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하데스’에 있는 부자
‘하데스’는 단순히 죽은 인류의 공통 무덤인데 왜 성서는 한 부자가 ‘하데스’의 불에서 고초를 받는다고 말하는가? 이것은 ‘하데스’가 혹은 적어도 그 일부가 불의 고초를 받는 장소임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가?
지옥불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이 기록이야말로 악인들을 기다리는 고초의 지옥이 실제로 있다는 명백한 증거라고 열심히 지적한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는 말과 같은 명백하고도 반복적인 성서의 진술을 무시하고 있다. (에스겔 18:4, 20) 이러한 진술도 있다.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느니라].” (전도 9:5) 분명히 이러한 진술은 “구제할 수 없는 영혼들”이 불타는 지옥에서 고초를 받는다는 사상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죽은 자들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은 그리스도교국의 많은 교직자들을 거북한 입장에 있게 한다. 그들은 그들의 가르침의 근거를 성서에 두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성서는 그들의 교리와 상반된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혹은 잠재의식적으로, 그들은 자기들의 논점을 증명하는 어떤 것을 포착하기 위하여 성서로 가야 한다고 느끼고 있으며 그렇게 하여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을 진리에 눈멀게 하고 있다. 흔히 고의로 이러한 일을 행한다.
반면에, 진리의 진실한 탐구자들은 옳은 것을 알고 싶어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어떤 부분을 배척하고, 그들의 신앙에 근거를 다른 일부에 두는 것은 그들 자신을 속이는 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죽은 자들의 상태에 관하여 성서가 실제로 말하는 바를 알고 싶어 한다. 그리고, 사실의 전모를 이해하기 위하여 그들은 ‘하데스’에서 고초를 경험한 부자에 대한 묘사의 의미와 그것이 성서의 나머지 부분과 어떻게 조화하는지에 대하여 알고 싶어 한다.
어떤 부자와 또한 ‘나사로’라 하는 한 거지에 대하여 말씀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의 말씀은 누가복음 16:19-31(새번역)에 나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부자가 있었다. 그는 자색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잔치를 베풀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런데 그 집 대문 앞에는 ‘나사로’라 하는 거지가 헌데 투성이가 되어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려 했다. 그런데 심지어 개들까지도 와서 그의 헌데를 핥았다. 어느 날 거지는 죽어 천사들에게 이끌려 ‘아브라함’의 품으로 가게 되었고
“부자도 죽어서 땅에 묻혔다. 부자가 ‘하데스’에서 고통을 당하다가 눈을 들어 보니 멀리 ‘아브라함’ 옆에 ‘나사로’가 있지 않은가! 그래서 그는 소리를 질러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시원하게 해 주십시오. 저는 이 불속에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읍니다’ 하고 말했다. ‘아브라함’이 대답했다: ‘아들아, 돌이켜 생각해 보아라. 네가 살아 있을 때에 너는 좋은 것을 다 받았고 ‘나사로’는 나쁜 것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지금 여기서 위로를 받고 있으며 너는 거기서 고통을 받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수렁이[구렁, 개역] 놓여 있기 때문에 여기서 네게 건너가려 해도 가지 못하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오지도 못한다.’ 부자가 말했다: ‘아버지, 소원입니다. 그를 내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실 수 없겠읍니까? 제 다섯 형제가 거기 있읍니다. ‘나사로’가 가서 그들에게 경고하여 고통받는 이곳에 그들이 오지 않게 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브라함’이 말했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될 것이다!’ 부자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사람들 중에 누가 그들에게 가서 말하면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대답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사람들 중에 누가 그들에게 가서 말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부자에 대하여 어떻게 언급되었는지 유의하라. 그는 왜 ‘하데스’에서 고초를 받고 있었는가? 그는 이전에 무엇을 하였는가? 예수께서는 부자가 타락한 생활을 하였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그렇지 않은가?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 사람이 부자였고 옷을 잘 입었고 호화롭게 연락했다는 것 뿐이었다. 그러한 행동 자체가 고초의 형벌을 받기에 합당한가? 거지 ‘나사로’에 대한 부자의 태도에 심각한 결함이 암시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부자는 ‘나사로’에 대한 동정심이 부족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결함이 부자와 ‘나사로’를 명확히 구별시켜 주었는가?
