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배양하라
“마음으로 서로 열렬히 사랑하시오.”—베드로 전 1:22, 새번역.
1, 2. (ㄱ) 사랑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ㄴ) 심지어 무신론적 과학자들도 사랑이 절대 필요함을 인정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랑은 평화와 행복과 만족을 누리는 데 절대 필요합니다. 사실상 사랑이 없다면 인생은 살 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그 사실은 유물론적 과학자들도 인정합니다. “나는 사랑이 비할데 없이 중요하다고 단언하고자 한다. ··· 사랑은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하고 저명한 과학자 ‘줄리언 헉슬리’ 경은 썼읍니다.
2 창조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 가지 이유는, 과학자들의 연구가 인간에게 사랑이 필요함을 실증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연구는 사람이 살아나아가는 데 식욕을 충족시킬 필요가 있듯이 인간에게는 또한 사랑을 주고 받을 필요가 있음을 시사합니다. 과학자 ‘애실리 몬터규’는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현재 우리는 수많은 의사와 연구가들의 관찰을 근거로, 사랑이 모든 아기의 자양물의 긴요한 일부이며 아기가 사랑을 받지 않으면 건강한 유기체로 발육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 신체적으로 영양 공급이 좋을지라도 그 아기는 허약해져서 죽을 수 있다.”
인간이 사랑을 소유하고 있는 이유
3. (ㄱ) 일반적으로 어린이들이 그들에게 필요한 사랑을 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인간은 사랑할 수 있는 역량과 재능을 어디에서 받았읍니까?
3 그러나, 다행히도, 어린이에게 필요한 부드럽고 비이기적인 사랑을 어린이가 받지 못할 위험성이 거의 없읍니다. 그 이유는, 성서에서 알려 주듯이, 본능적으로 “어머니가 자기 자녀를 귀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전 2:7, 새번역) 어머니는 자식에 대한 이러한 사랑을 어디에서 얻었읍니까? 그것은 우연히 발전된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있는 창조주께서 그들에게 심어주셨음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에게는 사랑할 수 있는 재능과 역량이 있으며, 사랑을 배양한다면 이 특성은 매우 아름답고 흐뭇한 방법으로 표현될 수 있읍니다.
4. (ㄱ) ‘아담’이 창조될 때 사랑의 특성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알리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ㄴ) ‘아담’이 ‘하와’를 사랑하였고 또 이성을 사랑할 수 있는 역량이 후손에게 전달되었다는 어떠한 증거가 있읍니까?
4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첫 인간 부부를 창조하실 때, 이 사랑의 선물을 주셨읍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즉 사랑이 그분의 탁월한 특성이므로, 그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은 역시 사랑을 소유할 것입니다. (창세 1:26, 27; 요한 1서 4:8) 첫 사람 ‘아담’이 자기의 아름다운 아내에 대한 사랑을 부여받았다는 것은 ‘아담’이 아내를 보자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말로 즐거움을 표현한 것으로 보아 분명합니다. (창세 2:23) ‘아담’은 죄를 범하고 완전성을 상실하였을지라도, 그는 자기의 후손에게 사랑할 수 있는 재능을 전해 주었읍니다. 그 가운데는 이성과 감미로운 즐거움을 나눌 수 있는 인간의 역량도 포함됩니다. 사실, 고대의 현명한 사람은 너무나 기이하여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것 네 가지 중 하나가 “남자가 여자와 함께 한 자취”라고 말하였읍니다.—잠언 30:19; 창세 24:67; 26:8.
사랑은 폭이 넓다
5. 남녀간의 낭만적인 사랑 외에 육적인 친척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에 대한 어떠한 증거가 있읍니까?
