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속에 소금을 두”라
1. 우리는 무엇으로 “말”의 맛을 내어야 하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소금은 우리의 육체적인 건강에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숭배자들로 이루어진 조직체의 건강에도 반드시 소금이 필요합니다. 제1세기 그리스도인 회중의 영적 건강을 앞장 서서 보호하였던 사도 ‘바울’의 충고는 이 사실과 일치합니다. 아직 개인적으로 사귈 기회가 없었던 한 회중에 편지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읍니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로새 4:6.
2. 그러므로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여 악귀들을 쫓아 내지 못하도록 “어떤 자”를 금하려고 한 사도들과 관련하여 어떠한 질문이 생깁니까?
2 이 말은 사도 ‘요한’이 자기의 스승 예수 그리스도의 주의를 이끌었을 때 사람들의 말에 얼마나 이러한 “소금”이 사용되었느냐 하는 점에 의문을 느끼게 합니다. 그와 관련된 내용은 이러합니다.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마가 9:38.
3, 4. (ㄱ) 그 때 ‘요한’은 아마 무엇을 기대하였을 것이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요한’의 설명에 어떠한 이기적인 요소가 나타나며, 그가 어떠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려 줍니까?
3 이 귀절을 보면 ‘요한’은 그리스도인 방식으로 그들을 가르치시는 스승으로부터 칭찬의 말을 듣거나 그분이 등을 두드리며 칭찬해 주기를 기대하였던 것 같습니다. ‘요한’은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근처 북부 지방에서 특히 고집센 악귀를 쫓아내신 경우를 기억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는 무능력한 악귀들린 자들로부터 더러운 영들인 악귀를 쫓아낼 권한을 줄 수 있는 예수의 권리를 자신이 보호하고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요한’의 견해로 볼 때는 예수로부터 그러한 권한을 인정받지 않은 사람은 악한 영들인 악귀를 쫓아 내기 위하여 그분의 강력한 이름을 사용할 권리가 없었읍니다. 그러나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악귀를 쫓아내지 못하게 하려고 ‘요한’이 제시한 이유를 보면 이기적인 요소가 엿보이고 있읍니다. ‘요한’은 그가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그들이 금지 조처를 취했다고 말하였읍니다.
4 “우리”라는 말은 ‘요한’이 예수만이 아니라 열두 사도들 모두를 의식하고 있었음을 지적합니다. 이전에 예수께서는 열 두 사도들을 보내어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고, 악귀들린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것을 포함하여 병고치는 일을 하게 하셨읍니다. (마태 10:1-8; 마가 6:7-13) 그러므로 ‘요한’은 사도들만이 병고치는 자들로 불리울 특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읍니다.
5. 예수께서는 분개한 열성스러운 사도들을 지도하기 위하여 그 “어떤 자”와 관련하여 어떠한 말씀을 하셨읍니까?
5 결국 ‘요한’과 그의 동료 사도들은 ‘그 “어떤 자”는 악귀들을 쫓아내는 데 스승의 이름을 사용할 아무런 권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그렇게 함으로써 분명히 예수와 그 사도들인 우리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였읍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문제를 그런 식으로 보시지 않았읍니다. 성서에는 그분이 분개한 열성스러운 사도들을 승인하셨다는 기록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가 9:39-41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6.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여 악귀들을 쫓아냄으로써 그 “어떤 자”는 그 이름과 관련하여 어떤 일을 수행하고 있었읍니까?
6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여 악귀들을 쫓아내지 못하도록 이 “어떤 자”를 금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의 이름에 모독을 돌리고 있었읍니까? 그는 메시야의 이름을 더럽히거나 그 이름에 수치를 돌리거나 좋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었읍니까? 그는 후에 ‘유대’인 대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이 예수의 이름을 악귀를 쫓아내는 주문 혹은 마술적인 이름으로 사용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사용하지 않았읍니다. (사도 19:13-16) 그 악귀는 그 “어떤 자”에게 ‘예수는 내가 알지만 너는 누구냐?’ 하고 말하지도 않았고, 악귀들린 사람으로부터 떠나기를 거절하지도 않았읍니다. 이 “어떤 자”는 예수의 이름에 진정한 믿음을 두었으며 악귀들을 쫓아내는 데 성공하였읍니다. 이러한 행로를 통해 그는 사실상 예수의 이름의 능력을 나타냄으로써 그 이름에 영예를 돌리고 있었읍니다.
