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목적을 자신의 생활 방식으로 삼으라
1. (ㄱ) 어떠한 생각과 마음의 태도가 오늘날 인류를 괴롭히고 있읍니까? (ㄴ) ‘룻’과 ‘나오미’가 직면한 무슨 도전이 열정과 충성에 있어서 우리에게 교훈이 됩니까?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하였읍니다. (데살로니가 후 3:2) 그러한 여러 가지 이유 가운데 두드러진 이유 한 가지는 현 20세기에 아주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 자기 결정의 정신입니다. 이 자기 만족의 욕망은 하나의 종교가 되어버렸으며,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한쪽 구석에 밀쳐버렸고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냉담한 정신으로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완전히 변질시켜 버렸읍니다. 여호와의 봉사에 대한 도전을 비이기적으로 받아들여 그의 목적을 자기의 생활 방식으로 삼는 사람들을 볼 때에 여호와께는 큰 기쁨이 되며, 우리에게는 훌륭한 본이 됩니다. 그에 대한 한가지 탁월한 예로, ‘모압’ 땅의 자기 백성과 가정을 버리고 과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온 고대 ‘룻’이 있읍니다. 자기도 과부의 입장으로서 ‘모압’에서 남편을 얻어 그 낯익은 고장에 정착하여 가족을 갖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나오미’와 여호와의 숭배에 대한 사랑이 컸기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나오미’를 따라 ‘이스라엘’로 왔읍니다. 이 낯선 환경에서 그의 사랑이 얼마나 비이기적인가가 크게 시험을 받았읍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목적을 자기의 생활 방식으로 삼고자 한 그의 성실한 열망 때문에 그는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이 도전을 직면하였읍니다. ‘룻’과 ‘나오미’가 당한 최종 결과 그리고 그 결과에 이르기 까지의 사건 진전은 우리에게 열정과 충성의 면에 있어서 실로 고무적인 교훈이 됩니다.
2, 3. ‘나오미’가 ‘룻’과 함께 자기 고향에 돌아온 것은 현대의 무엇을 의미합니까?
2 보리 수확 때가 되었읍니다. 그러니 유월절 축제가 지난 뒤일 것입니다. 봄철이 되어 겨울 비는 지나갔으며, ‘유다·베들레헴’에는 수확할 것이 있읍니다. 10년 동안의 오랜 기근이 지나고 그 곳은 또 다시 ‘떡의 장소’가 되었읍니다. 기근이 있던 그 동안에 ‘나오미’는 ‘모압’에서 살았으며, 거기서 그는 자기 남편 ‘엘리멜렉’과 두 아들을 잃었읍니다. 그 중 한 아들이 ‘룻’의 남편 ‘말론’이었읍니다. 이제 ‘나오미’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룻’을 데리고 고향에 돌아왔읍니다. 그들은 ‘나오미’의 고향, ‘나오미’의 상속 재산이 있는 곳으로 다시 왔읍니다. (룻 1:22) 이 점은 현 시대에 있었던 무슨 일을 의미합니까? 오늘날의 역사적 실체에 있어서, 이것은, 예수께서 천사들을 통하여 모든 선택받은 자들 곧 기름 부음을 받은 제자들의 남은 자를 모으는 데 대하여 하신 말씀을 상기시켜 줍니다. 언제 있을 일입니까? 실체적인 ‘고레스’ 대왕 앞에 큰 ‘바벨론’(거짓 종교 세계 제국)이 무너진 다음입니다. 그때는 바로 사물의 제도의 끝에 관한 예수의 예언이 성취될 때였읍니다.—마태 24:29-31.
3 이사야 12:1, 2에서는 큰 ‘바벨론’으로부터 남은 자를 모을 때의 즐거움을 말해 줍니다.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그 노가 쉬었고 또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이러한 말은 1919년 이래 ‘나오미’ 남은 자의 입에서도 울려나왔읍니다. 그들을 하나님의 은총 안으로 회복시키시고,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그들을 하나님의 봉사를 위하여 다시 조직하셨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수확하는 일에 참여한 결과는 훌륭하였다
4. ‘룻’은 ‘이스라엘’의 법 가운데 있는 어떠한 마련에 따라 ‘나오미’를 돕고자 하였으며, 그의 사랑의 노동은 어떻게 보람이 있었읍니까?
