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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파수대—1978 | 8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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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우리로 하여금 외인들과 형제들 모두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하셨읍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문제를 다음과 같이 편지하였읍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외국인]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교육받지 못한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로마 1:14, 15) ‘바울’은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읍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바울’은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한 후에 “복음”의 축복을 상실하거나 배척당하게 되기를 원치 않았읍니다.—고린도 전 9:19-27.
18.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기도에 합당하게 생활할 수 있읍니까?
18 결국, 우리가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기도할 때, 우리는 다른 모든 일을 제쳐 두고 우리가 하는 일이 항상 그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며, 거룩하게 하도록 도움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진리를 찾는 일에서 그들을 넘어지게 하는 아무 것도 그들 앞에 두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함으로써 우리의 기도에 합당하게 살아나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더욱 사랑을 나타내고, 비평적이 되지 않도록 조심할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복음과 그 축복에 참여하는 자가 되려 하는 것임을 항상 염두에 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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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파수대—1978 | 8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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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잠언 16:3.
1. 사도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크게 필요로 하는 것 중 하나가 무엇임을 알았읍니까?
오늘날 사람들이 가장 크게 필요로 하는 것 한 가지는 격려입니다. 누구나 이 세상의 압력 또는 자신의 무능으로 인해 종종 낙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한 회중을 방문하는 목적을 가리켜 “내가 여러분과 같이 지내면서 여러분과 내가 피차의 믿음을 통하여 서로 격려를 받으려는 것입니다.” 하고 말했읍니다. (로마 1:12, 새번역) ‘예루살렘’으로부터 그리스도인 형제들이 다른 여러 도시들을 여행할 때, 그들은 “여러 말로 형제들을 격려하며 굳세게 해 주”었읍니다. (사도 15:32, 새번역; 20:1) 이것은 오늘날 장로들과 여행하는 감독자들을 위한 훌륭한 본입니다.—빌립보 2:1 비교.
2. 우리가 어려운 일이나 문제거리에 부닥쳤을 때 성서는 어떻게 하라고 충고합니까?
2 때때로 어떤 문제나 일이 산더미같은 장애물로 보일 수도 있읍니다. 또는 매우 좋지 못한 환경에 처하게 되는 수도 있읍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낙심하거나 자포자기하는 대신,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 후 1:3, 4) 그렇습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잠언 16:3.
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3 그러나,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마치 짐을 당신의 어깨에서 내려서 그분에게 지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당신이 가지고 있는 계획이나 욕망은 의롭고, 선하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과 일치한 것이어야 하며, 이기적인 만족이나 원한을 풀기 위한 또는 그와 같은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그 짐이 당신 위에 있다고 생각지 말고 모든 것을 여호와 앞에 놓고 그 문제를 그분의 손에 완전히 맡기도록 하십시오. 그 다음, 기도로 그리고 당신의 능력껏 최선을 다하여 성서의 충고를 따름으로써 그분께서 당신이 구하는 바를 성취시켜 주실 것을 의뢰하십시오.—야고보 1:2, 5; 마태 7:7, 8.
성장과 성공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4.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는 것을 항상 기억하고 있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4 이렇게 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그는 아마도 의식적으로는 아닐지라도, 자기 자신의 중요성과 재력을 믿고 과신하기 시작할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의 계획이 성공한 듯이 보이면, 그는 그 공로를 자신에게 돌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자기의 “성공”이 일시적이고 피상적이었음을 알게 될 뿐입니다. 그러한 성공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참다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시 127:1.
5. 사도 ‘바울’은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이 그릇된 일임을 어떻게 지적하였읍니까?
5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있는 그리스도인 회중에 편지할 때 바로 이 원칙을 강조하였읍니다. 이 회중 내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야심에 가득찬 자들을 따르거나 그들을 영광스럽게 하고 있었읍니다. (고린도 후 11:4, 5, 13) 또한 어떤 사람들은 ‘바울’과 ‘아볼로’를 과도하게 중요시하였읍니다. (고린도 전 1:12) 그러나 ‘바울’은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거나 자신 또는 어떤 사람이나 사람들을 의뢰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임을 보여 주기 위하여 ‘바울’ 자신과 ‘아볼로’ 및 ‘게바’를 사용하였읍니다. (고린도 전 4:6) 그는 이렇게 말했읍니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또는 종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린도 전 3:5-7.
6. ‘자기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어떤 결과를 당할 것입니까?