7. 이 “어떤 자”가 예수와 그분의 사도들을 동반하지 않았을지라도 그들을 옹호한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7 그러므로 예수와 그의 사도들을 따르지 않고 있었던 이 “어떤 자”는 그들을 반대하거나 그들의 증거 활동으로부터 주의를 이탈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었읍니다. 논리적으로 그가 그들을 반대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을 동반하지 않고 있었을지라도 그가 그들의 편을 들고 있었음에 틀림 없읍니다. 예수의 이름을 높히고 찬양하게 하는 기적들을 행하고 있다가 그 다음 순간에 예수를 나쁘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 사람이 강력한 기적을 통해 그 이름에 영예와 존경을 나타내다가 그 후에 개인적으로 그 이름을 좋지 않게 말하고 그 이름을 가진 분과 그의 사도들을 반대하는 활동을 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비이치적이며 조리에도 맞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그 사람에게 더 이상 금지 조처를 취해서는 안되었읍니다.
8. 이 “어떤 자”는 어떠한 원칙에 근거하여 상을 받게 될 것입니까?
8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그 사람은 그가 행하고 있는 일에 대한 상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분명히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가망이 있었읍니다. 그는 상을 받을 만하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일 즉 목마른 사람이 그리스도의 제자이기 때문에 그에게 물 한 그릇을 주는 것과 비교되는 행동을 하고 있었읍니다. 그러한 행동은 어떤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지극히 사소한 일로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그것이 커다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물 한 그릇을 주는 자가 예수를 메시야로서 지지하며 그리스도의 활동을 지지하기 위하여 자기의 능력껏 봉사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후에 예수께서 정하신 다음과 같은 법칙이 여기에도 적용됩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태 25:40) 왕인 예수 그리스도는 그에 대하여 반드시 상을 베푸실 것입니다.
고의적으로 다른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
9. 예수의 사도들의 간섭이 그 “어떤 자”에 미친 영향과 관련하여 어떤 점이 중요합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9 사도들이 “어떤 자”로 하여금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여 악귀들을 더 이상 쫓아내지 못하게 하려고 할 때 그들이 그에게 한 말이 은혜로우며 소금으로 맛을 낸 것 즉 맛이 좋은 것이었는지는 의심스럽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관심사는 사도들의 스승으로부터 안된다는 말을 듣지 않은 상태에서 선한 일을 하고 있던 그가 사도들의 언행 때문에 걸려 넘어졌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예수께서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마가 9:42.
10. 그러한 “소자” 중 하나를 고의적으로 실족시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과 동일하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10 실족하는 사람이 ‘소자’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점이 이 경우에 있어서 실족케 하는 심각성을 감소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믿는 이 소자 중 하나”가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 믿는 사람을 가리킬 것입니다. 그 “소자”들은 그러한 믿음 때문에 생명의 길에 있게 되었읍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사려 깊음을 나타내지 않고 고의적으로 영원한 생명의 길에 서 있는 ‘소자’의 감정을 상하게 하여 생명의 길에서 걸려 넘어지고 멸망되게 한다면 그것은 살인 행위에 해당을 것입니다. 그것은 실족한 자에 대한 사랑의 부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11. 다른 사람을 무심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은 어떤 점에서 고의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과 다릅니까?
11 요한 1서 3:15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읍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새에 무심코 다른 사람을 불쾌하게 하는 일이 있을지 모르지만—이것도 아주 심각한 것이다—우리는 이로 인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그리스도인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는 일이 없기를 원합니다. 그러한 죄를 지었음을 알게 되면 그에 대해 적절한 주의를 기울이고 보상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동료 신자의 영적 복지에 무관심을 나타내거나 전혀 관심을 나타내지 않고 각자는 양심대로 할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자기의 권리를 자기가 원하는 대로 온전히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다른 사람의 영원한 생명 및 그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무시하는 이기적이고 사랑이 없는 태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신자를 위해서 돌아가셨는데도 그는 그러한 신자의 가치를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로마 14:15.
