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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은 당신에게 무엇을 뜻하는가?파수대—1984 | 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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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닌 행복한 사람들이 서로 사랑 가운데 의좋게 살아가는 것도 생각하게 되지 않는가? 그러므로, 지상의 어떤 아름다운 곳이 온전한 의미의 낙원으로 불리기에 앞서, 거기 살 사람들은 먼저 하나님같은 성품을 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성서는 사람들의 기질상의 이같은 변화를 지적하여 사람들—자기 성품과 생활을 개선시킨 사람들—의 영적 상태를 묘사한다. 하지만, 아마 당신은 ‘그런 상징적인 낙원이 오늘날 실제로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어디에?’라고 궁금해 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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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낙원을 지금 즐길 수 있는가?파수대—1984 | 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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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낙원을 지금 즐길 수 있는가?
하나의 낙원이 오늘날 지상에 존재한다. 그것은 계속 널리 확장되고 있으며, 수백만 명이 그것을 즐기고 있다. 당신 역시 그 일부가 될 수 있다. 이것은 이상적인 꿈에 불과한가?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자연의, 지적 낙원이 아니라 영적 낙원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a
“영적 낙원이라니 무슨 뜻인가?”라고 물을지 모른다. 간단히 말해, 자기 성품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요구 조건에 순응하고, 그분의 참 숭배 안에 연합되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한 조직은, 영적 낙원 안에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성서 어디에서 이같은 놀라운 영적 상태를 알려 주는가? 이런 상태가 오늘날 존재한다는 어떤 증거가 있는가?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함
낙원이 생각나게 하는 상태를 묘사하는 성서 예언은 많이 있다. 이런 낙원에 관한 즐거운 묘사 가운데 하나가 이사야 11:6-9에 들어 있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여기 묘사된 것 같은 평온한 환경 가운데, 이처럼 놀랍게 존재하는 온전한 평화를 누리면서 산다면 얼마나 즐겁겠는가! 그렇게 되면 ‘에덴’ 동산에서 동물들과 사람들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며 살던 때 존재하던 그 낙원 상태가 회복될 것이다. (창세 1:30; 2:8, 9, 19, 20) 참 그리스도인들은 장차 메시야 왕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온 지구에 내릴 이 웅대한 축복을 즐길 것을 간절히 기대한다. 위에 인용된 귀절 바로 앞에 나오는 이사야 11:1-5에 그분의 통치권이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왕국 통치 아래 틀림없이 실현될 이 미래의 축복만이 ‘이사야’의 말의 유일한 성취가 되는가?
그렇지 않다. 이 예언은 또한 인간의 성품의 변화를 묘사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떻게 그런가? 18세기 성서 학자 ‘마태 헨리’가 이렇게 대답한다. “아주 사납고 무서운 기질을 가지고 있어, 주변 사람 모두를 물어 뜯고 삼키곤 하던 사람들이 성질을 이상하리만큼 변화시켜 ··· 가장 약한 사람들, 전에라면 만만한 먹이로 여겼을 그런 사람들과도 함께 사랑 가운데 생활하게 될 것이다.”
또 다른 성서 학자 ‘조셉 벤슨’은 지난 세기에 이렇게 썼다. “사납고 잔혹하고 다스릴 수 없던 기질의 사람들이 복음 전파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크게 변화하여, 매우 겸손하고 신사적이고 유순하게 되며, 4절에 언급된 온유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더는 괴롭히거나 박해하지 않게 될 것이다.”
상상해 보라! 사람들이 이전의 호전적인 특성을 버리고 대신 평화스러움과 사랑으로 특징을 이루는 성품을 입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주체성을 상실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사야’는 이리가 어린 양이 된다고 하지 않고, 그 성품이 너무나 변화되어 어린 양과 함께 평화스럽게 거한다고 말했다.