6 그리고 나서 ‘바울’은 지적하기를, 그들이 의로운 기초인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우기 위해 노력해 왔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올바로 세우지 못하였다면—‘그들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지 않아서 성공을 위해 그분께 의뢰하지 않았다면—그들은 무가치한 것, 하나님의 시험을 견뎌낼 수 없는 것들을 세웠음을 알게 될 것이고 따라서 수치를 느끼게 될 것이라고 하였읍니다.—고린도 전 3:10-15.
7.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신뢰하거나 자신에게 공을 돌리지 않기 위해 왜 자신을 살펴야 합니까?
7 인간에게는 자신을 신뢰하고 자신에게 공을 돌리며, 독립적으로 행동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면밀히 살피지 않으면 안됩니다. ‘노아’ 홍수 직후,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고 지적하셨읍니다. (창세 8:21)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경향은 사물에 대한 자기 자신의 지침을 따라 독자적으로 일을 하기 위해 독립의 행로를 취한 ‘아담’으로부터 유전된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그가 마귀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창세 3:5.
우리 자신 대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라
8.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첫째 가는 동기는 무엇이어야 합니까?
8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이름과 그분의 아들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의 주권, 그분의 정당성, 그분의 자비 및 그분의 기타 훌륭한 특성들을 알리고 높이는 것이어야 합니다. (베드로 전 3:15) 만일 우리가 이러한 일을 하지 않는다면, 수행된 일에 대하여 우리나 어떤 다른 사람이 영예를 받게 되겠지만, 그건 아무 유익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록해 놓으신 가운데 이러한 사실을 강조해 주는 한 예를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정착한 이후 나타난 한 가지 상태 가운데서 찾아 볼 수 있읍니다.
9.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김’으로 어떠한 경험을 하게 되었읍니까?
9 그 당시 충실한 예언자 ‘사무엘’이 ‘이스라엘’에서 사사로 일하고 있었읍니다. 그 백성은 여호와를 숭배하는 일과 다른 신들을 숭배하는 일 사이에서 지조없이 왔다 갔다 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적들의 손에 많은 고통을 당했읍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였읍니다. 그는 그들 가운데 있는 거짓 신들을 버리라고 요구하였읍니다. 그들은 그 말에 순종하여 여호와만 숭배하기 시작하였읍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자기들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자’, 지독한 적인 ‘블레셋’에 대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었읍니다.—사무엘 상 7:3, 4, 10-14.
10, 11.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매우 훌륭하게 인도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떻게 그분을 높이고 그분을 신뢰하는 점에서 실패하였읍니까?
10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무능함을 그리고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여호와께 온전히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실제로 경험하고 나서도, ‘사무엘’이 늙자, 왕을 세워 달라고 요구하였읍니다. 그들은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하고 요구했읍니다. ‘사무엘’은 기도로 이 문제를 하나님께 아뢰었고,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하고 말씀하셨읍니다.—사무엘 상 8:4-7.
11 그리하여 ‘사무엘’은 인간 왕의 통치하에서 당하게 될 압제에 대해서 그들에게 경고하였읍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읍니다.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사무엘 상 8:10-20.
12. ‘그들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지 않음으로써 그들은 어떠한 결과를 당하였읍니까?
12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은 인간이 그들의 계획에 성공을 가져오기를 바라는 그들의 진짜 마음 상태를 나타냈읍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길 만큼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읍니다. 얼마 후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밀을 추수하는 바로 그 날 비를 내리게 하심으로써 자신의 불쾌하심을 나타내셨읍니다. (사무엘 상 12:17, 18) 그 이후 ‘이스라엘’은 ‘다윗’, ‘요시아’ 및 ‘히스기야’ 등 소수의 충실한 왕을 제외하고는 그들의 왕들의 다스림하에서 많은 고통을 당하였읍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의 참다운 왕이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온 결과였읍니다.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김
13. 하나님의 종들로서 우리가 지고 있는 모든 일에서, 우리는 그 일을 어떻게 해 나아가야 합니까?
13 이러한 예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종들이 직면하는 모든 문제들에 있어서 그리고 그들이 짊어지게 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여호와가 관련되어 있음을 이해할 수 있읍니다. 우선 우리는 여호와의 뜻과 그분의 이름을 머리 속에 간직해야 합니다. 그 다음 우리는 문제들을 그분 앞에 가져다 놓을 수 있고, 우리의 계획이 확고히 성공하는 것은 그분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읍니다. 만일 성공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 영예를 받으실 것입니다. 만일 그 결과가 우리가 계획했던 것과 다르다면, 그 또한 그분께서 일하시고 계시며, 우리를 위해서 최선의 결과를 허용하시고 계시다고 인정할 수 있읍니다.—로마 8:28.
