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단하지 말라—약속의 성취가 가까왔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 약속된 것을 받으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히브리 10:36, 새번역.
1. ‘아랍’인들과 ‘이스라엘’인들의 공동 조상은 신뢰할 만한 약속의 영향을 받아 어떻게 행하였읍니까?
믿을 만한 분의 좋은 약속은 그 약속을 받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에 따라 행동하게 할 수 있읍니다. 하지만 오늘날 오로지 하나의 약속을 위하여, 외국 땅에서 100년 동안 나라없는 외인으로 생활할 사람이 몇이나 있겠읍니까? 놀랍게도 역사 기록을 보면 바로 그렇게 행동한 사람이 있었읍니다! ‘아랍’ 사람들도 자기 조상이라고 주장하고, 또 그들과 혈연 관계가 있는 ‘이스라엘’ 백성도 자기네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한 사람이 그렇게 하였읍니다. 그들의 공동 조상이 전 인류의 영원한 유익에 큰 영향을 미칠 하나의 약속을 받았읍니다.
2. 그 약속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왜 그 약속받은 자의 행동이 필요하였읍니까?
2 세계적 중요성을 띤 이 약속이 실현되려면 행동이 필요하였읍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러하였읍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세 12:1-3.
3. 약속에 관하여 ‘갈대아 우르’의 ‘아브라함’은 어떤 면에서 우리에게 본이 됩니까?
3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포함되는 우리는, 그 약속을 받은 ‘갈대아 우르’의 ‘아브람’이 지시된 대로 행한 것에 대하여 참으로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아브람’(후에 ‘아브라함’이라고 불리웠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실현을 위해 합당한 행동을 취한 점에 있어서 우리의 본이 됩니다.
4.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은 얼마 동안 나라없는 사람으로 생활하였읍니까?
4 ‘아브라함’은 75세 때에 낯설은 땅인 ‘약속의 땅’에 들어갔읍니다. 그는 175세에 사망하였읍니다. 이렇게 볼 때에 그는 1세기라는 긴 세월 동안 나라없는 사람이었읍니다. 그가 이 외국 땅 곧 아직 자기에게 주어지지 않은 그 땅에서 낳은 아들 ‘이삭’도 나라가 없는 사람이었읍니다. 그는 더 긴 세월 곧 180년을 그렇게 살았읍니다. ‘이삭’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받은 ‘야곱’은 130년 동안 나라없이 생활하다가 ‘애굽’으로 내려가서 거기서 사망하였읍니다. (창세 47:7-9; 49:33) 그러나 147년을 산 이 족장은 자신의 요청에 따라, ‘약속의 땅’ 곧 ‘가나안’ 땅에 장사되었읍니다.—창세 50:1-14.
5, 6. 이 세명의 족장들이 외국 땅에서 215년을 인내하도록 힘을 준 특성은 무엇이었으며, 히브리 11:9, 10, 13-16은 이 점을 어떻게 알려 줍니까?
5 외국 땅에서 계속 생활하고 ‘갈대아 우르’로 돌아가지 않도록 이 세명의 족장들에게 힘을 준 것은 무엇이었읍니까? 그들이 총계 215년(기원전 1943년부터 1728년까지)간을 외국 땅 ‘가나안’에서 인내하도록 그들에게 도움을 준 것은 무엇이었읍니까?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믿음과 굳건한 약속의 신뢰성에 대한 믿음이었읍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11:9, 10, 13-16(새번역)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읍니다.
6 “믿음으로 그[‘아브라함’]는 약속의 땅에서도 같은 약속을 함께 상속받을 ‘이삭’과 ‘야곱’과 함께 외국 사람처럼 천막에서 살았읍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지으실 튼튼한 기초를 가진 도성을 그가 바랐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읍니다.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했으나 그것을 멀리 바라보고 즐거워했으며 땅위에서는 손과 나그네로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했읍니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 고향을 찾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만일 떠나온 곳을 생각했었더라면 돌아갈 기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지로 그들은 더 좋은 곳을 동경하고 있었읍니다. 그곳은 하늘에 있는 고향이었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시지 않고 그들을 위하여 한 도성을 마련해 주셨읍니다.”
