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위험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
1. 그러한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우리는 어느 길을 따라야 합니까?
시편 91편에 묘사되어 있는 영적 위험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를 얻으려면 우리는 그 내용이 알려 주는 길을 따라야 합니다. 이 길의 일부를 알리기 위하여 이 시편 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라].”—시 91:2.
2. 출애굽기 6:2, 3과 일치하게 독특한 이름을 가지신 분이 누구입니까?
2 이 시편 필자(혹은 그가 대표하는 사람)가 여호와를 가리켜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라고 한 것에 우리 모두는 유의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지존자이시며 전능하신 자가 여호와라는 독특한 이름을 가지신 분임을 알려줍니다. 이것은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온 후에 이 지존자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바와 일치합니다. “나는 여호와이다. 그리고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늘 전능한 하나님으로 나타나기는 하였으나, 나의 이름 여호와에 관하여는 내가 나 자신을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다.”—출애굽 6:2, 3, 신세.
3. 전능하신 자께서는 그의 이름의 의미를 설명하실 때 어떠한 ‘히브리’어 표현을 사용하셨으며, 일부 영어 번역판의 번역에 따르면 이 표현은 무엇을 의미 혹은 내포하고 있읍니까?
3 전능하신 자께서 자기의 이름의 의미를 설명하실 때 ‘모세’에게 “에혜 아셀 에혜”라고 말씀하셨읍니다. 출애굽기 3:14에 ‘히브리’ 원본에 나오는 이 표현은, “나는 내가 될 자가 되겠노라(I WILL BE THAT I WILL BE)” (‘랍비’ ‘리서’역); 혹은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되겠노라(I Will Become whatsoever I please)” (‘로더함’역); “나는 내가 증명될 자로 증명되겠노라(I SHALL PROVE TO BE WHAT I SHALL PROVE TO BE)”(신세계역)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이 전능하신 자가 그의 백성의 환경에 따라 적응하실 수 있으며, 더우기 그의 백성을 위하여 그리고 그의 목적과 일치하게 그가 되어야 할 혹은 증명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대로 그분이 되거나 증명될 수 있고 또 그렇게 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은 어떤 입장이든 성공적으로 대처하실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히브리’어 표현은 그분이 스스로 계신 것, 즉 그분의 영원한 존재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4. (ㄱ) 여호와라는 이름의 ‘히브리’ 어원을 살펴보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누구 혹은 무엇에 관련된 이름입니까? (ㄴ) 이 이름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에게 적용되는 점은 어떠합니까?
4 하나님의 이름은 그 표현과 관련이 있읍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대대로 기억할” “표호”로 지어진 것입니다. (출애굽 3:15) ‘히브리’어로 여호와라는 이름의 근원을 살펴보면 “그는 되게 하다(혹은 증명되다)”라는 뜻인 것 같습니다. 즉 자신에 관하여 그리고 그분이 되실 일 혹은 증명되실 일에 관하여 그러하다는 것이며, 사물을 창조하시는 것과 관련하여 그러하시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성 세계 전체를 통하여 지존자이시며 전능하신 자이신 그분 외에 또 누가 그러한 자신의 이름을 지어 가질 수 있겠읍니까?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도 그러한 이름을 가질 것을 생각지 않으셨읍니다. 그분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라”는 뜻인 ‘예수아’ 혹은 ‘예수’와 같은 하나님의 이름이 결합되어 있는 이름을 가질 수는 있었지만 엄격히 여호와라는 이름만을 가질 수는 없었읍니다.—예레미야 23:6; 33:16.
5. 여호와께 그분은 “피난처”요 “요새”가 되신다고 말하는 것이 왜 적절하며, 잠언 18:10은 현명하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5 그러므로 이 시편 필자로 대표된 사람들이 시편 91:2에서 여호와께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분은, 특히 전쟁 이후인 기원 1919년 이래, 그들에게 그러한 것들이 되셨읍니다. 물론 영적인 면으로 그러합니다. 여호와는 보이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에 대하여 그렇게 말하고 진실로 그렇게 생각하고 그와 일치하게 행동하는 데는 강한 믿음이 요구됩니다. 하지만 안전을 얻을 수 있는 피난처가 될 곳이 지존자이신 여호와 외에 또 누가 있겠읍니까? 어느 요새가 전능하신 자 자신보다 더 튼튼하고 공격하거나 정복하기 힘든 요새이겠읍니까? 다음과 같은 고대 ‘솔로몬’ 왕의 기록은 참으로 영감에 의한 지혜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언 18:10.
