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하나님의 새 질서에서 생활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1-3. (ㄱ) ‘이스라엘’ 사람들은 홍해에서 어떤 경탄스런 경험을 하였읍니까? (ㄴ) 그 일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변화시켰읍니까? 어떻게 압니까?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나오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홍해의 서쪽 연안에 도착하였을 때에 ‘바로’의 군대가 뒤쫓아오는 것을 보고는 자기들이 올무에 걸렸다고 생각하였읍니다. 그들은 불평을 하기 시작하였읍니다. ‘이 ‘모세’라는 사람은 왜 우리를 사막으로 이끌어 와서 여기서 아내들과 자녀들과 함께 잡혀 죽게 하는가?’ 그들은 하나님의 지도에 대해 믿음이 부족함을 나타냈읍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지팡이를 바다 위로 처들라고 하시고는 바다를 갈라지게 하여 동쪽 해변으로 통하는 길을 내셨읍니다. 약 3백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 길을 통과하였읍니다. 「성서 이해를 위한 보조서」(546면)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읍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루밤 사이에 바다를 건너갔으므로 물이 갈라진 통로가 조그마한 통로였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폭이 1‘마일’쯤(1.6‘킬로미터’) 혹은 여러 ‘마일’쯤 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커다란 집단이 수레와 짐과 짐승떼를 거느리고 간다면 조밀하게 줄을 지어선다고 하더라도 아마 3평방 ‘마일’(7.7평방 ‘킬로미터’) 정도의 면적을 점유할 것이다. ··· 그러한 대열이 바다에 들어가고 통과해 나가는 데는 여러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2 바다를 통하는 맞은 편으로 건너가서 해변에 올라선 다음 되돌아다보니 물이 다시 합쳐서 ‘바로’의 군대를 독안에 든 쥐처럼 물속에 잠겨버렸을 때에 얼마나 웅장한 경험이었겠읍니까! 실로 경탄스럽고 감격에 넘치는 경험이었읍니다. 그러나 그 일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변화시켰읍니까? 그들은 홍해의 동편에 왔을 때는 서편에 있었을 때와 다른 사람이 되었읍니까?
3 그 기록을 읽어보면 그들은 한달도 채 못되어 다시 불평을 시작하였읍니다. 이번에는 물이 충분치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때에나 그 후의 불평 때에 그들은 얼굴을 하늘로 쳐들고 직접 하나님께 불평을 한 것이 아니었읍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눈에 보이는 인간 대표자에게 불평을 하였읍니다. 믿음의 결핍 상태는 계속되었던 것입니다.—출애굽 15:22-24; 16:1, 2.
4-6. (ㄱ) 기적이나 다른 경탄스런 경험이 사람에게 지속적인 효과를 미치느냐 않느냐는 무엇에 따라 결정됩니까? (ㄴ) 누가 복음 17:11-19은 이 점을 어떻게 설명해 줍니까?
4 하나님의 능한 활동이 그 사람에게 일시적인 효과만을 주느냐, 그 사람을 실제 변화시키느냐는 그 사람의 마음이 영향을 받느냐 않느냐에 달려 있읍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예언자들과 하나님의 아들이 행한 기적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읍니다. 문둥병에 대하여, 손가락, 발가락, 귀, 코, 입술 등 신체 각 부분을 침해하는 무서운 그 병에 대하여 들어보지 않은 사람이 누구이겠읍니까? 어떤 사람이 그러한 병에 걸려 자신의 몸과 얼굴이 점차 일그러져 간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를 고쳐주어 몸과 얼굴이 원상을 회복하고 그 쓰라린 경험이 옛 일이 되어버렸다면 어떻겠읍니까? 당신은 어떻게 느끼겠읍니까? 당신은 무엇이라고 말하겠읍니까?
