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겟돈’의 어려움에도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함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하박국 3:17, 18.
1. ‘아마겟돈’은 무엇이며, 누가 거기에 모이며, 누구의 지휘 하에 모입니까?
인류의 모든 나라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적대 관계에 있어서 ‘할마게돈’ 혹은 ‘아마겟돈’이라고 불리우는 단계로 급속히 다가오고 있읍니다. 성서의 마지막 책을 기록한 영감받은 필자는 “귀신의 영” 곧 악귀들의 영감을 받은 표현들이 있다고 하였으며, 또 기록하기를, 그들이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 세 영[영감받은 표현]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고 하였읍니다.—계시 16:14-16.
2, 3. 누가 ‘아마겟돈’이라는 단어를 그들의 어휘에 사용하였으며, 그 말은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읍니까?
2 이 간단한 기술에 의하면, ‘아마겟돈’ 전쟁은 적의를 가진 인간과 전능자인 하나님 사이의 대결을 의미합니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래 저명 인사들과 논설가들은 ‘아마겟돈’이라는 말을 종종 사용하고 있으며, 거기에 현대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읍니다. 1971년 12월 8일자 ‘캐나다’의 「더 스펙테이터」지에, 논설 위원 한 사람은 “국제 연합과 전쟁”이라는 제목 하에 이렇게 썼읍니다. “각국 지도자들은 중동 긴장이나 인도 ‘파키스탄’ 전쟁이 핵보유국을 쉽사리 말려들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도, 어떤 자들은 자기네 권한을 조금이라도 국제 기구 위에, 그것도 대부분의 인류를 대표하고 있는 기구에게, 양도하느니보다는 ‘아마겟돈’의 위험을 무릅쓰려 한다.” (5항)
3 조금 후 1972년 1월 1일자 미국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지에 “‘아마겟돈’이 도사리고 있는 새해를 환영한다”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는데, 그 마지막 항은 다음과 같았읍니다. “그러나, 어제 자정(子正)에는, 인류가 자멸하지 않고 달력 365장을 또 한번 넘겼으며, 국가가 유혈의 혁명을 겪지 않고 또 열 두 달을 견디어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72년에도 ‘아마겟돈’을 한번 더 모면할 수 만 있다면, 이번에도 살아볼 만한 것이다.”
4. (ㄱ) ‘아마겟돈’에서 싸울 쌍방은 누구입니까? (ㄴ) 이 전쟁은 온 인류에게 무엇을 초래할 것이며, 그로 보아,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 어떤 질문이 생깁니까?
4 이러한 논설 기사에서는, ‘아마겟돈’을 지상의 인간 사이의 전쟁으로 간주하였읍니다. 그러한 필자들은, ‘아마겟돈’이 지상의 인간과 전능자 하나님 곧 사람과 지구를 창조하신 분 사이의 전쟁이라는 성서적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모든 전쟁은 교전 당사국이나 백성에게 어려움을 초래하였읍니다. 그러나 ‘아마겟돈’에서 있을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은 지구상 전 인류에게 어려움을 초래할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겪은 중에서 가장 큰 전쟁일 것입니다. 그것은 온 땅의 모든 통치자들의 최대의 용사인 전능자 하나님을 대항하는 전쟁이므로 반드시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면, 온 인류에게 심각한 어려움이 틀림없이 닥칠 터인데, 지상의 어떤 사람들이 ‘아마겟돈’에서 즐거워하는 일이 가능할 것입니까? 인류 가운데 즐거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이 즐거워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읍니까? ‘아마겟돈’에서 즐거워한다면 무슨 도움이나 유익에 대하여 즐거워할 것입니까? ‘아마겟돈’이라는 말의 근원인 ‘거룩한 책’에서만 이러한 질문에 대해 답을 알려 줍니다.
5. (ㄱ) 기원전 7세기의 어느 예언자도 그 전쟁에 대한 환상을 보았으며, 그 예언자의 이름의 뜻은 무엇입니까? (ㄴ) 하박국 3:1은 그가 종교 음악에 흥미가 있었음을 어떻게 시사합니까?