6. 이제 그리스도께서 관련되어 계시지만 구원을 위하여 누구의 이름을 불러야 하며, 그리스도인들에게 “피난처”와 “요새”가 되는 분은 누구입니까?
6 결국에는 이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그래도 타락한 죄인인 인간 피조물들은 영원한 구원을 위하여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게 말한 것은 다만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언자 ‘요엘’뿐만이 아닙니다. (요엘 2:32) 기원 33년 오순절날 그리스도인 회중이 설립될 때 사도 ‘베드로’ 역시 그렇게 말하였읍니다. (사도 2:21) 여러 해 후에 사도 ‘바울’ 역시 로마 10:13에서 그렇게 기록하였읍니다. 지존자이시며 전능하신 자이신 그분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은 다만 그의 중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야 하지만 아직도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고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실 분은 여호와이십니다.—스바냐 3:12.
의뢰해야 할 하나님
7-9. (ㄱ) 시편 91편의 ‘나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왜 그 시편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키는 것을 막지 못합니까? (ㄴ) 부활되신 예수 앞에서 의심하던 ‘도마’는 무엇이라고 외쳤으며,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이 내용을 포함시킴으로 무엇을 증명하였읍니까?
7 이 여호와는 이 시편 필자에게 피난처와 요새만 되시는 분이 아니었읍니다. 여호와에 대한 그의 언명 전체는 이러합니다.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시 91:2.
8 이 시편 필자가 그분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른 것은 여호와만이 신격자로서 그가 숭배하는 분임을 의미합니다. 이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여호와께 대하여 사용하실 만한 올바른 표현일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시편 91편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키는 것을 막지 못합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밖에서 형주에 달려 운명하시기 전에 그분은 시편 22:1을 인용하여 하늘에 계신 그의 아버지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외치셨읍니다. (마태 27:46; 마가 15:34)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되신 후에 사도 ‘도마’로 하여금 자기의 손과 발에 있는 못 자국을 살펴보게 하셨으며, 그것을 본 ‘도마’는 놀래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하고 말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도마’의 외침을 올바로 이해하셨고, 사도 ‘요한’도 그러하였읍니다. ‘요한’이 이 경우를 그의 복음서에 기록할 때 그는 예수가 여호와 하나님이라든가 예수가 삼위일체의 “아들 하나님”이었다는 생각을 전달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읍니다. 그렇지 않고 ‘요한’은 ‘도마’에 대한 예수의 반응을 말한 다음에 ‘도마’의 외침을 기록한 목적을 이렇게 말합니다.
9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아들 하나님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라].”—요한 20:26-31; 마태 16:16.
10. (ㄱ) ‘막달라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의 형제들에게 보내신 소식에 의하면 부활되신 예수는 누구에게로 올라가십니까? (ㄴ) 살아계시고 유일하신 참 하나님으로 여호와를 숭배함으로써 우리는 무슨 교리로부터 보호를 받습니까?
10 ‘도마’와의 이런 일이 있기 일주일 전에 부활되신 예수께서는 그의 시체가 묻혀 있었던 무덤 근처에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네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요한 20:17)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예수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되시는 만큼 예수에게도 하나님이 되십니다. 영감에 의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경우가 여러 번 있으나 “아들 하나님”이라고 한 경우는 전혀 없읍니다. (마태 14:33; 27:40, 43, 54; 마가 1:11; 5:7; 15:39; 누가 1:35; 요한 1:34, 49; 5:25; 10:36; 11:4, 27; 사도 9:20; 계시 2:18; 등) 그리하여 지존자이시며 전능하신 자인 여호와를, 살아계시고 유일하신 참 하나님으로 숭배함으로써(요한 17:3) 우리는 거짓 삼위일체 숭배와 기타 이교 숭배 형태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읍니다. 여호와는 우리가 의뢰해야 할 하나님이십니다.
11. ‘바울’, 예수, 시편 필자 및 잠언 필자는 각각 누구를 의뢰하였읍니까?
