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회개—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1. (ㄱ)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는 누구에게 죄를 고백해야 하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여호와 하나님께 지은 죄가 왜 회중에 대한 죄도 될 수 있읍니까?
장로들은 회중 성원들이 범하였을지 모르는 모든 죄를 용서하도록 권한을 받은 ‘고해 신부’가 아닙니다. 회개하는 자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그분은 자기 아들의 속죄 희생을 근거로 죄를 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어떤 사람을 용서하시는 것은 그가 자기의 죄를 장로들에게 고백하는 데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 1서 1:8, 9; 2:1, 2) 그러나 어떤 사람이 심각한 범법 행위로써 회중에 대해서도 죄를 지을 수 있읍니다. 심각한 범죄 때문에 그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속한 회중이 많은 수치와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회중을 대표하는 장로들은, 회중을 나쁜 평판의 대상이 되게 한 범법자를 용서하기 전에 그가 진정으로 회개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2. (ㄱ) 우리는 고린도 후 2:7에서 회중이 죄를 용서하는 점에 관하여 어떠한 점을 알게 됩니까? (ㄴ) 그 회중은 어떠한 점에서 회개한 ‘고린도’인을 용서하였읍니까?
2 어떤 경우에 회중이 용서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다는 점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제명당하였으나 회개한 사람을 그들 중에 받아들이라고 말한 점을 볼 때 명백합니다. 그는 “저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라고 기록하였읍니다. (고린도 후 2:7) 그 사도는, ‘많은 사람에게서 받은 꾸지람’이 그로 하여금 회개에 이르게 하려는 목적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를 용서하라고 권고하였읍니다. (고린도 후 2:6) 그 사람이 성실하게 회개하였고 여호와의 의로운 요구 조건에 일치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생활을 바로 잡았기 때문에 회중이 그를 다시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하였읍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자기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구하였으며 이제 회중도 역시, 그의 죄에 대한 “사면”을 베푼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의 잘못 때문에 회중이 당한 고통, 수치, 슬픔 등에 대하여 용서한다는 의미로 그를 용서하였읍니다.
3.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책망하였다고 주장할 때 장로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3 어떤 경우에는 죄가 드러났을 때 그 사람의 범죄 기록이 아주 수치스러운 것일지 모릅니다. 그는 몇달 동안 혹은 몇년 동안에 걸쳐 세상에서도 악하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자행해 왔을지 모릅니다. 후에 그가 장로들에게 와서 최근에 자기의 잘못을 중단하였으며 하나님께 기도로 용서를 구했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책망하였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혹은 그의 수치스러운 행실에 관한 증거가 제시되자, 그는 장로들에게 자기는 스스로 자신을 책망했기 때문에 그 문제와 관련하여 장로들을 찾아 올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장로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장로들은 그 사람에게 어떠한 영적 도움이 필요하며 그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의 진정한 감정, 동기, 필요로 하는 것들을 확실히 알기 위하여 그와 한번만이 아니라 더 많이 토론해야 할지 모릅니다.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이라면 장로들의 그러한 인자한 도움을 환영하고 겸손하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세상적인 슬픔인가, 진정한 회개인가?
4. 크게 슬퍼하는 것이 어떤 경우에나 참다운 회개의 증거입니까? 설명하십시오.
4 물론 범죄자는 자기의 죄의 행로와 관련하여 슬픔과 후회와 유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 사람의 감정적인 기질에 따라 이러한 느낌에 눈물이 수반될 수도 있고 수반되지 않을 수도 있읍니다. 그러나 장로들은 모든 슬픔, 후회 혹은 유감이 반드시 진정한 회개의 증거는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읍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슬픔, 신세]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고린도 후 7:10) 그러므로, 장로들은 어떠한 동기에서 그 범죄자가 슬픔을 나타내는지 알기 위해서 분별력을 사용해야 합니다.
5. 세상적인 슬픔의 동기는 무엇이며, 그것이 진정한 회개가 아닌 이유는 무엇입니까?
