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핍한 자를 격려하도록 교육받은 혀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를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통찰력, 신세]로 너희를 양육하리라”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셨다. 지식과 통찰력을 겸비한 영적 목자들로부터 보살핌을 받는다는 것은 상쾌한 일이 아닌가?—예레미야 3:15.
통찰력이란 표면만을 다루는 것 이상이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표면 밑을 뚫어보는 것을 요한다. 이사야 44:18에서는 통찰력을 마음과 관련지음으로 육안과는 구별하고 있다. 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통찰력은 목자들이 “우울한 영혼들”을 다룰 때 특히 필요하다. ‘이사야’는 그밖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이러한 말로 알려 주었다. “주 하나님께서 나에게 학자의 언어를 주사 곤핍한 자를 말로 격려하는 방법을 알게 하십니다.”—이사야 50:4, 「베크 역」.
“곤핍한 자를 말로 격려하는 방법”을 알기 위해서는 여호와께 훈계와 교육을 받아야 한다. 성서에 아주 친숙하게 되고 그것을 사용하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통찰력을 나타냄으로 장로들은 우울증에 걸린 많은 사람들을 성공적으로 도와줄 수 있다. 대부분의 장로들은 양떼를 치는 일에 관한 유익한 제안들을 존중한다. 그들은 어쩌면 후회스러운 경험으로부터, 취지는 좋았지만 어떤 노력들은 실망적인 결과를 낼 수 있음을 깨닫게 될지 모른다. 다음의 내용은 우울한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를 다루고 있다. 분명히 장로들은 회중 내의 “복종치 아니하는 자들”과 ‘헛된 말을 하는 자들’은 다소 다르게 다룰 것이다.—데살로니가 전 5:14; 디도 1:10-13.
흔히 예 가운데 나타난 대조점은 적절한 방법과 부적절한 방법을 분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번뇌케 하는 안위자들”
‘욥’이 우울한 상태에 있게 되었을 때 그의 동료 세 사람은 그의 곤경에 대해 듣고 ‘욥’을 “조문하고 위로하려”고 왔다. (욥기 2:11) 문제에 대한 그들의 견해는 잘못된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자격은 불충분하였다. 그들이 찾아 왔을 때 그들의 정신 속에는 어떤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나쁜 일을 행했기 때문이라는 이론이 이미 뿌리박혀 있었다. 그 결과 그들은 ‘욥’의 문제의 진상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해설자의 성서」는 그들의 “위로”를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그것은 화를 돋구는 행위이다. ··· 그것은 하나의 방관적인 논평으로 그럴 듯한 조언이 몇 마디 들어 있을 뿐이다. ··· 마치 사람을 삼킬 듯이 거센 파도 가운데의 대 심연 속에서 허우적대며 곤궁에 빠진 사람에게, 편안히 해변에 앉아 한 두 마디의 힘 내라는 말을 던지는 사람과 같다. ‘욥’이 필요로 하는 것은 마음으로부터의 동정이다. 그가 들은 것이라곤 절대적으로 ‘참되’고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일련의 진부한 종교적인 문귀 및 도덕적인 상투어였다.”
화를 돋군 것 중에는 무엇이 있는가? ‘엘리바스’는 냉혹하게 추리하였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을 강건하게 해 주었었소. 이제는 당신이 문제를 당하여 곤경에 처해 있소. 당신의 성실성을 믿을 수가 없지 않소?’ ‘빌닷’은 이렇게 덧붙였다. ‘당신이 하나님을 더욱 더 앙망한다면 그분이 당신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오.’ 참으로 지각없는 말들이다! ‘욥’은 이미 하나님께 믿음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특히 그러하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느꼈을 것인가? 외견상으로는 잘 의도된 그러한 말들은 ‘욥’을 위로하기는커녕 그를 “꺾”는 것이었다. ‘너희가 나의 입장이라면’이라고 그가 부르짖은 것도 이해할 만하다!—욥기 4:3-6; 8:5, 6; 16:2, 4, 5; 19:2.
