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목자”와 그의 “다른 양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하리라.]”—요한 10:16.
1. “선한 목자”는 어떻게 “삯군”과 다릅니까?
선한 목자는 단지 급료에만 관심이 있는 삯군과는 다릅니다.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해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하느니라.]”—요한 10:11-13.
2. (ㄱ)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심으로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의 어떠한 일을 언급하고 계셨습니까? (ㄴ) 예수께서 바치신 인간 영혼은 일반적으로 누구의 유익이 되었습니까?
2 그 당시 중동 지방의 초장에서 양들을 치는 것은 생명에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한때 목동 다윗이 그의 부친 이새의 양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곰과 사자와 싸워 죽이지 않으면 안 되었었던 일을 기억합니다. (사무엘 상 17:34-36) 예수께서는 양들을 늑탈하는 이리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리를 쫓아버리는 일에는 목자의 신체에 상처를 가져올 위험이 따를 수 있었습니다. 선한 목자는 삯군처럼 개인의 안전을 위해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약탈하는 야수로부터 양들을 보호할 것입니다. “선한 목자”는 심지어 하나의 양도 잃지 않도록 기꺼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까지 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 주의를 이끄심으로써 예수께서는 자기가 여호와의 “양들”을 위해 하나의 인간 영혼으로서 죽으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기꺼이 이러한 “선한 목자”의 특징을 갖추고자 하셨습니다. 그분의 천적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은 지상의 “양들”의 주인이시며, 그 “양들”을 매우 사랑하셨기 때문에 자기 아들로 하여금 그의 인간 생명을 기꺼이 바치게 하셨습니다. 예수의 인간 ‘영혼’은 범죄한 아담으로부터 유전받은 죽음으로부터 인류를 속량하는 데 대속의 희생으로서 바쳐졌습니다.
3. (ㄱ) 요한 복음 10:14, 15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자기 아버지와 관련하여 자신을 무엇에 비교하셨습니까? (ㄴ) “적은 무리”와 함께 아브라함에 대한 약속에 참여하기 위하여 예수께서는 어떠한 일을 기꺼이 하고자 하셨습니까?
3 “선한 목자”는 또한 양 무리의 각 양들과 친근하며 각 양들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그 이름으로 부르며 양들을 귀여워하고 그 필요를 돌보아 줍니다. 예수께서는 중동 지방의 목자의 이러한 특성을 염두에 두시고 계속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한 10:14, 15)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을 하나의 상징적 “양”으로 보셨습니다. 그분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셨습니다. (요한 1:29) 성서의 마지막 책인 「계시록」에서 그분은 28회나 “어린 양”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족장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 대신에 바친 수양에 의해 예표되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명령대로 자기 아들을 기꺼이 제물로 바치려고 하였었습니다. (창세 22:1-13) 이삭은 아브라함에 대한 약속을 받아 야곱에게 전달하였습니다. 이삭과 같이 예수께서는 아브라함에 대한 약속을 상속받으셨으며, “적은 무리”와 함께 그 약속에 참여하기 위하여 희생되는 것을 기쁘게 여기셨습니다.
4. 예수께서는 “적은 무리”를 아버지의 손에서 “잡아챘”습니까? 예수께서는 그 “무리”를 어떻게 평가하셨습니까?
4 그러므로 예수께서 아브라함과의 언약의 마련인 “양의 우리” 안에 있는 “적은 무리”를 구원하는 데 진정한 관심을 가지고 계심이 분명하였습니다. 그분은 그들을 자기 아버지로부터의 아주 값진 선물로 평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맡겨 주신 것은 무엇보다도 소중하다. 아무도 그것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요한 10:29, 공동 번역.
“다른 양들이 내게 있”다
5. 예수께서 양과 같은 사람들을 천적 생명으로 구원하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님을 무엇이 알려 줍니까?
5 그리스도교국의 교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가르치고 있지 않을지 모르지만, 예수께서는 인간 피조물을 단지 천적 생명으로 구원하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요한 10:16) 그러면 이들 “다른 양들”은 누구입니까?
6. (ㄱ) 그리스도교국의 교회들은 “이 우리”와 “다른 양들”에 관하여 어떻게 가르칩니까? (ㄴ) 누가 복음 23:43에 언급된 낙원과 양과 염소의 비유에 관한 예수의 말씀은 무엇을 시사합니까?
