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목자”와 “적은 무리”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누가 12:32.
1. 시편 필자 다윗과 예언자 이사야는 여호와를 어떠한 보호자로 비유합니까?
한때 베들레헴의 목동이었던 다윗 왕은 영감받은 시편 중 한 수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는 말로 시작하였습니다. (시 23:1) 동료 성서 필자인 예언자 이사야도 또한 여호와를 한 목자로 비유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는 목자 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으시리로다.]” (이사야 40:11) 한편 여호와께서는 아랫목자를 가지고 계시며, 합당하게도 그를 “내 종 다윗”이라고 부르십니다.
2. (ㄱ) 에스겔 37:24, 25에 언급된 다윗은 누구에게 적용됩니까? (ㄴ) 예수께서는 스가랴 13:7을 어떻게 적용시키셨으며, 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2 다윗 왕이 죽은 지 수백 년 후에 여호와께서는 또 다른 성서 필자인 에스겔에게 영감을 주어 다음과 같이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에게 단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 왕이 되리라.” (에스겔 37:24, 25) 그 예언은 여호와의 아랫목자요 더 큰 다윗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적함이 틀림없습니다. 기원 33년 니산월 14일 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배반을 당하시고 구속되어 적들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되셨을 때 스가랴 13:7의 예언이 성취를 보게 되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리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이 예언을 그와 같이 적용시키셨습니다.—마태 26:31; 마가 14:27.
3, 4. (ㄱ)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한 남자를 예수께서 고쳐주신 것에 관하여 예수를 논박한 유대인들에게 죄가 남아 있는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ㄴ) 그 후 겨울철에 있었던 수전절 축제 때에 예수께서 자기를 논박한 유대인들을 자기 “양”으로 분류시키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3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한 목자로 비유하여 “선한 목자”라고 칭하셨을 때 그것은 독자적인 것이 아니었고 아주 적절하였습니다. (요한 10:6, 11, 14) 이 점이 그분께서 날 때부터 맹인이 되었던 한 남자를 기적으로 고쳐주신 일과 관련하여 밝혀졌습니다. 예수의 동족 중 믿지 않는 자들은 이에 관하여 예수를 논박하면서, “우리도 소경인가” 하고 반문하였습니다. 이 도전적인 질문에 대한 답은 어떠하였습니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요한 9:40, 41) 얼마 후 기원 32년 (12월) 겨울철에 있었던 예루살렘의 수전절 축제 기간에 예수께서는 자기를 둘러싼 믿지 않는 어떤 유대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4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한 10:19-30.
5. 요한 복음 10:1-5에서, 예수께서는 자기를 이스라엘에게 소개한 선구자를 무엇에 비유하셨습니까?
5 이들 믿지 않는 자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자기 신분을 증명하는 일들을 거절하였을 뿐 아니라 예수를 메시야 즉 그리스도로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소개한 남자 즉 예수의 선구자에 대한 증거 역시 거절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참된 목자가 이러한 자격 혹은 신분을 가져야 할 필요성을 언급하시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요한 10:1-5.
“양의 우리”와 “문지기”
6. “문지기”가 그를 소개한 상징적 “양의 우리”는 왜 율법 언약의 마련이 아니었습니까?
6 예수께서 나사렛의 목수로서 일하셨지만 문자적인 양들의 목자로서 일하신 일은 결코 없으신데, “양의 우리”와 “문지기”란 무엇을 의미하였습니까? 첫째로 “양의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중보인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과 제정하신 율법 언약의 마련을 상징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소위 어떤 유대인 “문지기”에 의하여 율법 언약의 마련 가운데로 소개될 필요가 없음이 분명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태어나셨을 때부터 그 마련 안에 계셨습니다. 갈라디아서 4:4, 5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려 하심이라.]” 그들을 속량하시기 위하여 예수께서는 죽으셨습니다.