5 그러나 남녀 간에 존재할 수 있는 이 낭만적인 사랑 외에, 인간에게는 보통 그들의 육적인 친척에 대한 자연적이고 깊은 애정이 있읍니다. 일례로, ‘요셉’이 여러 해 동안의 이별 끝에 ‘베냐민’을 만났을 때에 “아우를 인하여 마음이 타는듯 하”였읍니다. 후에 그는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울었읍니다. (창세 43:30; 45:14) 또한 가족 간의 이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안드레’는 메시야를 발견하였을 때에 이 훌륭한 소식을 전달하려고 자기의 형제 ‘베드로’를 찾았읍니다.—요한 1:40-42.
6. 사람의 사랑이 육적인 친척 외의 사람들을 포함할 수 있음을 성서의 어떠한 본들이 알려 줍니까?
6 그러나 이 사랑의 특성은 육적인 친척 외의 다른 사람들에게 미칠 수 있으며 그들을 포함할 수 있읍니다. ‘이스라엘’의 ‘베냐민’ 지파의 ‘사울’ 왕의 아들인 ‘요나단’은 ‘유다’의 후손 ‘다윗’의 훌륭한 특성에 크게 감동을 받고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였읍니다. 후에 ‘요나단’이 죽임을 당하였을 때 ‘다윗’은 그를 “형”이라고 부르며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 ‘모압’ 여인 ‘룻’이 그의 시어머니 ‘나오미’에 대하여 나타낸 사랑도, 사랑이 선천적인 육적 친척 이외의 사람들을 포함할 수 있음을 알리는 또 다른 본입니다.—사무엘 상 18:1; 사무엘 하 1:26; 룻 1:16, 17.
7.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얼마나 포괄적이어야 합니까?
7 참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은 또한 그들의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들의 인종과 국적, 사회적 지위 혹은 경제적 신분에 관계없이, 서로 형제 사랑을 가지고 있읍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말로 그 점을 알리셨읍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요한 13:35) 그러나 참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단지 하나님의 동료 종들에게만 국한될 수 없읍니다. 그 사랑은 또 다른 사람들을 포함할 만큼 광범위해야 합니다. 사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명령하셨읍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마태 5:44, 45, 새번역.
우리가 배양해야 할 사랑
8. 사랑이 어떻게 여러 가지 정도와 의미로 표현될 수 있는지 설명하십시오.
8 명백히,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사랑이라는 이 특성은 여러 가지 정도와 의미로 포함될 수 있읍니다. 어떻게 그러합니까? 분명히 그리스도인이 자기를 박해하는 원수에 대하여 가지는 사랑은 자기가 키우는 아기에 대하여 어머니가 가진, ‘요셉’이 ‘베냐민’에 대하여 가진, ‘요나단’이 ‘다윗’에 대하여 느낀, 혹은 그리스도인이 동료 신자에 대하여 느끼는 부드러운 애정과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수에게 호감을 가질 것을 혹은 원수를 반드시 좋아할 것을 기대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원수를 사랑할 의무가 있읍니다. 이것은 모순이 아닙니까?
9, 10. (ㄱ) ‘아가페’의 의미를 아는 것과 여호와께서 그것을 나타내시는 면을 아는 것이 어떻게 우리가 사람들을 사랑하되 좋아하지는 않을 수 있음을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됩니까? (ㄴ) 악하고 부도덕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사랑을 보일 수 있읍니까?
9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 즉 소위 신약에 “사랑”으로 번역된 으뜸가는 희랍어 단어의 의미를 이해한다면 모순이 아닙니다. 그 단어의 명사형은 ‘아가페’입니다.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아가페’에 대하여 ‘더불류. 이이. 바인’ 편저 「신약 단어 해설 사전」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자기 만족의 사랑 혹은 애정이 아니다. 즉 그것은 대상물에 있는 미점을 발견하였을 때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인간 전체는 매우 사랑할 만한 상태에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실은 그들의 잘못이 아닙니다.—에베소 4:17-19; 디도 3:3.