5 그리스도인 예언자 ‘요한’이 장차 올 우주 전쟁의 전쟁터의 이름인 ‘아마겟돈’을 알려주기 700년전에, 그 전쟁에 대해 설명해 준 ‘히브리’ 예언자가 있었읍니다. 그의 ‘히브리’어 이름은 ‘하박국’이며, 그 뜻은 “(사랑의) 포옹”, 혹은 “열렬한 포옹”입니다. 그는 그의 감동적인 예언을 기록하는 일을 기원전 628년 경에 완료하였읍니다. 그는 종교 음악에 흥미가 있는 사람이었읍니다. 이 사실은 그의 예언서 마지막장인 제 3장을 보아서 알 수 있는데, 그 부분은 악곡을 붙일 시(詩)의 형태로 되어 있읍니다. 이 장(章)의 첫째 절은 그 음악이 만가(輓歌)와 같은 슬픈 가락을 띠었음을 암시합니다. “‘시기오놋’에 맞춘바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하였는데, 여기서 ‘시기오놋’이라는 ‘히브리’어를 「신세계역」에서는 “만가”라고 번역하였고, 「예루살렘 성서」는 “만가의 곡조”라고 하였읍니다. 다른 성서 번역판들은 “노래 혹은 곡조에 맞춘”이라고 하였고, 「흠정역」 난외주에는 “여러 가지 노래 혹은 곡조에 맞춘”이라고 하였읍니다. (유대 출판 협회; 미국역; 흠정역) 「신 미어 성서」는 “슬픈 곡조에 맞춘”이라고 번역하였읍니다.
6. (ㄱ) 하박국 3:19의 끝맺음 말은 그 예언자에 대해 무엇을 더욱 암시합니까? (ㄴ) 그는 무슨 건물을 염두에 두었음이 분명하며,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6 그 장 마지막에, “내 현악기로 지휘자에게”라는 단서를 붙여 또 한번 음악에 관해 언급하였읍니다. (하박국 3:19, 신세; 바잉튼; 미국역) 다른 번역판에서는 “지휘자”라고 한 ‘히브리’어 단어를 “합창대 지휘자” 또는 “인도자”라고 번역하였읍니다. (개역 표준역; 예루살렘 성서; 유대 출판 협회) 「모팻역」에서는 “합창대 지휘자의 수집품 중에서”라고 하였읍니다. 이러한 음악에 관한 언급으로 보아 ‘하박국’이 ‘예루살렘’ 성전 합창대원이었으며, 따라서 그가 ‘레위’인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읍니다. 적어도, 예언자 ‘하박국’은 그의 시적인 기도를 마친 다음에 그것을 성전 음악 지휘자에게 주어 거기에 적절한 곡을 붙이도록 하였읍니다. 예언자 ‘하박국’이 그의 시적인 기도를 기록하기 직전에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찌니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가 성전을 염두에 두었음이 분명합니다.—하박국 2:20.
7. 하박국 2:20에 언급된 성전은 어느 것을 의미하였읍니까?
7 ‘하박국’은 ‘예루살렘’ 성전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지만, 실제 내용은 ‘예루살렘’의 ‘솔로몬’ 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신, 하늘에 있는 여호와의 영적 성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 ‘메시야’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되어 기원 33년에 하늘에 올라가셨을 때에 이 영적 성전 지성소에 들어가셨읍니다.—히브리 8:2; 9:23, 24.
8, 9. 성경은 ‘하박국’의 예언적 기도가 어느 시대에 성취될 것으로 지적하였으며, 어떻게 지적하였읍니까?
8 ‘하박국’의 시적인 기도를 살펴보면, 그가 슬픈 곡조 곧 만가와 같은 가락을 붙이도록 요청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읍니다. 그는 그의 예언적인 기도가 응답되는 것을 생전에 보지 못하였읍니다.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에서는 ‘하박국’의 예언을 인용하여, 그것의 최종적인 성취를 미래, 곧 우리 시대에 이루어질 것으로 지적하였읍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그 예언에 관심을 가지고 있읍니다. 그의 예언이 영감을 받은 것이며, 확실하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우리 세대내에 성취될 것을 기대합니다. 기원 61년 경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히브리’인들을 위해 쓴 글인 「히브리서」는 ‘하박국’의 예언, 2장 3절과 4절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읍니다.
9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브리 10:36-39.
누구를 위하고 무엇을 위한 “기도”인가?