4 이제 모형적인 ‘드라마’에서 수확이 진행되고 있었읍니다. ‘룻’은 자기 시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지만, 시어머니에게 부담이 되고 싶지는 않았읍니다. 그는 ‘나오미’를 도와 주고자 하였읍니다. 그래서 ‘나오미’의 허락을 받아 ‘룻’은 수확에 대한 ‘이스라엘’의 법의 혜택을 받기로 하였읍니다. (레위 19:9, 10) 그리하여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룻 2:1-3) ‘보아스’는 여호와의 참 숭배자였으며, 여호와의 법을 존중하는 사람이었읍니다. (룻 2:4-7) 그는 ‘룻’의 신분을 알게 되자, ‘룻’이 자기 밭에서 계속 일을 할 수 있도록 마련을 해 줍니다. 보리 수확 동안만이 아니라, 계속 시작되어 5월에 있는 오순절 축제 때까지 계속되는 밀 수확 때까지 자기 밭에서 일하도록 해 줍니다. 그렇게 해 주면서 그는 ‘룻’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룻 2:8-13) 그는 이렇게 ‘룻’을 돌보아 줄 때에 그것이 ‘룻’의 시어머니 곧 나이많은 ‘나오미’를 도와 주는 것도 된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5, 6. ‘룻’이 수확 활동에서 ‘나오미’와 함께 한 것은 무엇을 상징하였읍니까?
5 이것을 성취한 당시의 사건들은, “밭은 세상이요 ···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과 일치합니다. (마태 13:38, 39) 1919년에는 그리스도의 신부의 성원들이 아직 다 차지 않았읍니다. 아직도 더 모아들여야 하였읍니다. 마치 ‘룻’이 ‘나오미’와 연합하여 수확 활동 중에 부지런히 일하고 죽을 때까지 기쁘게 연합한 것 같이 1919년 이후로 남은 자 반열에 새로운 자들이 더 들어오게 되었읍니다. 이렇게 들어온 반열은 ‘룻’으로 상징되었읍니다.
6 그해 미국 ‘오하이오’ 주 ‘시다포인트’ 대회 때 즉 1919년 9월 6일 토요일 오후에 ‘이어리’ 호수에서 200여명이 침례를 받았읍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신부 중의 본래 있던 ‘나오미’ 남은 자에 부가된 자들이었읍니다. 그 침례식을 관찰한 자들 가운데는 그해 3월 25일 화요일에 미국 ‘아틀란타’ 연방 형무소에서 석방된 협회의 간부들도 있었읍니다. 그들은 이제 새로운 자유를 누리게 되었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신권 정부의 왕국 권익을 위하여 일하고 있었읍니다. 1922년, 즉 3년 후에 ‘오하이오’ 주 ‘시다포인트’에서 또 다른 대회가 열렸읍니다. 1922년 9월 9일 토요일에 361명이 침례를 받았읍니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룻’ 반열은 계속 들어왔읍니다. 이제 ‘모압’ 여자 ‘룻’과 같이 현대의 ‘룻’ 반열은 예언적 ‘드라마’에서 보여 주는 바와 같이 ‘나오미’ 반열과 함께 지상에서 하나님의 수확이 끝날 때까지, 즉 보리 수확과 밀 수확이 끝날 때까지 열심히 일하기로 결심하였읍니다. ‘보아스’가 훌륭한 여자라고 칭찬한 ‘룻’과 같이 남은 자에게 새로 가입한 이들도 그러하였읍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한 실체적 훌륭한 여자임이 밝혀졌읍니다.
‘룻’의 충성을 시험한 ‘나오미’의 소망
7. (ㄱ) 어떻게 해야만이 ‘나오미’는 자기의 유산을 ‘엘리멜렉’의 이름으로 보존할 수 있으며, 동시에 약속된 ‘실로’에게 이르는 왕 계통에 기여할 수 있읍니까? (ㄴ) 이것은 어떻게 ‘룻’에게 도전이 됩니까?
