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당신을 박해하면 당신은 행복하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0, 새번역.
1, 2.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무슨 경고를 주셨으며, 그의 말씀은 여호와의 증인들의 생활에서 어떻게 성취되어 왔읍니까?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기의 추종자들에게 그러한 봉사를 요구한 사람은 일찌기 없었읍니다. 제2차 대전 초기에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 경은 자기 국민들에게 “피와 수고와 눈물과 땀”을 기대하라고 경고한 바 있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보다 더 어두운 경고를 하셨읍니다. 그의 제자들이 박해를 받고 회당 법정에 끌려가고 왕과 총독 앞에 불려가고 경우에 따라서는 죽임을 당하리라는 것이었읍니다.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읍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형주]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누가 21:12-17; 마태 16:24, 25.
2 이러한 말씀은 제1세기 이래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이 어떠한가를 잘 설명해 줍니다. 오늘날 우리는 전세계 여호와의 증인들의 생활에서 그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목격하고 있읍니다. 그들은 여러 나라에서 금지를 당하였읍니다. 그들은 악독한 박해를 당하였읍니다. 수천동에 달하는 그들의 가옥이 소각당하였으며, 수백동의 그들의 왕국회관이 파손당하였읍니다. 그들 부녀자들은 잔인하게 구타를 당하였고, 남자들은 구타당한 후에 죽기도 하고 무참히 살해당하기도 하였읍니다. 부당하게 자녀들을 빼앗기기도 하였읍니다. 이것은 그들이 예수와 그의 사도들이 행한 바와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을 숭배하겠다고 고집하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이 세상 정치 문제에 중립을 지키기 때문에 그러하였던 것입니다.—요한 17:16; 야보고 1:27.
3. (ㄱ) 박해에 대한 여호와의 증인들의 어떠한 태도가 관찰자들을 감탄케 하였읍니까? (ㄴ) 박해에 대한 어떠한 질문들을 알아볼 가치가 있으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3 그러한 박해를 받아도 여호와의 증인들은 하나님에게나 박해자들에게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그들은 박해자들을 대항하는 폭동을 일으키지 않았으며, 악을 악으로 갚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박해가 여호와의 증인들로 하여금 하나님 섬기기를 중지하게 하지도 못하였고 앞으로도 못할 것입니다. 증인들을 관찰한 사람들은 박해와 박해자들에 대한 여호와의 증인들의 태도를 보고 감탄하였읍니다. 어떤 사람들은 증인들이 좀 더 공격적으로 좀더 보복적으로 되지 않은 것을 이상히 생각하였으며, 박해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어떠하여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하기도 하였읍니다. 당신은 박해를 어떻게 보십니까? 당신은 박해를 보고 당황합니까? 당신은 그것 때문에 놀라거나 슬퍼합니까? 그러한 고통은 무의미한 것입니까? 박해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올바른 태도는 무엇입니까? 이러한 질문과 기타 질문에 대한 답을 알아보면, 여호와의 증인들이 박해를 직면해서도 평온을 유지하고 승리를 하는 이유를 알 것입니다.
박해에 대한 올바른 태도
4. 박해와 관려하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무엇을 알고 있읍니까?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확신하고 있읍니까?
4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손이 짧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읍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보호하고, 구출하고 부축해 주실 수 있음을 확신하고 있읍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고 예언자 ‘이사야’는 말하였읍니다. (이사야 59:1) 그리스도인들이 여호와께 헌신한 종들로서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지, 전적으로 마귀의 손아귀에 들어 있지는 않다는 이 한가지는 확실합니다. 만일 그들이 전적으로 마귀의 손아귀에 들어 있다면 현재 여호와의 증인으로서 존재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과거에 ‘욥’이 보호를 받은 것과 같이 현재도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종들이 있읍니다. (욥 2:4-7)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시험을 받고, 고난을 당하고, 심지어는 죽임을 당하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어떠한 일을 허락하시든 간에 충실하기만 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읍니다. 그 점에 대하여 우리는 감사합니다.—로마 8:38, 39.
5. 예수의 말씀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은 박해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합니까? 그 이유는?
5 예수께서는 산상수훈 가운데서 이렇게 선언하셨읍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나를 위하여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 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받으면 너희가 복이 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너희가 하늘에서 상 받을 것이 크다. 너희보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를 받았다.” (마태 5:10-12, 새번역) 그러므로, 예수의 말씀을 보면, 박해는 기뻐하고 즐거워할 원인이 됩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하늘 왕국이 속하여 있기 때문이며, 하늘에서 그들의 보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고통은 또한 탁월하고 영광스럽게도 그들을 하나님께 대한 믿음 때문에 고통을 받았던 예언자들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의 동료로 만들어 줍니다. 이러한 사람들과 동류로 분류된다는 것은 실로 이만저만한 영예가 아니며, 기뻐하고 즐거워할 이유가 됩니다!