10. (ㄱ) ‘하박국’은 1인칭으로 말하였지만 어떤 뜻으로 말하였읍니까? (ㄴ) 그러므로 그 기도는 그 내용에 따라 어떻게 응답될 수 있었읍니까?
10 ‘하박국’은 그의 예언적 기도에서 ‘나’라는 대명사를 사용하여 1인칭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가 대표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는 자기 민족, 곧 수도를 ‘예루살렘’에 두었던 ‘유다’ 왕국의 백성을 대표합니다. 이 사실은 3장 13절부터 16절을 보면 분명합니다.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주께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기름 받은 자를 구원하시려고 나오사 ··· 그들이 회리 바람처럼 이르러 나를 흩으려 하며 가만히 가난한 자 삼키기를 즐거워하나 오직 주께서 그들의 전사의 머리를 그들의 창으로 찌르셨나이다. ··· 환난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 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지휘관의 인솔을 받은 군대가 흩으려고 하였던 자는 ‘하박국’ 자신이 아니라, 예언자 ‘하박국’이 소속되어 있던 민족이었읍니다. 그러므로 ‘하박국’의 기도에 대한 응답은 그가 죽은 다음에 올 수도 있었읍니다. 그러나 그가 위하여 기도하였던 민족 곧 조용히 기다리고 있던 민족에게 와야 하였읍니다.
11. ‘하박국’의 기도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기원전 607년, 기원전 539년, 기원 70년, 또는 기원 1967년에 이루어졌는지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11 기원전 607년에 ‘예루살렘’과 그의 성전이 ‘바벨론’ 군대의 손에 파괴되었지만 그 때에 ‘하박국’의 기도가 응답되지는 않았읍니다. 또한 기원전 539년, ‘유브라데’ 강변에 튼튼한 성벽을 두르고 서 있던 ‘바벨론’ 시가 ‘바사’ 왕 ‘고레스’ 대왕의 지휘를 받은 ‘메데’와 ‘바사’ 연합군에 의해 무너졌을 때에도 응답되지 않았읍니다. 기원전 537년 이후에 재건되었던 ‘예루살렘’ 도시도 멸망되었으며, 재건되었던 ‘예루살렘’ 성전도 그렇게 되었읍니다. 그것은 기원 70년에 ‘티투스’ 장군 지휘 하의 ‘로마’ 군대의 손에 멸망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하박국’의 예언적 기도에 대한 응답은 없었읍니다. 파괴된 ‘예루살렘’의 터 위에 ‘로마’인들은 새로운 도시를 건축하였읍니다. 기원 1914년 제 1차 세계 대전이 돌발할 때까지도 그 도시는 비‘유대’인 곧 이방 통치자의 지배를 받았읍니다. 1967년 6월 5일부터 10일까지의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 군인들이 ‘예루살렘’ 옛 도시를 점령한 것은 ‘하박국’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 아니었읍니다. 「하박국」 3장에 기술된 내용이 그 때나 그 이후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발생하지 않았읍니다.
12, 13. (ㄱ) 그러면 ‘하박국’의 기도는 누구에게 성취됩니까? (ㄴ) 그리스도인이 된 ‘히브리’인, ‘바울’은 이 사람들을 무엇이라고 불렀읍니까?
12 여러 가지 사실에 비추어 볼 때에, ‘하박국’의 예언적 기도가, 정치적인 ‘이스라엘’ 공화국에도, ‘시온’주의 운동에도, 전세계 여러 이방 국가의 시민으로 남아있는 육적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이루어지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읍니다. 기원 제 1세기에, ‘하박국’의 예언이 예수 메시야의 충실한 추종자들에게 성취된다는 사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히브리’인들에게 밝혀졌읍니다. 이들 예수의 참 제자들은 기원 33년과 그 이후에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으며,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영적 ‘이스라엘’을 구성합니다. 그들은 영적 ‘이스라엘’, 영적 ‘유대’인들입니다. (로마 2:28, 29) 그리스도인이 된 ‘히브리’인,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지방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영적 ‘이스라엘’에 대해 이렇게 썼읍니다.
13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주]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형주]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찌어다.”—갈라디아 6:14-16.
14. (ㄱ) 그리스도교국이 “하나님의 ‘이스라엘’” 인가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읍니까? (ㄴ) 제 1세기의 영적 ‘이스라엘’과 오늘날의 영적 ‘이스라엘’은 그들의 경험에 있어서 어떤 점이 비슷합니까?
