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봉사에 대한 도전을 온전히 받아들임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의 말이니라.”—이사야 54:8.
1, 2. 고대 ‘베들레헴’에서 있었던 어떤 사건에서 커다란 영향을 준 도전이 있었읍니까?
‘베들레헴’ 시에는 먼동이 터오르고 있었읍니다. 이른 새벽 어슴프레한 빛이 거리를 비춰 주자 아침 일을 보러 가는 바쁜 발걸음들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하였읍니다. 우아한 몸매의 어느 젊은 여자가 그 도시를 향해 걸어 들어와서는 열려진 성문 안으로 미끌어지듯 들어갑니다. 겉옷에 짐을 싸가지고 가면서도 얼굴에는 기쁨이 서려있고 발걸음은 가볍습니다. 골목으로 돌아서 조그마한 집 안으로 들어가니 훨씬 늙은 여자 한 사람이 그를 반가이 맞아들입니다. 두 사람 다 기대를 안고 자리에 앉아 있읍니다. 젊은 여자는 미래에 대한 희망에 차 있고, 늙은 여자는 평생 동안의 염원을 성취할 희망을 안고 있읍니다.
2 두 여자는 성문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떤 일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읍니다. 언덕 위에 자리잡은 그 조그마한 도시에 아침 햇살이 비칠 때, 이미 성문에서는 그 일이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집니다. 해는 더욱 높이 올랐읍니다. 아직 여름은 아니지만 6개월간의 건조 기간이 시작된지 오래라 이른 아침부터 태양의 더운 기운이 느껴집니다. 이제 사방에 사람들이 나타나고 성문 앞 광장에는 사람들의 활동이 상당히 많아집니다. 성문 입구에 연로한 남자가 홀로 앉아 있는데, 그의 거동과 외모로 보아 부유하기도 하고 그 도시에서 이름 있는 사람 같습니다. 광장에 나타나는 사람 하나하나를 자세히 살펴보는 그 사람의 태도는 이날 따라 자못 심각합니다. 그가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문득, 그는 “아무게씨, 여기 보세요, 여기 좀 앉으십시오.” 하고 소리칩니다. 나이가 듬직한 다른 남자가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서 그 첫 사람의 곁에 앉습니다. 이렇게 인사를 주고 받은 다음 거기서 진행된 사건이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읍니다. ‘베들레헴’의 조그마한 집에서 애써 기다리는 두 여자의 생애뿐 아니라, 그 후 대대로 많은 사람들의 생애에 변화를 주었읍니다. “아무게”라는 사람에게 도전이 있었는데, 그것이 우리 시대에까지 이르는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되었읍니다.
3. ‘나오미’와 ‘룻’의 ‘드라마’에 있어서 주인공들은 누구 누구이며, 그들의 관계에 대하여 어떤 질문들을 살펴보아야 합니까?
3 이 의미심장한 날 그 도시 안으로 들어간 젊은 여자의 이름은 ‘룻’이었으며, 그 여자가 집에 들어올 때에 맞아들인 늙은 여자는 그의 시어머니로서, ‘엘리멜렉’의 미망인 ‘나오미’였읍니다. ‘나오미’는 ‘유대’ 여자였지만, ‘룻’은 혈통상으로 ‘유대’ 여자가 아니었읍니다. ‘룻’은 ‘모압’ 여자였읍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여 그 여자가 ‘나오미’의 며느리가 되었으며, 자기 고향과 민족에게서 멀리 떨어진 ‘베들레헴’에 와서 살게 되었읍니까? 그리고 ‘아무게’라는 사람과 어떤 문제를 심중히 상의하고자 한 그 연로한 남자 ‘보아스’와는 어떤 관계였읍니까? 그리고 그처럼 중요한 그 문제가 무엇이기에 그의 도전이 30세기 이상이 지난 오늘날 우리의 생활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읍니까?