6. 예수께서는 고난에 대하여 어떠한 본을 남겨 놓으셨읍니까?
6 박해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그리스도께서 본을 세워놓으신 그러한 태도여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읍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 (베드로 전 2:21-24) 이러한 비폭력적인 본은 생산적인 것이었으며,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이었읍니다.
7. (ㄱ) 그리스도가 받은 고난은 무의미하였읍니까? (ㄴ) 오늘날 그리스도께서 고난받으신 점에 대하여 가엽게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ㄷ) 이 사실로부터 우리가 무슨 교훈을 받아야 한다고 ‘바울’은 말하였읍니까?
7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하여 인류 구원의 수석 대행자를 완전하게 만드셨읍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었느니라.]” (히브리 5:8, 9; 2:10) 그가 죽기까지 충성을 지킴으로써 ‘사단’과 그의 악한 사물의 제도의 운명을 결정해 버렸으며, 하늘 왕국 정부를 위한 길을 열어 놓으셨읍니다. 그렇게 하여 대속물이 마련되었고 그것을 통하여 인류가 낙원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읍니다. (누가 23:43)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나타내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그리고 이러한 은혜를 가져오고 그의 승리와 하늘에서의 불멸성을 갖게 해 준 그 믿음을 누가 조금이나마 가엽게 생각하겠읍니까?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렇게 기술하였읍니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형주]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히브리 12:2, 3; 디모데 전 6:13-16.
8.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말하였읍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8 사도 ‘베드로’ 역시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을 때에 즐거워하라고 권고하였읍니다.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편지하였읍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험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베드로 전 4:12-16) 당신도 이러한 태도를 취합니까?
9.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을 때에 흔히 어떠한 보상을 느낍니까?
9 고난을 받을 때에 하나님의 영을 통하여, 진귀하게 하나님의 은총을 느끼는 일이 종종 있읍니다. 곧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자기의 이름과 말씀과 목적을 입증하는 일에 중대한 역할을 담당하도록 요청하셨음을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은 깊은 즐거움을 가져옵니다. 또한 진귀하게 믿음을 느끼는 수도 있읍니다. 그 믿음은 그리스도인들을 더 나은 종으로, 보다 더 활동적인 증인으로, 보다 더 침착한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인이 박해를 어떻게 직면하며, 그에 대하여 어떻게 행하느냐에 달려 있읍니다. 고난이란 그것이 그릇된 일을 시정하는 결과를 가져올 때에 유익한 것입니다.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릇된 행동으로 말미암은 비생산적인 고난은 실로 슬픈 일입니다! 그것의 종말은 더욱 더 비참할 뿐입니다.
10. 박해를 인내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10 그러면 박해를 인내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베드로 전 1:6-9) 박해는 그리스도인 믿음의 질(質)을 시험하고 그리하여 그가 충실하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며, 믿음에 대한 최종적 결과 곧 영혼의 구원을 받게 된다고 ‘베드로’는 말하였읍니다. 그러므로 박해는 가치 있는 목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박해받을 때에 즐거워하였다
11. 사도들은 왜 박해를 받을 때에 즐거워하였읍니까?
11 사도들이 그리스도를 대표한다는 이유로 채찍질을 당하고 투옥을 당하고 기타의 방법으로 박해를 받을 때에 즐거워한 것은 이상할 것이 없읍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그리스도처럼 고난을 받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었으며, 자기들의 구원의 실현을 기대할 수 있었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받으면 불평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노래하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예수께서 죽으신 조금 후에 사도들은 당국자에 의해 감금당하고 채찍으로 맞고,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읍니다. 이러한 일을 당하고 나서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사도 5:41, 42) 사도 ‘바울’ 역시 자기의 시련이 자기에게 하나님께 의뢰하는 법을 가르쳤기 때문에 고난을 즐거워하였다고 말하였읍니다. 박해를 당한 그리스도인들은 일반적으로 더 열정적이고 더 확고하고, 더 열심이 있고 더 성실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12. ‘바울’과 ‘실라’는 어떠한 일을 견디었으며, 고난을 당할 때 그들의 태도는 어떠하였읍니까?
12 한때 ‘바울’과 그의 동료 ‘실라’는 여러 번 채찍질을 당하고 발이 착고에 채워 갇혀 있었읍니다. 밤중에 그들은 기도를 하였으며,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였읍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죄수들은 그들이 노래하는 것을 들었던 것입니다. 투옥이 그들을 즐겁게 해 주었읍니다. 그들의 즐거움은 미래와 관계가 있었읍니다. 그때가 오면 하나님께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모든 사람에게 상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감옥도, 어느 토굴도, 심지어 죽음의 위협도 그리스도인들에게서 그러한 확신을 박탈할 수 없읍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라].”—야보고 5:11.
