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리 혹은 의무—어느 쪽인가?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그것이 너로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잠언 3:1, 2.
1-3. (ㄱ) 오늘날 권리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태도는 어떠합니까? (ㄴ) 사도 ‘바울’은 디모데 후서 3:1-5에서 누구에 관하여 이야기하였으며, 에베소 2:2에서 말한 영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까?
오늘날 이 세상 사람들의 생각을 차지하고 있는 큰 쟁점은 그들의 권리의 확립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떠하든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자기의 권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 특히 소위 “그리스도교”의 나라라고 하는 부분에서 사람들이 ‘과장하고 자만하고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이 없고 경건하지 않고 무정하고 배신하고 교만’할 것이라는 성서에 예언된 상태가 일어나고 있읍니다.—디모데 후 3:1-4, 새번역.
2 이것이 이 세상의 영(혹은 정신)입니다. 이것이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입니다. (에베소 2:2) 우리는 이러한 영이 우리를 둘러 싸고 있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압력을 가하고 있음을 알고 있읍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위와 같은 나쁜 상태를 묘사한 것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세상에 관하여 말한 것이라고 생각하여서는 안됩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 불순종하는 자들이 “경건의 모양은 가지고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할 것”이라고 하였읍니다. (디모데 후 3:5, 새번역) 성서는 이러한 상태가 그리스도교국내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였으며,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이 증명되었읍니다. 이러한 나쁜 영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마침내 죽을 것입니다.—계시 21:8.
3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나쁜 본을 따른다면 그는 하나님의 은총 아래 있지 않습니다. 그가 어느 교회에 속한 사람이든지 아니든지, 또는 심지어 그가 그리스도교국의 종교 제도를 탈퇴하고 여호와의 증인이 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러합니다. 독립적이고 과장적이고 교만한 영을 가진 사람이라면 심지어 그러한 영에 조금이라도 감염된 사람이라면 그들은 매우 위험합니다.
4, 5. 이러한 영은 젊은이들이나 어른들이 어떻게 하게 만들었읍니까?
4 우리는 이 영의 반영을 ‘뉴스’에서 읽을 수 있읍니다. 특히 오늘날 젊은이들에 관한 ‘뉴스’에서 그러합니다. 학교나 대학가에 일어나는 소동이 그 한 예입니다. 학생들은 학교 안으로 심지어 소총과 기타 흉기를 끌어들이기까지 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교육을 받고 있는 학교의 기물을 파괴합니다. 우리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젊은이들이 소동을 일으키는 경우를 보고 듣습니다. 그들은 시가로 몰려가서 상점들을 부수고, 무죄한 시민들의 차를 엎어버립니다. 이러한 모든 일이 아무런 이유없이 자행되고 있읍니다.
5 이러한 파괴적 행동이 모든 법률과 규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독립하려는 태도에서 나옵니다. 그들은 그러한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자기들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한 자들은 아무에게도 자기들이 책임이 없음을 나타내기를 원합니다. 심지어 성숙한 어른들 사이에서도 반항적 독립의 영이 뿌리박혀 있음을 볼 수 있읍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입을 보장받을 권리는 주장하면서도 일은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생활의 편리한 기구들은 갖기를 원하면서도 아무 것도 생산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대중에게 봉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원래 그들이 꼭 해야 할 일 이상을 한 봉사에 대하여 사례하는 또는 “팁”을 주는 일이 있었읍니다. 그러나 이제 봉사의 질은 어떠하든지 ‘팁’은 꼭 주어야 하는 것이 되었읍니다.
6-8. 권리가 아니라 의무에 주의를 기우린다면 가정 생활이나 기타 활동이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를 설명하십시오.
6 그러므로 권리에 대하여만 열중한 나머지 의무는 생각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권리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과 똑같이 의무에 대하여도 생각한다면 얼마나 달라질 것인가를 잠간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날의 생태는 정반대일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도 자기의 권리에 대하여는 조금도 염려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사람이나 다른 사람 모두가 각각 자기의 의무를 이행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7 사실상 권리에 대한 투쟁은 분열을 일으킵니다. 의무에 대한 주의력은 행복과 평화에 기여합니다. 자녀는 부모에 대하여, 부모는 자녀에 대하여 각자의 의무를 생각하는 한 가족이 얼마나 잘 연합한 가정인가를 상상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한 가정 내에는 의심과 싸움이 아니라 의뢰와 고려가 있을 뿐입니다.
