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호관계가 좋으면 의사소통이 좋아진다
“이렇게 여러분을 극진히 생각하는 마음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알려 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기쁜 마음으로 여러분에게 내어 줄 생각이었읍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우리의 사랑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데살로니가 전 2:8, 새번역.
1. 남편과 아내에게 어떤 질문이 제시되었으며, 믿을 만한 대답을 얻기 위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남편과 아내되시는 여러분, 여러분은 결혼한 부부로서 서로간에 자유로이 그리고 온전히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읍니까? 당연히 그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두 사람 사이에 어떤 한계 혹은 장벽이 있어서 좌절감을 느끼거나 심하면 적개심을 느끼는 일이 있읍니까? 의사소통의 이야기 곧 그것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그것이 어떻게 훌륭한 토대 위에 세워졌는지에 관한 이야기는 매우 흥미있읍니다. 이 제목에 관해 인도를 받고 지도를 받기 위하여, 우리는 신화나 전설이 아니라, 믿을 만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근원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야 합니다.
2. 의사소통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며, 무슨 결론에 이르게 됩니까?
2 먼저, 사람들은, ‘의사소통’이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를 물어 볼 것입니다. 그것은 한 편에서 다른 편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것, 또는 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하면, 서로가 어떤 것을 함께 갖게 되고, 어떤 일에 함께 참여하게 됩니다. 이것이 정신적인 수준에 국한되어 지식과 이해를 전달하는 것일지라도, 부부간에는 거기에 마음과 감정과 욕망과 상대방에 대한 사랑에 찬 관심이 곁들여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간단하고 직접적인 방법은 입의 말을 통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서로 대화 곧 의사소통을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여러분 상호간에 친교가 있으며, 상호 이해와 정신적 결합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말의 내용 외에 그 말을 하는 방법도 중요합니다. 단순히 한번 바라보는 것도 많은 의미와 느낌을 전달할 수 있읍니다. 결혼 전에 서로 사귀던 시절을 회상하면 그것을 알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 사실로 보아, 의사소통을 잘 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관계가 좋아야 한다는 것이 가장 필수 요건임을 인식하지 않습니까?
3. (ㄱ) 왜 성서는 의사소통의 수단이 됩니까? (ㄴ)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마태복음 15:1-9에서 어떤 사실을 알게 됩니까?
3 그러나, 의사소통의 또 한가지 방법은 기록된 말에 의한 것입니다. 당신이 지금 이 간행물을 읽는 것이 한가지 예입니다. 인쇄물은 당신에게 사상을 전달합니다. 그의 가장 좋은 예는 물론 성서입니다.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은 심지어 그리스도교국에서도, 성서가 지금도 교회 예배에서 사용되고는 있지만, 성서를 하나님의 저작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놀라거나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입장은 예수 당시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모세’의 율법을 지지한다고 주장하였지만, 예수께서 지적하신 바와 같이, 그들은 자기 조상들의 전통을 철저하게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헛되게” 하였읍니다. 잘못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 곧 「‘히브리’어 성경」에 있었읍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첫째로 중요한 것, 여호와를 섬김으로써 좋은 관계를 갖는 데 실패하였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나를 헛되이 예배하며 사람의 훈계를 교리로 가르치고 있다.”—마태 15:1-9, 새번역.
4. 어떻게 하여 우리는 잘 듣고 잘 받아들일 수 있으며, 어떤 결과에 이를 수 있읍니까?
4 오늘날 완성된 성서를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사람들은 기록된 말씀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소식과 또 거기서 전달하려고 하였던 정신에 대하여는 눈멀고 귀가 멀었었읍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예외적인 사람들이 있었읍니다. 당신도 오늘날의 예외적인 사람들 가운데 포함될 수 있읍니다. 예수께서는 그보다 조금 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태 13:11-16.
5. 지상의 다른 창조 활동에 비하여 인간 창조는 무엇이 두드러졌읍니까?
5 당신 자신이 행복한 예외적인 사람들 가운데 들어 있는 것으로 치고, 의사소통의 이야기로 되돌아가서 그것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겠읍니다. 창세기 1장에 있는 창조 기록을 보면, 여섯째 날에 이르기까지는 각 날에, 어떤 일이 발생해야 함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동사의 형태로 행동이 소개되었읍니다. 하나님께서 지시 사항을 발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지시에 응답한 자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구상의 것을 창조하는 일의 절정에 이르러서는 뚜렷한 변화가 있었음을 볼 수 있읍니다. 그 기록은 이러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창조주께서는 하급자에게 지시를 내릴 입장에 계셨지만, 협조를 요청하신 것입니다. 우정적이고 친절한 어조가 내포되어 있으며, 좋은 관계, 즐거운 협동의 상태가 내포되어 있읍니다. 당신이 남편이라면, 당신은 그러한 방법으로, “자, 우리가 ··· 이렇게 합시다” 하는 식으로 말합니까?—창세 1:3, 6, 9, 14, 20, 24, 26.