14.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거둔 어떤 성공에 대한 공로를 우리 자신의 재능이나 창안력으로 돌릴 때 무엇이 잘못입니까?
14 세상에서는 사람의 성공이 종종 그 사람의 재능과 창의력에 비례하므로, 사람들은 자신의 성공의 공로를 자신에게로 돌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을 대표하는 사람의 척도는 그 사람의 재능 또는 개성이 될 것입니다. 사실상 자신의 개성이나 재능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 사도는 이렇게 말했읍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 후 4:7; 비교 고린도 후 12:9) 그리스도인은 불완전한 육체의 경향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경계해야 하며, 자기들은 ‘보잘 것 없는 하나님의 종들’로서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일을 하지만, 그것을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고린도 전 3:6, 7.
15.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의 성공은 우리 몸의 성공적인 기능과 어떻게 그 원리가 같습니까?
15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 그분께서 수행하시는 역할은 우리 몸의 기능에 비교할 수 있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설계하신 신체 기관은 우리의 의식적인 노력 없이도 그 기능을 잘 발휘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약간 설명할 수 있을 뿐입니다. 또한 우리가 먹는 곡식도 우리가 약간의 수고만을 들이거나, 어떤 경우에는 전혀 수고를 들이지 않더라도 잘 자라며 모든 중요한 영양소들로 가득 찹니다. 태양, 비, 토양 및 씨가 그 주요 역할을 해냅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우리의 생명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것들에 달려 있읍니다. 실제로 그분께서 모든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바치는 봉사도 그 원리와 같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말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자답게 하고 봉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봉사하는 자답게 하시오. 그리하면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베드로 전 4:11, 새번역; 비교 마태 6:25-31.
‘아브라함’의 훌륭한 본
16. 약속된 씨와 관련하여 ‘아브라함’은 어떻게 ‘자기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지 않으면 안되었읍니까?
16 거리낌 없이 ‘자기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긴’ 사람으로서 훌륭한 본은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단지 하나님께서 그로 말미암아 큰 민족을 이루실 것이며, 그를 통하여 지상의 모든 가족들이 축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읍니다. (창세 12:2, 3)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주의를 이끌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입니다. 이것은 성서에 ‘내가 너를 만민의 조상으로 삼았다’고 기록된 대로입니다. 이 약속은 그가 믿는 하나님, 다시 말하면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불러 내시는 하나님 앞에서 보장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소망이 끊어진 때에도 믿고 바랐기 때문에 ‘네 자손이 이와 같이 많게 되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만민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그는 나이 백세가 되어 자기 몸이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또 ‘사라’의 태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줄 알고 있었으나 그의 믿음은 약해지지 않았읍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의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는 가운데 굳건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시리라고 확신했읍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믿음을 통하여 의롭다 함을 얻었읍니다.”—로마 4:16-22, 새번역.
17. 하나님께서 씨가 나오게 되어 있는 아들을 희생으로 바치라고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어떻게 ‘자기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겼’읍니까?
17 ‘아브라함’은 자기와 아내 ‘사라’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야 한다는 것을 알았읍니다. 그는 자기가 완전히 무기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읍니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은 실망하지 않았읍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태어났을 때, 그는 여호와의 기적에 의하여 자기와 ‘사라’의 생식력이 회복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읍니다. 이것은 그의 믿음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주었읍니다. 이제 그는 이 아들을 통하여 그 씨가 나오리라는 것을 알았읍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희생으로 바치라고 그에게 요구하셨을 때 그는 어떻게 하였읍니까? 이러한 요구는 ‘아브라함’을 크게 당황케 만드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건 “너무 지나친” 요구인데 하고 생각할 수도 있었읍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완전히 여호와의 손에 맡겼읍니다. 「히브리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았을 때에 ‘이삭’을 바쳤읍니다. 그는 약속을 받은 자였지만 자기의 외아들을 바쳤읍니다. ‘이 아들에 대해서는 ‘이삭’에게서 난 자가 네 자손이라 불릴 것이다’고 하신 말씀이 있읍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히브리 11:17-19, 새번역.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길도 성공으로 이끄실 수 있다
18, 19. 이러한 문제를 비추어 볼 때, 왜 우리는 용기와 확신을 가지고 어려운 일이나 문제들을 직면해야 합니까?