물론, 그리스도인 회중의 장로들은 그러한 “친구들”의 태도나 혹은 악귀의 영감받은 철학을 반영하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욥기 4:15, 16) 그러나 종종 위로를 베푸는 목자들은 비슷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우울한 영혼”에게 도움을 베푸는 데 있어 장로들은 아마 그 사람이 왜 그렇게 기분이 나쁜지 묻고자 할 것이다. 어쩌면, 그 우울한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의 영을 상실하였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장로들은 ‘다윗’의 예와 같은 성서적인 예들을 통해서 범죄가 우울증을 유발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시 38:1-6) 그들은 그 사람과 함께 그리스도인 행실을 다루는 성서 부분들을 읽고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성서가 말하는 바로 미루어 볼 때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을 당신으로부터 거두어 가셨다고 느낄 만한 무슨 실재적인 이유라도 있읍니까?’ 그 사람에게 그가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말하거나, 혹은 그가 잘못한 일이 있다는 암시를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스스로가 결론에 이르게 유도하는 것이 유익할 수 있다. 그는 죄책감을 느낄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수 있다. 혹은 그가 만일 범죄에 연루되었다면 장로들은 그가 자신의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다시 한번 여호와의 승인받는 은총을 즐기도록 도와 줄 수 있다.—히브리 12:12, 13.
우울한 사람들은 종종 정당한 이유 없이 죄의식으로 중압감을 느끼는 일이 있다. 통찰력은 장로들로 하여금 그러한 상황을 인식하도록 도와 줄 것이다. 자기를 도우려는 사랑스런 목자들의 방문을 깊이 인식한 어느 우울한 그리스도인은 자기는 하나님의 영을 상실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당신이 무슨 나쁜 일을 한 것은 아닌지 정말 잘 생각해 보시오”라고 한 장로는 이야기 도중에 말했다. 그 부인은 그 자리에 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는 걸요. 내가 무슨 일인가 떠올리기를 바라시나요? 그래야 도움이 되나요?”하고 흐느껴 울었다. 장로들은 요점을 파악하고는 다른 방식으로 돕고자 하였다.
‘욥’에게 충고한 자들은 이미 ‘욥’이 무엇인가 잘못을 저지른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었다. “곤핍한 자를 말로 격려하는 방법”을 아는 장로들은 각 상황을 다룰 때 “편견이 없이 ··· 아무 일도 편벽되이 하지” 않을 것이다. (디모데 전 5:21) 탐색적인 질문을 사용할 때, 그들은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자신들을 상대방의 입장에 두는 감정이입을 나타내어 그렇게 할 것이다.
통찰력을 가진 조언자들
‘엘리후’는 조언을 할 때 가끔 직선적이었지만 통찰력을 나타냈다. 그는 잘 듣는 사람이었다. 그는 듣기 전에는 대답하지 않았으며 성서에서는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를 “미련하고 무례한” 자라고 부른다. (잠언 18:13, 베크 역) 그는 ‘욥’의 충실성을 칭찬하였으며 자신을 표현하도록 그를 격려하였다. 그러한 통찰력은 ‘엘리후’의 말에 “설득력”을 더해 주었다.—욥기 32:4, 11; 33:5-7, 32; 잠언 16:23, 신세.
여호와는 통찰력을 가진 조언자로서 최고의 본이시다. 그분이 예언자 ‘요나’를 다루신 방법은 감정이입과 동정심을 분별하셨음을 보여 준다. 여호와께서 ‘니느웨’를 멸망시키지 않으심으로 그 예언자의 심판의 소식이 성취되지 않게 되자 ‘요나’는 화를 내었다. ‘요나’는 매우 우울하여 죽기를 원하였다. 이제 여호와께서는 그를 어떻게 다루셨는가?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는가? 즉 ‘‘요나’야, 너는 정말 자기 중심적이구나. 너의 마음 속에는 그다지도 사랑이 없느냐? 너의 사고 방식은 모두가 다른 사람들이 너를 보는 방식 그대로구나!’ 그러한 말은 올바른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마 그가 더욱 큰 죄의식과 우울증을 느끼게 해 주었을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어떻게 하셨는가?
여호와께서는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하고 물으셨다. 그렇다, 간단한 하나의 질문으로 그가 생각하도록 자극하신 것이다. 그분은 비난하지 않으셨다. 정죄하지도 않으셨다. 비록 ‘요나’가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여호와께서는 그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하나의 큰 식물을 마련하시어 작렬하는 햇빛으로부터 그를 보호해 주셨다. 그리고 나서 여호와께서는 분명히 ‘요나’의 마음에까지 도달한 하나의 실례를 사용하셨다. 그분은 그 큰 식물을 죽게 하신 것이다. ‘요나’가 그 식물이 죽은 것에 대해 화를 내자 여호와께서는 그를 도와 ‘니느웨’ 사람들의 생명이 그 식물의 생명보다 참으로 훨씬 더 귀중함을 깨닫게 하셨다. 단순한 식물의 죽음보다도 사람들에 대해 더욱 동정심을 느끼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간단하지만 효과적이었다!—요나 4:1-11.
