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 빛은 병행한다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빛, 신세] 중에 우리가 광명[빛, 신세]을 보리이다.”—시 36:9.
1, 2. 대조를 통하여, 우리는 필요하기도 하고 즐거움의 원천이기도 한 빛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어떻게 증가시킬 수 있읍니까?
서로 큰 대조를 이루는 것 중의 하나는 빛과 어두움입니다. 대낮에 활짝 트인 시골길을 간다면 그 길이 초행일지라도 당신은 안전감을 느낄 것입니다. 근처에 있는 물체를 보고 몇걸음 가서 만질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먼 곳의 경치를 감상하고 여러가지 세부적인 것, 심지어는 지평선에 보이는 감동적인 것을 구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칠흑같은 어두움 속에서는 횃불이나 등불 없이는 단 한발자국을 내딛는 것도 무모할 수 있읍니다. 당신은 극도의 주의와 경계심을 가지고 행동할 것입니다.
2 빛은 모든 형태의 생활과 동작에 필수적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또한 생활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크게 더해 줍니다. 아마 당신은 한낮의 햇빛 속을 걷다가 그늘진 숲속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얼마나 유쾌한 대조입니까! 그것이 왜 그렇게 매력적입니까? 빛은 이제 눈에 부드럽고 친절하며, 당신이 서서 각양 각색의 나무와 잎과 덤불 속의 어떤 꽃을 볼 때 빛은 무한히 다양한 색조와 색체에 반영되어 있읍니다. 눈부신 햇빛을 피하여 눈을 떠보면, 당신은 하늘이 나무 가지와 나뭇잎으로 갈라져 무수한 작은 점과 빛줄기가 되어 있음을 볼 것입니다. 당신은 그대로 서서 그 모든 것의 조용한 아름다움을 즐기고 싶을 것입니다. 특히 당신이 그러한 것을 조용히 즐길 줄 아는 동료와 함께 있다면 그러할 것입니다.
3. 빛과 생명에 어떠한 천연적인 관련이 있다는 것이 분명합니까?
3 물론, 당신이 살아서 눈으로 볼 수 없다면, 유용성에 있어서나 무한한 즐거움의 원천으로서의 빛이 엄청난 가치를 인식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실, 건강이 좋을수록, 그리고 시력이 좋을수록, 빛에 대한 인식은 더 좋을 것입니다. 생명과 빛은 병행합니다.
4. (ㄱ) 많은 사람들은 왜 그리고 어떻게 이런 일들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까? (ㄴ) 어떤 자기 만족의 태도가 있지만 어떤 경험을 예로 들 수 있읍니까?
4 유감스럽게도,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읍니다. 그들은 생명과 빛의 혜택을 받는 것을 즐거워하면서도 멈추어서 그것들의 진정한 근원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생명이 주로 우연히, 아무도 그것을 출발시키거나 그 작용을 조절함이 없이 진화 과정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빛에 대하여, 그들은 지상에 있는 우리에게 근원으로 필요한 것은 단지 태양만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한 때 어떤 사람이 겪은 일과 같은 경험을 한다면 참으로 놀랄 것입니다. 그는 ‘아그립바’ 2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읍니다. “전하, 제가 길을 가다가 한낮에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눈부신 빛이 저와 저 일행에게 두루 비치는 것을 보았읍니다.” 이 사람은 누구였읍니까? 어느 경우에 이 일이 있었으며, 무슨 중요성이 있읍니까?—사도 26:13, 새번역.
5. 개종으로 인도한 ‘사울’의 경험이 확실하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 어떠한 이유가 있읍니까?
5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실화로 기록된 성서의 일부가 신화와 전설의 영역에 속할 수 있다고 믿고 있읍니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이전에 ‘다소’의 ‘사울’로 알려진 ‘바울’과 같은 사람이 실제로 살았고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의 일부를 구성하는 많은 편지를 썼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신빙성있는 역사가 ‘누가’가 사도행전 9:1-30에 기록한 ‘사울’의 개종에 대한 세부점을 의심할 이유가 없읍니다. 전체 기록은 그 경우에 예수께서 ‘사울’에게 하신 말씀을 포함하여 진실성을 내포하고 있읍니다. 그것은 ‘사울’이 그 때에 ‘다메섹’으로 갈 때의 정해진 목적에 비추어 볼 때 그가 상상했었을 것과 전혀 반대되었읍니다. 그는 당시에 그가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가졌던 강렬한 증오심을 묘사하여 ‘아그립바’ 왕에게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그들을 형벌하여 강제로 신앙을 부인하게 하려고 했읍니다. 그들에 대한 분노가 극도에 달하여 나는 외국[즉, ‘예루살렘’에서 멀리 있는] 여러 도시에까지 박해의 손을 뻗쳤읍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가 그의 생애에서 충격과 놀라움을 경험한 것은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이었읍니다. 바로 그 때에 그러한 일이 있었읍니다. 그것은 어떠한 중요성이 있읍니까?—사도 26:8-11, 새번역.