7. ‘아브라함’은 어떻게 자기 고향 근처의 주민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게 행동하였으며, 그는 어떤 “도성”을 원하였읍니까?
7 자기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에게 본이 되었던 ‘아브라함’은 외국 땅에서 죽기로 결심하였으며, 자기의 임명에서 후퇴하여 고향인 ‘갈대아’의 ‘우르’로 되돌아가지 않았읍니다. 그 이교 도시는 ‘시날’ 땅에 위치해 있었읍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지방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행동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읍니다. 왜냐 하면 그는 그 지방에서 온 네명의 연합군 왕들을 추격하여 쳐부셨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었읍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군대는, 그들이 ‘가나안’ 땅을 침공하여 약탈해간 모든 귀중품과 포로들을 빼앗았읍니다. (창세 14:1-24; 히브리 7:1) ‘아브라함’은 ‘갈대아’의 ‘우르’를 더 이상 자기의 거주지로 받아들이지 않았읍니다. 그는 그 곳을 버렸읍니다. 그는 자기가 태어난 그 도시, 우상 숭배하는 죄 많은 그 도시에서 살기 보다는, 더 좋은 것을 바라며 ‘약속의 땅’에서 유목민으로 살기를 더 좋아했읍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인간이 만든 도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지으신 도시 곧 정부를 원하였읍니다. ‘갈대아 우르’는 오늘날 폐허가 되어 있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성”은 그렇지 않습니다.
8, 9. (ㄱ) ‘아브라함’은 부활 때에 어떤 종류의 유산을 받을 것이며, 어떻게 받을 것입니까? (ㄴ) 로마서 4:11, 12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영적으로 말하여 어떻게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아버지”가 되었읍니까?
8 ‘아브라함’이 죽기까지 충성한 데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천적인 것이 아니라 지적인 유산을 약속하셨읍니다. 즉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읍니다. 그러므로 부활될 때에 ‘아브라함’은 지상의 생명으로 일으킴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는 지구가 ‘아브라함’의 가장 중요한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왕국 곧 “하늘에 있는” 도시의 통치를 받을 것입니다. (히브리 11:16) ‘아브라함’은 이 영광스런 후손에게 믿음의 탁월한 본이 되었읍니다. 그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씨이기 때문에,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이며, 지상의 모든 민족이 끝없는 축복을 얻을 것입니다. (창세 22:18) 영적으로 말하여, ‘아브라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아버지”라고 되어 있읍니다. 그 제자들이 할례받은 ‘유대’인들로부터 나왔든지, 할례받지 않은 비‘유대’인 곧 이방인들로부터 나왔든지 마찬가지입니다. 이 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읍니다.
9 “저가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방황하는 외국인이 된지 여러 해 후에]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그가 ‘이삭’을 낳을 때까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이방인들처럼]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한 할례자[할례받은 ‘유대’인]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받을 자에게 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이방인으로서] 좇는 자들에게도니라.”—로마 4:11, 12; 창세 15:6; 17:7-17.
10. (ㄱ)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보다 더 높은 의미에서 ‘믿는 모든 자의 아버지’가 되십니까? (ㄴ)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특성에 의해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에 들어갈 것입니까?
10 ‘아브라함’은 자기의 육적 후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영적 아버지와 같기 때문에, 지상 만민의 축복의 근원이 될 모든 “씨”의 천적 아버지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모형으로 사용되었읍니다. (갈라디아 3:8, 9)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은 더 큰 ‘아브라함’이십니다. 그분으로부터 믿음이라는 특성이 나옵니다. 왜냐 하면 그분께서 모든 숭배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며, 믿음은 이 영의 열매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 5:22, 신세) 약속에 대한 그분의 변함없는 충실성은 그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고취시켜 줍니다. 여호와는 ‘아브라함’보다 훨씬 더 높은 의미에서 믿는 자들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우리는 그러한 믿음에 고착함으로써 ‘아브라함’처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에 들어갈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때까지 인내하도록 도움을 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이방인과 행인”
11, 12.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는 우리는 어떤 면에서 나라없는 백성이며, 베드로 전서 2:11, 12은 이 점을 어떻게 뒷받침하고 있읍니까?
