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온전한 상”을 주시다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룻 2:12.
1-3. (ㄱ) ‘나오미’와 ‘룻’의 대화는 사랑을 가진 가족의 대화에 대하여 무엇을 알려 줍니까? (ㄴ) ‘룻’이 ‘나오미’에게 그 날의 이삭주운 일에 관하여 말하였을 때 어떠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누구의 인도가 있음이 명백합니까?
‘여호와께서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연로한 ‘보아스’는 ‘모압’ 여자 ‘룻’에게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이 훌륭한 젊은 여자가 복을 받기를 진정으로 원하였읍니다. (룻 2:12) 그러나 그러한 희망이 실현될 것입니까? 그렇다면 어떠한 방법으로 그렇게 될 것입니까? 살펴봅시다.
2 사랑이 있는 가정이라면 연로한 사람들이 젊은이들의 활동에 관심을 가집니다. 모두가 생각을 이야기하고 그 날의 활동에 관해 말하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나오미’와 ‘룻’이 저녁 시간에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있는 ‘베들레헴’의 초라한 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들어 보십시오!
3 “오늘 어디서 주었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룻’이 집으로 가져온 많은 곡식과 음식을 보고 ‘나오미’는 그렇게 묻습니다. 어떤 사람이 ‘모압’ 여인에게 특별한 배려를 나타냈음이 분명합니다. 이 연로한 여자는 “너를 돌아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제 이 두 여인은 각각 놀라운 격려적인 사실을 알게 됩니다. ‘룻’은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확실히 하나님의 인도가 있읍니다. ‘나오미’는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그가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이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중 하나이니라.”—룻 2:19, 20.
4. 고대 ‘이스라엘’의 “기업무를 자”에 대하여 설명하십시오.
4 그들은 많은 격려를 받습니다! 이 여인들은 기업무를 자(‘히브리’어 ‘고엘’)는 가장 가까운 친척에 속한, 재산 혹은 유산을 회복하거나, 대속하거나, 다시 살 권리가 있는 남자 친척(형제, 혹은 다른 남자 혈족)임을 알고 있읍니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은 상속 토지가 공개 시장에 이르기 전에 그것을 살 수 있고 그리하여 그것을 그 가정의 소유로 계속 둘 수 있읍니다. 잠간 생각해 보십시오! ‘룻’은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이르게 되었으며 그는 기업무를 자, ‘엘리멜렉’의 집안의 한 남자입니다.
5. ‘야곱’의 딸 ‘디나’와는 달리 ‘룻’은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에 있어서 어떠한 본이 됩니까?
5 더우기 ‘보아스’는 전체 수확을 마칠 때까지 ‘룻’이 자기의 젊은 일꾼들을 가까이 따라 다니기를 원합니다. 물론 ‘나오미’는 다음과 같은 말로 그것을 승인합니다. “내 딸아 너는 그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 그리하여 ‘모압’ 여인은 보리와 밀 수확이 다 끝나기까지 약 두 세달동안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줍는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 ‘가나안’ 처녀들과 교제하여 재난을 당하고 자기 가족에게 고통을 초래한 ‘야곱’의 딸 ‘디나’와는 달리 ‘룻’은 자기 시어머니와 계속 함께 살면서 자기 교제에 대하여도 조심합니다. 참으로 훌륭한 본입니다!—룻 2:22, 23; 창세 34:1-31; 고린도 전 15:33.
겸손하게 행동하다
6. ‘나오미’는 비이기적으로 ‘룻’이 좋은 것을 즐기기 원함을 어떻게 알립니까?
6 여러 주일이 지나고 추수는 끝나갑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로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룻 3:1) 그 연로한 과부는 이기적으로 그 젊은 며느리인 ‘모압’ 여자를 자기에게 붙잡아 두려고 하지 않고, ‘룻’이 훌륭하고 인자한 남편을 만나 안식, 평안, 안정된 마음과 안전 등을 얻기를 원합니다. ‘나오미’는 자기 남편 ‘엘리멜렉’의 이름을 ‘이스라엘’에서 보존하는 데도 관심이 있읍니다. (신명 25:7) 그와 관련하여 ‘나오미’는 특별한 행동 계획을 밝히며, 그의 겸손한 자부는 기꺼이 그 말에 따릅니다. 그리하여 ‘룻’은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자기 외투 즉 겉옷을 입고 자기의 고상한 임무를 위하여 갑니다.