비슷하게도, ‘이사야’의 말과 일치하게, 짐승같은 특성을 가진—아마 동료 인간을 죽이거나 이용하거나 또는 다른 방법으로 피해를 입혔을—사람들이 성품을 변화하여 양같은 평화스런 기질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의좋게 살아간다. 이런 상태가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게 될 때, 그 웅대한 결과는 영적 낙원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사야’의 말은 오늘날 실제로 성취되고 있는가?
영적 낙원—언제?
‘이사야’서에 들어 있는, 그와 상응하는 예언은 이 놀라운 영적 상태가 실현되기 시작할 때를 알아내는 데 도움을 준다. 이사야 2:2-4을 읽어 보자: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
비슷한 변화—사람들이 평화스런 기질을 갖게 되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게 되는 일—가 묘사되어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이 일은 언제 일어날 것인가? 성서 예언은 “말일”에라고 대답한다. 「파수대」지에서 여러 번 설명했듯이 이 사물의 제도는 1914년 이래로 마지막 날에 처해 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이사야 11:6-9이 적용되고 있는 때에 살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 웅대한 영적 상태는 현존하고 있음에 틀림없는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라고 물을지 모른다.
성품을 길들이는 일
‘이사야’의 예언에 나온 대로 성품을 길들이는 일은 성서를 배워 “정신을 새롭게”하고 ‘새 성품을 입’은 진지한 사람들 가운데 여러 번 반복되고 있다. (로마 12:2; 에베소 4:23, 24, 신세 참조) 다음의 예를 고려해 보자:
‘데이빗’은 미국 ‘미네소타’ 주의 한 농장에서 자란, 덩치 크고 억센 젊은이이다. “아버지는 논쟁거리를 주먹으로 해결하라고 내게 늘 이야기했지요.” 나중에 ‘아마튜어’ 권투 선수가 된 ‘데이빗’은 설명한다. “아버지가 ‘싸움을 걸지는 말아라. 하지만 반드시 이겨라’고 말한 일을 난 늘 기억할 수 있어요. 그 결과, 질문을 하는 일은 없고 늘 주먹이 앞서게 되었지요. 사실상 다른 사람들의 몸에 상처를 내는 일을 즐겼읍니다.”
예를 들어, 어느날 밤 주차장에서 차를 빼내던 한 남자가 ‘데이빗’의 차를 가로막은 일이 있었다. 그는 완강하게 비켜주지 않았다. “너무나 화가 나서 죽이고 싶었지요”라고 ‘데이빗’은 말한다. 그래서 그는 그 남자를 차에서 끌어내려 의식을 잃게 할 정도로 구타했다. 이처럼 기질이 난폭한 사람이 참으로 행로를 바꿀 수 있었는가?
‘데이빗’은 실직 상태에 있던 어느 날, ‘여호와의 증인’과 접촉하게 되었다. 다가오는 의로운 사물의 새 질서에 관한 소식은 그에게 감명을 주었다. “처음부터 그들에게 진리가 있음을 확신했지요”라고 ‘데이빗’은 말한다. ‘데이빗’은 배우는 것을 생활에 적용함에 따라 변화하기 시작하여, 담배를 끊고 마약 사용을 중지했다. 심지어 난폭한 기질을 길들이는 일에 있어서도 발전하였다.
하지만 몇 달 후 ‘데이빗’은 실망적인 퇴보를 겪었다. 건축 현장에서 일하던 중이다. 어느 날 아침 한 동료 작업자가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데이빗’은 그에게 그만두라고 주의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과는? ‘데이빗’은 이렇게 설명한다. “내가 그 사람을 너무나 심히 때렸기 때문에 그가 죽었다고 생각했어요. 거의 20분간이나 그는 의식을 차리지 못했읍니다. 나는 정말 부끄러웠읍니다.”
