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실하게 인내하는 일
“여호와여, 주의 눈이 성실[충실함, 신세]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예레미야 5:3.
1. ‘예루살렘’이 취한 행로는 ‘예레미야’의 행로와 어떻게 대조를 이루었읍니까?
여호와께서는 고대 ‘예루살렘’에 대하여 “이 ··· 백성이 항상 나를 떠나 물러감[불충실함]은 어찜이뇨?” 하고 물으셨읍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완고한 행로, “전장을 향하여 달리는 말같이 각각 그 길[인기있는 길, 신세]”로 갔기 때문이었읍니다. 그리고 그들이 사물을 보는 육적인 견해는 재난을 초래하였읍니다. 왜냐 하면, 그들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8:5-7) 이와 대조적으로, ‘예레미야’는 충실히 인내하였읍니다. ‘예루살렘’이 멸망되기까지 40년간, 그리고 그 후에도, 그는 여호와의 심판을 선포하는 그의 임무를 계속 수행하였읍니다.
2. 다가오는 환난과 관련하여, ‘예레미야’의 입장은 어떻게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의 입장과 상응하였읍니까? (예레미야 4:5, 6; 6:1)
2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멸망될 날과 시간을 미리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북방에서 크게 떠드는 풍성” 즉 ‘바벨론’을 알고 있었읍니다. 그는 집행군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읍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여호와의 백성들은 “창초부터 지금까지 ··· 없”던 “환난”이 다가오는 “징조”를 뚜렷이 보고 있읍니다.—예레미야 10:22; 마가 13:4, 19.
3. (ㄱ) ‘여호와의 증인’들은 현대에 무엇을 선포해 왔으며, 얼마 동안 선포해 왔읍니까? (ㄴ) 그들은 그들의 믿음에 무엇을 공급해 왔읍니까?
3 지금까지 거의 60년간,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은 그리스도교국 안팎의 나라들에게 이 세상이 1914년 이래 “마지막 때”에 처해 있으며 현 사물의 제도가 조속한 장래에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에서 소멸될 것임을 선포해 왔읍니다. (다니엘 12:1, 4) 악귀의 세력이 나라들을 ‘아마겟돈’으로 모으고 있읍니다. (계시 16:13-16) 현대 ‘예레미야’ 반열은 이러한 소식을 선포하면서 충실히 인내하고 있읍니다. 그들은 그들의 믿음에 인내를 공급하고 있읍니다.—베드로 후 1:5, 6.
4. 우리의 격려의 원천은 무엇이며, 이것이 예레미야 17:5-8에 어떻게 예시되어 있읍니까?
4 ‘예레미야’ 반열이, 왕국 선포자의 대열에 새로이 모이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승리를 거둘 때까지 전진해 나아가는 데는 격려가 필요합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러한 격려를 베푸십니다.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는 자와 대조적으로, ‘예레미야’에 의해 상징된 사람들은 여호와를 신뢰하며 신임합니다. 그들은 “물가에 심기운 나무 같”아서, 여호와의 생명의 마련 모두를 마시기 위하여 거기에 뿌리를 내릴 수 있읍니다. 박해의 “더위”나 금지령 및 제한 조치로 인한 ‘가뭄’으로 인해 “결실이 그치”는 일이 없읍니다. 그들은 생산적인 나무처럼, 여호와께 찬양을 가져오는 면에서 “청청”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들은 “복을 받”고 있읍니다.—예레미야 17:5-8.
인내의 시험에 응함
5. ‘예레미야’의 인내의 어떠한 본에서 우리가 자극을 받아야 할 것입니까?
5 오늘날 일부 사람들은 왕국 봉사의 고귀한 보배보다 물질적인 목표에 눈을 고정시켰읍니까? 일부 사람들은 인내하기 어려워합니까? 때로는 ‘예레미야’도 인내하기 어려워하였음을 기억하십시오. 심지어 그는 중단해야 하겠다고 생각하기까지 했읍니다. 그러나 그 때에 그는 여호와의 말씀이 그의 마음 속에서 ‘불붙는 것 같이 골수에 사무쳤’읍니다. 그 말씀은 그로 하여금 계속 투쟁해 나아가고 그의 원수들에 대해 승리를 거두게 한 추진력이 되었읍니다. (예레미야 20:9) ‘예레미야’가 분투하여 극복한 문제들 몇가지를 고려하여 보면, 확실히 우리 마음 속에 승리를 목표로 인내하고자 하는 욕망이 심어질 것입니다!