8 사업계에서, 만일 피고용인들은 그들의 고용주에게 자기들에게 하루의 일을 시킬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용주는 자기에게 합당한 임금을 지불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피고용인들의 복지를 고려한다면 그들은 서로 좋은 결과를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객들은 그만한 봉사를 받고 있기 때문에 즐거워 할 것입니다. 사업은 더 잘되고 직업은 더 안정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이기심 때문에, 다른 사람은 조금도 생각지 않고 자기의 이익에만 몰두하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이기심은 너무나 보편적이고 너무나 깊이 뿌리 박혀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은 개혁될 수 없읍니다.
그리스도인의 견해
9. 권리를 위하여 투쟁하는 문제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입장은 어떠합니까?
9 그러면 권리와 의무라는 문제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입장은 어떠합니까? 그들에게는 생활에서 성서의 원칙을 적용하므로써 하나님을 숭배하고 그의 명령을 이행해야 할 의무와 더불어 하나님께서 주신 권리가 있읍니다. (마태 4:10) 그들은 이 권리를 굳게 지켜야 합니다. (마태 22:21) 그것은 인간적 곧 사람이 만든 권리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권리로서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이행해야 할 의무를 가진 권리입니다. (마태 28:18, 19) 그들이 끊임없이 이 권리를 행사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후원하십니다. 그러나 성서는 개인의 권리를 강조하지 않습니다. 성서는 의무에 관하여 많은 것을 알려 줍니다.—전도 12:13; 누가 17:10.
10-12. (ㄱ) 권리와 의무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입장은 어떠합니까? (ㄴ) “현대적”인 행동이란 것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어떠해야 합니까?
10 이 세상 행로를 따르다가 돌아섰고, 그리스도의 대속 희생을 믿게 된 참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은 어떠합니까? 성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린도 전 6:19, 20)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권리를 말할 근거가 거의 없읍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아들의 피로 그들을 사서 소유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의무가 있읍니다. 그 의무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화를 추구함으로써, 만족감을 가짐으로써, 심지어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권리를 유린한다 할찌라도 참음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읍니다. 우리가 우리 개인의 권리라고 생각되는 것을 주장하는 일이 없이, 그러한 “권리”를 주장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불행이나 혼란을 일으키게 하는 일이 없이, 우리의 의무를 이행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잠언 11:2.
11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행실이 이 세상에서 보편적이라고 해서 그들이 그리스도인 회중과 그 장성한 사고 방식 앞에서도 그러한 행동을 고집하는 것이 그들의 권리라고 생각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어느 그리스도인이 회중에 속해 있으면서 이 세상 영이나 극단적인 옷차림, 극단적인 음악 및 소위 현대적인 행실등, 이 세상을 대표하는 것들을 그의 생활에 끌어 들이려고 할 이유가 어디 있읍니까? 사실상 그가 이러한 것들을 하나님의 회중으로 끌어 들이려고 할 이유가 어디 있읍니까?
12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그것이 현대적이다. 우리는 현대적이 되기를 원하며, 세상을 따르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것을 생각하십시오.—이 세상의 영은 급속도로 악화해 가고 부패해 가고 있으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욱 심해 갈 것이 분명합니다. 과거에도 세대마다 그 세대가 “현대”적이고 다른 세대보다 앞섰다고 생각하였읍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대들과 그들의 방식은 어떻게 되었읍니까? 성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스스로 깨끗한 자로 여기면서 오히려 그 더러운 것을 씻지 아니하는 무리[세대, 신세]가 있느니라.”—잠언 30:12.
13. 독립적인 정신을 갖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지금 어떻게 해야 하며, 왜 그렇습니까?
13 우리는 회중을 소란케 하거나 독립적인 정신을 갖게 되어 지금 회중과 온전히 협조하는 일을 조금이라도 중단할 것입니까? 오히려 “큰 환난”의 먹구름이 점점 더 어두워지고, 이 세상 “기후”가 더 냉냉해지는 것을 봄에 따라 우리는 더욱 더 그리스도인 조직과 가까와져야 하고 더욱 더 따뜻한 사랑으로 단합해야 합니다. (잠언 18:1) 우리는 우리의 태도와 하나님과의 우리의 신분에 대하여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은 말로써 그렇게 해야 할 필요성을 매우 강력하게 표현하였읍니다.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베드로 전 4:18.