빛에 대한 증거는 생명을 의미한다
6. 예수께서는 ‘사울’에게 어떠한 임명을 주셨으며, 우리는 왜 관심을 가져야 합니까?
6 그 때에 예수께서 ‘사울’에게 말씀하신 바에 면밀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매우 흥미있고 유익할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과 빛과의 긴밀한 관계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것이며, 우리의 반응이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 모두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가 ‘사울’에게 주려던 임명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내가 네게 나타난 목적은 너를 내 일군으로 삼아 네가 나를 본 것과 내가 장차 네게 보여줄 일에 대한 내 증인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이 백성과 이방 사람 가운데서 너를 건져내어 이방 사람들에게 보낸다. 이것은 그들의 눈을 열어 어두움에서 빛으로 돌아서고 ‘사탄’의 세력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서게 하고 또 죄사함을 받아 나를 믿는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 사람들 가운데 참여하게 하려는 것이다.”—사도 26:16-18, 새번역.
7. 후에 ‘바울’로 알려진 ‘사울’은 그가 자기에게 주어진 임명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어떻게 증거하였읍니까?
7 ‘사울’이 증인이 되라는 임명을 즉시 받아들였음이 그가 ‘아그립바’ 왕에게 그 다음에 한 말에 나타나 있읍니다. “저는 하늘로부터 오는 환상을 거스르지 않고 ··· 제가 이날까지 ··· 낮은 사람이나 높은 사람에게 증거하고 있는데 ··· 그것은 그리스도가 고난을 당해야 하고 그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살아나서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 사람들에게 빛을 선포하리라는 것이었읍니다.” (사도 26:19-23, 새번역) ‘사울’은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의 요점을 올바로 이해하였읍니다. 문제는, 당신도 예수의 말씀의 요점을 파악하고 그 영향을 받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고려하여 보십시오.
8. (ㄱ) 문자적인 의미와 비유적인 의미가 있을 수 있는 어떤 표현이 있는지 설명하십시오. (ㄴ) 성서에서 비유적인 언어를 사용하는지의 여부를 무엇이 알려 줍니까?
8 예수께서는 어떤 것을 보는 것과 다른 사람들의 눈을 열어 어두움에서 빛으로 돌아서는 것에 대하여 ‘사울’에게 말씀하실 때에 분명히 비유적인 언어를 사용하셨읍니다. 여기에는 새로운 것이나 이상한 것이 없었읍니다. 시각과 정신은 밀접히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는 흔히, 정신과 마음에 연결되어 있는 문자적이고 물질적인 의미를 가질 수도 있고 비유적인 그리고 때때로 영적인 의미도 지닐 수 있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우리는 종종 상대방의 말을 알아서 이해하고 인식하려는 노력으로 “알아 보다”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에 대한 좋은 예로, ‘바울’은 한 편지에서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그를 알게 하시고 여러분의 마음 눈을 밝히”시기를 기도하였읍니다.—에베소 1:17, 18, 새번역.
9. 빛과 어두움은 대조적으로 각각 무엇을 상징합니까?
9 전술한 내용에서 빛이 진리의 상징이며, 검사받는 것을 환영하는 관련된 것, 이를테면 의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읍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어두움은 오류와 무지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또한 검사받는 것을 피하는 관련된 것, 이를테면 부끄러운 행실과 악행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읍니다.
10. (ㄱ) ‘바울’이 증거한 것은 일반적인 진리였읍니까? (ㄴ) 성서의 진리를 받아들이면 점차 어떠한 단계에 이릅니까?