4. 주인공들은 누구 또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4 고대 ‘이스라엘’에서 전개되어 「룻기」에 기록된 그 ‘드라마’는 현 시대에 발생될 사건에 대한 예언적 의미를 지니고 있읍니다. 그것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도전적이며 커다란 영향을 줍니다. (고린도 전 10:11; 로마 15:4) 그리고 고대 ‘드라마’에 관련된 각 인물은 모두 상징적 의미도 지니고 있읍니다. ‘엘리멜렉’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왕이다”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나오미’의 가까운 친척인 ‘보아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이름은 아마 “힘으로”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면, “나의 기쁨”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나오미’는 그리스도와 약혼한 자들, 그리스도의 신부들 특히 이 ‘드라마’가 훌륭하게 성취되는 “마지막 때”에 지상에 남아있는 그리스도의 신부들을 상징할 것입니다. ‘룻’은 아마 “우정”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는 ‘나오미’의 며느리가 되었으며, 그리하여 ‘나오미’를 위하여 자손을 낳아 줄 위치에 있었읍니다. 그러므로 그 여자 역시 그리스도의 신부들을 상징하되, 약간 다른 각도에서 그리고 다른 환경 하에서의 신부를 상징할 것입니다. 그러면 역시 ‘나오미’의 가까운 친척이었으며 “아무게”라고 불리운 그 사람은 누구를 상징합니까? 이 점을 완전히 밝히기 위하여 현시대의 사건 진전을 살펴봅시다.
버림받은 여자
5. (ㄱ) ‘나오미’ 시대에 ‘베들레헴’에 어떤 일이 있었으며, 그 때문에 그의 남편 ‘엘리멜렉’은 어떻게 하였읍니까? (ㄴ) 이것은 현대적 성취에서 무엇을 상징합니까?
5 이제 ‘엘리멜렉’의 행복한 가족이 탈없이 살던 때로 되돌아가 봅시다. 그는 그의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 ‘말론’과 ‘기론’과 함께 ‘유다’ 땅 ‘베들레헴’ 곧 ‘에브랏’(에브라다)에 살았읍니다. ‘베들레헴’은 “떡 집”이라는 뜻이며, ‘에브랏’은 “다산”(多産)을 의미합니다. 두가지 이름 다 풍족한 것, 굶주림과 기근이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 기원전 13세기에는 ‘베들레헴’과 ‘유대’ 전 지역에 기근 곧 식량 부족이 있었읍니다. 그것은 제 1차 세계 대전 중 여호와의 조직이 영적으로 궁핍하던 것을 상징합니다. ‘베들레헴’의 다른 주민들이 그 도시를 떠났는지는 몰라도 ‘엘리멜렉’은 가족을 데리고 이사를 떠났읍니다. 그는 ‘요단’ 강을 건너 ‘모압’ 땅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외국인으로서 임시 거주하였읍니다. 마치 오늘날 여호와의 종들이 ‘사단’의 사물의 제도에 임시적으로 거주하는 것과 같습니다. (요한 17:16; 요한 1서 5:19) ‘엘리멜렉’은 이사하면서 고향에 토지를 두고 떠났읍니다.—룻 1:1, 2.
6. ‘모압’에서 ‘나오미’의 가족에게 어떤 일이 발생하였읍니까?
6 세월은 흘러 나이많은 ‘엘리멜렉’은 죽고 ‘나오미’만 미망인으로 남게 됩니다. 그러자 ‘나오미’는 자기의 두 아들을 ‘모압’ 땅에서 결혼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그 중 형으로 보이는 ‘말론’은 ‘모압’ 여자 ‘룻’과 결혼시키고, ‘기론’은 역시 ‘모압’ 여자인 ‘오르바’와 결혼시킵니다. 그러나 나중에 ‘말론’과 ‘기론’마저도 죽고, 과부가 된 어머니 ‘나오미’와 두 과부 며느리 ‘룻’과 ‘오르바’만 남게 됩니다. (룻 1:3-5) 그들은 자녀가 없는 과부들로서 ‘나오미’에게 자녀를 낳아 주지 못하였읍니다. ‘나오미’ 자신은 나이가 너무 많아 자녀를 둘 수 없기 때문에 수치를 당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말론’(“병든, 허약한”의 뜻)과 ‘기론’(“연약한”의 뜻)의 죽음은 이 곤난한 기간에 하나님의 조직과 연합하였던 어떤 자들의 영적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때 여호와의 백성들은 크게 슬퍼하였읍니다.