6. (ㄱ) ‘예레미야’는 인내할 수 있는 힘을 어디에서 발견하였읍니까? (ㄴ) ‘예레미야’의 본과 일치하게, 우리는 어떠한 교제를 피해야 할 것입니까?
6 ‘예레미야’는 ‘아나돗’에 있는 그의 동료 향민들의 격렬한 반대를 받았읍니다. 그들은 ‘예레미야’에게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 하고 말하였읍니다. 그의 형제들과 그의 아버지의 집안은 그를 속였읍니다. 그를 저주하는 원수가 어디에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 11:21; 12:6; 15:10) 그러나 ‘예레미야’는 인내할 수 있는 힘을 발견하였읍니다. 어디에서? 여호와께 기도하는 데서, 그리고 그가 여호와의 이름 및 말씀과 관련된 특권에 대한 인식에서 힘을 얻었읍니다.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내가 기뻐하는[희롱하는, 신세] 자의 회에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니이다.]” (예레미야 15:16, 17)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말씀에서 그리고 그분의 이름을 지니는 데서 기쁨을 발견하였읍니다. 그는 불경건한 사람들의 희롱 즉 헛된 농담을 즐거워하지 않았고 그러한 사람들과 한 자리에 앉는 것을 현명하게 피했읍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읍니까?
7. (ㄱ) ‘예레미야’로 불평없이 그의 독신 신분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한 것은 무엇이었읍니까? (ㄴ) ‘바스훌’의 가혹한 행동에 대한 ‘예레미야’의 반응은 어떠하였읍니까?
7 그의 소식이 확실하다는 표징으로서,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에게 결혼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읍니다. 그리하여, 그는 멸망당할 자식을 낳지 않게 되어 있었읍니다. 그는 자기의 독신 신분에 대해 불평하지 않고 해야 할 일에 전념하였읍니다. 얼마 후, 여호와의 전의 유사장 ‘바스훌’은 ‘예레미야’의 말에 모욕을 느끼고 그를 구타하고 밤새도록 그를 착고에 채워 두었읍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석방되자마자 다시 두려움없이 ‘바스훌’에게, ‘유다’ 전체가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질 것임을 선언했읍니다.—예레미야 16:1-4; 20:1-6.
8. ‘예레미야’는 ‘여호야김’ 통치 중에 어떻게 두려움없이 행동하였읍니까?
8 기원전 628년 악한 왕 ‘여호야김’이 즉위하였을 때 여호와께서는 선포해야 할 강력한 예언을 ‘예레미야’에게 주시면서 “한 말도 감하지 말라”는 말씀을 반복하셨읍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성전 뜰에 서서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명하신 모든 말씀, 즉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의 소식을 말하였읍니다. 그 결과는 어떠하였읍니까? 기록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예레미야’가 여호와께서 명하신 말씀을 모든 백성에게 고하기를 마치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그를 붙잡고 이르되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고 예언하여 이르기를 이 집이 ‘실로’같이 되겠고 이 성이 황무하여 거민이 없으리라 하느뇨? 하며 그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집에서 ‘예레미야’에게로 모여드니라.” (예레미야 26:1-9)
‘유다’ 방백들이 현장으로 달려 오고,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은 ‘예레미야’가 죽어 마땅하다고 말하였읍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보내어 예언하게 하셨으며, 자기는 여호와의 음성을 순종하였고 그들이 자기를 죽음에 처하는 것은 무죄한 피를 흘리는 행위가 될 것이라고 감동적인 말로 분명히 말하였읍니다.—예레미야 26:10-15.
9. (ㄱ) 누가 ‘예레미야’를 옹호하는 말을 하였읍니까? (ㄴ) 이것은 최근의 어떠한 일을 상기시켜 줍니까?
9 바로 그 때에, 방백들과 모든 백성이 “이 사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고 우리에게 말하였”다고 하면서 ‘예레미야’를 옹호하였읍니다. 일부 장로들도, ‘예레미야’를 지지하였는데, 그 중 한 사람은 ‘그달리야’의 아버지 ‘아히감’이었읍니다. (예레미야 26:16-24)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두려움없이 이 예언을 계속하였읍니다. 이처럼 ‘유다’인들이 ‘예레미야’에 대한 박해를 잠시 중단한 것은, ‘말라위’에 있는 우리의 형제들이 경험한 얼마의 해방을 상기시켜 줍니다. 최근의 몇가지 보고에 의하면, 이들 중 다수는 감옥에서 석방되었으며,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지을 허락을 받았읍니다. 이전에 그들을 박해하던 청년들 중에 그들과 성서를 연구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나라의 또 다른 지역에서는, 지방 관리들과 친척들이 여호와의 백성에게 어려움을 주어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있읍니다. 하지만, ‘예레미야’와 같이, 그들은 계속 성실히 인내하고 있읍니다.
