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영
성실한 탐구자에게는 성서에서 말하는 “영혼”이 사람의 불멸하는 일부분이 아니며, 사람이 죽은 후에 의식을 가지고 계속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영혼의 참된 본질에 관해 압도적인 증거를 보여 주면, 어떤 사람들은 사람 속에 있는 어떤 것이 사후에도 계속 존재한다는 자기들의 신념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다른 주장을 제시한다.
그런 목적으로 흔히 사용되는 하나의 성서 귀절은 전도서 12:7인데, 내용은 이러하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영; spirit]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느니라].” ‘웨슬리’파 감리교 신학자 ‘아담 클라아크’는 그의 저서[주석]에서 이 귀절에 관하여 이렇게 썼다. “여기서 그 현명한 사람은 육신과 영혼을 매우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다. 그 두 가지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두 가지 다 물질이 아니다. 물질인 육신은 그의 근원인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비물질인 영은 하나님께 돌아간다.” 이와 유사하게 「성경에 대한 가톨릭 주석」이라는 책에서는 “영혼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 두가지 주해서는 영혼(soul)과 영(spirit)을 동일시하고 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다른 학자들은 전혀 다른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가톨릭’계 번역판 「신 미어 성서」(1970년, P. J. Kenedy & Sons, New York 판)에 기준한 「성서 신학 용어 사전」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영’이 ‘육체’와 대조적으로 사용되었을 때에 ··· 그 목적은 사람의 물질적인 부분과 비물질적인 부분을 구별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 ‘영’은 영혼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번역판은 전도서 12:7에 “영”이라는 단어 대신 “생명 호흡”(life breath)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프로테스탄트’계 「성서 주해」에서는 「전도서」의 필자에 관해 “‘코헬렛’의 말은 사람의 개성이 계속 존재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고 설명하였다. 이러한 상반되는 결론들을 볼 때, 우리는 영이 무엇이며, 그것이 어떤 의미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지 확인할 수 있는가?
전도서 12:1-7에는 노령의 영향과 사망이 시적 언어로 묘사되어 있다. 죽은 후에 몸은 결국 분해되어 다시 땅의 흙이 된다. 반면에, “영”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사람의 죽음은 영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과 연관되어 있으며, 이 사실은 사람의 생명이 어떤 면으로 그 영에 의존해 있음을 시사한다.
전도서 12:7의 원문을 보면, “영” 혹은 “생명 호흡”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루아흐’이다. 그에 해당하는 희랍어 단어는 ‘프뉴마’이다. 우리의 생명이 호흡 과정에 의존해 있기는 하지만 “호흡”(많은 번역들은 ‘루아흐’와 ‘프뉴마’라는 단어들을 그렇게 번역하고 있음)이라는 단어가 언제나 “영”을 대신할 수 있는 적절한 대용어는 아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히브리’어와 희랍어 단어 곧 ‘네사마’(‘히브리’어)와 ‘프노에’(희랍어)도 역시 “호흡”이라고 번역된다. (창세 2:7과 사도 17:25 참조.) 그렇지만, “영”이라는 단어 대신에 “호흡”을 사용함으로써 번역자들이 원어의 단어는 생명의 지속에는 필요하지만 개성은 가지지 않은 어떤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영이 무엇인가를 알아 냄
사람의 생명이 영(‘루아흐’ 혹은 ‘프뉴마’)에 의존해 있다는 사실은 성서에 분명히 기술되어 있다. “주[여호와]께서 저희 호흡[영, ‘루아흐’]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시 104:29) “영[‘프네우마’]이 없는 몸은 죽은 것[이다].” (야고보 2:26, 신세) 따라서, 영은 몸에 활기를 주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활기를 주는 이 힘은 단순한 호흡이 아니다. 왜냐 하면, 호흡이 끊어진 후에도 잠시나마 몸 세포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인공 호흡이 성공을 거둘 수 있고, 또 신체 기관을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이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신속히 행해지지 않으면 안된다. 일단 몸의 세포에서 생명력이 사라지면 생명을 연장시키려는 노력은 허사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호흡을 다 동원해도 세포 하나를 소생시킬 수 없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영”이란 보이지 않는 생명력, 사람의 몸의 모든 산 세포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생명력임이 분명하다.