예수께서 ‘나사로’에 대하여 말씀하신 바를 생각하여 보라. 반대 입장이었다면 ‘나사로’가 동정적이었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만한 것이 기록에 나타나 있는가? ‘나사로’가 마침내 “‘아브라함’의 품” 즉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지위에 들어가게 된 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선한 행실의 기록을 세웠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는가? 예수께서는 그러한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나사로’를 병든 거지로 묘사하셨을 뿐이다.
그러므로 병든 거지는 모두 사망시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이고 부자는 모두 의식을 가지고 고초를 받는 장소로 갈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논리적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구걸 자체는 하나님의 은총의 표가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성서에는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소서]” 하는 기도가 포함되어 있다. (잠언 30:8) 그리고 ‘다윗’ 왕은 자기 시대에 관하여 이렇게 기술하였다. “내가 ···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시 37:25.
만일 우리가 예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한다면, 그 비유를 참으로 이상하게 보이게 할 또 다른 결론들을 내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러하다. 하늘의 행복을 즐기는 사람은 ‘하데스’에서 고초를 당하는 사람들을 보고 대화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손가락 끝에 있는 물은 ‘하데스’의 불에 증발되지 않는다. 그리고, ‘하데스’의 고초는 크지만 단지 물 한방울로도 고통받는 자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다.
문자 그대로 생각할 때 이러한 결론들이 당신에게 이치적인 말로 들리는가? 아니면, 당신은 예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길이 있는가?
“부자”와 “나사로”의 신분
문맥을 검토하여 보라. 예수께서는 누구에게 말씀하고 계셨는가? 누가복음 16:14에는 이러한 말이 있다. “돈을 사랑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를 비웃었읍니다.” (새번역)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이 말씀을 들려 주고 계셨으므로, 그는 실제 경우를 이야기하고 계셨는가, 아니면 단순히 비유를 사용하고 계셨는가? 군중을 가르치신 예수의 방법에 관하여 성서는 “예수께서 ···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다고 알려 준다. (마태 13:34) 따라서, 부자와 ‘나사로’에 관한 기록은 비유임이 분명하다.
이 비유는 분명히 ‘바리새’인들을 향한 것이었다. 그들은 한 반열로서 부자와 같았다. 그들은 명성과 우쭐하게 하는 칭호 뿐 아니라 돈을 사랑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들은 경문곽을 크게 하고 옷단을 넓게 한다. 그리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를 좋아하며 장터에서 인사받는 것과 사람들이 선생이라 불러 주는 것을 좋아한다.”—마태 23:5-7, 새번역.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람들, 특히 세금 징수원들과 창녀들과 죄인이라는 평판을 듣는 기타 사람들을 멸시하였다. (누가 18:11, 12) 한 때 예수를 체포하도록 파견되었던 당국자들이 예수의 가르침에 감명을 받고 빈손으로 돌아왔을 때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꾸짖었다.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요한 7:47-49.
그러므로, 비유 가운데서 거지 ‘나사로’는, ‘바리새’인들이 경멸하였지만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이 된 겸손한 사람들을 적절히 대표한다. 예수께서는 이들 경멸받은 죄인들이 회개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지위를 얻을 것이며 반면에 ‘바리새’인들과 기타 탁월한 종교 지도자들은 한 반열로서 실패할 것임을 지적하셨다.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사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마태 21:31, 32.
“부자”와 “나사로”의 죽음
그러면 “부자”와 “나사로”의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실제 죽음을 가리킨다고 결론지을 필요가 없다. 성서에서의 용법에 따르면, 죽음은 또한 개인의 상태의 커다란 변화를 의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생활 행로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하나님 앞에서 승인받는 입장에 들어올 때 그들은 ‘살아났다’고 언급된다. (에베소 2:1, 5; 골로새 2:13) 동시에 그러한 산 사람들은 죄에 대하여 “죽었”다. 이러한 기록이 있다.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로마 6:11.
예수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는 둘 다 명백히 상징적 인물이므로 논리적으로 그들의 죽음도 또한 상징적이다. 그러면 그들은 어떠한 의미에서 죽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의 열쇠는 예수께서 그 비유를 소개하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 가운데 있다.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사람은 간통하는 것이며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와 결혼하는 사람도 간통하는 것이다.” (누가 16:18, 새번역) 이 진술은 비유와는 전혀 무관한 것같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의 율법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었으며 따라서 그 민족을 하나님의 아내라고 부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예레미야 3:14에서 하나님께서는 그 민족을 불충실한 아내라고 불러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니라.” 또한 예수가 오심으로 ‘유대’인들에게는 예수의 “신부” 성원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열렸었다. 그러기 때문에 침례자 ‘요한’은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예수]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한 3:28-30.
