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예지하신 일들
하나님께서 예지와 예정을 행사하신 것은 성서 기록 전체를 통하여 시종일관 하나님 자신의 목적과 뜻에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의 목적은 성취가 확실하기 때문에, 그분은 자기의 목적의 궁극적 실현이라는 결과를 예지하시고 예정하실 수 있으시며, 더 나아가서 그러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필요한 세부적 단계까지도 예정하실 수 있으시다. (이사야 14:24-27)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미래의 사건이나 행동에 관한 자신의 목적을 “정”하셨다 혹은 “경영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열왕 하 19:25; 이사야 46:11) 위대한 토기장이로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목적과 일치시켜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며(에베소 1:11),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의 선을 위하여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 (로마 8:2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시는 것은 특별히 하나님 자신의 예정하신 목적에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이사야 46:9-13.
하나님께서 첫 인간 남녀를 창조하였을 때, 그들은 완전하였었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창조 사업의 결과를 돌아보시고 “심히 좋았더라”라고 하셨다. (창세 1:26, 31; 신명 32:4) 하나님께서는 인간 부부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하는 노파심에서,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근심하신 것이 아니라, 성서 기록은 하나님께서 “안식하시니라”라고 알려 준다. (창세 2:2)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 있으셨다. 왜냐 하면 그분은 전능하신 분이시며 지고한 지혜의 소유자이시기 때문에, 어떠한 미래 행동이나, 환경이나, 불의의 사태라 할찌라도, 그분의 최고 주권자로서의 목적을 실현시키는 데,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이나 타개할 수 없는 문제가 전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역대 하 20:6; 이사야 14:27; 다니엘 4:35.
사람들의 반열에 대한 예지
하나님께서 어떤 집단, 국가, 혹은 대다수의 인류가 취할 행로를 예지하시고, 그에 따라 그들의 미래 행동의 기본 노선을 예언하시며, 스스로 그에 부합하는 적절한 행동을 취하실 것을 예정하시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고 하여 그러한 예지나 예정이 어떤 집단이나 부류에 속한 개개인들에게서 그들이 취할 행로를 자유로이 선택할 여지마저 박탈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서, 그 점을 고찰해 보자.
‘노아’의 때의 홍수 이전, 여호와께서는 수많은 인간 및 동물들의 생명을 잃게 할 멸망을 일으키시려는 자신의 목적을 선포하셨다. 그러나 성서 기록이 알려 주는 바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결정을 하신 것은 그러한 행동을 자초하는 여건이 충분히 조성된 후였다. 그에 더하여 “인생의 마음”을 아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는 조사해 보시고 “[인류의]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셨다. (역대 하 6:30; 창세 6:5)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와 그의 가족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멸망을 피하였다.—창세 6:7, 8; 7:1.
‘이스라엘’ 민족의 경우도 비슷하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므로써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셨지만, 약 40년 후, 그 민족이 약속의 땅의 경계에 당도하였을 때, 그들이 국가적으로 언약을 어길 것이며,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될 것임을 예언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예지가 이미 공공연히 나타나기 시작한 국가적인 불손과 반항이라는 사전 근거없이 행사된 것은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날에 나는 그들이 상상하는 바를 아노라” 하고 말씀하셨다. (신명 31:21; 시 81:10-13) 증가 일로에 있는 불법 가운데서 그러한 명백한 경향이 향하고 있는 결과를 하나님께서는 예지하실 수 있으셨으며, 마치 어떤 사람이 저질(低質)의 재료와 조잡한 기술로 지어진 날림 건물이 쉽게 무너질 것이라고 예지한다고 하여 그 사람에게 그러한 붕괴에 대한 책임이 없는 것처럼, 단순히 하나님께서 예지하셨다는 사실 때문에 그분께 그 문제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예언자들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심판의 예언적 경고를 발하였는데, 이 모든 것은 기존의 조건 및 마음의 태도라는 기초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시 7:8, 9; 잠언 11:19; 예레미야 11:20) 그러나 이 경우에도 어떤 개인들은 또 다시 하나님의 충고와 징계, 경고에 응답하여 그분의 은총을 획득할 수 있었으며 또 그렇게 하였다.—예레미야 21:8, 9; 에스겔 33:1-20.