이 생명력은 사람 속에서만 작용하는가? 성서의 설명이 이 점에 대해 확실한 결론을 얻는 데 도움이 된다. 세계적인 홍수에서 인간 생명과 동물 생명이 멸망된 것에 관하여 성서는 이렇게 보고한다. “육지에 있어 코로 생물의 기식[루아흐, 영; 생명력, 신세]을 호흡[네사마]하는 것은 다 죽었더라.” (창세 7:22) 전도서 3:19에는 사망과 관련하여 동일한 기본적인 점이 지적되어 있다.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루아흐’, 영]이 있어서 이의 죽음 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느니라].” 따라서, 영이 몸에 활기를 준다는 점에 있어서는 사람이 짐승보다 우월할 것이 없다. 같은 보이지 않는 영 혹은 생명력이 사람이나 짐승에게 똑 같이 적용된다.
짐승과 사람에게서 작용하는 영 혹은 생명력은 어떤 의미에서 기계나 기구에 통하는 전자나 전기의 흐름에 비할 수 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전기는 그 전기가 통하는 기계나 기구의 형태에 따라 여러 가지 기능을 발휘하게 한다. 난로라면 열을 낼 수 있게 하고, 선풍기라면 바람을 낼 수 있게 하고, ‘컴퓨터’라면 문제를 풀 수 있게 하고, ‘텔레비젼’이라면 영상과 음성과 기타 소리를 재생할 수 있게 한다. 하나의 기구에서 소리를 내는 동일한 보이지 않는 힘이 다른 기구에서는 열을 낼 수 있고, 또 다른 기구에서는 수학적인 계산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전류가 작용 혹은 작동하는 기계나 기구의 흔히 복잡한 특성을 그 전류가 떠맡는가? 아니다. 전류는 단순한 전기 곧 단순한 힘 혹은 ‘에너지’의 한 형태로 남아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과 동물에게는 모두 “동일한 호흡[‘루아흐’, 영]” 즉 활동케 하는 동일한 힘이 있다. 사람으로 하여금 생활 기능을 수행할 수 있게 하는 영 곧 생명력은 동물들로 하여금 그렇게 할 수 있게 하는 영과 결코 다른 것이 아니다. 그 영은 죽은 몸의 세포의 특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예를 들면, 뇌세포의 경우, 영은 뇌에 저장된 정보를 지니고 있지 않으며 이들 세포를 떠나서 사고 과정을 지속시키지 않는다. 성서는 이렇게 알려 준다. “그 호흡[영, ‘루아흐’]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생각, 흠정역]가 소멸하리로다.”—시 146:4.
그러므로, ‘루아흐’ 곧 영이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의식적 존재가 계속한다는 의미일 수 없음이 명백하다. 그 영은 인간의 사고 과정을 지속시키지 않는다. 영이란, 몸을 떠난 의식적 존재가 아닌 생명력에 불과하다.
영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방법
그러면, 보이지 않고 비인격적인 이 힘 혹은 영이 어떻게 하나님께로 돌아가는가? 그것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이 계신 하늘로 돌아가는가?
“돌아가다”라는 말의 성서적 용법을 보면 그것이 모든 경우에 실제적인 장소의 이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불충실한 ‘이스라엘’인들은 이러한 권고를 받은 일이 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말라기 3:7) 이것은 ‘이스라엘’인들이 지구를 떠나 하나님의 어전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자기의 처소를 떠나 ‘이스라엘’인들과 함께 지상에 거하실 것이라는 의미도 아니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돌아오”는 것은 그릇된 행로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의로운 길에 다시 순응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돌아가리라”는 것은 그의 백성에게 다시 한번 호의를 가지고 주의를 돌리리라는 의미였다. 그 두 경우 모두, 돌아온다는 것은 지리적인 위치상의 실제적 이동이 아니라 태도와 관련이 있었다.
어떤 것이 돌아가려면 반드시 실제적인 이동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업체 혹은 소유권의 이전의 경우도 예시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나라에서는 철도 관리권이 개인 기업체에서 정부로 이전되는 일이 있다. 그러한 이전이 있을 때에도 철도 시설과 심지어 모든 기록까지 여전히 제 위치에 있을 수 있다. 바뀌는 것은 그들에 대한 권한이다.
영 혹은 생명력의 경우도 그와 같다. 사망시에 영이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위하여 실제로 지구에서 하늘 영역으로 이동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다. 죽은 사람이 한 때 즐겼던, 지성있는 피조물로서의 존재라는 선물 혹은 은사가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사람을 살아있게 하는 데 필요한 것 즉 영 혹은 생명력은 하나님의 수중에 있다.—시 31:5; 누가 23:46.
