목격하였을지 모릅니다. ‘오르바’는 그런 것으로 돌아가고 있읍니다.—민수 21:29; 열왕 하 3:26, 27.
14. ‘룻’은 ‘나오미’에게 무엇이라고 말하며, 그리하여 그 ‘모압’ 여인은 어떤 결정을 내립니까?
14 그러나 ‘룻’은 그렇지 않습니다. ‘룻’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그리고 나서 이 ‘모압’ 여인은 하나님 앞에 다음과 같은 말로 맹세를 합니다.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참으로 충성스러운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실상 그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읍니다. ‘룻’은 여호와를 섬기는 생활을 택하였으며 ‘나오미’의 백성 곧 참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백성이 그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이 ‘모압’ 여인은 충실히 여호와를 섬기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므로 ‘나오미’는 이 젊은 여자를 보내려는 모든 노력을 그칩니다.—룻 1:16-18.
15. (ㄱ) 지금까지 ‘룻’은 충성스러운 사랑을 어떻게 나타내 왔읍니까? (ㄴ) 우리는 ‘룻’과 ‘오르바’의 결정으로부터 어떠한 유익을 얻을 수 있읍니까?
15 이 연로한 ‘유다’인과 젊은 ‘모압’ 여인이 나란히 다시 그들의 힘든 여행을 계속하기 때문에 우리가 본 감동적인 장면을 고려할 기회를 가지게 됩니다. ‘오르바’는 자신의 이익에 굴복하였읍니다. 그가 여호와에 관하여 얼마나 배웠든지간에 그는 자기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는 데 그 지식이 장애가 되지 않았읍니다. ‘룻’도 이기적으로 자기 고국을 사모하였다면 그도 그리로 돌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히브리 11:15 비교) 그러나 이 젊은 ‘모압’ 여인은 연로한 ‘나오미’에게만이 아니라 특히 여호와께 충실한 사랑을 나타냈읍니다. ‘룻’은 자기 희생적인 영과 믿음 가운데서 참 하나님을 섬길 결심을 나타냈읍니다. 이러한 대조적인 결정을 볼 때 우리도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지 않고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지도록 격려를 받게 됩니다.—히브리 10:38, 39.
‘베들레헴’이 떠들썩하다!
16. 왜 ‘베들레헴’의 여자들은 “이가 ‘나오미’냐?” 하고 계속 묻습니까?
16 결국 이 두 여자는 그들의 목적지인 ‘베들레헴’에 당도합니다. 그들이 오게 되자 전 성읍이 떠들썩해집니다. “이가 ‘나오미’냐?”라고 여인들은 계속 묻습니다. 여러 해 동안에 많이 변하였읍니다. 확실히 그 여자들은 한 때는 명랑하던 이 여자가 슬픔과 고통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고 있읍니다. 그 여자의 대답 자체가 마음의 고통을 지적해 줍니다!
17.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는 ‘나오미’의 말은 어떠한 의미입니까?
17 ‘나오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를 ‘나오미’[나의 기쁨]라 칭하지 말고 ‘마라’[괴로움]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남편과 두 아들을 가져]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룻 1:19-21) 오! ‘나오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하지만 분명히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재난을 주신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룻 1:13; 사무엘 상 3:18 비교.) 생산적인 태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간주되고 아이를 못낳는 것을 저주라고 생각하던 그 당시에는 살아 있는 후손이 없는 여자는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읍니다. 그리고 이제 ‘나오미’에게 메시야의 혈통에 기여할 어떠한 희망이 있읍니까?
보잘 것 없는 이삭줍는 여인이 호의를 얻다
18. ‘룻’은 어떻게 이삭줍는 일을 하게 되며, 그는 “우연히” 누구의 밭에 이르게 됩니까?
18 ‘나오미’와 ‘룻’은 이른 봄인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읍니다. (룻 1:22) 부지런하고 기꺼이 섬기려고 하는 ‘룻’은 ‘나오미’의 허락을 받고 나가 곡식 밭에서 추수꾼들의 뒤를 따라 이삭을 줍기 시작합니다. ‘룻’은 이삭이 가난한 자와 고통하는 자, 외국인 거주자들, 아버지 없는 아이와 과부를 위한 여호와의 인자하신 마련임을 알고 있읍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부주의로 혹은 일부러 추수꾼들이 남겨 놓은 곡식은 그러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모으거나 이삭으로 주울 수 있읍니다. (레위 19:9, 10; 신명 24:19-21) ‘룻’에게는 이삭을 주울 권리가 있었지만 그 여인은 어느 밭에 가서 이삭 줍기를 겸손하게 요청하며 그렇게 할 허락을 받습니다. 그러나 ‘룻’이 “우연히 ···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게 된 것은 분명히 여호와의 손이 함께 하셨음을 알려 줍니다.—룻 2:3.
19, 20. (ㄱ) 보아스는 누구입니까? (ㄴ) 왜 ‘룻’은 결코 자기만 아는 여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읍니까?
