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할 포도나무와 포도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한 15:8.
1. ‘세베데’의 아들 ‘요한’을 반려자로 가지고 계신 그 주목할 만한 분은 자신을 어떻게 식물로 비유하셨읍니까?
오늘날 어떤 사람이 자신을 포도나무에 비유한다면 이상하게 생각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상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분이 바로 그렇게 하셨읍니다. 그분은 자기의 충성스러운 반려자 열 한 명과 함께 마지막으로 포도주를 마시던 날 밤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읍니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 반려자들 중 하나인 ‘세베대’의 아들 ‘요한’이 이 생각을 자극하는 말씀을 듣고, 기억하고, 우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읍니다.—요한 15:1, 5.
2, 3. (ㄱ) 사사 ‘기드온’의 아들 ‘요담’의 비유에 의하면, 상징적 나무들이 어떠한 나무들에게 왕이 되어 달라고 요청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읍니까? (ㄴ) 그들의 왕을 뽑은 최종 결정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어 있었읍니까?
2 이러한 일이 있기 수백년 전에 이 동일한 땅에 살던 한 사람이 한 가지 비유를 하였는데 그 비유 가운데서 그는 사람을 포도나무에 비유하였읍니다. 그 사람 역시 생명이 위험에 처해 있었읍니다. 결론으로 그는 이 비유를 들어서, 왕을 추대하는 사람들이 의로운 사람을 왕으로 뽑지 않음으로써 어떻게 국가적인 재난을 당하게 될 것인지를 보여 주었읍니다. 그는 자기 백성을 나무들에 비유하여, 자기들을 다스릴 왕을 찾는 이들이 처음에는 감람나무에게, 다음에는 무화과나무에게 왕이 되어 달라고 요청하였지만, 그들이 어떻게 이 열매 맺는 나무들에게 거절을 당하였는지를 묘사하였읍니다.
3 ‘이스라엘’의 사사 ‘기드온’의 오직 하나 살아남은 아들 ‘요담’은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읍니다: “나무들이 또 포도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의 왕이 되라 하매 포도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나의 새 술을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하니라].” 이렇게 세번 씩이나 거절을 당하자, 상징적 나무들은 열매 맺지 못하는 가시나무를 자기들의 왕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읍니다. (사사 9:3-14) 이렇게 왕을 잘못 선택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열매 맺는 포도나무에서 나는 즐거움을 주는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요담’은 지적하였읍니다.—사사 9:15-20.
4. 이보다 조금 앞서 예수께서는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무엇의 상징으로 사용하셨으며, 그 다음 그분은 그 의미를 어떻게 더 밝히셨읍니까?
4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의 왕으로서 역시 거절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 즉 사람을 포도나무로 비유하신 첫 번째 분이 아니었읍니다. 그분은, 방금, 자기에게 닥칠 죽음을 기념하는 일을 소개하셨으며, 그 때 그분은 같은 날 늦게 쏟게 되실 자기의 피를 상징하기 위해 함께 마시는 잔에 들어 있는 포도주를 사용하셨읍니다. 그러나 다음에 포도주의 상징적 의미를 좀더 밝혀 주시기 위해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마태 26:26-29) 새 포도주는 특히 기분을 상쾌하게 해 주는 것이며, 그분의 천적 아버지의 왕국에서 마실 새 “포도주”는 분명히 기쁨을 주는 포도주일 것입니다.
5. 예수께서 말씀하신 포도나무의 비유 가운데서, 그분은 그것을 단지 자신만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용하셨는지의 여부를 어떻게 알 수 있읍니까?
5 그 때는 유월절 밤이었으므로 포도주가 중요하였으며, 기원 33년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가지신 이 모임에서 적어도 포도주 네 잔을 마셨을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분이 포도나무에 관한 새로운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읍니다. 그러나 이 비유 가운데서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 뿐 아니라 그 이상을 상징하기 위해 포도나무 전체를 사용하셨읍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그분은 자기의 충실한 제자들에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말씀하셨읍니다.—요한 15:5.
6. 거기에는 열 한명의 사도들 밖에 없었으므로, 예수께서는 그 “포도나무”가 단지 열 한개의 가지만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특히 마태복음 21:43에 있는 그분의 말씀으로 비추어 볼 때 어떠합니까?