7. ‘나오미’는 자기의 상태를 어떻게 생각하였으며, 여러 세기 후에 ‘이사야’는 어떤 상태를 예고하였읍니까?
7 ‘나오미’는 자신이 씨도 없고 씨를 생산할 능력도 없는 버림받은 여자라고 생각하였읍니다. 그 여자는 마치 “버림을 입어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 곧 소시에 아내 되었다가 버림을 입은 자” 같았읍니다. 태의 열매를 여호와의 축복으로 여기고 불임(不妊)을 저주로 여기던 그 당시에는 ‘나오미’가 ‘여호와께서 나를 욕되게 하셨다’고 할 만도 하였읍니다. (룻 1:21, 신세) 여러 세기 후에 예언자 ‘이사야’는 비슷한 욕된 상태를 기술하였는데, 이 경우에는 직접적으로 여호와께서 불쾌하셔서 그렇게 만드신 것이었읍니다. ‘나오미’가 직면한 도전을 온전히 인식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사야’의 예언을 이해하고, 또한 그 예언의 성취로서 우리 시대에 발생한 사건에 적용되는 면을 이해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마치 버림을 입어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 곧 소시에 아내 되었다가 버림을 입은 자에게 함같이 하실 것임이니라. 네 하나님의 말씀이니라.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도울 것이요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의 말이니라.”—이사야 54:6-8.
여호와, 남편 같은 소유자
8, 9. (ㄱ) 이사야 54:6-8은 누구에게 한 말이며, 그 사실을 그 예언의 전후 관계로 보아 어떻게 알 수 있읍니까? (ㄴ) ‘나오미’로 상징된 어떤 집단이 거기에 포함되었읍니까?
8 이 예언을 보면 모든 창조물의 하나님이신 여호와께 아내가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것이 가능합니까? 상징적으로 말하면 가능합니다. 그 아내에 대하여 이사야 54:5에서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고 하였읍니다. 이 말은 ‘이사야’ 시대에는 이미 죽은지가 5세기가 되는 ‘나오미’나 혹은 다른 실제 여자에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조직 곧 하늘의 ‘시온’ 즉 하늘에 있는 영적 아들들로 구성된 하나님의 우주 조직에게 한 말입니다. 약 1,900년 전부터는 하나님의 우주 조직에 속한 이들 영적 아들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충성을 지키고 거룩한 상태에 있는, 하늘의 보이지 않는 영적 천사들로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읍니다. 여호와의 이 우주 조직은 지상에서 영으로 출생한 하나님의 아들들을 포함하게 되었읍니다. 그들의 총수는 144,000입니다. (계시 14:1) 이들 모두는 하나님의 우주 조직 내에서 우두머리인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9 이들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자 144,000명은 하늘에서 예수와 결혼하기로 예정된 자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계시록 21:9에서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라고 부른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자들입니다. 이 신부 반열의 성원들은 지난 천 구백년 동안 선택을 받았읍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날 지상에 있는 자들은 단지 남은 자들 뿐입니다. 현 20세기에 들어와 제 1차 세계 대전을 살아남고 1919년 이전에 헌신하고 침례를 받은 자들은 ‘드라마’에서 ‘나오미’로 상징되었읍니다. 그러면 그들이 어떻게 하여 ‘모압’ 땅에 있는 ‘나오미’와 같이 자녀가 없고 버림받은 상태에 처하게 되었읍니까?
10. 하나님의 우주 조직과 남은 자 사이는 어떠한 관계이며, 어느 기간에 더 큰 ‘엘리멜렉’은 ‘나오미’ 반열에 대하여 “죽었”읍니까?
