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마련하신 영적 안전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라].”—시 91:2.
1, 2. (ㄱ) 알려진 바에 의하면 ‘보나파르트’(나폴레옹)는 칼과 정신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였읍니까? (ㄴ) ‘히틀러’는 어느 그리스도인들에게서 그 말이 참됨을 알게 되었읍니까?
칼을 휘두르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이러한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힘이 있다. 그것은 칼과 정신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언제나 정신이 승리한다.”
2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는 이 냉혹한 군인의 말을 믿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그는 “칼”의 힘으로 세계를 정복하려고 피비린내나는 무서운 싸움을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히틀러’는 그가 폭력으로 점령한 지역에서 이 세상 분쟁에 대하여 중립적 태도를 취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정신을 깨뜨리려고 시도하였읍니다. 그의 “칼”의 힘은 1945년에 그를 낙담케 하였읍니다. 패배를 자인하게 된 그는 총으로 자살하였고 그의 시체는 불에 타버렸읍니다. 그러나 박해를 받았던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은 수적으로는 수천명이 감소되었지만 불굴의 정신으로 승리를 거두게 되었으며 ‘히틀러’가 지배하던 여러 나라에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는 일을 당당히 재개하게 되었읍니다.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은 ‘히틀러’ 통치 12년만에 승리를 거두었던 것입니다.
3. (ㄱ) 그러한 군인들은 어떠한 형태의 안전을 의뢰하였으며, 그 결과는 어떠하였읍니까? (ㄴ) 여호와의 증인들은 어떠한 형태의 안전을 의뢰하였으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3 ‘보나파르트’(나폴레옹)와 ‘히틀러’는 독재 정치 세력 및 영향력과 더불어 강력한 군사 조직으로 안전을 얻으려고 하였읍니다. 그러한 세상적 형태의 안전은 기대에 어긋나고 헛것임이 들어났읍니다. 안전과 보호가 없는 것처럼 보였던 여호와의 증인들은 다른 형태의 안전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읍니다. 그것은 영적 안전이었읍니다. 왜냐 하면, 그러한 안전만이 사람들을 장차 올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새로운 사물의 제도에서 평화스럽고 행복한 가운데 영원한 생명을 얻기에 합당한 자로 보호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럽’에 살아남은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 영적 안전 상태 안에 머물러 있으려고 노력하고 있읍니다. 다가오는 “큰 환난”에서 사람이 만든 물질적, 재정적, 군사적 안전 수단은 그들의 생명을 하나님의 새 질서로 보존해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여도 의리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잠언 10:2.
4. 영적 안전이 육체적 안전보다 가치있는 이유는 무엇이며, 성서의 어느 시편에 그것이 묘사되어 있읍니까?
4 영적 안전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에 일치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영적 생활을 보호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비록 자기에게 충실한 자들이 원수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일을 허락하시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승인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적 안전이 있읍니다. 죽기까지 영성(靈性)을 지킨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의로운 새 질서에서 생명의 축복과 기회를 받도록 부활의 상을 받을 사람들입니다. 영적 안전은 물질주의적인 사람들이 갖고자 노력하는 육체적 안전보다 가치있는 것입니다. 영적 안전이야말로 우리가 가지기를 원하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서 시편 91편에 우리를 위하여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는 안전입니다.
5. 시편 91편의 작자에 관하여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그 시는 누구에게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켜 줍니까?
5 시편 91편의 영감받은 작자는 시편 90편의 필자와 동일인인 것 같습니다. 시편 90편의 마지막 절에 이어지는 91편에는 작자를 알리는 머릿말이 끼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90편의 작자로 머릿말에 이름이 나와 있는 예언자 ‘모세’가 그 필자일 것입니다. 상황으로 판단한다면 그러하지만 그렇다는 명백한 증거는 없읍니다. 하지만 그 시(詩)도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의 영감받은 기록 중의 일부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점이고 그것이 참되고 신뢰할 만한 점입니다. 늦어도 기원전 460년 이전에 기록된 이 시는 오래 전부터 약속된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 메시야 곧 그리스도를 직접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 시는 영적 안전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켜 줍니다. 이분은 심지어 메시야 곧 그리스도에게까지도 영적 안전의 근원이 되시는 분입니다.