14 사도 ‘바울’이 이러한 말을 기록하였을 때에는 그리스도교국이 없었기 때문에 ‘바울’이 그리스도교국을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고 부른 것은 아닙니다. 3세기 후, 이교의 ‘폰티펙스 맥시머스’였던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 때 그리스도교국이 생겨났으며, 그리스도교국은 지금까지도 “평강과 긍휼”을 받은 하나님의 영적 ‘이스라엘’ 같은 태도를 보이지 못하였읍니다. 제 1차와 2차 세계 대전이 다 그리스도교국 내에서 발생하였으며, 그 때 긍휼을 보이지 않았던 나라들은 대부분 그리스도교국 나라들이었읍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고 불렀던 제 1세기의 충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제국의 박해를 받았읍니다. 마찬가지로, 제 1차와 2차 대전 중에 살았던 하나님의 영적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도 그리스도교국의 참전국들에 의해 박해를 당하였읍니다. 왜 그랬읍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령으로 기름부음받은 영적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규례를 행”하려고 노력하였으며, 그리스도교국의 나라들과 함께 유혈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5. 기원 1914년 이래 이 영적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누구이며, 어떤 점으로 그들을 밝힐 수 있읍니까?
15 누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기름부음받은 영적 ‘이스라엘’의 남은 자입니까? 역사적 사실은 그들이 누구인가를 밝혀 줍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물의 제도의 결말”에 대한 예언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던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마태 24:9) 기원 1914년 이래 이 예언적 말씀을 직접 체험하였던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인 충실한 성서 연구생들이었읍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처럼, 국가의 정치에 대해, 혁명과 국제간의 전쟁에 대해, 중립을 지킨다는 사실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교국으로부터, 또한 그리스도교국에 속하지 않는 나라들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받았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랑을 받고 있읍니다. 그들은 마치 그 예언자의 이름, ‘하박국’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의 포옹’을 받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16, 17. (ㄱ) 영적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하박국’의 기도를 자기네 것으로 삼는 것이 왜 매우 긴급합니까? (ㄴ) ‘하박국’이 그 기도문을 만가의 곡조에 맞추라고 요청한 것은 왜 적절하였읍니까?
16 오늘날 이 영적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박국’의 예언적 기도를 자기 것으로 삼고 있으며, 여호와의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증인들인 자기들에게 여호와의 응답이 있을 것을 기대하고 있읍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그러한 기도를 드릴 매우 긴박한 이유가 있읍니다. 성서 예언들과 현 세계 상태로 보아서, 그들은 조만간, 이 세대 내에, 그리스도교국에 그리고 이 사물의 제도의 나머지 모든 부분에 “큰 환난”이 들이 닥칠 것이며, 그것이 ‘아마겟돈’에서 있을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에서 그 절정에 달할 것을 기대하고 있읍니다. 그들은 이 때에 크나큰 어려움을 당할 것을 이해하고 있으며,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들의 편에 서서 충실한 동료로서 함께 고통을 받는 모든 사람들도 그러한 어려움을 당할 것을 알고 있읍니다. 벌써, 영적 ‘이스라엘’의 문 안에, 거주하는 타국인 곧 ‘외국인 거주자’와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동료들의 “큰 무리”가 모였읍니다. (계시 7:9, 10, 14; 출애굽 20:10; 마태 24:21, 22) 그러므로 예언자 ‘하박국’이 ‘예루살렘’ 성전 음악 “지휘자”에게 만가a의 슬픈 곡조를 지으라고 지시한 것은 매우 합당하였읍니다. 그 첫 말은 이러합니다.
17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보고, 신세]을 듣고 놀랐나이다. [무서워하였나이다, 신세]”—하박국 3:2.
초자연적 “일”에 당연히 “무서워”하다
18. ‘하박국’은 여호와께 대한 “보고”를 어떻게 들었으며, 영적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보고”를 어떻게 듣습니까?
18 ‘이스라엘’의 예언자 ‘하박국’처럼 오늘날 영적 ‘이스라엘’의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들도 여호와라 이름하신 성서의 하나님에 대한 보고를 들었읍니다. ‘하박국’이 예언을 하던 때에는 영감받은 성경의 많은 부분이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성경을 통해 여호와께 대한 “보고”를 들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영적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영감받은 「히브리어 성경」 전부와 거기에 또 영감받은 「희랍어 성경」 27권을 가지고 있읍니다.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들은 이러한 모든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함으로써, ‘하박국’의 하나님, 여호와에 대한 “보고”, 진실된 보고를 들었읍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실제 행하신 일들에 대한 무시무시한 보고입니다.