10 ‘바울’은 분명히 부활되신 주 예수의 인도하에서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진리를 나타냄으로” 빛에 대하여 증거하게 되어 있었읍니다. (고린도 후 4:2) 그 진리는 일반적인 진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에 포함되어 있는 진리입니다. (요한 17:17; 디모데 전 2:4; 디모데 후 2:15) 반응을 나타낸 사람들은 정신적인 눈이 열리어 그들이 빛에 들어올 뿐아니라 생명을 얻기 위하여 취해야 할 단계를 알 것입니다. 그리고 빛과 유사한 이 생명은 우리의 육체에 속한 현재의 육체적이고 일시적인 생명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생명에 대한 그러한 더 깊은 의미는 ‘바울’이 ‘에베소’인들에게 한 다음 말에 분명히 나타나 있읍니다. “여러분도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이 설명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생명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 이르는 첫 단계에 불과합니다.—에베소 2:1, 새번역.
11. (ㄱ) 우리는 빛에 대하여 어떻게 증거할 수 있으며, 이것은 생명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읍니까? (ㄴ) 우리는 이와 관련하여 무슨 태도를 피해야 합니까?
11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과 빛이 문자적으로 뿐만 아니라 비유적으로나 영적으로 말하여 병행한다고 말할 수 있읍니다. 빛 즉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고 증언하는 것은 ‘바울’에게 생명을 의미하였을 뿐만 아니라 먼저 빛을 받고 다음에 다른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는 우리에게도 생명을 의미합니다. 당신은 어디에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인식하십니까? 이 점에서 우리가 도움을 받기 위하여 예수께서 ‘다메섹’으로 가던 그 사람에게 하신 말씀에 좀 더 주의를 기울여 봅시다. 그는 일시 동안 신체적으로 맹인이 되었었지만, 이상하게도, 이제 사물을 정신적으로 보기 시작하였으며, 사실 모든 것을 전혀 새로운 관점으로 보기 시작하였읍니다. 그의 마음이 또한 관련되어 있었읍니다. 그는 반역적이거나 불순종적이 아니었읍니다. 우리는 ‘에스겔’에게 주어진 여호와의 경고를 염두에 두고 우리에 대하여 동일하게 말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인자야, 네가 패역한 족속 중에 거하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패역한 족속임이니라.”—에스겔 12:2.
당신은 누구의 권위 하에 있는가?
12. ‘사울’의 임명에는 어떠한 목적이 밝혀져 있으며, 어떠한 질문이 유도됩니까?
12 예수께서는 ‘사울’에게 말할 때 사람들의 눈을 여는 목적은 “어두움에서 빛으로 돌아서고 ‘사탄’의 세력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서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였읍니다. (사도 26:18, 새번역) 그러므로 이 말씀은 어두움과 빛에 대한, 바꾸어 말하여 사망과 생명에 대한 근원과 지배적인 권위를 언급하고 있읍니다. 우리는 확실히 우리가 누구의 권위 아래로 들어오며 원한다면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어떻게 이동할 수 있는지를 알기를 원합니다.
13.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와께서 (ㄱ) 빛과 (ㄴ) 생명의 원천이심을 어떻게 알려 줍니까?
13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와께서 생명과 빛의 근원이심을 밝혀 줍니다. 그는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땅도 조성하시[되] ··· [산 피조물이] 거하게 지으신 자”입니다. 「창세기」에 있는 창조 기사는 이것을 확증하여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었다고 알려 줍니다. 다음에, 땅에 대하여,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고 말씀하셨읍니다. 그 기록을 보면 후에 “낮을 주관하”는 “큰 광명” 즉 태양을 언급합니다. 태양은 지구의 빛과 지상의 생명에 필수적인 ‘에너지’의 주된 근원입니다. 지구에 관한 창조의 절정은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이 생령이 되”었을 때였읍니다. ‘아담’은, 그리고 다음에 ‘하와’도 생명과 빛을 온전히 사용하고 즐길 수 있도록 신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모든 감각과 기능을 가진 완전한 인간으로 창조되었읍니다.—이사야 45:18; 창세 1:1, 3, 16, 27; 2:7.
14. 여호와께서는 무엇을 근거로 최고 권위이심이 분명하며, 따라서 어떠한 질문이 생깁니까?
14 이로 보건대, 여호와 하나님은 생명과 빛의 근원이며 창작자이시며 창조주시고 생명의 수여자이실 뿐만 아니라, 당연하게도 그분은 최고 권위이시며 정부 최고 통치자이심이 분명합니다. (시 103:19; 다니엘 4:17, 35; 계시 4:11) 이 사실을 받아들일 때에 우리는 물론 여호와께 반대되는 권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를 원합니다. 예수께서 언급하신 “‘사탄’의 세력” 즉 권위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어떻게 있게 되었읍니까?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그 세력하에서 벗어날 수 있읍니까?