10 ‘나오미’와 ‘룻’에 대한 ‘드라마’의 이 부면을 이해하기 위하여, 지상에 있는 남은 자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우주 조직의 성원 간의 관계에 대하여 또 다른 부면을 이해할 필요가 있읍니다. 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우주 조직의 성원이며, 육체로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영적 아들들인만큼, 신부의 남은 자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여자 곧 하늘의 ‘시온’ 즉 우주 조직에게 영향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이사야 54:6-8의 예언을 제 1차 세계 대전 동안에 ‘나오미’ 반열의 활동에 관계된 사건들과 연결시켜 고려해 볼 때에 이 점이 분명해집니다. 1918년부터 1919년, 이 기간에 더 큰 ‘엘리멜렉’이 ‘나오미’ 반열에 대하여 “죽었”으며, 그 반열은 남편이 없는 것같이 버림을 받게 되었읍니다. 그 우주 조직의 남편인 여호와께서 이사야 54:6-8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지상의 영으로 출생한 자들로 대표된 하나님의 여자를 배척한 것은 실로 굴욕적인 경험이었읍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아내를 불쾌하게 여기시다
11. 언제, 무슨 이유로 여호와께서는 남은 자를 불쾌하게 여기셨으며, 이 불쾌하심이 어떻게 나타나 전체 우주 조직에 영향을 주었읍니까?
11 여호와께서 ‘이사야’의 예언 가운데서, 자기의 얼굴을 가렸을 때 자기의 아내가 버림을 받아 마음이 상한 바 되었다고 묘사한 것을 유의하십시오. 그것은 그 여자를 불쾌하게 여기는 기간이 있을 것을 시사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11절에서는 그 여자에게, “너 곤고하며 광풍에 요동하여 안위를 받지 못한 자여” 하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나오미’ 남은 자는 그러한 상태를 당하였읍니다. 특히 그들이 여호와의 은총 밖으로 추방당한 것이나 다름 없었던 1918년에는 더욱 그러하였읍니다. 그 해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사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대동하시고 홀연히 그의 성전에 오셨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곳 지상에 있는 남은 자를 살펴보시고는 그들을 불쾌히 생각하셨읍니다. (말라기 3:1, 2) 한 동안 그들은 그들에게 열려진 여호와의 왕국 봉사의 도전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을 두려워한 나머지 뒷걸음질 하였으며,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려고 올바로 처신하지 못하였읍니다. (야고보 1:27)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큰 ‘바벨론’과 그의 정치적 연합자들에게 속박당하도록 버려두셨읍니다. 이 기간에 그들은 많은 박해와 굴욕을 당하였으며, 그 절정에 가서는 협회 본부의 대표자들이 1918년에 간첩 활동이라는 허위 죄목으로 구속 수감되기까지 하였읍니다.a 그 결과 하나님의 불쾌하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우주 조직 전체 곧 하나님의 여자가 영향을 받게 되었읍니다. 예언에 의하면 전체 조직이 ‘완전히 버림받은 아내’와 같이 될 것이라고 하였읍니다.
12. 만일 ‘엘리멜렉’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면, 여호와께서 자기 아내에 대하여 얼굴을 가리신 것이 어떻게 ‘엘리멜렉’의 죽음과 부합됩니까?
12 ‘엘리멜렉’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하였는데, 여호와께서 자기 아내 앞에 얼굴을 가린 것이 어떻게 ‘엘리멜렉’의 죽음과 부합됩니까? 하늘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있는 ‘나오미’ 반열에 대하여 어떻게 죽은 것 같이 될 수 있읍니까? 예수께서는 지상에서 봉사하시는 동안 자기의 행동 방침으로서, ‘나는 내 아버지께서 행하신 것을 본 그대로 행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나타내셨읍니다. 그렇다면, 여호와께서 불쾌하게 여기셔서 자기 아내를 버리시고 그 여자에게서 자기 얼굴을 가리신 경우에는 아들도 틀림없이 그렇게 할 것입니다. 특히 자기 신부의 구성원들인 지상에 있는 영적 남은 자, 즉 하나님의 우주 조직의 일부에 대하여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사실상 여호와께서 버리신 자들에 대하여 “죽은” 것같이 되었읍니다.