10 ‘아담’으로부터의 유전으로 인하여 모든 인간은 죄 가운데 잉태되었으며, 악행을 하는 경향을 가지고 태어났읍니다. (시 51:5)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인류를 사랑하게 된 것은 인류에게 있는 어떠한 가치 혹은 미점 때문이 아니라 특히 그분이 때가 되면 많은 사람이 그의 사랑에 응하여 그들의 생활을 그의 뜻에 일치시킬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로마 5:8-11) 그러므로, ‘아가페’는 원칙을 존중하는 점에서 구별되는 사랑의 의미를 지니고 있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천적 아버지의 본을 그대로 받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다는 증거를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도 사랑을 나타낼 것입니다. 그들은 냉소적이고 이기적이고 심지어 부도덕하거나 범죄성을 띠고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들의 언행을 미워할지라도, 동시에, 우리는 그들의 개인적 복지에 관심을 기울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응하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것입니다. 당신은 인류 전반에 대한 그러한 사랑, 원칙의 인도를 받는 사랑을 배양하고 있읍니까?
11, 12. (ㄱ) 형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단지 원칙의 인도만을 받아야 합니까? (ㄴ) 부부 간의 사랑과 아들에 대한 여호와의 사랑은 원칙의 인도를 받는 사랑 이상이 ‘아가페’에 포함된다는 것을 어떻게 지적합니까?
11 그러나 사도 ‘베드로’가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마음으로 서로 열렬히 사랑하시오” 하고 썼을 때에 염두에 둔 것은 단지 원칙의 인도를 받는, 그리고 애정과 따뜻함이 결핍된 사랑이 아닙니다. (베드로 전 1:22) 원칙을 존중하는 것이 ‘아가페’의 뚜렷한 특징이지만, 이 사랑은 또한 애정과 호감을 포함할 수 있읍니다. 일례로, 이러한 기록이 있읍니다.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동사형 ‘아가파오’]하기를 제몸 같이 하라.” (에베소 5:28) 분명히, 이것은 그리스도인 남편들이 원수를 사랑하듯이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아내를 사랑하라는 그 훈계는, 창조주께서 목적하신 대로, 남편들이 또한 아내에 대하여 따뜻함, 부드러움 및 애정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12 ‘아가페’라는 희랍어 단어에 애정과 호감의 매우 깊은 감정이 포함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성서의 예에서도 지적되어 있읍니다. 예를 들면,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신다는 기록이 있읍니다. (요한 3:35, 새번역)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단순히 원칙을 존중하는 것에 지배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는 예수에 대하여 부드러운 애정과 동정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성서의 이러한 말과 같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애정, 신세]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느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요한 5:20; 베드로 후 1:17.
13. (ㄱ)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사랑을 가져야 합니까? (ㄴ) “열렬히”에 대한 희랍어 단어의 기본적 의미는 어느 정도의 사랑이 우리에게 적합한지를 어떻게 지적합니까?
13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에 대하여 바로 이 정도의 사랑을 배양해야 합니다. 그것은 마지못한 사랑 혹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하여 의무적으로 나타내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이 소중한 친척에 대하여 가진 사랑, 여호와께서 매우 사랑하는 아들에 대하여 가지고 계신 사랑에 비할 수 있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애정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서로 열렬히 사랑”하라고 격려하였을 때에 서로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이러한 종류 혹은 이 정도라야 한다고 강조하였읍니다. 다른 번역판들은 “강렬히”,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표현하였읍니다. (베드로 전 1:22, 신세, 신 영어 성서) “열렬히”로 번역된 원 희랍어 단어는 문자적으로 “뻗치어”를 의미합니다. (왕국 행간 번역)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은 열렬함을 가지고 극도로 노력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당신은 이러한 사랑을 배양하고 있읍니까?
14. (ㄱ) 왜 우리는 사랑을 배양하고자 노력할 필요가 있읍니까? (ㄴ) 우리는 어떻게 서로 사랑하게 될 수 있읍니까?