6 그리스도교국의 교회들은 여기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양] 우리”는 오직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만을 수용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고, “다른 양들”은 비유대인 즉 이방인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인들이 된 사람들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믿는 유대인들과 믿는 이방인들이 함께 “한 목자” 아래 한 영적 우리 안에서 “한 무리”가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은 이 제목에 관한 다른 성귀들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 기록 가운데서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예수께서는 그의 왕국에서 있을 지상 낙원에 대하여 말씀하셨고, 또 그의 천적 공동 후사들의 “적은 무리” 외에도 다른 사람들을 “양들”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당시로는 장래의 일이 될 그분의 임재(臨在)와 사물의 제도의 결말에 관한 “징조”를 말씀하셨을 때 마태의 기록에 의하면 그분은 양과 염소의 비유로 그 “징조”를 마치셨습니다. 이들 “양들”은 그리스도의 영적 “형제”들이 아니며, 이들 양과 같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영적 형제들에게 선을 베풉니다.—누가 23:43; 마태 24:3; 25:31-46.
7. 요한은 왜 양과 염소에 관한 예수의 비유를 잘 기억할 수 있었고, “이 우리” 안에 수용되는 수를 인식할 수 있었습니까?
7 사도 요한은 그 비유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와 그의 형제 야고보와 또한 베드로와 안드레가 조용히 “징조”를 물어 예수로 하여금 그 예언을 하게 한 자들이며, 요한은 그 예언 전체를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가 13:3, 4) 그러므로 “다른 양들”에 대한 예수의 말씀을 기록하였을 때 그는 양과 염소에 관한 예수의 비유를 잘 기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또한 영적 이스라엘의 12지파에는 다만 144,000명의 성원이 있음을 알리는 계시를 받은 연로한 사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적은 무리”를 수용하는 “양의 우리”가 구원받은 모든 자들 중 제한된 수만 포함될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8. 사도 바울은 영적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나무와 관련해서 무엇에 비유하였으며, 그 “나무”의 주요 부분들은 무엇을 상징하였습니까?
8 로마서 11장에서 사도 바울은 영적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재배된 감람나무의 가지들로 비유하였습니다. 상징적 감람나무의 뿌리는 육적으로 말해서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인 족장 아브라함으로 예표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무 줄기는 계속되는 족장들 즉 이삭과 야곱과 육적 이스라엘 민족의 12지파의 12족장들을 상징하였습니다. (사도 7:8) 이 줄기에서 뻗어나는 가지들은 할례받은 육적 이스라엘의 12지파에 속한 유대인 성원들을 상징하였습니다. 당연히 이들이 “씨”에 관한 아브라함에 대한 약속의 후사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씨”에 의하여 지상의 모든 족속과 민족이 영원한 생명의 길을 향해서 그들 스스로를 축복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할례받은 육적 유대인들이 그 ‘아브라함의 씨’를 형성할 처음 기회를 가질 자들이었습니다.
9. 나무의 특성을 고려할 때, 상징적 “가지들”은 누구였으며, 그러므로 참된 “뿌리”와 “줄기”는 각각 누구를 상징하였습니까?
9 이제 우리는 그 “씨”가 영적인 하나의 씨이고 여호와 하나님에 의하여 출생해서 그분의 영적 아들들이 된 씨라는 것을 압니다. 그분이 그 영적 감람나무의 참 “뿌리”였습니다.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더 큰 아브라함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그 “씨”의 주요한 필수적인 성원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이 상징적 감람나무의 줄기로 상징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나무의 “가지들”은 그와 함께 공동 후사가 될 영적 ‘아브라함의 씨’의 소수 성원들인 충실한 제자들을 상징할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가지들”의 수는 제한이 없을 것입니까?
10. 로마서 11:11-32에서 바울은 그 상징적 감람나무의 “가지들”의 수가 오직 제한된 수일 것임을 어떻게 밝혀 줍니까?
10 사도 바울은 그 영적 감람나무의 “가지들”의 수가 오직 제한된 수일 것임을 알려 줍니다. 어떻게 그러합니까? 그 이유는 문자적 가지들이 꺾어지면 본연의 다른 가지가 그 곳에서 자라지 않을 것이라고 바울이 지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 들감람나무의 가지가 그 자리에 접붙여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접붙여진 들감람나무는 그 나무의 가지들의 수를 증가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그 나무 줄기에 달린 가지들의 수는 똑같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받은 육적 유대인들이 더 큰 아브라함의 주된 씨인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며 불신의 태도를 나타내어 그 영적 나무에서 꺾어졌을 때, 비유대인 즉 이방인들이 그 꺾어진 본“가지들”의 자리에 접붙여졌습니다.—로마 11:11-32.