6. 이 점에 있어서 회중 내의 장로들에게 어떠한 지침이 주어져 있읍니까?
6 우리는 지금 여기서 특히 부부 관계에 대해 논하고 있지만, 동일한 원칙은 여호와의 증인의 회중 내의 장로 곧 감독자들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등 다른 대인 관계에 있어서도 적용됩니다. 장로 여러분은 특별한 책임이 있고, 어느 정도의 권한이 있지만, 의사를 전달하는 일반적인 태도와 방법은 명령적이 아니라 협조를 요청하는 식이어야 합니다. 특정한 구역에서 증거할 때에 접하는 문제와 같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도록 어떤 사람을 도와 줄 때에도, 어떻게 해야 한다고 단순히 설명하는 것보다는 “함께 가서 그 문제를 해결해 봅시다” 하고 말하는 편이 훨씬 더 좋습니다. 비이기적이고 사랑에 찬 온정이 말에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음조와 행동에서도 전달되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회중에 보낸 사도 ‘바울’의 편지에 이 점이 어떻게 명료하고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는가를 보십시오. “이렇게 여러분을 극진히 생각하는 마음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알려 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기쁜 마음으로 여러분에게 내어 줄 생각이었읍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우리의 사랑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말과 행동에 있어서, 상호관계가 좋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좋았던 훌륭한 본이 아닙니까!—데살로니가 전 2:8, 새번역.
좋은 의사소통의 모범적인 본
7. 하나님께서 창세기 1:26에 기록된 말씀을 하셨던 상대자를 ‘요한’은 어떤 분이라고 밝혔읍니까?
7 본래의 이야기로 되돌아가서, 우리는 여호와께서 인간 창조 때에 의사를 전달하였던 상대자가 누구인지를 압니까? 그것을 알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들어졌다는 말의 깊은 의미를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에 관한 그의 복음서의 서두에서 그분을 “말씀”이라고 밝히면서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고 하였읍니다. 인간도 그분에 의해 창조되었읍니다. ‘요한’은 계속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었으며,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였읍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분으로서 그 아버지를 나타내셨’읍니다. 예수에 관한 이 훌륭한 묘사를 보면 확실히 그분들의 사이가 훌륭하였고, 의사소통을 잘 할 수 있었으리라는 점을 느낄 수 있읍니다.—요한 1:1-3, 14, 18; 또한 잠언 8:22, 30, 31.
8. “말씀”이라는 칭호의 의미는 무엇이며,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께 어떻게 적용됩니까?
8 이 점은 “말씀”이라는 칭호의 의미에서도 볼 수 있읍니다. 그 말에는 소식 전달자 혹은 대변자라는 뜻이 있읍니다. 그것은 마치, 휘장 앞에 서서 안에 있는 왕의 말을 외부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전달하던 옛날 관리와 같습니다. 그 관리를 ‘칼 하체’라고 불렀는데, 그 뜻은 “왕의 목소리 또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는 아버지 여호와를 위한 입 또는 대변자였읍니다. 그는 창조주께서 전달하고자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른 자들에게 전달하는 신뢰성 있는 수단이었읍니다. 그는 지상에서 봉사하던 기간에도 동일하게 충실히 봉사하셨읍니다. 그는 한 때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그분께서는 ‘아마겟돈’ 전쟁에서 천군을 인솔하여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집행하실 때에도 동일한 자격으로 말하고 행동하십니다. 그때에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불리웁니다.—요한 12:49, 50; 14:10; 계시 19:13.
9. 창세기 1:26에 어떤 훌륭한 본이 나와 있으며, 지금도 그 본을 따를 수 있읍니까?
9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둘 때에 우리는 인간이 위대하신 창조주와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깊은 감명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이 점을 인식하고 그것을 서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 점이 참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께서는 친절하시게도 우리에게 좋은 관계와 의사소통의 본을 그분의 기록된 말씀에서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우리가 죄와 불완전 가운데서 6천년이나 흘렀는데 지금도 그러한 본을 따를 수 있읍니다. 수많은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서 그렇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남편과 아내 여러분은 그렇게 하고 있읍니까?
10. 인간 지혜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그리고 왜 부부간의 문제를 적절하게 다루지 못합니까?