6 이러한 말씀으로써 예수께서는 이 그리스도의 “포도나무”가 그 당시 자기와 함께 식탁 앞에 기대 앉아 있던 열 한명의 충실한 사도들과 상응하게 단지 열 한개의 가지만 있을 것을 의미하지 않으셨읍니다. 메시야의 “포도나무”는 하나의 전체적인 새로운 그리스도의 나라를 구성하기에 충분할 만큼 더 많은 가지를 가져야 하였읍니다. 예수께서는 믿음이 없는 ‘유대’ 민족의 대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 이 새로운 나라를 넌지시 말씀하셨읍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태 21:43.
7. 시편 80:8-15에서는 어떤 나라가 “포도나무”로 비유되어 있으며,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실 것을 부르짖을 만한 어떠한 이유가 있었읍니까?
7 한 나라를 포도나무에 비유한 일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읍니다. 예수 자신의 천적 아버지 여호와께서는 이 나무를 한 나라의 상징으로 사용하셨읍니다. 예를 들면, 그분은 시편 필자 ‘아삽’이 영감으로 그분께 대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읊게 하셨읍니다: “주[여호와]께서 한 포도나무를 [‘모세’ 시대에] ‘애굽’에서 가져다가 [약속의 땅에서]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 주께서 그 앞서 준비하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편만하며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웠나이다.] ···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이키사 하늘에서 굽어 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권고하소서. 주의 오른 손으로 심으신 줄기[니이다].” (시 80:8-15) ‘예루살렘’은 기원전 607년에 멸망되고 이어서 세상 나라들이 온 땅을 지배하는 이방인의 때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은 이방 민족들에게 크게 짓밟힘을 당하였읍니다. 따라서 시편 필자는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실 것을 고통스럽게 부르짖었읍니다.
8. 여호와께서는 언제 새로운 “포도나무”를 심으셨으며, 이사야 5:3-7은 이에 대한 필요성을 어떻게 설명합니까?
8 예수께서 ‘요단’ 강에서 침례를 받으신 후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령으로 기름부으셨을 때 하나의 새로운 “포도나무”가 심어졌읍니다. 그렇게 해야 할 절실한 필요성이 있었읍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700여년 전에 예언자 ‘이사야’는 그 이유를 예언하였읍니다. 여호와께서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도록 영감을 주셨읍니다.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 판단하라.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 것을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임을 당케 하[리라]. ··· 내가 그것으로 황무케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을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말라 하리라 하였으니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이사야 5:3-7.
9. 후에 ‘예레미야’ 시대에,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민족적 “포도나무”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질문하셨읍니까?
9 ‘이스라엘’의 사태가 개선되지는 않았지만, 약 100년 후에,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수 있었읍니다: “네가 옛적부터 [‘애굽’에서 노예로서의] 네 멍에를 꺾고 [속박받는] 네 결박을 끊으며 말하기를 나는 순복지 아니하리라 하고 모든 높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몸을 굽혀 행음하도다.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예레미야 2:20, 21; 호세아 10:1, 2.
10. ‘이스라엘’에 모략이 없기 때문에, 신명기 32:28-33은 ‘이스라엘’이 어떤 “포도나무”가 될 것이라고 말하였읍니까?
10 그러한 상태는 일찌기 기원전 1473년에 ‘모세’가 다음과 같이 예언한 바와 꼭 같은 것이었읍니다: “그들은 모략이 없는 국민이라. 그중에 지식이 없도다. ··· 그들의 포도나무는 ‘소돔’의 포도나무요 ‘고모라’의 밭의 소산이라. 그들의 포도는 쓸개포도니 그 송이는 쓰며 그들의 포도주는 뱀의 독이요 독사의 악독이라.”—신명 32:28-33.
새 “포도나무”의 필요성
11. 포도원에 관한 예수의 비유에 의하면, 메시야는 포도 수확 때에 농부들의 손에 어떠한 대우를 받게 될 것입니까?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기원 29년에 메시야 즉 기름부음받은 분으로 오셨을 때 이 상징적 나라인 “포도나무”의 포도 수확기가 되었읍니다. 하나님의 대표자이신 그분이 이 “포도나무”로부터 거두실 그 과실은 어떠할 것이었읍니까? 기원 33년 ‘니산’월 11일, 즉 그분의 3년 반 동안의 공개적인 전파 사업이 끝나기 3일 전에, 예수께서는 하나의 비유를 말씀하심으로써 그분이 어떠한 대우를 받게 될 것인지를 설명하셨읍니다. 예수께서는 자기의 활동과 가르치는 일에 대한 성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반대에 관하여 논평하시기 위해서 그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은 비유를 말씀하셨읍니다: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 쫓아 죽였느니라.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
“···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본 일이 없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마태 21:33-44.