5 누가 복음 17:11-19에 보면 예수께서 여러 마을을 여행하시다가 문둥병자 열명을 만나신 일에 관하여 읽을 수 있읍니다. 율법의 규정대로 그들은 멀리 서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고 외쳤읍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셨으며, 율법에 따라 제사장들에게 가서 보고하라고 말씀하셨읍니다. 가는 길에 열 사람 모두 고침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하였읍니까?
6 한 사람만이 예수께 돌아와 감사를 나타냈는데 그나마도 ‘사마리아’인이었읍니다. 다른 아홉명은 어떠하였읍니까? 그들은 틀림없이 계속 즐거워하면서 자기들의 길을 갔을 것입니다. 그들은 원하는 것을 받았읍니다. 그것은 무엇이었읍니까? 신체적 건강이었읍니다.
7. 신체적 건강을 강하게 열망한다고 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새 질서에서의 생활을 준비한다고 말할 수 있읍니까?
7 우리는 이들 중 누구와 같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새 질서에서 당연히 신체적 건강을 회복할 것을 기대합니다. (계시 21:3, 4) 그러나 완전한 건강을 싫어할 사람이 누구이겠으며, 아픔과 질병으로부터의 해방이나 청년의 활력을 마다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읍니까? 현재 지상에 살아있는 절대 다수는 그렇게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신체적 건강을 열망한다는 사실을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의 새 질서에서의 생활을 준비한 사람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읍니까? 그 이상의 어떤 것이 있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새 질서가 가져다 주는 완전한 건강을 열망하는 데 대한 올바른 동기가 있어야 합니다.
8. (ㄱ) 예수께 돌아왔던 한 문둥병자는 어떤 면으로 올바른 태도를 나타냈읍니까? (ㄴ) 새 질서의 축복에 대한 성서의 약속들을 읽을 때에 우리는 언제나 무엇을 하고자 해야 합니까?
8 우리는 돌아서서 예수께 갔던 그 한사람과 같아야 하겠읍니다. 그 사람은 아마 터질듯한 벅찬 가슴을 안고 눈물을 흘리면서 찾아왔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어떤 점에서 다른 사람들과 달랐읍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친절이 그의 마음에 도달하였다는 것이 달랐읍니다. 그는 자신이 고침을 받은 점에서 여호와께서 얼마나 웅대한 하나님인가에 대한 증거를 보았으며, 그분을 찬양하고자 하는 열망이 넘쳤읍니다. 그는 올바른 태도를 가졌으며, 영적 인식을 가졌읍니다. 우리 역시 새 질서에서 얻을 그 많은 축복들을 하나하나 생각할 때에 그들이 우리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알려주는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읍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들은 우리 안에 하나님께 대한 인식을 깊게 해줄 것이며, 강한 열망, 완전한 건강과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웅대한 하나님을 섬기고 또 우리 이웃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러한 축복을 갖고자 하는 열망을 길러줄 것입니다.
개성의 변화, 하나님의 기적으로 되는 것이 아님
9. (ㄱ) 왜 죽음으로부터의 부활도 그 자체가 사람들을 의롭게 변화시키지는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읍니까? (ㄴ) 하나님의 새 질서에서 ‘두로’와 ‘시돈’과 ‘소돔’ 사람들이 예수의 꾸지람을 들은 도시 사람들보다 더 잘 발전할지도 모를 이유를 마태 21:31, 32은 어떻게 알려줍니까?
9 죽음으로부터 부활되는 것도 그 자체가 사람들을 변화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어떤 ‘이스라엘’ 도시 사람들에게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그리고 ‘소돔’ 땅]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하신 말씀으로 보아 알 수 있읍니다. (마태 11:20-24)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고대 ‘두로’, ‘시돈’ 및 ‘소돔’ 사람들은 제1세기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받았던 일들, 곧 전도와 가르침과 능력있는 일 등으로부터 유익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가버나움’, ‘고라신’ 및 ‘벳새다’ 사람들이 천년 통치 기간에 부활되어 나올 때에 그 당시에 가지고 있던 바와 똑같은 교만하고 완고한 성품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두로’와 ‘시돈’과 ‘소돔’ 사람들이 불의한 것은 사실이지만, 성품이 그 정도는 아니었으므로 하나님의 의로운 원칙에 대한 진리와 교훈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더 나은 입장에 있다는 것이었읍니다.—마태 21:31, 32 비교.
