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롭게 책망하는 자들은 죄를 범한 자들을 구해 준다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고리[니라].”—잠언 25:12.
1, 2. 하나님의 책망에 대한 반응 여하에 따른 결과는 무엇이며, 슬기롭게 책망하는 자들이 되기 위하여 장로들에게 무엇이 필요합니까?
오래 전에 충성스러운 사람이었던 ‘엘리후’는 여호와 하나님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그들의 귀를 열어 교훈을 듣게 하시며 명하여 죄악에서 돌아오게 하시나니 만일 그들이 청종하여 섬기면 형통히 날을 보내며 즐거이 해를 지낼 것이요 만일 그들이 청종치 아니하면 칼에 망하여 지식 없이 죽을 것이니라. 마음이 사곡한 자들은 분노를 쌓으며 하나님께 속박을 받을찌라도 도우심을 구하지 아니하나니[라.]”—욥 36:10-13.
2 그리스도인 장로들의 소원은 당연히 슬기롭게 책망하는 자들이 됨으로써 ‘죄를 범한 자들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자들이 되기 위하여는 그들이 성서에 사용된 “책망”이라는 말의 뜻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책망”과 “꾸짖음”과의 차이
3. 꾸짖다 라는 말의 뜻은 무엇이며, 보통 꾸짖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3 성서 원어를 보면 책망의 뜻으로 사용된 단어와 꾸짖음을 나타내는 단어가 다름을 보게 됩니다. 그 차이는 무엇입니까? “꾸짖다”(to rebuke)라는 말은 “견책”하기 위하여 예리하게 비판하는 것 혹은 엄하게 비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꾸짖음”은 단순히 강력한 비난의 표현일 수 있으며, 흔히 무례한 혹은 불쾌한 행동이나 말을 중지시키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창세 37:10; 욥 11:3, 신세 비교) 예를 들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예수의 제자들이 그에게 환호성을 보내자 ‘바리새’인들이 예수에게 “선생님, 제자들을 꾸짖으십시오”라고 말하였읍니다. ‘그들에게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라’는 말이었읍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읍니다.—누가 19:39, 40, 새번역.
4. 마태 18:15과 누가 17:3을 비교해 볼 때 “꾸짖다”라는 말과 “책망하다”라는 말은 같은 의미로 서로 바꿔서 사용할 수 있는 단어입니까?
4 여기서 영감받은 복음서 필자가 사용한 “꾸짖다”라는 희랍어 단어는 ‘에피티마오’입니다. “책망”(reprove)에 해당하는 희랍어 단어는 ‘엘렝코’입니다. 마태 18:15에 이 단어가 나오는데 그 내용은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신세, 그의 허물을 들어내라; 희랍어, ‘엘렝코’; 왕국 행간 번역, “책망”)하라”는 예수의 말씀입니다. (레위 19:17 비교) 누가 17:3에 나오는 예수의 같은 내용의 말씀은 이렇게 되어 있읍니다.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신세, 꾸짖고; 희랍어, ‘에피티마오’)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이것은 “꾸짖다”라는 말과 “책망하다”라는 말은 같은 뜻을 가지고 있고 서로 바꿔서 사용할 수 있는 단어들이라는 의미입니까? 이 한 가지 경우만을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현명한 길이 아닐 것입니다. 그 두 가지 단어가 사용된 성경의 방법은 그들이 각각 다른 뜻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려 줍니다.
5, 6. 어떠한 실례로 보아 이 두 가지 단어는 뜻에 있어서 아주 다르며, 이것은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성귀에 이 단어들이 사용된 것에서 무엇을 알려 줍니까?
5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을 보면 예수께서 악귀들에게 ‘잠잠’하고 악귀들린 사람들에게서 ‘나오라’고 그들을 ‘꾸짖’으신(에피티마오) 일이 있읍니다. (마태 17:18; 마가 1:25; 9:25; 누가 4:35, 41; 9:42) 어느 곳에도 성서 필자들이 예수께서 악귀들을 책망(엘렝코)하신 것으로 기록한 곳은 없읍니다. 예수께서는 또한 ‘베드로’의 장모에게서 열병이 떠나가라고 ‘꾸짖’으셨으며; ‘갈릴리’ 바다에서 폭풍과 심한 파도를 ‘꾸짖’어서 자기와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를 뒤집으려는 위협을 막으셨읍니다.—누가 4:39; 마태 8:26; 마가 4:39; 누가 8:24.
