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은 얼마나 중요할 수 있는가?
1, 2. (ㄱ) 약속에 대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태도는 어떠합니까? (ㄴ) 약속을 고의로 파기하는 것을 여호와께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실망하고 상심하고 심지어 분노를 느끼는 일이 날마다 끊치지 않습니다. 계약, 차용, 기타 여러 가지 합의 사항들이 지켜지지 않고 있읍니다. 간단한 약속도 지키지 않습니다. 보수, 선물, 노역 등을 약속해 놓고도 잊어 버립니다. 약혼도 깨집니다. 당사자들이 합법적으로 갈라지고 기타 여러 가지 사소한 근거로 이혼을 할 때에 결혼 서약은 무시되어 버립니다. 정치가들의 약속이 거듭 거듭 빈말이 되고 맙니다. 뿐만 아니라 고의로 꾸민 사기적 약속도 많습니다.
2 많은 사람들은 약속이 별것 아닌 것 같이 행동합니다. 그들은 약속이 파기될 때에 초래되는 손해에 대해 별로 염려를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이 인정하든 않든, 그들은 절대 약속을 어기지 않으시는 분으로부터 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분은 인류의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하는 것이나 파기하는 것을 적은 일로 보지 않으십니다. 특히 고의로 그 일을 하였고 분명히 해로운 일일 때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리고 또한 그 약속에 그분의 이름이 관련되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성취시키지 않으므로써 자기의 이름에 모독이 돌아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러한 예로 ‘유다’ 왕 ‘시드기야’의 예를 살펴 봅시다.
‘시드기야’의 언약 파기
3. ‘시드기야’와 다른 저명한 ‘유대’인들은 ‘느부갓네살’ 왕에게 어떻게 하겠다고 약속하였읍니까?
3 기원전 617년에 ‘시드기야’의 조카 ‘여호야긴’ 왕과 다른 귀인들 및 왕족들이 ‘바벨론’으로 사로 잡혀갔읍니다. 그때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시드기야’를 ‘예루살렘’의 보좌에 앉히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자기에게 예속한 왕이 되겠다는 약속을 하게 하였읍니다. 방백들과 다른 저명한 인물들도 그의 신하가 되겠다고 하였읍니다. (에스겔 17:13, 14; 21:23)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맹세까지 한 이 약속들을 중요한 것으로 보시지 않았읍니까?
4, 5. (ㄱ) 맹세한 약속에 대한 ‘유대’인들의 태도는 어떠하였읍니까? (ㄴ)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이름으로 행한 맹세를 배반한 ‘시드기야’를 어떻게 보셨읍니까?
4 자기들이 맹세한 약속을 지키지 않더라도 여호와 앞에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유대’인들이 있었읍니다. 그들은 ‘바벨론’ 왕에게 배반하고 애굽의 ‘바로’의 지원에 의지하였읍니다. 그들은 ‘시드기야’에게 그렇게 하도록 권고하였읍니다. ‘느부갓네살’ 왕에게 반역할 것을 예언적으로 말씀하시면서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셨읍니다.
5 “그[‘시드기야’]가 사자를 애굽에 보내어 말과 군대를 구함으로 ‘바벨론’ 왕을 배반하였으니 형통하겠느냐? 이런 일을 행한 자가 피하겠느냐? 언약을 배반하고야 피하겠느냐? 나 [주권자]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바벨론’ 왕[‘느부갓네살’]이 그를 왕으로 세웠거늘 그[‘시드기야’]가 맹세를 업신여겨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그 왕의 거하는 곳 ‘바벨론’ 중에서 왕과 함께 있다가 죽을 것이라. 대적이 토성을 쌓으며 운제를 세우고 많은 사람을 멸절하려 할 때에 ‘바로’가 그 큰 군대와 많은 무리로도 그 전쟁에 그를 도와 주지 못하리라. 그[‘시드기야’]가 이미 손을 내어 밀어 언약하였거늘 맹세를 업신여겨 언약을 배반하고 이 모든 일을 행하였으니 피하지 못하리라.”—에스겔 17:15-18.