14 우리 모두는 그렇게 하기 위하여 노력할 필요가 있읍니다. 왜냐 하면, 약 6,000년 전에 ‘아담’이 불순종하였기 때문에 인류 가족은 죄와 불완전성에 깊이 빠졌으며 여호와의 탁월한 특성인 사랑을 반영할 수 있는 우리의 재능에 불리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친척이 선천적으로 서로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본능적인 사랑도 때때로 비뚤어지고 변태될 수 있읍니다. 고대의 ‘가인’과 ‘에서’ 및 ‘요셉’의 이복 형제들이 그 예입니다. 성서는 이러한 풍조가 또한 사람들이 “무정”할 “마지막 날”에 뚜렷할 것이라고 예언하였읍니다. (디모데 후 3:1-3, 새번역)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이 항상 우리 마음 속에 살아있도록 사랑을 배양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의 이 위기에 살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서로 사랑하게 될 수 있읍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데살로니가 전 4:9)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것을 어떻게 가르치십니까?
하나님께서 사랑을 가르치시는 방법
15. (ㄱ) 어떠한 면에서 여호와께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도록 가르치신다고 말할 수 있읍니까? (ㄴ)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얼만큼 사랑할 의무가 있읍니까?
15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는, 사람을 그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인류에게 사랑할 수 있는 역량과 재능을 주심으로 하나님께서 사실상—우리가 현재는 비록 죄인이지만—우리를 사랑할 줄 알도록 의도하셨다고 말할 수 있읍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실천하라고 반복적으로 명령하심으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도록 가르쳐 오셨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에 의하면,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율법 중 가장 큰 두 가지 계명 중 하나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었읍니다. 제자 ‘야고보’는 이것을 “최고의 법”이라고 불렀읍니다. (마태 22:39; 레위 19:18; 야고보 2:8, 새번역)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대변자의 역할을 하시면서 그리스도인들이 더욱 우월한 사랑을 가지라고, 즉 그분이 그의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같이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읍니다. (요한 13:34; 요한 1서 3:16)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호소력 있는 또 다른 방법으로 인류에게 서로 사랑하도록 가르치셨읍니다.
16. (ㄱ) 여호와께서 특별히 훌륭한 어떠한 방법으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도록 가르치십니까? (ㄴ) 하나님의 사랑의 가장 큰 표현은 무엇입니까?
16 그것은 본으로써 가르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소‘아시아’의 고대 ‘로마’령 ‘갈라디아’ 도에서 군중에게 연설하는 가운데 하나님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선한 일을 하심으로 자신을 알려 주셨읍니다. 곧 하늘에서 비를 내려 주시고 철을 따라 추수하게 하시고 먹을 것과 즐거움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만족하게 하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읍니다.” (사도 14:17, 새번역)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실 뿐만 아니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본으로 보여 주십니다. (마태 5:44, 45) 사랑을 나타내신 그분의 가장 훌륭한 본은 그의 가장 귀한 소유를 통하여 우리에게 유익을 주시는 마련입니다. 성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한 1서 4:9-11.
17. 우리가 여호와에 관한 진리와 우리를 위한 그분의 웅대한 마련을 알 때 어떠한 결과가 있을 것입니까?
17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께서 해 오신 놀라운 마련 즉 우리에게 풍부한 물질적 축복을 주시고 특히 의로운 새 제도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그의 아들을 선물로 주신 점을 고려함에 따라 우리는 여호와께서 얼마나 훌륭한 하나님이시며 창조주이신가에 대한 진리를 알게 됩니다. 여호와의 이러한 마련들에 대한 이 웅대한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와 일치하게 생활하면 그 결과는 어떠할 것입니까? 사도 ‘베드로’는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다고 말하였읍니다. 그렇습니다. 형제 우애와 사랑의 아름다운 가족 관계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충분한 인식을 가지고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이 절대 필요합니까? ‘베드로’는 이렇게 부언하였읍니다. “마음으로 서로 열렬히 사랑하시오.”—베드로 전 1:22, 새번역.
당시 열렬한 사랑이 절대 필요했던 이유
18. ‘베드로’는 언제 첫째 편지를 썼으며, 당시에 무엇이 가까왔었읍니까?