15. (ㄱ) 어떻게 ‘사단’은 교활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권위를 침해하려고 노력하였읍니까? (ㄴ) 하나님의 말씀은 여기에 어떻게 관련되었읍니까? (ㄷ)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그러한 행동을 하도록 촉구한 것은 무엇이었읍니까?
15 영감받은 기록이 알려 주듯이 ‘사단’은 교묘한 방법으로 자기의 영향력을 사용하고자 시도하였으며 이 면에서 그는 성공하였읍니다. 어떻게 그리하였읍니까? 교묘하게 환심을 사고 거짓으로 그렇게 하였읍니다. 그는 참말 대신에 거짓말을 사용하여 허위를 제시하였읍니다. 다시 말하여, 그는 빛 대신에 어두움을 제시하였읍니다. 흥미롭게도, 그것은 생명에 관한 것이었으며, ‘하와’가 제안받은 바와 같이 할지라도 죽지 않고 지상에서 육신을 가지고 계속 살 것이라는 것이었읍니다. 그는 뱀을 통해서 “너희가 그것[금지된 실과]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질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해력이 증가할 것이라고 약속하였읍니다. 다음에 ‘하와’가 하나님을 떠나 권위를 자유로이 행사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암시하면서 “하나님과 같이 되어 [너희 자신이] 선악을 알”게 된다고 부언하였읍니다. (창세 3:1-5) 그리하여 ‘사단’은 ‘아담’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 그와 그의 아내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올바른 길로 안내하고 머물게 하는 참다운 빛으로 의지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읍니다. 먼저 ‘하와’가, 다음에 ‘아담’이 하나님의 단순하고 직접적인 명령에 불순종하고 이기적인 독립의 길,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있는 생명과 빛으로부터 벗어나 어두움과 사망으로 인도되는 길로 나섰읍니다.—시 119:105; 또한 고린도 후 11:14 참조.
16. (ㄱ) ‘사단’의 접근 방법을 고려하는 것이 왜 유익합니까? (ㄴ) 성경은 이에 대하여 어떠한 계몽을 해 줍니까?
16 여기에서 잠깐 ‘사단’의 주된 전략 중 하나와 그것의 작용을 고려하여 봅시다. 그는 교활한 수단으로, 속임수로, 그가 ‘하와’에게 그렇게 한 바와 같이, 우리가 이기적인 관점으로 사물을 보도록 유혹합니다. 만일 마음으로 우리가 이기심에 지배되고 있거나 그렇게 되면, 우리는 쉽사리 ‘사단’의 올무에 빠지고 쉽게 속게 됩니다. 이 사실이 시편 36:1-3에 매우 분명하고 강력하게 표현되어 있읍니다.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 저가 스스로 자긍하기를 자기 죄악이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 그 입의 말은 죄악과 궤휼[즉, 속임수]이라. 지혜와 선행을 그쳤도다.” 그러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예언자 ‘이사야’의 이러한 말에 잘 나타나 있읍니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그들은 화 있을찐저.” 우리는 “죄의 유혹에 빠져 완고하게 [그리하여 속게] 되는 일이 없”도록 확실히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이사야 5:20, 21; 히브리 3:13.
17. ‘사단’의 영향 아래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는 데 대하여 인간 자신은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읍니까?
17 ‘에덴’에서의 반역의 때 이후로, 일반 인류는 ‘사단’의 영향과 지배를 더욱 많이 받아 왔읍니다. ‘사단’이 일차적인 책임이 있지만, 인간 자신에게도 상당한 책임이 있읍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세상 앞에 자신에 대한 증거를 나타내셨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는 보이지 않으시지만, “그의 보이지 않는 특성들, 말하자면 그의 영원하신 힘과 신으로서의 성품이 그가 만드신 만물을 통하여 분명히 알려져 있”읍니다. 시편 36:1-3과 일치하게, ‘바울’은 이어서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그들(인간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높이지 않고 감사도 드리지 않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각이 허황하여 그 분간 없는 마음이 어두움에 빠졌읍니다.” (로마 1:19-23, 새번역) ‘사단’이 어두움 대신에 빛을 둔 것은 사실이지만, 일반 인류가 빛보다 어두움과 불경건함을 더 좋아하였음도 시인해야 합니다. ‘에녹’의 영감받은 예언은 불경건을 사중적으로 강조하여 이것을 확증합니다. (유다 14, 15) 홍수 때까지 보고에 나타난 세명의 예외적인 인물 즉 ‘아벨’과 ‘에녹’과 ‘노아’만이 다수의 행위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었음을 증명하였읍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동행’하였읍니다. ‘노아’에 대하여는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정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읍니다.—창세 5:22; 6:9; 히브리 11:4-7.
