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끼”와 “찍는 자”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느냐]?”—이사야 10:15.
1, 2. (ㄱ) 역사상 개인이나 나라를 어떻게 사용하는 일이 흔히 있었읍니까? (ㄴ) 인간을 이렇게 도구로 사용한 어떤 예가 있읍니까?
어떤 일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도구로 사용되는 일은 흔히 있읍니다. 인류 역사 가운데는 한 나라 전체가 권세를 가진 어떤 사람에 의해 도구로 사용된 예도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경우에는 사용자인 권세자는 도구로 사용당하는 나라의 통치자 보다 우월하다고 인정됩니다.
2 이를테면, ‘예루살렘’의 ‘다윗’ 왕의 예가 있읍니다. 그는 야전 사령관 ‘요압’ 장군을 도구로 사용하여 충실한 군인이었던 ‘헷’ 사람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게 하였읍니다. 이리하여 ‘우리야’는 ‘다윗’이 자기 아내 ‘밧세바’를 범하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죽었읍니다. (사무엘 하 11:1부터 12:9; 열왕 상 15:5) 그리고 영국 태생인 교황 ‘하드리안’(아드리안) 4세의 예가 있읍니다. 기원 1155년에 그는 ‘헨리’ 2세의 지배 하에 있는 영국을 도구로 사용하여 ‘아일랜드’ 전체를 정복하기 시작하였읍니다. 그것은 ‘아일랜드’의 종교 지도자들을 ‘로마’ 교황의 세력 하에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었읍니다.a
3, 4. (ㄱ) 옛날 어느 나라가 단순한 도구로 사용되었읍니까? (ㄴ) ‘이사야’의 무슨 예언 가운데 ‘앗수르’ 나라를 단순한 도구로 사용한 분의 이름이 들어 있읍니까?
3 그보다 훨씬 옛날, ‘아일랜드’의 교회를 정복하기 여러 세기 전에, 고도의 군사력을 가진 어느 강국이 그보다 더욱 큰 능력자에 의해 도구로 사용된 예가 있었읍니다. 그 고대의 나라는 ‘앗수르’였는데, 당시 그 나라는 세계적인 강국이었고 성서 역사상 둘째 세계 강국이었읍니다. 그러면, ‘앗수르’ 세계 강국을 단순한 도구로 사용할 수 있었던 더 큰 능력자는 누구였읍니까? 더 큰 그 능력자가 누구인가는 ‘산헤립’ 왕 지배 하의 ‘앗수르’인들이 기원전 732년에 ‘유다’ 왕국을 침략하기 얼마 전에 사람들에게 밝혀졌읍니다. ‘앗수르’ 제국보다 우월한 능력자의 신분은 다음과 같은 말 가운데 들어 있었읍니다.
4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 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일반이로다.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찐 자로 파리하게 하시며 그 영화의 아래에 불이 붙는 것 같이 맹렬히 타게 하실 것이라. ‘이스라엘’의 빛은 불이요 그 거룩한 자는 불 꽃이라. 하루 사이에 그의 형극과 질려가 소멸되며 그 삼림과 기름진 밭의 영광이 전부 소멸되리니 병인이 점점 쇠약하여 감 같을 것이라. 그 삼림에 남은 나무의 수가 희소하여 아이라도 능히 계산할 수 있으리라.”—이사야 10:15-19.
5, 6. ‘이사야’는 후에 ‘앗수르’를 단순한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여호와의 능력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읍니까?
5 이 글은 ‘아모스’의 아들, 영감받은 예언자 ‘이사야’가 기록한 것입니다. 그는 그 훌륭한 예언서의 기록을, ‘앗수르’인들이 ‘유다’ 땅을 침략한 해인 기원전 732년 경에 완료하였읍니다. ‘이사야’는 도구를 사용하는 큰 능력자를 “주 만군의 여호와” 곧 “‘이스라엘’의 빛 ··· 거룩한 자”라고 선언합니다. 이 거룩한 자는 한 나라 전체를 단순한 도구로 사용할만큼 유능하십니까? 이 질문에 대한 영감받은 답을 듣기 위해 예언자 ‘이사야’가 후에 “주 만군의 여호와”에 대해 한 말을 알아 보겠읍니다.