18 열렬한 사랑이 ‘베드로’의 시대에 왜 중요하였는가를 인식하기 위하여 우리는 당시의 상황을 검토할 필요가 있읍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시오.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열렬히 사랑하시오.” (베드로 전 4:7, 8, 새번역) 그 당시 끝이 확실히 가까왔읍니다. ‘베드로’는 기원 62년과 64년 사이 어느 때인가 이 편지를 기록하였으며, ‘유대’인 사물의 제도에 마침내 끝이 온 것은 바로 얼마 후인 70년이었읍니다. ‘로마’ 군대는 ‘유대’ 전 지역, 특히, ‘예루살렘’을 황폐시켰읍니다. 예수의 예언을 고찰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당시에 왜 서로 “열렬히” 사랑할 필요가 있었는지를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19. (ㄱ)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끝이 가까왔음을 알도록 어떠한 징조를 말씀하셨으며, 이 징조는 어떻게 성취되었읍니까? (ㄴ) 그리스도인들은 도망하라는 예수의 명령을 어떻게 청종할 수 있었으며, 순종하는 것이 그들에게 왜 현명하였읍니까?
19 예수께서는 이렇게 예언하셨읍니다.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누가 21:20; 마태 24:15) ‘세스티우스 갈루스’ 휘하의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한 것은 기원 66년 11월이었읍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거룩한” 것으로 간주한 그 도시에 진입하여 성전 벽을 공격하고 그 성벽 밑을 파기 시작하였읍니다. ‘로마’인들은 쉽사리 전체 도시를 정복할 수 있었을 것이지만 갑자기 뚜렷한 이유도 없이, ‘갈루스’ 장군은 군대를 철수시키고 퇴각하였읍니다. 이 기회에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그 다음에 말씀하신 훈계 즉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하라는 말씀을 청종할 수 있었읍니다. (누가 21:21-24) 후에 ‘티투스’ 장군 휘하의 ‘로마’ 군대가 돌아와 그 땅을 공략하여 ‘예루살렘’에서만도 1,100,000명이 죽은 것으로 보고되었읍니다. 실로 “큰 환난”이었읍니다!
20.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명령에 청종하였다는 어떠한 증거가 있읍니까?
20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하였읍니까? 제3 세기의 역사가 ‘유세비우스 팜필루스’는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있던 교회의 전체 집단은 전쟁 전에 그곳에 있던, 신앙심을 인정받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여 명령을 받은 대로 그 도시에서 떠나 ‘요단’ 건너편 ‘펠라’라는 작은 도시에 거주하였다.”a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교훈을 청종하였으며 ‘세스티우스 갈루스’와 그의 군대가 철수한 후에 ‘펠라’ 근처의 산악 지대로 도망하여 무사히 피신하였읍니다. 그러나 그 일은 쉽지 않았읍니다.
21. (ㄱ) 왜 예수께서는 즉각 도망하는 것의 긴급성을 강조하셨읍니까? (ㄴ) 도망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환경을 경험하였을 가능성이 있읍니까?
21 예수께서는 ‘티투스’ 장군이 이끄는 ‘로마’ 군인들이 돌아오면 멸망에 직면한 그 도시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사태가 즉시 진전될 것을 아시고 오래 전에 이렇게 권고하셨읍니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질러 내려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질러 뒤로 돌이키지 말찌어다.” (마태 24:17, 18) 그 결과 순종하는 그리스도인 수백명과, 아마 수천명이 ‘갈루스’와 그의 군대가 철수하자마자 서둘러 지극히 적은 소지품을 가지고 떠났을 것입니다. 짐이 없는 것이 좋았읍니다. 왜냐 하면, 가는 길이 멀었고 험하였으며 연중 그 때에 날씨가 매우 불순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상황 하에서는 도망하는 사람들 사이에 논쟁과 기타 불화가 쉽게 발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모두 어디에서 살 것인가 하는 문제도 있었읍니다.