11 거짓이 없는 하나님의 훌륭한 약속을 바라는 우리에게 ‘아브라함’은 좋은 본이 됩니다. 현재에도 상징적으로 말하여 나라없는 남녀들이 있읍니다. 그들은 실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씨’ 중 으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하고 침례받은 제자들입니다. 그들을 나라없는 백성이라고 보는 것은 잘못된 견해가 아닙니다. 그 견해는 그리스도의 제자인 사도 ‘베드로’가 쓴 첫째 편지로도 뒷받침 됩니다. 그는 자기의 첫째 편지를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보낸다고 하였읍니다. (베드로 전 1:1) 이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의미에서 “나그네”였읍니까? 그 점은 제 2장 11, 12절에 설명되어 있읍니다. 거기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12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베드로 전 2:11, 12.
13. (ㄱ) 그러나 우리는 누구에 대해 “나그네”가 아니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베드로’와는 달리 왜 우리는 그들의 악한 사물의 제도로부터 옮겨지지 않을 것입니까?
13 그리스도의 헌신한 제자들인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는 “나그네”일지 모르지만, 하나님께 대하여는 “나그네”가 아님을 알 때 크게 위안이 됩니다! 우리는 “악한 행실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골로새 1:21) 우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읍니다. (에베소 4:17, 18) 사도 ‘베드로’와 그 당시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죽을 때에 이 세상 사물의 제도로부터 옮겨져서 더 이상 그 안에서 나그네 혹은 임시 거주자가 되지 않을 것을 기대하였읍니다. 그러나 20세기인 오늘날 존재하는 그리스도인 회중 즉, 다가오는 “큰 환난”을 살아남을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은 그 제도로부터 옮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 하면, 이 악한 사물의 제도 자체가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의 전쟁’에서 지면으로부터 제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마태 24:21, 22; 계시 7:14; 16:14, 16; 19:11-21.
14.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행인”같이 처신해야 할 확고한 이유를 ‘베드로’는 무엇이라고 하였읍니까?
14 우리는 참으로 헌신한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합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영감받은 사도 ‘베드로’가 권고한 바와 같이 세상 나라들 가운데서 “나그네와 행인” 같이 처신합니까? 그가 ‘거듭나서 산 소망’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 외국 땅에 사는 사람들처럼 조심하라고 권고한 데는 확고한 이유가 있었읍니다. 그들이 이렇게 행동해야 할 이유를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 (베드로 전 1:3; 2:9, 10)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은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이 세상의 일부가 아닙니다. 그들은 더 이상 어두움 가운데 행하지 않는 사람들이며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빛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들은 과거의 ‘아브라함’과 같은 입장에 있읍니다.
15. 베드로 후서 3:13, 14에 의하면, ‘거듭 난’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은 무엇입니까?
15 그들의 희망은 이 세상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희망은 하나님의 약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약속은 현재 영광스럽게 성취될 날이 임박했읍니다. 19세기 전에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썼읍니다. “우리는 그의 약속을 따라 새하늘과 새땅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곳은 의의 본향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것을 기다리고 있느니만큼 티도 없고 흠도 없는 자로 평안한 가운데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있기를 힘쓰시오.” (베드로 후 3:13, 14, 새번역) 그 “새 하늘”은 충실한 ‘아브라함’이 참을성있게 기다렸던 “도성” 즉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지으실 튼튼한 기초를 가진 천적” 정부였읍니다. (히브리 11:10, 새번역) “새 땅”은 영적 ‘아브라함’의 ‘씨’를 통하여 축복을 받을 모든 사람으로 구성된 새로운 인간 사회입니다.—창세 22:18; 계시 21:1.
그리스도처럼 세상에 관여하지 않음
16.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나라들의 정치 문제와 분쟁에 관여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6 그리스도인들이 “나그네와 행인”이며 또 그러한 신분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떻게 그들이 세상 나라들의 정치 문제와 폭력 전쟁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겠읍니까? 만일 그들의 관심이 하나님의 왕국과 관련하여 “새 하늘”과 “새 땅”에 온전히 집중해 있다면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17. 마태복음 6:32, 33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한다면, 왜 관심을 하나님의 왕국과 인간이 만든 왕국 사이에 나누어 가질 수 없읍니까?