18 이러한 기록을 읽고 나면, 우리 중 아무도 감히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봉사에서 어떤 일을 성취시키기 위해 자신의 능력이나 지위 또는 재능을 신뢰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과 같이 여호와를 절대적으로 의뢰하고 그분께 순종할 경우, 아무리 어려운 일이나 문제거리가 우리 앞에 놓이더라도 그 결과에 대하여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참신한 격려가 됩니다. 그것은 우리 가족의 필수품을 공급하는 문제일 수도 있읍니다. 또는 어린 자녀들이 딸린 과부가 “여호와의 징계와 정신적 단속”으로 그들을 키워나아가는 문제를 안고 있을 수도 있읍니다. (에베소 6:4, 신세) 또는 야외 봉사 시간을 내는 것이 문제일 수도 있읍니다. 어떤 사람은 호별 방문을 하는 일 또는 사람들을 성서로부터 가르치는 일에 관해 몹시 주저할지 모릅니다. ‘당신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빌립보 4:13)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곁에 계시다는 사실도 잊지 마십시오. ‘모세’가 약 300만명의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황무한 광야를 여행해야 하였던, 인간의 역량으로는 감당키 어려운 산과 같은 임무를 맡았을 때, 그가 행한 것과 같이, 당신도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참을 수 있을 것입니다. (히브리 11:27-29) ‘모세’는 ‘자기의 모든 짐을 여호와께 맡기’지 않으면 안되었읍니다. 그 다음 여호와께서는 그 일을 수행하셨읍니다. 분명히 우리의 문제는 ‘모세’가 당면했던 것보다 무겁지 않을 것입니다.
19 그러기 때문에 성서는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고’ ‘기도에 항상 힘쓰라’고 충고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우리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길’ 수 있으며, 그분께서 우리의 계획을 확고하게 성공으로 이끄실 것을 계속해서 신뢰할 수 있읍니다. (데살로니가 전 5:17; 로마 12:12) 그렇게 한다면, 예수께서 하신 것처럼, 우리도 여호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것이며, 사실 그분께서 결과를 이루셨음을 인정하고 성취된 일에 대한 영예와 찬양을 그분께 돌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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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거의 수고하지 않아도 우리의 몸이 기능을 발휘하고 식품이 재배되도록 만드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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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영적인 성장을 가져오시는 분도 바로 그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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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노를 계속 품는 것은 생명을 잃게 할 수 있다파수대—1978 | 8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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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노를 계속 품는 것은 생명을 잃게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 왔다고 말씀하신 후에 계속 노를 품는 것을 살인과 관련시키셨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서두를 꺼내셨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느니라].”—마태 5:21.
“너희가 들었”다는 표현은 영감받은 ‘히브리’어 성경에 언급된 내용과 ‘유대’인 전통의 가르침을 함께 언급하는 것일 수 있다. (마태 5:21, 27, 33, 38, 43; 요한 12:34) 살인을 중대 범죄로 지적하는 법은 “옛 사람” 즉 예수 시대보다 여러 세대 전에 살던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사실상 그러한 법은 ‘노아’ 시대로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다.—창세 9:5, 6; 출애굽 20:13; 21:12; 레위 24:17.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은 ‘팔레스타인’ 전역에 있는 “지방 법정”(희랍어 ‘시네드리아’로서 “더 작은 ‘산헤드린’”)에서 선고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태 10:17; 신명 16:18) ‘유대’인 전통에 의하면 성인 남자의 수가 120명 이상인 도시들의 법정은 재판관들의 수가 23명이었다고 한다.a 살인자들로 입증되면 사형을 당했다. 그러나 예수 당시에 ‘유대’인 법정은 극형에 있어서 ‘로마’ 관리들의 승인을 받지 않으면 안되었다.—요한 18:31.
예수의 말씀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실제로 살인을 범하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극형에 해당된다고 보실 수도 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에 의하여 직접 보냄을 받으신 분으로서 권위있게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계속 노하는, 신세]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리라].”—마태 5:22ㄱ.
예수의 말씀에 의하면 ‘형제에게 계속 노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살인죄를 범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진다. 자기 품에서 분을 풀지 않는 것은 실제로 동료 인간을 미워하는 것이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요한 1서 3:15) 노하거나 화를 내는 것이 정당할 경우가 있을지 모르지만 자기 형제나 동료 인간에 대하여 계속 노를 품으면 두 사람 다 생명을 잃을 수 있다.—마가 3:5; 에베소 4:26; 야고보 1:19, 20.
계속하여 예수께서는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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