왕국 권위
18. 홍수 후에 ‘사단’의 권위에 대하여 어떠한 사태 발전이 있었읍니까?
18 홍수 후에, ‘사단’이 독특한 보이는 통치권으로 권위를 행사하기 시작하였읍니다. 처음으로 우리는 왕국에 대하여 읽게 됩니다. 자기의 야망에 찬 목적에 맞는 자진적인 도구가 ‘니므롯’임을 발견하였으며 그에 대한 기록은 이러합니다.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군이 되었으므로 ··· 그의 나라(왕국, 신세)는 ‘시날’ 땅의 ‘바벨’[이었으며] ···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느니웨’[를] ··· 건축하였[느니라.]”—창세 10:8-12.
19. (ㄱ) 어떻게 여호와께 대한 반대가 나타났으며, 여호와께서는 어떠한 반응을 보이셨읍니까? (ㄴ) 이 반대는 중지되었지만 어떻게 계속 발전되었읍니까?
19 그러한 야망적이고 반항적인 정신에 찬 어떤 사람들은 그와 같이 스스로의 권위를 세우고 그것을 유지하고자 결심하였읍니다. 그들은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고 말하였읍니다. 이것은 ‘사단’의 목적에 부합하였지만 주권자이신 주 여호와와 그의 언명된 목적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이었읍니다. 그는 그러한 상황에 대하여 모르고 계시지 않았읍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셨읍니다. 다음에 “이 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라고 말씀하셨읍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언어를 혼잡시키고 그들이 온 땅에 흩어지게 하심으로 그들의 연합된 목적을 파괴시키셨읍니다. (창세 9:1; 11:1-8; 사도 4:24) 그러나 인간 대다수는 아직도 인간 통치권을 더 좋아하였으며, 권력과 권위를 야망하는 ‘사단’의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언제나 있었읍니다. 이 결과로 인간이 세운 왕국들이 생겼으며 때로는 도시 왕국들이 생겼으며 다음에 ‘모압’과 ‘암몬’ 왕국과 같이 전체 지역을 포용하는 왕국으로 확장되었고 마침내 대 제국과 세계 강국들이 등장하게 되었읍니다.
20. (ㄱ) 종교는 인간이 세운 왕국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였읍니까? (ㄴ) 이에 대한 예외를 성서는 어떻게 기록하였읍니까? (ㄷ) ‘사단’은 어떻게 어느 정도로 인류 대부분에 대한 통치권을 장악하였읍니까?
20 이 모든 왕국에서 종교가 커다란 역할을 하였지만 통치자들과 그들의 신민들은 숭배와 순종을 받기에 합당하신 최고 통치자로 여호와를 인정하지 않았읍니다. (예레미야 10:10; 다니엘 6:26) 성서는 단지 한가지 예외 즉 ‘살렘’ 왕 ‘멜기세덱’만을 언급합니다. 그는 또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봉사하였으며 그는 ‘아브람’을 축복할 때에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하고 말하였읍니다. ‘아브람’ 자신도 ‘소돔’ 왕에게 말할 때에 하나님에 대하여 비슷한 말을 하였읍니다. (창세 14:18-23) 그러나, ‘사단’은 거짓 종교와 속임수를 통하여, 자기에게 가담한 불순종한 천사들과 함께 모든 왕국에 대한 통치권을 잡았읍니다. ‘사단’과 그의 악귀의 무리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체로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읍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효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세 차례에 걸쳐 예수께서는 ‘사단’ 마귀를 ‘이 세상 통치자’라고 불렀읍니다. 그리고 ‘바울’은 ‘마귀’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싸움에 대하여 말하면서 그것이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한 싸움이라고 말하였읍니다.—요한 12:31; 14:30; 16:11; 에베소 6:11, 12; 또한 고린도 후 4:4.
21. (ㄱ) ‘사단’의 권위에서 구출되는 데에는 무엇이 관련되어 있읍니까? (ㄴ) 사태는 어떻게 오늘날 양측에서 절정에 달하였읍니까?