12. 예수께서는 고의적으로 다른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사람에게 분노하심을 어떤 말로 나타내셨읍니까?
12 그리스도인이라 공언하는 사람이 “믿는 이 소자 중 하나”가 넘어지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함으로써 그 사람의 영원한 생명을 참으로 무가치하게 평가하고 있음을 나타낸다면 어떠합니까?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다른 사람을 고의적으로 넘어지게 하는 그 사람의 생명을 중요하게 생각하시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을 고의적으로 실족케 하는 사람에 대하여 분노하신다는 점을 말씀하셨읍니다. 어떻게 그 점을 표현하셨읍니까? 그분은 그처럼 범죄적인 무관심을 나타내는 사람은 물 위로 떠오르지 못하도록 큰 맷돌을 달아 깊은 바다에 던져 넣는 것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더 낫고 안전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읍니다.
13. 실족하게 하는 것과 관련하여 우리는 특히 무엇을 경계하여야 합니까?
13 그러므로 아무리 비천하게 보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실족하게 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동시에 다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함으로써 우리가 실족하게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자신의 전망을 아주 가치있게 보기 때문에 자신을 실족시키지 않도록 경계합니까? 자기 자신을 실족케 한다고요? 그렇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읍니까?
14. 예수께서 부가하신 경고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가 어떻게 자신을 걸려 넘어지게 할 수 있읍니까?
14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시키는 점과 관련하여 말씀하신 후에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은 경고의 말씀을 부가하셨읍니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게헨나’]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게헨나’]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게헨나’]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마가 9:43, 45, 47-49, 새번역 참조.
15. 예수께서 말씀하신 ‘게헨나’는 무엇이었으며, 그분은 무엇의 상징으로서 그것을 사용하셨읍니까?
15 위에 언급된 경우에서 예수께서는 불에 의한 멸망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예수 당시에 그분이 언급하신 ‘게헨나’ 즉 ‘힌놈’의 골짜기는 ‘예루살렘’의 남쪽 및 남서쪽에 자리 잡고 있었읍니다. 그분의 말씀은 이 ‘게헨나’가 그 도시의 쓰레기 소각장으로 사용되었고, 부활의 소망을 가진 영예로운 매장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되는 범죄자들의 시체가 거기에 던져졌음을 확증해 줍니다. 시체가 불속에 떨어지지 않고 ‘게헨나’의 불에 의해 따뜻해진 경사진 곳이나 암벽의 튀어나온 부분에 떨어진다면 그것은 부패되고 거기에서 생긴 구더기들이 그것을 먹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도시의 쓰레기장에 던져진 것들이 완전히 처분되도록 불이 밤낮 계속 타고 있었읍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유대’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게헨나’]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라고 말씀하신 경우에서처럼 ‘게헨나’는 영원한 멸망을 상징하게 되었읍니다.—마태 23:33, 새번역 참조.
16. ‘게헨나’에 던져진 사람들은 어떻게 생명이나 하나님의 왕국으로 들어가지 않습니까?
16 ‘게헨나’로 들어갈 것이란 선고를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 가지 못합니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천적 통치에 참여하거나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 기간중 하나님의 왕국의 지적 영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게헨나’에 들어가도록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사람들은 그들이 모든 신체 기관을 갖추고 있을지라도 결코 생명을 얻을 수 없읍니다. 그러므로 ‘게헨나’는 하나님의 불리한 심판에 의한 무존재, 멸절, 멸망을 상징합니다. 예수 당시의 위선적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스스로 걸려 넘어져 ‘게헨나’로 들어간 것처럼 오늘날의 헌신하고 침례받은 그리스도인들도 스스로 걸려 넘어져 하나님으로부터 ‘게헨나’ 즉 영원한 멸망의 선고를 받을 수 있읍니다. ‘가룟 유다’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17. ‘가룟 유다’는 어떻게 스스로 걸려 넘어져 도둑질을 하였읍니까?