10. “정신을 차리”고 있는 사람이라면, 새 질서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가장 큰 요인이 무엇임을 인식할 것입니까?
10 그러므로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있는 사람이라면, “큰 환난”과 같은 어떤 굉장한 사건이 우리를 마술적으로 변화시켜 하나님의 새 질서에서 성공을 보장할 수 있게 될 것을 기대할 수 없읍니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느냐의 여부가 단순히 어떤 사람들이나 조직과 연합하는 것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인식하게 됩니다. 결국은 우리가 어떠한 사람인가, 우리의 성품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11, 12. (ㄱ) 현재의 심각한 영적 취약 상태를 시정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새 질서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완전성을 향해 전진하는 데 어떻게 방해가 될 수 있는지 설명하십시오. (ㄴ) 그때 열려진 “책들”의 내용에 따라 살아가지 못한다면 누구에게 책임이 있을 것입니까?
11 그러므로 우리는 심중하게 그리고 정신을 바짝 차려서, 자신의 심한 영적 취약성을 나타내는 그릇된 습관이나 태도를 과소 평가하거나 빛나게 꾸며대지 않도록 자신을 정직하게 평가해야 합니다. 혹시 어떤 사람은 ‘눈을 두리번 거리는’ 사람일지 모릅니다. 실제 음행이나 간음을 하지는 않더라도 이성에 대한 관심이 과도하여 이 사람 저 사람에게로 눈을 두리번거리는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사람이 “큰 환난”을 생존하는 무서운 경험을 하게 된다면, 한 동안은 ‘똑 바로 앞을’ 볼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마음으로 음란한 경향을 참으로 반대하지 않는다면, 그는 아마 얼마 안가서 다시, 새 질서에서 살고 있는데도, 눈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술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주정군은 아닐지 모르지만 술을 과도하게 좋아하고 또 그 점을 시정하지 못한다면 후에 새 질서에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자신에게 문제를 일으킬 것입니다. 양조 회사가 없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대홍수 후에 ‘노아’가 과음하였던 바와 같을 것입니다.—창세 9:20, 21.
12 다른 위험한 습성이나 성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기적인 야망, 자만심, 시기, 말질, 게으름, 머리 직분에 대한 순종심의 결핍 등등의 경향—우리가 제어하지 않는다면 문제를 야기시킬 만한 것들이 많이 있읍니다. 그러한 경향들은,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천적 합동 후사들이 지상에 있는 왕국 백성을 고쳐주기 위한 제사장으로서 봉사하는 천년 기간에 완전성을 향해 발전하는 데 방해 내지는 장애가 될 것입니다. (갈라디아 5:19-21; 계시 5:10; 22:1, 2) 만일 우리가 그 때에 하나님의 “책들”의 내용에 따라 생활하지 않아 생명을 받을 자격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무도—현 악한 세상도 ‘사단’과 그의 악귀들도—핑계하지 못하고 단지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근신하여 기도함
13. “근신하여 기도”하는 것에는 무엇이 포함됩니까?
13 사도 ‘베드로’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므로 “정신을 차리”라고 권고한 다음,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촉구한 이유를 우리는 쉽사리 이해할 수 있읍니다. (베드로 전 4:7) 식사 때, 잠자리에 들어갈 때에나 일어날 때에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적절함에는 틀림없으나 이것이 “근신하여 기도”하는 것입니까? 오히려 우리는 하루 종일 ‘여호와의 얼굴을 찾으려고’ 해야하며 음성이나 입술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시 27:8, 9)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의 필요성에 대해 민감해야하며, 우리의 믿음에 있어서나 여호와의 의로운 원칙에서 이탈하려는 경향에 있어서 약점을 의식할 때엔 언제나 하나님께 향하여 인도와 힘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14, 15. (ㄱ) 무슨 관계가 그것을 훌륭한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주의를 크게 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읍니까? (ㄴ) 어떤 종류의 기도는 새 질서에서의 생활을 준비하고 있음을 나타냅니까?