6 “누가 손바닥으로 바다 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재었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명칭으로 산들을, 간칭으로 작은 산들을 달아보았으랴 ···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라].”—이사야 40:12-15.
상징적 도끼
7. 그러므로, 여호와에 비할 때 나라들은 무엇과 같으며, 이사야 10:15에서 그분은 자신을 무엇에 비하십니까?
7 “주 만군의 여호와”에 비할 때 ‘앗수르’를 포함하여 모든 나라는 통에서 떨어지는 작은 물방울과 같고 저울에 붙은 먼지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자기가 선택하는 어느 나라든지 아주 쉽게 도구로 사용하여 그분의 거룩한 목적을 수행하실 수 있읍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10:15에서 그분은 자기를 찍는자, 톱을 켜는 자, 막대기를 휘두르는 자, 몽둥이를 사용하는 자에 비유하십니다. 그분은 자기가 ‘나무가 아니’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분은 도끼의 자루가 아니며, 막대기나 몽둥이가 아닙니다. 그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이며, 이러한 상징적 도구를 취급하시는 전능자이십니다. 그러면, 그분이 찍는 일을 하시는 상징적 도끼는 무엇입니까?
8. 이사야 10:5, 6에 나오는 “‘앗수르’ 사람”은 정확히 누구를 뜻합니까?
8 ‘이사야’ 예언서 10장, 조금 앞에서 여호와께서는 친히 상징적 도끼가 무엇인가를 밝히십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10:5, 6에서 우리는 여호와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을 수 있읍니다. “‘앗수르’ 사람이여, 그는 나의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나의 분한이라. 내가 그를 보내어 한 나라를 치게 하며 내가 그에게 명하여 나의 노한 백성을 쳐서 탈취하며 노략하게 하며 또 그들을 가로상의 진흙 같이 짓밟게 하려 하[노라].” 그렇습니다. 여호와께서 천명하신 목적을 수행하는 데 사용하실 상징적 도구는 “‘앗수르’ 사람”입니다. 이 말은 ‘앗수르’인 개인을 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앗수르’ 왕을 칭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앗수르’라고 하는 나라 전체, 성서 예언상의 둘째 세계 강국을 의미합니다. ‘앗수르’의 어느 개인이나 왕 자신도 여호와께서 “‘앗수르’ 사람”에게 명하신 일을 단독으로 수행할 수는 없었읍니다. 이 점은 ‘앗수르’ 사람을 “나의 진노의 막대기”라고 부르신 다음에 여호와께서 “그[그들의, 신세] 손의 몽둥이는 나의 분한”이라고 말씀하신 사실에 나타나 있읍니다. (이사야 10:5, 24, 신세 참조) 이 점으로 보아 종합적인 ‘앗수르’인, ‘앗수르’ 나라 전체, 특히 그의 군대를 의미한 것이 분명합니다.
9. 이사야 10:5, 6의 예언의 성취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며, 사도 ‘바울’은 이것을 어떻게 시사합니까?
9 그러나 “‘앗수르’ 사람”에 관한 그 옛날의 예언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슨 관심거리가 됩니까? 그것은 커다란 관심거리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먼 옛날에만 관련된 예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예언이며, 그 예언의 성취는 우리 시대에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줄 것입니다. 그 예언은 우리 세대 내에 대규모적이고 최종적이고 완전한 성취를 볼 것입니다! 그 예언의 적용은 기원전 8세기에 성취됨으로써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도 ‘바울’은 그 동일한 이사야 10장 22절을 인용하여 기원 제1세기 자기 시대에 적용하였읍니다. ‘이사야’의 예언 그대로 ‘유대’인의 남은 자 소수만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주[여호와]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로마 9:27, 28. 또한 로마 15:4 참조.
10. 이사야 10:6에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바 “배도한 나라”와 “나의 노한 백성”의 신분이 어떻게 밝혀졌읍니까?