형벌을 면치 못함
6. 이로 보아 ‘시드기야’가 형벌을 면하리라고 기대할 만한 이유가 있었읍니까?
6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는 ‘시드기야’의 맹세 파기를 승인하지 않으심과 그로 인한 고통스런 결과가 그에게 이르지 않도록 막아주지 않으실 것을 강조하셨읍니다.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 왕이 ‘시드기야’의 배반을 묵과하지 않고 ‘예루살렘’을 공격할 것을 예언하셨읍니다. 이것은 ‘느부갓네살’과 그의 군대를, 여호와의 이름을 헛되게 사용하여 맹세를 파기한 배반자에 대한 형벌의 “칼”로 사용하실 여호와의 목적과도 조화됩니다.
7, 8. (ㄱ) ‘느부갓네살’ 왕은 ‘팔레스타인’으로 군대를 이끌고 갈 때에 어떠한 결정을 내려야 하였읍니까? (ㄴ) 틀림없이 올바른 결정을 내리기 위해 그는 무엇을 하였읍니까?
7 북쪽으로부터 ‘팔레스타인’ 땅에 들어 올 때에 군대의 선두에 선 ‘느부갓네살’은 갈림길에 당도하였읍니다. 그러므로 그는 어느 길로 군대를 이끌어가야 할 것인가 결정을 내리는 데 인도를 원하였읍니다. 한쪽 길은 ‘암몬’족의 수도인 ‘랍바’로 가는 길이고 다른 길은 보다 강력하게 방비가 되어 있는 ‘예루살렘’ 시로 가는 길이었읍니다. 문제는, 먼저 ‘랍바’를 쳐부수고 나서 군대가 그 도시를 함락시켜 사기가 높아지면 좀 더 어려운 ‘예루살렘’을 공격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읍니다. ‘느부갓네살’은 틀림없이 올바른 결정을 내리기 위하여 세가지 점술을 사용하였읍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을 예언자 ‘에스겔’에게 밝히셨읍니다.
8 “인자야 너는 ‘바벨론’ 왕의 칼이 올 두 길을 한 땅에서 나오도록 그리되 곧 성으로 들어가는 길머리에다가 길이 나뉘는 지시표를 하여 칼이 ‘암몬’ 족속의 ‘랍바’에 이르는 길과 ‘유다’ 견고한 성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을 그리라. ‘바벨론’ 왕이 갈랫길 곧 두 길 머리에 서서 점을 치되 살들을 흔들어[흔들고, 신세] [화살 하나에는 ‘랍바’ 표를 하고 다른 것에는 ‘예루살렘’ 표를 하여 그릇에 담고 흔든 다음 뽑아 내었다] 우상에게 묻고 [동물] 희생의 간을 살펴서 오른손에 ‘예루살렘’으로 갈 점괘를 얻었으므로 공성퇴를 베풀며 입을 벌리고 살륙하며 소리를 높여 외치며, 성문을 향하여 공성퇴를 베풀고 토성을 쌓고 운제를 세우게 되었나니[라.]”—에스겔 21:19-22.
9. 사실은, ‘느부갓네살’이 먼저 ‘예루살렘’을 공격하도록 누가 그 일을 조종하였읍니까?
9 ‘느부갓네살’ 왕이 자기 오른손으로 뽑은 것은 대단히 상서(祥瑞)로운 길을 지시해 준 유리한 선택이었읍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선택이 자신의 뜻과 일치하게, ‘바벨론’ 왕이 먼저 ‘예루살렘’을 진격하는 방향으로 결정되게 하셨읍니다. 이것은 ‘바벨론’의 모든 막중한 공격 장비로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강력하게 방비되어 있는 도시에 대해 그 모든 기구를 사용하는 것을 의미하였읍니다.
10. (ㄱ) ‘느부갓네살’의 점술의 결과에 관한 예언에 ‘유대’인들은 어떤 반응을 나타내었으며, 왜 그러하였읍니까? (ㄴ) 그 ‘유대’인들은 무엇을 기억지 못하였으며, 어떤 일이 일어났읍니까?