예언자들의 논쟁
10, 11. (ㄱ) ‘예레미야’와 ‘하나냐’는 어떠한 예언적 비유를 연출하였읍니까? (ㄴ) ‘예레미야’는 어떻게 참 예언자임이 증명되었읍니까?
10 ‘예레미야’가 예언적인 비유를 연출한 것 역시 ‘시드기야’ 통치 중이었읍니다. 여호와의 지시에 따라, 그는 목에 나무 멍에를 메고 ‘유다’와 그 주위 나라들이 ‘바벨론’ 왕의 멍에 아래로 들어갈 것 즉 엄중 처벌을 받을 것을 선언하였읍니다. 그러나 예언자 ‘하나냐’는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풀고 여호와께서 2년 이내에 나라들로부터 ‘바벨론’의 멍에를 쉽게 꺾어 버릴 것이라고 선언하였읍니다.—예레미야 27:2-15; 28:1-11.
11 예언자들의 이 논쟁에서 승리한 것은 누구였읍니까? 여호와의 참 예언자는 ‘예레미야’였읍니까, ‘하나냐’였읍니까?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나무 멍에가 쇠 멍에로 대치되리라는 것, 그리고 ‘하나냐’가 그 해에 죽으리라는 것을 예언하도록 명령하심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추호의 의문도 남지 않게 하셨읍니다. ‘하나냐’는 그 해 7월에 죽었을 뿐만 아니라, ‘바벨론’의 멍에는 마침내 과연 쇠 멍에임이 증명되었읍니다.—예레미야 28:12-17.
12, 13. (ㄱ) 어느 현대 집단이 ‘하나냐’와 같이 행동하며, 그들은 어떻게 위선적 행동을 하고 있읍니까? (ㄴ) 하나님의 참 증인들을 유지시켜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12 악한 의도로 ‘여호와의 증인’의 사업을 ‘넘어뜨리려’는 현대 거짓 예언자들도 참으로 ‘하나냐’와 흡사합니다! 이들 중 일부는 한 때 하나님의 백성과 동행하기도 했었으나, 그들은 이기적 야망이 충족되지 않는 것을 보고 기분이 상하여 그들이 이전에 토했던 그 가르침으로 돌아갑니다. 그들은 확실히 “착한 뜻”으로가 아니라 “투기와 분쟁으로” 전파합니다. 그들은 건설할 말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후 2:22; 빌립보 1:15) 그들은 “큰 환난”의 도래에 대해 ‘예레미야’ 반열과 반대되는 기대를 제시합니다.
13 그러나, 여호와께서 꺾어진 나무 멍에를 쇠 멍에로 대치하신 것만큼 확실하게, “큰 환난”은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때에 올 것이 확실합니다. 그리고 ‘하나냐’가 그 해에 여호와의 심판에 따라 사망한 것만큼 확실하게, 반대 예언을 하는 이들 집단들도 정해진 때에 집행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으며 그들을 유지시켜 줄 여호와의 영 혹은 “말씀”이 없읍니다.—예레미야 23:16-19; 31:1, 12.
계속 굳게 확신하라!
14. (ㄱ) ‘예레미야’와 같이, 우리는 어떠한 확신을 보여야 할 것입니까? (ㄴ) 왜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까?
14 ‘예레미야’와 같이, 우리는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에 대한 불굴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한 확신의 상징으로, ‘예레미야’는 ‘아나돗’의 상속 토지를 매입하라는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였고, 그것도 ‘바벨론’ 군대가 그 땅을 황폐시키기 위하여 진군해 오기 한 해 전에 그렇게 하였읍니다! (예레미야 32:8-25) 이 마지막 때에, 우리도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보호하고 확립시켜 주시겠다는 그의 모든 약속의 말씀을 성취시키실 것을 확신해야 할 것입니다. (예레미야 32:38-41) 그리스도 예수 휘하의 천군이 공격을 개시할 때는 위험스럽게 가까왔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깨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긴급합니다.—마가 13:10, 32-37.