박해 아래서 즐거워한 현대적인 예
13-15. (ㄱ) 현대 여호와의 증인들은 어떠한 고난을 당했으며, 그들의 태도에 대해 어떠한 말들을 하였읍니까? (ㄴ) 그들이 고난 중에도 즐거워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13 그러기 때문에 오늘날의 여호와의 증인들이 박해를 받을 때에 즐거워할 수 있읍니다. 주로 사람들에 관한 기사를 취급하는 잡지인 남‘아프리카’의 「퍼스낼리티」지에 ‘넬카워드’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불타는 믿음과 그들의 행복감을 설명하였읍니다. 그는 ‘나치’ 강제 수용소가 여호와의 증인들로 붐비던 2차 세계 대전의 암흑시대에 증인들과 접촉한 사람들의 글을 발췌하여 그러한 글을 쓴 것입니다. 그러한 글을 쓴 사람들은 그 당시에는 모두 여호와의 증인이 아니었읍니다. ‘캡틴 에스. 피. 베스트’는 「벤로 인시던트」라는 책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읍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강인성은 대단히 감탄스런 것이었으며, 간수들까지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부분이 1933년 이후에 투옥당하였고, 그들은 구타당하고 고문을 당하고 굶주림을 당하였다. 하지만 내가 만난 사람들은 모두가 다 정직하고 친절하고 대단히 용감하였다. 광신적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으나 그들에게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고무시켰던 신성한 정열이 있었다.”
14 ‘다코우’ 수용소 피수용자였던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그러한 용기, 패기, 덕성을 나타낸 칭찬받을 여호와의 증인들 ··· 그들은 특별한 경의를 받을 만합니다. 그들은 수렁 속의 바위였읍니다.” 그리고 ‘나치’ 치하의 ‘아우쉬비츠’ 수용소 소장이었던 ‘헤스’의 말도 인용할 만한 가치가 있읍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부지런한 남녀들이었다. 사형당하는 것을 보는 사람들 모두가 깊은 감동을 받았고 사형 집행자들까지도 감명을 받았다.” ‘카워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강렬한 행복감은 공포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에서 나온 것이다. 사후에 생명이 있다는 교회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다른 종파의 교인들이 두려워하는 것과는 달리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 여호와의 증인들은 틀림없이 이러한 모든 질문에 대한 해답을 알기 때문에 두려움을 갖지 않을 것이다.”
15 좀 더 근년에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등지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의 박해를 목격한 다른 사람들도 동일한 칭찬을 보내고 있읍니다. ‘시베리아’의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나온 보도에 의하면 여호와의 증인들은 매일 아침 왕국 노래를 부르면서 작업장에 간다고 합니다. 그들이 즐거워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베드로 전 4:14) 하나님으로부터 온 이러한 증거가 그들을 박해 아래서도 행복하게 만들어 줍니다.
도대체 무엇을 즐거워하는가?
16-18. (ㄱ) 여호와의 증인들이 박해 아래서도 즐거워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 설명하십시오. (ㄴ) 그들이 고통을 즐거워하지는 않으므로 그들의 즐거움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16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당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들은 평화롭게 사는 것을 훨씬 더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원칙에 고착한다는 이유로 이 악한 세상이 그들에게 박해를 가져옵니다. 그러나 그들의 공고한 입장은 기쁨을 가져왔읍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편에 굳게 서며, 하나님과 하나님의 조직에 수치를 돌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하여 즐거워합니다. 그들의 즐거움은 성실을 고수한 점에 있읍니다. 예를 들어, 박해자들이 그들의 가옥과 왕국회관을 불사르는 사실은 즐거워할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그들 가운데 머물러 있어서 그러한 손실을 보고서도 하나님께 충성을 지킬 수 있도록 해 준다는 것은 크게 즐거워할 이유가 됩니다.
17 ‘히틀러’ 치하의 독일이나 그의 점령지에서 있었던 바와 같이 아내나 남편이 의를 위하여 박해자들로부터 무자비한 구타를 당할 때에 그러한 잔인성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즐거움을 주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이 혹독한 고난을 당하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악행이 박해 받는 자들을 격분시키지 않았다는 사실, 아내나 남편이 시련하에서도 하나님께 충성을 지켰다는 사실,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의심하지 않고, 고난을 받은 결과 도리어 여호와께 더 가까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에 즐거움을 느끼게 됩니다. 의를 위하여 그러한 비타협적인 입장을 지킨 것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이 작용한다는 증거임을 알기 때문에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을 즐겁게 합니다.