11. 바울은 갈라디아서 3:26-29에서 영적 이스라엘의 우리 안에 있는 자들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분류되어서는 안 됨을 어떻게 밝혀 줍니까?
11 그러므로 마땅히 그 아브라함과의 언약 나무의 그들 가지들은 육적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가지들은 모두 영적 이스라엘인들로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 점을 명백히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약속과 아브라함의 씨에 대하여 토론한 다음에 그는 계속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라디아 3:8, 16, 26-29.
12-14. (ㄱ) 바울은 갈라디아서 4:21-31에서 갈라디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누가 그들의 영적 어머니라고 지적하였습니까? (ㄴ) 그러므로 바울은 “이 우리” 안에 있는 “적은 무리”는 유대인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까?
12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인에게 이 편지를 쓴 것은 기원 50-52년경이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형주에 못박히게 하심으로 율법 언약을 도말하신 지 적어도 17년이 지나간 때였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 회중의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아라비아 시내 산에서 모세를 중보로 하여 체결된 그 율법 언약의 법에 속박되고자 하였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들은 지적 예루살렘과 아기 예수를 죽이려 한 헤롯 대왕에 의해 그 곳에 건축된 물질적 전에 고착한 적그리스도인인 유대인들과 함께하고자 하였습니다. 그 예루살렘은 아브라함의 계집 종 하갈에 의해 예표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더 큰 모세로서 받아들이지 않고 모세의 율법에 계속 속박되기를 원했던 유대인들에게 어머니와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점에 관해 바울은 다음과 같이 편지하였습니다.
13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 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라디아 4:21-5:1.
14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유대인도 아니었고 이스라엘인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자유 여자, 사라의 아들로서 야곱의 아버지였습니다. 야곱은 나중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아 유다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 우리” 안에 있는 “적은 무리”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아브라함에 대한 약속을 상속하는 점에서 이삭과 같습니다. 하늘의 예루살렘은 유대인이 아니요 히브리인 이삭의 어머니인 사라에 의해 예표된 그들의 영적 어머니입니다.
15, 16. 요한 복음 10:16-18에서 예수께서는 “한 목자”의 인도를 받기 위하여 “다른 양들”을 한 “우리” 안으로 인도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15 복합적인 ‘아브라함의 씨’의 성원들을 수용하는 “양의 우리”에 대해 논한 다음에, 예수께서는 방향을 바꾸어 계속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한 10:16-18.
16 우리는 예수께서 이들 “다른 양들”을 “이 우리” 안으로 “인도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은 점에 유의합니다.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그분은 단지 “한 목자”가 있을 것이므로 “한 무리”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7. 예수께서 “이 우리”를 고려한 일로부터 “다른 양들”에 대한 말씀으로 부드럽게 간격 없이 넘어간 사실에 비추어 어떻게 추리할지 모릅니까? 그러나 그것이 꼭 옳은 것입니까?
17 예수께서 “이 우리”를 고려하는 일로부터 “다른 양들”을 인도하는 일로 매우 부드럽게 넘어가기 때문에 독자들은 이 두 가지 일이 시간의 큰 공백이 없이 틀림없이 여러 세기가 지나는 일이 없이 짧은 기간에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을지 모릅니다. 또한 이런 이유로, 예수께서 사도 시대의 그리스도인 회중에 확장의 역사에 따라서 “이 우리” 안으로 비유대 민족들 즉 이방인들을 인도하는 일에 대해 언급하신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예수께서는 먼 앞날까지의 장기간의 예언을 고려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고 결론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결론짓는 것이 꼭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이 우리”와 “한 무리” 사이의 차이를 구별하지 않습니다.—계시 7:8, 9 비교.
18. 예수께서는 장기간의 예언을 하실 수 있었습니까? 그리고 땅의 모든 민족의 축복이 있기 전에 어떠한 일이 먼저 있어야 합니까?
18 예수께서는 예언적 환상을 선물로 받으셨기 때문에 1,900년 후에 성취될 일인 양과 염소의 비유를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약속된 ‘아브라함의 씨’의 기초 성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인류의 모든 족속과 민족이 그 씨를 통하여 그들 스스로를 축복함으로써 영원히 구원받는 일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한 축복이 이루어지려면 그 복합적 ‘아브라함의 씨’로서 144,000명 성원들이 그분 아래 완성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역사적 사실이 알려 주듯이 19세기란 기간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들 스스로를 축복할 자들이 모든 족속과 민족의 양과 같은 사람들임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아브라함의 약속의 상속자들이 인도되는 “이 우리”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에 “다른 양들”에 속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적 이스라엘인들이 아니고 상대적으로 말해서 이방인들이었습니다.