14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관계할 때에 그들의 기분을 상하지 않도록 하려고, 위험을 피하려고, 또는 우리의 상업 거래가 성공하도록 주의합니까?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과의 훌륭한 관계를 유지하고 또 그분의 온전한 도움과 지도를 받는 데 대하여는 얼마나 더 주의해야 하겠읍니까! 지금 기도의 필요성은 긴급합니다. 우리가 단순히 다가오는 새 질서에 들어간다고 하여 그 일이 그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15 우리가 하나님께 이야기할 때에 냉담하거나 틀에 박힌듯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마음을 터놓고 우리의 문제거리들, 개선하고자 하는 자신의 노력, 자신에 대한 실망, 하나님의 도움과 과분하신 친절에 대한 간구, 긍휼에 대한 간청 등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기도의 필요성에 대해 깨어 있고 민감하다면 그때의 생활을 위해 준비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깊은 믿음의 증거입니다.
신권적 머리 직분에 대한 존경
16, 17. (ㄱ) 하나님의 새 질서에서 지상에 생존한 자들 사이에 머리 직분의 원칙이 작용할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압니까? (ㄴ) 그 때의 생활을 준비한 점에 관하여 어떠한 질문이 생깁니까?
16 그러한 믿음은 하나님의 새 질서에서의 성공에 크게 기여할 것입니다. 그때의 생활에 대해서 우리는 머리 직분이 작용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읍니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하고 ‘다윗’ 왕은 인정하였읍니다. (역대 상 29:11) 여호와께서는 주권을 정당하게 행사하시기 위해 머리 직분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마련 가운데서 하나의 기본 원칙으로 만드셨읍니다. 그것이 왕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와 같이 개개인이 행사하는 머리 직분이든지, 가족의 머리이든지, 하나님의 임명된 왕 아래서 지시를 내리고 결정을 하고 판결을 하도록 책임을 받은 사람들의 집단을 통해 행사되는 머리 직분이든지, 우리는 그러한 머리 직분을 새 질서에서 존경할 것입니까? 우리는 지금 머리 직분을 존경합니까?
17 천년 통치 기간에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자기의 모든 백성에 대한 “인도자와 명령자”로서의 기능을 온전히 수행하실 것입니다. (이사야 55:4) 그분의 정부는 “가이사”의 정부들을 대신할 것이며, 활동적인 정부가 되어 지상의 일에 대한 그 정부의 지도를 여러 면으로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왕의 명령에 기꺼이 순응할 것입니까? 완전성으로의 발전이나 생명 자체까지도 이에 따라 좌우될 것입니다.
18. ‘시날’ 평야와 회복된 ‘예루살렘’에서 어떤 대조적인 입장이 생겨나 사람들의 생활 환경에 관한 머리 직분의 영향을 나타냈읍니까?
18 ‘노아’ 시대 세계적인 홍수가 있은 다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살아남은 자들에게 흩어져서 땅에 가득 차라고 교훈하셨읍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날’ 평지에 모여 그에 반대되는 결정을 하고 큰 도시로 집결하기로 결정하였을 때에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지존한 뜻을 강행하시기 위해 그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시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읍니다. (창세 9:1; 11:1-9) 그와는 반대로, 여러 세기 후에, 되돌아온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재건하였을 때에, ‘느헤미야’의 기록을 보면, 그 도시에 주민이 희소하여 제비를 뽑아 십분의 일은 가족과 함께 도시로 이사하도록 하였읍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자진하여 그리로 이사하였으며, 백성들로부터 축복을 받았읍니다. 선발된 사람들 모두가 ‘예루살렘’으로 이사하는 것을 특별히 좋아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순응한 것은 “거룩한 도시”가 효과적으로 기능을 발휘할 수 있기를 바라는 믿음과 관심의 표현이었읍니다.—느헤미야 7:4; 11:1, 2.