이러한 입장은 재판관에게 ‘나의 생명은 재판장의 수중에 있다’고 말하는 피고인의 입장에 비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말은 자기 생명의 장래는 재판관에게 달려 있다는 뜻이다. 피고인에게 선택권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수중을 벗어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죽은 사람은 자기의 영 혹은 생명력에 대한 관리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개인의 장래 생명의 전망을 좌우한다는 의미로 하나님께로 돌아갔다. 죽은 사람에게 영 혹은 생명력을 회복시키실 것인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필연적으로 사후 생명의 모든 가능성을 배제하는가? 고려해야 할 다른 점들이 있지 않는가?
재생 혹은 환생이라는 것이 있는가?
소위 그리스도교 혹은 비그리스도교를 막론하고 여러 종교에 속한 수많은 사람들은 인간에게는 전생(前生)이라는 것이 있었고 사후에도 내생(來生)이라는 것이 있다고 믿는다. 그들의 개념은 아주 구구하지만, 인간의 어떤 부분은 다른 몸에 재생(再生) 혹은 환생(還生)한다는 신앙은 공통적이다.
재생에 대한 신앙을 지지하는 한 가지 논증을 「불교 입문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때 우리는 재생으로 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경험을 한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전에 결코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지만 아주 낯익다고 속으로 느끼는 사람을 만나는가?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곳 저곳을 방문할 때 그 주위 환경이 우리에게 매우 낯익다는 인상을 받는 경우가 있는가?”
당신은 그러한 경험을 한 일이 있는가? 당신은 어떤 사람을 만나보고 오래 전부터 그 사람을 안다고 느낀 적이 있는가? 그러한 경험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들 사이에는 유사점이 많다. 아마 얼마 동안 생각한 후에 당신은 그 사람이 친척이나 친구의 성격이나 신체적 특징과 비슷한 점들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당신은 특정한 도시에 살았거나 사진들을 보았을지 모른다. 그래서, 다른 도시에 갔을 때에 몇가지 유사한 점들을 보게 되면 당신은 그리 생소하고 낯선 환경 가운데 있지 않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전에 알지 못한 사람들과 장소에 대하여 가지는 친숙한 느낌은 어떤 전생(前生)의 산물이 아니라 현생에서의 경험의 결과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이치적이 아닌가? 참으로 모든 사람에게 전생이라는 것이 실제로 있었다면 그들 모두가 이것을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왜 수많은 사람들은 전생을 가졌었다는 느낌 혹은 생각이 조금도 없는가? 더우기, 사람이 전생을 회상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전생의 잘못을 피할 수 있겠는가? 그러한 전생이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이 만일 전생에 대해 자세히 안다면 그것은 생명의 부담이 될 것이다’ 하고 설명하려고 한다. ‘모한다스 케이. 간디’는 그러한 표현을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가 여러 번의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자연이 베푸는 친절이다. 우리가 겪은 무수한 출생을 자세히 안들 좋은 것이 무엇이겠는가? 만일 우리가 그러한 막대한 양의 기억을 지니고 있으면 생명은 부담이 될 것이다. 현명한 사람은 많은 것을 고의로 잊어버린다. 그것은 변호사가 사건을 처리하자마자 그 사건과 세부점을 잊어버리는 것과 같다.” 그것이 흥미있는 설명이기는 하지만 확실한 근거가 있는가?
우리가 경험한 여러 가지 일들을 회상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 제한되어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정신은 확실히 그러한 일에 대하여 전적으로 공백은 아니다. 변호사는 어떤 사건의 정확한 세부점은 잊어버릴지 모르지만 그러한 사건을 다룰 때에 얻은 경험은 그의 지식의 일부가 된다. 만일 그가 실제로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면 그의 손실은 참으로 크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더욱 방해가 되는 것은 기억력이 나쁜 것인가, 좋은 것인가? 쌓아놓은 지식과 경험을 잘 기억하는 노인이 모든 것을 거의 잊어버린 노인보다 훨씬 유리하지 않은가?