6, 7. ‘사단’은 예수 그리스도를 유혹하려고 시편 91편 11, 12절을 어떻게 사용하였으며, 왜 성공하지 못하였읍니까?
6 예를 들면, 통용 기원 29년에 하나님의 대적은 중동 지방에 살고 있는 한 사람에게 그 시의 11절과 12절을 적용시켰읍니다. 유혹자인 ‘사단’ 마귀는 이 사람의 영성을 깨뜨리고자 하나님의 영감받은 말씀을 남용하여 그를 속이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시편 91편에 있는 그 귀절들을 유혹자는 육체적 안전에 적용시키려고 하였읍니다. 그는 특히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신체적으로 그러한 보호와 안전함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읍니다. 마귀와 ‘유대’인들에게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 꼭대기에서 몸을 던지면 천사들이 중력의 법칙을 막고 그를 종용히 성전 마당에 내려줄 것이라고 말하였읍니다. 그것은 마치 “하늘로부터의 징조”와 같았을 것입니다.
7 이 시편 91편은 누구에게보다도 메시야 곧 그리스도로서 얼마 전에 하나님의 영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이 사람에게 적용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는 자기 생각에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이 사람에게 커다란 유혹이 될 만한 계략을 꾸몄읍니다. 그러나 그 사람 예수 그리스도는 그 꾀를 통찰하셨고 시편 91:11, 12을 잘못 적용시킨다는 것을 아셨읍니다. 그는 그의 영적 안전을 버리지 않으셨읍니다.
8. 예수는 ‘사단’의 유혹을 어떻게 물리치셨으며, 그 결과는 자신에게 어떠한 유익이 되었읍니까?
8 그분은 예언자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영감받은 명령에 관심을 이끌므로 그렇게 하셨읍니다. 성서 기록은 이러합니다. “예수께서 [마귀에게]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여호와]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마태 4:7; 신명 6:16) 예수께서 천사는 신뢰하셨읍니다. 그러나 그분은 자기가 성전에서 ‘유대’인들 앞에 이기적으로 자기 자신을 나타내기 위하여 무모하게 하나님의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려는 부당한 행동을 한다면 이들 천사들이 자기를 보호할 것이라고 믿지 않으셨읍니다. 이 경우에, 현명하게도 영적 안전을 제 자리에 지킨 예수는 육체적 안전도 얻으셨읍니다. 그분은 성경을 성취시키지 못하는 일에서 미리 죽는 일을 방지하셨읍니다. 그분은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서 생존하신 것입니다.—시 91:1.
지존자의 은밀한 곳
9, 10. (ㄱ) 예수께서는 시편 91편이 자기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을 배척하셨읍니까? (ㄴ) 이 시편은 또한 누구에게, 어떠한 방법으로 적용됩니까?
9 시편 91편은 그 내용에서 필자가 언급한 여러가지 위험한 일이 있을 때, 그러한 위험한 때를 겪을 사람들에게 위안과 확신과 보증을 주기 위하여 적용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한 인간으로서 지상에 계실 때에 이 놀라운 시편을 마음에 간직하실 수 있었읍니다. 그 내용이 자기 개인에게 적용된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11절과 12절에 근거한 마귀의 거짓 제안을 배척하신 것은 그 시편이 자기에게 적용된다는 것을 배척하신 것이 아니었읍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굳은 사랑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면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14절을 성취시킬 그러한 분이었을 것입니다.