18 현재는 상태가 나아졌지만 불과 수년 전에 ‘말라위’에서 있었던 바와 같이 자기 딸들이 강간을 당하며 도움을 달라고 소리를 치나 속수무책이었을 때에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것을 보고 즐거워하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도 아십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련하에서도 자기의 자녀가 여호와를 믿으며,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은 즐거움의 원인이 됩니다. 고통 그 자체에는 즐거움이 없읍니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운 환경하에서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대표할 자를 불러내셨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이 극난한 가운데서도 하나님 앞에 굳게 서고 충성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참다운 즐거움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보고 즐거워하실 것입니다.—잠언 27:11.
박해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올바른 태도
19, 20. (ㄱ) 박해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태도는 어떠해야 합니까? (ㄴ)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함으로써 악에게 지지 않을 수 있읍니까?
19 그러면, 박해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태도는 어떠해야 합니까? 이해성있는 태도라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박해자들이 ‘사단’ 마귀와 그의 악한 조직에 의하여 악행을 하도록 조종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많은 경우 박해자들은 완전히 속고 있읍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요한 16:2, 3; 고린도 전 2:8)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용서하는 태도여야 하며, 박해자들로 하여금 사람과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을 이해하도록 도우려는 욕망을 가져야 합니다.
20 예수께서는 이렇게 명하셨읍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라].” (마태 5:44, 45) 예수께서는 그러한 것을 실천하셨읍니다. 예수께서는 나무에 못박히신 때에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고 박해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읍니다. (누가 23:34) 예수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였읍니다. ‘스데반’은 돌로 쳐 죽임을 당하는 순간 “주[여호와]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고 기도하였읍니다. (사도 7:60) 사도 ‘바울’은 이렇게 교훈하였읍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로마 12:14, 17-21) 이러한 자세와 태도가 하나님의 승인을 가져다 줍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방법입니다.
21. (ㄱ) 그리스도인의 재산이 파괴된다던가 그 자신이 상해를 입게 될 경우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어떠해야 합니까? (ㄴ) 최악의 상태하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그 문제를 어떻게 볼 것입니까?
21 설사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의 재산을 파괴하거나 그에게 상해를 가한다 할지라도 원수를 갚겠다고 보복할 이유가 없읍니다. 그 재산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그 자신은 하나님의 동료 일군입니다. 법원이 그리스도인을 보호해 주고 상실한 재산을 보상해 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해 주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대로 손실을 당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사람에게나 해를 가하거나 그를 죽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원수갚는 것은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하나님께서 갚으실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태도입니다.
박해 하에서 견딤
22, 23. (ㄱ) 박해를 견디기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일을 할 것입니까? (ㄴ) 폭도들의 위협을 받을 때에 어떻게 하는 것이 좋습니까?
22 박해를 인내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은 여호와께 완전히 의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힘을 주실 것이며, 그를 행복하게 하실 것입니다. (디모데 후 4:17) 그는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역시 시련을 당하고 있을 다른 그리스도인 형제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기도할 때에 박해에 대하여 여호와를 비난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무죄한 자를 박해하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박해하는 자들은 ‘사단’과 그의 악한 조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창조물 앞에서 그의 우주 주권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충성심을 확증하기 위하여 그 박해를 허락하셨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인내함으로써 그러한 방법으로 여호와의 이름과 말씀을 선양하는 것입니다.
23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받으려고 하거나 순교를 당하려고 하지 않으며, 경건치 못한 자들이 폭행을 하도록 자극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는 권고를 받고 있읍니다. (마태 10:16) 예수께서는 한 때 폭도들을 피하셨읍니다. 경우에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위협을 받을 때에 좀 더 친절한 지역으로 이사할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요한 10:31-39.
24.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항상 자기 앞에 간직하려고 할 것이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24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자기 자신의 힘으로 박해를 인내하는 것이 아님과 하나님께서 그에게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을 받도록 허락지 아니하시며, 그것을 인내할 수 있도록 여호와께서 피할 길을 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고린도 후 4:9, 10; 고린도 전 10:13)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죽기까지 충성하는 것이 그가 가야 할 길이겠지만, 여호와께서는 그처럼 혹독한 시련이라도 인내할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여호와를 그의 산성으로 삼음으로써 그리스도인은 어려운 때에 힘을 얻을 것입니다. 부활의 희망, 영원한 생명의 약속 등은 믿음을 강화해 줍니다. 예수에게도 그러하였읍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의지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그러할 것입니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형주]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 12:2) 당신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여호와의 약속을 항상 당신 앞에 간직하십시오.—나훔 1:7; 잠언 18:10.
25. 성실을 지킨 사람은 행복하게도 무엇을 바라볼 수 있읍니까?
25 박해의 시련은 오래 계속되지 않으며,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보상과는 비교도 안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라].” (로마 8:18; 고린도 후 4:17)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을 특권을 가진 당신은 그러므로 모든 시련을 인내하십시오. 당신의 보상은 실로 크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야고보 1:12; 계시 2:10) 바로 당신이 그러한 복된 상을 받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