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믿어야 하는가?
어떠한 추리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는가? 성서는 우리에게 하나의 지침을 제시해 준다. 성서는 말한다. “창세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이] ···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느니라].”—로마 1:20.
“만드신 만물”—창조물 자체를 숙고함으로 많은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의 배후에 무엇인가가 또는 누군가가 틀림없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여러 이론으로 현대 과학 사상에 심대한 영향을 미쳐 온 ‘아인시타인’은 이렇게 말하였다. “과학 연구에 깊이 몰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의 영—인간보다 엄청나게 월등하여 미약한 우리로 하여금 비천한 느낌이 들게 하는 영이 우주의 법칙에 명백하게 나타나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당신 자신을 보라
성서는 말한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시 19:1) 그것도 얼마나 웅변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는가!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과 특성이 전시되는 것을 보기 위하여 별들이 반짝이는 광대한 하늘을 바라볼 것까지 없다. 단지 당신 자신을 고려해 보라.
당신의 손을 보라. 지금 읽고 있는 잡지를 두손으로 잡고 있는가? 그렇다면 틀림없이 잡지를 눈에서 적당한 거리에 두기 위해 팔꿈치를 구부리고 있을 것이다. 손가락 하나 하나는 잡지가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꼭 필요할 만큼, 그러나 종이가 찢어지지는 않을 만큼 적당히 압력을 가하고 있다. 당신은 읽기 시작하기 전에 이 모든 것을 미리 곰곰히 생각해 두었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당신이 단지 최소한의 결정만 내리면 되도록 당신의 몸이 이 모든 일을 조직한 것이다.
당신의 몸이 비교적 휴식 상태에 있지만, 눈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눈은 자동적으로 다음에 계속되는 단어 혹은 단어 집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시각 인상은 눈 뒷면에서 전기 충격으로 변화되고 이 전기 충격은 뇌로 전달되고 있다. 당신이 정신을 집중하고 있다면, 뇌는 장래에 사용하기 위하여 지식을 저장하고 있으며 새로운 자료를 이전에 받았던 자료와 비교하고 있다.
한편, 당신은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지만, 당신의 심장은 부지런히 피를 ‘펌프’질하여 복잡한 여로를 따라 온몸으로 보내고 있다. 이 피는 필수적인 물질들을 필요한 장소들로 나르고 있으며, 다음에는 노폐물들을 몸 밖으로 배출할 수 있는 장소들로 나르고 있다.
이에 더하여, 횡경막의 운동은 당신의 양쪽 폐를 산소로 채우고 있으며, 다음에는 이산화탄소를 제거하기 위해 폐를 수축하고 있다.
방금 전에 식사를 했다면, 당신이 의식적으로 지시하지 않지만, 그 음식은 지금 소화가 돼 가고 있다. 음식은 당신의 위에서 산과 혼합되어 그 기본 성분으로 분해되고 있든지, 아니면 “연동 운동”이라고 알려진 복잡한 근육 운동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장을 통과하면서 혈류 속으로 영양분이 흡수되고 있을 것이다.
기타 많은 운동들 역시 진행 중에 있다. 당신의 골수(骨髓)는 교체할 혈액 세포를 만들고 있다. 당신의 피부는 닳아 없어진 표피 세포를 대치시키기 위해 새로운 세포를 제조하고 있다. 당신의 발톱, 손톱 및 머리칼이 자라고 있다. 선(腺)들은 복잡한 물질들을 제조하여 당신의 신체 화학 구조의 균형을 잡아 주고 있다. 이 모든 일이 당신의 신체가 분명 휴식을 취하고 있는 바로 이 순간에 진행되고 있다!
인간 신체의 기계 작용에 수반되는 기술은 이 우주 시대에 인간이 이룰 수 있었던 어떤 것보다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더 발달되어 있다. 이러한 걸작품을 단순한 우연의 산물로 보는 것이 논리적인가?
진화론은 인간을 자연 법칙이 만들어 낸 산물이라고 말하면서도 그 “법 제정자”가 누구인지를 설명하지는 않는다. 사실상 진화론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서 필자의 다음과 같은 논리를 따르는 것이 더—우리가 알기에, 사물들이 실제로 발생하는 방법에 따르면 더—이치적이 아니겠는가? 그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시나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 신줄 너희는 알찌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로다.]”—시 139:14; 100:3.