19, 20. (ㄱ)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들은 ‘하박국’과 같이 고대에 여호와께서 하신 일을 어떻게 봅니까? (ㄴ) 하나님께서 하신 그러한 일에 대한 “보고”는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줍니까?
19 예언자 ‘하박국’은 성경적 “보고”를 통하여 자기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보았읍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들도, 성경적 “보고”에 묘사된 대로 여호와의 “일”을 머리속으로 그려봄으로써, 그들 역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보았읍니다. 만일 그들이 과거에 여호와께서 일하시는 것을 현장에서 직접 목격하였더라면, ‘하박국’이 보고만을 듣고도 무서워하였다고 한 바와 같이 그들도 “무서워”할 것입니다. 기원전 1513년, 하나님께서 애굽에 속박되어 있던 ‘하박국’의 조상들을 해방시키시고, 또 마른 홍해 바닥을 통해 도망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광적으로 추격해오던 애굽의 ‘바로’의 병거들과 마병들을 멸하신 때에, 여호와의 일 곧 활동이 어떠하였는가를 상상해 보십시오.
20 진을 치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선포하시던 당시, ‘아라비아’ ‘시내’ 산에서 여호와께서 나타내신 무서운 광경을 또한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선민이 위험한 광야를 방황하던 40년 동안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생각해 보고, 또 40년 끝에 가서, 기원전 1473년에, 하나님께서 수위가 높던 ‘요단’ 강을 통해 이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드린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또한 그후 여러 세기 동안 사사들을 일으키시어 압제받던 그 백성을 구출하신 여호와의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하박국’ 시대 조금 전에 여호와께서 천사를 사용하여 하룻 밤 사이에 ‘앗수르’ 침략군 185,000명을 쓸어버리시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앗수르’의 ‘산헤립’ 왕으로부터 ‘예루살렘’을 구출하신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신 이 모든 일들을 상상해본다면, 무서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박국’은 자기가 무서워하였음을 자인하였읍니다.
21, 22 (ㄱ) ‘하박국’의 경우에나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의 경우에 그러한 무서운 “보고”를 왜 생각할 필요가 있었읍니까? (ㄴ) 그러므로 남은 자들은 ‘하박국’의 무슨 열렬한 기도를 생각해야 합니까?
21 그러나 자신을 무섭게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그런 무서운 “보고”를 다시 기억합니까? ‘하박국’은 예언적으로 장래를 내다보고 국제적으로 여호와의 참 숭배자들이 공격 받을 것을 예견할 때 그렇게 할 필요가 있었읍니다. 오늘날의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들도 그렇게 할 필요가 있읍니다. 지금은 여호와의 원수들이 국제적으로 공격할 시기가 점차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이 남은 자들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고대에 그러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믿고 그분께 의지해야 할 때입니다.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와 그들의 충실한 동료들을 위해 하나님은 살아 계셔야 하며, 또 과거와 같이 일을 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박국’의 열렬한 기도를 생각하고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22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하박국 3:2.
23, 24. (ㄱ) ‘하박국’은 때가 되면 무엇을 나타내실 것을 기도하였읍니까? (ㄴ) 그것은 누가 누구에게 향한 “진노”이며, 어떠한 면으로 긍휼을 기억해 주셔야 하겠읍니까?
23 ‘하박국’은 오늘날의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를 위해 예언적으로 말하면서 무엇을 위해 기도하였읍니까?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 때가 되면, 위급한 때에 그의 일을 반복하시도록, 다시 나타내시도록 기도한 것입니다. 위험에 처한 숭배자들을 위해 그분의 일을 다시 나타내시라는 것이었읍니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시어 행동을 취하실 이유가 있읍니다. 만일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들과 충실한 동료들의 “큰 무리”의 잘못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노하신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위해 그들에게 긍휼을 나타내실 것을 잊지 않으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진노가 참 숭배자들을 박해하고 공격하는 자들에 대한 것이라면, 거만한 원수들에 대해 행동을 취하시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받고 있는 남은 자들과 “큰 무리”의 동료들에게 긍휼을 나타내실 것을 기억하셔야 하겠읍니다. “큰 환난”으로 인해 그들이 죽는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셔야 하겠읍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환난”에 관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을 성취하셔야 하겠읍니다.