6 이상의 모든 경우에 “책망”(엘렝코)이라는 단어를 대신 사용하려는 것은 전적으로 부당한 일일 것입니다. 심지어 짐승도 꾸짖음을 받을 수 있읍니다. (시 68:30) 그러나 앞으로 이해하게 되겠지만 추리력과 마음의 특성 및 양심을 가지고 있는 인간만이 책망을 받을 수 있읍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참조한 누가 17:3에 사용된 “꾸짖음”이라는 말은 단순히 책망이 꾸짖음을 수반할 수 있거나 포함할 수 있음을 알리는 실례일 뿐입니다.
7. 영감받은 성서 필자들이 사용한 “책망하다”라는 희랍어 단어는 그 당시 사람들이 사용한 방법으로 어떠한 뜻이었읍니까?
7 그러면 희랍어 ‘엘렝코’(책망하다)의 뜻은 무엇입니까? 이 말이 한 때 고전 희랍어에서 “망신시키다” 또는 “수치스럽게 하다”라는 사상의 표현으로 사용된 일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희랍어 사전에 의하면 이것이 이 단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된 방법은 아닙니다.a 그리고 그 사전들은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 가운데서 그 단어가 그러한 생각으로 사용되지 않았음을 분명히 알려 줍니다. ‘리델’과 ‘스코트’ 공편 「희-영 사전」에 나오는 ‘엘렝코’(책망하다)의 정의를 알아 봅시다.
“반대 심문을 하다, 질문하다, ··· 사람의 하는 일을 고발하다, ··· 유죄가 되다 ··· 2. 시험하다. 증거를 보이다 ··· 3. 증명하다 ··· 납득할 만한 증거를 대다 ··· 4. 논박하다, ··· ㄴ. 올바르게 하다, 시정하다 ··· 5. 에 이기다 ··· 6. 폭로하다.”
8. 이 정의는 책망이 필요한 근본 이유가 무엇인가를 어떻게 알려 줍니까?
8 이러한 정의들은 주로 비-성서 희랍어 필자들이 그 말을 사용한 방법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로부터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읍니다. 이러한 정의들은 모두 책망을 받아야 할 사람이 자기의 죄를 전적으로 부인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자기의 죄를 시인하려고 하지 않거나 죄의 사실과 그로 인한 회개의 필요성을 인정하려 하지 않음을 나타냄을 알려 줍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의 죄를 “납득”시키거나 “확신”시켜 줄 필요가 있읍니다. 이것이 왜 기억해야 할 중요한 점인가를 우리는 다음에 알게 될 것입니다.
9, 10. 성서는 또한 책망을 필요로 하는 것은 죄를 인정하지 않고 죄를 회개하지 않을 경우임을 어떻게 알려 줍니까?
9 이러한 정의들은 그 희랍어 단어의 성서적 사용으로 증명이 됩니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그의 허물을 들어내라, 신세; 엘렝코; “(그를) 책망하라”, 왕국 행간 번역)하라”고 하신, 앞에서 참조한 마태 18:15에 유의하십시오. 죄를 범한 자가 자기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죄의 해를 입은 사람이 그의 허물을 들어냄으로써 책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10 이 단어(엘렝코)가 사용된 다른 성귀들도 또한 책망을 받는 사람들이 그 시점까지는 그들의 죄를 계속함으로 시정을 받아 들이지 않았음을 알리는 경우들입니다.—다음 성귀들과 비교: 누가 3:19; 요한 3:20, 신세; 에베소 5:6, 7, 11-14; 디모데 후 4:2-4, 새번역; 디도 1:9-13(13, 새번역); 베드로 후 2:15, 16.
11, 12. (ㄱ) 그러므로 범죄자들을 성경적인 방법으로 책망하는 데는 어떠한 특성이 포함되는 것이 필수적이며, 그 목적은 무엇입니까? (ㄴ) 부모가 자녀들을 교육하는 면에 있어서 “꾸짖음”과 “책망”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을 수 있읍니까?