사실을 직시하자
서양의 유물론적인 사고의 경향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시인하거나 “인간은 어디서 기원하였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영적인 답을 인정하기를 꺼려한다. 한 자유 사상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현재 지식에 입각하여, 그 테두리 안에서 우리의 의견을 표명할 때 비로소 분별력과 이성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참으로 그러한가?
존재한다는 것은 알면서도 과학자들이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다. 인간의 정신, 우리의 양심, 우리의 숭배 본능 등—이 모든 것은 분명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과학은 “현재 지식”에 입각하여 이것들을 설명할 수 없다. 생명 자체는 어떠한가? 생물과 무생물을 구분짓는 이 강력한 “생명 ‘에너지’”는 무엇인가? 과학자들은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일상 경험의 일부이다. 사실상 그것은 너무나 일반적이어서 우리는 생명 자체가 참으로 얼마나 기적적인 것인가 하는 점을 망각하는 경향이 있다.
흔히 듣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의하면 모든 결과에는 하나의 원인이 있다. 인체를 구성하는 놀랍게 섬세한 기계 장치에도 하나의 “원인”이 있어야만 한다. 오늘날 우리는 이전 어느 세대보다도 그 제일 “원인”이 얼마나 지혜로운가 하는 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 인간의 정신, 인간의 양심과 같은 것들 및 생명 자체의 “원인” 즉 제작자는 더더욱 지혜로와야 할 것이다. 참으로, 성서의 설명 방법 이외에는 이러한 것들을 만족스럽게 설명할 도리가 없다. 자신이 숭배하는 하나님에 대하여 성서 필자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나이다].” (시 36:9) 우리의 “현재 지식”으로는 다른 결론을 내릴 아무런 근거가 없다.
그렇다면 왜 나쁜 일들이 발생하는가?
상기의 논증을 고려하면서 ‘필리핀’의 한 무신론자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했다. “자연에는 어느 정도 질서, 경이 및 미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진상의 반쪽 면에 불과하다. 다른 반쪽은 무서운 혼돈이다.” 자기가 말하는 “혼돈”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한 후—자연의 재난, 질병 등—그는 계속 이렇게 말한다. “종교적인 사람은 자기의 신앙심을 강화하는 자연의 질서를 사랑스런 눈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그러한 신조를 약화시키는 혼돈으로부터는 눈을 돌려 버린다.”
당신도 그렇게 하는가? 아니면 이 무신론자가 불신이라는 자기의 신조를 약화시키는 “자연의 질서, 경이 및 미”로부터 눈을 돌려 버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예를 들어, 질병에 대해 불평을 할 때 그는 진상의 일부만을 말하고 있다. 그는 우리 몸의 경이로운 치유력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했는데, 이것이야 말로 경이로운 능력을 가지신 조물주가 계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한번은 ‘나폴레옹’의 군의가 황제의 수많은 병사들을 치료한 데 대해 황제로부터 감사를 받았다. 일설에 의하면, 이 의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그들을 돌봤고, 하나님은 그들을 치료하셨읍니다.”
게다가, 지금 존재하는 질병 및 기타 문제들을 빙자하여 하나님의 존재에 의문을 제기할 도덕적 권리가 사람에게 있는가? 인간의 실정(失政), 전쟁, 범죄, 부정직 및 이와 같은 것들이 십중 팔구 이러한 문제들의 원인임이 사실이 아닌가? 주로 인간 자신이 발전시킨 환경 및 생활 습관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질병—심장병이나 암 따위—이 얼마나 많은가? 인류 중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궁핍과 불결함 가운데 살고 있다는 현실만 아니라면 얼마나 많은 다른 질병들이 제어될 수 있었을 것인가!
그렇지만, 인간의 문제들이 모두 인간 자신의 직접적인 잘못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님은 사실이다. 하나님은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도록 허락 하시는가? 이러한 일들은 그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가?
아래의 예는 우리가 요점을 좀더 명확히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아일랜드’ 서안의 한 섬에는 「버림받은 마을」로 알려진 장소가 하나 있다. 그곳은 아무도 살지 않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상상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집들의 상태가 좋지 않다. 지붕은 벗겨져 있고, 문들이 떨어져 나갔다. 많은 벽들이 무너져 있다.