24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마태 24:21, 22) “만일 주[여호와]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어늘 자기의 택하신 백성을 위하여 그날들을 감하셨느니라.”—마가 13:20, 신세; ‘조지 엔. 레페브르’ 역, 그리스도인 성서—신약(19-28)에서도 여기에 여호와라는 이름을 사용하였음.
행진하시는 하나님!
25, 26. (ㄱ) 이제 ‘하박국’은 하나님께서 유서깊은 무슨 두 장소에서부터 행군하시는 것으로 묘사하였읍니까? (ㄴ) 두 장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25 ‘하박국’은 과거의 일을 다시 나타내실 것을 여호와께 기도한 다음, 그가 어떤 종류의 일을 하시도록 기도하였는지 이렇게 설명하였읍니다. “하나님이 ‘드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 산에서부터 오시도다. (셀라) 그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도다. 그 광명이 햇빛같고 광선이 그 손에서 나오니 그 권능이 그 속에서 감취었도다. 온역이 그 앞에서 행하며 불덩이가 그 발밑에서 나오도다.”—하박국 3:3-5.
26 ‘하박국’은 여기서 중동(中東)에 있는 두 개의 유서깊은 장소, ‘드만’과 ‘바란’ 산을 말하였읍니다. ‘드만’은 ‘에돔’ 땅과 관련이 있었읍니다. ‘에돔’(“붉다”는 뜻)은 ‘아브라함’의 손자 ‘에서’가 배고픔을 면하려고 자기 쌍동이 동생 ‘야곱’에게 붉은 죽을 받고 ‘아브라함’ 계통의 장자권을 팔아버린 이후에 ‘에서’에게 붙여진 별명이었읍니다. (창세 25:27-34) ‘바란’은 ‘시내’ 산 북쪽 산이 많은 광야에 있었읍니다. 방랑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 광야 부근에서 약 38년간 방황하였읍니다. (민수 10:11, 12; 신명 2:14) ‘에돔’ 땅은 이곳에서 북동쪽으로 ‘아카바’ 만과 사해 사이에 위치해 있었읍니다. “왕의 대로”는 ‘에돔’ 땅을 통과하는 길이었읍니다. ‘드만’(“남쪽”이라는 뜻)은, ‘에돔’(‘에서’)의 자손 중에 ‘드만’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드만’이란 이름을 붙인 그 장소는 ‘에돔’ 사람들의 도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 학자들은 그곳이 ‘에돔’의 북동쪽에 위치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의 선민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던 때에 “‘드만’에서부터 오시”었읍니다.
27, 28. (ㄱ) 이주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원수들과 비우호적인 백성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계속 전진하였읍니까? (ㄴ) ‘이스라엘’의 행진의 출발점에 대해 ‘모세’의 기록은 ‘하박국’의 기록과 어떤 점에서 일치합니까?
27 ‘에돔’ 사람들의 거절과 반대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은 ‘왕의 대로’로 ‘에돔’ 땅을 통과하지 못하고, 아마 북쪽으로 향하여 ‘에돔’의 동쪽 경계를 따라 ‘모압’을 돌아서 사해 쪽으로 갔을 것입니다. (민수 20:14-21)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란’ 산지를 나와서 ‘드만’을 통과한 다음,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때에, 원수들이나 비우호적인 사람들이 그들의 진행을 막지 못하였읍니다. 행진하던 민족의 눈에 보이는 인도자는 예언자 ‘모세’였읍니다. 그리고 ‘모세’의 기록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남쪽 지점에서 출발하였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 ‘하박국’의 기록과 일치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요단’ 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2개월 전에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축복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28 “여호와께서 ‘시내’에서 오시고 ‘세일’ 산(‘에돔’ 사람들이 점령하고 있던 지역)에서 일어나시고 ‘바란’ 산에서 비취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서 강림하셨고 그 오른 손에는 불 같은 율법이 있도다. 여호와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나니 모든 성도가 그 수중에 있[도다.]”—신명 33:1-3.