심각하게 제기된 도전
13. 이제 ‘나오미’는 무엇을 하기로 결심하며, 이것은 ‘룻’과 ‘오르바’에게 어떻게 도전이 됩니까?
13 고대 ‘드라마’에서, 이제 10년이 흐른 뒤, ‘나오미’는 ‘베들레헴’의 상태가 변화되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시 그의 백성들에게 주의를 돌려 그들에게 식량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되돌아갈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절박한 이유가 있읍니다. ‘나오미’는 ‘유다·베들레헴’에 유산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관리하기 위하여 갈 필요가 있읍니다. 이 일은 ‘나오미’의 두 “딸”인 ‘룻’과 ‘오르바’에게 심각한 도전이 됩니다. 그들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들은 의심할 것 없이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가려고 출발합니다. (룻 1:6, 7) 그 후 얼마쯤 길을 가다가 ‘나오미’는 그들을 되돌려 보내려고 설득시킵니다.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 ···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로 각각 남편의 집에서 평안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나오미’가 가로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나의 태중에 너희 남편될 아들들이 오히려 있느냐? 내 딸들아 돌이켜 너희 길로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찌라. ···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룻 1:8-13.
14. ‘오르바’는 어떻게 결정하며, 그 여자로 상징된 자들은 오늘날 어떠한 비슷한 길을 갑니까?
14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 시모에게 입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나오미’가 또 가로되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룻 1:14, 15) ‘오르바’는 충실한 ‘나오미’ 반열과 접촉하여 얼마 동안 상당한 관심과 열성을 나타내다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아직도 젊은 시절에 움칠하여 물러나버린 자들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이기심과 개인적 욕망 때문에,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하신 여호와의 도전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말라기 3:10; 히브리 10:38, 39; 베드로 후 2:22.
15, 16. ‘룻’은 도전에 대해 어떻게 응하였읍니까?
15 반면에, ‘룻’ 반열은 그들에 대한 여호와의 목적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 ‘나오미’ 반열과 함께 하기 위해 모든 개인 이익을 희생합니다.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 1:16, 17.
16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한 이 말로 ‘룻’은 이렇게 하기로 여호와께 맹세한 것입니다. ‘룻’은 ‘나오미’의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봉사에 있어서 죽을 때까지 ‘나오미’와 함께 한다는 도전을 온전히 받아들였읍니다. 그 도전에 대한 ‘오르바’의 실패가 ‘룻’의 결의를 약화시키지 못하였으며, ‘룻’의 열정을 식히지 못하였읍니다. ‘나오미’의 영향력이 ‘룻’을 개종시키는 결과를 내었는데, 이제 ‘나오미’의 마음 속 깊이 뿌리박힌 염원이 ‘룻’으로 하여금 그 두 여자가 장차 ‘베들레헴’에서 당할 도전을 충실하게 받아들이도록 작용하였읍니다.
또 하나의 도전을 맞다
17. ‘베들레헴’에 돌아온 후, 이웃 사람들의 인사에 대하여 ‘나오미’는 어떻게 대답하였읍니까?
17 ‘베들레헴’에서의 전망에 대해 ‘나오미’가 ‘룻’과 ‘오르바’에게 피력한 괴로움과 환멸은 ‘나오미’가 고향에 돌아간다고 하여 보다 완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고향에 돌아가서는 허탈감이 심해질 뿐이며, 자기의 무력함을 더욱 절감할 것이므로 괴로움과 슬픔이 강해질 뿐입니다. 그들이 돌아오자 온 도시가, 법석댑니다. 특히 여자들은 더욱 그러합니다. 그들은 자기 눈을 믿지 못합니다. 아니, ‘엘리멜렉’은 어디 있는가? ‘말론’과 ‘기론’은 어디 있는가? 그리고 이 ‘모압’ 소녀는 누구인가? “[여인들이] 이르기를 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나의 기쁨”이라는 뜻]라 칭하지 말고 ‘마라’[“괴로움”의 뜻]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룻 1:18-22.