19, 20. (ㄱ) 우리가 새 질서에서의 생활을 생각할 때에 어떠한 질문들이 생깁니까? (ㄴ) 새 질서 생활의 그러한 부면에 대해 현재 우리가 준비가 되어 있음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읍니까?
19 그러므로,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새 질서에서 다른 지역, 아마 먼 곳으로 이사하여 거기서 살라는 지시를 받는다면 어떻게 하겠읍니까? 당신은 순응하겠읍니까? 만일 당신이 좀 더 주민이 많은 지역으로, 집단적인 노력과 협동을 요하는 왕국 정부의 특별 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사회로 이사하라는 요청을 받는다면 어떻겠읍니까? 또는 그러한 곳으로 이사하도록 자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떻겠읍니까? 당신은 어떻게 하겠읍니까? 당신은 개인적 기호를 따르겠읍니까, 그리고 당신의 행복이 어떤 지역에 또는 당신이 선택한 어떤 환경과 불가분의 관련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겠읍니까?
20 지금도 우리가 어느 정도 약간 비슷한 성질의 기회나 제안에 기꺼이 순응함으로써 올바른 성품을 나타낼 수 있읍니다. 집회 또는 대회 장소에서 어떤 자리에 앉으라는 식의 적은 일에 있어서도 우리는 기꺼이 순응합니까?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는 어떤 구역에서는 봉사하기를 꺼려합니까? 환경과 개인적 의무로 보아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설사 그것이 자기의 본거지를 떠나야하고 어떤 면의 개인적 편의와 기호를 희생하도록 한다 하더라도 더 크게 필요한 곳에서 봉사하도록 자진합니까? 그리스도 예수에 의한 하나님의 왕국 정부 곧 “새 ‘예루살렘’”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점에 우리는 어느 정도의 믿음과 성실한 관심을 나타냅니까?
불완전하여도 존경함
21. 하나님께서 인간 대표자들을 사용하실 때 왜 우리에게 진정한 믿음이 필요합니까?
21 이와 함께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이 통치 활동에서 인간 대표자들을 유능하게 사용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다는 점에 믿음을 가질 필요가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천사로부터나 하늘에서 나온 강력하고 천둥 같은 소리에 의한 지시나 임명에는 속히 응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하늘 정부의 인간 대표자를 통하여 임명이 온다면 어떻겠읍니까? 여기에는 믿음이 더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22, 23. (ㄱ) 인간 불완전성이 지상의 대표자들의 봉사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며,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읍니까? (ㄴ) 불완전성, 실수 및 판단의 잘못이 “큰 환난” 직후에 즉각 사라질 것입니까? (ㄷ) 이 사실은 어떤 질문들을 일으킵니까?
22 오늘날, 장로의 회는 지방의 그리스도인 회중 내에서 일하며, 장로들의 통치체는 전세계 회중을 섬깁니다. 현재 그러한 장로의 회나 통치체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불완전한 인간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성령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잘 이행할 수 있읍니다. 우리는 그들이 완전치 못함을 알기 때문에 그들을 존경하기 어렵거나 그들과 협조하기 어렵습니까? 그렇다면, 새 질서의 초기에는 어떻겠읍니까?