7 이제 ‘룻’이 근면하게 일하고 ‘보아스’가 관대하게 해준 덕분에 ‘나오미’와 ‘룻’에게는 양식이 있었읍니다. 그래도 ‘나오미’는 자녀를 낳을 나이가 지난 늙은 과부이고, 그에게는 자기 남편 ‘엘리멜렉’에게 속하여 있던 유산이 있읍니다. ‘룻’이 자기의 대리로 즉 자신을 대신하여 행동해 주지 않는다면 이제 ‘나오미’는 무력합니다. ‘나오미’는 해결책을 생각해냅니다. 그는 이 재산을 내어 놓기로 결심합니다. 특히 이 일에 있어서 자기가 꼭 사용해야 할 ‘룻’의 유익을 염두에 두고 그렇게 결심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오미’와 그의 며느리 ‘룻’이 과부로 있어서는 약속된 ‘실로’에게 까지 이르는 ‘유다’ 지파의 왕계통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나오미’는 아이를 갖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유산은 ‘유다’ 지파 외의 사람에게 넘겨질 수 없기 때문에, ‘나오미’는 ‘유다’ 지파에서 ‘룻’을 통한 아이 곧 양자를 가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룻’은 ‘유다’ 지파의 한 남자와 결혼하여 계속 그 재산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러나 먼저, ‘룻’ 자신이 늙은 ‘보아스’보다는 어떤 젊은 남자를 원할지도 모를 욕망을 버리고 이러한 생활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한 제안에 대하여 ‘룻’은 어떤 태도를 취할 것입니까?
8. ‘나오미’는 ‘룻’에게 그들의 문제에 대한 이 해결 방법을 실현하도록 어떻게 제안하며, ‘룻’은 어떻게 응합니까?
8 ‘나오미’는 ‘룻’에게 이 도전을 아주 솔직하게 제시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함께하던 시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그가 오늘 밤에 타작 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라.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 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 가서 그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너의 할 일을 네게 고하리라.” ‘룻’은 응하였읍니까? “‘룻’이 시모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하니라. 그가 타작 마당으로 내려가서 시모의 명대로 다 하니라.”—룻 3:1-6.
9. 이러한 조처를 취하는 점에 있어서 ‘나오미’는 어떻게 ‘바울’과 같습니까?
9 ‘나오미’는 사도 ‘바울’과도 같습니다. ‘바울’은 교회 즉 회중과 자기와의 관계에 대하여,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하고 말하였읍니다. (고린도 후 11:2) 마찬가지로 ‘나오미’는 ‘룻’을 합당한 남자에게 결혼시킬 마련을 하였읍니다. 그러므로 ‘룻’은 들에 나가서 ‘보아스’의 발치에 눕습니다. ‘보아스’가 밤중에 잠에서 깨자 ‘룻’은 죽은 ‘엘리멜렉’에게 씨를 낳아 주기 위하여 자기를 아내로 맞아달라고 제의합니다.—룻 3:7-9.
다른 “고엘”이 개입하다
10. ‘나오미’와 ‘룻’의 이러한 행동은 왜 부도덕한 행동이 아니었으며, ‘보아스’는 ‘룻’의 상속 결혼 제의를 어떻게 보았읍니까?
10 ‘나오미’와 ‘룻’의 이러한 행동은 부도덕한 행동이 아니었읍니다. 그것은 단순히 기업 무를 자의 입장에 있는 사람 즉 ‘고엘’의 영예를 신뢰함을 나타낸 행동입니다. ‘보아스’도 그의 동기를 오해하거나 그의 상속 결혼의 제의를 부도덕한 요구로 잘못 인식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그의 대답에서도 분명합니다. “[‘보아스’가] 가로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내 딸아 두려워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참으로 나는 네 기업을 무를 자나 무를 자가 나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으니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코자 아니하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행하리라.”—룻 3:10-13.
11. (ㄱ) ‘보아스’가 ‘룻’의 제안을 즉시 받아들여 기업무를 자로서 행동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이것은 실체에 있어서 어떻게 성취됩니까?