11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고린도 후 1:9, 10) 또한 히브리 2:13은 이사야 8:17, 18의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용하신 것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찌어다 나와 및 하나님[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을 의뢰하거나 죽을 다른 인간을 의뢰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찌니 ···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146:3-5) 현인 ‘솔로몬’도 같은 안전한 행동 법칙을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잠언 3:5.
12. ‘하나님 여호와를 의뢰’한다는 것은 그의 말씀과 관련해서, 그의 계명과 숭배와 관련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12 따라서 여호와라는 이름을 가지신 이 하나님을 우리가 의뢰한다는 것은 거짓 종교 세계 제국인 큰 ‘바벨론’과 타협하지 않고 그분에 대한 숭배에 나누일 수 없는 고착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계시 17:1부터 18:24) ‘하나님 여호와를 의뢰’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케 하신 성경을 온전히 믿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바와 같이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숭배가 인간의 전통이나 세상적 습관에 물들지 않도록 열렬히 보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13. (ㄱ) 시편 91편 첫 두 귀절에서 우리는 우리의 안전을 위하여 함께 작용하는 어떠한 네가지 요소들을 알게 됩니까? (ㄴ) 특히 언제 그러한 네가지 특성은 우리를 위하여 작용해 왔으며, 우리가 보호받아 온 위험성들의 실례를 우리는 어디에서 볼 수 있읍니까?
13 여기서 잠간 멈추어 생각해 봅시다. 시편 91편 첫 두 귀절에서만도 우리는 우리가 숭배하는 분의 네가지 중요한 칭호와 또한 이러한 칭호와 관련된 네가지 중요한 점들을 볼 수 있읍니다. (1) 지존자와 거할 곳인 “은밀한 곳”; (2) 전능하신 자와 유숙할 환경을 마련해 주는 그의 “그늘”; (3) 여호와와 그의 피난처 및 요새; 그리고 (4) 하나님과 그분을 의뢰할 만한 점. 이것은 참 숭배자들의 안전과 보존을 위하여 즉 그러한 혜택을 누리기 위하여 요구 조건에 달하는 참 숭배자들을 위하여 함께 작용하는 참으로 완전한 결합 요소입니다. 하나님의 특성의 이 무비한 결합이 이 사물의 제도의 “마지막 때”인 지난 수십년 동안에도 작용해 왔으므로 우리는 지금까지 놀라운 영적 안전을 경험해 온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 안전을 위하여 그것이 어떠한 역할을 해 왔는지 이제 이 시편 필자는 계속해서 설명함으로써 우리가 보호를 받아 온 위험성들에 대하여 더 잘 알고 더 잘 인식하도록 해 줍니다.
“새 사냥군”의 협박적인 “덫”
14, 15. (ㄱ) 시편 91:3에서 어떠한 언어의 사용을 보게 되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다윗’은 시편 124편에서 어떠한 비슷한 예를 보여 주며, 누구에게 적용되는 비유였읍니까?
14 이 시편 필자는 처음 두 절에 언급한 사실이 어떻게 참되고 실제적인가를 자세히 설명하기 위하여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군의 올무[덫, 신세]에서와 극한 염병[재난이 되는 전염병, 신세]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하고 말합니다.—시 91:3.
15 여기에 사용된 언어는 비유적이고 상징적입니다. 왜냐 하면 우리가 문자적인 “새 사냥군”의 덫에 걸릴 위험성에 있는 문자적 새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있는 새로 비유한 것이 이곳에서 계속된 것입니다. 시편 필자 ‘다윗’은 자기 자신과 자기의 동족을 실제로 덫에 걸렸었으나 구출받은 새로 비겼읍니다. 시편 124:1-8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 사람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날 때에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다면 그 때에 저희의 노가 우리를 대하여 맹렬하여 우리를 산 채로 삼켰을 것이며 ··· 우리를 저희 이에 주어 씹히지 않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찌로다. 우리 혼이 새가 사냥군의 올무[덫, 신세]에서 벗어남 같이 되었나니 올무[덫]가 끊어짐으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이 경우에 “사냥군”은 문자적 “새 사냥군”이 아니었으며, 끊어진 덫을 벗어난 “새”도 문자적 새가 아니라 “우리 혼” 곧 ‘이스라엘’ 민족의 영혼 혹은 생명을 의미하였읍니다.