장로들이 우울한 영혼들을 위로하고자 할 때 여호와와 ‘엘리후’를 본받을 필요가 있다. 아낌없이 진심에서 칭찬하도록 하라. 간단하고 직접적인 말과 질문을 사용하라. 이해하기 쉬운 말을 사용하라. 구체적인 질문을 하되 겁을 주는 질문은 피하도록 하라. 그 사람의 사고를 자극하거나 다소 별개의 문제에 감정적으로 개입되게 할 만한 비유(이를테면, 식물의 죽음에 대하여 ‘요나’가 분노한 일)를 사용하여 그가 자신의 그릇된 생각을 알아 차리도록 도와 줄 수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말씀을 기억하도록 하라.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 (잠언 25:11) 만일 그 사람이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점진적으로 극복하도록 도움을 주어야 한다. 격하된 그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일을 하도록 하라. “근심이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번뇌케 하나 선한 말은 그것을 즐겁게 하느니라.”—잠언 12:25.
하지만, 장로들은 어떠한 종류의 제안들로 우울한 사람에게 접근할 수 있는가?
뜻깊은 기도를 통한 도움
“나는 여호와께서 완전히 이해하신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우울증 혹은 두려움이 너무 심하여 기도할 희망조차 없다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어요”라고 어떤 우울증에 빠진 사람은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장로들은 그와 같은 감정이 우울증에 빠진 많은 사람들에게 흔히 있는 일임을 인정해 주는 한편, 그들이 꾸준히 기도하도록 격려할 수 있다. 하지만, 무엇에 관해 기도할 것인가?
“나는 여호와께서 내가 인내하도록 도움을 주시거나 혹은 도움을 발견할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해 주실 것을 기도하였어요”라고 한 우울증에 걸린 젊은 부인은 말하였다. 학대하는 믿지 않는 남편을 둔 33세 된 한 어머니는 우울증에 빠졌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몹시 근심하고 긴장하게 되거나 혹은 두려움을 갖게 될 때는 곧바로 여호와께 나아간답니다. 때때로 손을 들고 무릎을 꿇고 울면서 이 문제를 극복하게 도와 달라고 그분께 호소하지요. 기도를 구체적으로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였읍니다. 여러 번 나는 즉각적인 도움을 받곤 하였읍니다.” 41세 된 한 아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울증에 걸렸을 때 기도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어요. 그러나 로마 8:26은 진정한 위로의 근원이었읍니다. 그래서, 나는 여호와께 ‘도와 주소서!’하고 요청할 수 있게 되었읍니다.”
장로들은 그 사람과 함께 그리고 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다. 물론 장로들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큰 죄의식을 느끼게 하는 말은 피해야 한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 듣는 가운데 여호와께,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가 다른 사람들 및 심지어 여호와께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지 이해하도록 도와 주실 것을 구하는 것은 분명히 그를 세워 주게 될 것이다. 또한 고통을 겪는 사람은 여호와께 대한 신뢰심이 곁들인 진실한 기도가 위안을 가져다 줄 수 있음을 알게 될 수 있다.—사무엘 상 1:9-18.
곤핍한 자로 통찰력을 얻도록 도우라
“사람들은 종종 그들이 믿음을 상실했다고 느끼며 그 때문에 심한 죄의식을 느끼는 일이 있다. 영적으로 실패한 경우라 할지라도, 나는 많은 경우에 그것은 아마 종교적인 믿음의 실패가 아니라 우울증의 초기 징후라고 생각한다”라고 ‘뉴우요오크’ 주 ‘로크랜드’ 연구소의 정신 위생 과장 ‘나단 클라인’ 박사는 설명한다. 그는 자기 환자들 중에 종교심이 깊은 많은 사람들에게서 이러한 징후를 관찰한 후에 그와 같이 말했다. 그러므로, 심한 우울증에 빠진 사람으로 하여금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도록 도와 줌으로써 불필요한 많은 죄의식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
많은 “우울한 영혼들”에게 도움을 베풀어 건강을 되찾게 해 준 한 ‘증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부 사람들이 처하게 되는 불필요한 죄의식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나는 내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지만, 여호와께서 이러한 일들을 없던 것으로 돌리실 수 있는 대속을 마련하였다면 내가 그에 관해 끊임없이 자책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내가 도움을 베푸는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려고 노력하는 것들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점이다.” 진실하게 자신의 어떤 나쁜 행동에 대해 회개하고 그것을 반복하지 않으려는 욕망으로 ‘그 잘못을 바로 잡으려고’ 참으로 노력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대속으로 그의 양심이 깨끗하게 될 수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경건한 슬픔에 잠겨 있는 사람들이 여호와의 자비와 용서를 인식하게 되도록 도와주는 것은 종종 그들로 우울증에서 벗어나게 한다.—시 32:1-5, 11; 103:8-14; 고린도 후 7:9-11.
