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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와 장례—누구를 위한 것인가?파수대—1977 | 1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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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극을 주어 가능하다면 올바른 상태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그 사람의 나쁜 영향력으로부터 회중을 보호하는 것이다. 이제 그 제명된 사람이 사망하였기 때문에 그 중 어느 것도 적용되지 않을 것이다. 제명된 사람이 단지 “이방인”같이 계속 생활해 온 경우라도 성경적인 장례식 연설은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한 가지 이상의 선한 목적을 수행할 수 있다. 즉 가족을 잃은 사람에게 위안이 되고 외인들에게 증거가 될 수 있다. 선한 증거가 주어진다는 바로 그 점은 환경에 관계없이 유가족에게 위안과 위로를 줄 수 있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 우리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이 무엇인지를 인식할 수 있다. 같은 이유로 다른 사람이 생명을 잃은 것을 슬퍼하기도 하고 가족을 잃은 사람을 위로도 하게 된다. 우리의 천적 아버지는 참으로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 아니신가? 참으로 그렇다. 그러므로 애도와 장례 문제에 있어서도 생활상의 다른 모든 경우와 같이 그분의 지혜와 공의와 사랑의 원칙이 우리의 감정과 행동을 인도해야 할 것이다.—고린도 후 1:3, 4; 고린도 전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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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야심을 멀리 하는가?파수대—1977 | 1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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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야심을 멀리 하는가?
당신은 일을 주도하는 재주가 있는 사람인가?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큰 유익을 베풀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일이 순탄하고 효율적으로 잘 돌아가게 조직할 수 있는 사람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그러한 지도 능력이 축복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재앙이 될 수도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야심인데, 이것은 “승진, 영예, 우월성, 권력 또는 성공에 대한 지나친 또는 과도한 욕망”을 의미한다.
탁월해지려는 욕망은 대단히 강한 것이다. 행실에 본이 되어야 할 사람들까지도 이것에 노예가 되어 버린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는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시오. 그들은 길다란 예복을 걸치고 보라는 듯이 나다니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는 것을 즐기며 회당에서 높은 자리를 찾고 잔치에 가면 윗자리에 앉으려 합니다.” (누가 20:46, 공동번역) 때로는 예수의 제자들까지도 야심에 희생되는 일이 있었다. 그러한 경우들 중 한 예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마가 9:33, 34; 누가 22:24.
야심이 맺는 좋지 않은 열매
고대 ‘이스라엘’의 장군 ‘요압’의 경우는 야심이 이끌어 갈 수 있는 극단적인 예들을 제시하여 준다. ‘요압’은 은밀하게 ‘아브넬’과 ‘아마사’ 두 사람을 살해하였다. 이 사건은 ‘다윗’ 왕의 군사령관 지위를 두고 경쟁하였기 때문에 일어났다. (사무엘 하 3:26, 27; 20:8-10, 23) 왕이 늙고 병들자 ‘요압’은 ‘다윗’의 아들 ‘아도니야’와 부동하여 왕위를 찬탈할 음모를 꾸몄다. (열왕 상 1:18, 19) 이 일이 실패하자, ‘솔로몬’이 왕이 되고, ‘요압’은 ‘아도니야’를 배신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야심에 찬 계획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요압’은 ‘솔로몬’ 통치 초에 불명예스러운 사형을 당하였다.—열왕 상 2:5, 6, 29-34.
아마 당신은 권세있는 지위를 얻은 야심에 찬 많은 사람들을 보아 왔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 추종자들에게 진정한 유익을 끼치는가? 아마도 당신은 영감받은 성서 필자의 다음과 같은 말에 동의할 것이다. “내가 해 아래서 한 가지 폐단 곧 주권자에게서 나는 허물인 듯한 것을 보았노니 우매자가 크게 높은 지위를 얻고 부자가 낮은 지위에 앉는도다. 또 보았노니 종들은 말을 타고 방백들은 종처럼 땅에 걸어 다니는도다.”—전도 10:5-7.
야심에 사로잡힌 자들이 인간사를 그르친 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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