16. 시편 124편은 현대 어떻게 성취되었으며, 또 다른 “덫”의 위험성이 있읍니까?
16 이 예언적 시편의 성취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영적 ‘이스라엘’의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들이 걸렸던 덫이 끊어지게 하셨읍니다. 이것은 큰 ‘바벨론’과 정치적, 사법적, 군사적 그의 종범자들이 놓은 덫이었읍니다. 전후인 1919년 봄에 여호와께서는 회개한 그의 남은 자들을 위하여 덫을 끊으셨으며 상징적 새잡는 “사냥군”이 덫에 걸린 “새”고기를 그들의 이로 씹을 수 없게 하셨읍니다. 그 후에 영적 ‘이스라엘’의 벗어난 남은 자들은 “지존자의 은밀한 곳”과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로 이끌려 들어갔읍니다. 그러나 “새 사냥군”은 그들을 잡기 위하여 계속 “덫”을 놓고 있으며,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그것에 걸리지 않도록 구하셔야 합니다.
17. 1904년과 1927년 「파수대」지가 지적한 바와 같이 상징적 “새 사냥군”은 누구입니까?
17 그러면 “새 사냥군”은 누구이며, 그의 “덫”은 무엇입니까? 이 상징적 “새 사냥군”은 ‘사단’ 마귀로 오랫 동안 이해되어 왔으며 의견이 일치해 왔읍니다. 오래 전 1904년 3월 1일호 「파수대」지(영문)는 “그의 날개 아래”라는 기사에서 시편 91:3을 설명하면서 “새 사냥군의 덫”에 관하여 이것은 “보호를 받지 않는 모든 사람이 걸리게 될 ‘사단’의 기만”이라고 하였읍니다. (74면 우난) 여러 해 후에 나온 「파수대」지는 같은 견해로 이와 같이 말하였읍니다. “예언자가 여기에서 ‘새 사냥군’이라고 한 자는 마귀이며, 그의 덫은 지존하신 하나님의 종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을 치게 하려고 그와 그의 조직이 사용하는 숨겨진 여러 가지 기만적 수단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확실하다.” (「파수대」(영문) 1927년 8월 1일호 231면 37항, 시편 91편(흠정역)에 관한 세계의 연속 기사 중 첫째 기사) 성서에 나와있는 상징적 “새 사냥군”들 중에서 ‘사단’ 마귀는 탁월한 자입니다.
18. ‘예레미야’와 ‘호세아’는 누구를 새 사냥군으로 비유하였으며, 그들이 사용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18 상징적 새 사냥군이 사용하는 방법을 예레미야 5:26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내 백성 너희 중에 악인이 있어서 새 사냥군의 매복함 같이 지키며 덫을 놓아 사람을 잡[느니라.]” 배교한 ‘에브라임’(‘이스라엘’의 열지파 왕국) 민족 중에서 거짓 예언자들이 새 사냥군과 같은 짓을 한 것에 관하여 호세아 9:8은 “선지자는 그 모든 행위에 새 잡는 자의 그물[덫, 신세] 같”았다고 말하였읍니다. ‘사단’ 마귀인 대 새 사냥군은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유숙하는 사람들을 잡으려고 합니다.
19. 대 새 사냥군의 상징적 “덫”은 무엇입니까?
19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계속 거하는 사람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하여 구출하셔야 할 상징적 “덫”은 무엇입니까? ‘사단’ 마귀가 여호와 하나님을 그들의 “피난처”요 “요새”로 의뢰하는 자들을 잡으려고 놓은 상징적 “덫”은 하나님의 조직을 대항하는 이 땅의 조직 곧 ‘사단’의 보이는 조직입니다. 하나님의 대적은 여호와의 숭배자들을 그것으로 잡아서 그들이 영적 파멸과 마침내 멸망을 당하게 하려고 합니다.
20. (ㄱ) 언제부터 현저하게 하나님께서 하나의 조직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과 만일 그 조직에 속하지 않는다면 무슨 조직에 속하게 된다는 것이 지적되었읍니까? (ㄴ) 예수의 직접적인 말씀에 의하면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어느 조직에 속하였었읍니까?