그리스도의 “신부” 성원이 되기 위하여 ‘유대’인들은 비유적으로 말하여 그들을 하나님의 아내가 되게 한 율법에서 해방되어야 하였다. 그러한 해방이 없이는 그리스도와의 아내 관계에 들어올 수 없었다. 간통 관계가 성립될 것이기 때문이다. 로마서 7:1-6(새번역)은 이를 확증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형제들이여, 여러분은 율법을 아는 사람들이므로 내가 말합니다. 율법은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에만 그 사람을 주관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결혼한 여인이 그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법을 따라 그에게 매에 있으나 남편이 죽으면 남편에 대한 법에서 해방됩니다. 따라서 자기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에 그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가면 그 여자는 간음한 여인이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었을 경우에는 법에서 해방되는 것이므로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간음한 여인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여러분도 그리스도의 몸을 통하여 율법에 대해서는 죽었읍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다른 이, 곧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분에게 가서 하나님께 드릴 열매를 맺기 위한 것입니다. ··· 그러나 지금 우리는 우리를 얽어매던 율법에 대해서는 죽고 그 속박에서 벗어났읍니다. 따라서 우리는 법조문의 낡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새로운 방식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유대인’들을 율법에서 해방시키는 기초였지만 그분이 죽으시기 전에도 회개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제자가 되어 하나님 앞에서 은총받는 입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침례자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소식과 사업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얻을 기회를 얻고 그리스도의 신부 성원으로 천적 유업을 받을 대열에 설 수 있는 문을 열어 놓았다. 예수 자신이 이렇게 표현하신 바와 같다. “침례자 ‘요한’의 날로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사람들이 밀고 나아가는 목표이며, 밀고 나아가는 사람들은 그것을 잡고 있다.”—마태 11:12, 신세.
그러므로, 침례자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업과 소식은 상징적 “부자”와 “나사로”의 상태로 점차적으로 완전한 변화를 초래하였다. 두 반열 모두 그들의 이전 상태에 대하여 죽었다. 회개한 ‘나사로’ 반열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입장에 들어왔고, 반면에 “부자” 반열은 끝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였다. 한 때 “나사로” 반열은 ‘바리새’인들과 기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서 영적 “부스러기”를 구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에게 진리를 전해 주심으로 그들의 영적 필요를 충족시켰다. 예수께서 공급하신 영적 양식과 종교 지도자들의 영적 양식을 대조하여 성서는 이렇게 알려 준다. “군중은 그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겼읍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그들의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아주 권위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마태 7:28, 29, 새번역) 참으로 완전한 역전이 일어났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나사로” 반열에게 아무 것도 제공할 수 없었음이 드러났다.
기원 33년 오순절에 상태의 변화는 완성되었다. 그때에 구 언약은 새 언약으로 교체되었다. 회개하고 예수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그 때에 구 율법 언약에서 온전히 해방되었다. 그들은 그에 대하여 죽었다. 그날 오순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바리새’인들과 기타 저명한 종교 지도자들보다 훨씬 높여졌음을 알리는 명백한 증거가 있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아니라 이들 제자들이 하나님의 영을 받아 널리 흩어진 여러 지역에서 온 사람들의 본토어로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하여 말할 수 있었다. (사도 2:5-11)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축복과 승인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참으로 놀라운 표현이었다! “나사로” 반열은 더 큰 ‘아브라함’ 여호와의 영적 씨가 됨으로 은총받은 입장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것이 “품”으로 상징되었다.—요한 1:18 비교.
회개하지 않은 ‘바리새’인들과 기타 저명한 종교 지도자들은 은총을 받는 것 같았던 그들의 이전 상태에 대하여 죽었다. 그들은 “하데스”에 있게 되었다. 그들은 회개하지 않은 상태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큰 구렁”이 가로놓인 것같이 예수의 충실한 제자들로부터 분리되어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변할 수 없고 의로운 심판의 “구렁”이었다. 이에 관하여 성경은 “주의 판결은 광대한 물의 깊음”이라고 말한다.—시 36:6, 신세.