18. ‘나오미’ 남은 자로 대표된 하나님의 여자를 왜 구속할 필요가 있었읍니까?
18 사실 ‘나오미’ 반열은 고난을 당하던 동안에 “나를 ‘마라’ 곧 괴로움 받는 자라고 불러 주시오” 하고 말할 만하였읍니다. 이사야 12:1도 이러한 혹심한 징벌에 대하여 말하였는데, 그 예언자가 여호와 하나님께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였사오나 이제는 그 노가 쉬었”다고 한 말 가운데 표현되었읍니다. 그리고 이사야 52:3에서는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값없이 팔렸으니 돈없이 속량되리라” 하셨읍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곳 지상에서 하나님의 헌신한 종들을 사로잡아간 자들은 그들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거저 잡아갔다는 것입니다. 5절과 6절에서는 이렇게 부언하였읍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 백성이 까닭 없이 잡혀갔으니 내가 여기서 어떻게 할꼬 ··· 그러므로 내 백성은 내 이름을 알리라. 그러므로 그 날에는 그들이 이 말을 하는 자가 나인줄 알리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아무 가치 없이 붙잡히게 하셨으며, 원수들로 하여금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잡아가도록 하셨읍니다. 그러므로 이곳 지상에 있는 ‘나오미’ 남은 자로 대표된 하나님의 여자는 큰 ‘바벨론’으로부터 구속(救贖) 곧 다시 삼을 받을 필요가 있었읍니다.
19. ‘나오미’는 그 버림받은 상태 하에서 ‘야곱’이 ‘유다’에게 한 무슨 약속을 특히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까?
19 자녀도 없고 버림받은 자 같으며 여호와로부터 벌을 받은 자와 같은 ‘베들레헴’ ‘유다’ 지파의 ‘나오미’는 바로 이 도전을 직면하였읍니다. ‘나오미’의 마음 속에는 아직도 ‘이스라엘’의 여자들 특히 ‘유다’ 지파에 속한 소수의 은혜받은 여자들에 대한 여호와의 목적에 참여하고자 하는 염원이 불타고 있었읍니다. 그 지파에 속한 자들은 ‘유다’의 아버지 ‘야곱’의 약속이 성취될 그 계통이기 때문이었읍니다. 기원전 1711년에 ‘야곱’은 죽기 직전에 애굽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유다’를 축복하였읍니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창세 49:10) “그것이 속한 자” 또는 “그것을 소유한 자”라는 뜻의 이름인 이 ‘실로’는 틀림없이 지팡이를 휘두를 치리자일 것입니다. 그는 틀림없이 왕이 가지는 홀을 잡는 자일 것입니다. 그는 틀림없이 메시야, ‘아브라함’의 참 씨 곧 그를 통하여 지상의 온 인류가 스스로를 축복할 자일 것입니다. (창세 22:17, 18) ‘아브라함’의 증손 ‘유다’의 계통 중 누구의 집에서 그가 나올 것인가? ‘유다’ 지파 가운데 어느 어머니가 그를 가슴에 안게 되는 영예를 차지할 것인가? ‘나오미’ 자신은 자녀가 없고 아이를 낳을 연령이 지났으므로 자기에게는 그러한 특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나오미’가 외로운 상태 하에서 “‘마라’라 칭하라”고 외친 것도 무리가 아니었읍니다.
여호와께서 길을 열어 주시다
20. 여호와께서는 여러 세기 후에 ‘이사야’를 통하여 무슨 약속을 하셨읍니까?