20 특히 1922년부터 현저하게, 영감에 의한 성경으로부터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상에 그의 조직된 “남은 자들”을 포함한 하나의 조직을 가지고 계시며, 또한 원수 조직 곧 보이지 않는 악귀 부분과 보이는 지상의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 ‘사단’의 조직이 있음이 지적되어 왔읍니다. 사람이 여호와의 보이는 조직에 속하여 있지 않다면 원수 조직에 속하게 됨도 지적되었읍니다. 시편 91편이 첫째로 적용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조직에 속하셨읍니다. 그의 충실한 제자들 역시 같은 이 하나님의 조직에 속하였읍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께서 그의 충실한 열한 사도들과 함께 기도하실 때 하나님께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고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요한 17:14, 16)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라고 그분은 말씀하셨읍니다.—요한 15:18-20.
21, 22. (ㄱ) 덫으로 유인하기 위하여 보통 무엇이 사용되며, 대 새 사냥군은 무엇을 사용하여 유인합니까? (ㄴ) 하나님께서는 이 기만적인 미끼에 대하여 ‘요한’으로 하여금 무엇이라고 기록하도록 영감을 주었읍니까?
21 사람이나 동물이나 덫에 걸리는 경우는 보통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됩니다. 보통, 덫을 놓는 사람은 덫을 놓아둔 근방에 미끼를 놓아서 안심하고 있는 동물을 유인해들여 미끼를 갉아먹는 동안 덫의 제동 장치가 튕겨지게 합니다. “새 사냥군”인 ‘사단’ 마귀는 미끼를 놓는 자입니다. 그가 사람들을 그의 보이는 세상 조직으로 이끌어 덫에 치인 동물처럼 되게 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미끼는 무엇입니까? 그 미끼는 이 세상의 이기적 매혹물 곧 부와 명성, 지위 및 권세를 얻을 이기적인 기회를 이 세상이 제공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기만적인 미끼를 경고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사도 ‘요한’에게 영감을 주어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유숙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편지하게 하셨읍니다.
22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한 1서 2:15-17.
23. (ㄱ) 우리는 왜 ‘바울’과 관련해서 언급된 ‘데마’와 같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까? (ㄴ) 계시록 18:4에 순종하는 것은 우리를 무슨 “덫”에서 빠져나와 무슨 장소로 들어가게 하였읍니까?
23 ‘요한’이 이런 말을 기록한지 천구백년이 지난 오늘날 ‘사단’ 마귀의 덫과 같은 조직이 영원히 사라질 때가 매우 가까왔읍니다. ‘사단’의 보이는 조직에서 나와서 “지존자의 은밀한 곳”으로 들어온 우리가 다시 멸망의 운명에 있는 그 조직으로 돌아가려는 유혹을 받을 이유가 어디 있읍니까? 한때 그리스도인이었던 ‘데마’와 같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쓴 편지에서 그에 관하여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말하였읍니다. (디모데 후 4:10) 그리스도교국을 포함한 종교적 큰 ‘바벨론’은 ‘사단’의 보이는 조직의 덫에 치어 있어서 그 조직과 함께 먼저 멸망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계시록 18:4에 있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우리는 큰 ‘바벨론’에서 그리고 그것이 치어 있는 ‘사단’의 덫에서 나왔읍니다. 그에게로 다시 돌아가지 않으므로써 우리는 “새 사냥군의 덫”으로부터 구출받은 이익을 계속 즐길 수 있읍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서 영적 안전을 누리고 있읍니다.
“재난이 되는 전염병”
24, 25. (ㄱ) 이 시편 필자는 같은 절에서 무엇을 새 사냥군의 덫과 함께 언급하였읍니까? (ㄴ) 이것은 무엇을 상징하며, 왜 그것이 적절합니까?
24 이 시편 필자는 같은 절에서 “새 사냥군의 덫”과 함께 또 다른 영적 안전에 위협이 되는 것 곧 매우 전염성과 유행성이 있는 치명적 질병을 언급합니다. 그의 말은 이러합니다.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군의 올무(덫, 신세)에서와 극한 염병[재난이 되는 전염병, 신세]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시 91:3.