그릇된 생각이 우울한 사람의 정신을 괴롭힐 수 있지만,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느끼거나 “하나님에 의해 단죄받고 있다”고 느낄 필요는 없다. 성서는 그러한 생각들을 배양하고 행동으로 ‘이루’는 것에 대해 경고한다. (야고보 1:14, 15; 갈라디아 5:16) 따라서 그러한 생각들을 몰아내려고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한, 죄의식 때문에 중압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예를 들어, 우울한 사람의 마음 속에 분노 혹은 원한이 끓어 오를지도 모른다. 장로가 그 사람에게 ‘그런 식으로 느껴서는 안 돼요’ 혹은 ‘그와 같이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별 성과가 없다. 문제는 그 사람이 지금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성서는 사람이 종종 분노를 느낄 때가 있음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한편, 그러한 분노를 나타내지 않도록 경고한다. (시 4:4; 37:8) 성서는 우리에게 분노를 계속 품고 있지 말 것을 격려한다. (에베소 4:26, 27) 그러므로, 분별력을 가진 장로는 몇 가지 간단한 질문을 사용하여 고통을 겪는 사람이 왜 분노를 느끼고 있는지 알아낼 수 있다. 그 사람이 도움을 받아 (‘요나’의 경우처럼) 그 상황을 분석하고 나면 분을 낼 만한 건전한 근거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감정을 상하게 하였다면, 그는 일정한 성서적 단계를 밟음으로 분개하는 마음을 극복하도록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골로새 3:13; 마태 5:23, 24; 누가 17:3, 4.
장로가 곤핍한 자의 부정적인 태도에 민감하다면, 어떤 사람이 우울증의 초기 단계에 흔히 시정을 받아 중우울증에 빠지지 않게 해 줄 수 있다. 중우울증이란 의학적 도움을 요할 정도의 불안 상태를 말한다. 이 경우에도 장로는 불안 상태가 의학적인 보살핌을 필요로 할 정도에 이르렀을 때를 인식하도록 환자 혹은 그의 가족을 도와 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장로들이 의사의 역할을 하거나 어떤 형태의 치료를 받아야 하는지 지시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1982년 2월 1일호 “깰 때이다”에 나오는 “중우울증 격퇴—전문적 치료법” 기사에 나오는 내용들을 관련된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고자 할 수 있다. 그 기사는 몇 가지 요법들을 요약하고 있지만, 그 어느 것도 장려하지는 않는다.
균형을 되찾도록 도우라
“매일 매 순간 귀중한 생명에 매달리고 있어요”라고 40세 된 한 그리스도인 어머니는 자신의 중우울증의 발작을 묘사하였다. 회복되고 나서 그는 그 한 가지 원인을 이렇게 분석하였다. “나는 아무도 낙담케 하거나 혹은 나의 가족 생활의 여하한 부분이나 봉사를 추호라도 소홀히 버려 두지 않으려고 나를 기진맥진하게 만드는 계획에 고착하였다. 나는 8년간 이렇게 하였으며 마침내 의사는 내가 ‘기진해 있다’고 말했다. 회고해 보건대 그러한 계획을 고수하는 나의 이유가 경솔한 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좀 더 이치적이어야만 했다고 생각한다.”
비이치적이 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장로들은 종종 우울한 사람이 그의 행동에서 균형을 되찾도록 도움을 베풀어야 한다. 틀림없이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온 영혼을 다한 봉사를 격려할 것이다. 사실상 때때로, 심각한 중우울증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호별 전파 활동에 참여할 수 없을 때, 환자로 하여금, 그의 상태가 허락한다면 다른 증인이 사회하는 성서 토론에 참석하도록 하는 마련이 베풀어진 일이 있다. 그 침울한 사람은 자기의 능력껏 그 토론에 기여하였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몸을 살아 있고, 거룩하며,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제물로, 즉 여러분의 이지력으로 섬기는 거룩한 봉사에 제공하”도록 명하였음을 기억하라. (로마 12:1, 신세) 그렇다, 사람의 이지력이 관련되어야 한다. “이지력”이라고 번역된 희랍어 단어(로기코스)는 문자적으로 “논리적”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치적이고 논리적인 행동을 할 것을 기대하신다. 각자의 능력, 체력 및 환경은 서로 다르다. 온 영혼을 다한 봉사란 다른 누가 아닌 당신의 영혼과 힘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마가 12:30; 골로새 3:23.