5 세상적인 슬픔은 단순히 개인적인 실패감 및 그에 수반되는 실망, 혹은 다른 사람들의 존경심 혹은 어떤 이권을 상실한 데 대한 염려, 혹은 징계나 수치를 당하리라는 예상에서 비롯될 수 있읍니다. 그러한 슬픔은 범죄로 인한 바람직하지 못하고 유해한 결과에 대한 혹은 범죄가 드러났다는 사실에 대한 슬픔인 것입니다. 그 자체는 정상적인 것이지만 이러한 감정이 슬퍼하는 유일한 이유라면 그 사람은 죄를 지은 것을 진정으로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폭로되었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는 그의 범법 행위 때문에 하나님께서 수치를 당하신 데 대하여는 사실상 염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6. ‘이삭’이 ‘야곱’을 축복한 것과 관련하여 ‘에서’가 감정을 억제하지 못한 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니었음을 어떠한 사실이 알려 줍니까?
6 ‘에서’의 경우에서 그러한 점이 잘 나타나 있읍니다. 그는 한끼의 식사를 위해 ‘야곱’에게 자기의 장자권을 팔았읍니다. 여러 해 후 ‘야곱’이 장자에게 돌아갈 축복을 받았을 때 ‘에서’는 감정적인 슬픔을 억제하지 못했읍니다. 그는 ‘야곱’을 축복하는 데 대한 아버지 ‘이삭’의 의도를 변경시키려고 “방성대곡” 하였읍니다. ‘에서’는 자신이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긴 비영적인 태도를 유감스럽게 여긴 것이 아니었읍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행로로 이권을 상실한 것에 대하여 유감스럽게 생각한 것입니다.—창세 25:29-34; 27:34; 히브리 12:16, 17.
7, 8. ‘사울’ 왕이 죄를 시인한 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니었음을 어떠한 점이 알려 줍니까?
7 ‘사울’ 왕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읍니다. ‘사울’은 예언자 ‘사무엘’로부터 그가 ‘아말렉’인들을 완전히 멸망시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였다는 말을 들었을 때 자신은 여호와의 말씀을 수행하였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하였읍니다. 그 때 ‘사무엘’은 분명한 말로 ‘사울’ 왕의 잘못을 지적하고 다음과 같이 부언하였읍니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이 말을 들은 ‘사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읍니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청하오니 지금 내 죄를 사하고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사무엘 상 15:17-25) 그러나 이처럼 죄를 시인하였다고 해서 그가 참다운 회개를 나타낸 것은 아니었읍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8 ‘사울’은 백성이 두려워서 그렇게 하였다고 핑계를 대려고 함으로써 계속 자신의 죄를 극소화하였읍니다. 그는 자신이 여호와께 죄를 지었음을 진심에서 인정한 것이 아니었읍니다. 그는 자신이 왕으로서 배척당하고 공개적인 수치를 당한 것을 두려워하여 그러한 말을 하였음이 분명합니다. 그 점은 ‘사울’이 ‘사무엘’에게 자기와 함께 돌아가자고 호소한 점에서 분명히 알 수 있읍니다. 어떻게 그러합니까? ‘사울’은 단순히 자신을 위해 중재의 기도를 해 달라는 의미에서 ‘사무엘’에게 같이 가도록 호소한 것이 아니었읍니다. ‘사무엘’이 굳이 떠나려고 하자 ‘사울’은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읍니다. “내 백성의 장로들의 앞과 ‘이스라엘’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소서].” (사무엘 상 15:30) 이와 같이 ‘사울’은 그가 다른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보일 것인가에 관심이 있었읍니다. 그는 ‘사무엘’이 함께 가지 않음으로써 면목을 잃는 것보다 ‘사무엘’이 함께 함으로써 위신을 세워 주기를 원하였읍니다. 그러므로 ‘사울’이 죄지었음을 인정한 것은 단지 말뿐이었읍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불쾌하게 한 데 대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슬퍼하는 것’이 아니었읍니다.
9. 우리는 ‘에서’와 ‘사울’에 관한 성경 기록으로부터 회개와 관련하여 어떤 점을 알게 됩니까?