11 그러면 사람들은 어떠한 방법으로 책망을 받습니까? 책망하는 데는 단순히 고발을 한다거나 (꾸짖을 경우처럼) 누가 한 일에 대하여 단죄를 선언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또한 단순히 어떤 사람이 죄를 범했다는 발표문을 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서에 의하면 책망하는 데는 증거 혹은 논증을 제시하는 것이 요구됩니다. (명사 ‘엘렝코스’를 실체의 “명백한 증거”라고 번역한 히브리 11:1, 신세 비교) 그러므로 “꾸짖음”(rebuke)과 “책망”(reprove)이라는 성서 용어 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하기 위하여 희랍어 학자 ‘트렌취’편 「신약 동의어」(Synonyms of the New Testament)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아무런 잘못의 증거를 제시함이 없이 ‘꾸짖을’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잘못이 없기 때문일 수 있으며, 그러므로 그 꾸짖음은 필요치 않거나 부당한 것일 수 있다. (마태 16:22, 흠정; 19:13; 20:31 비교) 또는 그러한 잘못이 있기는 하지만 그 꾸짖음은 죄를 범한 사람에게 그것을 인정하게 하는 데 무력하기 때문일 수 있다; 죄의 ‘확증’이 없이 죄를 ‘꾸짖을’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이 두 가지 단어 사이의 구별이 있게 된다 ··· ‘엘렝코스’(책망)는 단순한 고발이 아니라 고발의 증거, 그리고 고발의 증거의 제시를 의미한다. 또한 흔히 외부로는 아닐찌라도 내부라도 고발된 사람이 그 증거를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
12 이 차이는 자녀에게 어떤 일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나무라는 것으로 만족하는 부모와 기꺼이 시간을 내서 자녀와 함게 추리하고 범죄 행위가 나쁜 이유와 그것을 피하기를 원해야 할 이유를 이해하도록 도우려는 부모와 비교될 수 있읍니다. 꾸짖음이 필요한 때가 있기는 하지만 책망의 필요성이 흔히 더 큽니다.
13. 책망할 때 제시하는 증거는 어떠한 두 가지 목적을 수행합니까?
13 그러므로 책망을 하는 데 증거를 제시하는 것은 두 가지 목적을 이룰 수 있읍니다: 즉 그가 고발된 행동 혹은 행동들을 범한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거나 혹은 그의 행위가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보일 혹은 지적해 주기 위해 필요할 것입니다. 요한 16:8, 9에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성령이 “세상을 책망[세상에게 납득케 하는 증거를 제시, 신세; ‘엘렝코’]하시리라 ···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라고 말씀하셨읍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에 관한 한, 그의 적들이 자기를 부당하게 꾸짖으려고 할지 모르지만 그들이 결코 자기에게서 어떠한 죄에 대하여도 “납득케 하는 증거”를 제시할 수 없음을 아셨읍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그들에게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엘렝코’; “책망하다,” 행간역) 잡겠느냐?”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요한 8:46.
그리스도인 책망의 배후 동기
14, 15. 그러면 그리스도인 책망과 납득케 하는 증거의 최종 목적은 무엇입니까?
14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종들에게 있어서 책망은 단순히 (세속 희랍어 필자들이 흔히 그 단어를 사용한 방법처럼) 범한 죄를 증명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단어의 성서적 사용은 그 단어의 세속적 사용과 다릅니다. 어떠한 면으로 그러합니까? 성경적으로 “책망”하는 데는 죄를 증명하려고 하거나 공의로 만족하려는 것을 초월한 동기가 있읍니다. 그 동기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신약 신학 사전」(제2권)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고딕체는 우리가 바꾼 것임)
“신약에서 ‘엘렝코’의 사용은 제한되어 있다. ··· 그것은 ‘사람에게 그의 죄를 보여 주고 그로 회개하도록 권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아마 마태 18:15, 흠정; 에베소 5:11의 경우와 같이 두 사람 사이의 사적인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목회 서간」의 디모데 전 5:20; 디모데 후 4:2; 디도 1:9, 13; 2:15의 경우처럼 지도자 아래 있는 회중 문제일 수 있다 ··· 그 단어는 다만 ‘원망하다’ 혹은 ‘책망하다’ 라든가 증명한다는 의미로서의 ‘납득시키다’나 ‘들어내다’ 혹은 ‘폭로하다’라는 뜻이 있을 뿐 아니라 ‘바르게 하다’ 곧 ‘죄를 떠나 회개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15 그러므로 성서적인 책망은 단순히 어떤 사람의 범죄 행위를 부끄럽게 하거나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꾸짖음의 경우는 그러할지 모르지만 책망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단순히 범죄 행위를 하지 못하게 할 뿐 아니다 책망의 목적은 적극적인 것입니다. 즉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그로 죄를 미워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범죄 행위를 ‘들어나게’ 하는 것은 단순히 그의 잘못을 폭로시키는 것이 아니라 형제로서 그를 다시 얻고 죄에 더욱 깊이 빠져 들어감으로 회중으로부터 잃게 되는 일이 없이 보존하려는 데 있는 것입니다.—마태 18:15, 16.