사실, 전생에서 이미 배운 것을 모두 다시 배워야 하는 것이 무슨 “친절”인가? 만일 당신이 사는 동안 십년마다 당신이 아는 모든 것을 거의 다 잊어버리고, 언어도 다시 배워야 하고 지식과 경험을 다시 쌓기 시작해야 한다면 그리고 그것도 결국 잊혀질 것이라면, 그것을 당신은 “자연이 베푸는 친절”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이것은 좌절감을 갖게 하지 않겠는가? 그 결과 심한 패배감을 갖게 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그러한 일이 칠십년 혹은 팔십년마다 발생한다고 상상할 이유가 무엇인가?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러한 재생을 인류에 대한 목적의 일부로 삼을 수 있었다고 당신은 상상할 수 있는가?
재생의 교리를 믿는 많은 사람들은 나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낮은 신분이나 곤충, 새, 혹은 짐승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믿는다. 그러면 범죄와 폭력이 전례없는 규모로 증가하는 때에 대대적인 인구 폭발이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또한, 가장 낮은 신분에 있는 사람들도 교육의 기회가 주어질 때에 탁월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예를 들면, 1973년 10월 26일자 「뉴우요오크 타임즈」지는 낮은 신분의 16세 소녀가 인도 ‘칼리파심’에 있는 학교에서 가장 총명한 소녀였음을 보고하였다. 그 소녀는 가장 높은 신분인 ‘브라만’ 계급에 속한 소녀보다 영리하였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재생 혹은 환생의 교리는 그러한 일에 대한 만족할 만한 설명을 제시할 수 없음이 사실이 아닌가?
또한 그러한 가르침이 맺은 열매를 생각하여 보라. 그것은 인간들에게 교육을 통하여 생활을 개선할 수 있는 가망성을 주지 않고 불량한 노동 조건 하에서, 비천한 일을 억지로 하게 함으로 많은 사람들에게서 고귀한 신분을 박탈하지 않았는가?
성서는 재생의 교리를 가르치는가?
물론, 어떤 사람들은 논리적인 추론이 재생의 가능성을 반드시 배제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지 모른다. 상술한 논증에 대하여 그들은 이렇게 대답할지 모른다. ‘심지어 성서도 재생을 가르친다. 이것은 다만 인간들이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여러 가지 것 중 하나이다.’
재생을 믿는 사람들이 성서를 거론하므로, 성서의 내용을 고려하여 보기로 하자. 도대체 재생을 믿을 만한 어떠한 성서적 증거가 있는가? 「불교란 무엇인가?」(영문)라는 책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리스도교 독자들에게 우리는 그것(재생의 교리)이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파손된 문헌에 명백히 나타나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가 다시 출생한 침례자 ‘요한’ 혹은 ‘예레미야’ 혹은 ‘엘리야’라는 널리 알려진 소문을 고려하여 보라. (마태 16:13-16) ‘헤롯’도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킴을 받은 침례자 ‘요한’’이라고 생각한 것같다.”
이러한 논증이 올바른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침례자 ‘요한’ 혹은 ‘예레미야’ 혹은 ‘엘리야’라고 자처하셨는가? 아니다. 이러한 주장을 한 사람들은 예수의 참된 신분 즉 그분이 약속된 메시야 곧 그리스도임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예수께서는 도저히 침례자 ‘요한’일 수 없었다. 왜냐 하면, 연하자인 예수께서 약 삼십세 되셨을 때 연상자인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셨기 때문이다. (마태 3:13-17; 누가 3:21-23) ‘헤롯’ 왕은 ‘요한’을 처형한 데 대한 심한 죄책감 때문에,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킴을 받은 ‘요한’이라는 비이치적인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재생 혹은 환생에 대한 신앙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말씀이 있지 않는가? 그렇다. 하나 있다. 한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침례자 ‘요한’을 고대 ‘히브리’ 예언자 ‘엘리야’와 결부시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줄을 깨달으니라.” (마태 17:12, 13) “‘엘리야’가 이미 왔”다는 예수의 말씀은 침례자 ‘요한’이 재생한 ‘엘리야’라는 의미였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는, 성서 전체의 내용을 기초로 대답해야 한다. 예수께서 지상 봉사를 수행하시던 당시 많은 ‘유대’인들은 ‘엘리야’가 문자적으로 다시 올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말라기’의 예언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언자 ‘엘리야’를 보내실 때를 미리 지적하였다. (말라기 4:5) 그러나 침례자 ‘요한’은 본인 자신이 ‘엘리야’라거나 환생한 그 ‘히브리’인 예언자라고 생각지 않았다. 한 때 어떤 ‘유대’인들이 그에게 “당신이 누구요? ‘엘리야’요?” 하고 질문하였다. ‘요한’은 “아니요” 하고 대답하였다. (요한 1:21, 새번역) 그러나 ‘요한’이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메시야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 예언되었다. (누가 1:17) 따라서, 예수께서 침례자 ‘요한’을 ‘엘리야’와 결부시킨 것은 단순히 그 예언이 과거의 ‘엘리야’의 사업과 같은 사업을 한 ‘요한’에게 성취되었음을 알리는 말씀이었다.