10 논리적으로 말해서 이 시편은 충실하게 그의 발자취와 그의 본을 따르는 침례받은 그의 제자들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들 각자가 ‘이 시편은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와 같이 나에게 개인적으로 적용된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한 반열로서 이들 참다운 제자들에게 적용된다는 뜻이며, 이 반열에 속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이 시편으로부터 영적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편은 그리스도의 충성스러운 참 제자들 중 어떤 특정한 한 제자에 대하여 예언한 것이 아닙니다.
11-13. (ㄱ) 계시록 어디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형제들의 남은 자들이 언급되어 있으며, 그들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안전 장소에 있어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1927년 8월 1일호 「파수대」(영문)지는 누가 “은밀한 안전 장소”에 있음을 알려 주었읍니까?
11 성서 ‘계시록’ 12장 17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형제들의 “남은 자들”을 언급합니다. 즉 그들이 기원 1914년 하늘에 하나님의 메시야 왕국이 탄생한 후에 재난이 심한 땅 위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읍니다.
12 그 왕국의 천적 산모의 “씨” 곧 자손들의 남은 자들에 관하여 계시록 12:17은 이렇게 말합니다. “용[‘사단’ 마귀]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여자의 씨의 남은 자들, 신세]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그 여자의 지상에 있는 씨의 남은 자들에게 ‘사단’ 마귀와 그의 악귀 천사들이 전쟁을 일으켜 옴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이 남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영적 안전 장소에 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이 명백한 사실과 일치하게 1927년 8월 1일호 「파수대」(영문)지에 발행된 “안전 장소”라는 기사에서 227면에 나오는 첫 항목은 계시록 12:17을 참조한 다음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13 “‘남은 자들’에게 속한 사람들은 분명히 은밀한 안전 장소를 알려고 부지런히 노력할 것이며, 그 안에 들어와서는 거기에 거할 것을 열망할 것이다.”
14, 15. (ㄱ) 그러한 이해로써 1927년에 어떠한 일련의 기사들이 나오기 시작하였읍니까? (ㄴ) 이것은 「파수대」지에서 현대 어떠한 무리의 사람들에 관하여 논하기 8년전이었읍니까?
14 그 당시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던 사람들의 이러한 이해로 시편 91편을 다룬 세개의 연속 기사가 “안전 장소”, “안전의 이유” 및 “방어와 안전”이라는 제목으로 1927년 8월 1일, 15일 및 9월 1일호에 발행되었읍니다.a 시편 91편에 관한 이 주석이 발행된 것은, 계시록 7:9-17에 묘사된 “큰 무리”가 형성되기 시작한 1935년보다 8년 전이었읍니다. (1935년 8월 1일 및 15일호 「파수대」(영문)에 발행된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 “큰 무리”라는 기사 참조) 이 “큰 무리”를 묘사하면서 영감받은 사도 ‘요한’은 계시록 7:14, 15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5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라].”
16. (ㄱ) “큰 무리”도 또한 어떠한 안전 장소에 있어야 하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예수 그리스도 외에 시편 91편에 예언된 자는 누구이며, 언제부터 특히 시편 91편이 적용될 필요가 있읍니까?
16 이 예언적 묘사에 의하면 “큰 무리”의 충실한 성원들도 오늘날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있는 여자의 씨의 “남은 자들”과 함께 영적 안전 장소에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지존하신 하나님께서는 “큰 환난” 동안에 그들을 보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들은 보존을 받아야만 지상에서 “큰 환난”을 살아 남아 하나님의 새 질서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의로운 새 질서에서 “큰 무리”에 속한 이들은 하나님의 영적 성전 마당에서 밤낮으로 하나님께 거룩한 봉사를 드리는 일을 계속합니다. 그러므로 시편 91편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제외하고는 그리스도의 제자들 중 어느 개인을 예언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 반열 혹은 회중으로서의 그의 침례받은 제자들을 의미하였음을 이해할 수 있읍니다. 그 시편의 적용이 특히 필요한 때는 ‘사단’과 그의 악귀 천사들이 하늘로부터 이 땅 근처로 쫓겨난 후인 1919년부터입니다. 그들이 쫓겨나는 일은 기원 1914년에 하나님의 메시야 왕국이 하늘에 탄생한 뒤를 이어 일어났읍니다.—계시 12:1-13.