7. (ㄱ) 기원 33년 무슨 날에 여호와께서는 율법 언약의 마련들을 도말하셨으며, 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ㄴ) 기원 33년 오순절 이후로 유대인들을 인도해 내야 할 율법 언약의 마련이 더는 존재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7 하나님께 속가를 바치기 위하여 예수께서는 기원 33년에 그가 죽은 지 사흘 만에 죽은 자로부터 일으킴을 받으셨습니다. 부활되신 날로부터 계산하여 40일째 되는 날에 예수께서는 하늘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때부터 열흘 후는 기원 33년 시완월 6일로서 오순절이라는 유대인 춘계 축제에 해당합니다. 바로 그날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사용하시어 예루살렘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의 제자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인을 포함하여 죄 아래 팔린 모든 인류를 속량하시기 위하여 자기의 완전한 인간 희생의 가치를 바치고자 하나님 앞에 나타나신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날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율법 언약을 도말하시고, 약속하신 새 언약으로 그것을 대치하셨으며, 유대인들이 아니라 중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제자들과 새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골로새 2:13, 14) 그리하여 목자이신 예수께서 믿는 유대인들을 인도하셔야 할 유대인 율법 언약이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8. (ㄱ) 그렇다면, “양의 우리”는 무엇을 상징하였습니까? (ㄴ)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육적 후손들은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습니까?
8 이상의 점에 비추어 볼 때, 예수께서 요한 복음 10:1에서 말씀하신 “양의 우리”가 사실상 무엇을 상징하는가 하는 질문이 더욱 집요하게 제시됩니다. 이것은 의문의 여지 없이 기원전 1513년의 율법 언약보다 더욱 오래 되고 더욱 폭 넓고 더욱 지속적인 것을 대표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언약입니다. 족장 아브라함이 기원전 1943년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 유브라데 강을 건넜을 때 아브라함과 그의 장래의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유효케 되었습니다. 그 약속은 이러합니다. “내가 너를 축복하는 자들을 축복할 것이며 너에게 화를 가져오는 자를 내가 저주할 것이다. 땅의 모든 족속들이 확실히 너로 인하여 그들 스스로를 축복할 것이다.” (창세 12:3, 신세) 몇 년이 지나,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희생으로 바치고자 하는 자진성을 나타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에 다음의 점을 부가시키셨습니다.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그들 스스로를 축복할 것이니, 신세]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창세 22:17, 18) 그 후로부터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그 “씨”가 올 것을 기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양의 우리”는 아브라함의 언약의 마련을 상징하였습니다. 그 안에 거하게 될 양과 같은 자들은 그 약속의 “씨”가 올 것을 기다리고 있는 자들을 예표하였습니다.
9. “문지기”는 누구를 “양의 우리” 안으로 통과시키지 않을 것입니까?
9 그 양과 같은 자들이 “씨”에 대하여 미리 알고 있었든지, 않았든지 간에 그 “씨”가 밝혀져 그들에게 나타났을 때 그들은 그를 환영할 것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이들 “양”들을 약탈하기 위하여 거짓된 수단 방법으로 이들을 붙잡고 있는 자들은 “절도요 강도”일 것입니다. 양의 우리의 “문지기”는 그러한 거짓 그리스도 즉 거짓 메시야를 소개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나 “문지기”의 승인을 받아 “문”을 통과하는 이는 아브라함의 “씨”인 참 “목자”일 것입니다.
10. 누가 “문지기”임이 증명되었으며, 어느 예언에 따라 그러하였습니까?
10 그러면 그 “문지기”는 누구였습니까? 그 “문지기”는 레위 지파의 제사직 가문에 출생한 침례자 요한임이 증명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약속된 “씨”에 앞서서 선구자를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말라기 3:1에 다음과 같이 예언되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네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마가 1:1-11) 그러므로 요한은 약속된 ‘아브라함의 씨’가 올 것을 기대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그는 아브라함 언약의 마련인 양의 우리 가운데 있었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양과 같은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일년 남짓한 특별한 봉사 끝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늘 왕국의 기름부음받은 후사가 될 “적은 무리” 중 하나가 될 수 있는 기원 33년 오순절까지 살아 남지 못하였습니다.—마태 11:11-14; 14:1-12; 누가 12:32; 갈라디아 3:16.
11. (ㄱ) 예수께서는 침례자 요한이 자기의 선구자임을 어떻게 확인하셨습니까? (ㄴ) 주 여호와를 수행하여 전에 임하였을 때 예수께서는 무슨 “언약”의 사자로 오셨습니까?