10 이 본을 좀 더 밀접히 살펴보고, 본받아야 할 필수적인 점들을 알아 보며, 피해야 할 점, 또는 필요하다면, 근절시켜야 할 점들을 알아보도록 합시다. 이것은 사실상 우리가 직면하는 난관들과 문제들을 해결하고 극복하는 유일한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특히 부부 사이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한 문제를 다루는 갖가지 학자들이 많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사회 기관에서 선전을 하고 있으며, 곧잘 조언과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그들의 동기는 의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의 노력은 기껏해야 심리학 분야에 있어서의 인간 지혜의 총화를 나타내는 것 뿐입니다. 사실상, 그들은 결혼이란 인간 사이의 관계이며, 그 수준에서 다루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결혼 관계의 창시자인 창조주의 합당한 위치를 인정하기를 거절하며, 그분이 모든 인간 관계에 대한 충고와 교훈이 들어 있는 성서의 저자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정신과 의사가 자기를 찾아온 환자 또는 고객에게 지도를 위한 최종 권위로서 성서를 지적해 주었다는 말을 들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사제들 혹은 교직자들 중에 그러한 문제를 취급하면서 자기의 교인들에게 그러한 요지로 조언을 해 주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11. (ㄱ) 사람이 진화하지 않았음은 무엇으로 보아 분명합니까? (ㄴ) 창세기 2:23에 나타난 바 ‘아담’의 기록된 첫 말에는 무엇이 나타나 있읍니까?
11 그러나 우리는 세속적 지혜를 멀리하고, ‘위대하신 의사’께서 마련해 주신 책을 참조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확신을 가지고 그분의 도움을 구할 것입니다. (야고보 1:6) 창세기 1:26부터 읽어보면, 인간은 세상적으로 현명한 사람들이 가르치는 바와 같이 진화한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었을 때에 무슨 일이 있었읍니까? ‘아담’은 무슨 말을 할까 당황하지 않았읍니다. 그는 좋아한다는 뜻의 짖는 소리나 싫어한다는 뜻의 으르렁거림으로 그 여자를 대하지 않았읍니다. 그 대신, 그는 즉시 이 이상적인 보조자이며 돕는 자인 이 가장 놀랍고 반가운 선물에게 즉시 큰 소리로 자기의 반응을 전달하였읍니다. 그가 단순히 여자를 보고 멀찌기 서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가 말한 내용으로 보건데, 그가 그 여자를 가까이 잡고서, 다음과 같은, 의미와 감정이 풍부한 말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이 말은 정말 훌륭한 시였읍니다. 짜임도 그렇고 표현의 간결성도 그렇고, 각 마디가 다음 마디와 잘 조화되며, 사상이 점차 발전을 하고, 완전히 균형을 이룬 점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원어로는 이 점이 더욱 두드러질 것입니다. 인간은 참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고,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훌륭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읍니다.—창세 2:22, 23.
12.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아름답게 끝맺고 있읍니까?
12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의 서두에는, 하늘에서와 땅에서, 서로 간에 의사를 소통한 흥미롭고 고무적인 기록이 들어 있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끝을 맺을 때에도 웅장하고 요란한 절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두 개인 사이의 우정적인 대화로 끝을 맺었읍니다.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그리스도 예수]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고 말하자 사랑받던 노령의 ‘요한’은 눈을 번쩍 뜨고 간절하게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하고 응답하였읍니다. 그렇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오십시오’ 하는 어조였읍니다.—계시 22:20.
장벽을 극복하다
13. 인간의 범죄로 인해 의사소통의 길과 수준이 어떻게 영향을 받았읍니까?
13 ‘아담’과 그의 아내가 창조주와의 사이에 그리고 그들 상호간에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동안에는 문제가 없었읍니다. 그러나 고의적인 범죄로 그 관계가 침해를 당하자 의사소통의 길에 즉시 장벽이 생겼읍니다. 동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읍니다. 숨은 이유를 ‘아담’은 “두려워하여 숨었”다고 말하였읍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면할 수 없었으며, 그분이 자기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할까 두려워하였읍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 사이의 의사소통도 별로 다정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아담’이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고 변명조의 해명을 한 점에서 나타나 있읍니다. 또한 ‘하와’는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는 선고를 받았읍니다. 후에 설명하겠지만, “다스리다”라는 단어는 의사소통에 있어서 난관을 초래하는 주된 원인을 지적해 줍니다. 특히 여자에게는 더욱 그러합니다.—창세 3:8-16.