그러나, ‘데이빗’은 성품을 변화하는 일에서 서서히 진보했다. 그가 침례받은 여호와의 증인이 된 지 여러 해 후에 정말 시험이 왔다. 호별 전도를 하던 중이었다. 한 집에서 남자가 나오더니 욕설을 마구 퍼붓기 시작했다. 그리고 ‘데이빗’의 ‘코우트’를 움켜 잡고 계단 아래로 떠밀어 냈다. 한 마디 말도 없이 ‘데이빗’은 다음 집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던지, ‘데이빗’을 따라와, 야구 방망이로 그의 아랫등을 내리쳤다. 그럼에도, 전에는 난폭하던 이 젊은이는 보복하지 않았다! 자리를 피했을 뿐이다. 성품이 참으로 놀랍게 변화되지 않았는가! 이 “이리”가 이제 “어린 양들”과 평화스럽게 지내며, 회중에서 장로로, 전 시간 봉사자로 섬기고 있다.
흔히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처럼 변화하는 것을 보고 감동되어, 자기 역시 생활에서 개선을 위한 변화를 하려는 자극을 받게 된다. 이같은 경우로, 역시 ‘데이빗’이라는 이름의 다른 젊은이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한 옛날 친구를 만난 후에 이렇게 말했다. “그 친구는 달라졌어요. 더는 장발이 아니고, 욕도 안 하고 마약 관계에도 관심이 없었지요. 자기 생활을 완전히 깨끗하게 한 겁니다. 이 일로 나는 너무나 깊은 인상을 받아 무엇 때문에 그런 변화를 하게 되었는지 알아보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데이빗’의 친구는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던 것이다. ‘데이빗’도 자기 생활을 먼저 깨끗하게 한 다음 그렇게 되었다.
전세계 45,000개의 ‘여호와의 증인’의 회중에는 위와 같은 경험들이 무수히 많다. 아마 당신도 생활에 주목할 만한 변화를 일으킨 사람들 한 두 명을 알지 모른다.
관찰자들이 ‘여호와의 증인’들의 대회에 참석하면, 흔히들 평화로운 분위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쥬르날 드 몽레알」지의 기고가 한 사람은 이렇게 썼다. “나는 ‘증인’이 아니다. 하지만 ‘증인’들이 효율성과 합당한 행동을 입증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증인이다. ··· 만일 그들만 세상에 산다면, 밤에 사람들은 문을 걸어 잠그거나 도난 경보기를 장치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멕시코’의 두 마을은 반목 상태였다. 툭하면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경찰도 이를 제지하는 데 무력했다. 그러다가, 한 가족이 ‘여호와의 증인’과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다른 가족들 또한 연구하기 위해 무기를 팔아 그 돈으로 성서를 샀다. 곧 이 마을들 사이에는 참다운 평화와 연합이 있는 영적 낙원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사야 11:6-9에서 알려 주는 상태를 이룬 것에 대한 영예를 받는 것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아니다. 그렇지 않고, 우주에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질을 단호히 바꾸게 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힘이 있다. 그 힘은 하나님의 성령이다. (갈라디아 5:22, 23) 하나님께서는 진지하게 성령을 구하며 그분의 요구 사항에 순응하는 사람들에게 그 성령을 기꺼이 베푸신다.—누가 11:9-13; 사도 5:32.
‘여호와의 증인’들은 결코 완전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고,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문제가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문제를 처리하는 데 사용하는 건전한 지침—성서—이 있다. (시 119:105) 그들은 때때로 실패하는 일이 있어도, 그 원칙을 생활에 적용하려고 열심히 노력한다. (로마 3:23) 알다시피, 깊숙이 뿌리박힌 특성이 쉽사리 근절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영의 도움을 받아, 성품이 아주 거친 사람들조차 바람직하지 않은 특성을 길들이는 데 있어서 발전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이 있다. 영적 낙원에서는 우리가 오늘날 세상에서 보고 있는 분쟁, 분열, 부도덕이 아니라, 전세계 ‘여호와의 증인’들 가운데 가득찬 사랑, 정신의 평화, 연합을 즐기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천년 통치 기간 중 자연의 낙원에서 이 지상에 인간들이 어떻게 평화로이 함께 살 것인지를 미리 맛보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누가 23:43.