17. 이제 시편 91편을 검토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 관하여 무엇을 자문해 볼 수 있읍니까?
17 이제 우리가 시편 91편을 검토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 관하여 이렇게 자문해 볼 수 있읍니다. 나는 이 믿음을 강화시켜 주는 시편에 언급된 은혜받은 반열에 속해 있는가? 우리가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시편에 묘사되어 있는 영적 안전 장소에 있음을 확신할 수 있읍니다. 이 시편은 서술적으로 이렇게 시작합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유숙하게 될 것이다, 신세].”—시 91:1.
18. “지존자의 은밀한 곳”이란 무엇이며, 왜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보거나 분별할 수 없읍니까?
18 이 “지존자의 은밀한 곳”은 그분이 친히 거하시는 곳인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곳은 천군으로부터도 떨어져 있는 곳입니다. 그곳은 기원전 1513년에 ‘시내’ 산 광야에서 예언자 ‘모세’가 세운 숭배의 장막의 제일 안쪽에 있는 지성소(至聖所)로 상징되었던 하늘에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 지성소에서는 황금 언약궤 시은좌(施恩座) 위에 기적의 ‘세키나’ 빛이 떠 있어서 하나님의 임재(臨在)를 상징하였읍니다. 지존자께서는 시편 91편에 묘사되어 있는 위협과 위험을 피해서 은밀한 곳에 계셔야 할 필요가 없읍니다. 오히려 이 “은밀한 곳”은 시편 91편에 요구된 일들을 성취시키는 사람들을 위하여 그분이 마련하신 숨는 곳, 보호받는 곳입니다. 그곳은 그들이 거할 곳, 그들의 보호의 장소입니다. 이곳은 영적 안전 장소이기 때문에 이 세상 사람들은 그들의 육안으로 이곳을 볼 수 없으며, 영적 분별력 없이는 그곳의 거주자들이 “은밀한 곳”에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읍니다.
19. (ㄱ) “은밀한 곳”에 있는 사람들은 무슨 쟁점에 있어서 영적으로 보호를 받았으며, 무슨 칭호로 보아 그것을 알 수 있읍니까? (ㄴ) 이 쟁점이 세상에 공표된 것은 언제였읍니까?
19 하지만 그곳에 충실하게 거하는 사람들이 누리는 영적 안전은 그들이 참으로 안전 장소에 있음을 증명해 줍니다. 그 사실은 그들이 지금 하늘과 땅 전체 앞에 놓여 있는 중대한 쟁점에 있어서 영적 보호를 받고 있음을 알려 줍니다. 그 쟁점이 무엇인가는 “은밀한 곳”을 마련하시는 분이 “지존자(至尊者)”라고 지칭됨으로써 알 수 있읍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우주 주권이라는 쟁점입니다. 누가 이 지구를 통치할 것인가의 문제를 놓고 열국이 싸운 제 2차 세계 대전이 한참 치열한 때에 이 쟁점이 인류 세계의 관심을 끌게 되었읍니다. 그때는 미합중국이 이 세계 전쟁에 참가하기 수개월 전이었읍니다. 1941년 여름, 미국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 시에서 개최된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의 국제 대회에서 그 당시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 회장은 “성실”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읍니다. 수만명의 대회 참석자들에게 한 이 연설에서 그는 모든 피조물 앞에 놓여 있는 쟁점이 우주 지배 문제라는 것을 명백히 설명하였읍니다.—1941년 8월 15일호 「파수대」(영문)에 발행된 “성실”이라는 주요 기사 245면 19항 참조.