14. (ㄱ)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ㄴ) 히브리서 11장에 자주 나오는 “믿음으로”라는 표현은 무엇을 암시합니까?
14 그렇게 하여 우리로서는 도저히 희망이 없는 처지가 되었으며, 난관을 극복할 전망이 없게 되었읍니까? 「창세기」에는 그렇지 않음을 알려 주는, 어떤 사람들에 관한 사실이 나타나 있읍니다. ‘에녹’과 ‘노아’에 관하여 기록되어 있는데, 그들은 가끔이 아니라 평생 동안 참 하나님과 동행하였읍니다. ‘아벨’의 경우도 틀림없이 그러하였을 것입니다. (창세 5:22-24; 6:9) 두 사람이 함께 동행을 하면, 그 사이는 필연적으로 좋은 관계를 갖게 되고 의사소통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이 세 사람과 다른 사람들에 과하여 말한 다른 표현에서도 그 점이 나타나 있읍니다. ‘바울’은 ‘아벨’로 시작하여, 히브리서 11장에 언급된 사람들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충성과 헌신을 입증하였으며,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었다고 하였읍니다. 이러한 특성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필수적인 점들입니다.—히브리 11:4-6.
15. 왜 여호와께선 죄로 인해 생긴 장벽을 제거하셨으며, 우리는 이에 대해 어떻게 순응해야 합니까?
15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자비와 사랑의 친절로써 그 장벽을 극복하는 것을 가능케 해 주셨읍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편에서 올바른 마음의 태도, 적어도 올바른 태도를 배우려는 의욕을 나타내야만 합니다. 왜냐 하면,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 그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 미치기 때문입니다. (시 103:10-14, 17, 18) 제 고집대로 하려는 혹은 거만한 태도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적극적인 면으로, ‘바울’이 언급한 사람들을 계속 살펴보면, 우리는 ‘아브라함’과 ‘모세’라는 두 사람을 보게 되는데, 우리는 그들로부터 우리가 따르고자 하는 본을 많이 배울 수 있읍니다.
16. (ㄱ) 상호 관계에 관하여 무엇이 유의할 만합니까? (ㄴ) ‘아브라함’은 믿음과 헌신을 어떻게 나타내었으며, 어떤 결과를 얻었읍니까?
16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정지 상태에 있는 경우란 거의 없읍니다. 그것은 발전하든지 아니면 쇠퇴합니다. 그것은 건전하게 자라든지 불건전하게 자라갑니다. 이러한 점은 잘 살피고 보호해야 할 점입니다. 부부로서 밀접히 생활해 나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특히 그러합니다. 처음에는 서로 믿음과 신뢰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취급하여서는 안됩니다. 작은 일에도 이러한 훌륭한 특성을 신속히 나타내십시오. 창세기 12장에서부터 나오는 기록에 나타난 바와 같이, ‘아브라함’은 평생 그렇게 하였읍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신속한 순종으로 여호와께 대한 강한 믿음과 헌신을 입증한 세 가지 큰 사건을 언급하였읍니다. (1) 그는 부름을 받았을 때에 자기 고향과 나라를 떠났으며, (2) 낮선 땅에서 외국인으로 여러 해를 살았으며, 특히 (3) ‘이삭’을 바쳤읍니다. (히브리 11:8-10, 17-19) ‘야고보’는 이상의 점들을 잘 뒷받침하고 있읍니다. 마지막의 예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여호와]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라].” 훌륭한 상호 관계가 되도록 실로 건전하게 성장하였읍니다. 실로 인상적인 결과를 보았읍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께 대해 커다란 믿음을 가졌으며,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벗을 강하게 신뢰하셨읍니다.—야고보 2:21-23; 창세 18:19; 로마 4:16-22; 갈라디아 3:7-9.
17. (ㄱ)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무슨 본을 보이셨읍니까? (ㄴ) 벗관계에는 무엇이 따르며, 이 점을 ‘아브라함’의 예에서 어떻게 볼 수 있읍니까?
17 예수께서는 좋은 의사소통에 관련하여 참다운 벗관계의 본을 말씀하셨읍니다. 기꺼이 섬기고자 하는 정신이 곁들여 있는 겸손, 겸비함이 그 본에서 중요한 부분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하신 마지막 저녁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다음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그날 밤 조금 후에 그들에게 또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요한 13:14, 15; 15:14, 15; 빌립보 2:3) 예수께서는 그들을 신뢰하시고 아무 것도 숨기지 않으셨읍니다. 마찬가지로, 여호와께서는 벗에게 하듯이, ‘아브라함’과 여러 차례 말씀하셨으며, 한번은 매우 친밀하게 상당한 시간을 이야기하셨읍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창세기 18장에 기록된 바와 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관해 하나님께 말씀드릴 때였읍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그러하였읍니다. 그는 신속하게 봉사하였읍니다. 그는 믿음을 나타냈읍니다. 그는 커다란 존경심을 보였읍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말하기를, 아내들이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될 수 있다고 하였읍니다.—베드로 전 3:5, 6; 창세 18:6; 히브리 11:11.