12. 모형적인 국가적 포도원의 농부들은 어떠한 열매를 바치지 못했으며,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합당한 열매를 꼭 받으시기 위해 어떻게 하실 것이었읍니까?
12 여호와의 국가적 “포도원”에서 일하는 ‘이스라엘’ 농부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어떠한 열매를 바쳐야 하였읍니까? 그 아들을 참되고 약속된 메시야로 믿어야 하였고, 그분을 ‘이스라엘’의 국가적 “포도원”을 심으시고 소유하신 분의 아들로서 받아들여야 하였읍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에게 그러한 열매를 바쳤더라면 그들은 하나님의 진정한 메시야 왕국에 들어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모형적인 왕국임을 알려야 했을 열매를 맺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왕국이 되는 특권이 국가적으로 그들로부터 옮겨지게 되었읍니다. 따라서 “포도원” 농부들로 이루어진 다른 나라가 만들어져야 하였읍니다. 이 새로운 나라는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한 열매를 산출할 것입니다. 이들 농부들은 이 포도원을 심고 소유한 분 즉 하나님께 합당한 열매를 바칠 것입니다.
13. (ㄱ) ‘유대’인 “포도원” 농부들은 주인의 아들의 상속권을 탈취함으로써 어떻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읍니까? (ㄴ) 예수께서는 건축자들이 버린 귀중한 돌이 어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읍니까?
13 누가 하나님의 메시야 왕국의 특권을 누릴 것인가를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열매”입니다. ‘유대’인 농부들은, 마땅히 기대된 열매는 바치지 않고, 하나님의 왕국의 “상속자”이신 예수를 죽이기까지 함으로써 그들이 그의 기업을 장악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읍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 언약하에 있는 하나님의 모형적인 왕국의 통치권을 그들 스스로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읍니다. (요한 11:47-53) 그러나 예수의 비유에서 이끌어 낸 결론에 의하면 그렇지 않았읍니다. (마태 21:41)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승리의 입성을 하신 후, 버림을 당하신 바로 다음날 하나님의 집 건축자들이 버린 귀중한 돌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읍니까? 하나님의 새로운 왕국 즉 ‘하나님의 천국’에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읍니다.
14. 예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시기 바로 전에 포도나무와 가지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시는 일을 왜 무의미하다고 생각지 않으셨읍니까?
14 여호와 하나님께서 심으시고 가꾸시는 “참 포도나무”에 관하여, 예수께서는, 비록 모형적인 국가적 “포도나무”의 ‘유대’ 농부들이 유월절 날 늦게 그를 죽이도록 허용된다 할지라도 그 참 포도나무는 죽어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읍니다. 따라서 그 때는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다가 체포되는 일이 일어나기 바로 전이었지만, 자기 제자들에게 포도나무와 가지에 관한 비유를 말씀해 주시는 것을 무의미한 일로 생각지 않으셨읍니다.
15. 요한복음 15:1-5에 의하면, 누가 “참 포도나무”의 농부이며, 가지들이 열매를 맺는가 못맺는가에 따라 그분은 가지들에게 어떻게 하십니까?
15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한 15:1-5.
심고 가꾸는 일
16, 17. (ㄱ) 여호와께서는 언제 “참 포도나무”를 심으셨으며, 어떻게 심으셨읍니까? (ㄴ)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족장 ‘야곱’보다 크신 분이며, “참 포도나무”에서 언제 “가지”가 나왔읍니까?
16 위대한 포도 재배자는 언제 이 열매맺는 포도나무를 심으셨읍니까? 그것은 기원 29년이었으며, 그 때 그분은 새로 침례받으신 예수에게 자기의 성령으로 기름을 부으셨읍니다. (이사야 61:1, 2) 그 때 여호와께서는 메시야 왕국의 상징적인 “포도나무”의 본줄기를 심으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형적인 ‘이스라엘’ 왕국이 ‘이스라엘’이라고도 불리운 족장 ‘야곱’에게서 뻗어 나왔다는 사실을 상기합니다. ‘야곱’은 열 두 아들을 낳았으며, 그 열 두 아들로부터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가 나왔읍니다. (사도 7:8-14)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야곱’에 상응한 분이었읍니다.