19. 계시록 7장 앞 부분에 기록된 점을 고려해 볼 때, 계시록 7:9-17에 묘사된 “큰 무리”는 누구입니까?
19 이와 일치한 사실로서, 사도 요한은 계시록 7:1-8에 묘사되어 있는 바와 같이 영적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인치는 일을 본 다음에, 셀 수 없는 “큰 무리”에 대한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영적 이스라엘 백성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다른 양들”에 속합니다. 그들은 보좌 앞에 서서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고 외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큰 환난”을 살아 남을 것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여호와 하나님께 그분의 전에서 밤낮 거룩한 봉사를 바칠 것입니다. “선한 목자”는 이들 “다른 양들”에게 사랑의 주의를 기울이실 것입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리라.]”—계시 7:9-17.
20. “큰 무리”의 환상에 대한 성취가 언제 어디에서 성취되기 시작하였으며, 이 점이 어떻게 증명되었습니까?
20 계시록 7장에 기록된 일의 순서와 일치하게 「계시록」의 “큰 무리”의 환상에 대한 설명이 나온 것은 1914년에 “사물의 제도의 결말”이 시작된 지 20년이 지난 1935년 봄에 있었습니다. 이 일이 1935년 5월 31일에 미합중국 수도에서 개최된 대회에서 있었습니다. 그 때, 당시의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 회장인 J. F. 러더포드는 “큰 무리”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하였고 이 “큰 무리”가 종전의 생각처럼 이차적 천적 반열이 아니라 지적 반열이며 “선한 목자”의 “다른 양들”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이 설명이 나중에 「파수대」(영문)지에 발행되었습니다. 사실 그 때 “선한 목자”는 “다른 양들”을 인도하기 시작하셨으며, 그들은 그분의 음성을 듣기 시작하였고 그분을 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계시록 7:9-15에 대한 그 설명이 있은 바로 다음날에 물침례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헌신을 상징한 사람들이 840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 중 대다수가 그리스도의 “다른 양”인 “큰 무리”임을 설명하였습니다.
21. (ㄱ) 그러므로 “선한 목자”는 “적은 무리” 외에 또 누구를 위해 자기 영혼을 바치셨습니까? (ㄴ) 이 목자는 어떻게 자기 영혼을 다시 받으셨으며, 그것은 누구의 사랑의 표현이었습니까?
21 “선한 목자”는 아브라함에 대한 약속의 상속자들이 들어 있는 “우리”에 속해 있지 않는 이들 “다른 양들”을 위해서도 자기 ‘영혼’을 바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씨” 반열 중 한 사람이었던 사도 요한은 이렇게 편지하였습니다. “저[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요한 1서 2:1, 2) 천적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는 자기 아들을 매우 사랑하셨습니다. 이 일을 진심으로 인식한 “선한 목자”이신 예수께서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자기를 미워한 그들 앞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10:17) 아버지께서는 자기를 희생한 “선한 목자”를 죽은 자로부터 삼 일 만에 일으키심으로 아들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여 하나님의 아들은 자기 ‘영혼’을 다시 받아 살게 되셨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하늘 수준의 생명을 받으셨습니다.
22. 예수의 생명을 빼앗으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그분이 요한 복음 10:18의 말씀을 하실 때까지 아무도 그분의 인간 영혼을 빼앗을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22 예수께서 “다른 양들”에 대하여 말씀하셨을 때까지 이 “선한 목자”의 생명을 취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사람들에 의해 처형당할 만한 어떠한 일도 결코 하시지 않았습니다. 이 점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한 10:18.
23. 예수께서 스스로 자기의 인간 영혼을 바치신 때는 언제였으며, 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23 수개월 후에 이 말씀에 대한 증거가 제시되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배반당하시던 날 밤에 제자 베드로가 칼을 들어 그분을 보호하고자 하였을 때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마태 26:53, 54)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사도들이 자기 옆을 떠나게 한 다음에 체포하러 온 군중에게 스스로 자기 자신을 내주시어 자기를 죽이려는 마지막 시도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예수께서 자기 생명을 헛되게 버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24. 예수께서는 아버지로부터 자기 영혼에 관한 어떠한 완전한 권세를 받으셨으며, 이 권세 행사를 막으려는 마지막 시도가 어떻게 실패했습니까?