15, 16. (ㄱ) ‘예레미야’를 유지시켜 준 것은 무엇이었읍니까? (ㄴ) ‘바룩’은 어떠한 문제에 직면하였읍니까? (ㄷ) ‘바룩’에게 주신 여호와의 경고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떠한 격려가 됩니까? (계시 2:3)
15 ‘예레미야’ 앞에는 난관이 많았읍니다. 그러나 여호와께 대한 확신과 임무에 대한 그의 충성으로 인하여 그는 끝까지 일을 수행하였읍니다. 그는 또한 그의 충실한 동료이며 서기관인 ‘바룩’이 의기소침했을 때 그를 격려할 수 있었읍니다. ‘예레미야’가 약 20년 내지 30년 예언한 후에, ‘바룩’은 이렇게 선언하였읍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고통에 슬픔을 더하셨으니 나는 나의 탄식으로 피곤하여 평안치 못하다 하도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하여 이러한 말씀을 그에게 전달하셨읍니다.
“보라. 나는 나의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나의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이러하거늘 네가 너를 위하여 대사를 경영하느냐? 그것을 경영하지 말라. 보라. 내가 모든 육체에게 재앙을 내리리라. 그러나 너의 가는 모든 곳에서는 내가 너로 생명얻기를 노략물을 얻는 것 같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레미야 45:1-5)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이 충실한 종은 시간이 흐르면서 피곤을 느꼈읍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바룩’에게 ‘넘어뜨리고 뽑’을 정해진 때, 즉 그분께서 불충실한 ‘유다’와 ‘예루살렘’에 환난을 가져오실 때가 가까왔음을 확언하셨읍니다. 지체되는 것같이 보일지라도, 그 “재앙”은 확실하였읍니다!
16 여호와께서는 ‘바룩’에게 ‘유대’인들의 세상적이고 물질주의적인 행로로 돌아가 개인의 이익 향상을 추구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읍니다. 명백히, 그의 위치는 여호와의 예언자 곁에서 충실히 봉사를 계속하는 것이었읍니다. 마찬가지로, 현 이십세기 “마지막 날”은 하나님의 백성 중 아무도 멸망이 정해진 이 물질주의적인 세상으로 돌아갈 때가 아닙니다. 그들이 지켜야 할 합당한 위치는, 마침내 그들이 ‘아마겟돈’의 폭풍을 지나 그리스도 예수에 의한 하나님의 왕국의 영역에서 ‘그들의 생명을 전리품으로 받’을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충성스러운 동료들
17. ‘레갑’ 족속은 누구였으며, 무엇을 보시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상을 주셨읍니까?
17 ‘예레미야’에게는 다른 친구들도 있었읍니다. 이들은 여러 해 동안의 충실한 봉사 후에 여호와의 지시에 따라 비로소 나타났읍니다. 악한 ‘여호야김’ 왕이 아직 통치하던 때에,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요나답’의 후손들 즉 ‘레갑’ 족속을 성전으로 데려오게 하셨읍니다. ‘요나답’은 이보다 약 250년 전에 ‘예후’ 왕 시대에 여호와의 편을 지지하였읍니다. (열왕 하 10:15-17) ‘요나답’은 그의 후손들에게 “영영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고 명령하였읍니다. 그리고 이제, ‘바벨론’인들이 처음으로 접근했을 때, ‘레갑’ 족속은 ‘예루살렘’에서 은신하였읍니다. ‘예레미야’는 그들 앞에 포도주를 놓았읍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조상 ‘요나답’의 말에 충성스럽게 순종하여 그것을 거절하였읍니다. 여호와께서는 그 때 ‘유다’와 ‘예루살렘’의 불순종과 ‘레갑’ 족속의 지속적인 충성과를 대조하여 이렇게 선언하셨읍니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서 내 앞에 설 사람이 영영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요나답’의 후손들은 웅대한 상으로, ‘예루살렘’에 임한 환난 중 구출을 받았읍니다.—예레미야 35:1-19.
18. 누가 현대 ‘‘요나답’의 아들들’이며, 그들은 어디에서 보호를 받습니까?
18 오늘날 이들 ‘레갑’ 족속과 대응하는 사람들이 있읍니다. 정직한 마음을 가지고 의로운 원칙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그들인데, 그들 중에는 현 “어려운 때”에 현대 “그리스도교국”의 종교적 경계안에 머물러 은신하고자 시도했던 사람들도 있읍니다. (디모데 후 3:1, 새번역) 그러나 그들의 진정한 은신처는 그리스도를 통한 여호와의 마련에 있읍니다. 그분은 그들에게 현대 ‘예레미야’ 반열을 보내셔서 구원을 의미하는 소식을 듣게 하셨읍니다. 분명히, 그러한 “요나답들”의 안전 지대는 노쇠한 그리스도교국에 있지 않고, 바로 여호와의 현대 “예언자” 편에 있읍니다.
19. ‘시드기야’ 앞에서의 ‘예레미야’의 입장으로부터 우리는 어떠한 격려를 받아야 합니까?