10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고대 어느 나라를 치기 위하여 ‘앗수르’를 “막대기”와 “도끼”로 사용하셨읍니까? 그러한 질문이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관계가 되는 것은 그 고대 나라가 현대의 그리스도교국을 전영하였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그 고대 나라를 “나의 노한 백성”이라고 하셨으며 “배도한 나라”(신세)라고 하셨읍니다. (이사야 10:6) 여호와의 이 말씀은 ‘사마리아’에 도읍을 정하고 있던 ‘이스라엘’ 열 지파 왕국 백성과 그 나라를 뜻하였읍니다. 그 나라는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한 ‘다윗’ 왕국에서 떨어져 나갔읍니다. 그들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 왕이 죽은 후에 이탈하였읍니다. “‘앗수르’ 사람”은 수도 ‘사마리아’에 대해 그리고 “그의 무가치한 신들”(신세)에 대해 경멸적으로 말함으로써 열 지파 ‘이스라엘’ 왕국의 종교적 배도 행위를 증거합니다. (이사야 10:11) 기원전 997년에 ‘이스라엘’ 왕국이 여호와 하나님의 숭배에서 배도하였으므로, 배도한 나라의 왕들이 소개한 신들은 “무가치한 신들”일 수밖에 없지 않겠읍니까? ‘이스라엘’이 250년 이상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배척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나의 노한 백성”이라 부르고 그들에 대해 “진노의 막대기”를 사용하셔도 얼마든지 정당하셨읍니다.—열왕 상 12:25부터 13:6; 16:8-33; 이사야 10:5, 6.
11. 오늘날 무슨 종교 조직이 배도한 열 지파 ‘이스라엘’ 왕국과 부합되며, 우리는 왜 그 조직에 포함되기를 원치 않습니까?
11 오늘날의 그리스도교국은 배도한 열 지파 ‘이스라엘’ 나라와 정확히 부합됩니다! 참 그리스도교로부터 그리스도교국이 배도한 것은 단순히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고대 ‘이스라엘’의 반역으로 전영된 것 만이 아니었읍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도들에 의해서도 분명히 예언되었읍니다. (마태 13:24-43; 사도 20:29-31; 데살로니가 후 2:1-12; 디모데 후 4:3, 4) 그러므로 성서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정하신 때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분노의 상징적 “막대기” 곧 상징적 “도끼”를 현대적인 “나의 노한 백성”에게 사용하실 것을 확신을 가지고 기대할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 포함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막대기”와 “도끼”가 무엇을 상징하는가를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12. (ㄱ) 여호와께서는 고대 ‘이스라엘’에 관하여 “‘앗수르’ 사람”을 어떻게 “도끼”로 사용하셨읍니까? (ㄴ) 그 당시 ‘앗수르’와 여호와의 조직과의 관계는 어떠하였읍니까?
12 예언자 ‘이사야’의 시대에, 여호와께서는 배도한 ‘이스라엘’의 열 지파 왕국에게 최종적인 공격을 가하시기 위해 ‘앗수르’ 세계 강국을 “막대기”처럼 휘두르셨읍니다. 그 결정적인 해는 기원전 740년이었읍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앗수르’ 세계 강국을 그의 “도끼”로 사용하시어 우상 숭배하던 ‘이스라엘’ 나라를 찍어버리셨읍니다.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군대가 수도 ‘사마리아’를 3년 동안 포위하였다가 결국 그곳을 함락시키고 진흙처럼 짓밟도록 허락하셨읍니다. (열왕 하 17:7-23; 18:9-12)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특별한 것을 유의해야 합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자기의 숭배로부터 배도한 자들을 멸하기 위해 ‘앗수르’ 세계 강국을 도구로 사용하셨지만 ‘앗수르’는 여호와의 조직의 일부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사단’ 마귀의 보이는 조직의 일부였읍니다. ‘앗수르’ 땅은 “‘니므롯’ 땅”이라고 불리웠읍니다. 그것은 ‘앗수르’의 수도가 된 ‘니느웨’ 도시를 최초에 건설하였던 ‘니므롯’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는 “여호와께 반대하는 능한 사냥군 ‘니므롯’”으로서 악명높은 자였읍니다. (미가 5:6; 창세 10:8-12, 신세)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또 한가지 사실은 이 점입니다. 즉, 여호와께서 ‘앗수르’를 “막대기”와 “도끼”로 사용하셨지만, 그 세계 강국은 그렇게 하고 나서 여호와의 보이는 조직의 일부가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의 숭배를 받아들이지 않았읍니다!