17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물질적인]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마태 6:32, 33) 이처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왕국을 먼저 구하는 것 가운데는 예수의 다음과 같은 예언을 활동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이 왕국의 좋은 소식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사람이 거주하는 온 땅에 전파될 것입니다. 그러면 끝이 올 것입니다.” (마태 24:14, 신세) 순종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자기의 관심과 시간을 타협적으로 하나님의 왕국 관심사와 인간 왕국의 관심사에 나누어 바치면서 하나님의 왕국을 첫째로 두고 있다거나 하나님의 승인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18. 그리스도인들은 왜 이 세상에 속할 권리가 없읍니까?
18 그리스도인들은 이 낡은 세상에 대해 “나그네와 행인”이 되었으므로 다시 이 세상에 속할 권리가 없읍니다. 만일 그들이 세상에 속한다면 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께 드린 다음과 같은 기도에 포함될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한 17:15-17) 그렇게 기도한 데는 확실한 이유가 있었읍니다. “이 세상 임금”이 악을 조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요한 12:31; 14:30.
19. 그리스도인들은 “나그네와 행인”으로서 이 세상에서 무엇을 견디어야 합니까?
19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류 세상은, 이들 그리스도인 “나그네와 행인”들이 이 세상에 속하기를 계속 거부하기 때문에 그들을 사랑합니까? 또한,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말씀과 같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셨기 때문에 그분을 사랑하였읍니까? 제자가 선생보다 낫지 못합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요한 15:18-20; 16:2) 참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에 들어가려면 그러한 세상의 증오와 학대를 충실하게 견디어야 합니다.
20. 히브리서 10:32-34에 의하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유대’인들은 예수처럼 미움을 받았지만 무엇을 기억할 필요가 있었읍니까?
20 ‘로마’의 행정 구역인 ‘유다’에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유대’인들, 특히 그 수도인 ‘예루살렘’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그들의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그 경고의 말씀이 참됨을 체험하였읍니다. 예수께서 위의 말씀을 하신지 28년 후에,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유대’인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사는 ‘히브리’인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격려의 말을 써보냈읍니다. “여러분은 빛을 받은 후 많은 고난의 도전을 받으면서도 견디어낸 그 처음 시절을 생각해보시오. 여러분 중에는 모욕과 환난을 당하여 구경거리가 된 사람들도 있고 그런 형편에 빠진 사람들의 친구가 된 사람들도 있읍니다. 여러분은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동정하고 또한 자기 소유를 빼앗기는 일이 있어도 그보다 더 좋고 더 영구한 재산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일을 기쁘게 당했읍니다.”—히브리 10:32-34, 새번역.
그리스도인 “사절”들
21, 22. (ㄱ) 세상의 증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누구를 보내셨으며, 무엇을 하게 하셨읍니까? (ㄴ) 고린도 후서 5:19-21에서는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하였읍니까?
21 사실 이 세상은 여호와 하나님과 그분을 섬기는 사람들을 미워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거듭 남’을 받은 자들 곧 헌신하고 침례받은 숭배자들에게 사절로서의 임무를 부여하셨읍니다. (베드로 전 1:3)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세상에 보내셨읍니다. 그러나 세상에 평화를 구하고 그들과 협상하기 위해서 보낸 것이 아닙니다. 멸망의 운명에 처한 이 세상은 하나님 앞에 평화의 조건을 내세울 입장에 있지 않습니다. (누가 14:31, 32) 하나님께서 사절들을 보내신 것은 세상에 속한 개개인들에게 호소하여 그들이 하나님과 평화로운 관계를 갖고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유대’인 ‘바울’은 혼혈 ‘유대’인 동료 ‘디모데’와 함께 그 사실을 지적하였읍니다. 고린도 후서 5:19-21(새번역)에서는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22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을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며 인간들의 죄과를 인간들에게 돌리시지 않고 오히려 화해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겨 주셨읍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이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여러분에게 권면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요청합니다. 하나님과 화해하시오.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대신하여 그를 정죄하셨읍니다. 그것은 우리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에 함께 참여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23. 그리스도인 “사절”들이 전하는 “화해의 말씀”을 생각할 때에 왜 그들은 세상의 정치와 분쟁에 관여할 권한이 없읍니까?