19 ‘예레미야’에게 ‘유다’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고 촉구한 것은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기원전 617-607년)이었읍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임박한 멸망을 계속 선포하였읍니다. 후에, 그는 매를 맞고 여러 날 동안 투옥되었다가 왕 앞에 이끌려 갔는데, 왕은 그에게 “여호와께로서 받은 말씀이 있느뇨?” 하고 은밀히 질문하였읍니다. ‘예레미야’는 솔직히 “있나이다 ··· 왕이 ‘바벨론’ 왕의 손에 붙임을 입으리이다” 하고 대답하였읍니다. (예레미야 37:3-17) 마찬가지로,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지적하는 데 솔직합니다. 그들은 연합 신앙 운동이나, 그리스도교국에 대해 선포되는 소식을 완화하는 데 관심이 없읍니다.
20. (ㄱ) 어떠한 과정을 거쳐 ‘에벳멜렉’은 ‘예레미야’를 구조하였으며, 이 ‘구스’인 즉 ‘에디오피아’인은 어떻게 상을 받았읍니까? (ㄴ) 현대에 누가 ‘에벳멜렉’과 같이 행동해 왔으며, 그들에게 어떠한 결과가 임할 것입니까? (마태 25:34, 40)
20 ‘예레미야’는 그 도시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을 끈질기게 선포한다는 이유로 구덩이에 던져졌으며 거기에서 진흙 중에 빠졌읍니다. 그는 비참한 죽음을 당할 것같이 보였읍니다. 그러나 ‘구스’인 즉 ‘에디오피아’인 왕궁 환관 ‘에벳멜렉’이 왕에게 가서 ‘예레미야’를 위하여 호소하였읍니다. 왕의 지시에 따라 ‘에벳멜렉’은 30명을 데리고 가서 헝겊과 낡은 옷을 사용하여 ‘예레미야’를 구덩이에서 끌어내고 시위대 뜰에 있는 한 곳으로 복귀시켰읍니다. 거기에서 그는 ‘예루살렘’이 멸망되기까지 머물다가 석방되었읍니다. 그러나 ‘에벳멜렉’은 어떻게 되었읍니까? ‘예레미야’가 아직 뜰에 있는 동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였읍니다.
“너는 가서 ‘구스’인 ‘에벳멜렉’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이 성에 재앙을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 한 나의 말이 그 날에 네 목전에 이루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그 날에 너를 구원하리니 네가 그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손에 붙이우지 아니하리라. 내가 단정코 너를 구원할 것인즉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네 생명이 노략물을 얻음같이 되리니 이는 네가 나를 신뢰함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바벨론’ 군대가 북에서부터 침공해 왔을 때, ‘에벳멜렉’은 생명을 보존하였읍니다. 현대에도, 여호와의 박해받는 증인들에게 친절을 베푼 사람들이 많았으며, 그 중에는 정부 관리와 교도관들도 있었읍니다. 후에 이들 중 일부는 증인이 되어, 그리스도 예수의 천적 집행군이 ‘아마겟돈’에서 행동하실 때 구원받을 대열에 서게 되었읍니다.—예레미야 38:6-13; 39:15-18; 계시 7:14-17; 16:16.
21. (ㄱ) 여호와의 현대 종들은 ‘예레미야’ 시대의 종들과 어떻게 비교됩니까? (ㄴ) 그들은 어떠한 면으로 인내를 보이고 있읍니까? (계시 14:12)
21 오늘날 ‘예레미야’, ‘바룩’, ‘레갑’ 족속 및 ‘에벳멜렉’과 같은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아직 지상에 있다는 것에 유의하는 것은 기쁨이 됩니다. 1977년도 중 ‘여호와의 증인’의 전세계 활동보고는 그 점을 증명해 줍니다. ‘바룩’과 같이 피곤해져서 한동안 이기적인 관심사로 돌아선 사람들도 일부 있지만, 이들은 ‘바룩’이 시험을 받아가며 하나님의 예언자와 함께 머물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큰 환난” 후의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며 인내할 가치가 있읍니다. 그리고 ‘요나답’의 아들들과 ‘에벳멜렉’과 같은 기질을 가진 의의 애호자들이 계속 발견되기를 기원합니다. 여호와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부지런히 실천하며 끝까지 인내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실로 큰 상이 있을 것입니다!
[17면 삽화]
‘예레미야’가 빈 구덩이에 던져졌을 때 ‘에디오피아’인 ‘에벳멜렉’은 왕의 허락을 받아 그를 구조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랑의 행동에 대해 상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