하나님의 아들께서도 인간의 마음을 판독(判讀)하실 수 있으셨는데(마태 9:4; 마가 2:8; 요한 2:24, 25),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예지의 능력을 부여받아 미래의 상태와 사건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 등을 예언하셨다. 그는 한 반열로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닥칠 ‘게헨나’의 심판을 예언하셨으나(마태 23:15, 33), 사도 ‘바울’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로 말미암아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 개개인이 멸망받도록 운명지어졌다고는 말하지 않으셨다. (사도 26:4, 5) 예수께서는 회개하지 않는 ‘예루살렘’이나 그외의 다른 도시의 주민에게 임할 화를 예언하셨지만, 그의 아버지께서 그러한 도시에 사는 각 개인들이 그러한 수난을 꼭 당하도록 예정하셨다고 지적하지는 않으셨다. (마태 11:20-23; 누가 19:41-44; 21:20, 21) 그는 또한 인류의 경향과 마음의 태도가 인도하는 방향을 예지하시고 “사물의 제도의 결말”의 때에 인간 중에 성행할 상태와 하나님의 목적의 확충된 실현을 예언하셨다.—마태 24:3, 7-14, 21, 22.
개인들에 대한 예지
하나님의 예측 가운데는 반열들에 대한 여지가 들어 있는 외에도, 어떤 개인들이 특별히 포함되어 있다. 이들 중에는 ‘에서’와 ‘야곱’,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바로’, ‘삼손’, ‘솔로몬’, ‘예레미야’, 침례자 ‘요한’, ‘가룟 유다’ 및 하나님 자신의 아들이신 ‘예수’가 포함된다.
‘삼손’, ‘예레미야’ 그리고 침례자 ‘요한’의 경우,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출생 전부터, 예지를 행사하셨다. 그러나 그러한 예지는 그들의 최후 운명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특별한 규정을 짓지 않고 있다. 그 대신, 그러한 예지를 근거로 여호와께서는 ‘삼손’은 ‘나실’인의 서약에 따라 생활할 것과 ‘불레셋’ 사람들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출하는 일을 주도할 것임을 예정하셨고, ‘예레미야’는 예언자로서 봉사할 것이며, 그리고 침례자 ‘요한’은 메시야의 선구자로서 준비사업을 수행할 것임을 예정하셨다. (사사 13:3-5; 예레미야 1:5; 누가 1:13-17) 그들이 그러한 특권으로 크게 은총을 입긴 했으나, 이것이 그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획득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며, 또는 심지어 (이 세 사람은 끝까지 충성하였지만) 이들이 죽기까지 충성을 지킬 것이라는 사실의 보증도 아니었다. 이와 비슷하게,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여러 아들들 중에 ‘솔로몬’이라는 아들이 있을 것을 예언하셨고, 이 ‘솔로몬’이 전을 건축하는 일에 사용될 것임을 예정하셨다. (사무엘 하 7:12, 13; 열왕 상 6:12; 역대 상 22:6-19) ‘솔로몬’이 이러한 방법으로 은총을 받았고 성경 가운데 어떤 책을 기록하는 특권까지 받았지만, 그는 말년에 배교의 구렁텅이에 빠져들고 말았다.—열왕 상 11:4, 9-11.
‘에서’와 ‘야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예지는 그들의 영원한 운명을 고정시켜 놓지 않았다. 그 대신, 이들 형제를 각각 계승하는 민족 집단 중, 어떤 집단이 더 우월한 위치를 점할 것인지를 확정 혹은 예정하였다. (창세 25:23-26) 이렇게 미리 예견된 우세(優勢)는 ‘야곱’이 장자의 권리를 획득하게 될 것임을 지적하였으며, 그 장자의 권리에는 ‘아브라함’의 씨가 출현할 가계를 이루는 특권이 수반되었다. (창세 27:29; 28:13, 14) 이러한 방법으로 여호와께서는 사람들의 기대에 부합되는 일반관습이나 절차에 구애됨이 없이, 용도에 따라 개인들을 자유로이 선택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다. 하나님께서 임명하시는 특권은 업적에 따라 분배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아무도 자기는 그러한 특권에 대한 ‘권리를 취득’하였으며 또 그러한 특권은 자기에게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사도 ‘바울’은 한때 ‘이스라엘’만을 위하여 보존된 것처럼 보이던 특권들이 하나님의 과분하신 친절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이방 나라들에게도 허락하실 수 있으셨던 이유로 말하는 가운데 그 점을 강조하였다.—로마 9:1-6, 10-13, 30-32.