환생의 신봉자들이 지적하는 또 다른 성귀는 로마서 9:11-13이다. “[‘에서’와 ‘야곱’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말라기 1:2, 3에]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이 귀절은 하나님의 선택이 ‘야곱’과 ‘에서’가 ‘리브가’에게서 출생하기 전에 누린 생애에 행한 바에 근거한 것임을 나타내지 않는가?
다시 읽어보라. 그 귀절은 그 두 사람이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에 하나님의 선택이 이루어졌음을 명시하고 있음에 유의하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은 어떤 전생의 행위의 기록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러면, 무엇을 근거로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들이 출생하기도 전에 선택하실 수 있었는가? 성서는 하나님께서 태아를 보실 수 있다고 알려 준다. 따라서 그분은 출생 전에 인간의 유전적 구성을 아신다. (시 139:16) 하나님께서는 예지를 사용하여 그 두 아들이 기질과 성품이 기본적으로 어떠할 것인가를 파악하시고 더 우월한 축복을 받기에 합당한 아들을 선택하실 수 있었다. 그 두 아들의 생활 기록은 하나님의 선택이 현명하였음을 확증한다. ‘야곱’은 영적 관심사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표시하였지만, ‘에서’는 물질주의적인 경향과 거룩한 사물에 대한 인식의 부족을 나타냈다.—히브리 11:21; 12:16, 17.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시고 ‘에서’를 미워하셨다’는 말을 「말라기」로부터 인용한 것을 생각해 보자. 이것 역시 그들의 유전적 구성을 근거로 한, 여호와의 그들에 대한 견해와 관계가 있다. 그들의 생존시로부터 여러 세기 후에 ‘말라기’가 이러한 말씀을 기록하였지만,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 두 아들의 출생 전에 그들에 대하여 시사한 바를 확증하였다.
환생을 지지하기 위하여 일부 사람들이 인용하는 또 다른 것은 예수의 제자들이 제기한 질문이다. 제자들은 날 때부터 소경인 한 사람에 대하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하고 질문하였다. (요한 9:2) 이러한 질문은 그 사람에게 분명히 전생이 있었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머니의 태내에서 자라는 아이가 출생 전에 죄를 범하였다는 암시조차 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요한 9:3) 다시 말하면, 이 사람이 소경이 된 것과 같은 인간 불완전성과 결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기적에 의한 고침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었다. 아무도 소경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에게 시력을 주실 수 있음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죄많은 인간들이 존재하도록 허락하심으로써 그들의 불완전성과 결함을 통하여 자신이 그들을 위하여 무엇을 하실 수 있는가를 나타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재생의 개념을 지지한다고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성서 귀절들이 있을 수 있으나, 좀 더 면밀히 조사하여 보면 재생을 지지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사실 성서 어디에서도 육체가 죽은 후에 생존하는 영혼 혹은 영 혹은 다른 것의 재생 혹은 윤회(輪廻)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 일부 사람들이 출생 혹은 환생의 뜻으로 성경을 곡해하려고 시도하였을 뿐이다. 그것은 성서의 교리가 아니다.
성서는 의식을 가진 존재가 사망시에 육체를 떠나는 영혼 혹은 영에 의하여 계속되지 않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첫 사람에게 불순종에 대한 형벌로 사망을 선고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재생 혹은 환생의 전망을 두지 않으셨다. ‘아담’에게 하신 말씀은 이러하였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창세 3:19) 그렇다. 사람은 생명없는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그러면 우리는 현 생명이 인생의 전부라고 이해해야 하는가? 아니면 어떤 다른 면으로 누릴 수 있는 미래의 생명에 대한 마련이 있는가? 이러한 마련의 혜택을 얻으려면 산 사람이 죽은 사람들을 돕는 것이 필요할 것인가, 아니면 죽은 사람은 산 사람의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는가?
[45면 삽화]
영은, 여러 가지 기계를 작동시키지만 그 특성을 떠맡지 않는 전기와 아주 흡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