25 새 사냥군의 “덫”의 경우와 같이 이 재난이 되는 “전염병”도 상징적인 것입니다. 영감받은 이 시편 필자는 이 두가지를 함께 연결시킨 것으로 보아 오늘날의 상징적 전염병은 새 사냥군의 덫 곧 ‘사단’의 보이는 지적 조직과 관련이 있는 어떤 것임이 분명합니다. 이 상징적 “전염병”은 사실상 그 사욕적이고 세상적인 조직 안에서 자라고 배양된 것입니다. 지구상에 선풍과 같이 맹위를 떨치고 있는 이 유행성 “전염병”은 국가주의입니다.
26. 언제부터 국가주의가 국민 위에 엄습해 있으며, 역사가 ‘토인비’는 최근에 국가주의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였읍니까?
26 세속 역사가들은 기원 1914-1918년에 있었던 제 1차 세계 대전 이래 국가주의 정신이 세계 국민 위에 엄습해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게 되었읍니다. 이것은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왜냐 하면 그 전쟁은 동맹국들이 “민족자결”을 위하여 싸웠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최근 1972년 11월 21일에 이렇게 말한 일이 있읍니다.
“제 2차 세계 대전 종전 이래 국가주의는 지방 주권 독립국의 수를 배로 증가시켰고 그들의 평균 영토의 크기를 반으로 축소시켰다. ··· 인류의 전략상 위생학상 문제들은 세계적이며, 그들은 심각해지고 있다. 그들은 지방 국가 정부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다. 그들은 우선권이 부여된 세계 권위의 설립을 요구한다. 인류가 생존하려면 정치적 연합이 요구되는데 인류의 현 추세는 더욱 분열되는 것이다. 우리는 미쳤는가?”
27. 국가주의는 어떻게 “재난이 되는 전염병”과 같이 되었읍니까?
27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통치자”라고 부르신 ‘사단’ 마귀가 이 국가주의의 물결에 대한 책임을 가진 자입니다. 그는 이것으로써 여호와께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고 말한 사람들을 없애려고 했읍니다. (시 91:2) 이 국가주의인 정치적 “전염병”은 많은 그리고 큰 “재난”의 원인이 되어 왔읍니다. 1920년에 국제 연맹이 창설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의 ‘뭇솔리니’나 ‘러시아’의 ‘스탈린’, 독일의 ‘히틀러’ 그리고 일본의 제국주의적 정당 등 격렬한 국가주의적 독재자들이 일어났읍니다. 그렇게 해서 그것은 제 2차 세계 대전으로 돌입케 하는 힘이 되었읍니다. 그것은 광신적 애국주의와 국가적 상징물에 종교적 의식을 가하는 일 및 군비를 부채질하였읍니다. 이 군비에는 무거운 세금과 국제간의 경쟁, 여호와의 우주 주권과 메시야 왕국에 대한 복종보다도 국가적 주권을 주장하는 일이 수반되었읍니다.
28. 이 “전염병”은 특히 누구에게 어려움이 되었으며, 그러나 어떠한 쟁점에 있어서 이들은 타협하지 않았읍니까?
28 이 모든 것이 전체 인류에게 가져온 재난들은 그만두고라도, 그것은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에게 특별한 어려움을 가져다 주었읍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자는 그들이 국가주의적 “전염병”에 감염되어 그리스도인 영성에 치명적 영향을 미쳐 희생되도록 버려두시지 않았읍니다. 그들은 유혹이나 압력으로 말미암아 666이라는 수를 가진 정치적 “짐승”이나 그 정치적 “형상”인 국제 연맹의 후신 국제 연합을 숭배하는 일이 없었읍니다. (계시 13장; 15:2-4; 20:4) 그들은 하나님께 전적 헌신을 하고 그의 우주 주권을 옹호하는 일에 있어서 타협하지 않았읍니다.
29. 제 2차 세계 대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1939년에 무엇을 옹호하고 나섰으며, 그들의 영성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읍니까?
29 제 2차 세계 대전의 와중에도 불구하고 1939년에 그들은 일치 연합해서 세계적으로 이 세상 정치와 군사적 분쟁에 대하여 그리스도인 엄정 중립을 지킬 것을 옹호하고 나왔읍니다. (1939년 11월 1일호 「파수대」지(영문)의 “중립” 기사 참조) 그들은 고통을 당하였고 그들 중 얼마는 그들의 충실성 때문에 죽음을 당하기까지 했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그리고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영적으로 안전하게 보존해 오셨읍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