17 이 ‘그리욧’의 ‘유다’는 예수와 그의 열 두 사도의 회계를 맡은 사람이 되었읍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는 돈궤에 들어 있는 돈을 탐내게 되었읍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손을 넣어 그의 탐욕적인 눈이 보는 것을 훔쳐내고 착복하였읍니다. 그는 눈과 손으로 하여금 자신을 실족케 하여 도둑질을 하게 되었으며 심지어 여호와의 메시야로부터도 훔치게 되었읍니다.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닷새전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베다니’에서 그분을 위해 잔치가 베풀어졌을 때 ‘유다’는 자선 사업과 관련된 위선적인 말을 하였읍니다. 이와 관련하여 이러한 기록이 있읍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한 12:6.
18. ‘유다’는 자기의 신체 기관이 그를 걸려 넘어지게 함으로써 결국 무엇에 빠졌으며, 그 과정은 어떠하였읍니까?
18 결국 ‘유다’는 더 많은 경제적인 이득을 추구한 나머지 자기 발로 걸어가서 대제사장들과 성전 책임자들과 만나서 은 삼십에 그의 주 예수를 팔기로 약속하였읍니다. (누가 22:1-6) 그 다음에 그 돈을 손에 쥐기 위하여 ‘유다’의 발은 유월절 밤에 일단의 무장한 사람들을 ‘겟세마네’ 동산으로 인도하여 예수를 체포하게 하였읍니다. (누가 22:47, 48; 마가 14:10, 11, 43-46; 마태 26:14-16, 47-50; 27:3-5) ‘유다’는 반역적인 행동을 한 후 자신의 손에 있는 그 은 삼십을 탐욕적인 눈으로 보면서 잠시 동안은 만족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의 눈과 손과 발이 협동하여 발생케한 일을 이전 상태로 돌아가게 할 수는 없었읍니다. 그는 이러한 신체 기관들이 그를 걸려 넘어지게 함으로써 용서받을 수 없는 죄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마태 27:4) 그는 절망하여 자살하였읍니다. 창자가 흘러나온 그의 시체가 ‘예루살렘’에 있는 문자적인 ‘게헨나’에 던져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영혼”은 ‘게헨나’로 상징된 곳에서 멸망되었읍니다. (사도 1:16-19; 마태 10:28) 예수께서 그를 “멸망의 자식”이라고 말씀하신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읍니다.—요한 17:12.
19. 예수께서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무슨 의미였읍니까?
19 예수께서는 어떤 제자가 자기의 손, 발, 눈으로 하여금 그 자신을 실족하게 하여 ‘게헨나’에 빠지게 하는 것에 관한 토론을 다음과 같은 말로 결론지으셨읍니다.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마가 9:49) 다시 말하자면 자기의 신체 기관이 자신을 실족케 하여 돌이킬 수 없이 넘어지게 되는 사람은 누구나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소금 치듯함을 받게 하는 그 불은 예수께서 바로 전에 말씀하신 “불” 즉 ‘게헨나’의 불이었읍니다. 이것은 소금 치듯함을 받는 사람에게 무엇을 의미할 것입니까? 사람에게 소금을 뿌린 것과는 다를 것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멸망을 의미할 것입니다. 고대의 ‘소돔’과 ‘고모라’ 도시는 사해(혹은 염해) 근처의 하늘에서 내려오는 불이 그 위에 쏟아졌을 때 즉 “소금 치듯함을 받”았을 때 멸망되었읍니다. (누가 17:28, 29)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깨뜨릴 수 없는 “소금 언약”에 고착하시는 것처럼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걸려 넘어진 사람들을 다루시는 이 원칙에 고착하십니다.—레위 2:13; 민수 18:19; 역대 하 13:5.
20.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지 않도록 우리는 잘못한 손이나 발, 눈을 어떻게 제거합니까?
20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는 어떻게 잘못하는 손이나 발을 잘라내거나 잘못하는 눈을 빼어 버릴 것입니까? 우리가 문자적으로 그렇게 한다 할지라도 육체적인 손, 발, 눈 등을 통해서 표현된 좋지 않은 충동이 시정되거나 제거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잘라내거나 빼어 버리는 일은 상징적으로 행해져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의 충고를 적용을 수 있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읍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무엇을?]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골로새 3:5, 6.
21. 우리는 어떻게 이와 같이 ‘죽이는’ 일을 합니까?
