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절실히 요청되는 특성
다른 사람들의 필요나 복지에 대한 진정한 관심은 오늘날 점점 더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무엇 때문에 이러한 서글픈 상태가 되었는가?
틀림없이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부당한 처우를 받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 대해 관심을 덜 갖게 되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남에게 도움을 주려고 하였다가도 자기의 노력이 오해를 받은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 결과 이제 그들은 “아무 소용없다”라는 태도를 갖는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탐욕적인 사람들의 성공을 선망하기 때문에 그들의 무정한 태도를 본받는다. 그리고 또한 영화, ‘텔레비젼’, 신문 및 잡지에 자주 나타나는 이기심 때문에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덜 갖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관심없는 태도는 흔히 가정 내에서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아내들은 남편들보다도 불면증을 더 많이 겪는다고 한다. 그러나 자기 아내의 이러한 문제에 대해 무관심한 남편들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당신이 남편이라면, 당신도 이 점이나 다른 비슷한 점에 있어서 부족한 점이 있는가?
반면에, 많은 아내들도 자기 남편들에 대해 진정한 관심을 나타내는 데 있어서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당신이 아내라면, 당신은 자신의 사치를 남편의 필요보다 앞세우는 사람인가? 그러한 관심없는 태도는 남편의 부담을 가중시키며, 어떤 경우에는 심장병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리고 자녀들의 습성에 대해 무관심한 부모들이 또 얼마나 많은가? 청소년들의 책임이 전연 없다는 말이 아니지만, 부모들의 냉담함이 그 근본 문제가 되어 있는 경우는 너무나 많다.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이 결핍되어 있는 분야는 그 외에도 많이 있다. 그것은 좋지 않은 예의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여자들은 백화점에서 물건을 살 때에 무례하게 사람들을 밀치고 앞을 선다. 청소년들은 노인들이나 허약한 사람들을 밀치고 간다. 그리고 낙서를 하고, 기물을 파괴하는 등의 행위는 다른 사람의 재산과 이익에 관심이 전혀 없다는 표시가 아니고 무엇인가?
일부 사람들은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관심을 나타낸다. 그들은 가까운 벗이나 자기 가족이 관련되었을 때에만 관심을 표시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국적, 피부색, 혹은 인종의 경계 내에서만 관심을 보인다. 그리하여 많은 백인들은 흑인들의 딱한 처지에 대해 무관심하며 많은 흑인들은 백인들에게 닥친 일에 대해 무관심을 나타낸다. 그리고 도로상에서 어떤 사람이 불량배들에게 맞고 있는 데도 사람들이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말 한마디 혹은 손하나 까닥 않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는 신문 기사를 우리는 너무나 자주 읽고 있다.
사실상, 다른 사람에 대해 관심이 없는 그러한 모든 태도는 최초의 인간 가족으로까지 소급한다. ‘아담’이 금단의 과실을 먹은 이유에 대해 ‘하와’에게 책임을 돌리면서, 자기 아내를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신 여자”라고 칭하였을 때에 자기 아내의 느낌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하는 식의 표현을 들어 보지 못한 사람이 누구인가? 그 냉담한 말은 ‘아담’의 첫 아들 ‘가인’이 한 말이다. 하나님께서 그가 죽인 아우 ‘아벨’의 행방을 물으시자 ‘가인’은 그렇게 대답하였던 것이다. 물론, 살인할 생각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증오심을 품는 것은 어떠한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불공평한 대우를 받을 때에 그렇게 되기 쉽다. 그러나 당신은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는 성서의 말을 아는가?—창세 3:12; 4:3-11; 요한 1서 3:15.
의심할 바 없이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관심을 보인 이상적인 예는 예수께서 비유 중에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일 것이다. 그 사람은 두명의 뽐내는 종교인들과는 두드러지게 대조되어 있다. 두 종교인은 강도에게 얻어 맞고 강탈을 당하여 길가에 넘어져 있는 동료 인간에게 동정심이나 감정이입을 나타내지 않았던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진정한 관심을 나타내었다. 그는 피해자의 상처를 치료해 주고, 그를 당나귀에 싣고 여관으로 데려갔으며, 비용을 자기가 지불하겠다고 하였다.—누가 10:29-37.
왜 그리 중요한가?
다른 사람에 대해 관심을 나타내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사랑하는 것같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즉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곤경에 처해 있을 때에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관심을 나타내는 것을 우리는 감사히 생각한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곤경에 처할 때에 우리도 관심을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마가 12:31; 누가 6:31.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나타내게 되면 우리가 좋은 양심을 갖게 된다. 그것은 또한 우리 임무를 다했다는데 대한 만족감을 갖게 한다. 그것은 일종의 주는 것이며, 주는 일에는 커다란 행복감이 따른다.—사도 20:35.
작은 일에나 큰 일에 관심을 보이면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이룩하게 된다. 우리는 사람들이 위험에 처할 때에, 병을 앓을 때에 또는 기타 곤경을 당할 때에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적인 관계에서도 관심을 보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자동차 운전을 할 때에 비이기적인 관심이 있다면 사고를 내지 않도록 조심할 것이다. 다른 차를 방해하지 않을 것이며, 곁에 있는 차가 중앙 노선으로 들어오도록 자기 차의 속도를 늦춘다든가 하는 등의 사려깊음을 나타낼 것이다.
우리가 ‘아파트’에 살고 있다면 어떠한가? 그렇다면, 전축, ‘라디오’, ‘텔레비젼’ 등을 너무 크게 틀지 않음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보일 수 있다. 또한 밤늦게까지 너무 시끄러운 ‘파아티’를 갖지 않도록 조심할 것이다. 그리고 겨울이라면 우리집 앞길에 어름이나 눈이 쌓이지 않도록 함으로써 관심을 보일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보인 훌륭한 사례를 독일의 여호와의 증인들에게서 볼 수 있다. 1945년에 그들이 강제 수용소에서 석방되었을 때에 있었던 예를 한 가지만 들어보자. 그들 220명이 엄중한 감시를 받으면서 ‘작센하우젠’ 강제 수용소를 나왔을 때에 120‘마일’의 기나긴 여행을 해야 하였다. 환경상 그들은 무리를 지어 여행하였다. 그들은 손수레를 몇개 구하여 그 위에 그들 중 가장 허약한 자들을 태우고 강한 자들이 수레를 끌었다. 그 결과 10,000명 이상의 재소자들이 생명을 잃은 그 죽음의 행진에서도 여호와의 증인들은 한 사람도 죽지 않았던 것이다.—「‘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라’」.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이 이웃 사람들의 집을 자주 방문하는 것은 비이기적인 관심 때문이다. 그들은 지금이 “마지막 때”임을 알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너무 늦기 전에 안전한 장소로 도망하라고 권고한다. 이 점에 있어서 그들은 고대 ‘롯’과 같다. ‘롯’은 자기 사위들에게 ‘소돔’과 ‘고모라’에서 도망하라고 경고하였던 것이다. 기록에 보면, 그의 말을 “그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롯’은 농담을 한 것이 아니었으며, 오늘날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도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다!—창세 19:12-29; 계시 18:4.
그러므로, 우리는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여호와의 증인들이 나타내는 관심으로부터도 유익을 받도록 권고하는 바이다. 그들은 당신이 다가오는 “큰 환난”를 살아 남아 영원한 생명을 얻을 기회를 갖도록 하기 위해서 당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