11 침례자 요한이 여호와의 목적을 수행하는 데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에 대해 논하면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마태 11:10)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말라기 3:1의 예언을 여호와와 그분의 “언약의 사자” 앞에 보냄을 받은 자로서 침례자 요한에게 적용시키셨습니다. 주 여호와를 수행하여 검사하기 위해 전(殿)에 임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 언약의 사자(使者)가 아니라 아브라함 언약의 사자이십니다. 여호와의 예언에 믿음을 둔 아브라함 언약의 마련 가운데 있는 자들은 메시야와 같은 “사자”가 오실 것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2. 침례자 요한은 ‘아브라함의 씨’의 기초가 되실 분을 어떻게 “알”게 되었다고 말하였습니까?
12 침례자 요한은 ‘아브라함의 씨’의 으뜸이시며 기초가 되실 분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침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침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요한 1:31-34.
13. (ㄱ) 침례자 요한은 언제 참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었습니까? (ㄴ) 그 때 요한은 어떠한 ‘아브라함의 씨’를 지적하고 있었습니까?
13 예수께서는 “문”을 통과하여 양의 우리 안으로 들어가는 데 곁길로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30세가 되셨을 때 물침례를 받으시기 위하여 침례자 요한에게로 가셨습니다. 광야에 계시는 40일 동안에 유혹을 물리치시고 그분은 확신을 가지고 침례자 요한이 그의 몇 명의 제자들과 함께 있는 곳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분이 아브라함 언약의 상징적 “문지기”에게 가까이 오셨을 때 요한은 그분이 다가오시는 것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하고 외쳤습니다. (요한 1:29, 36) 이스라엘 민족의 죄뿐 아니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셨습니다. 그리하여 침례자 요한은 우주의 목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필요한 자격증 혹은 신임장을 받으신 참 목자에게 상징적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요한이 자기 제자들의 주의를 가까이 오시는 예수에게 이끌었을 때 그는 단순히 할례받은 한 유대인이나 지적 아브라함의 육적 후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더 큰 아브라함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기름부음받은 자 즉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후손을 지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분은 천적 아브라함의 그 “씨”의 으뜸되는 분이셨으며 땅의 모든 인류는 그 “씨”를 통하여 그들 스스로를 축복할 것입니다.
14. (ㄱ) “양의 우리”에 접근하셨을 때 예수께서는 단지 육적 유대인들과 기타 일반 사람들을 찾고 계셨습니까? (ㄴ) 중동 지방의 목자는 어떻게 자기의 각 양들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습니까?
14 그러므로 그분은 아브라함 언약의 마련인 상징적 “양의 우리” 안으로 들어가도록 “문지기”의 인정을 받기에 합당하였습니다. 그분은 참 목자이셨으며, 유대인들이나 기타 일반 사람들이 아니라 그 씨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축복을 받을 복합적 ‘아브라함의 씨’의 일부가 될 즉 그와 함께 연합할 자들이 될 수 있는 기회에 호응하는 자들을 찾기 위해 오셨습니다. 절대 다수의 육적 유대인들이 그분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육적 유대인의 남은 자들은 그분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들이 그분의 음성에 청종한 “양”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렀을 때 그들은 응답하였고 그들은 목장으로 인도를 받았습니다. 중동 지방에서 목자는 양들에게 보통 각각 이름을 붙였습니다.
15. (ㄱ) 목자는 한꺼번에 자기의 모든 양들을 부르는 전체 소집의 신호를 어떻게 발할 것이며, 왜 양들이 속아 “타인”을 따르는 일이 없을 것입니까? (ㄴ) 그것은 오늘날 누가 따라야 할 안전한 본이 됩니까?
15 하지만 목자가 자기의 모든 양들을 한꺼번에 자기에게 모이도록 부르기를 원했을 때 그는 전체 소집의 소리를 내곤 하였습니다. 예로서, 일정한 음질의 떨리는 목소리로 ‘드르-르-르-르-르-르트’ 하고 외쳤으며, 그 목소리의 재간은 다른 목자들이 모방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여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르게 됩니다. 양들은 “타인”이나 모방자들의 음성을 탐지하기에 충분히 예리한 귀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양들은 속는 일이 없을 것이며, 그러한 의심스러운 자들과 아마 악을 꾀하는 “타인”들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적은 무리”를 형성하는 양과 같은 자들이 주의 깊이 따라야 할 좋은 본이 되며, 그들에게 왕국을 주실 것을 만족히 여기시는 더 큰 아브라함에게 기쁨이 될 것입니다.