9 ‘에서’와 ‘사울’ 왕에 관한 성서 기록으로부터 장로들이 어떤 범죄자의 회개 여부를 간파하는 데 도움이 되는 몇가지 중요한 점들을 이해할 수 있읍니다. 참다운 슬픔을 표현할 때 눈물이 수반될 수 있읍니다. 그러나 ‘에서’의 눈물과 같이 감정적인 표현 자체가 회개의 증거는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눈물이 없다고 해서 잘못한 자가 반드시 회개하지 않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점은 그 사람이 그 범죄를 여호와께 대한 범죄로 인정하면서 그에 대하여 깊은 유감을 나타내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가 계속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거나 그에 대해 핑계를 댄다면 그가 회개하였다는 어떠한 주장도 의문시될 것입니다. 그 사람은 잘못된 행로를 매우 미워하고 증오해야 합니다. 심각한 죄를 범한 데 대하여 어느 정도 창피하게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그의 주된 염려는 자기의 잘못으로 인한 불쾌한 결과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의 회중에 수치를 돌린 점에 대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는 지존하신 분과의 관계를 손상시킨 것에 관하여 성실하게 유감을 나타내야 합니다.
참된 회개에는 무엇이 내포되는가?
10. 여호와께 수치를 돌린 데 대하여 슬퍼하는 감정에는 왜 형제들과 동료 인간들에게 해를 끼친 것에 대한 후회도 포함되어야 합니까?
10 여호와께 수치를 돌린 데 대하여 슬퍼하는 것은 자기의 형제들과 동료 인간에게 해를 끼친 데 대한 후회의 느낌과 반드시 별개의 것 혹은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의 형제들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증거, 아니, 그것의 필수 불가결한 일부라고 알려 주고 있읍니다. (요한 1서 3:11, 17; 4:7, 8, 11, 12, 20, 21) 범죄는 항상 해로운 것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게 되면, 다음과 같은 점들을 숙고해 볼 필요가 있읍니다.
11. 우리가 심각한 죄를 저질렀다면 우리는 어떠한 점들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합니까?
11 그러한 죄를 범했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이기적으로, 아니, 탐욕적으로 행동함으로써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 곧 사랑이 많고 의로우신 하나님과 같지 않았다는 점을 인식하기 때문에 마음이 아픕니까? (데살로니가 전 4:3-6) 우리는 진정으로 부도덕과 같은 범죄가 다른 사람들의 참다운 행복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읍니까? 우리는 그들의 영속적인 유익과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서 누릴 생명에 대한 그들의 소망을 위하여 어느 정도로 염려를 나타냈읍니까? 우리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과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우리의 본과 영향력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읍니다. (로마 14:7)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영적인 힘을 침식할 수 있는 나쁜 본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는 데, 급급할 만큼 자기 중심적입니까? (로마 15:2, 3 대조)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하면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습니다. (마태 7:14) 의로운 길에 계속 머물러 있으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하자면, 그러한 좁은 길을 따라 걸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실족케 하거나 적어도 다른 사람들의 발전을 더욱 어렵게 만들 수 있는 걸림돌을 두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까? 그것은 우리의 천적 아버지와는 참으로 거리가 먼 태도일 것입니다! (이사야 40:11) 사도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읍니다. (에베소 4:19-24) 우리가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을 그분들의 훌륭한 특성들 때문에 참으로 사랑하고 찬양한다면, 우리가 배은망덕하게도 그분들과 거리가 먼 행동을 했을 때, 깊은 수치와 슬픔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이와 같은 생각은 참다운 회개와 조화되는 생각입니다.
12. 하나님께서 ‘므낫세’ 왕을 용서하신 후에 ‘므낫세’ 왕이 따른 행로로부터 회개에 관한 어떠한 사실을 알 수 있읍니까?