20. 이 중대한 쟁점이 해결될 때는 언제이며, 이 쟁점을 직시하고 이 쟁점에서 유리하게 입증될 분의 편을 드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20 지구의 지배와 민족들의 주권이라는 문제는 현재도 열띤 논쟁이 되고 있읍니다. 세계 상태와 성서 연대는 이 세대가 바로 지존자께서 우주 지배 곧 우주 주권이라는 오래된 쟁점을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해결하셔야 할 세대임을 지적해 줍니다. “자존자의 은밀한 곳”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쟁점을 직시하고 그분의 우주 주권을 단호히 지지하고 나온 자들이며, 그러므로 국가적 주권과 지구 지배를 위한 이 세상 나라들의 투쟁에 대하여 그리스도인 중립을 지킵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의 비정치적 거주자들은 그분의 우주 주권을 인정하고 그것을 지지하지 않는 한 그곳에 들어가거나 머물러 있을 수 없읍니다. 그들은 바로 이 세대 내에 ‘아마겟돈’이라는 상징적 장소에서 있을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에서 그의 우주 주권이 입증될 것을 열렬히 기대하고 있읍니다.—계시 16:13-16.
21. 기원전 20세기에 어느 왕이 우주 주권이라는 쟁점에서 올바른 편에 섰었으며, 그는 어느 족장을 축복하였고, 무슨 말로 그렇게 하였읍니까?
21 성서 기록을 보면, 중동 ‘살렘’ 왕 ‘멜기세덱’은 통용 기원전 20세기에 우주 주권이라는 쟁점에 있어서 올바른 편에 섰었읍니다. 예언자 ‘모세’가 기록한 그에 관한 짧은 기록이 그것을 증명해 줍니다. 이 고대 왕은 족장 ‘아브람’(곧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야’ 땅으로부터 침략해 들어온 네 왕에게 승리를 거둔 것을 우주 주권자의 은혜로 돌렸읍니다. 이러한 취지로 창세기 14:18-20은 이렇게 알려 줍니다.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지존하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지존하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텍’에게 주었더라.”
22, 23. (ㄱ) ‘아브람’은 즉시 그가 우주 주권자 편에 선다는 공개적 증거를 어떻게 나타냈읍니까? (ㄴ) 우주 주권자는 신명기 32:8에 기록된 바와 같이 어떻게 그의 권리를 행사하셨읍니까?
22 천지의 주재(主宰)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에게, 침략자인 네 왕을 이겨 얻은 전리품의 10분의 1을 줌으로써 ‘아브람’은 왕-제사장인 ‘멜기세덱’과 함께 우주 주권자 편에 섰읍니다. 이에 대한 공개적 증거로서 ‘아브람’은 우주 주권자의 이름으로 맹세하였읍니다. ‘아브람’은 그가 취한 물품을 ‘소돔’ 왕에게 돌려줄 때 그렇게 하였읍니다. 창세기 14:21-24은 이렇게 알려 줍니다.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구조된 사람들]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지존하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람’의 맹세에 사용된 이름을 가지신 그 분은 ‘아브람’의 자손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중동 지방의 땅을 보존하실 때 우주 주권자로 행동하신 분입니다. 이에 관하여 ‘모세’는 이렇게 알려 줍니다.
23 “지극히 높으신 자[지존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신명 32:8.
24. ‘마리아’에게 수태를 알릴 때 어떻게 충실한 천사들도 우주 주권을 인정함을 나타냈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에서 그러한 인정을 어떻게 나타내셨읍니까?
24 하늘의 충실한 천사들도 천지의 창조주의 우주 주권을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천사 ‘가브리엘’이 ‘유대’인의 처녀 ‘마리아’에게 그가 어떻게 기적으로 ‘예수’라고 불리울 첫 아들의 어머니가 될 것인가를 설명할 때 그는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지존자]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누가 1:35) 그 후에 온전히 성장한 이 아들도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 자기가 누구를 우주 주권자로 인정하는가를 나타내셨읍니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지존자]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누가 6:35.