19 보십시오! ‘보아스’가 가까이 이릅니다. 그는 “유력한 자”로서 ‘살몬’과 ‘라합’ 사이의 아들입니다. 그렇습니다. ‘보아스’는 ‘유다’인입니다. ‘보아스’는 자기 일꾼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는 사려깊은 주인일 뿐만 아니라 참 하나님의 경건한 숭배자이기도 합니다. 그의 인사로써 그것을 알 수 있읍니다. 그는 추수꾼들에게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인사하고 그들은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대답합니다.—룻 2:1-4.
20 추수꾼들의 책임자인 젊은 사람으로부터 ‘보아스’는 ‘룻’이 ‘나오미’와 함께 최근에 ‘베들레헴’에 온 ‘모압’ 여자임을 알게 됩니다. ‘룻’은 허락을 받은 후 아침 서늘한 때부터 해가 높이 오를 때까지 뜨거운 것을 인내하면서 불평없이 꾸준히 이삭을 주웠읍니다. ‘룻’은 단지 곡식을 거두는 사람들의 초막에 불과한 집에서 잠시 쉬었을 뿐입니다. ‘룻’은 결코 자기만 아는 여자가 아닙니다!—룻 2:5-7.
21. ‘룻’에게는 ‘보아스’를 감동시킨 어떠한 점이 있으며, 그리스도인 여자들은 이로부터 어떠한 결론을 내릴 수 있읍니까?
21 후에 ‘보아스’는 다른 밭에서 이삭을 줍지 말고 자기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고 권합니다. 그 소녀들은 아마도 그의 곡식을 거두는 사람들의 뒤를 따르면서 곡식단을 맸을 것입니다. ‘보아스’는 그 젊은이들에게 그 여자를 건드리지 말라고 말하며 그들이 떠다 둔 물을 원하는 대로 마시게 합니다. ‘룻’은 깊은 감사를 느껴 자기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면서 이렇게 묻습니다. “나는 이방 여인이어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보아스’는 결코 늙은이의 일시적인 기분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그의 애정을 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고 그 ‘모압’ 여인이 자기 부모와 고국을 떠나 자기의 연로한 시어머니와 계속 함께 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룻’의 충성스러운 사랑과 겸손으로부터 감동을 받은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룻’이 인정한 바와 같이 ‘보아스’는 분명히 ‘룻’을 위로하였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을 하였읍니다.—룻 2:8-13; 시 91:2, 4.
22, 23. (ㄱ) ‘보아스’는 어떻게 ‘룻’을 관대하게 대합니까? (ㄴ) ‘룻’의 부지런함과 비이기적인 점은 어떠한 면으로 나타납니까?
22 추수꾼들의 식사 시간에 ‘보아스’는 ‘룻’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내 떡조각을 초[신 포도주]에 찍으라.” 뜨거운 날에 얼마나 구미를 돋구는 말입니까! ‘보아스’는 ‘룻’에게 볶은 곡식을 주며, ‘룻’은 실컷 먹고 얼마를 남깁니다.—룻 2:14, 「신 영어 성서」 비교.
23 이제 또 다시 일을 시작합니다. ‘보아스’는 관대한 영으로 그의 사람들에게 ‘룻’으로 하여금 “곡식단 사이에서” 줍게 하라고 말합니다. 그는 심지어 그들에게 “줌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룻’이 그것을 줍게 하라고 지시합니다. 저녁이 되었는데도 ‘룻’은 자기가 주운 것을 ‘떠는 데’ 바쁩니다. 땅에다 놓고 막대기 혹은 도리깨로 치면 보리가 줄기와 이삭에서 떨어져 나옵니다. 자, 그 날 ‘룻’이 거둔 보리는 한말이 넘습니다! ‘룻’은 이것을 ‘베들레헴’ 집으로 가지고 갑니다. ‘룻’은 비 이기적으로 그 날 일찌기 식사 때 남긴 음식도 가지고 가서 자기의 시장한 시어머니에게 줍니다.—룻 2:14-18.
24. (ㄱ) 왜 사람들이 ‘룻’을 “현숙한 여자”라고 생각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ㄴ) 그러므로 왜 ‘룻’은 경건한 여자에 대한 훌륭한 본입니까?
24 또 다시 ‘룻’은 ‘나오미’에 대한 충성스러운 사랑을 나타냅니다. 그 젊은이의 여호와께 대한 사랑, 그의 근면성과 겸손은 이에 보탬이 되며 사람들이 그를 “현숙한 여자”로 보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룻 3:11) 분명히 ‘룻’은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아니하며 자기가 열심히 일하였기 때문에 그는 궁핍한 사람에게 줄 것이 있게 됩니다. (잠언 31:27, 31; 에베소 4:28) 그리고 과부가 된 자기의 연로한 시어머니에 대한 책임을 떠맡음으로써 그 ‘모압’ 여인은 주는 데서 얻는 행복을 알고 있음에 틀림없읍니다. (사도 20:35; 디모데 전 5:3-8) ‘룻’은 참으로 경건한 여자의 훌륭한 본입니다.
[각주]
a 「룻기」의 예언적 의미에 관해서는 1972년 5월 15일호 「파수대」 223-235면과 1932년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 발행 「보존」(영문)이라는 책 169-335면을 참조하라.
[8면 삽화]
‘룻’은 ‘나오미’에게 ‘어머니를 떠나라고 권하지 마십시오. 어머니 가시는 곳에 저도 가겠읍니다’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