여호와께서 “‘야곱’[‘이스라엘’]을 사랑하고 ‘에서’[‘에돔’]는 미워하였다”는 말을 사도 ‘바울’이 인용한 것은 ‘야곱’과 ‘에서’의 때로부터 먼 훗날에 기록된 말라기 1:2, 3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성서는 여호와께서 이 쌍동이 형제들에 대하여 그들의 출생 이전부터 그러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인자의 영향에 따라 임신기간 중, 태아의 일반적 성격이나 기질이 대부분 결정된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확립된 사실이다. 여호와께서 그러한 인자(因子)의 특성을 식별하실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로, ‘다윗’은 여호와께서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보셨다고 말한바 있다. (시 139:14-16; 또한 전도 11:5 참조) 그러한 하나님의 통찰력이 여호와께서 이들 두 아이에 대하여 예정하실 때,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였었는지는 단언할 수 없겠으나, 하여간 여호와께서 ‘에서’를 대신하여 ‘야곱’을 택하셨다는 사실 자체가 ‘에서’나 그의 후손들인 ‘에돔’ 족속에게 멸망의 운명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에서’가 눈물로써 “번의(翻意)”를 간구한 것은 장자의 특별한 축복이 전적으로 ‘야곱’에게만 있으리라는 그의 아버지 ‘이삭’의 결정을 번복시키려는 무익한 시도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은 ‘에서’가 하나님 앞에서 물질적인 태도에 대하여 일말의 회개의 빛도 보이지 않았음을 암시한다.—창세 27:32-34; 히브리 12:16, 17.
그러므로, 어떤 개인의 출생 이전에 예지가 행사된 이러한 경우, 이것과 하나님의 계시된 성품 그리고 하나님의 선포된 표준과의 사이에 아무런 상호모순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 어떤 개인들이 자기들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행동하도록 강제하셨다는 아무런 암시도 없다. ‘바로’나 ‘가롯 유다’의 경우, 그리고 하나님 자신의 아들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들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여호와의 예지가 행사되었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이들 개개인의 경우는 하나님의 예지 및 예정과 관계되는 몇 가지 원칙을 예시(例示)해 준다.
그러한 원칙 중의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태와 사건을 유발시키거나 또는 발생하도록 허용하시므로써 혹은 그러한 개인들이 하나님의 영감받은 소식을 듣도록 만드시므로써 그들을 시험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결과적으로 자유 선택권을 행사하여 결정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되며, 따라서 자기들의 확정적인 심적 태도를 반영하게 되어, 여호와께서 그것을 판독하실 수 있게 된다. (잠언 15:11; 베드로 전 1:6, 7; 히브리 4:12, 13) 또한 이러한 개인들이 응답하는 방법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자기들의 자유 의사대로 선택한 행로에 맞게 틀잡으실 수 있다. (역대 상 28:9; 시 33:13-15; 139:1-4, 23, 24) 이와 같이, 먼저 “사람이 마음으로” 어떤 특정한 방향으로 그 경향을 나타내면 그 다음, 여호와께서는 그러한 사람의 발걸음을 인도하신다. (잠언 16:9; 시 51:10) 시험 아래서 사람의 심적 상태는 더욱 고정되어 출애굽 시대의 ‘바로’의 마음처럼 불의와 반항 중에 굳어지거나 혹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깨어질 수 없는 헌신과 그분의 뜻을 행하는데 있어서 확고해진다. (출애굽 4:21; 8:15, 32) 그리하여 그들이 자기를 스스로 선택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면, 이제 인간의 자유 도덕 행위를 침해함이 없이, 공정하게, 그 개인의 행로의 최후 결과를 예지하며, 예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욥 34:10-12와 비교하라.
‘가룟 유다’의 반역적 행로는 하나님의 예언을 성취시켰으며 여호와의 예지 그리고, 또한 그분의 아들의 예지를 실증하였다. (시 41:9; 55:12, 13; 109:8; 사도 1:16-20) 그러나 하나님께서 ‘유다’가 그러한 행로를 가도록 예정, 즉 그의 운명을 그렇게 고정시켰다고는 말할 수 없다. 예수의 절친한 친구 중에 그를 팔자가 있을 것이 예언되긴 했으나, 그러한 친교를 즐길 사람들 중에서 누구라고는 꼬집어 말하지 않았다. 다시 반복해서 말하자면, 성서 원칙은 하나님께서 ‘유다’의 행동을 예정하는 것을 억제한다. 사도 ‘바울’이 천명한바, 하나님의 표준은 이러하다. “아무에게도 너무 서둘러서 안수를 하지 말고 또한 남의 죄에 끼어들지도 말고 자신의 순결을 지키시오.” (디모데 전 5:22, 새번역) 예수께서 그의 열두 사도를 지혜롭고도 올바르게 선택하려고 애쓰신 증거로서, 그는 자신의 결정을 공표하기에 앞서 그의 아버지께 밤을 새우며 기도하셨다. (누가 6:12-16) 만일 하나님께서 미리 ‘유다’가 배반자가 될 것이라고 예정하셨다면, 이는 하나님의 지도 및 인도 면에 있어서 부조리를 초래하는 것이며, 규정에 의하면 자신을 그러한 자가 범한 죄에 끼어드는 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로 선택될 때, ‘유다’의 마음은 아무런 명백한 반역적인 태도의 증거를 나타내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는 “쓴 뿌리가 나서” 자신을 더럽게 하도록 허용하여, 결국 그것이 자기의 탈선을 초래하게 하였으며, 도적질과 모반(謀叛)을 계속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지도가 아니라 ‘사단’의 인도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히브리 12:14, 15; 요한 13:2; 사도 1:24, 25; 야고보 1:14, 15) 이러한 탈선이 어떤 단계에 이르렀을 때, 예수께서는 ‘유다’의 마음을 판독하실 수 있으셨으며 그의 배반을 예언하실 수 있으셨다.—요한 13:10, 11.