사람이 병들게 되면, 그의 마음과 정신은 이전과 같이 하나님의 봉사에서 많은 일을 하고 싶어 해도 힘이 모자라게 된다. 영원한 생명을 얻을 사람들은 누구나 ‘정력적으로 노력해야’ 하지만 그러한 노력은 언제나 사람이 수행하는 일의 분량으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다. ‘에바브로디도’가 병들었을 때에 “주의 사업”에서 그에게 가능했던 정력적인 활동의 분량은 그가 건강했을 때에 수행했던 것과는 비교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전체적인 노력에 대해 ‘바울’로부터 칭찬을 받았다.—누가 13:24; 빌립보 2:25-30, 신세 참조.
질병과 같은 변화된 환경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마음이 원하는 바를 온전히 수행하는 데 방해를 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여행하는 감독자의 아내는 중우울증에 걸려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전 생애를 통해서 나는 지극히 활동적이었으며 하나님께 대한 봉사를 온전히 즐겼다. 그러나 그 후 약 9개월 동안, 나는 지하 깊은 ‘구덩이’ 속에 있는 것같은 두려운 느낌을 갖게 되었다.” 그와 그의 남편은 회중을 방문하는 일을 중지해야 했으며 그는 의사에게 치료를 받게 되었다. 1년 이상이 경과한 후 그는 건강을 되찾게 되어 이 정력적인 봉사의 임명을 다시 수행할 수 있을 정도에 이르게 되었다. 현재 이전처럼 온 영혼을 다한 봉사를 하고 있는 그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나는 나의 봉사에서 다시 한번 행복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지나치게 피곤하고 지치게 되면 집에 머물러 휴식을 취하면서 신체의 징후에 순응하려고 힘쓴다. 이제는 그 징후들을 알고 있으며 내가 회복되고 있는중임을 여호와께 크게 감사한다.”
그렇다,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에 따라서가 아니라 우리의 가진 바에 따라서’ 우리의 선물과 희생을 받으시는 분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삼게 된 것을 우리 모두는 참으로 감사할 수 있다. 이 점은 그러한 희생이 영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혹은 우리의 체력에 관한 것이든 다 마찬가지이다.—고린도 후 8:12.
그러나, 종종 우울한 사람은 그가 자신의 힘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관해 더 잘 분별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중우울증으로 고생하는 어느 자매는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균형을 못 잡고 있어요. 나는 ‘안 돼요’라고 말할 줄을 몰랐어요. 누가 나에게 무슨 일을 해 달라고 요청할 때면 언제든지 ‘예, 좋아요’ 하거든요. 나는 ‘미안하지만 안 돼요, 나는 정말 못 해요. 아마 다른 때에 도와드릴 수 있을 거예요.’하고 말하는 법을 배워야 했어요. 이것을 배우지 않았다면 나는 흥분 상태에 있었을 거예요.” 언제나 자기 능력 이상의 일을 하려고 애쓰는 한 사람은 심각한 우울증에 걸리고 말 수 있다. 현인은 이렇게 충고하였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케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며 우매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느냐?”—전도 7:16, 17.
우울한 사람들에게 위로의 말을 해 주는 데는 순수한 노력이 요구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을 청종함으로써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통찰력도 배워야 한다. 하지만, 그 결과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
마음이 상하여 자신의 감정을 눈물로 호소하던 사람이 변화되기 시작하는 것을 보는 즐거움을 상상해 보라. 점차, 활기가 눈물을 대신하게 된다. 미소로 인해 얼굴에는 화기가 감돌게 된다. 그러한 사람은 사랑 많고 이해심 깊은 목자에게 얼마나 감사하겠는가! 그리고 누구보다도 “우울한 자를 위로하시는”, 동정심 많으신 우리의 하늘의 아버지께서 참으로 기뻐하신다.—고린도 후 7:6, 신 미표 역.
[9면 삽화]
우리는 ‘욥’의 동료들처럼 번뇌케 하는 안위자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10면 삽화]
당신은 우울한 사람에게 문제를 가중시키는가, 아니면 참으로 위로를 베푸는가?
[12면 삽화]
장로들은 우울한 사람과 함께, 그리고 그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으나, 그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큰 죄의식을 느끼게 하는 말을 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