10 ‘느부갓네살’의 점술의 결과를 말해주는 이 예언이 ‘유다’와 ‘예루살렘’의 거민들에게는 거짓된 것 같이 들렸읍니다. 그들은 ‘바벨론’ 왕이 그처럼 강력하게 방비되어 있는 ‘예루살렘’을 공격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읍니다. 그들은 그 왕이 그처럼 성벽이 튼튼한 도시를 함락시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읍니다. 그들은 또한 그 누가 그들을 공격해도 애굽 군대가 격퇴해낼 것으로 생각하였읍니다. 지나치게 자신을 가졌던 ‘유대’인들이 기억지 못한 점은 그들의 언약 파기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범죄였다는 사실이었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반역적인 행동이 폭로 되고 ‘느부갓네살’ 왕이 그것을 잊지 않도록 하셨읍니다. ‘예루살렘’은 점령당하고 그 거민들은 ‘그 손에 잡혀’ ‘바벨론’으로 사로 잡혀갈 것이었읍니다. (에스겔 21:23, 24) 그것은 또한 ‘시드기야’ 왕이, 여호와께서 ‘에스겔’을 통해 선언하신 바를 어쩔 수 없이 행할 것을 나타냈읍니다.
11, 12. 에스겔 21:25-27의 말은 ‘시드기야’ 왕에게 어떻게 성취되었읍니까?
11 “너 극악하여 중상을 당할 ‘이스라엘’ 왕아 네 날이 이르렀나니 곧 죄악의 끝 때니라. 나 [주권자]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관을 제하며 면류관을 벗길찌라. 그대로 두지 못하리니 낮은 자를 높이고 높은 자를 낮출 것이니라. 내가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려니와 이것도 다시 있지 못하리라. 마땅히 얻을 자가 이르면 그에게 주리라.”—에스겔 21:25-27.
12 ‘시드기야’ 왕은 자기의 반역적인 행동으로 자신에게 치명적인 중상(重傷)을 입혔읍니다. 그 치명적인 중상은 ‘예루살렘’에서 종속된 왕으로서의 평화로운 죽음이 아니라, 폐위당하고 자녀도 없고 앞도 못보고 ‘바벨론’에 갇힌 자로서의 치욕적인 죽음을 의미하였읍니다. ‘시드기야’는 반역함으로써 자신이 ‘극악한 ‘이스라엘’ 왕’임을 나타냈읍니다. 자기의 악에 대한 고통스런 열매를 먹을 날이 이르렀읍니다. “죄악의 끝 때”가 되었읍니다. ‘시드기야’ 왕의 “죄악”만이 아니라 ‘유다’와 ‘예루살렘’ 왕국의 모든 “죄악”도 포함되었읍니다. 이 “끝 때”는 ‘유다’ ‘요시야’ 왕 제13년, ‘예레미야’가 예언을 시작한 때에 시작하였읍니다. (예레미야 1:1, 2; 25:3-11) 이 “끝”의 절정에 이르러 ‘시드기야’ 왕이 자진적으로 자기의 관과 면류관을 포기한 것이 아니었읍니다. 자기의 왕좌와 그 도시가 파괴되던 때에 그가 할 수 없이 그러한 결과를 당한 것입니다.
13. 기원전 607년에 무엇이 ‘높아’지고 무엇이 ‘낮아’졌읍니까?
13 기원전 607년에 그 멸망으로 인해, ‘다윗’의 자손이 ‘예루살렘’ “여호와의 보좌”에 앉은, 지상의 하나님의 모형적 왕국은 종말을 당하였읍니다. 이로써 세계 무대 위의 입장이 완전히 역전되었읍니다. ‘유다’ 왕국은 여호와 하나님의 소규모적인 왕국으로서 “높은 자”였읍니다. 그러나 그것은 파괴됨으로써 ‘낮아’졌읍니다. 그러나 이방 곧 비‘유대’ 나라들은 ‘높아’졌읍니다. ‘유다’ 왕국의 멸망으로 이방 통치가 온 땅을 지배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고의적 언약 파기자를 형벌할 자
14. “마땅히 얻을 자”는 누구이며, 그는 어떤 면에서 ‘시드기야’ 왕과 완전히 다릅니까?