낙원에 관해 더 알아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여호와의 증인’들이 어떻게 평화, 만족, 행복, 연합—낙원하면 틀림없이 금방 연상될 것들—을 그처럼 상당히 즐기게 되었는지 알아볼 수 있다. 바로 지금 이런 낙원을 당신 역시 어떻게 즐길 수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 어떠한가!
[각주]
[5면 네모]
낙원에 관한 예언들
‘히브리’어 성경 가운데 들어 있는 낙원에 관한 많은 예언들이 우리 시대에 이미 성취를 보았다.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날 것을 예언한 이사야 35장의 예언을 일례로 고려해 보자. 이 예언은 포로로 잡혀 갔던 ‘유대’인들이 기원전 537년에 ‘바벨론’에서 돌아왔을 때 소규모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들이 하나님을 숭배하는 일로 돌이키자 기뻐하신 하나님께서는 황폐한 고토 ‘유다’로 하여금 다시 한번 꽃이 피고 풍성한 산출을 내게 하심으로 소규모적 낙원이 되게 하셨다.
이사야 35장의 예언은 또한 분명히 영적으로도 성취된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한 가지는, 5절과 6절에서 소경, 귀머거리, 저는 자, 벙어리가 모두 고침을 받을 것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원전 537년에 돌아온 ‘유대’인들이 이런 병을 문자적으로 고침받았음을 시사하는 내용이 없다. 분명히 이것은 영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그들의 눈은 열려 고국에서 누리는 자유의 빛을 보게 되었다. 비슷하게, 지금 영적 낙원이 여호와 하나님의 숭배자들 가운데서 번성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세계적으로 그러하다.
가까운 장래에 하나님께서 지상에서 모든 악을 멸망시키신 후에, 살아 남은 “큰 무리”와 죽음에서 부활되는 사람들은 매우 실제적인 신체적 고침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자신의 대속 희생에 기초하여 순종하는 사람들을 인간 완전성으로 이끌어 올려, 회복된 지적 낙원에서 영원히 살게 하실 것이다. 이처럼 이사야 35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상태는 조만간 확산되어, 지구가 평화로운 공원 같은 정원으로 변모하면서 문자적 낙원이 실현되어 감에 따라, 온 땅을 포용하게 될 것이다.—이사야 25:6-8; 계시 7:9; 21: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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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조직과 함께 전진함파수대—1984 | 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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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조직과 함께 전진함
‘그랜트 수우터’의 체험담
내가 열네 살 때인 1922년에, 나의 아버지는 우리 가족을 데리고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 ‘캘리포오니아’ 주로 이사를 하였다. 가는 길에 우리는 ‘아이다호’에 사는 옛 친구들을 방문하였다. 그 친구들은, ‘캘리포오니아’ 주에는 성서에 의하면 당시에 살고 있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캘리포오니아’ 주에 도착한 직후에, 우리는 한 신문에서 “지금 살아 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란 광고문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산호세’에서 있을 공개 강연의 제목이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나의 아버지는 ‘성경 연구생’들(당시는 ‘여호와의 증인’이 그렇게 알려졌다)의 소재를 알게 되었고, 우리를 그들이 갖는 공개 집회로 데리고 가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내가 교회의 주일 학교에 관계하기를 원하였다. 모든 종파의 설교자들에 대해선 비평적이었던 아버지도, 그렇게 하는 것이 나에게 좋겠다고 하여 그 점에 동의하였다. 그래서 나는 감리교의 주일 학교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마침내 나는 그 학교의 회계 담당이 되었고, 그 학교의 농구 ‘티임’에서 운동도 하였다. 동시에, 우리 가족은 ‘산타클라라’의 우리 집에서 몇 ‘킬로미터’ 거리밖에 안 되는 ‘산호세’에서 ‘성경 연구생’들이 개최하는 공개 강연에 참석하였다.
나의 아버지는 세상 상태가 개선되기를 희망하였고, 또 그런 목적으로 여러 정치 후보자들을 위해 선거 운동을 하였는가 하면, 심지어 그러한 후보자 한 사람의 이름을 우리의 ‘모델 T 포오드’ 자동차 바람막이 유리창에 써 부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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