24 예수께서 이 행로를 취하시는 권세를 아버지로부터 받으셨지만 이렇게 할 것인가는 그의 자유 의지에 달려 있었습니다. 부활에 의해 자기 영혼을 다시 받는 권세는 그의 자진적인 자기 희생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가 자기 영혼을 죽음에 버리셨기 때문에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께서는 그를 죽은 자로부터 일으키실 수 있는 유일한 분으로부터 생명을 다시 받는 권세로 그를 옷 입히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어떠한 권세도 예수께서 자기의 ‘영혼’ 즉 생명을 다시 받는 이 권세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무에서 죽은 후 그를 묻은 무덤의 입구를 막은 커다란 돌 위에 붙여진 총독의 봉인도 또한 제자들이 시체를 도적질하지 못하게 세워 놓은 경비병도 예수께서 삼 일 만에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행사하는 것을 막지 못하였습니다.—마태 27:62부터 28:15.
25. 예수께서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으로 인간 생명을 상실한 것이 아니므로 그 생명을 어떻게 인류의 유익을 위해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까?
25 참으로 예수는 이 모든 일을 행하라는 천적 아버지의 명령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죽으신 지 삼 일 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아들에게 죽은 자로부터 일어나 천적 아버지와 함께 영의 영역에서 다시 생명을 받으라는 명령을 발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으로 인간 생명을 상실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분은 하늘 전에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바쳐서 온 세상의 죄를 속할 수 있는 완전한 인간 생명에 대한 권리 혹은 자격을 받으셨습니다.
26. (ㄱ) 그리하여 땅의 모든 민족이 어떻게 하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까? (ㄴ) 특히 언제 예수의 “다른 양들”의 “큰 무리”가 그들 스스로를 축복하기 시작하였습니까?
26 그리하여 ‘아브라함의 씨’의 으뜸되신 분을 통하여 세상의 모든 족속과 민족이 “그들 스스로를 축복할”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창세 12:1-3; 22:15-18) “선한 목자”의 “다른 양들”의 “큰 무리”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헌신하고 이 헌신을 물침례로 상징하였을 때 그분을 인하여 “그들 스스로를 축복”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 그들은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들었고 ‘아브라함의 씨’의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들과 함께 그분을 따랐습니다. 이 일이 특히 1935년 워싱턴 (D.C.) 대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들은 모든 “다른 양들”을 환영하였고 예수께서 예언하신 바와 같이 “한 목자” 아래 “한 무리”가 되었습니다.
27. “큰 환난”을 살아 남은 “큰 무리” 외에 또 누가 선한 목자의 “다른 양들”의 일부가 될 것이며, 그 때는 언제일 것입니까?
27 왕으로 즉위하신 “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 기간에 인류의 대속된 모든 죽은 자들이 죽음의 잠으로부터 일으킴을 받아 선한 목자의 “다른 양들”의 일부가 됨으로 “그들 스스로를 축복할” 기회를 갖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는 아브라함과의 언약의 마련을 대표하는 “양의 우리”의 이전 “문지기” 즉 침례자 요한도 포함될 것입니다. (요한 10:1-3) 예수께서는 순종하는 자들을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다가오는 “큰 환난”을 살아 남은 “큰 무리”는 부활된 수십억의 사람들에게 축복이 될 것입니다. 이들 역시 “생명수 샘”을 이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계시 7:9-17) 양과 같은 모든 자들은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고 외치는 “큰 무리”에 가담할 수 있을 것입니다.—계시 7:10; 20:11-14.
[44면 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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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들”을 위한 여호와의 마련
(1) “선한 목자”: “양들”을 위해 자기 영혼을 바치는 예수 그리스도
(2) “문지기”: “양들”에게 “목자”를 소개하는 침례자 요한
(3) “양의 우리”: 아브라함과의 언약 마련의 왕국 우리
(4) 이 우리 안의 “양”: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이루어진 “적은 무리”
(5) “양의 문”: 예수
(6) “타인”, “도적”, “삯군”: 배교자들과 거짓 목자들
(7) “다른 양들”: 왕국의 땅의 영역을 상속받는 “큰 무리”와 다른 사람들
(또한 「파수대」(영문) 1946년 5월 15일 호 147-158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