14. 이 세상이 따르는 어떤 ‘스타일’이나 모양 때문에 흥분하는 것이 왜 헛된 일입니까?
14 더욱이, 우리가 지금은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것이 하나님의 새 질서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일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권리라고 싸우고 있을지도 모를 어떤 것(어떤 ‘스타일’이나, 어떤 행실, 어떤 음악)이 앞으로 1년이면 완전히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될지 모릅니다. 그때에는 우리는 그것을 원치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것을 지금 회중으로 끌어 들이려고 할 이유가 어디 있읍니까? ‘스타일’이나 이 세상의 본은 급속도로 지나가고 잊혀져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회중은 영원히 있읍니다. 성서는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간다’고 말합니다. (고린도 전 7:31) 그것은 현재도 악화 일로에 있으며, 이제 완전히 대치될 것입니다. (요한 1서 2:17) ‘스타일’은 완전히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현대 ‘스타일’이란 어디 있겠읍니까? 덥수룩한 머리 ‘스타일’이나, 단정치 않게 옷을 입는 유행이 어디 있겠읍니까? 우리가 지금은 권리라고 주장할지도 모르는 그러한 것들이 어디 있겠읍니까?
우리의 동기를 검토해 봄
15. 회중의 책임있는 사람들이 베푸는 충고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왜 우리에게 유익합니까?
15 여호와께서는 믿음으로 자기에게 가까이 오는 모든 자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분은 마음으로부터의 봉사와 순종을 원하십니다. (로마 6:17) 따라서 그리스도인 회중의 목적은 여호와의 뜻이 무엇인가를 명백히 하고 회중 성원 모두가 이유를 이해하도록 돕는 것—모두가 여호와를 더 온전히 알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직면하는 문제들에 대하여 회중의 책임있는 사람들이 베푸는 충고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유익합니다.—출애굽 18:15, 16 비교.
16-18. 옳게 보일지 모르는 어떤 일과 관련해서 어떻게 우리의 태도와 동기를 검토해 볼 수 있읍니까?
16 만일 당신이 권리가 관련된 어떤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면 당신의 생각과 동기가 바로 무엇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생각과 어떻게 일치할 수 있는지를 검토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기 위하여 어느 남자 혹은 소년이 손질도 하지 않은 장발을 하고 다니는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아마 당신은 그러한 ‘스타일’을 좋아하고 그러한 머리를 하고 다닐찌 모릅니다. 그런데 어떤 형제가 당신에게 머리를 짧게 깎고 단정하게 손질을 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고 합시다.
17 당신은 이렇게 자문해 볼 수 있읍니다. ‘내가 그러한 머리 ‘스타일’을 하는 이유는 나의 외관을 더 낫게 보인다고 생각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내가 사귀고 있는 사람들 때문인가? 이들은 회중에서 사귀는 사람들인가? 아니면 바깥 세상에서 사귀는 사람들인가? 만일 회중에 있는 어떤 사람들이 그러한 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다면, 그들은 장성한 자들 곧 장로들이나 봉사에 종들이며, 봉사에 열성스러운 사람들인가?’ 이렇게 생각할 때에 다음과 같은 사도 ‘바울’의 교훈을 염두에 두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히브리 13:7.
18 그리고 또 이렇게 자문해 보십시오. ‘나의 ‘스타일’은 일반 사람들의 눈에 나를 누구와 같이 보이게 하는가? 내가 찾아간 사람이 나를 여호와의 증인 전도인으로 볼 것인가?’ 당신이 장발을 하고 있지 않다면 외부 사람들 사이에서 거북하게 느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당신은 그들이 어떻게 말할 것인가를 두려워합니까? 당신은 그들이 여호와의 증인인 당신도 그들과 같이 옷차림을 할 것을 기대한다고 생각합니까? 혹은 당신이 전도인으로서 그들처럼 옷차림을 한다면 당신을 더 존경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19, 20. 만일 회중의 형제들이 우리가 따르는 어떤 ‘스타일’이나 행동을 바꾸라고 권한다면 어떤 본을 따르는 것이 현명합니까?