22. (ㄱ) 당시 그 지역 전체에 어떠한 상태가 존재하였읍니까? (ㄴ)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베드로’의 훈계를 적용하는 것이 왜 중요하였읍니까?
22 그들은 마침내 ‘펠라’ 근처에 임시 은신처, 아마 그곳에 산악 피난민 수용소 같은 것을 세웠을 것입니다.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어찌되었든지 간에, 그들은 곤경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때 전 지역이 부족 사태와 곤란을 당하고 있었읍니다. 그 전체, ‘유대’ 사물의 제도의 끝이 가까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자기의 편지를 읽는 사람들 즉 “나그네”들에게 다음과 같은 영감받은 격려의 말을 한 것은 참으로 적절하였읍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열렬히 사랑하시오.” (베드로 전 1:1; 4:7, 8, 새번역) 그러한 사랑을 가진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에 대하여 이기적이 되지 않으며 화내지 않고, 서로 분담하며 그들이 직면한 어려운 환경을 인내하도록 서로 세워 주고 힘을 돋우어 줄 것입니다.
지금 열렬한 사랑이 절대 필요한 이유
23. 끝이 가까왔다는 성서의 경고는 오늘날 우리에게 의미가 있읍니까?
23 그러나 우리는 단지 그 때만을 돌이켜 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사물의 제도의 결말”에 관한 예수의 예언은 오늘날에도 적용되며, 사실 현재의 적용이 가장 중요합니다. 또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다”는 ‘베드로’의 비슷한 경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현 악한 제도 전체를 일소하고 가까운 장래에 ‘새 하늘과 새 땅’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마태 24:3-22; 베드로 후 3:13) 그러므로 우리는 ‘예루살렘’과 그 주위 지역의 끔찍한 멸망을 무색케 하는 “큰 환난”이 매우 가까운 때에 살고 있읍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다가오는 “큰 환난” 중에 직면해야 할 시련은 근년에 겪었던 두 가지 시련과 비슷할 것입니다.
24, 25. (ㄱ) ‘말라위’ 증인들은 어떠한 경험을 인내하였으며, ‘베드로’의 훈계에 순종하는 것이 그들에게 왜 중요하였읍니까? (ㄴ) 우리가 자신을 어떻게 검토하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까?
24 첫 번의 경우는 ‘말라위’의 여호와의 증인의 경우입니다. 1972년 10월 22일자 「뉴우요오크 타임즈」지는 “여호와의 증인들—필사적으로 도피”라는 표제 하에 이렇게 보도하였읍니다. “지난 주에 동부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인 ‘말라위’에서 대대적인 탄압에 대한 보고가 들어왔다. ··· 그 집단의 여자 성원들이 강간을 당하고 증인들의 가옥이 불태워지고 그 나라의 23,000 신도 대부분이 강제 추방당한 것이나 다름없다.” ‘말라위’ 증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충실하였기 때문에 국경너머로 쫓겨나 거대한 수용소에 수용되었으며 그 곳에서 처음에 생활 필수품의 심한 부족 사태를 겪었읍니다. 많은 사람들은 곤경으로 인하여 사망하였읍니다. 그러한 고통스러운 환경 하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열렬히 사랑하시오”라는 영감받은 조언을 청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겠읍니까!
25 ‘말라위’ 증인의 대부분은 하나님께 대한 충실을 유지하고 영적으로 강한 상태를 유지하며 어려움을 견디어 냈읍니다. 그리고 참으로 도움이 된 것은 위에 있는 성서의 조언에 순종하는 것이었읍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앞에 놓인 시련을 준비하고 있읍니까? 우리는 ‘요셉’이 아우에 대하여 느꼈던 것과 같은, ‘요나단’이 ‘다윗’에 대하여 느낀 것과 같은,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느끼시는 것과 같은 열렬하고 부드러운 상호간의 애정을 배양하고 있읍니까? 그러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이 “마지막 날”에 참으로 절대 필요합니다.