14 “마땅히 얻을 자” 곧 ‘유대’ ‘다윗’ 왕의 자손이 올 때까지 이방 여러 나라들이 계속 지배할 것이었읍니다. 그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났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악한 ‘시드기야’ 왕과는 달리 약속을 파기하는 자가 아니었읍니다. 그는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었읍니다. (히브리 7:26) 그는 지상에서 인간으로서 항상 참을 말하였읍니다. “그의 입에서는 아무런 거짓도 찾아 볼 수 없었읍니다.” (베드로 전 2:22, 새번역) 따라서 예수께서는 자기 본을 따르고자 하는 올바른 동기를 가진 자들만 자기의 신민으로 삼으십니다. 그는 아버지의 뜻에 일치하게, 고대의 ‘시드기야’와 같이 반역적이고 믿음성이 없고 여호와의 이름을 존중히지 않는 모든 자들을 벌하실 것입니다.
15.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대 내에 그리스도교국을 처벌할 것이 왜 틀림없읍니까?
15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대 내에 그러한 조치를 취하실 것을 알고 있읍니다. 성서 연대는 기원 1914년에 그가 인류 세계에 대한 통치권을 받았음을 분명히 확증해 줍니다. (다니엘 4:16-27; 7:12-14; 계시 11:15)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제 진리와 의를 중요시하지 않는 사람들과 나라들을 처벌할 입장에 있읍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교국은 불충실한 ‘예루살렘’과 같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지 않았읍니다. 엄숙한 약속과 계약을 파기한 것은 그가 저지른 많은 죄악 중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있다고 공언하는 제도로서 그리스도교국은 최초로 멸망될 것입니다.
16. 에스겔 21:28-32의 성취로써 ‘암몬’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발생하였읍니까?
16 그것은 고대에 발생하였던 일과 일치합니다. 형벌의 “칼”은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 곧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먼저 임하였읍니다. 그러나 그 “칼”은 거기서 그친 것이 아니었읍니다. ‘암몬’ 사람들은 불충실한 ‘유대’인들과 같이 올바른 일을 행하지 않았으므로 그들도 형벌을 받게 되었읍니다. 물론, ‘암몬’의 예언자들은 그렇게 생각지 않았읍니다. 그들은 그들의 수도인 ‘랍바’가 멸망을 피하는 것을 보았읍니다. 또한 점술가들은 그 도시가 살아남을 것이라고 예고하였읍니다. 그러나 예언자들과 점술가들은 잘못되었읍니다. 예언자들이 ‘본’ 것은 “허무한 것”이었으며, 복술자들의 예측은 “거짓”이었읍니다. 이것은 ‘느브갓네살’이 ‘암몬’ 사람들의 땅을 멸망시켰을 때에 드러났읍니다. 이리하여 ‘에스겔’을 통해 예언된 바와 같이 ‘암몬’의 살륙당한 자들은, 시체가 동일한 무더기에 쌓인 것 같이 살륙당한 악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목 위에’ 놓이게 되었읍니다.—에스겔 21:28-32.
17. 오늘날 사람들이 자기들의 생활 행로를 검토하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17 그러므로 오늘날 약속과 계약에 대해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속임수를 쓴 나라들은 어느 나라든지 형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자는 자신의 행동을 검토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각자는, 나는 ‘입에 아무런 거짓도 없었던’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인가? 그렇지 않으면, ‘시드기야’ 왕처럼 반역적인 맹세 파기자의 성품을 반영하는가? 하고 자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의 생명은 훌륭한 행실을 계속하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읍니다. 그것은 자신의 엄숙한 약속을 이행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이행하지 않는다면 생명을 상실할 수도 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