11 ‘보아스’는 존경 받을 만한 사람이었으며, 자제력이 강한 사람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나오미’에게는 자기보다 더 가까운 친척이 있다는 사실을 ‘룻’에게 일러 주었읍니다. 자기는 ‘나오미’의 조카이지만, 더 가까운 이 친척은 ‘나오미’의 시동생입니다. 바로 그 사람이 ‘나오미’의 유산을 사고, 기업무를 자 곧 ‘고엘’로서 행동해야 할 우선적인 책임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보아스’가 가족 책임도 없이 오랫 동안 살아온 독신 늙은이로서 그의 의무를, 설사 그것이 가족 책임을 지게 만드는 한이 있더라도, 이행하기 싫어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보아스’는 자기가 속하여 있는 ‘유다’ 지파의 약속된 ‘실로’에 이르는 왕족 계통에 기꺼이 기여하고자 합니다. 이 점은 하늘에 계시는 ‘고엘’ 곧 기업 무를 자이신 구속자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에도 적용됩니다. 그러나 그는 먼저 ‘나오미’ 반열과 ‘룻’ 반열을 ‘나오미’의 시동생인 “아무게”로 상징된 사람에게 내놓습니다. 이 사실은 오늘날 남은 자의 ‘나오미’ 반열과 ‘룻’ 반열에게 시험이 됩니다. 누가 승리하고 누가 실패합니까? 다음과 같이 되었읍니다.
12. ‘보아스’의 행동에 대하여 ‘룻’과 ‘나오미’는 어떤 행동을 취합니까?
12 ‘룻’은 이른 아침 햇살이 그 도시에 비치기도 전에 자기 시어머니에게로 갑니다. 그는 ‘보아스’가 약속의 증거로 자기에게 준 보리 여섯 되를 겉옷에 싸들고 가면서 마냥 즐겁기만 합니다. 늙은 ‘나오미’가 그를 맞으면서, “내 딸아, 너는 누구냐?” (난외주)하고 말합니다. ‘나오미’의 말의 본 뜻을 알아차린 ‘룻’은 자기가 아직 ‘보아스’의 아내가 아니라고 말한 다음 거기서 있었던 모든 일과 ‘보아스’가 자기에게 한 말을 상세히 이야기합니다. 그러자 ‘나오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되는 것을 알기까지 가만히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날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룻’은 미래에 대한 밝은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으며, ‘나오미’는 평생 동안의 염원이 성취될 희망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룻 3:14-18.
기업 무를 자가 도전을 당하다
13.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보아스’는 어떠한 행동을 취하였읍니까?
13 이제 이 의미깊은 날 중대한 사건이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보아스’가 성문에 올라가서 거기 앉았더니 마침 ‘보아스’의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그가 와서 앉으매 ··· ‘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이르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관할하므로 내가 여기 앉은 자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고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그가 가로되 내가 무르리라.”—룻 4:1-4.
14. “아무게”는 기업 무를 자가 되는 도전에 대해 어떻게 합니까?
14 그렇습니다. “아무게”는 그 재산을 사고 싶어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베들레헴’에서의 자기 소유지가 늘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노파 ‘나오미’로 말한다면 그는 생산력이 없을만큼 되었으니 그 여자에게서 아이를 낳을 염려도 없고 그 아이에게 재산이 돌아갈 염려도 없읍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이미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 외에도 ‘나오미’의 재산까지도 온통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자 “‘보아스’가 가로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야 할찌니라” 아, 그렇게 되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그렇게 되면 책임이 너무 무거워지며,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이 예기치 않았던 도전에 직면하자 기업 무를 자는 ‘보아스’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나의 무를 권리를 네가 취하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그러므로 그는 합의의 증거로 자기의 신을 벗어 ‘보아스’에게 넘겨 줍니다.—룻 4:5-8.
15. ‘보아스’는 어떠한 행동을 취합니까?
15 “아무게”는 도전을 받아 들이는 데 실패하였읍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그 마련을 받아들이며, 기쁘게 그렇게 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더 가까운 그 친척과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엘리멜렉’과 ‘기론’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날 증인이 되었고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취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있게 하여 그 이름이 그 형제 중과 그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않게 함에 너희가 오늘날 증인이 되었느니라.” 이처럼 ‘보아스’는 형제에 대한 책임 문제에 있어서 여호와의 목적을 수행하였지만, “아무게”는 성문에 있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합니다.—룻 4:9-12.
16. “아무게”는 현대의 누구에 해당합니까?