7. 보리를 까부르는 데 ‘보아스’는 어떠한 과정을 따릅니까?
7 한편—부유하면서도 열심히 일하는 일꾼인—‘보아스’는 저녁 미풍을 이용하여 타작 마당에서 보리를 까불었읍니다. 도리깨질을 하면 곡식알이 껍질에서 분리되고, 줄기는 부서집니다. 이제 이것을 커다란 쇠스랑이나 까부르는 삽으로 바람을 향하여 공중에 날립니다. 미풍은 껍질을 멀리 불려 보내고 줄기는 옆으로 날려가며 곡식알은 타작 마당에 떨어지게 합니다. 이 때는 행복한 시간이며 따라서 이러한 작업을 한 후에는 즐거운 식사가 뒤따릅니다. ‘보아스’는 먹고 마셨으며 과도하게 음식을 먹었다는 암시는 없으나 그의 마음이 ‘즐겁’습니다. (시 104:15) 이제 그는 “노적가리 곁에” 누워 별이 있는 하늘을 지붕삼아 이내 곤한 잠에 빠집니다.—룻 3:1-7.
8. ‘룻’은 타작 마당에서 ‘보아스’에게 어떻게 하며, 그의 목적은 부도덕한 것입니까?
8 어른거리는 물체가 서서히 그리고 조용히, 보이지 않게 다가갈 때까지도 사방은 고요합니다. 그 어른거리는 것은 한 여자입니다. 그는 잠을 자고 있는 ‘보아스’가 덮은 것을 제치고 그 발치로 가서 옷을 입은 채 눕습니다. 한 밤중에 ‘보아스’는 한기를 느껴 몸을 앞으로 돌이키는데 그의 발치에 가로누어 있는 여인을 보고 놀랍니다! 어두움 가운데서 그 여자를 알아 보지 못하고 “네가 누구뇨?” 하고 묻자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니이다’라는 대답을 듣게 됩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재빨리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하고 덧붙입니다. (레위 25:25) ‘보아스’는 놀라기는 하였지만 당황하지도 노하지도 않습니다. 그 ‘모압’ 여인도 어떤 부도덕한 목적 때문에 온 것이 아닙니다. 겸손하게도 이러한 상징적인 행동과 말로 그는 ‘나오미’의 지시를 따른 것입니다. ‘룻’은 연로한 ‘유다’인에게 기업무를 자, 작고한 자기 남편 ‘말론’과 그의 아버지 ‘엘리멜렉’의 친척 남자로서의 그의 의무를 일깨워 준 것입니다. ‘나오미’는 이러한 모험이 성공적일 것임을 확신하였으며 그 젊은 여자는 ‘보아스’가 자기를 영예로운 방법으로 대할 것을 확신하였음이 분명합니다. (룻 3:4, 7-9) 그러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 것입니까?
9. (ㄱ) ‘룻’은 ‘보아스’가 “처음”과 “나중”이라고 부른 때에 각각 사랑의 친절을 어떻게 나타냈읍니까? (ㄴ) ‘룻’은 부와 머리 ‘스타일’과 값비싼 옷 때문에 “정숙한 여자”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입니까?
9 ‘보아스’는 다음과 같은 말로 그 겸손하고 충실한 ‘모압’ 여자를 축복하고 칭찬합니다.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처음에 ‘룻’은 ‘나오미’에 대한 충성스러운 사랑을 나타냈읍니다. 이제 그 ‘모압’ 여자는 결혼할 수 있는 젊은이와 교제하려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죽은 남편 ‘말론’과 ‘엘리멜렉’의 나이든 과부인 자기 시어머니의 이름을 위하여 훨씬 더 나이든 사람과 기꺼이 결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그것을 어떻게 느낍니까? 그는 확신있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 딸아 두려워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룻’은 자기의 덕성을 요란하게 광고하지 않았읍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칭찬하게 된 것은 돈이나, 머리 ‘스타일’, 값비싼 옷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일, 선한 행실, 조용하고 온유한 영, 충성스러운 사랑, 근면성 등 그 젊은 여자의 행동과 특성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현숙한 여자”라고 보게 된 것입니다. 경건한 여자로서 그런 훌륭한 평판을 원치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읍니까?—룻 3:10, 11; 잠언 31:28-31; 디모데 전 2:9, 10; 베드로 전 3:3, 4 비교.
10. ‘룻’은 왜 즉시 ‘보아스’의 아내가 되지 않을 것입니까?