“도끼”가 “찍는 자”보다 높아지려 하다
13. 여호와의 도구로 사용되는 데 대한 “‘앗수르’ 사람”의 태도는 어떠하였읍니까?
13 고대 ‘앗수르’는 여호와를 섬기려는 의향이 전혀 없었으며, 하나님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그분의 목적을 계속 이루려는 욕망이 없었읍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사람”에 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그의 뜻은 이같지 아니하며 그 마음의 생각도 이같지 아니하고 오직 그 마음에 허다한 나라를 파괴하며 멸절하려 하[니라].”—이사야 10:7.
14. (ㄱ) “‘앗수르’ 사람”은 단순한 도구로 사용되었는데도 그 자신은 어떤 뜻을 가지고 있었읍니까? (ㄴ) 그 의향과 일치하게 그의 마음에는 무엇을 하고자 하며, 왜 그렇습니까?
14 “‘앗수르’ 사람”은 자기 뜻이 그렇지 않더라도 그 방향으로 행하게 되었읍니다. 그 당시 여호와께서는 “‘앗수르’ 사람”을 하나님의 손에 든 도구로 사용하시고 고집센 나라에 징계를 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려고 하였읍니다. 그러나 반대로 “‘앗수르’ 사람”은 다른 일, 곧 자기 야망에 맞는 일에 뜻이 있었읍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음모를 합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부터 사랑으로써, ‘니므롯’이 반대한 그 하나님의 손에 도구로 사용되고 싶어서 그런 음모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은 여호와의 의로운 목적과 일치한 목적을 가지고 계획하도록 그를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가 나라들을 멸절하고 공격하는 것은 단순히 그 자체를 위해서, 짐승을 무차별하게 죽이기를 좋아하는 사냥군의 정신에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네 거짓 신들을 기쁘게 하려는 것이지 여호와를 기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순전히 세계 정복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그에게 원하시어 그에게 맡기시는 신분, 곧 징계 대행자의 신분을 원치 않습니다. “‘앗수르’ 사람”의 계속적인 행동은 이것이 사실임을 증명하였읍니다.
15. “‘앗수르’ 사람”은 자기의 정복에 대해 누구에게 영예를 돌리며, 이사야 10:8-11에 기록된 그의 말은 이 점을 어떻게 나타내고 있읍니까?
15 “‘앗수르’ 사람”은 그를 도구로 사용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여호와께 영예를 돌리지 않고 모든 영예를 자신에게 돌립니다. “‘앗수르’ 사람”이 열 지파 ‘이스라엘’ 왕국을 무너뜨리고 그의 수도 ‘사마리아’를 점령하려고 접근하는 때에 그러한 태도가 잘 나타납니다. 그 ‘이스라엘’ 왕국은 그 “‘앗수르’ 사람”이 멸절시키고 무너뜨리려고 결심한 나라들 중 하나였읍니다. “이르기를 나의 방백들은 다 왕이 아니냐? ‘갈로’는 ‘갈그미스’와 같지 아니하며 ‘하맛’은 ‘아르밧’과 같지 아니하며 ‘사마리아’는 ‘다메섹’과 같지 아니하냐? 내 손이 이미 신상을 섬기는 나라에 미쳤나니 그 조각한 신상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신상보다 우승하였느니라. 내가 ‘사마리아’와 그 신상에게 행함 같이 ‘예루살렘’과 그 신상에게 행치 못하겠느냐 하도다.”—이사야 10:8-11.