23 모든 민족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사절이 되었기 때문에 사명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정치 집단의 사람들 곧 민주당원에게, 공화당원에게, 사회주의자들에게, ‘나치’ 사상가들에게, ‘팟쇼’ 사상가들에게, 공산주의자들에게, 보수주의자들에게, 노동당원들에게, 기타 누구에게나 “화해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화해의 말씀”은 이들 어느 사람에게나 동일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절’들은 어떤 나라의 정치에 관여하거나 어떠한 정당의 당원이 될 수 없읍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파견된 “사절”들로서 그들은 “이 왕국의 좋은 소식”을 어디서 전파하든지 “나그네와 행인”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한 사도 ‘바울’의 말을 기억하고 그들은 정치 문제에 관여할 권한 혹은 권리가 없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빌립보 3:20, 21) 그들은 국가적 혹은 지방적 정치 문제에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이기적 분쟁에 엄정 중립을 지켜야 합니다.
24. 이 “사신”들 곧 사절들은 법을 잘 지키지만, 에베소서 6:19, 20에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세상으로부터 어떤 일을 당합니까?
24 그러므로 그들은 세금을 내고 지역 사회에 최대의 유익이 되도록 행동하는 등 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 그리스도의 사절들은 세상의 미움을 받고 있읍니다. 그리스도께서 미움을 받으신 바와 같습니다. (마태 22:21; 로마 13:1-7) 그러므로, 고린도 후서 5:19-21의 말을 기록한지 약 6년 후, ‘바울’이 ‘이탈리아’의 ‘로마’에 감금되어 있을 때 소‘아시아’의 ‘에베소’ 회중에 편지를 하여 자기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한 것도 이상할 것이 없읍니다. “내가 입을 열 때에 내게 할 말을 주셔서 담대하게 복음의 비밀을 알릴 수 있도록 나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시오. 나는 지금 사슬에 매여 있으나 복음의 사신입니다.”—에베소 6:19, 20, 새번역.
25. 그리스도인 사절이라는 직책을 수행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견디어야 하며, 재물에 대해 어떤 사실을 알고 있읍니까?
25 1900년 전과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사람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사절’로 봉사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고난을 견디어야 합니다. ‘바울’은 충실하게 인내하였으며, 우리에게 본이 됩니다. 그는 자기의 사절로서의 직책 곧 그리스도인 봉사에 고착하였읍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군이라는 것을 생활로 보여주었읍니다. 극심한 환난과 곤경에서도 변함없이 참았읍니다. 우리는 매를 맞고 옥에 갇히고 폭동을 겪고 괴로운 노동을 하고 잠을 자지 못하고 굶주리기도 했읍니다.” (고린도 후 6:4, 5, 새번역) ‘바울’은 함께 고난을 받는 자로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히브리’인 형제들에게, 그들이 처음 성서 진리의 빛을 받을 때 많이 인내한 바와 같이 계속 인내하라고 말할 수 있었읍니다. 지상의 모든 재물을 상실한다 할지라도 그들이나 ‘바울’ 자신에게는 “더 좋고 더 영구한 재산”이 있었읍니다.—히브리 10:32-34.
26. 왜 그리스도인 사절들은 아직도 충실히 계속 인내해야 합니까?
26 하나님으로부터 그리스도 대신 보냄을 받은 사절 혹은 사신들로서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인 우리는 인내력을 기를 필요가 있읍니다. 그렇치 않습니까? 우리는 계속 인내할 필요가 있읍니다. 1914년에 이방인의 때가 끝난 이래 우리는 적대적인 세상에서 많은 박해와 학대를 받아 왔읍니다. 영원히 의가 거할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기 전에 우리는 아직도 그러한 일을 겪어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 후 3:13) 이 약속의 성취는 점점 가까와지고 있읍니다. 기원 1914-1918년의 제1차 세계 대전 이래 하나님의 사절들과 사신들을 그렇게 불의하게 박해한 이 세대는 획기적인 세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의로운 새 사물의 제도를 가져오시겠다는 약속을 하나님께서 성취하는 것을 볼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마태 24:34; 마가 13:30)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계속 충실하게 인내하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