20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이 충실한 여자를 버리시지 않을 것이었읍니다. 그의 부르짖음이 하나님의 귀에 사무쳤읍니다. 여러 세기 후에 예언자는 그 여자에 대하여 ‘나오미’가 상징하는 여자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으로 기술하여 다음과 같이 잘 말하였읍니다.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사야 54:8) 이 말이 ‘나오미’에게 어떻게 이루어질 것입니까? 만일 그가 친아들이 없이 죽게 된다면, 그는 죽은 자기 남편의 재산을 물려줄 상속자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만일 여호와께서 ‘유다’ 지파에서 나올 ‘실로’를 그 여자를 통하여 나오게 하시려면 그는 남자 상속자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가 취할 행동은 무엇이었겠읍니다?
21. ‘이스라엘’의 법 가운데 ‘나오미’와 같은 처지의 과부를 위한 어떤 마련이 있었으며, 이것은 어떻게 하여 ‘룻’에게 도전이 되었읍니까?
21 ‘이스라엘’의 법 가운데는 ‘나오미’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위한 마련이 있었읍니다. 고대 ‘이스라엘’ 가운데 충실한 여자로서 자녀 없는 자가 없도록 하겠다는 여호와 자신의 약속에 의거한 것이었읍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 네 몸의 소생[이] ··· 복을 받을 것이[라].” (신명 28:2-4) 남자가 자기의 대를 이을 자가 없이 버림받게 되어 있지도 않았읍니다. ‘이스라엘’의 법 가운데 이러한 내용이 있었읍니다. “형제가 동거하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취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의 낳은 첫 아들로 그 죽은 형제의 후사를 잇게 하여 그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신명 25:5, 6) 이 법은, 기업을 무르는 즉 다시 사는 법과 함께 ‘나오미’가 기대를 걸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읍니다. 만일 한 형제나 가까운 친척이 나타난다면 ‘나오미’는 이러한 법의 마련에 의지하여 일을 해결해나갈 수밖에 없읍니다. 그러나 그러한 친척이 있다 하더라도 ‘나오미’ 자신은 아이를 낳을 수 없었읍니다. 그가 기대할 수 있는 것으로는, 그의 며느리 ‘룻’이 이 마련하에 자기를 대신하여 주고 ‘엘리멜렉’에게 씨를 낳아 주도록 하는 방법 뿐이었읍니다. ‘룻’은 이러한 기회를 어떻게 생각하였읍니까? ‘룻’은 자기를 만족하게 해 줄 어떤 젊은 남자를 맞을 수도 있는 그러한 희망을 기꺼이 버릴 것입니까? 그는 이 도전에서 여호와의 목적을 추구할 기회를 인식하고 그것을 자기의 생활 방식으로 삼을 것입니까?
22. 이 예언적 ‘드라마’에서 또 누가 이 도전으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그 결과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 것이 마땅합니까?
22 그리고 ‘보아스’와 ‘아무게’는 어떠합니까? 죽은 ‘엘리멜렉’의 대를 잇기 위하여 ‘나오미’에게 자손을 낳아 준다는 이 도전을 그들은 어떻게 직면할 것입니까? 그들은 이것을 여호와의 봉사에 보다 온전히 참여하는 기회로 인정할 것입니까? 그리고 이 도전과 그 결과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나오미’의 기쁨이 되살아나는 방법, 그의 평생의 꿈이 실현되는 방법, 그리고 ‘룻’과 ‘보아스’와 ‘아무게’가 이 도전을 직면한 점에 있어서 행한 역할 등, 이 모두는 오늘날 우리에게까지도 여호와의 목적을 우리의 생활 방식으로 삼도록 감동시켜 주는 고무적인 이 ‘드라마’의 내용들입니다. 다음 기사에서 계속 전개되는 내용이 밝혀질 것입니다.
[각주]
a 「하나님의 목적 아래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영문) 79-83면 참조.
[224면 삽화]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되는 것을 알기까지 가만히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날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227면 삽화]
‘룻’은 여호와를 섬기려는 도전을 받아들여, ‘나오미’에게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라” 하고 선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