16. 예수께서 목자와 그의 양무리에 대하여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신 비교의 뜻을 그들이 이해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16 오늘날 우리는 예수께서 여기에서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지 그 뜻을 이해하고 있습니까? 율법 언약의 마련 가운데 있었던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 대하여 말하자면, 그들은 예수께서 비교하고 계신 점이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다음과 같이 기록된 점으로 보아 그러합니다.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요한 10:6) 그들은 메시야인 목자의 음성을 알지 못하였고 목자도 그들을 알지 못하며 각각 이름으로 그들을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스스로 초래한 소경의 상태는 그들로 하여금 그분을 식별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들과 같은 사람들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양의 문”
17. 요한 복음 10:7-10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자기를 양의 우리의 어떠한 다른 특징에 비유하셨습니까?
17 여기에서 예수께서는 문제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을 비유로 말씀하시기 위하여 상징하는 대상을 변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내 대신 온 자, 신세]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한 10:7-10.
18. (ㄱ) 도대체 상징적 “문”이신 예수의 문지기 노릇을 하려는 자는 누구입니까? (ㄴ) 예수께서는 “사물의 제도의 결말”의 특징으로서 어떤 반열에 대하여 말씀하셨으며, 이 반열이 “문”이신 예수의 문지기로서 일합니까?
18 예수께서 자신을 “문”으로 비유하신 점과 관련해서 “문지기”라고 말씀하시지 않은 점에 유의하십니다. 그분은 절대 불과오를 주장하는 어느 종교 조직의 우두머리인 소위 “그리스도의 대리자”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수개월 후에 이처럼 부언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 14:6) 이에 부가하여 예수께서는 “[자기의] 임재와 사물의 제도의 결말의 징조”에 관한 긴 예언을 말씀하셨을 때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맡기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에 대하여 예언하셨습니다. (마태 24:3, 45-47) 그러나 여기에서 그분은 지상의 보이는 모든 소유를, 특히 이 “사물의 제도의 결말”중에 감독하도록 위임하실 그분의 충성되고 지혜 있는 추종자들의 “종” 반열이 있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임명으로 그 “종” 반열을 예수의 “문지기”가 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19. 아브라함 언약의 마련인 양의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양”들은 얼마나 되며, 어느 길을 통하여 들어가는 것이 그들의 구원이 됩니까?
19 예수는 자기와 함께 ‘아브라함의 씨’의 일부가 될 그들 양과 같은 추종자들에게 상징적 “문”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브라함 언약의 마련인 “양의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합한다 해도 비교적 “적은 무리”이며 목자이신 그분 아래 단지 144,000명이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말하자면 영적 이스라엘의 12지파를 형성하며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적 시온 산 위에 섭니다. (누가 12:32; 계시 7:1-8; 14:1-5) 그들은 그들의 구원을 천적 상속 마련으로 돌립니다. 즉 그리스도의 어떤 대리자가 아니라 “양의 문”이신 분에게 돌립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요한 10:9) “적은 무리”가 천적 희망을 갖는 데 대하여 말하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로마 5:1, 2; 에베소 2:18; 3:12.
20. 여호와의 아랫목자는 그분 “대신 온”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과 어떻게 뛰어난 대조가 되십니까?
20 “사물의 제도의 결말”에 관한 예언에서 예수께서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크게 미혹하는 일을 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이들은 참 그리스도 “대신 온 자”들이며 이 기만자들에게 속아서 그들을 따른 자들은 종교적으로 도적질을 당하고 죽임을 당한 것이며, 실제적이 아니라면 영적으로 멸망을 당한 것입니다. (마태 24:3, 24, 25; 요한 10:8, 10, 신세) 반면에 예수께서는 생명의 구원자로서 오셨으며 현재보다 훨씬 더 풍성히 인간 창조물들이 생명을 즐길 수 있는 마련을 하셨습니다. 그 생명은 완전한 가운데 영원히, 그리고 위대하신 목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온전한 안전 가운데 즐길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양”으로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한다면 그분의 자기 희생적 아랫목자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우리가 따라야 할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