21 이로 보건대, 예수께서 ‘사울’에게 사람들을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데 대하여 말씀하실 때에 이것이 한 통치권에서 다른 통치권으로 이동하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기술한 바와 같습니다. “그[여호와]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왕국, 신세]로 옮기셨[느니라.]” (골로새 1:13) 오늘날, 그 상황은 두가지 반대되는 편 즉 여호와 하나님의 편과 ‘사단’ 마귀의 편에서 크고 강렬한 절정에 도달하였읍니다. 양측 간의 예언된 “적의”는 참으로 절정에 도달하였읍니다. (창세 3:15, 신세) ‘사단’의 다스림 아래에서 어두움은 어느 때보다도 짙습니다. 통치자들과 통치받는 사람들은 그들의 여러가지 골치 아픈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어디로 가야할지를 모르고 있읍니다. 그것은 ‘더듬을 만한 어두움’입니다. (출애굽 10:21, 22) 그러나 메시야 왕이신 그리스도 예수에 의한 여호와의 다스림 아래에서 진리와 의의 빛은 어느 때보다도 강렬히 비치고 있으며 많은 영적인 즐거움 및 기쁨과 아울러 그의 신민들에게 분명한 인도와 확신을 주고 있읍니다. 그러므로 인류 앞에 있는 쟁점은 통치권과 왕국 권위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하고 있읍니다.
22. 권위와 통치권은 (ㄱ) 메시야 왕국과 관련하여, 그리고 (ㄴ) 지존성에 대한 ‘사단’의 추구와 관련하여 어디에서 어떻게 강조되어 있읍니까?
22 「계시록」에 이 주제가 어떻게 강조되어 있는지 유의하십시오. ‘요한’에게 주어진 환상 중에서 그는 하늘에서 이러한 큰 음성을 들었읍니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시리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원전 607년부터 2,520년간 허락하신 이방 강국들에 의하여 세상이 간섭없이 지배되는 기간의 끝인 기원 1914년에 성취되었읍니다. 다음에 메시야 왕국의 탄생과 하늘에서의 전쟁, 및 용인 ‘사단’ 마귀가 하늘에서 던져지는 것을 본 후에 ‘요한’은 이러한 선언을 들었읍니다.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느니라.]” 이와 대조적으로, 다음 환상은 용이 “짐승”[‘사단’의 세계적인 정치 조직]에게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주어서 그 결과로 땅의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숭배한다고 말하였읍니다. “짐승의 우상” 즉 현대의 국제 연합 기구의 상징에 대한 비슷한 권위와 숭배가 더욱 언급되었읍니다. 사실, ‘사단’의 조직은 ‘강제로’ 모든 사람들이 식별의 표를 받게 하고 그것이 없이는 사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합니다.—계시 11:15; 12:10; 13:2, 15-17.
23. (ㄱ) 이에 비추어 볼 때에, 우리는 어떻게 자문해야 합니까? (ㄴ) 시편 36:9의 후반부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따라서 어떠한 훌륭한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까?
23 당신은 누구의 권위 하에 있읍니까? 당신은 ‘사단’의 세상 질서의 지지자로 식별되는 것에 만족합니까? 아니면 그의 권위 하에서 도망하기를 성실하게 바라지만 취해야 할 단계를 확실히 모르고 있으며 그것에 관련된 일을 두려워하고 있읍니까? 격려를 받기 위하여 시편 36편을 다시 보십시오. 「시편」 필자는, 자기들의 눈에 항상 바른, 그러므로, 그들의 잘못을 보거나 미워하지 않는 사람들의 나쁜 태도를 묘사한 후에, 여호와께 주의를 돌립니다. 그는 여호와의 사랑의 친절, 충실성과 의 그리고 그의 날개 아래 피난처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오는 축복을 찬양합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생명의 원천”이심을 말한 후에,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빛]을 보리이다” 하고 말하였읍니다. 다시 말하면, 오로지 그 분의 관점에서 우리 자신을 포함한 사물을 보는 방법을 배움으로써만, 우리는 어두움에서 빛으로 돌아설 수 있으며 하나님의 권위 하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우리가 취해야 하는 단계를 인식할 수 있읍니다. 우리가 그 빛과, 진리와 의와 병행하여 걷는다면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다윗’과 같이 이렇게 기도할 수 있읍니다. “주를 아는 자에게 인자(사랑의 친절, 신세)하심을 계속하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의를 베푸소서.”—시 36:5-10; 잠언 4:18.
[367면 삽화]
‘아담’과 ‘하와’는 이기적인 독립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빛과 생명에서 나와 어두움과 사망으로 들어갔다
[368면 삽화]
하나님께서는 언어를 혼잡시킴으로 ‘바벨’ 탑 건축자들의 반항적인 목적을 좌절시키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