사실상, 요한 6:64에서 우리는 예수의 어떤 가르침 때문에 몇몇 제자가 실족했을 때,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더라” 하고 기록된 것을 읽을 수 있다. 이 “처음”이라는 단어가 베드로 후서 3:4에서는 창조의 시작을 가리켜 말하고 있으나, 이 말은 다른 때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누가 1:2; 요한 15:27) 예를 들면, 사도 ‘베드로’가 이방인들 위에 성령이 임하는 것에 관하여 말하여,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 같이” 임한다고 하였을 때, 그는 한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성령이 부어진 것의 “처음”인 기원 33년 오순절 날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사도 11:15; 2:1-4) 그러므로 흥미있게도 ‘샤프-레인즈’의 「비평, 교리 및 설교 주석」에서 요한 6:64에 대한 이러한 해설을 볼 수 있다. “[‘처음’]은 추상적으로 모든 것의 처음을 의미하거나, 그[예수]와 각자와의 친교의 처음, 또는 자기 주위에 제자들을 모은 것의 처음, 또는 메시야로서의 전도 봉사의 처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 [어떤 제자들을 실족케 한] 불신이 최초로 비밀히 싹튼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는 처음부터 자기로 팔 자를 알고 계셨다.”—요한 1서 3:8, 11, 12을 비교하라.
메시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메시야가 당할 수난과 죽음, 그리고 그 뒤를 이은 부활을 예지하시고 예언하셨다. (사도 2:22, 23, 30, 31; 3:18; 베드로 전 1:10, 11) 하나님께서 행사하신 그러한 예지에 의해 결정된 일들의 실현은 부분적으로는 하나님 자신의 능력의 행사와 그리고 얼마간 사람들의 행동에 달려있는 것이었다. (사도 4:27, 28) 그러나 그러한 인간들은 하나님의 대적, ‘사단’ 마귀에 의하여 사기당하도록 자신들을 방임하였다. (요한 8:42-44; 사도 7:51-54) 그러므로, 심지어 ‘바울’의 시대의 그리스도인들도 “[‘사단’의] 책략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대적이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대항하여 궁구할 악한 사욕과 계략을 예견하셨다. (고린도 후 2:11, 새번역 참조) 또한, 분명히 하나님의 능력은 예언된 방법이나 때에 부합되지 않는 메시야에 대한 어떠한 공격이나 시도도 방해하거나 좌절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운명 예정론자들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희생적 어린 양으로서 “창세[희랍어, 카타볼레 코스모우]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라는 ‘베드로’의 진술을 하나님께서 인류를 창조하시기 이전에 그러한 예지를 행사하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베드로 전 1:19, 20) “창세”라고 번역된 창(創)이라는 희랍어 단어 ‘카타볼레’의 문자적 의미는 “던지다, 부설(敷設)하다”이며, 히브리서 11:11에서와 같이 씨를 “잉태”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이 아들을 낳기 위하여 인간 씨를 뿌리고 ‘사라’는 수태하기 위하여 이 씨를 받는 것을 가리켜 말하고 있다. 히브리 4:3, 4에서 볼 수 있는 바, 하나님께서 첫 인간 부부를 창조하셨을 때, 한 인류 세계를 창설하였으나, 그 부부는 후에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지위를 상실하였다. (창세 3:22-24; 로마 5:12)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과분하신 친절로 말미암아, 그들은 씨를 뿌리고 씨를 잉태하여 후손을 낳도록 허용되었으며, 그 후손들 중 하나가 바로 하나님의 은총을 얻고, 자신을 대속과 구원을 받을 위치에 올려놓은 사람으로 성서에서 특별히 알려진 자, 즉 ‘아벨’이다. (창세 4:1, 2; 히브리 11:4) 예수께서 누가 11:49-51에서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말씀하신 것과 이것을 “‘아벨’의 피로부터 ··· ‘사가랴’의 피까지”라는 말과 평행시키신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아벨’을 “창세”와 관련시키셨으며, 그 전반적인 기간과도 연결시키셨다.