12 회개에 있어서 또 한 가지 중요한 부면이 ‘유다’ 왕 ‘므낫세’의 경우에 잘 나타나 있읍니다. 그의 죄에 관하여 성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읍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많이 행하여 그 진노를 격발하였[느니라].” (열왕 하 21:6) 결국 ‘므낫세’가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것은 여호와의 심판의 표현이었읍니다. 거기에서 그는 회개하였읍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보고합니다. “저가 ··· 그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 그 열조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비하여 기도한고로 하나님이 그 기도를 받으시며 그 간구를 들으시사 저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거하게 하시[니라].” (역대 하 33:12, 13) 그 후에 ‘므낫세’는 자기의 통치 영역에서 우상 숭배를 몰아내고,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고, 백성이 지존하신 분을 섬기도록 격려함으로써 자기의 잘못을 시정하고자 최선을 다하였읍니다. (역대 하 33:15, 16) 이러한 점을 볼 때, 참다운 회개에는, 잘못된 행로를 버리는 것뿐 아니라, 의를 행하려는 단호한 노력이 포함된다는 점을 잘 알 수 있읍니다.
13. “회개에 합당한 열매”에는 어떠한 것이 포함될 수 있으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13 그러므로 참으로 회개한 사람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지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태 3:8) 여기에는 그 사람이 처한 현재의 환경에서 가능한 한도까지 문제를 시정하기 위하여 이치적으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포함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기가 훔친 물건에 대하여 보상하는 데 관심이 없다면 그가 회개하였다고 공언하더라도 그 말은 실속이 없을 것입니다. 또한 그가 올바른 행로를 따르려는 적극적인 결의를 나타내지 않는다면 그의 회개가 진정한 것인지 매우 의심스러울 것입니다.
14. 어떤 사람의 죄의 기록이 아주 충격적이고 좋지 않은 소문이 퍼진 경우에 그를 제명할 것인가의 여부를 결정짓는 것은 무엇입니까?
14 그러면 어떤 사람의 범죄가 아주 충격적이며 좋지 않은 소문이 널리 퍼진 경우라면, 그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이 경우에도, 범죄자가 회중에서 추방되느냐의 여부는 그가 진정으로 회개하느냐 않느냐 하는 데 달려 있읍니다.
15. 어느 때에 장로들이 제명 처분을 결의하는 것이 합당하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15 성실한 회개의 증거가 없을 경우에는 언제나 장로들은 감정에 이끌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들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의 불법 행위가 회중에 미친 수치와 고통을 사소한 것이라고 단순히 무시하거나 그렇게 생각함으로써 범죄를 묵인할 수는 없읍니다. 그렇게 한다면 전체 회중이 유해한 영향을 받을 수 있읍니다. 회중의 일부 성원들은 자유 분방한 행동을 할 만큼 대담해질지 모르며 다음과 같은 영감받은 충고를 무시하게 될지 모릅니다.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베드로 전 2:16) 또한 범죄자 자신도 죄를 가볍게 생각하여 장래에 자제력을 덜 행사하며 다른 사람들도 불법 행위에 빠지게 할지도 모릅니다. 현명한 ‘솔로몬’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읍니다.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전도 8:11) 그러므로 어떤 범죄자가 진정으로 회개했는지 심히 의심스럽고 부패한 결과의 가능성이 있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다면 장로들은 주저없이 다음과 같은 훈계를 따라야 합니다.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고린도 전 5:13.
장로와 봉사의 종의 범죄
16. 어떤 장로가 심각한 범죄를 저질렀다면 그는 어떻게 해야 하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16 장로들은 그리스도인 회중에서 매우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으므로 확실히 그들의 행실은 모범적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장로가 심각한 죄를 범했다면 그 잘못에 대하여 회개하였을지라도 장로 본인은 이 점에 대해 장로의 회에 알려야 할 도덕적인 의무를 가지고 있읍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제는 비난받을 만한 것이 없는 상태가 아니므로 그가 감독자로서 계속 봉사할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디모데 전 3:2) 심각한 영적 흠을 가진 사람들이 장로로 봉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표준과 일치하지 않을 것입니다.—베드로 전 1:15, 16; 또한, 육체적인 결함이 있을 때 ‘아론’계 남자들로 하여금 제사장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한 레위 21:17-23의 율법 비교.