18. ‘모세’의 경우에는 무엇이 특이하였으며, 무슨 특별한 의사소통을 하게 되었읍니까?
18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여호와의 벗”으로서 밀접한 관계를 가졌지만, ‘모세’에게 있어서는 의사소통에 있어서 탁월하고 예외적인 경우였읍니다. ‘모세’를 비방하였다는 이유로 ‘미리암’과 ‘아론’을 책망하실 때에,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느니라].” (야고보 2:23, 신세; 민수 12:6-8) 여러 해 전에, 여호와께서, 진 바깥 멀리 떨어진 곳에 지은 ‘모세’의 장막을 “회막”으로 사용하신 점을 설명한 기록을 보면, “모든 백성이 회막문에 구름 기둥이 섰음을 보고 ···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었다고 하였읍니다. 이렇게 하여 웅대한 의사소통을 하게 되었읍니다. ‘모세’의 요청을 받고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하셨읍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출애굽 33:7-11, 17-20; 34:6, 7.
19. ‘모세’가 특이한 입장을 누린 데 대한 이유를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읍니까?
19 ‘모세’는 여호와와 그렇게 밀접한 의사소통을 한 점에 있어서 확실히 특별하였읍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가지는 “목이 곧”고 “악”하며 매우 다루기 힘든 백성의 지도자로서 그러한 도움이 크게 필요하였고, 또한 ‘모세’ 자신도 여호와께 흔들리지 않는 충성을 유지하였기 때문입니다. (출애굽 32:9, 22, 25-29) 또 한 가지 특성이 언급되어 있읍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이 점에서도 그는 특이하였지만, 그에 관한 마지막 말을 보아도 그러하였읍니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라].”—민수 12:3; 신명 34:10.
요약
20, 21. (ㄱ) 상호관계와 의사소통에 대한 천적인 본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읍니까? (ㄴ) 또한 지적인 본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읍니까?
20 그러므로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읍니까? 서로간에 좋은 관계를 형성하고 결과적으로 좋은 의사소통을 갖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영감받은 성경을 보면, 먼저 여호와와 그분의 아들의 예가 있읍니다. 시초부터, 서로간에 진정하고 사랑에 찬 관심이 있었읍니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에] ··· 나를 가지셨으며 ···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느니라].” 여호와께서는 우월하시면서도 자기 아들의 협조를 요청하셨읍니다. 그 아들은 또한 언제나 존경심이 강하였고 순종적이었읍니다. 그분들 사이에는 밀접한 접촉과 신뢰감이 있었읍니다. 그분들은 서로 온전히 연합해 있었읍니다.—잠언 8:22, 30; 창세 1:26; 요한 11:42; 14:10, 11.
21 하나님의 말씀에서 지상의 본을 보면 어떻습니까? 당신의 배우자는 당신과 같이 불완전하지만, 슬기로운 방법으로 서로 감사를 나타내는 방법을 배우며, 젊었을 때만이 아니라 노년기에도 그렇게 하십시오. 교만이나 이기심으로 인해 지배적인 태도를 갖지 않도록 하십시오. 무엇이든지 자기 방법으로 하려고 하거나, 사소한 일에까지 배우자도 당신의 방법대로 하기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서로 함께 걸으며 이야기하고 거기에 따라 속도와 기분을 조절하도록 하십시오. 상호간의 믿음과 신뢰감을 길러 가고 유지하십시오. 자유로운 의사소통에 있어서 의심은 가장 나쁜 원수입니다. 참된 우정의 띠를 길러가고 강화하도록 하십시오. 자비와 온유함으로 부드러운 애정을 실천하고 나타내십시오.—빌립보 1:8; 데살로니가 전 2:8; 야고보 5:11.
22. 또 무슨 중요한 질문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읍니까?
22 부부가 참으로 성실하게 이러한 일을 하려고 노력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참 그리스도인들이든 아니든 쉽게 문제거리가 발생할 수 있읍니다. 특히 분열된 가정에서는 충실한 행로를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읍니까? 다음 기사에서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살펴보겠읍니다.
[368면 삽화]
‘앗수르’ 왕의 대변자 혹은 ‘칼 하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