19 만일 회중의 책임있는 형제들이 당신의 ‘스타일’을 바꾸라고 권한다든가, 만일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스타일’을 전도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기꺼이 바꾸겠읍니까? 아마 당신은 그들이 잘못 생각한다고 느끼거나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생각하고 회중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문제시한다고 해서 고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워 놓으신 본은 받아드리겠읍니까?
20 예수에 관하여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로마 15:3)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셨읍니다. 그분이 다른 행로를 걸으셨다면 더욱 편리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하셨다면 그분이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되셨겠읍니까?—마태 26:53, 54; 고린도 후 5:14, 15.
21. 사도 ‘바울’은 회중 성원이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행동을 고집하는 것이 비그리스도인적임을 어떻게 말하였읍니까?
21 만일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회중의 어떤 사람이 당신이 고기 먹는 것 때문에 넘어졌으므로 고기를 먹지 말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읍니까? 무엇이라고요? 아니 그런 기본적인 권리까지도 포기하란 말인가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본을 따랐으며, 이렇게 편지하였읍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그다음 ‘바울’은 고기를 먹는 것으로 양심에 가책을 받지 않으나 회중의 복지를 위하여 피하려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로마 14:19-22; 고린도 전 8:12, 13 비교.
22. 우리 형제들이 왕국의 좋은 소식에 거짓 반향을 던진다고 느끼는 행동이나 ‘스타일’을 고쳐야 할 다른 이유들을 설명하십시오.
22 그러므로 당신이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온전히 동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할지라도, 양보하고 당신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음을 알고 마음 속으로 만족감을 갖는 것이 낫습니다. 아무튼 당신이 좋아하는 어떤 ‘스타일’을 하고 다닌다면 그것을 제일 많이 보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당신이 참으로 어떻게 보이는지를 알고 당신의 외관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당신은 자신을 잘 볼 수 없읍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당신을 사방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입니다. 만일 당신의 형제들이 당신의 외관이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준다고 느끼거나 당신이 전하는 소식에 대하여 잘못된 혹은 나쁜 반향을 일으킨다고 느낀다면 고치고 행복해지지 않을 이유가 무엇입니까?
‘스타일’이 아니라 세상적 행실로부터 분리하는 것
23. ‘이스라엘’에서 수염을 기르는 것보다 말끔이 면도하는 것을 더 좋아하였을 사람의 입장은 어떠하였읍니까?
23 우리는 ‘스타일’ 문제나 옷차림 문제를 또 다른 각도로 볼 수 있읍니다. 당신이 한 남자로서 ‘이스라엘’ 시대에 율법 아래 살고 있는데 수염을 싫어한다고 합시다. 당신은 말끔이 면도를 해서 애굽 사람들 같이 보이는 것을 좋아한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겠읍니까? 당신은 면도할 개인 권리를 행사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에게 그러한 권리가 없을 것입니다. 당신은 수염을 길러야 합니다. 율법은 모든 남자들에게 “머리 가를 둥글게 깍지 말며 수염 끝을 손상치 말”라고 명령하였기 때문입니다.—레위 19:27; 21:5.
24.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수염을 기르도록 요구한 율법의 이유는 무엇이었읍니까?
24 이 율법은 ‘스타일’ 때문에 주어진 것이었읍니까? 그렇지 않았읍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그들 주위에 있는 어떤 이방 나라들의 행위를 모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읍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염을 손질하여 단정하게 하고 잘 가다듬었읍니다. 수염을 손질하지 않았거나 깎은 것은 어떤 재난 때문에 탄식하거나 슬퍼하는 것의 표징이었읍니다. (사무엘 하 19:24-28; 이사야 7:20) 머리털 역시 ‘나실’인의 서약을 한 사람이 아닌 이상 주기적으로 깎았읍니다. ‘에스겔’의 예언에서 제사장들은 그들의 머리털을 깎고 길게 자라게 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읍니다.—에스겔 44:15, 20.
25, 26. 적절한 옷 ‘스타일’에 관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의 견해를 우리에게 어떻게 알려 줍니까?