17. 어떤 장로가 자기는 이제 흠잡힐 일이 없는 상태에 있지 않다고 느낀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7 물론, 회중의 다른 모든 성원들과 같이, 장로들도 때때로 여호와의 형상을 완전히 반영하지는 못할 경우가 있읍니다. 어떤 장로가 자신의 반복되는 잘못 때문에 그가 더 이상 성경적인 요구 조건에 달하고 있지 못하다고 느끼게 되어 이 점을 다른 장로들에게 알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살펴보고 전체적인 회중의 양심을 고려한 후 다른 장로들은 관련된 그러한 종류의 약점이 감독자로서 봉사하는 그 사람의 자격에 의문을 불러 일으키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리게 될지 모릅니다. (갈라디아 2:11-14, 여기에서 우리는 ‘베드로’가 책망을 받았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잘못이 있었지만 그는 장로로 계속 봉사할 자격을 상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장로가 계속 양심적으로 더는 흠잡힐 일이 없는 상태에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다른 장로들은 그의 감정을 존중하여 그의 책임을 면하게 할 것입니다.
18. 장로가 심각한 죄를 범하면 장로들은 어떠한 책임을 져야 합니까?
18 반면에, 어떤 장로에 대한 타당한 고발이 있거나 그가 심각한 죄를 범하였음을 고백한다면 다른 장로들은 그를 장로 지위에서 해임시킬 온전한 책임을 져야 하며, 필요에 따라 그를 책망하고, 적절하다면 제한을 가해야 합니다. 혹은, 회개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면, 제명 처분을 해야 할 것입니다.
19. 심각한 죄를 범한 봉사의 종은 어떻게 해야 하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19 심각한 죄를 범한 봉사의 종들도 장로들의 경우와 같이 그 점에 대하여 장로들에게 알려야 할 도덕적 책임이 있읍니다. “비난 받을 것이 없”는 사람만이 그러한 지위에서 봉사할 자격이 있읍니다. (디모데 전 3:10, 신세) 그러므로, 봉사의 종들과 관련된 범죄의 경우도 장로들이 관련된 경우와 같이 다루어집니다.
20. 진정한 회개의 본은 어떠한 유익을 줄 수 있읍니까?
20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 회중의 모든 성원들에게 그분을 기쁘게 하고 그분의 봉사를 위해서 깨끗함을 유지하는 데 양심적이 되기를 요구하신다면 마찬가지로 장로와 봉사의 종들도 그들의 행실에 대하여 민감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 생활 방식에서 더 경험이 많고 하나님 앞에 더 큰 책임을 지고 있읍니다. 왜냐 하면 그들은 본을 보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12:48; 베드로 전 5:2, 3 비교) 그들이 심각한 잘못을 범할지라도 그 죄에서 돌아서고 장로의 회에 그것을 알림으로써 나타내는 그들의 성실한 회개는 본이 됩니다. 그러한 본은 심각한 범죄로 빠져 들어간 다른 사람들도 동일한 회개하는 행로를 취하도록 돕는 데 기여할 수 있읍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려는 열심, 자신의 죄에 대한 분노, 죄를 바로 잡으려는 노력은 모두의 구원에 이바지할 것입니다. 더우기 그렇게 함으로써 회중 내에서 평화 즉 하나님과의 평화 및 상호간의 평화가 유지될 것입니다.—고린도 후 7:11.
21. 회개는 우리에게 어떠한 건전한 영향을 미칩니까?
21 진정한 회개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실제로 매일 어떤 면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읍니다. 이에 대하여 우리가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사소한 모든 잘못이나 실수 때문에 고민하여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우리가 말과 행실에서 자주 잘못을 범한다는 점을 인식할 때 우리가 계속 겸손을 유지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 대하여 죄를 범하는 경우에 자비를 보여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할 때 그분이 우리의 기도를 기뻐하실 것을 확신할 수 있읍니다. (마태 6:12, 14, 15) 이렇게 하여, 우리는, 계속 그분의 뜻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깨끗한 양심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그분의 깨끗한 종으로 받아 주신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참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여호와의 종들은 영원한 생명의 전망을 가지고 있읍니다.—시 32:1, 2; 103:10-13.
[15면 삽화]
‘므낫세’ 왕이 크게 범죄하였지만 그가 우상인 “‘아세라’ 목상”을 제거하는 열심으로 자기의 진정한 회개를 증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