10 ‘보아스’는 즉시 ‘룻’을 자기 아내로 맞을 것입니까? 아닙니다. ‘엘리멜렉’과 ‘말론’의 더 가까운 남자 친척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아스’는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면서 “만일 그가 기업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코자 아니하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행하리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보아스’는 그 문제를 아침에 처리할 것입니다.—룻 3:13.
11. 무엇 때문에 ‘보아스’는 ‘룻’에게 보리를 여섯번 되어 줍니까?
11 시간이 늦었으므로 ‘보아스’는 ‘룻’에게 이른 아침까지 거기에 그냥 있게 합니다. 그러나 부도덕한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직 어두울 때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근거없는 좋지 않은 소문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모압’ 여자가 떠나기 전에 ‘보아스’는 ‘룻’의 겉옷에 보리를 여섯번 되어 넣어 줍니다. 아마 엿새 동안 일하고 하루의 안식일이 뒤따르는 것처럼 자기가 그에게 “안식할 곳”, 남편있는 가정을 가지도록 처리할 것이기 때문에 그 여자의 안식할 날이 가까옴을 의미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룻 1:9; 3:1) 관대한 ‘보아스’는 ‘룻’이 빈 손으로 자기 시어머니에게 돌아가는 것도 원하지 않음은 물론입니다.
12. 왜 ‘나오미’는 “내 딸아 너는 누구냐?” 하고 묻습니까?
12 그 ‘모압’ 여인은 결국 집에 도착하고 ‘나오미’는 “내 딸아 너는 누구냐?”라고 큰 소리로 묻습니다. 아마 ‘나오미’는 어둡기 때문에 들어오려는 사람을 알아 보지 못할 수도 있읍니다. 반면에 이 질문은 ‘룻’이 그의 기업무를 자와의 관계에서 생길 수 있는 새로운 신분과 관련될 수도 있읍니다. 지난 밤에 일어난 사건의 자초지종을 듣고 ‘나오미’는 ‘보아스’가 그의 말을 지키고 신속히 행동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습니다. ‘나오미’는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되는 것을 알기까지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권고하고 여성다운 지혜와 인간 본래의 이해력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부언합니다. “그 사람이 오늘날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룻 3:12-18. 난외주 참조.
13. 우리는 ‘나오미’와 ‘룻’의 믿음을 고려함으로써 어떤 유익을 얻습니까?
13 그 궁핍한 두 과부가 초라한 거처에서 참을성을 가지고 기회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그들의 믿음을 고려해 보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우리는 ‘나오미’처럼 우리의 충실한 동료 신자들을 개인적으로 신뢰합니까? 그리고 ‘룻’과 같이 우리는 위기에 처하였을 때 여호와의 마련이 최선책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선뜻 그분을 의뢰합니까? (시 37:3-5; 138:8) ‘룻’에 관하여 생각해 보십시오. ‘룻’은 첫 번째 권리를 가진 남자 친척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는 그 사람의 기질에 관하여 전혀 아는 것이 없었지만 사망한 형제의 아내와의 결혼에 관한 여호와의 법에 기꺼이 순응하고자 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물을 올바로 처리하실 것을 확신합니다. 비교적으로 우리는 여호와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 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을 개인적으로 확신합니까?—로마 8:28; 베드로 전 5:6, 7.
‘보아스’는 단호한 행동을 취하다
14, 15. (ㄱ) ‘보아스’보다 누가 ‘엘리멜렉’과 더 가까운 기업무를 자입니까? (ㄴ) 가난한 상태 때문에 ‘나오미’는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될 것으로 보이며, 그러므로 더 가까운 친척이나 ‘보아스’에 의해서 어떠한 일이 행해져야 합니까?
14 ‘베들레헴’에 새날이 밝아옵니다. 사람들은 거리를 돌아다니고, 상인들은 상품을 선전하고, 작은 무리들이 성문 앞 광장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으며, 농부들은 그 성읍 주위 밭에서 일하려고 떠납니다. 그리고 이곳 성문 앞에는 ‘보아스’가 자리를 잡고 있읍니다. 그의 눈은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봅니다. 갑자기 그는 큰 소리로 “아무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고 소리칩니다. (룻 4:1) 자, 이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사람이 ‘보아스’보다 더 ‘엘리멜렉’과 가까운 바로 그 기업무를 자입니다. 그는 아마 죽은 ‘엘리멜렉’의 친형제이었을지도 모릅니다.