23 하나님의 새 질서는 처음부터 커다란 즐거움을 가져오겠지만, 그러나 불완전성은 “큰 환난”과 ‘사단’을 무저쟁에 넣은 후 첫날, 첫 주, 첫 달, 첫해, 심지어는 처음 십년 내에도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일찍 완전성을 회복한다면 왜 완전성을 전부 회복하고 하나님과 화목하는 데 일천년이나 기간을 정해놓았겠읍니까? 만일 왕국 정부의 대표자로 책임을 맡은 사람들의 불완전성 때문에 우리가 불리한 영향을 받는다면, 아마 우리가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어떤 행동이나 마련을 초래하든지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불유쾌함이나 불만족을 초래하였다면 어떻겠읍니까? 문제가 즉각 시정되지 않으면 우리가 성급하여 흥분할 것입니까? 자기가 문제를 직접 취급하여 자기 생각대로 시정하려고 해야 할 것입니까? 현재 하나님의 새 질서에서의 생활을 준비할 때, 비슷한 환경에서 우리는 어떻게 행동합니까?
24, 25. (ㄱ) 왜 ‘웃사’는 하나님의 손에 죽임을 당하였읍니까? (ㄴ) 그는 아마 무슨 동기로 그렇게 하였을 것입니까? 그것은 무슨 태도를 나타낸 것입니까?
24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려고 한 예에서 우리는 교훈을 받을 수 있읍니다. 언약궤를 (율법대로) ‘레위’의 ‘고핫’ 자손들이 대로 어깨에 메어 운반한 것이 아니라 수레로 운반하게 되었읍니다. 어떤 지점에 와서는 수레를 끌던 소들이 뛰므로 ‘웃사’라 하는 사람이 언약궤를 붙잡았읍니다. 그 결과 어떠하였읍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사무엘 하 6:1-7) 무엇이 잘못이었읍니까?
25 하나님의 율법에는 제사장들 중 권한이 있는 대표자들 외에는 아무도 신성한 언약궤를 만지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위반시엔 죽게 되어 있었읍니다. 그 법은 널리 알려 있었으며, ‘웃사’는 아마 ‘레위’인이었을(그러나 제사장은 아니었음) 것이므로 공표된 하나님의 명령을 다른 사람들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렸읍니다. 아마 상황으로 보아 그렇게 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만일 자기가 언약궤를 잡아주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넘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생각하였다면, 하나님께서 자기의 종들로 하여금 공표된 명령을 위반하도록 하지 않고 일을 처리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그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자기를 ‘영웅’으로 만들려고, ‘거룩한 언약궤를 넘어지지 않게 잡아놓은 ‘웃사’’라는 명성을 얻을려고 했을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였든 그는 불경함을 나타낸 것입니다.
26. 우리는 이 사실로부터 새 질서에서의 우리의 생활을 보호해줄 어떤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읍니까?
26 비성경적인 행동 또는 방법, 주제넘음, 권리 침해 등은 도저히 정당화할 수 없읍니다. 하나님의 새 질서에서는 즐거워할 이유들이 대단히 많을 것이므로 인간적 불완전성을 반영하는 어떤 상태로 인해 분개한다든가 성급한 말이나 행동을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정신을 차리고,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다는 원칙이 하나님의 아들의 천년 통치에도 적용된다는 것과,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 노는 우매자의 품에 머무름이니라”는 말을 인식할 필요가 있읍니다.—디모데 후 4:5; 전도 7:8, 9.
27, 28. 어떤 문제가 시정을 요하는 것 같이 보일 때에,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을 받을 행동입니까?
27 만일 우리가 어떤 문제를 처리할 권한이 없다면 그 일은 권한이 있는 사람에게 통지해야 합니다. 성급하게 자신이 ‘언약궤를 붙잡으려’ 할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지시를 신뢰하고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선한 결과만을 가져오실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시편 4:4에서 “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하고 말한 바와 같습니다.—또한 시편 63:6-8 비교.
28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그리스도인 회중 내에 세워 놓은 마련에 대해 존경심을 나타내고 또 여호와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께서 시정이나 조정을 요하는 것들을 전부 알고 계시다는 확신을 가짐으로써 지금 하나님의 새 질서를 위해 준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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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의 건강을 바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새 질서에서 살 준비를 갖춘 사람인가? 열명의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고침 받기를 간청하였지만 단지 한 사람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자극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당신의 마음은 어떠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