26, 27. (ㄱ) 1972년 12월에 ‘니카라구아’의 ‘마나구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그것은 무엇을 소규모적으로 예고한 것일 수 있읍니까? (ㄴ) 여호와의 증인들은 ‘마나구아’에서의 그 재난 중에 어떻게 서로 사랑을 나타냈읍니까?
26 앞에 놓인 난관은 또한 「깨어라!」 1973년 3월 8일 호에 보고된 재난과 같을지 모릅니다. 그 잡지 기사는 “이 도시를 알리는 간판은 지금도 서 있다. 그것은 묵묵히 ‘마나구아’, 주민 404,700명이라고 알려 주고 있다. 그러나 그 도시 중앙부에는 또 다른 ‘목격자’가 말없이 증언을 해 주고 있다. 국립 궁전 정문 입구에 달려 있는 시계는 12시 35분을 가리키며 멈춰 있다. 1972년 12월 23일 토요일 그 이른 새벽 컴컴한 때에 ‘니카라구아’의 수도는 무시무시한 지진으로 죽어버렸다.” 그렇습니다. 그 도시는 문자 그대로 기능이 정지되었읍니다. 수도가 막히고 전기가 나가고 거의 모든 것이 마비되었읍니다. 멀지 않아 이런 일이 발생할 것입니다. 단 한 도시에 만이 아니라 도시마다 붕괴될 것이며, 전체 사물의 제도가 사멸할 것입니다! 그러한 환경 하에서 우리가 무엇을 실천하는 것이 절대 필요합니까?
27 ‘니카라구아’와 인근 국가에 있는 수백 수천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열렬한 사랑을 나타냈읍니다. 「깨어라!」지는 이렇게 보고하였읍니다. “이들 증인들[지진으로 피해를 입은]과 그 가족들을 돌보는 작업이 즉시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순수한 사랑이 분명하게 표현되었다. 토요일 오후에 한 증인이 ‘트럭’에 300‘갈론’의 음료수를 싣고 16‘마일’ 떨어진 회중으로부터 도착하였다. ··· 그 다음 오후 10시에 ‘코스타리카 리베리아’의 여호와의 증인들로부터 일차로 ‘트럭’ 두대분의 구호품이 도착하였다. 조금 후에 ‘온두라스’의 ‘테구시갈파’ 증인들로부터 ‘트럭’ 두대가 또 도착하였다. 이렇게 하여 재난을 당한지 24시간 정도 되자 식품, 의류, 약품, 음료수, 휘발유 등이 도착되었다!”
28. (ㄱ) 우리는 유명한 ‘마나구아’의 경험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읍니까? (ㄴ) 여호와의 증인들은 서로 사랑을 보이는 면에서 어떠한 방법으로 훈련을 받아왔읍니까?
28 우리는 그 경험으로부터 배울 수 있읍니다. 커다란 고난과 재난이 모든 곳에서 발생할 때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서로에 대한 열렬한 사랑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점을 생각할 때에 우리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러한 환경을 직면하도록 훈련을 받아오지 않았읍니까? 정기적으로 우리는 크고 작은 대회에 함께 모이며 그 대회에서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훌륭한 교훈과 격려를 받습니다. 또한 우리는 서로 음식을 대접하는 식당에서 일한 경험이 있으며, 우리 가정을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숙소로 제공하는 친절을 보여왔읍니다. 참으로 서로 사랑하고 염려하는 훌륭한 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이 놀라운 특성인 사랑을 계속 나타내야 합니다. 이 사랑의 특성이 죄와 불완전성으로 인하여 약 6,000년 동안 매우 뒤틀리고 빗나갔던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서로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계속 배양하는 것은 절대 필요합니다. 왜냐 하면, 만물의 끝이 가까왔기 때문입니다.
[각주]
a ‘C. F. 크루스’가 희랍어에서 번역한 「‘유세비우스 팜필루스’의 교회사」(1894년) 75면.
[393면 삽화]
‘요나단’은 ‘다윗’을 진정으로 사랑하였기 때문에 ‘다윗’에게 그 표시로 몇가지 선물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