25 또한 하나님께서는 옷차림이 사람을 잘못 판단하게 할 수 있음을 인정하시고 다음과 같이 명령하셨읍니다.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니라.” (신명 22:5)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부도덕으로 유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26 여자용 바지와 남자용 바지와 같이 어떤 옷의 ‘스타일’이 비슷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스타일’이나 옷감에 있어서 보통 확실히 구별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사실상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옷을 입는다면 그것은 여호와 보시기에 나쁜 것입니다. 너무 꼭 끼는 혹은 작은 옷으로서 부도덕으로 유인하거나 부정한 행실을 하는 자들과 동류로 보이게 하는 옷을 입는 것 역시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만일 어떤 머리 ‘스타일’이나 옷차림이나 어떤 행실을 꼭 하고 싶다면 ‘내가 세상 사람들을 모방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자문해 볼 것입니다.
“자연 그 자체”가 우리를 가르친다
27, 28. (ㄱ) 사도 ‘바울’은 ‘스타일’에 있어서 어떤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정당한 것인지 우리에게 어떻게 좋은 지침을 주고 있읍니까? (ㄴ) 일부 성서 학자들은 “자연”이라는 단어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27 성서에는 예를 들면 머리의 길이는 어느 정도래야 하고 치마의 길이는 어느 정도래야 한다는 식의 특정한 규정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감받은 사도는 진실하고 헌신한 그리스도인과 회중이 어떠한 ‘스타일’ 혹은 풍습이 적절하며, 올바른가를 알 수 있는 좋은 지침을 제공해 줍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자연 그 자체가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지 않습니까? 남자가 머리를 길게 느리면 그것이 그의 부끄러움이 되지만 여자가 머리를 길게 하면 그것은 그에게 영광이 됩니다. 긴 머리는 그의 머리를 덮기 위하여 여자에게 주신 것입니다.”—고린도 전 11:14, 15, 새번역.
28 이 사도의 말에 관하여 성서 학자 ‘알버트 바아네스’는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자연이란 단어는 ··· 분명히 모든 남자들이 가지고 있는 예의감을 의미하며, 어떤 현저한 혹은 일반적인 관습을 표현한 말이다. ··· 그것은 남자들 사이에 타당함에 대한 자연적 감정으로 나타나는 그러한 것이다 ··· 그러므로 이곳에서의 이 말은 성의 본질이나 ··· 단순한 사용 및 풍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 그 단어는 올바르고 정당한 것에 대한 깊은 내적 양식을 말한다.”
그리고 희랍어 학자 ‘에이. 티. 로버트슨’ 박사는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여기에서 그 말은 단순한 풍습 외에도 본래의 예의감(로마 2:14 참조)을 의미하며, 그러나 그것은 사물의 본질에 있어서 객관적 차이에 놓여 있다.”
29. (ㄱ) 그리스도인에게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해서는 안된다는 법칙이 필요치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어느 경우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29 그러므로 그것은 법칙처럼 꼭 어떻게 해야 하고 어떻게 하면 안된다고 말할 문제가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이고 우리의 마음이 옳은 것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자연이, 특히 우리의 훈련받은 양심으로써 그것이 우리가 전파하는 좋은 소식의 영광에 이바지할 것인지 혹은 손상을 입힐 것인지를 압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보기에 회중의 명성 혹은 영상을 우리가 세우고 있는지 무너뜨리고 있는지를 압니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모른다면 그는 그리스도인 회중의 선한 양심의 인도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는 좋은 충고를 받아드리고 책임있는 형제들의 좋은 판단력에 의뢰해야 할 것입니다.—잠언 12:15.
30. (ㄱ) 회중 안에서 책임있는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어떠한 임무 아래 있읍니까? (ㄴ)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해 줄 지침이 되는 원칙은 무엇입니까? (ㄷ) 우리는 왜 권리보다도 의무에 관심을 더 기울여야 합니까?
30 참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사랑하며, 책임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본을 세우는 면에 있어서나 충고를 하는 면에 있어서나 다만 형제들에게 최선의 유익이 되는 일만 해야 할 임무 아래 있읍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행동은 항상 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 주 하나님의 가르침을 빛내고 있는가?’라는 원칙에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사람에게가 아니라 여호와께 하듯 온 영혼을 다하여 일함으로써 우리의 의무를 이행한다면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상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은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확립할 수 있는 어떠한 “권리”보다도 훨씬 더 큰 축복일 것이며, 긴 생명과 평화와 더불어 받게 될 것입니다.—디도 2:10; 골로새 3:23, 24; 잠언 3:1, 2.