15 그 성문은 사업 거래가 기록되고 장로들이 심판을 위해 앉아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보아스’는 기업을 무르고 사망한 형제의 아내와의 결혼 문제와 관련하여 그곳에 없는 ‘나오미’와 ‘룻’을 대표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는 바로 성문으로 ‘베들레헴’의 장로 열명을 청합니다. (신명 16:18; 22:15; 25:7, 8) 그리고 나서 ‘보아스’는 더 가까운 그 기업무를 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오미’가 우리 형제[혹은 친척]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관할”하는 데 그의 가난한 상태 때문에 그것을 팔아야 하므로 “그것을 사라”고 말합니다. (룻 4:3) 가난에 쪼들린 ‘이스라엘’인이 자기 가족의 토지를 팔아야 한다면 기업무를 자가 희년까지 남아 있는 햇수를 근거로 하여 값을 지불함으로써 그것을 살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렇게 했을 때 그 상속 토지는 원주인에게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레위 25:23-28) 더 가까운 친척을 무시하고 그 땅을 비밀리에 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존경받을 만한 ‘보아스’는 정당하게 그 사실을 공공연히 제시합니다. 더 가까운 친척이 그것을 산다면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보아스’가 그렇게 할 것입니다.
16, 17.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은 친척이 ‘나오미’로부터 그 땅을 사기를 원한다면 그는 어떤 일도 하지 않으면 안됩니까? 그에 대한 그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16 이 더 가까운 친척은 “내가 무르리라”고 대답합니다. 그는 그 땅을 사서 자기 재산을 늘리려는 것을 기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보아스’의 다음 말을 듣고 놀랍니다.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엘리멜렉’의 아들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야 할찌니라.” (룻 4:4, 5) 이 친척이 그 땅을 원한다면 그는 ‘룻’과 결혼해야 하고 그의 친척 남자를 위해 자손—그 땅을 상속할 아들—을 생산해야 할 것입니다.
17 그렇게 되면 문제는 전혀 달라지게 됩니다.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그 가까운 친척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나의 무를 권리를 네가 취하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룻 4:6) 이 친척 남자는 어떻게 “기업에 손해가 있”을 것인지는 말하지 않고 있읍니다. 그러나 그가 그 땅을 위해 돈을 사용하면 그만큼 그 재산이 줄어들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까운 친척에게 이미 있는 다른 자녀들이 아니라 ‘룻’의 아들이 그 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일은 이기적인 아무에게는 결코 적당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보아스’여, 네가 그것을 사라’고 말합니다.
18, 19. 이 더 가까운 친척은 이 경우에 기업무를 자로서의 그의 권리를 어떠한 행동으로 포기하며, ‘보아스’는 어떻게 합니까?
18 그리고 나서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그 친척은 기업 무를 권리와 그 양도와 관련된 널리 시행되던 습관을 따릅니다. 그는 자기 신 하나를 벗어 ‘보아스’에게 줍니다. 증인들 앞에서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이 경우에 있어서의 자기의 기업 무를 권리를 포기합니다. 그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것은 분명히 그의 이기적 행로 때문입니다. 이제 ‘보아스’는 기업 무를 권한을 가지고 있읍니다.—룻 4:7, 8; 신명 25:7-10.
19 지체하지 않고 ‘보아스’는 ‘나오미’로부터 ‘엘리멜렉’ 및 그의 아들 ‘기론’과 ‘말론’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삽니다. 또한 그는 ‘룻’을 “사서 ··· 아내로 취하고 그 죽은 자[‘말론’]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 그 이름이 그 형제 중과 그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말론’의 이름과 결국 그의 아버지 ‘엘리멜렉’의 이름은 후에 ‘베들레헴’의 성문에 모인 사람들과 장로들에 의하여 기억될 것입니다. ‘보아스’는 “너희가 오늘날 증인이 되었느니라”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들과 연로자들은 “우리가 증인이 되”노라고 큰 소리로 증언합니다.—룻 4:9-11.
여호와께서 ‘룻’에게 “온전한 상”을 주시다
20. 증인들은 ‘보아스’의 집으로 들어오는 아내에게 여호와께서 어떻게 하시기를 원하며, 그들은 장차 ‘룻’을 통해 나올 아들에 대하여 누구에게 영예를 돌립니까?