29. 여호와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행진하던 백성의 선두에서 가셨으며, 자신을 위하여 어떤 기록을 남기셨읍니까?
29 물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행진 대열 선두에 눈에 보이게 나타나셨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 눈에는 보이지 않으셨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보이지 않는 인도자로서 찬양할 만한 기록을 남기셨읍니다. 또한 하나님을 대표한 상징물로서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그들 앞서 갔읍니다.—출애굽 13:21, 22; 민수 14:14; 신명 31:15.
30. ‘이스라엘’ 민족은 수 십년 동안 희미한 존재였다가 어떻게 다시 빛 가운데 들어왔읍니까?
30 기원전 1474년에, 여호와께서 이윽고 정처가 없는 자기 백성을 ‘바란’ 산지로부터 약속의 땅을 향해 출발하게 하셨을 때에, 이교 나라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읍니다. 그것은 마치 만물을 그들 앞에 드러나게 해주는 밝은 빛과도 같았읍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위엄을 갖추시고 행진하시는 증거였읍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수십년 동안 ‘시내’ 반도의 광야에서 희미한 존재였는데, 이제 그들이 빛 안으로 들어 왔읍니다. 여호와의 강력한 “손”이 활동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그의 “손”에서 두개의 빛이, 손의 양편에서, 두 방향으로 비취는 것과도 같았읍니다. 여호와의 손에는 힘이 감취어 있읍니다. 거기서 나오는 빛은 강한 빛입니다. 원수 나라들은 그것을 흐리게 할 수도 없고, 그의 광채를 못본체 할 수도 없읍니다.—하박국 3:4.
31, 32. (ㄱ) 온역과 불덩이에 관한 하박국 3:5은 어떻게 성취될 것입니까? (ㄴ) 여호와께서는 ‘모압’ 평야에서 그러한 능력을 어떻게 전시하셨읍니까?
31 “마지막 때”—역사는 그것이 제 1차 세계 대전이 돌발한 기원 1914년에 시작되었음을 증명한다—에 관하여 예수께서는 예언하시기를 국제적인 전쟁만이 아니라, 지진, 기근, 온역 등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읍니다. (마태 24:3, 7, 8; 누가 21: 10, 11; 다니엘 12:4) 그런 온역은 부도덕하고 전쟁에 시달린 인류가 비위생적인 상태를 조성하였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가까운 장래에 여호와께서 ‘아마겟돈’에서 있을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으로 행진하실 때에는, 비폭력적이고 조용한 방법, 곧 온역으로 많은 원수들을 죽이실 것입니다.
32 그 때에 여호와의 승리적인 행진 대열을 방해하는 것은 위험하고 치명적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앞에 온역을 보내시고, 그의 뒤에는 불덩이 처럼 강한 열에 의해 죽임을 당한 자들이 남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박국 3:5에서는 여호와의 나오심에 대하여, “온역이 그 앞에서 행하며 불덩이가 그 발밑에서 나오”리라고 하였읍니다. 그렇게 하실 능력이 여호와께 있다는 사실은, ‘모세’가 죽기 직전, 약속의 땅 맞은편 강 건너 ‘모압’ 평야에서 부도덕한 ‘이스라엘’ 사람 24,000명을 여호와께서 죽이셨을 때에 잘 나타났읍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여 이교 여인들과 음행을 하고 거짓 신인 ‘브올’의 ‘바알’을 숭배하였기 때문이었읍니다.—민수 25:1-9.
놀라게 될 나라들
33. 여호와께서는 ‘아마겟돈’에서 적군을 공격하기 전에, 하박국 3:6에 암시된 바와 같이 무엇을 하실 것입니까?
33 오래 전에 여호와께서 행하신 방법을 보면, 앞으로 하나님께서는 ‘아마겟돈’ 전쟁터를 검사하시고 적군의 대열을 살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박국’의 만가와 같은 기도는 이렇게 계속됩니다. “그가 서신즉 땅이 진동하며 그가 보신즉 열국이 전율하며 영원한 산이 무너지며 무궁한 작은 산이 엎드러지나니 그 행하심이 예로부터 그러하시도다. 내가 본즉 ‘구산’의 장막이 환난을 당하고 ‘미디안’ 땅의 휘장이 흔들리도다.”—하박국 3:6, 7.