이 마을의 황폐된 상태에 비추어 볼 때, 당신은 그곳의 집들을 누군가가 설계하고 건축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하겠는가? 아니면, 당신은 다소 본능적으로 “집마다 지은 이가 있[느니라].”—그렇다, 심지어 황폐된 집이라 할지라도 말이다—는 성서의 말에 동의하겠는가? (히브리 3:4) 이 집들이 버려진 상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들을 누군가가 지었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또한 이 집들의 현재 상태가 꼭 건축자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집이 나빠지는 것을 막는 방법은 많이 있다. 그러나 소유주들이 그 집들을 버린 것이다. 그래서 집들이 지금 황폐된 상태에 있게 된 것이다.
인간의 입장도 이와 비슷하다. 성서는 조물주께서 사람을 완전하게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사람에게는 땅을 정복하고 자녀들로 충만하게 할 책임이 주어졌다. (창세 1:28) 이의 성공은 인간이 조물주의 지시를 따르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었다. 인간이 이 교훈들을 따랐더라면 “혼돈”이 없었을 것이고 정복된 땅에는 자연의 재난이나 질병으로 인한 생명의 상실도 전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의 창조주의 인도를 배척하였다. 그래서 지금 인간의 “집”은 명백히 손질이 잘 되어 있지 않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의 행로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율적인 의지를 부여하셨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순종하도록 강요하지 않으신다. 그렇지만, 인간이 잘못된 다스림을 해 온 여러 세기 동안,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섬기기 위해 기꺼이 자기들의 자율적인 의지를 행사할 자들을 찾아 오셨다. 성서는 자신의 창조물들을 다스릴 하나님의 권리를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이 머지 않아 멸망될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들은 생명의 원천을 배척함으로 인하여 생명을 몰수당할 것이다. 그러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요구 조건에 순응시키는 자들은 이 땅이 하나님의 하늘 정부 아래서 세계적인 낙원으로 변화되는 것을 목격하는 즐거움을 갖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인간의 불완전과 잘못된 다스림으로 인하여 박탈당했던 모든 축복을 즐기게 될 것이다.—계시 21:3-5.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에 관해 아는 것은 모두에게 극히 중요한 일이다. 일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도록 어떻게 도움을 받았는지 알면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8면 삽화]
인체는 누가 설계하였는가?
뇌: 너무나 복잡하여 인간이 만든 최상의 ‘모델’도 이에 비하면 장난감에 불과한 살아있는 ‘컴퓨우터’. 기억하고 배울 수 있는 용량은 현재 인간이 일생 동안 사용하는 것보다 10억배로 추산됨.
눈: 현상소에서 현상이 필요없는 3차원의 즉석 사진을 찍는 완전 자동, 초점 자동 조절, 얼룩없는, ‘컬러’ 영화 ‘카메라’.
심장: 인간이 고안한 어떤 기계보다도 월등히 효율적인 ‘펌프’. 매일 5,700‘리터’ 이상을 ‘펌프’질하는데, 이는 우리의 몸을 곧장 150‘미터’ 들어올리기에 충분한 작업량이다.
간: 피, ‘비타민’, ‘미네랄’ 및 영양소들을 필요에 맞춰 저장, 방출하는 일을 포함하여 500여 가지의 기능을 수행하는 극히 복잡하고 다양한 화학실험실, 화학 변화를 촉진하는 1,000여가지 효소를 제조한다.
뼈: 무게가 9 ‘킬로그램’에 불과하지만 강철 대들보처럼 강한 구조물. 근육을 고정시키고 중요 기관들을 보호하기 위해 고도의 장비를 갖춘 균형잡힌 기관.
신경 조직: 전기 화학 충격을 통하여 1초에 1억개의 감각을 수신 혹은 그에 따라 반응을 나타내는, 몸 구석구석까지 미치는 통신망. 피부, 근육, 혈관이 미치는 뼈 및 기관에 매 평방 ‘밀리’까지 미친다.
[9면 삽화]
황폐된 집이라 할지라도 “누군가가 건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