16. 이러한 “‘앗수르’ 사람”의 신성모독적인 말은 누구에 대한 말이며, 어떠한 종교적 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왕들 중의 왕”이 되었읍니까?
16 이 말은 살아계시고 참되시며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에 대한 경멸적인 말이며, 실로 신성모독적인 말입니다! “‘앗수르’ 사람” 보기에는 자기가 정복하려고 하는 도시들은 그가 이미 정복한 도시들과 같이 될 것입니다. 그가 정복한 지역들은 지방적인 왕들의 다스림을 받았었읍니다. 이제 그 왕들은 자기에게 조공을 바치는 방백들이 되었읍니다. 그러므로 그의 방백들은 사실상 “왕”들이었으며, 그 때문에 그는 자기가 “왕들 중의 왕”이라고 자부하였읍니다. “‘앗수르’ 사람”은 자기가 정복한 왕들이 다스리던 도시에 “신”들이 많이 있었고 사람이 만든 형상도 많은 것을 보았읍니다. 사실상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있는 수보다 더 많았읍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비‘이스라엘’ 여러 도시에 신들과 인공적 형상의 수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앗수르’ 사람”은 그들 이교 도시들을 정복하였읍니다. 이 사실은 그가 그러한 모든 신들보다 강력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었읍니까? “‘앗수르’ 사람”은 자기 스스로 ‘강력하다’고 대답하였읍니다.
17. 그러므로 왜 “‘앗수르’ 사람”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이 용이하게 정복될 것으로 생각하였읍니까?
17 그러한 “신”들은 헛것과 같이 무가치하였읍니다! 그러니, “‘앗수르’ 사람”에게 고개를 숙인 비‘이스라엘’ 도시들에 비해 신들과 형상들을 더 적게 가진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은 더 용이하게 정복될 것 같았읍니다. 왕들 중의 왕인 “‘앗수르’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였읍니다.
18. ‘사마리아’를 정복할 수 있는 “‘앗수르’ 사람”의 능력은 중요한 무엇에 기인하였읍니까?
18 그 당시 열 지파 ‘이스라엘’ 왕국은 배교한 나라, 종교적 배신자가 되었읍니다! 그 나라는 금송아지를 숭배하였고, 심지어는 이교의 ‘바알’을 숭배하였읍니다. ‘사마리아’는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받들지 않았읍니다. 그 대신 그들은 무가치한 신들과 인간이 만든 우상을 가지고 있었읍니다. 그러므로 “‘앗수르’ 사람”이 3년 동안 포위하였다가 결국에 가서 기원전 740년에 그 도시를 함락시킨 것도 놀랄 것이 없었읍니다! 이 도시를 정복하게 되자 “‘앗수르’ 사람”의 교만은 더욱 높아졌으며, 동시에 ‘예루살렘’에서 행해지는 여호와의 숭배에 대한 모독도 강해졌읍니다. ‘사마리아’에 대한 군사적 승리에 대해, 그곳을 “가로상의 진흙 같이 짓밟”은 데 대해, ‘앗수르’의 정복자는 자기에게 영광을 돌렸읍니다. 그는 필적할 자가 없을 것 같이 보이는 자기의 군사 기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였읍니다. 그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 배도한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연 몰랐읍니다!
19. 그러므로 이제 무슨 질문이 솟아납니까?
19 이제 매우 흥미 있는 질문이 솟아납니다. 바로 이러한 질문입니다. ‘사마리아’와 열 지파 ‘이스라엘’ 왕국이 그리스도교국을 전영하였으므로, 배도한 ‘이스라엘’에 닥친 참화가 우리 시대 그리스도교국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닥칠 것입니까?
그 제국주의자에 대한 심판이 약속되다
20, 21. 이사야 10:12-14에 의하면, 여호와께서는 “‘앗수르’ 사람”의 말에 대해 왜 관심을 가지셨읍니까?
20 우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호와의 이름을 받은 도시가 위협적인 말을 들을 때에, 여호와께서 관심을 갖지 않으시겠읍니까? 당연히 관심을 가지실 것입니다. 따라서 예언자 ‘이사야’를 통하여, 여호와께서는, 그 ‘앗수르’ 제국 건축자의 자화자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명하십니다.