16 그러나, “아무게”가 현대에 와서는 누구에 해당합니까? 그리고 이 도전은 약 30세기가 지난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아무게”는 한 동안 ‘보아스’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오늘날 지구상에서, ‘나오미’ 반열과 ‘룻’ 반열이 함께 영적으로 약혼한 신랑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반열을 나타냅니다. ‘나오미’의 시동생이며, ‘엘리멜렉’을 대신해서 씨를 낳을 수도 있었던 이 “아무게”는, 자기의 의무를 수행하지 못한 거짓 그리스도 곧 거짓 예언자를 상징합니다. 그에 대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때에]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즉 ‘나오미’ 반열과 ‘룻’ 반열]도 미혹하게 하리라.”고 경고하셨읍니다. (마태 24:24) 오늘날의 거짓 그리스도 반열이 그렇게 하고 있읍니다. 바로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약혼한 회중 곧 남은 자를 장악하려고 하며, 이들의 후원과 지지를 받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오미’ 반열과 ‘룻’ 반열을 왕국 권익 면에 있어서 열매를 맺도록 해 주는 책임은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귀찮은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일은 자기네 이기적인 일에 너무 손해를 끼치는 일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왕국에는 관심이 없읍니다. 그들은 국제 연맹을 더 좋아하였으며, 지금은 현재 존재하는 국제 연합을 더 좋아합니다. 그들은 왕 예수 그리스도 곧 ‘실로’의 왕족 계통과 인연을 맺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정신 태도와 행동은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의 행동과 일치합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봉사의 도전을 받아들이는 일에 실패하였으며, 하나님의 목적을 그들의 생활 방식으로 삼는데 실패하였읍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그러한 자들로부터 멀리하라고 경고하셨읍니다.—디모데 후 3:5; 계시 18:4.
여호와의 뜻을 받아들여 축복을 받다
17. ‘보아스’와 ‘룻’은 자기들 앞에 제시된 도전을 받아들임으로써 어떤 축복을 받았으며, ‘나오미’의 관심사는 어떻게 거기에 연결되었읍니까?
17 반면에, ‘보아스’는 약속대로 ‘룻’을 상속 결혼상의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룻 4:13-15) 그들의 결혼으로 왕 혹은 ‘실로’가 탄생된 것은 아니었읍니다. ‘이스라엘’ 왕국의 때는 아직 이르지 않았읍니다. 그러나 그들이 낳은 아들은 ‘다윗’ 왕의 할아버지가 되었읍니다. ‘다윗’은 ‘유다’로부터 11대 손으로 여호와께서는 그와 함께 영원한 왕국에 대한 언약을 맺으셨읍니다. (마태 1:3-6; 사무엘 하 7:12, 13) 그리고 그 가계에서 결국 주 예수 그리스도 곧 ‘다윗’의 영원한 후사가 나왔읍니다. (누가 3:23-31; 20:41-44) ‘룻’의 관심사와 ‘나오미’의 관심사는 모두 상호 연결되어 있읍니다. ‘룻’이 어머니이지만, ‘나오미’는 그 아기를 받아들여 양모처럼 대하였으며, 그 아기가 자기의 죽은 남편 ‘엘리멜렉’의 아들처럼 그리고 ‘엘리멜렉’의 유산을 이을 아들처럼 대하였읍니다. 따라서 이웃 사람들은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하여 그 이름을 ‘오벳’(“종” 혹은 “섬기는 자”라는 뜻)이라 하였”읍니다. (룻 4:16, 17) 이처럼 ‘보아스’와 ‘룻’은 여호와의 목적을 가슴깊이 받아들여 그들 앞에 나타난 도전을 받아들였으며,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데 자기의 생애를 바쳤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축복하시어 약속된 ‘실로’의 조상을 낳도록 해 주셨읍니다. 그 ‘실로’의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며] ···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세 49:10.
18. 오늘날 남은 자의 ‘나오미’ 반열과 ‘룻’ 반열은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은 무엇을 형성합니까?