21 그처럼 ‘죽이’는 일을 하기 위하여 땅에 있는 우리의 문자적인 신체 기관에 대하여 자제력을 행사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눈이 음란한 작품을 읽거나 악한 영화 혹은 ‘텔레비젼’ ‘프로’를 보지 않도록 억제해야 하며 도둑질을 하거나 부도덕한 행위를 하는 데 손이 사용되거나 발의 충동에 따라 암시적인 춤을 추고 ‘이 세상 친구’와 함께 유혹 지대로 가는 것을 금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우리는 “세상에 있는 것들”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대한 사랑을 죽여야 합니다.—요한 1서 2:15-17; 잠언 6:16-19.
우리 속에 두어야 할 “소금”
22, 23. (ㄱ) 마지막으로 예수께서는 어떠한 성격의 소금 치는 일에 대해 언급하셨읍니까? (ㄴ) 예수께서는 그의 사도들이 그들 속에 어떠한 종류의 소금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으며, 왜 그들에게 그러한 말씀을 하셨읍니까?
22 예수께서는 좋지 않은 면으로 소금을 언급하는 것으로 자기의 토론을 끝맺지 않으셨읍니다. (마가 9:33-49) 그분은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읍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마가 9:50.
23 양념으로서의 문자적인 소금은 일반적으로 품질이 좋습니다.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고 ‘욥’(6:6)은 질문하였읍니다. 확실히 소금은 식품을 더 맛있게 할 수 있읍니다. 그러나 예수 당시에 보통 사용되던 소금은 짠 맛을 잃게 되면 이질적인 혼합물을 제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요리용이나 식용으로는 부적합하였읍니다. 그것을 사람이 먹을 수 있게 할 수가 없었읍니다. 적절하게도 예수께서는 소금을 실례로 사용하셨읍니다. 그분은 자기의 열 두 사도들에게 “너희 속에 소금을 두”라고 말씀하셨읍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왜 그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읍니까? ‘가버나움’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있었던 토론에서 그들이 그들 속에 이러한 훌륭한 상징적 소금이 부족함을 나타내었기 때문입니다.
24. 그러한 상징적인 “소금”은 무엇입니까?
24 그러한 소금은 다른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서 좋은 맛을 내도록 행동을 하게 하는 개인 성품의 질을 상징합니다. 그러한 소금은 그 사람의 말이 다른 사람에게 더 맛있는 것이 되게 하고 삼키기 쉽게 하며 더 잘 소화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소금은 그것을 가진 사람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들게 합니다. 즉 그가 옆에 있기를 원하게 만듭니다.—잠언 16:21, 23.
25. 심지어 문자적인 소금을 같이 먹는 것도 어떤 유익한 결과를 가져 왔읍니까?
25 주인과 손님의 경우처럼 함께 소금을 먹는 것은 그 사람들이 상호간에 좋은 느낌을 갖게 하고 훌륭한 관계를 맺게 합니다. 소금은 고용인에게 급료로 주어지기도 하였읍니다. (에스라 4:14) 사도 ‘바울’은 우리의 성품의 특성으로서 그러한 상징적인 소금을 갖는 것이 가치있는 훌륭한 것임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읍니다. “외인을 향하여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기회를 사라, 난외주]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골로새 4:5, 6) 잠언 15:1도 살펴보십시오.
26. 우리 안에 상징적인 “소금”을 둔다면 사도들에게 하신 예수의 어떠한 교훈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며, 그분의 제자들인 우리에게 어떠한 결과를 가져 올 것입니까?
26 우리 속에 “소금”을 두고 그것으로 우리의 말의 맛을 내면 예수께서 열 두 사도들과의 토론을 끝내시면서 “서로 화목하라”고 하신 말씀을 실천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마가 9:50) 우리가 재치있고, 사려깊고, 건전하고, 화평케 하는 말과 행동을 한다면 확실히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서로간의 평화로운 관계가 증진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있음을 명백히 밝혀 줄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며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이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 5:22; 야고보 3:17)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에 관한 예수의 교훈을 순종하는 것은 높은 지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경쟁과 반목이 심하고, 붕괴되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가 참 그리스도인 제자임을 알리는 표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아래 조직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를 함께 연합시킬 것입니다.
[521면 삽화]
‘자신 속에 소금을 갖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맛을 주도록 행동하게 하는 특성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