우리 심중으로 또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통하여 책망받음
16, 17. 이미 범죄 행위를 버린 사람에게 책망이 필요한가에 관한 질문에 대답할 때 어떠한 요인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까?
16 그러면 만일 그리스도인이 한번이나 혹은 여러 번 어떤 죄를 범하였으나 그 후에 그의 양심이 그로 회개하게 하고 그로 그러한 죄를 버리고 돌아서게 하였다면 어떻게 됩니까? 아직도 누군가가 그를 책망해야 합니까?
17 여기에서 우리는 “책망”(엘렝코)이라는 단어의 뜻을 염두에 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그 단어는 사람을 고발하는 것, 그의 죄의 증거를 얻기 위하여 질문이나 반대 심문을 하는 것 혹은 그가 시인한 행동에 대한 그의 잘못된 견해를 납득케 하는 논증을 통하여 논박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 그의 정신과 마음에 죄를 인식하도록 한다는 사상이 내포될 수 있읍니다. 이 모든 것은 그로 회개하도록 함으로써 그가 다만 범죄를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다시 그리로 돌아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18. 사람이 자기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책망을 받을 수 있읍니까? 있다면 어떻게?
18 그러나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그것을 버린, 앞에서 언급한 사람의 경우에 있어서 그 범죄자는 사실상 자기를 이미 책망한 것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자기의 양심이 고발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영이 죄를 선언하고 그의 마음이 그로 회개하게 하고 죄로부터 돌아서게 합니다. 그에게는 다른 사람이 그의 범행을 인정하게 하고 시정하게 하기 위하여 ‘허물을 들어나게’ 할 필요가 없읍니다.—시 16:7; 예레미야 2:19 비교.
19. ‘베드로’의 경우에 있어서 이 점에 대한 어떠한 실례를 볼 수 있읍니까?
19 사도 ‘베드로’가 아마 이러한 경우였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가 주를 세번 부인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읍니다. 예수께서 잡히시고 시련을 당하시는 어려운 환경이 이르자 ‘베드로’는 과연 예수를 세번이나 부인함으로써 약함을 나타냈읍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베드로’를 쳐다보시는 것만도 그의 마음을 움직여 자기가 한 일을 회개하고, 나가서 심히 통곡하게 하였읍니다. 그 자신의 마음과 예수께서 앞서 말씀하신 것이 생각나서 그를 책망하였읍니다. 그 이후의 ‘베드로’의 행동은 그와 비슷한 심각한 죄를 다시는 범하지 않으려는 그의 결심을 증명하였읍니다. 몇 주일이 지난 후에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 회중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베드로’를 ‘기초 돌’의 하나로 사용하시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시게 되었읍니다.—누가 22:54-62.
20, 21. (ㄱ) 다시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것을 결심했다 하더라도 어떠한 마련을 이용하는 것이 현명한 일일 것입니까? (ㄴ) ‘다윗’에게는 왜 책망이 필요하였으며, ‘나단’은 그를 어떠한 방법으로 책망하였읍니까?
20 이것은 그러한 경우에 아무런 도움이 필요치 않을 것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시는 어떤 범죄를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다 하더라도 그러한 결의를 강화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을지 모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면에 있어서 우리에게 도움을 베풀도록 형제들을 마련하셨읍니다.—잠언 17:17; 누가 22:31, 32; 갈라디아 6:2.
21 더 일찌기 ‘다윗’ 왕은 ‘베드로’와는 달리 다른 사람이 그를 책망할 필요가 있었읍니다. 그는 매우 심각한 범행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큰 해를 끼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가 범한 일에 대하여 담대히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의 범죄를 숨기려고 하였읍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나단’을 보내서 ‘다윗’을 책망하게 하셨읍니다. ‘나단’은 ‘다윗’의 경우를 빗대어 아주 강력하고도 생생한 실례를 사용하여 책망을 하였읍니다. ‘나단’의 실례 가운데 나오는 사람의 이기심에 분노한 ‘다윗’은 그 사람의 잔인성과 동정심의 결핍을 단죄하였읍니다. 그러자 ‘나단’은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말함으로써 ‘다윗’에게 충격을 주었읍니다. 자기의 행동을 사실대로 보고 이해하고 그 범행이 어떠한 것이었는가를 예리하게 느끼게 됨으로써 ‘다윗’은 이제 회개하였읍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자기 자신이 시인한 바와 같이 죽임을 당해야 마땅했을 것입니다.—사무엘 하 12:1-13.