21 “이러므로 주[여호와] 내가 나의 일을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한 후에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리라. 그의 말에 나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나니 나는 총명한 자라. 열국의 경계를 옮겼고 그 재물을 약탈하였으며, 또 용감한 자 같이 위에 거한 자를 낮추었으며 나의 손으로 열국의 재물을 얻은 것은 새의 보금자리를 얻음 같고 온 세계를 얻은 것은 내어버린 알을 주움 같았으나 날개를 치거나 입을 벌리거나 지저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는도다.”—이사야 10:12-14.
22. 온 세계를 정복하기 위하여 “‘앗수르’ 사람”은 무엇을 점령해야 하였읍니까?
22 “‘앗수르’ 사람”의 입에서 나온 그러한 말을 볼 때에 ‘앗수르’ 세계 강국은 ‘사마리아’를 정복한 것으로 만족치 않을 것은 분명합니다. 그는 “온 세계를 얻”으려고 하였읍니다. ‘예루살렘’과 ‘유다’ 땅은 그가 주어담을 수 있는 좋은 알 같았읍니다. ‘앗수르’ 제국주의자는 자기가 온 세계를 정복할 능력과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생각하였읍니다.
23, 24. (ㄱ) “‘앗수르’ 사람”은 버려진 보금자리에서 알을 집어내듯이 어떤 식으로 온 세계를 얻을 것으로 생각하였읍니까? (ㄴ) 왜 여호와께서는 그에 관해 무슨 말씀을 해야겠다고 느끼셨읍니까?
23 “‘앗수르’ 사람”은, 그렇게 하는 것이 마치 어미 새가 놀라서 버리고 도망간 보금자리에서 알을 집어내는 것 같이 용이하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알을 집으려고 들어오는 손을 막기 위해 날개를 펄럭이는 일도 없을 것 같았읍니다. 입을 벌려 항의하는 일도 없을 것 같았읍니다. ‘앗수르’ 전쟁 기구에 의한 약탈과 탈취 및 추방에 대해 지저귀는 불평도 없을 것 같았읍니다. 그러므로, “‘앗수르’ 사람”은 정복한 지역에서 자기 원대로, 경계를 변경 혹은 말소하고 사람들을 본거지에서 추방하려 하였읍니다. 마치 “‘앗수르’ 사람”이 생존한 ‘이스라엘’ 사람을 하나님이 주신 ‘이스라엘’ 땅에서 추방하고 그 땅에 다른 민족을 이주시킨 것과 같이 하려고 하였읍니다.
24 “‘앗수르’ 사람”이 특히 탐내는 약탈물은 ‘예루살렘’과 ‘유다’ 땅이라는 것을 여호와는 아셨읍니다. 그것은 지상에 있는 여호와의 숭배의 마지막 보루였읍니다. 그분이 그에 관해 무슨 말씀을 하신 것은 당연하였읍니다. 그러한 경우에 그분이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25. 왜 그 당시에 여호와께서는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 하실 일이 있었읍니까?
25 기원전 8세기 그 위급한 때에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빛 ··· 거룩한 자”로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하실 일이 있으셨읍니다. ‘예루살렘’은 ‘시온’ 산에 위치해 있었읍니다. (이사야 10:17) 배교한 왕 ‘아하스’의 통치 기간에 ‘예루살렘’을 포함한 ‘유다’ 땅은 이교 우상 숭배로 오염되었읍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 ‘히스기야’ 통치 초기에 여호와의 영이 ‘예루살렘’의 새로운 왕을 감동시켜 그 땅에서 거짓 숭배와 무가치한 신들을 일소하고 여호와의 성전이 서 있는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 순결한 숭배를 회복케 하였읍니다. “‘앗수르’ 사람”이 ‘사마리아’를 함락시키기 전에 ‘히스기야’는 5년을 통치하였읍니다. 그는 기원전 716년까지 29년을 의롭게 다스렸읍니다.