“부자의” 고초
“부자” 반열은 또한 고초를 받았다. 어떻게? 예수의 제자들이 선포하고 있던 하나님의 불같은 심판의 소식에 의해서 그러하였다.—계시 14:10 비교.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의 제자들이 선포한 소식으로 인하여 고초를 받았다는 것에는 의문이 있을 수 없다. 그들은 그 선포 활동을 중지시키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저명한 종교 지도자들로 구성된 ‘유대’인 최고 법정에서 자기들의 입장을 변호하였을 때에 판사들은 “격분하여 사도들을 죽이려고 했”다. (사도 5:33, 새번역) 후에, 제자 ‘스데반’의 변호는 그 법정의 구성원들에게 마찬가지로 고통을 주었다. “그들은 ‘스데반’의 말을 듣고 격분하여 이를 갈았읍니다.”—사도 7:54, 새번역.
이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와서 ‘그들의 혀를 식혀’ 주기를 바랐다. 그들은 “나사로” 반열이 하나님의 은총의 “품”을 떠나 그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는 방식으로 소식을 전하여 주기를 바랐다. 동일하게, 그들은 “나사로” 반열이 그들의 “다섯 형제” 곧 그들의 종교적 협력자들을 “고통받는 곳”에 있게 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소식을 약하게 만들기를 바랐다. 그렇다. 그들은 그들의 동료 아무도 심판의 소식에 의하여 고초를 받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예수의 비유에 암시되어 있듯이, “부자” 반열도 그의 종교적 협력자들도 “나사로” 반열이 선포하는 소식으로 인하여 받는 고초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소식을 약하게 하는 것을 거절하였다. 그들은 예수의 이름을 기초로 가르치는 일을 중지하기를 거절하였다. ‘유대’인 최고 법정에서의 그들의 대답은 이러하였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사도 5:29.
만일 “부자”의 종교적 협력자들이 그 고초를 피하기를 원하였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었다. 즉 ‘모세’와 기타 고대 예언자들이 기록한 영감받은 성경이 있었다. 그 영감받은 성경은 사후의 어떠한 문자적인 고초의 장소에 대하여 한번도 지적한 일이 없으며 오히려 그 가운데에는 예수가 약속된 메시야 즉 그리스도라는 것을 식별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신명 18:15, 18, 19; 베드로 전 1:10, 11) 그러므로, 만일 “부자” 반열과 그의 “다섯 형제”가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그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대열에 서게 되었을 것이며, 하나님의 심판의 소식으로부터 고초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교국은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이 예수의 비유의 이러한 이해를 모르고 있을 리가 없다. 유명한 ‘프로테스탄트’ 주해서인 「성서 주해」(영문)는 비슷한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그 책은 많은 해석자들이 예수의 말씀을 “초기 그리스도교와 정통 ‘유대’교 사이의 갈등을 예상하는 부가적인 비유담으로 믿는다”고 지적하고 이렇게 덧붙였다. “부자와 그의 형제들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대표한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성경에 있는 자신에 관한 분명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완고하게도 회개하기를 거절하였다고 단언하고, 그들이 그의 부활에도 감명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하게 되었다. ‘누가’와 그의 독자들이 이 귀절들에 대하여 그러한 어떤 해석을 부과하였다는 것은 있을 법한 일이다.” 그리고 ‘가톨릭’ 「예루살렘 성서」는 누가복음 16장의 각주에서 이것이 “어떤 역사적 인물을 지적하지 않은 이야기 형태의 비유”라고 시인한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렇게 질문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은 왜 그들의 교인들에게 적어도 이것이 비유라는 것을 시인하지 않는가? 성서가 인간 영혼의 불멸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왜 분명한 비유를 계속 문자적으로 적용시키는가? 이것은 부정직이 아닌가? 그들은 사실을 고의로 숨김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하는 것이 아닌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오늘날 우리에게 중대한 교훈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감받은 말씀에 주의를 돌리는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한 제자로서 그 말씀을 따르고자 하는가? ‘유대’교 ‘바리새’인들과 같이 그렇게 하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소식으로 인한 고통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의 충성스러운 종들은 계속 진리를 선포할 것이며, 두려움 없이 종교적 거짓을 폭로할 것이다.
당신은 이 문제에 있어서 어느 입장에 서 있는가? 당신은 종교는 다 좋다고 생각하고 그와 같이 폭로하는 일을 중지해야 한다고 믿는가? 아니면 당신은 죽은 자들에 대한 거짓 교리를 통하여 그리스도교국이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주는 것에 대하여 분노를 느끼는가? 당신은 거짓 교리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에 돌려진 모독이 제거되는 것을 보기를 원하는가? 당신은 수고를 아끼지 않고 종교적 거짓에의 속박으로부터 정직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것을 보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죽은 자와 산 자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 매우 위안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