22. ‘다윗’은 책망에 대한 훌륭한 태도와 회개함으로 얻게 된 훌륭한 유익을 어떻게 표현하였읍니까?
22 ‘다윗’은 그의 한 시 가운데서 책망에 대한 그의 올바른 태도를 이렇게 표현하였읍니다. “의인이 나를 칠찌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찌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치 아니할찌라.” (시 141:5) 더 나아가서 ‘다윗’은 시 32:1-6에서 자기의 범죄에 대해 여호와의 용서를 구하지 않았을 때에 그가 경험한 고통과, 회개하고 하나님께 고백함으로 얻게 된 축복된 편안감을 설명하였읍니다.
23. 현명하게 책망하는 자들은 무엇을 인정할 것이며, 이 항목에 참조된 성귀들은 어떻게 이 점을 알려 줍니까?
23 슬기롭게 책망하는 자들이 되려면 회중의 목자들 역시 범죄의 중대성이 다양한 것처럼 책망도 그 엄한 정도가 광범위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갈라디아 6:1; 디모데 후 2:24-26과 디도 1:13, 새번역 비교) 하나님의 종으로서 훌륭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까지도 때로는 잘못된 견해나 말 혹은 행동 때문에 책망을 받을 필요가 있읍니다.
24, 25. 하나님의 충실한 종들에게도 역시 책망이 필요할 수 있읍니까? 그들은 이 책망으로 어떤 유익을 얻게 됩니까?
24 나중에 ‘베드로’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러하였읍니다. 갈라디아 2:11-14에 보면 그는 ‘시리아 안디옥’에 갔을 때 할례받지 않은 비-‘유대’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친근하게 사귀었읍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회중으로부터 온 어떤 사람들 (아마 ‘유대’인 분리 사상을 고집하는 사람들이었던 모양)이 ‘안디옥’에 오자 ‘베드로’는 그리스도인 이방인들과 교제하는 것을 중단하였읍니다. 이러한 잘못된 행위와 다른 ‘유대’인 신자들에게 미치는 그로 인한 좋지 않은 영향을 본 사도 ‘바울’은 ‘베드로’를 책망하지 않을 수 없다고 느꼈읍니다. 건전한 논증을 제시함으로써 그는 ‘베드로’에게 그의 잘못을 지적하였읍니다. 그것도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듣는 가운데서 공개적으로 그렇게 하였읍니다. ‘베드로’가 이 책망을 받아 들였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읍니다. 그는 후에 따뜻한 감사함을 가지고 ‘바울’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베드로 후 3:15, 16.
25 그렇습니다. 잠언 9:8, 9에 있는 말씀과 같습니다. “지혜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 지혜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 그가 더욱 지혜로와질 것이[라]”. ‘베드로’의 경우에 있어서 “명철한 자를 견책하라[책망하라, 신세]. 그리하면 그가 지식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참이었읍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과 그의 의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의 길”이 될 슬기로운 “훈계의 책망”을 듣도록 항상 우리의 귀를 크게 열고 있도록 합시다.—잠언 19:25; 6:23; 25:12.
[각주]
a ‘로빈슨’편 「신약 사전」의 ‘엘렝코’의 정의는 이러하다. “‘호머’(그리스도인 전 시대의 희랍 시인)의 글에서만 수치스럽게 하다, 망신시키다로 사용됨 ··· 일반적으로 그리고 신약에서는 납득시키다, ··· 논박하다, 죄를 증명하다.”
‘빈센트’ 저 「신약 용어 연구」에 의하면 이러하다. “고대의 고전 희랍어에서는 그 단어가 망신시키는 것, 수치스럽게 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 그 후에는 납득, 유죄 판결, 혹은 논박할 목적으로 반대 심문하는 것 혹은 질문하는 것 ··· 논쟁으로, 증거를 제시함; 증명함; 추리의 연쇄로써 증명함.” (고딕체는 우리가 바꾼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