18 이제 결국 우리 시대에 와서 영적 남은 자의 ‘나오미’ 반열과 ‘룻’ 반열은 ‘야곱’의 예언에 나오는 ‘실로’ 곧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대열에 서 있읍니다. 그러나 ‘보아스’와 ‘룻’이 왕을 낳지 않은 것과 같이 이들도 하나님의 메시야 왕국의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을 낳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섬길 반열을 낳기는 합니다. ‘베들레헴’에서 ‘룻’이 낳은 아들이 “섬기는 자” 혹은 “종”이라는 뜻을 가진 ‘오벳’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운 바와 같이, 현대의 ‘룻’ 반열과 ‘나오미’ 반열은 마태 24장에 기록된 예수의 예언에서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 반열로 묘사된 반열을 형성합니다. ‘룻’이 나이 많은 ‘나오미’에 대하여 끊을 수 없는 사랑을 가지고 있었고, ‘나오미’에 대하여 ‘일곱 아들보다 더 나은’ 것처럼, 오늘날의 영적 남은 자의 두 반열, 곧 ‘나오미’ 반열과 ‘룻’ 반열도 서로 열렬하게 사랑합니다. 죽음 이외에는 그들의 사이를 아무 것도 끊을 수 없읍니다.
열정과 충성의 때
19. 이 제도의 마지막 때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오미’와 ‘룻’은 비이기적인 사랑에 대한 어떠한 본이 됩니까?
19 재미 있으면서도 감동적인 성서 「룻기」에서는 열정과 충성면에 있어서 훌륭한 교훈이 들어 있읍니다. 그리고 현 악한 사물의 제도의 마지막 때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현대적 ‘나오미’ 반열과 ‘룻’ 반열은 훌륭한 본을 보여 주고 있읍니다. 지금은 자기 결정에 따른 행동을 하거나 이기적인 관심사나 직업 때문에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동할 때가 아닙니다. 또한 지금은 이 사물의 제도의 극한점에 다가가고 있으니만큼 하나님의 목적에 대하여 무관심할 때도 아닙니다. ‘나오미’는 분명히 자기가 ‘실로’의 계통에 사용될지의 여부를 자기로서는 알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읍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가능케 하는 일에 자기의 전 생애를 기꺼이 바쳤읍니다. 그리고 ‘룻’은 젊은 여자의 몸이니만큼, 자기가 원한다면 부자 청년과도 결혼할 수 있었고, 자기가 사랑하기만 한다면 가난한 청년과도 결혼할 수 있었지만, 자기의 아들이 ‘나오미’의 아들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나이 많은 남자와 기꺼이 결혼하였읍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은 그들이 여호와를 사랑하였으며, 여호와의 목적을 성취하는 데 참여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비이기적인 사랑에 대한 얼마나 훌륭한 본입니까! 그러나 ‘나오미’나 ‘룻’은 그 당시 자기 이웃 사람들 간에는 단순히 “보통” 사람으로 간주되었을 것입니다.
20. ‘바울’은 무슨 경고를 하였으며,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여호와의 축복의 보상을 받을 수 있읍니까?
20 오늘날 우리는 “마지막 때” 곧 이러한 모든 예언이 웅대하게 성취되고 있는 때에 살고 있읍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하였읍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고로 이 후부터 ···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고린도 전 7:29-31) 만일 우리가 이 제도의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생활상의 염려에 우리의 시간을 다 뺏겨버린다면,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이 세상은 급격히 사라지고 있으며, 얼마 안가서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없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충격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메시야 왕국의 축복은 얼마 안되어 온 땅에 넘칠 것이며, 현 악한 사물의 제도에서 살 수 있는 기간은 조금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할 일이 대단히 많습니다. 설사 우리가 이 사물의 제도가 제공하는 모든 것을 포기하여, ‘바울’의 말대로 ‘세상 물건을 쓰기를 다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한다 하더라도 이러한 행동이 ‘룻’의 행동이나 그리고 여호와의 목적을 수행하는 일에 이미 여러 해를 바친 ‘룻’ 반열의 행동과 비교나 되겠읍니까?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름 부음을 받은 남은 자의 ‘나오미’ 반열과 ‘룻’ 반열을 축복하시어 왕국의 열매를 맺게 해 주신 바와 같이, 현재에도 여호와의 봉사라는 도전을 온전하게 받아들이고 여호와의 목적을 자기의 생활 방식으로 삼는 자들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인간이 받을 보상으로 그보다 더 큰 보상이 어디 있겠읍니까!
[234면 삽화]
‘룻’은 비이기적으로 아기를 ‘나오미’에게 바쳤으며, ‘나오미’는 마치 자기 아들처럼 받아들였다. 그 아기는 메시야의 조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