25. 중대성을 가진 쟁점에 관한 어떠한 기도가 우리 세대 내에 응답될 것이며, 그러므로 우리의 안전은 어디에 달려 있읍니까?
25 천지의 주재의 우주 주권을 반대하는 자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영감받은 기도가 응답될 때는 매우 가까왔읍니다. “저희로 수치를 당하여 영원히 놀라게 하시며 낭패와 멸망을 당케 하사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 (시 83:17, 18) 그러므로 우주 주권이라는 중요한 쟁점이 영원히 해결될 이 세대에 우리의 안전은 이 쟁점에 있어서 그분의 편을 굳게 지지함으로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것에 달려있읍니다. 우리가 그곳에 거하면 지금 지상에 편만해 있는 논쟁적 모든 정치 선전으로부터 해로운 영향을 받거나 잘못 인도되지 않도록 보호받게 될 것입니다.—시 27:5.
“전능하신 자의 그늘”
26, 27. (ㄱ) 손님으로서 “지존자의 은밀한 곳”으로 안내 될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ㄴ) 이분은 왜 그의 주권을 행사하실 수 있으며, 그러므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합리적인 행동은 무엇입니까?
26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무엇을 얻게 될 것입니까? 시편 91편 첫째 절 전체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유숙하게 될 것이다, 신세]” 이 경우에 유숙하게 되리라는 말은 전능하신 자의 손님 대우를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 전능하신 자가 바로 그 지존자이십니다. 바로 이분이 지존하시고 전능하신 두가지 특성을 함께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27 전능하시기 때문에 그분은 그의 지존성 곧 우주 주권을 계속 가지고 계실 수 있읍니다. 그분은 피조물 전반에 걸쳐, 그리고 그의 주권을 반항하는 지성있고 살아있는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그의 주권을 행사할 수 있읍니다. 피조물이 지존자의 주권을 반항하거나 무시한다는 것은 소용없는 일입니다. 그분은 전능하신 자이기 때문입니다. 합리적인 행동은 그분의 정당한 주권을 인정하고 그 주권에 복종하고 충성하고 진실되게 하며 항상 그분을 자기의 생명의 주권자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자들은 전능하신 자의 손님으로서 “지존자의 은밀한 곳”으로 안내되는 사람들입니다.
28. 지존자께서는 자기가 전능하신 분임에 대하여 언제 ‘아브라함’의 관심을 이끄셨으며, 그분은 어떻게 그것을 증명하셨읍니까?
28 오늘날 성서를 잘 알지 못하는 수백 수천만의 사람들은 우주에서 결코 동등한 것이 없는 전능자가 계시다는 생각을 납득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통용 기원전 20세기에 천지의 주재, 지존자께서는 그 점에 대하여 이 땅에 있는 그의 벗, 족장 ‘아브람’의 관심을 이끄셨읍니다. ‘아브람’의 아들 ‘이삭’이 출생하기 1년 전에 지존자께서는 그의 천사를 통하여 자신의 전능하심에 관하여 말씀하셨읍니다. 창세기 17:1, 2은 이렇게 알려 줍니다.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서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라].” 그분은 ‘아브람’과 그의 연로한 아내에게 기적으로 그들의 아들 ‘이삭’을 주심으로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음을 증명하셨읍니다. 그 때 이들 부부는 자녀를 출생할 능력에 있어서는 마치 죽은 것과 같았던 것입니다. ‘이삭’을 출생할 때 ‘아브람’은 백세였고 그의 아내는 구십세였읍니다. (창세 17:17; 21:1-5; 로마 4:19-21) 이 전능하신 자가 지금도 존재하십니다.