26. 이제 여호와께서는 무엇을 할 기회가 무르익었음을 아셨으며, 관련된 ‘앗수르’ 왕은 누구였읍니까?
26 ‘히스기야’ 왕은 자기 아버지 ‘아하스’ 왕이 ‘앗수르’와 맺은 정치적 동맹 관계를 단절하였읍니다. 이 때문에 “‘앗수르’ 사람”과 ‘히스기야’의 하나님 여호와 사이에 대결이 있게 되었읍니다. 그러한 상황 하에서 여호와께서는 하나님을 대항하는 ‘앗수르’ 왕을 처벌할 입장이 무르익었음을 보셨읍니다.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기 좋은 기회였읍니다. (이사야 10:12) 여기에 관련된 왕은 ‘사르곤’ 2세의 아들 ‘산헤립’(‘세나케리브’)이었읍니다. 기다란 그의 이름은 “‘신’이 형제들을 증가시켰다” 혹은, “‘신’이 (상실한) 형제들을 대치해 주소서”를 뜻합니다. ‘신’이라는 말은 ‘앗수르’의 달신(月神)의 이름이었읍니다.
27. ‘앗수르’의 내부 조직에 간섭하지 않고도 여호와께서는 그것을 어떻게 상징적 “도끼”로 사용하실 수 있었읍니까?
27 우리 시대에 ‘산헤립’에 대응하는 자가 있읍니다. 여호와께서 현대적인 실체적 “도끼”를 어떻게 취급하시고, 그것으로 어떻게 찍는 일을 하실 것인가는 고려해 볼 만한 흥미있는 내용이 됩니다. 이 점을 연구할 때, 여호와께서 고대 ‘앗수르’ 제국으로 하여금 그 자체의 조직을 갖도록 허락하셨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내부 구성을 간섭하지 않으셨읍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세계 강국을 자기의 “도끼”로 사용하실 수 있었읍니다. 어떻게 그 일을 하셨읍니까? 그것의 타격을 지도하시고 그 상징적 “도끼”가 칠 장소로 인도하심으로써였읍니다. 그렇게하여 여호와께서 찍기를 원하시는 것을 찍도록 하셨읍니다.b
[각주]
a 이 문제에 관하여 「매클린톡과 스트롱 백과사전」 4권 641면 2단 “아일랜드”라는 항목에서는 이렇게 알려줍니다. “[북방인들의] 이러한 침공이 있은 후 무정부 상태의 기간이 잇따랐다. 그 기간에 ‘아일랜드’ 교직자들의 도덕 상태가 크게 몰락하였다. 그 당시 ‘로마’의 불평은 주로 ‘아일랜드’의 독특한 교회 의식 곧 교직자들의 결혼, 성유(聖油)없이 세례를 행하는 것, 자기네 독자적인 기도문의 사용 등에 관한 것이었다. 교황 사절단은 결국 12세기 중엽에 가서야 ‘아일랜드’의 교회를 ‘로마’의 교회에 굴복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때까지는 그 교회가 고해, 미사, 면죄 등을 행하지 않았으며, 주의 만찬을 두 가지로 기념하였다고 믿어진다. 1155년에 교황 ‘하드리안’ 4세는 교서로써 영국 왕 ‘헨리’ 2세에게 ‘아일랜드’를 정복할 것을 허락하였으며, 그 대신 왕은 교황의 특권을 보호할 것을 교황에게 약속하였다.”
b 이에 대한 실예로서, 왕의 결혼 잔치에 관한 비유 가운데 마태복음 22:7에 나오는 예수의 말씀을 보라. 그분의 이 예언은, 기원 70년에 ‘티투스’ 장군 지휘 하의 이교 ‘로마’ 군대에 의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지 않은 ‘예루살렘’ 도시에 성취되었다.
[205면 삽화]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그림—‘앗수르’ 문자]
신 아키 이리바
(달) (형제들) (그가 증가시켰다)
“달이 형제들을 증가시켰다”
‘산헤립’(세나케리브)의 이름을 나타내는 설형문자와 그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