메시야, 즉 그리스도는 그를 통하여 지상의 전 종족에 속한 모든 의로운 사람들이 축복을 받게 될 약속된 씨가 되실 것이었다. (갈라디아 3:8, 14) 그러한 “씨”에 관한 언급이 최초로 나타난 것은 ‘에덴’에서 반역이 이미 시작된 후였으나, ‘아벨’이 출생하기보다는 이전이었다. (창세 3:15) 이것은 메시야를 통하여 도래할 다스림의 “비밀”이 계시되기 4,000년 전이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오랜 세월 동안 감추어 두셨던” 것이었다.—로마 16:25-27, 새번역; 에베소 1:8-10; 3:4-11.
정하신 때가 되었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예언된 그 “씨”의 임무를 수행하고 메시야가 되도록 자기의 맏아들을 임명하셨다. 그러나 이 아들이 창조되기 전이나, ‘에덴’에서 반역이 자행되기 전부터, 그가 그러한 역할을 수행할 운명으로 예정되었다고 가르치는 곳은 전혀 없다. 하나님께서 예언을 성취시킬 책임을 맡은 자로서 그를 결국 선택하신 것은 아무런 사전 근거없이 이루어 진 것이 아니다. 의심할 바없이, 여호와께서는 아들을 이 지상에 보내시기 전 그와 가까이 연합하셨던 기간을 통해서 그가 예언적 약속과 전영을 충성스럽게 성취시킬 것이라고 확신하실 수 있을 만큼, 그를 ‘아셨’던 것이다.—로마 15:5; 빌립보 2:5-8; 마태 11:27; 요한 10:14, 15을 비교하라.
‘부르시고 택하신 자들’
그리스도인 “부르심을 입은 자” 혹은 “택하신 자들”을 다룬 귀절들이 아직 남아 있다. (유다 1; 마태 24:24)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 택하심을 입은 자들”(베드로 전 1:1, 2), “창세 전에 ··· 택하”시고, “예정하사 ···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자들(에베소 1:3-5, 11) 그리고 “구원에 이르게 하려고 ··· 택하여 주셨고 그것을 위하여 부르셨”다고 묘사된 자들이다. (데살로니가 후 2:13, 14, 새번역) 이러한 귀절들의 이해는 그 귀절들이 어떤 개인들의 예정을 말하는 것인가 혹은 사람들의 한 반열,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그의 천국에서 공동 후사가 될 자들의 “한 몸”(고린도 전 10:17)인, 그리스도인 회중의 예정을 묘사하는 것인가에 달려있다.—에베소 1:22, 23; 2:19-22; 히브리 3:1, 5, 6.
만일 이러한 말들이 영원한 구원을 얻도록 예정된 어떤 특정한 개인에게 적용된다면, 그러한 개인들은 그들의 부르심 가운데, 결코 불충실하다고 판명될 수도 없으며, 실패할 수도 없다는 말이 된다. 왜냐 하면, 그들에 관한 하나님의 예지는 부정확한 것으로 입증될 수도 없으며, 그들이 당할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은 결코 실패하거나 역전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기한 말을 기록한 같은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희생의 피로 “사신”바 되고 “거룩하게”된 자들,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 내세의 능력을 맛”본 자들 중의 얼마가 회개하지 않고 떨어져 나갈 것이며, 그들 위에 멸망이 임하게 될 것이라고 알려 준다.—베드로 후 2:1, 2, 20-22; 히브리 6:4-6; 10:26-29.
반면에, 그것이 한 반열, 하나로서 불리움을 받은 자들의 그리스도인 회중 혹은 “거룩한 나라”(베드로 전 2:9)에 적용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앞에서 인용한 귀절들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반열(반열을 형성하는 특정인들이 아님)이 생겨날 것임을 예지하셨고 예정하셨다는 뜻이 된다. 이러한 성귀들은, 또한,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그 성원들이 되도록 불리움을 받을 자들이 틀잡히지 않으면 안될 “본”을 규정하셨다는, 혹은 예정하셨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모든 것은 그분의 목적에 따른 것이다. (로마 8:28-30; 에베소 1:3-12; 디모데 후 1:9, 10) 그리고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수행할 것으로 기대되는 사업의 종류, 그리고 세상이 가져올 고통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시험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 등을 예정하셨다.—에베소 2:10; 데살로니가 전 3:3, 4.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지의 행사는 우리로 그분의 의로운 뜻에 일치되려고 노력해야 할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