29. 오늘날 우리는 다만 누구를 통해서만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들어올 수 있으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29 이 전능하신 자는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에게 매우 친근한 분이었읍니다. (창세 35:11; 43:14; 48:3; 49:25; 출애굽 6:3) 우리가 그분과 비교할 때 말할 수 없이 보잘것 없는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와도 매우 친근해지실 수 있읍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그러한 분의 손님이 된다는 것을 잠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나 오늘날에 있어서는 우리가 이러한 친근한 관계를 가지려면 다만 그분의 가장 친근한 천적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직책을 통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하나님께 희생물로 자기의 완전한 인간 생명을 희생시키시기 전 밤에 그의 충실한 사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 14:6) 그러므로 그분을 통해서 우리는 우주에서 가장 높으신 분께 가까이 가서 그분을 우주 주권자 곧 그분께 우리의 생명과 사랑의 충성 및 헌신이 속해 있는 주권자이심을 인정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우리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유숙”하게 됩니다.
30, 31. 이 시편 필자가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에 관하여 기록할 때 그의 머리에는 무엇을 그렸을 것임에 틀림 없읍니까?
30 우리가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훌륭한 일입니까! 이것은 우리가 그분의 관심, 염려 및 주의를 이끌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작은 사람이 아주 큰 사람의 그늘에 있는 것이나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은 생명이 없는 것의 그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32:2) 이 시편 작자의 머리 가운데 상상되었던 올바른 그림은 시편 17:8에서 ‘다윗’이 지존자께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소서]” 하고 기도한 바와 같은 것입니다.
31 그렇습니다. 위에 있는 그림은 어미 새가 새끼 새들의 위에 떠서 그들 위에 그늘을 드리워 주는 그림입니다. 밑에 있는 새끼 새들은 그들이 어미 새의 그늘 밑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한 그들은 어미의 관심이 그들에게 있다는 것과 약탈하는 새로부터 보호를 받아 안전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한 새가 머리 위에서 날으는 것이 관심과 보호의 징조라는 것은 이사야 31:4, 5의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도 확증됩니다. “이와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영(嶺) 위에서 싸울 것이며 새가 날개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과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보호할 것이라. 그것을 호위하며 건지며 넘어와서 구원하리라.”
32. (ㄱ) 전능하신 자와 그의 “그늘 아래” 있는 우리는 각각 무엇에 비유되었읍니까? (ㄴ) 그분은 또한 지존자이시므로 충실한 주인으로서 어떻게 하실 수 있읍니까?
32 그리하여 전능하신 자는 힘센 새로 비유되었고 영적 안전의 “은밀한 곳”에 있는 사람들은 이 어미 새의 새끼로 비유되었읍니다. 그들이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있다는 것은 “은밀한 곳”을 그들에게 더욱 안전하게 해 줍니다. 그분은 지존자이시므로 만물은 그분 아래 있으며, 그분의 전능하신 시력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읍니다. 그분은 자기 “그늘 아래” 있는 자들에 대항하기 위한 어떠한 것의 움직임도 즉각적으로 포착하실 수 있읍니다. 그분은 즉시 손님으로서 자기와 함께 유숙하며 자기의 그늘 아래 있는 자들을 호위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행동을 취하실 수 있읍니다. 그분은 주인으로서 손님에 대한 책임을 충실히 영예롭게 이해하십니다. 이것은 얼마나 위안이 되는 소식입니까! 이 외에 또 어디에서 우리가 진정한 영적 안전을 얻을 수 있겠읍니까?
[각주]
a 여러해 전 곧 1897년에 발행된 「아마겟돈 전쟁」이라는 책 592면 1항에는 이러한 말이 있다. “이 기간을 묘사하는 한 시편은 이렇게 선언한다.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충실한 성도들, 그리스도의 몸의 성원들, 이들 선택된 성원들은 이제 멀지 않아 완성될 것이다] 가까이 못하리로다.’—시 91:7.”
그리하여 이미 1897년 당시에도 시편 91편에 나오는 개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반열인 합성체로 고려되었다.
[56면 삽화]
예수에게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고 할 때 마귀는 시편 91편을 마치 육체적 안전을 보증해 주는 것처럼 부정직하게 인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