20 다음과 같은 증언이 부가되는 것은 감동적입니다.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그들의 후손이 많게 되었기 때문에] 너로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케 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이 소년 여자로 네게 후사를 주사 네 집으로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사람이 많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룻 4:11, 12) 그렇습니다! 그러한 증인들은 충실한 ‘모압’ 여인 ‘룻’을 통하여 나올 아들에 대하여 이미 여호와께 영예를 돌리고 있읍니다.
21, 22. 왜 이웃 여자들은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고 말합니까?
21 그리하여 ‘보아스’는 ‘룻’을 자기 아내로 취하여 그와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여호와께서는 ‘룻’에게 임신하게 하시고 ‘룻’은 아들을 낳습니다.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즐거워하는 할머니 ‘나오미’에게 ‘베들레헴’의 여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찬송할찌로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친] 아들보다 귀한 자부가 낳은 자로다.” 즐거워하는 ‘나오미’는 그 아이를 자기 품에 안고 그를 돌보는 자 혹은 살피는 자가 됩니다.—룻 4:13-16.
22 이웃 여자들은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그 아이를 ‘엘리멜렉’과 그의 과부의 아들로서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겠읍니까? ‘룻’은 연로한 ‘나오미’를 대신하여 사망한 형제의 아내와의 결혼의 법과 일치하게 ‘보아스’의 아내가 된 것입니다. ‘보아스’와 ‘룻’은 여호와께 대한 봉사를 하였으며, 이웃 여자들이 그 아이를 “종” 혹은 “섬기는 자”를 의미하는 ‘오벳’이라고 부른 것은 유의할 만합니다. 그 어린 아이는 ‘유다’ 지파인 ‘엘리멜렉’의 법적 상속자입니다.—룻 4:17.
23. ‘보아스’는 자기가 ‘룻’에게 바라는 축복을 내리는 데 어떻게 도구가 되었읍니까?
23 ‘보아스’가 ‘룻’에게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 여호와께서 ···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한지도 몇달이 지났읍니다. (룻 2:12) 이제 ‘보아스’는 ‘오벳’의 아버지가 됨으로써 그 젊은 ‘모압’ 여자에게 바라던 축복을 내리는 도구가 되었읍니다. ‘베레스’, ‘헤스론’, ‘람’, ‘암미나답’, ‘나손’, ‘살몬’, ‘보아스’를 통한 ‘유다’의 후손인 ‘오벳’은 후에 ‘이스라엘’의 둘째 왕 ‘다윗’의 아버지가 될 ‘이새’라는 아들을 낳게 될 것입니다.—룻 4:18-22.
24. (ㄱ) 방금 고려한 ‘드라마’는 어떠한 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인도가 있음을 증명합니까? (ㄴ)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룻’에게 주신 “온전한 상”은 무엇이었읍니까?
24 이 실제 ‘드라마’는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가장 중요한 인간 후손 계통의 보존을 위해서 개인들을 선택하는 데 하나님의 인도가 있음을 명백히 알려 줍니다. ‘유다’ 지파의 남자들과 결혼한 ‘이스라엘’ 여자들은 메시야의 지적 계통에 기여할 전망을 가질 수 있었음은 사실입니다. (창세 49:10) 그러나 한 ‘모압’ 여인이 큰 특권을 받았다는 사실은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는 원칙을 잘 예시해 줍니다. (로마 9:16) ‘룻’은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택했으며, 그분은 커다란 자비로써 그 겸손한 여인이 메시야의 조상이 되게 허락하심으로써 “온전한 상”을 주셨읍니다.—마태 1:3-6, 16; 누가 3:23, 31-33.
25. 하나님께서 ‘룻’에게 주신 “온전한 상”을 고려할 때 우리가 어떠한 영향을 받아야 합니까?
25 하나님께서 충실한 ‘룻’에게 주신 “온전한 상”은 확실히 생각있는 사람들이 여호와의 존재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확인하며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그분에게 가까이 나아가도록 움직여야 함이 분명합니다. (히브리 11:6) 그렇습니다. 「룻기」는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충성을 바치는 사람들을 위하여 행동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알려 줍니다. 더우기 그것은 하나님의 목적은 결코 실패하지 않음을 증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 ‘다윗’과 동일한 영을 가질 수 있고,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너의 승리로 인하여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기를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 바 기름부음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 오른손에 구원하는 힘으로 그 거룩한 하늘에서 저에게 응락하시리로다.”—시 20:5, 6.
[15면 삽화]
‘보아스’는 “네가 누구뇨?”라고 묻는다.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