34. (ㄱ) 여호와께서 서실 때에 왜 땅이 진동할 것입니까? (ㄴ) 여호와께서 ‘보실’ 때에 왜 열국이 전율할 것입니까?
34 여호와께서는 무슨 일이든 충동적으로 아무렇게나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위치를 정한 다음, 조치를 강구해야 할 입장에 주의를 기울이시고, 자기가 꼭 원하는 장소에 원수들이 들어오고 그들의 의향을 온전히 들어내도록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서서 대비하고 계시면 그분 앞에 있는 상징적인 “땅”이 요동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상에 있는 원수의 조직에 지진이 일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과연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접근하여 그들 앞에 서셨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면 지상의 조직은 무너지기 전에 모두 흔들릴 것입니다. 마침내 전능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신다’는 것 즉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을 그들이 깨닫게 되면 그들은 참으로 전율할 것입니다. 이제, 사태의 진상을 깨닫고 그들은 즐거워서가 아니라 충격을 받아서 소동하고 뛸 것입니다. 그들은, 마치, 애굽의 병거와 말탄 자들이 홍해에 빠졌을 때, 자기들의 재난의 참된 원인을 깨닫고, “‘이스라엘’ 앞에서 우리가 도망하자 여호와가 그들을 위하여 싸워 애굽 사람들을 치는도다.” 하고 외친 것과 같이 될 것입니다.—출애굽 14:25.
35. (ㄱ) 여호와의 행진 대열 앞에서 산들과 작은 산들 같은 조직들은 어떻게 될 것입니까? (ㄴ) 여호와께서는 그때에 어떠한 면으로, ‘옛적의 행하신 일’을 다시 하실 것입니까?
35 비록 지상의 조직이 산처럼 위엄이 당당할지라도, 여호와의 승리의 행진을 방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한 산같은 조직들은 비록 연륜이 영원한 것 같이 보일지라도 무너질 것입니다. 기타 그만 못한 지상의 조직들은 무궁하게 계속될 것 같이 보이는 것들일지라도 여호와 앞에 엎드러져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짓밟고 행진하실 것입니다. ‘아마겟돈’에서의 그분의 행하심은 마치 “예로부터 그러하심” 같이 하실 것입니다. 다만 훨씬 거대한 규모로 하실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옛적에 하신 일은 오늘날도 하실 수 있읍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의 일을 다시 나타내실 것입니다.
36. (ㄱ) ‘구산’의 장막이 환난을 당하고, ‘미디안’의 장막의 휘장이 흔들린다는 사실이 어떻게 설명됩니까? (ㄴ) 그러한 자들은, 즐거워하는 어떤 사람들 가운데 포함되지 않습니까?
36 ‘하박국’의 하나님께서 꿋꿋이 전진하실 때에, 그 보고를 들은 모든 자들, 여호와와 그분의 백성들에게 우호적이 아닌 모든 자들은 공포에 떨 것입니다. 이 사실을 비유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하박국’은 서로 인근 지역에 사는 ‘구산’과 ‘미디안’ 땅의 천막 생활자들을 예로 들었읍니다. ‘미디안’ 땅은 ‘아카바’ 만 동쪽에 위치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이 약속의 땅으로 행진하던 때에 거기를 통과하지는 않았으나, ‘미디안’ 사람들은 동요하였읍니다. 그것은 마치 천막의 천이 흔들려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동요하는 것과 같았읍니다. 예언자 ‘하박국’은 ‘구산’의 장막이 “환난을 당”한다고 하였읍니다. 천막 생활자들은 여호와께서 구속된 백성들과 함께 지나가시는 것이 ‘구산’ 사람들에게 좋지 않다고 생각하였읍니다. 침울하고 긴장된 감정이 그들에게 환난이 되고, 고통을 주고 그들을 전전긍긍하게 만들었읍니다. 여호와께서 ‘아마겟돈’으로 전진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고통을 느끼고 요동하는 사람들 가운데 포함되는 것은 확실히 좋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그러한 상황에서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사람들 가운데 포함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각주]
[87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바란
에돔
홍해
시내 산
아카바 만
드만
사해
[84면 삽화]
홍해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하던 ‘바로’의 군대를 멸하신 여호와의 “일”
[85면 삽화]
‘요단’ 강의 수위가 높은 시기에 여호와께서 기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그 강을 통하여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오셨음을 성서의 “보고”는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