17 이 더 큰 ‘야곱’은 중심 포도나무 줄기였읍니다. 그분은 열 두명의 사도들을 선택하셨는데, 이들은 이 영적 “포도나무”의 장래의 “가지”들이 되었읍니다. (요한 15:16; 6:70) 그러기 때문에 그 유월절 날 밤, 그분은 그들을 “가지”들이라고 부르셨읍니다. 그러나 51일 후인 오순절 날 열 두명의 충실한 사도들은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읍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새로운 영적 ‘이스라엘’ 나라의 열 두개의 이차적인 기초들이 되었읍니다. 그들 위에 하늘의 새 ‘예루살렘’이 지어집니다. (계시 21:14; 에베소 2:20) 그러나 바로 그 오순절 날 약 120명으로 이루어진 그 집단의 기타 사람들도 성령을 받고 방언을 말하는 첫째 사람들이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그들 역시 그 영적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붙은 “가지”들이 되었읍니다.
18. 육적 ‘이스라엘’은 출애굽기 19:6, 7에 명시되어 있는 바와 같은 어떠한 기회를 붙잡지 못하였으며, ‘베드로’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누구에게 적용시켰읍니까?
18 그리하여 새로운 나라 즉 영적 ‘이스라엘’이 존재하게 되었읍니다. 한 나라로서의 육적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그분의 중보 ‘모세’를 통하여 출애굽기 19:6, 7에 있는 바와 같이 그 앞에 주신 기회를 붙잡지 못했읍니다. 그리하여 사도 ‘베드로’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영적 ‘이스라엘’인 새로운 나라의 성원들에게 적용하였읍니다. 어디에서 그렇게 말하였읍니까? 그의 첫 번째 영감받은 편지 즉 베드로 전서 2:9, 10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읍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19. 이사야 5:5-7이 성취된 이후, 영적 ‘이스라엘’ 나라에 어떠한 일이 일어났으며, 여호와께서 모형적인 ‘이스라엘’ “포도원”에 기울였던 동일한 주의를 그것에 기울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19 다행히도, 하나님께서 육적 ‘이스라엘’의 상징적 “포도원”에 대하여 이사야 5:5-7에 명시되어 있는 경고의 말씀을 실행하신 후, 영적 ‘이스라엘’의 그리스도인 나라는 계속하여 번영하였읍니다. 그분은 몸소 심으신 것을 키우는 농부로서, 기원 33년까지 육적 ‘이스라엘’의 이전 “포도원”에 기울이셨던 필요한 주의를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지”들에게 동일하게 기울이십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가지”들을 깨끗하고 생산적인 가지로 만드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흡지(吸枝)와 죽은 가지가 그러한 ‘깨끗한’ 가지에 섞여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비유 가운데서, 예수께서는 자기의 충실한 사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니라].”—요한 15:2, 3.
20. 요한복음 6:67-69에 있는 기록과 일치하게, 예수의 열 한명의 충실한 사도들은 무엇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들을 “깨끗”하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읍니까?
20 배반한 사도인 ‘가룟 유다’는 예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실 때 거기 있지 않았읍니다. 예수께서 이미 유월절 저녁 식사가 끝났을 때 그를 쫓아내셨읍니다. (요한 13:26-30) 남아있던 열 한명의 충실한 사도들은 전심으로 그분의 말씀 즉 메시야의 소식을 받아들였으며, 그러기 때문에 그분은 그들을 “깨끗”하다고 말씀하셨읍니다. 예를 들어, ‘가버나움’ 북쪽에 이르러 예수께서 그 사도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 하고 물으셨을 때 ‘시몬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였읍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요한 6:67-69.
21. 그러므로 이들 사도적 “가지”들은 어떠한 일들로부터 깨끗케 되었으며, 예수께서 사적으로 해 주신 말씀은 그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읍니까?
21 그러므로 이들 충성스러운 사도들에게는 결실치 못하는 불신이라는 죽은 나무 가지들이 없었읍니다. 그들에게는 비성경적인 ‘유대’교의 산만한 흡지(吸枝)가 붙어 있지 않았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에게 그들의 모든 주의를 기울였읍니다. 그들은 그분을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읍니다. (마태 16:16) 또 한번의 경우에, ‘베드로’는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하고 그분께 말하였읍니다. (마태 19:27) 그러한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서, 특히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사적으로 해 주신 말씀은 깨끗케 하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며, 그들을 “깨끗”한 영적 상태에 있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깨끗”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모든 “가지”들은 여호와의 “참 포도나무”의 독특한 목적을 온전히 수행하는 데 전념할 수 있었읍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게 기쁨이 되게 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